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김밥도 종류가 많고 아주 맛있다. 우영우 덕분에 김밥이 더 인기다. 나도 음식 중에서 김밥이 가장 좋다. 몇 번이나 이야기를 했던 거지만 귀찮지 않기 때문이다. 굽고, 삶고, 끓이고 할 필요도 없고, 젓가락, 숟가락을 많이 움직일 필요도 없다.


김밥을 어찌나 좋아하면 1년 내내 점심을 김밥으로 해결했던 적도 있었다. 그때 김밥을 만들어서 건물마다 돌아다니며 파는 할머니가 있었는데 그 할머니에게 매일 김밥 두 줄을 구입해서 먹었다. 그 덕에 김밥 할머니에 대한 소설도 한 번 써 보기도 했다. https://brunch.co.kr/@drillmasteer/2339


김밥이 좋은 점은 강변 벤치에 앉아서 은박지를 벗겨내서 한 손으로 들고 먹으며 소설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옆 사람에게 김밥 예찬을 블라블라 하고 있으면 옆에서 시큰둥 한 얼굴을 하고 있기도 했다. 근래에 김밥 전문점도 많아지고 맛있고 맛있는 김밥이 흘러넘치지만 나에게는 김밥 중 최고는 '소풍 김밥'이다. 소풍 김밥이란 말 그대로 소풍 갈 때 엄마가 새벽에 말아 준 김밥이다.


원태현의 시처럼 4시에 너를 만나면 3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하는 것처럼 소풍 가는 전날에는 기분이 째진다. 소풍 그거 별 거 아닌데 김밥이라는 점심을 들고 소풍을 간다는 기대가 엄청났다. 소풍 전날에는 잠도 잘 안 온다.


나는 소풍을 한 번 안 간 적이 있었는데 중학교 1학년 때 소풍 전날 집으로 오는데 도로가에 소형 트럭을 주차해 놓고 건물 공사 때문에 트럭의 모래를 인부가 삽으로 퍼서 밑으로 내리고 있었다. 근데 지나가는 나를 보지 못하고 삽으로 모래를 휙 던졌는데 그 삽에 귀를 찍히고 말았다. 얼굴 옆이 삽으로 찍혀 버린 것이다.


순간 머리와 얼굴에 모래가 다 들어가서 막 터는 순간 피가 두두두두 떨어졌다. 피를 보니 그 뒤로 띵한, 멍한 세상이 보이고 아직 덜 자라서 그런지 얼굴의 옆이 조금씩 아려오기 시작했다.


놀랐던 인부 아저씨가 수건을 들고 귀를 감쌌고 병원의 응급실로 가서 치료를 했는데 오른쪽 귀 밑부분이 겨우 붙어 있어서 그걸 꿰맸다. 손으로 튕기면 귀의 밑부분이 날아갈 정도로 너덜너덜거렸다. 지금도 흉터가 그걸 잘 말해준다. 집에는 엄마와 큰 이모가 있었는데 놀라서 달려오느라 신발이 짝짝이였다. 그 모습에 풋 하고 웃었던 기억이 있다.


어쩔 수 없이 그다음 날 소풍은 가지 못했다. 사실 중학교 때에는 먼지 같은 존재였고 공부도 못하고 그저 음악이나 듣고 지냈기에 친구도 없었다. 그래서 중학생활이 그저 빨리 지나가기를, 중학생 주제에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쓸모없는 중학생 시절은 빨리 지나갔으면. 그런 생각을 3년 내내 하고 있었다. 그래서 중학교 3년 동안 소풍이라고 해봐야 기억이 없다.


어떻든 나에게 최고의 김밥은 소풍 김밥이다. 초등학교 때 소풍을 가서 먹는 김밥은 정말 맛있었다. 가방에 넣어서 소풍장소에서 놀다가 점심시간에 김밥을 꺼내면 약간 짓눌러져 있고 모양도 반드시 동그랗지 않았지만 소풍 김밥 만의 맛이 있었다. 그 맛이 좋았다. 김밥전문점에서 갓 나온 맛있는 김밥 과는 다른, 어머니 만의 맛이 깃든 김밥이 소풍 김밥이다.


소풍 김밥의 묘미는 같이 둘러앉아서 먹는 친구들의 김밥을 먹을 수 있는데 거짓말 1도 보태지 않고 집집마다 김밥의 맛이 달라도 싹 달랐다. 그저 밥과 들어가는 재료가 거기서 기기에 김으로 둘둘 말은 것뿐인데 맛이 다 다르다. 특별히 맛이 있는 김밥도 없고 아주 맛없는 김밥도 없다.


고만고만한 맛인데 다 다르며 야외에서 둘러앉아 깔깔거리며 칠성사이다를 마시며 약간 짓눌린 소풍 김밥을 먹고 있으면 행복했다. 소풍 김밥이 가장 맛있는 이유는 행복하다는 이유다. 시간에 쫓겨 편의점에서 앉아 먹는 김밥은 슬픔의 맛이다. 김밥전문점에서 나온 김밥은 맛은 있지만 비싸서 부담스럽다. 휴일에 애인이 집에서 만들어온 김밥은 그야말로 산더미다. 소풍 김밥을 따라올 수 없다.


그래서 소풍 김밥이 김밥 증에서 나는 제일이다. 요즘은 소풍 갈 일도 없고, 빙 둘러앉아 김밥도 먹지 않으니 소풍 김밥의 맛을 볼 수가 없다. 그만큼 행복의 총량도 줄어들었다고 볼 수 있다. 생각을 해 보면 수많은 맛있는 김밥 속에서 소풍 김밥을 먹을 수 있는 기간은 아주 짧다. 복잡한 도심지의 생활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 틈에 있지만 어쩐지 고독하다고 느끼는 것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아무리 김밥을 먹어도 행복하다고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꼭 예전으로 돌아갈 필요는 없지만 소풍 김밥의 맛을 다시 느끼려면 뭘 해야 할까.


남은 재료를 밥과 먹어도 맛있다. 소풍 김밥의 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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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인데 조깅을 하러 나오자마자 뭐야? 벌써 겨울인가? 할 정도로 날이 쌀쌀해졌다. 일기예보에서는 날이 추우니, 일교차가 어떻니 하는 예보를 했다. 날이 쌀쌀해졌다. 이런 날 조깅을 하는 건 애매하다. 일단 달리면 등에서 땀이 나고 후끈하지만 반환점에서 몸이라도 풀라치면 10분 만에 땀은 식고 바람 때문에 식은땀 때문에 더 춥다.


옷이 두껍지 않기 때문에 이런 날은 그저 입은 한일자로 다물고 마지막까지 달리는 것이다. 쉬지 않고 9, 10킬로미터를 달리는 건 힘들다. 무난한 평지만 달린다면 해볼 만하지만 마지막 코스에는 오르막길에 대략 2킬로미터 정도 있다. 쉬지 않고 달려오면 오르막길은 걸어야 한다. 날이 추워져서 그런지 강변에 나온 사람도 썩 없을 것 같은데 또 사람들은 꽤 나와서 강변을 달리고 있다.


며칠간의 사진 기록이다.

어디선가 부터 지하 주차장까지 잠자리가 들어왔다. 잠자리는 이제 지금의 세계에서는 볼 수 없다. 한 계절이 죽으면서 잠자리도 같이 소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겨울에도 앵앵 거리는 모기처럼 잠자리 한 마리가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와서 날갯짓을 하고 있다.

여기는 지하 4층이라 어떻게든 밖으로 보내려고 했지만 금세 포기했다. 밖은 추워졌다. 잠자리도 몸을 파고드는 추위에 깜짝 놀라서 지하주차장까지 그것도 4층까지 내려오지 않았나 싶다. 지하 4층에는 차들도 없어서 훨훨 날아다니기에도 좋다.

계절에 따라가지 못한 잠자리를 보니 안도현 시인의 간장게장으로 유명한 ‘스며드는 것’이 생각난다. 오늘 아침 박준 시인도 말했지만 엄마 게는 자신이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세상의 이치를 받아들인다. 내 아무리 노력으로 모든 것을 지키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무거운 세상의 무게를 꼭 버텨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다.


불 끄자, 잠들 시간이야.

지금 이 도시는 전국체전으로 후끈한 것 같지만 실상 일반 시민들은 체감을 잘 못한다. 도시 곳곳에서 경기가 열리고 있지만 그곳에 가지 않는 이상 후끈함은 전달받지 못한다. 전국체전이 열리기 전 날 밤하늘을 환하게 밝히는 불 때문에 불이 난 것만 같았다. 강변을 다니는 사람들 역시 이 먼 곳에서 지 곳의 불이 난 장면을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러나 불이 났다는 뉴스는 나지 않았다. 아마도 전국체전의 일환으로 무슨 행사를 한 것으로 보인다.

저녁에 조깅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후미진 곳에 가면 늘 길고양이들을 만난다. 길고양이들 중에는 대담한 녀석들도 있지만 대체로 사람을 보면 화들짝 놀라서 숨어 버리기 일쑤다. 나는 그냥 옆으로 걸어가는데 이 녀석아, 내가 더 놀랐다.

이건 마치 영화 ‘놉’에서 처럼 움직이지 않는 거대한 구름처럼 보였다. 몹시 이질적이었다.

다른 구름보다 낮게 떠 있어서 아주 입체적이며 거대하고 또 너무나 하얗게 보였다.

영화 ‘놉’에서 촬영감독이 구름 속의 빛을 보더니 수동식 카메라를 들고 본격적으로 외계 생명체를 담으려 한다. 영화에서 처럼 밤인데 구름에서 빛이 났다. 달이 교묘하게 구름 뒤에 숨었다. 별거 아닌데 신기하게 보였다.

이렇게 야경을 담을 때면 기기에 무딘 나도 아아 아이폰 14였다면 멋지게 담았을 텐데,라고 2초 정도 생각한다. 좀 기묘 한 건 예전 아이폰4s를 들고 다닐 때에는 전혀 그러지 않았다. 내가 사용하는 건 아이폰 8인데 사진을 담으면, 야간 사진을 담으면 아이폰4와 그렇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러나 아이폰 13으로 담은 야간 사진들을 보니 탐이 난다.

사진은 멀쩡해 보여도 아파트 쪽은 사진이 뭉개졌다. 근거리는 쨍하게 잘 담겼지만 원거리의 피사체는 흐트러진 것이다. 자연광이 없어서 그렇다. 광량이 충분하지 않기에 내가 들고 있는 폰의 카메라는 이 정도밖에 담아내지 못한다.


어쨌거나 고즈넉한 풍경이다. 낚시를 하는 모습은 멍하게 바라보기 좋다. 그들도 멍하게 낚싯대를 바라보는데 그 모습을 멍하게 보는 것 역시 나쁘지 않다. 우리는 평소에 너무 많은 생각들을 하며 지낸다. 그 많은 생각 중에 생활 전반에 사용되는 건 1 정도뿐이거나 그 마저도 안 된다.

불안한 눈빛의 고양이가 불안한 모습으로 불안하게 음식물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다.

다행히 사람들이 다니지 않았다. 나는 전봇대 마냥 가만히 서서 고양이를 지켜봤다.

잘 꺼내 먹나 싶더니 도로로 자동차가 지나가니 자동차만큼 빠른 속도로 도망가 버렸다. 쫄보 녀석.

달과 별과 플레어가 동시에 담신 사진이다. 날이 차가워지면 좋은 건 밤이 깜깜하다는 것이다. 검은색의 밤이다. 불순물이 섞이지 않는 밤. 그저 검은 밤과 깜깜한 밤의 계절이라는 것. 밤 다운 밤, 밤 같은 밤의 연속이 좋다.

어떻든 조깅을 하고 나면 몸이 상쾌하다.

일상, 기록, 사진기록, 며칠간의, 사진, 잠자리, 주차장, 강변, 조깅, 하늘, 구름, 영화, 놉, 저녁, 달리기, 또달리기,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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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2-10-13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엘리베이터 컷은 교관님의 시그니처군요.ㅋㅋㅋ

교관 2022-10-13 12:21   좋아요 0 | URL
이제 엘베 공사한다고 해서 이 컷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음요 ㅋㅋ
 


겨울의 카페는 따뜻하고 좋다. 안에서 보는 카페의 밖은 추위 때문에 사람들이 등을 구부리고 옷깃을 한껏 세워서 걷지만 카페 안에서는 커피의 향이 온통 넘쳐나기 때문에 기분이 나른하고 좋은 것이다. 하지만 아르바이트의 경우는 또 다르다. 겨울의 카페에는 저녁이 되면 거의 만석이다.


모든 테이블에 사람들이 꽉 들어찬다. 음료를 서빙 보다가 아차 해서 부딪히기라도 하면 낭패인 것이다. 음료야 다시 만들면 되지만 손님들의 옷이 젖었다거나 테이블에 튀었다거나 하면 뒤에 따르는 문제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열심히 서빙을 보면 덥다. 겨울이라 카페 안은 따뜻함을 넘어서서 후끈하다. 그래서 쉬는 타임에는 조그만 탕비실 같은 곳에서 창문을 열어 놓고 있기도 한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카페의 아르바이트는 묘한 재미가 있다. 아르바이트를 할 때에는 ‘이 일을 빨리 끝내고’라는 마음과 ‘재미가 있어서 계속해야지’라는 마음이 반반씩이었다. 카페의 아르바이트는 뭐랄까 딱히 힘든 일이 없다. 그저 서빙을 보는 것뿐이다. 손님이 많으면 재빠르고 눈치껏 서빙을 보면 된다. 그러니까 비운 건 빨리 치워주고 테이블을 닦아 주고.


음료는 만드는 일은 전적으로 주방에서 바리스타 같은 사람이 모든 음료를 만든다. 아주 능숙하게 맛있게 모든 음료를 만들어 버린다. 카푸치노도, 라테도, 위스키가 들어간 커피도, 칡차도 모든 음료를 만든다. 무엇보다 빠르게 만든다. 그리고 서빙을 보는 아르바이트는 그걸 빠르게 테이블에 가져다주면 된다. 그래서 음료를 맛있게 만드는 주방장이 있는 카페는 당연하지만 손님이 많고, 그 손님의 80%는 여자 손님들이었다.


아르바이트가 재미있었던 이유는 좀 무서웠던 사모님의 칭찬이 자자했기 때문이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듯이 칭찬을 들으면 얼씨구 아르바이트가 재미있었다. 칭찬을 들었던 이유는 손님이 없는 주말의 오전 시간, 그리고 방학을 한 평일의 저녁이 되기 전까지 나를 찾아온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들이 손님이 되어 주었다. 그들은 여자들로 여상 아이들과 땡땡 여고 아이들로 우리 학교 클럽활동을 하면서 교류를 하면서 알게 된 친구들이었다.


남자고등학교를 다녔는데 거기서 클럽활동으로 사진부를 활동을 했다. 그 덕분에 선배들에게 맞기도 많이 맞았지만 여학교 사진부 아이들과 교류가 잦았다. 필름 카메라를 들고 같이 다니며 사진을 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친해지게 된다. 그녀들이 돌아가면서 카페에 놀러 왔다. 놀러 왔다고는 하나 테이블에 앉아서 음료를 가져다주면 지들끼리 재미있게 수다를 떨다가 간다. 그 수가 많아서 사모의 칭찬이 잦았다.


그러던 중 땡땡 여고 아이들이 매년 하는 이웃 돕기 성금을 마련하려고 일일찻집을 하게 되었는데 내가 아르바이트하는 카페에서 하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일일찻집을 하면서 자신들의 사진을 전시를 해서 팔리는 사진이 있다면 팔고 싶다고 했다. 일일찻집 겸 작은 전시회를 하는 것이다. 내가 아르바이트했던 카페는 2층 3층을 카페로 하고 있었다. 그래서 3층을 하루 종일 일일찻집으로 열 수 있었다. 물론 사모님이 그렇게 하라고 했고 대박을 친 것이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글바글 거렸고 덕분에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느라 다리가 후덜거렸다.


그래서 한 달만 하기로 했던 아르바이트가 두 달이 되고 해를 넘겨 여름까지 하게 되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아르바이트를 할 동안 갑질하는 손님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경찰이 오고 가고, 언성을 높이는 일이 없었다. 주방에서 만든 음료나 커피는 정말 맛이 좋았다. 주방장 형은 실력이 좋아서 멀리 순천인가 거기서 스카우트를 해왔다고 사모님이 말했는데 그게 사실인지 알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음료를 만들면 맛은 정말 좋았다.


일일찻집을 끝내고 교류하는 여고의 아이들이 자주 찾아왔다. 그녀들이 음료를 다 마시면 나는 또 새로 음료를 가져다주었다. 주방장 형도 마음껏 퍼주라고 했고 사모님도 나무라지 않았다. 그 시간이 손님이 별로 없을 시간이라 내가 늘 들고 다니는 앨범을 카페의 음악으로 틀었다. 카페에는 대체로 가요가 많이 나왔는데 유행에서 좀 먼 노래들이 많았다. 그러니까 사모님의 취향에 맞는 노래들이 흘렀다.


그때 내가 듣고 있던 앨범은 여러 노래가 섞인 앨범이었는데 그 안에는 브루스 스프링스턴, 마빈 게이, 에어로 스미스, 조지 마이클 같은 노래들이 있었다.


주말에 출사를 다니며 같이 사진을 담고 난 다음에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음악 감상실에 가기도 했고, 그녀들은 내가 음악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노래가 나오면 자동적으로 이건 누구 노래? 라며 물었고, 이건 마빈 게이의 렛스 겟 잇 온, 그리고 마빈 게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주었다.


마빈 게이는 흑인들의 성지 모타운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거기서 나온 거지. 모타운이 바로 퀸스 존스가 거의 수장 격으로 있는 거대한 레이블인데 대체로 흑인들의 음악을 하는 곳이야. 그런데 뭐랄까 백인들을 위한 흑인음악? 그런 느낌이 많이 드는 노래들을 만들었지. 그 안에 마이클 잭슨도 있었고 말이야. 대놓고 그러지는 않았는데 그런 분위기가 있었던 거지. 그런 분위기가 싫었던 마빈 게이는 모타운을 뛰쳐나와 흑인을 위한 자신만의 노래를 불러. 그래서 전설의 복서 무하마드 알리와 함께 흑인을 위한 인권 운동을 하기도 했고 말이야. 그러나 후에 아버지와 다투다가 총에 맞아서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맞이해. 그때 나이가 고작 44세인데.


나는 음악감상실에서 주워들은 이야기들을 풀어놓고, 그녀들은 재미있어했고 자주 나의 앨범을 틀었다. 그랬더니 사모님이 카페에 흐르는 음악을 싹 바꾸어 버렸다. 남자 손님들이 카페에 나오는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더라는 것이다. 그 노래가 아마 뎀 양키즈의 하이 이너프였을 것이다. 뎀 양키즈, 넬슨, 파이어 하우스, 익스트림, 도켄, 본 조비, 곤센 로즈, 미스터 빅 등 강력하지는 않지만 록. 록 발라드 노래들을 카페에 많이 틀었다. 그랬더니 남자 손님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남자 손님들의 특징은 모여서 커피를 마시고 나가는 시간이 비교적 짧다는 것이다. 물론 이야기를 하고 수다를 떨지만 그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 그리고 노래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남자들이 좋아할 만한 노래들인 것이다. 안 그럴 것 같았는데 음악은 카페의 분위기를 싹 바꾸었다.




그럼 뎀 양키즈의 하이 이너프를 들어보자 https://youtu.be/l_uh8XjgL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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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뜨지 않아서 서늘한 기운이 피부에 스며드는 날이다. 지난주에도 선풍기를 틀어 놓고 잠을 잤는데 이제는 긴팔을 입어야만 한다. 한 시간은 느릿느릿 가는데 어느새 한 달이 지나가 버렸다.


지난주, 아직 여름의 끝자락 같은 날인데 그 틈을 벌리고 가을의 냄새가 들어왔다. 파랗게 멍든 하늘과 깨끗한 공기와 사람들이 빠져나가서 쓸쓸하게 보이는 해변과 문을 열어 놓은 카페의 모습에서 이미 가을을 보았다. 조금 당황스럽고 난처하기도 한, 마치 대중목욕탕에서 실컷 목욕을 하고 나왔는데 때를 밀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는 것처럼.


종잡을 수 없는 그녀의 마음처럼 계절은 언어를 잃어버리고, 바다는 여귀가 뿜어 놓은 듯한 해무도 소거하고 해풍도 사라졌다. 그건 바로, 여름을 밀어내고 밀려오는 파도처럼 가을이 오는 것이다. 지난주에는 개와 늑대의 시간 속으로 희미해지는 끝자락의 여름의 모습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오늘 시월 구일은 여름이 다 태우고 남은, 완전히 재가 된 가을이었다. 누군가는 가을이 책을 읽는 계절이라 하고, 어떤 이는 천고마비의 계절이라 하지만 나에게 가을이란 겨울의 앞잡이처럼 눈에 띄지 않게 추위를 받아들이는 계절로 입술이 트기 시작하는, 독이 퍼지는 계절이다.


가을은


독서(讀書)의 계절이 아니라


독(毒) 서(㾷)의 계절이다


입술과 피부는 귀신같아서 가을이 왔다는 것을 여지없이 알려준다.

저 서쪽 너머의 마른 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입술마저 타닥타닥 태워 말려 버리고 태양 밑에서 빳빳하게 변한 빨래처럼 피부를 건조한다.


온 세상이 말라가고 있다.

메마르지 않게 말라가는 것들을 불러 세워 놓고 물뿌리개로 사각사각 곱게 물방울의 옷을 입혀주고픈,

그리하여 작은 무지개가 곳곳에 펼쳐지는 아침을 맞게 해주고 싶다.


그래서 절박해지지 않게 하고 싶다.

절박해지면 잘못된 선택을 한다.

그리고 누가 잘못인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잘못된 선택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

우리는 늘 그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요즘은 여기저기서 ‘형식’에 얽매이지 말자, ‘형식’에서 벗어나자고 한다. 코로나 이후 형식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모습이 더 엿보인다. 형식이란 틀에 갇히게 하고 사람들의 사고를 한정시키는 몹쓸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형식’이라는 게 정말 나쁜 것일까. ‘형식’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배제해야 할 그 무엇이 아니다.


[일을 할 때의 일정한 절차나 양식 또는 한 무리의 사물을 특징짓는 데에 공통적으로 갖춘 모양]을 형식이라 한다. 형식은 사실 아름다운 것이다. 다양한 요소를 총괄하는 통일 원리라고 하며, 사물의 본질을 이루는 것으로 해석된다고 나와 있다.


계절이 오는 것 역시 형식이 있다.

‘형식적이다’라는 말 때문에 사람들에게 ‘형식’이라는 본질이 외면받고 있는 느낌이지만 형식 없이는 질서가 파괴되고 눈에 보이지 않게 아포칼립스 같은 세계가 올지도 모른다.


김영하 작가는 여행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에 언급을 했지만, 어느 날 알게 된 것인데 지금 내가 하는 어떤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보다 지금 한 무엇이 후에 어떻게 ‘기억을 할 것인가'가 중요한 것 같다. 지금 하는 무엇이 거창하지 않고 형식적 이리자만 후에 나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었던 것으로 기억된다면 괜찮지 않을까 싶다.


오늘은 시월 구일.

매년 시월 구일은 있지만 오늘의 시월 구일은 역사적으로 단 하루만 있는 날.

해는 숨었고 일요일이고 한글날이다.

그런 단 하루뿐인 날 중심에 우리가 서 있다.

형식에서 너무 탈피하려 하지 말자.

그 안에서도 얼마든지 역사를 만들어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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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세상이 서서히 가을의 색으로 물들어 가려고 한다. 가을의 색이라면 허브차의 이런 색이지 싶다. 봄의 초록을 지나 푸른 여름과 다르고 하이얀 겨울과도 다른, 그 어디에도 끼지 않는 독자적인 색감이 있다.


그러고 보니 요즘은 밤에 맥주를 버리고 허브차를 한 잔씩 마시고 있다. 한 잔이라기보다 하나의 티백으로 세 잔 정도 우려내서 마신다. 허브차라는 게 그냥 풀 맛이 날 뿐인데 이상하게 계속 홀짝홀짝거리게 된다.


커피와 다르고 뱅쇼와도 다르다. 정말 풀 맛이 미미하게 날 뿐인데 이상하게 맛있다. 맛이 없는데 그 맛이 없는 게 맛있다. 맛없는 맛있는 음식이 있다면 허브차가 그렇지 않을까 싶다.


어른들의 맛이다.


어린이는 절대 먹지 않을 맛이다. 어린이는 입에 대자마자 우웩 하는 맛이다. 나도 어린이 입맛이었는데 언젠가부터 이런 풀 맛에 매료되어 버렸다. 어째서 나이가 들면 이런 맛없는 맛이 맛있다고 느껴질까.


과학적으로나 의학적으로는 세포가 노화하면서 어쩌고 하겠지만 그 외적으로 생각을 해 보면 인간이 태어나서 어른이 되기까지, 그러니까 어른의 입맛으로 바뀌기 전까지 수많은 음식을 먹게 된다. 집에서 어머니가 해주는 밥과 반찬부터 학교의 급식, 친구들과 먹는 떡볶이부터 짜장면, 달달한 음료까지. 씁쓸하고 풀 맛난 맛을 제외하고 많은 맛있는 음식들을 먹었다.


그러다 보니 입은 맛있는 맛으로 채워졌고 보통의 맛있는 맛으로는 입맛을 채울 수 없게 되었다. 어떤 사람은 더 자극적이고 더 더 자극적인 음식을 원한다. 어제보다 오늘 더 맛있는 음식을 원하고 내일은 오늘보다 더 맛있는 음식을 먹을 거라는 희망을 가진다. 그렇게 자극적인 맛이 길들여진 입으로 어느 날 풀 맛이 나는 허브차가 마치 신처럼 내려왔다.


슴슴하고 심심한 맛.

가미되지 않은 하나의 맛.

밋밋하지만 묵직하고 깊은 맛.

위장을 채우는 맛이 아니라 위로에 가까운 맛.

어른이 되면 그런 맛을 알게 된다. 가을에 이르러 깊은 색감을 내는 것처럼.


어제는 날이 쌀쌀해져 가죽재킷을 꺼내서 호다닥 입고 나왔는데 더워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1리터 정도 마셨을 것이다. 어쩐지 나의 몸은 아직 여름의 끝을 붙잡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아직 가을의 색감을 받아들일 준비가 덜 된 것일까.


한 인간이 준비가 되고 말고 할 것 없이 자연은 때가 되면 법칙을 착실하게 지킨다. 자연이란 마음이라는 게 없어서 그저 육체는 시간에 따라 계절의 색감을 바꿔 입는다. 그러나 인간은 또 다른 문제다. 인간의 육체 역시 시간의 착실한 법칙에 순응하지만 마음이라는 것이 그 법칙에 따라가지 않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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