더 이상 갈 데가 없어서 나는 기형도라는 정거장에 간다

고립의 끝에는 기형도라는 정거장이 있다

정거장은 늘 배경이 된다

정거장은 내 몸이 된다

사람들은 나를 지나쳐갈 뿐 누구도 머무르지 않는

쓸쓸하고 황망한 정거장에서

나는 기형도를 노래한다

여기에서 나는 고립을 먹고

희망을 노래하련다

모두가 빠져나간 기형도라는 정거장에는

추억이 덜 깬 개와

어떤 구름과

불안의 짐짝들이 있다

그들과 함께 기형도를 노래하며

어디에도 갈 데가 없는 이들에게 고한다

닳고 허물어져 가는 내 육체에서 머물다 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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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뉴올리언스를 완전히 덮친 5등급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인해 메모리얼 병원에 있던 환자와 가족들 그리고 의사, 간호사 1200명이 고립이 된다. 그들은 모두 긴장을 하고 태풍에 대비를 한다. 메모리얼 병원은 병원에 있는 사람들 이외에 마을 주민들도 병원에서 대피할 수 있도록 했다. 늘 그렇게 해 온 것이다. 마을은 흑인들이 많이 살고 있으며 태풍이나 자연재해에 연약한 집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1화에서는 카트리나가 상륙하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드라마) 속에서는 실제 카트리나가 휩쓸고 간 장면을 교차 편집해서 몰입감을 최고조로 이끈다. 메모리얼 병원의 의사, 간호사 그리고 직원들은 분주하게 움직이며 늘 그런 것처럼 농담도 하며 태풍에 대비를 한다. 밤이 도래하고 깊어질수록 카트리나의 강도는 점점 거세진다. 모두가 아무렇지 않은데 주인공 애나만 두려움에 몸이 떨려 온다.


애나는 메모리얼 병원에 상주하는 의사가 아니라 파견된 의사여서 처음 겪는 병원에서의 태풍 대비는 겁나기만 했다. 카트리나는 뜨거워지는 바다의 영향으로 엄청난 허리케인으로 발전을 하는 것 같았는데 생각하는 것만큼의 큰 피해는 주지 않고 지나가게 된다. 그럼에도 병원의 창문이 깨지고 사람들은 두 병동이 있는 메모리얼 병원에서 한 병동으로 옮겨야 하는 과정이 있었고 그 통로는 태풍으로 인해 곧 무너질 것만 같았다. 모든 사람들을 그 통로를 통해 저 병동으로 옮겨야 하는데 그 중심에 애나가 사람들을 도운다.


그렇게 다음 날이 되었고  해가 뜨고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문제는 이틀째부터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한다. 영화는 카트리나가 덮치고 간 후 15일이 지나 메모리얼 병원에서는 시신 45구가 발견이 된다. 그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해 정부 조사단은 의료진을 조사하게 된다.


카트리나가 지나가고 난 후 다음날부터 문제가 발생하는데 불어난 둑의 물이 점점 뉴올리언스 마을을 덮치게 된다. 대지가 해수면보다 낮아서 모든 집들이 점점 물에 잠기게 되고 흑인들은 대피할 곳이 없어서 점점 병원으로 몰리게 된다.


카트리나가 상륙하기 전 시설담당자가 예전부터 태풍이 와서 병원이 침수가 되었을 때 전력이 차단이 되는 것을 경고했다. 전력은 1층에 있기 때문에 태풍 때문에 둑이 무너지면 1층은 자연스럽게 물에 잠기게 되고 발전기가 있는 1층이 침수가 되면 병원 전체가 마비가 될 수 있음을 계속 경고를 해왔지만 병원의 임원진들은 늘 무시했을 뿐 아니라 병원에는 모든 매뉴얼(전쟁 시, 강도가 들었을 시, 무너졌을 시 등)이 있었지만 침수에 대한 매뉴얼이 없었다.


태풍이 몰려와서 병원에 고립이 되었을 때 침수가 되고 나서 갇혀 있는 사람들의 대처에 대한 병원과 정부의 데이터 교류가 전혀 갖춰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틀째부터 침수로 인해 병원과 도시 전체가 점점 물에 잠겨 외부와 통신이 단절되고 도시의 전력이 차단된다. 도시의 전력으로 발전기가 돌아가는 병원 역시 전기 공급이 중단된다. 산소호흡기, 의료장비를 사용하지 못해 환자들이 곳곳에서 죽음과 마주하게 되고 병원으로 대피해온 사람들로 인한 식량부족, 엄청난 더위로 인한 환자들의 고통, 무엇보다 사람들이 언제 탈출할지 모르는 극심한 두려움 때문에 고립된 병원이라는 곳은 사람들을 살리는 곳이 아니라 죽음을 내 모는 지옥이 되어 간다.


옥상에 헬기장이 있지만 18년 동안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탓에 위험하기만 하고, 구조대가 오지만 환자들을 색깔이 있는 띠로 분류한다. 움직일 수 있는 환자, 못 움직이는 환자, 그리고 살 가망이 없는 환자. 처음에는 병원의 의료진들은 구조대가 오면 위독한 환자들부터 먼저 내보냈는데 구조대는 말이 달랐다. 그렇게 하면 시간이 너무 더디다, 움직일 수 있는 환자 먼저 살리는 게 낫다. 그래야 시간이 절약된다.라고 한다. 도대체 누가 생명의 순서를 정할 수 있을까. 병원은 아비규환이 되어간다.


찜통 같은 병원의 복도와 병실은 마구 갈긴 대소변 때문에 악취와 세균으로 인해 사람들은 공황상태가 되고 더 이상 사람들을 받을 수 없는 병원 측에서는 병원으로 오는 흑인 가족들에게 총을 겨누게 된다. 도시의 사람들은 병원에 헬기가 오는 모습을 목격하고 메모리얼 병원에 가면 탈출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몰려오지만 사실 헬기로는 환자 한 사람 정도만 이송할 수 있었다. 그것도 신생아 정도.


병원 밖 도시에는 가게를 털고 탈취가 난무하고 밤에 움직이는 사람들은 총으로 쏴 버리기까지 한다. 이 지옥 같은 상황에서 부시 대통령과 정부는 어떠한 도움의 손길도 제대로 뻗지 않는다.


점점 생지옥으로 변해가는 병원. 이 드라마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었다. 드라마에서처럼 2005년 여름 미국 남부를 강타한 허리케인 카트리나 때문에 엄청난 피해가 있었다. 실종과 죽은 사람의 수가 2,500명에 이르렀다. 드라마를 보면 잘 나오지만 남부에는 흑인이 많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자동차도 없어서 허리케인이 온다는 소식에도 제대로 피난도 가지 못했다.


미 정부는 허리케인이 빈민층을 휩쓸고 갈 것이라는 것을 알고 빈민가의 피해를 줄이는 비용과 허리케인이 지나가고 난 후 시신을 치우는 비용을 계산을 했다. 그리고 자본이 덜 드는 쪽을 택한다. 그것이 후자였다. 당시 미 정부는 카트리나가 휩쓸고 간 후 수많은 시신들을 지역 경찰이나 단체, 민간에게 손도 대지 못하게 했다.


여름이라 시체는 곳곳에서 썩어가고 엉망이었다. 그럼에도 미 정부는 시민단체나 지역 공무원들은 건드리지 못하게 한 후 하나의 업체를 지정해서 시체 인양의 권한을 준다. 그 업체는 시체 한 구당 얼마, 식으로 시체 독점 체재로 인양을 했다. 지옥이었다.


이를 두고 선진국이라 불리는 미국의 민낯 ‘재난 자본주의’라 부른다. 후에 그 사실이 국회에서 미국 전 국민에게 까발려졌고 미국 사회는 발칵 뒤집어졌다.


요즘은 2시간짜리 영화보다 이렇게 방대한 스케일의 드라마가 훨씬 내용면이나 디테일에서 눈을 뗄 수 없다. 허리케인이 몰아닥친 도시를 이렇게 표현을 하다니, 하며 놀랄 수밖에 없다. 베이츠 모텔에서 미친듯한 연기를 보여줬던 베라 파미가가 ‘재난, 그 이후’에서는 의사로 분해 고군분투한다.


4화 말미에서 지칠 대로 지친 애나가 동료 간호사에게 말한다. 아비규환의 주위를 둘러보며 "이건 제3세계에서나 일어나는 일이에요, 여기가 아니라. 어떻게 일이 이렇게 되도록 내버려 두는 거죠?"


인간에게 있어서 최선의 희망인 동시에 최고의 절망은 바로 인간이었다.


그래픽에 몰두한 영화보다 원작을 중심으로 실화를 배경으로 스토리가 이어져 매우 아프고 묵직한 몰입감을 보여준다. 살아있는 듯한 플롯과 함께 흑인들의 배제에서 나타나는 사회적인 이면성을 보여준다. 시작은 태풍이라는 자연의 재해가 일으켰지만 비극은 인간의 재난으로 인한 인재로 이어지는 대단했던 미드 ‘재난, 그 이후’였다.


https://youtu.be/eZhde_BLva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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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신문기자’는 여론을 조작하고 가짜 뉴스를 만들어 내는 정부의 내각 정보실에 대해서 진실을 알리려는, 인지도가 떨어지는 신문사 토우토 신문의 요시오카(심은경) 기자와 내각 정보실의 관료인 스기하라(마츠자카 토리)의 이야기를 어두운 분위기고 죽 끌어가는 이야기다.


이 영화를 보면 한때 우리나라 가짜 뉴스를 생산하던 곳, 정장을 입고 출근을 하여 하루 종일 가짜 뉴스를 트위터와 페이스 북에 올리는 사람들이 있는 곳도 나온다.


지금은 끝나버린 김학의 사건과 비슷한 사건(2017년 성폭력 기자회견을 한 이토 시오리 사건)도 다루고 있다. 무엇보다 일본의 아베(가 생존해 있을 때) 정부가 꾸미는 전쟁국가로의 발돋움 계획(대학교를 군부 생화학 개발을 하는 군사시설로)을 요시오카와 스기하라가 계란이 되어 바위를 깨트리려고 한다.


요시오카의 아버지도 기자 출신으로 비리를 까발리다 언론의 거짓 뉴스에 자살을 했다. 이 영화에는 많은 사실적인 대사가 나온다.


진실을 판단하는 건 우리들(정부 관료)이 아니라 국민이다. 그러니 가짜 뉴스를 계속 퍼트려라고 한다. 영화 속에서는 일본의 공무원은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을 위해 존재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가짜 뉴스를 퍼트리고 기업 언론권력이 작동을 하여 악플에 시달리게 하고 결국 자살을 하게 만든다.


중앙대 독어독문학과 김누리 교수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현재 한국 사회가 헬조선이 된 이유를 알 수 있다. 왜 청춘들이 자살을 하고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을까. 지금 한국 사회는 시대착오적인 지옥이다. 가장 큰 이유는 잘못된 정치에 있다. 지금 우리는 정말 이상한 나라에 살고 있다. 민주화를 이루었고 경제화도 성공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살 수 없는 지옥이 되어 버렸다. 불평등, 노동시간, 산업재해, 자살률이 높아졌다.


이렇게 한국사회가 헬조선의 지옥이 된 이유는 독재, 군사정권의 계승 정당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자체가 희한한 현상이고 또 그런 정당이 힘이 강하다. 군사독재에서 민주화로 넘어온 것이 아니라 군사독재에서 자본독재로 넘어온 것이다. 그 과정에서 민주화라는 ‘형식’이 한국 사회를 덮고 있을 뿐이다.


한국 국민이 이루어 낸 이 엄청난 성취에도 불구하고 지금 현 한국사회에서 우리는 왜 이렇게 고통스럽게 살아가고 있을까. 그건 여의도 국회에 있는 정치인들이 정치를 잘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생활의 강제력, 구속력을 가지는 법을 만드는 그곳의 법이 제대로 된 법이 만들어진다면 우리가 이렇게 고통을 받고 자살을 하지 않는다.


국회에 300명의 의원이 있는데 그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자유시장경제’이다. 295명이 ‘프리 마켓 이코노미’를 추구하고 있다. 저들에게 중요한 것은 노동자들의 생명권, 노동권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경쟁력’을 키우는 것이 저들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이다. 가장 좋아하는 말도 ‘경쟁력’이다. 국회에 앉아 있는 자들의 99%가 국가경쟁력, 기업 경쟁력을 말하고 있다.


인간 존엄성, 사회적 정의를 말하는 정치를 한국에서는 볼 수 없다. 정치의 목적은 인간의 존엄성과 사회적인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다. 기업 경쟁력을 높이려고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니다. 기업은 기업인들이 알아서 열심히 한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다. 정치인들은 기업이 잡아먹는 인간의 존엄을 보호하고 기업을 규제하는 것이 그들의 일이다.


독일의 경우 베를린 국회에 633명 국회의원이 있는데 ‘자유시장 경쟁’을 추구하는 의원이 이전 회기에는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이번 회기(2019)에 10% 정도 생겼다. 자유시장 경쟁을 지지하는 정당은 대체로 앞에 자유가 붙는 자유당 또는 자유민주당 같은 정당인데 인간의 자유를 성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기업의 자유를 성장시킨다.


자유시장경제는 인간과 함께 갈 수 없다. 잉겔라 메르켈이 2005년 총리가 된 이후 16년(곧) 총리를 했다. 어째서 이렇게 오랫동안 총리를 할 수 있을까. 메르켈의 정당은 기독교 민주연합 정당으로 보수정당이다. 메르켈 정당이 추구하는 체제는 ‘소셜 마켓 이코노미’다. 즉 ‘사회적 시장경제’다. 우리 한국의 ‘자유시장경제’와는 다르다.


인간은 20세기에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는데 훨씬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경제는 무엇인가에 대해서 거대한 경쟁이 있었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경쟁을 했다. 거의 90년 가까이 결투를 해서 결론은 자본주의가 이겼다. 1990년에 사회주의 경제가 붕괴를 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훨씬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켜준다고 결말이 났다.


문제는 자유시장경제는 인간의 욕망을 효율적으로 충족은 시켰는데 대신 인간을 잡아먹는다. 독일에서는 이 부분을 ‘야수 자본주의’라고 한다. 미국도 카트리나가 왔을 때 흑인들을 대피시키는 자본과 카트리나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의 시체를 치우는 자본을 비교했을 때 후자가 낫다고 정부는 판단을 했고 그렇게 프로그램을 돌렸다. 후에 그 사실이 국회에서 까발려졌고 미국 사회는 발칵 뒤집어졌다. 이를 미국의 ‘재난 자본주의’라 한다.


독일을 비롯한 서유럽 나라에서는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자본주의’의 병패를 보았다. 그냥 자유경쟁, 프리 하게 놔두면 인간을 잡아먹는다는 것이다. 그럼 무엇을 잡아먹는다는 것일까. 정말 인간을 잡아먹는 것일까. 그건 바로 ‘실업’과 ‘불평등’이다. 여기에 따르는 것이 ‘빈곤’과 ‘불안’이다. 그리고 불안은 바로 ‘자살’을 키운다. 자본주의는 상시적으로 5~8%의 실업을 내장하고 있는 체제다. 실업이 없을 수가 없다. 불안과 자살이 따라오게 되어 있다.


그래서 독일과 서유럽 대부분의 나라는 실업과 그에 따른 불안과 자살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자본주의 시스템의 문제이기 때문에 ‘소셜’로 잡아줘야 된다는 체제가 이루어졌다. 마르켈은 ‘자유시장경제‘가 아니라 ‘사회적 시장경제’로 불평등과 실업 그리고 불안으로 인한 자살을 개인의 문제로 돌리지 않고 사회에서 그걸 잡아주려고 노력했기에 오랫동안 총리를 하고 보수 집권당이지만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이 흔히 듣는 말 ‘소셜’은 ‘관계’로 ‘공동체’를 말한다. 이 공동체는 개인의 불평등과 불안과 자살을 개인의 문제로 돌리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개인의 불안과 자살은 개인의 문제로 돌리고 있다. 기업형 언론이 배설하듯 뱉어놓은 기사를 가지고 사람들은 악플을 단다. 개인의 문제이니까 막을 수 있는 장치가 없다. 그러니까 악플은 악플을 낳고 악플은 축소되는 것 없이 확대되고 재생산되고 결국 청춘을 죽음으로 몰고 간다. 자살을 막으려면 악플에 대한 강력한 규제가 있어야 하고 그 이전에 기업 언론의 과다한 가짜 기사도 잡아야 한다.


인간의 존엄을 지켜줘야 하는 일을 여의도에 앉아있는 정치인들이 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못하고 있다. 실업과 빈곤과 불평등으로 인한 자살이 얼마나 더 나타나야 할지 모르는 이곳이 그래서 헬조선인 것이다.


여론의 조작, 가짜 뉴스 흘리기는 현 대통령이 처참하다는 외교순방을 마치고 온 직후, 다름 아닌 대통령 실에서 다시 시작되었다. 이렇게 대놓고 국민들은 바보구나, 같은 갈라 치기와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재미를 주는 신문 총리와 더불어 둘이 합쳐 지지율 50%도 안 되는 일본의 총리와의 짧디 짧은 굴욕적인 비밀 회담은 재미를 넘어서 슬프다는 생각이 든다. 거기에 언론 탄압까지. 독일 같은 선진국에서는 국민의 자실을 개인의 문제로 돌리지 않고 어떻게든 정부가 지려고 하는 노력과 시스템을 만들어 가는데 현 일본의 신문은 한국의 대통령이 굳이 만나 달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만나줬다, 식의 기사가 쏟아지고 있다.


시간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어른이 되어버린 나만 슬퍼하고 화를 내면 될 텐데 청춘들까지 슬퍼하고 힘들어한다. 점심밥 한 끼 만원 가까이라 편의점에서 삼각김밥으로 때우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현실인데 바이든이니 날리면이니 같은 뉴스로 온 나라가 며칠이나 떠들썩하다는 건 정말 어떻게든 슬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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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포포(담뽀뽀)

음식의 탐미와 미식의 허영.

굴에 떨어진 피가 퍼지는 예술작품 같은 마법.

단 음식에 대한 인간의 갈망.

라면을 빨아 당겨 목구멍으로 넘기는 쾌감.

쾌락적 후추와 쾌락적 레몬을 젖가슴에 뿌려 먹는 욕망.

쾌락의 절정은 음식에서 완성되고.

죽음을 앞두고도 끊을 수 없는 완탕면의 유혹.

인간의 위를 채우기 위해 무수히 죽어간 생물들.

이 모든 것들이 나대거나 모자라지 않게 영화 속에 잘 스며들어 있다.

영화는 웨스턴의 대결구도를 따라간다. 맛이 없는 탐포포네 라멘을 일으키기 위해 은둔 고수들을 찾아 나서고 그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어 라면 맛의 ‘1’을 올리기 위해 노력과 훈련을 처절하게 한다.

라멘집에서 라멘과 주인장인 탐포포를 둘러싼 대결은 그야말로 웨스턴 서부극의 일대일 결투와 같다. 장엄하고 비장한 음악과 배경은 없지만 라멘에 대한 집념과 80년대 도쿄의 도시를 배경으로 하수구에서 대결을 펼치는 장면은 너무나 멋지다.

라멘 하나로 이렇게나 재미있게 인간의 모든 욕망을 표현할 수 있다니 정말 놀라운 영화다. 인간의 발끝부터 시작하는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음식이다. 음식은 죽음과 직결한다.

영화 속에는 김치와 상추에 싸서 먹는 돼지갈비가 나온다. 돼지갈비는 꽤 오래전에 일본에 상륙한듯싶다. 그렇게 각고의 노력 끝에 탐포포는 네기소바를 만들어낸다. 바로 줄을 서서 먹는 라멘. 그것을 해내고 만다.

마지막 장면이 아주 인상적이다. 아기가 엄마의 품에서 젖을 빨고 있는 장면은 긴 호흡으로 점점 클로즈업이 되며 끝난다. 인간의 탄생은 음식과 함께 출발한다. 그 출발을 알리는 것이 엄마가 만들어낸 모유였다. 엄마 젖을 빨아먹는 아기의 마음속에는 생존과 함께 오감도 열리게 된다.

음식이 인간의 탐욕을 잘 말해주는 영화가 후에 또 나오게 된다. 브라질과 이태리 영화 ‘에스토마고’다. 요리 영화가 아닌데 요리 영화인 이상하고 굉장한 영화다. 음식 하나를 가지고 권력을 가지게 되는, 인간의 욕망 충족에 대한 갈망을 음식으로 만들어낸 영화였다.

영화 ‘탐포포‘는 ‘담뽀뽀‘라고도 발음이 되고, 제주도에는 담뽀뽀라는 일본식 라멘집도 유명하다고 한다. 탐포포는 민들레이며, 영화 속 간판이 민들레 삽화로 되어 있다. 85년 영화로 영화 속 라멘 한 그릇 가격이 480엔이다. 우리나라 돈으로 50원 정도인데 아주 저렴해서 서민화가 확 이루어졌나 싶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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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이 한 장의 사진을 담기 위해 같은 곳을 매일, 두 달 동안 비슷한 시간에 고양이 먹이를 들고 찾아갔던 적이 있었다. 그때는 나도 부지런하여 카메라를 들고 영차영차 열심히 사진을 담고 있었다.


내가 들고 다니는 카메라는 렌즈 찰탁식이 아니고 망원렌즈도 아니기 때문에 피사체를 자세히 담으려면 피사체 가까이 가야 한다. 움직이는 피사체라면 그 피사체와 어떻게든 친밀해져야 하고 친근해지면 움직이는 피사체를 담을 수 있다. 좋은 카메라로, 좋은 망원 랜즈를 달고 뒷 배경의 보케가 몽글몽글 날아가는 사진은 쳐다보지도 않았던 때였다. 자존심이 강했던 때였다.


고양이는 수천 년 동안 인간의 곁에서 인간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지지만 인간과 늘 이만큼의 거리를 두는 요물단지 존재다. 강아지처럼 헤실헤실 오로지 주인의 눈만 보며 24시간이 모자라는 것도 아니며, 포기했다 싶으면 어느새 손을 내밀어 친밀함을 표현하는 기묘한 존재가 고양이다.


그래서 길고양이는 더더욱 가까이 다가가기가 어렵다. 조깅을 그동안 하면서 만난 길고양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 올린 적이 있었다. https://brunch.co.kr/@drillmasteer/1269


고양이는 다가가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한 번 친밀해지면 그들 나름대로 그 친밀함을 표현하는 것에 인간의 마음은 또 녹아버리고 만다.


길고양이와 최고의 인연?이라고 해야 할까, 나와 길고양이에 관한 이야기는 차에 치어서 이제 막 죽음으로 간, 그래서 몸이 아직 뜨근 뜨근했던 어미 고양이를 수건에 돌돌 말아서 저수지 근처에 묻어준 일이었다. 이 이야기도 어디선가 풀어놨는데 어딘지 기억이 없다. 그런 것을 보면 나는 머리가 나쁘다,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


어미 고양이라는 걸 알 수 있었던 건 죽은 어미 고양이 주위에 이제 태어난 지 며칠 되지 않을 것만 같은 새끼 고양이들이 앙앙 거리고 있었다. 눈망울이 만화에 나오는 그, 그런 눈망울을 한 채 4마리인가 도로에 죽은 어미 고양이 주위에 모여 앉아 있었다. 그 시각이 새벽이었다. 새벽 2시나 3시쯤.


그때 나는 술을 마시고 대리운전을 해서 집으로 가는 중이었다. 대리기사님이 도로에 뭐가 있는데요?라고 하기에 잠깐 내려서 보니 그런 모습이었다. 도로는 아파트 밑의 4차선으로 저녁이 되면 차선 양옆으로 자동차들이 죽 주차를 해서 2 차선 되어버리는 도로였다. 그리고 그 아파트에 내가 산다. 집에 거의 다 와서 그 모습을 발견했다. 그래서 근처에 주차를 시켜달라 하고 대리기사는 가버리고, 나는 술이 좀 취한 상태로 어미 고양이를 들었다. 그때 고양이의 몸이 뜨근뜨근 해서 놀랐다.


아마 맨 정신이었으면 나는 그대로 집으로 갔을 것이다. 순전히 술 때문이다. 술 때문에 새끼 고양이들이 새벽에 다니는 차에 치일까 봐 어미 고양이를 묻어야겠다 생각이 들었다. 단지 그랬을 뿐이다. 조깅을 하니까 수건이 있었고, 그때는 도시락을 싸 다녔다. 숟가락을 주머니에 꽂고 수건으로 고양이를 말아서 아파트 단지 뒤의 저수지 쪽으로 갔다. 만약 비가 왔다면 나는 영화 사이코처럼 보이지 않았을까. 비를 추적추적 맞고 주머니에 숟가락을 꽂고(이건 좀 웃기지만) 힘든 발걸음으로(술 때문에) 고양이를 수건으로 감싼 채 저수지로 오르는 모습.


그리고 숟가락으로 적당한 곳을 찾아서(비교적 사람이 다니지 않을 것 같은, 그리고 나무 뒤에, 그리고 비가 와도 괜찮을 정도의 땅의 굳기 등) 열심히 숟가락으로 땅을 팠다. 정말 미친 듯이 팠다. 술 때문이었다. 술 때문에 그런 약간은 초인적인 땅파기를 할 수 있었다. 수건에 싼 채 고양이를 묻고 흙을 덮고 잘 밟아 주었다. 누가 봐도 원래 땅인 것처럼.


이제 흩어졌던 새끼 고양이들이 이 험한 세상에서 잘 헤쳐 나가기를 바랄 뿐이었다. 하루키의 일큐팔사 2권에 고양이 마을이 나온다. 꼭 저 사진 속의 고양이들을 따라가면 고양이 마을로 들어갈 것 같다. 고양이 마을로 들어가면 상실이 가득한 고양이 마을보다는 고양이의 보은에 나오는 그런 기분 좋은 마을로 이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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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2-09-28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양이가 은혜 갚을 겁니다.

교관 2022-09-29 11:51   좋아요 0 | URL
ㅎㅎㅎ 은혜까지는 바라지 않고요, 고양이와 사람이 잘 섞여 살아갔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