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입대를 해서 훈련소에서 조교들에게 맞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을차례는 많이 받았다. 5월 군번이었다. 중순에 가서 6주 훈련을 받는 동안 여름이 왔다. 무지하게 땀을 흘렸고 매일 샤워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번은 내무반에서 암구호를 잊어버리는 녀석이 있어서 점호가 끝나고 전부 그 여름에 야상을 입고 장갑을 끼고 복도 끝에서 복도 끝까지 네발로 엉금엉금 걸었다. 팔이 다리보다 짧으니 복도를 두 번 왕복하고 나니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그러나 웃거나 힘들어도 일어나면 안 되는 분위기였다. 조교가 딱 버티고 있으니까.


30분인가 40분 정도를 하고 난 다음 땀을 비처럼 흘리고 기진맥진했을 때 을차례가 끝이 났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리고 조교가 목욕을 시켜 주었다. 그런데 정말 힘들었던, 그러니까 공포에 질려서 너무나 무서웠던 을차례가 있었다. 무엇 때문인지 모르지만 중대 전체가 을차례를 받았는데 중대장이 직접 화를 냈다. 매일 시원하게 목욕을 할 수 있던 그 목욕탕이 공포의 장소가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중대장은 내무반 별로 목욕탕에 우리는 넣었다.


처음에는 탈의실에만 우리를 넣는 줄 알았는데 목욕탕 안까지 밀어 넣었다. 그리고 여러 내부반을 차례로 밀어 넣었다. 그러자 점점 애들이 1자로 서게 되었다. 벽으로 벽으로 몸을 밀착하게 되었는데 점점 밀려오는 아이들 때문에 초반에는 재미도 있고 냄새 때문에 키득키득거리던 아이들이 점점 몸이 전혀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 힘들어했다. 몸이 다른 애의 몸과 몸에 끼여 압박을 당하다 보니 신음소리가 이어졌다.


손가락조차 움직일 수 없었다. 몸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 끼여 겨우 숨을 쉴 수 있었다. 중대장은 계속 잘할 수 있냐고 했고 우리는 대답을 했지만 목욕탕 안을 울리는 건 아이들의 신음소리뿐이었다. 고통에 겨워 목에서 겨우 쥐어짜 나오는 듯한 신음이었다. 몸이 짓눌리니까 심장이 터질 것 같았고 그에 따른 공포로 너무 무서웠다. 단지 무서웠다, 라는 말로는 표현이 안 될 정도였다.


다리가 다른 아이들의 뼈와 뼈에 짓눌려 감각이 없어지는 느낌, 아무리 움직이려 해도 전혀 움직일 수 없는 공포, 심장이 이대로 터지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엄청났다. 군생활 통틀어, 화생방까지 해서 그때 그 목욕탕에 꽉 끼이면서 받았던 을차례가 가장 무서웠다. 그 공포를 생각하면 아직도 무섭다. 그런 공포는 처음 겪었기 때문이다.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서 말하는 걸 나는 이렇게 받아들였다. 매일이 소란스럽고 전쟁 같지만 엄마는 오늘도 나에게 온 선물 같은 너를 위해 치열하게 싸운다고. 여기저기서 누구의 엄마로 불리는 것이 자신의 이름을 잃어버리고 산다고 하는데, 내가 열 달 동안 뱃속에서 교감하며 낳은, 나에게 온 이 세상의 가장 크고 위대한 선물이 나의 자식인데 그의 엄마로 불리면 좀 어떠리. 이 지옥 같고, 이 전쟁 같은 세계에서 나의 딸을 위해서라면 나는 그 어떤 모습으로도 변할 수 있다, 비록 괴물일지라도 나는 나의 딸을 위해서 치열하게 싸우겠다.


나의 여동생은 조카가 생기고 난 후 그 이전의 자신의 생활 모든 것을 버리거나 바꾸었다. 조카가 태어나고 1년 정도 우리 집에 있었는데 일 마치고 집에 들어가면 늘 같은 자세로 옆에 누워 자는 조카를 바라보고 있었다. 매일 지치지 않고 조카의 자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린 조카가 어린이 집에서 다리를 절면서 집에 왔을 때, 그리고 병원에서 구타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의 여동생은 전사가 되었다. 의사의 소견서, 경찰, 보건소 등등. 어린이 집 엄마들과 함께 어린이 집 추궁에 들어갔고 쉬쉬하던 어린이 집의 비밀을 밝혀냈고 그 어린이 집은 폐쇄되었다. 조카 같은 아이가 몇몇 있었다. 그 아이들의 엄마와 아빠들은 모두 상처를 떠안게 되었다.



수요일 배철수의 음악캠프에 ‘철수는 오늘’ 코너에서는 [그 사람이 남겨둔 모든 것이 생생하지만 그 사람은 더 이상 곁에 없다. 그 사람의 부재는 너무나 크게 느껴져서 견디기가 어렵다. 이런 걸 슬픔이라고 부르는 걸까. 아니다, 이건 그런 감정과는 거리가 있다. 오히려 혼란스러움에 가깝다. 믿을 수 없어서, 이해할 수 없어서, 이해한 것 같아도 납득하거나 투영할 수 없어서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서 도통 뭐가 뭔지 몰라서 머릿속은 자꾸 하얘진다. 누가 와서 말해주면 좋겠다. 이게 꿈속의 일이라고. 한 숨 푹 자고 일어나면 된다고.


철수는 오늘 상실의 슬픔은 빨리 잊거나 덮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를 들었다. 견디기 어렵다고 애도를 생략하거나 축소하는 건 죽음과 상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한다. 더 이상 곁에 없는 그 사람, 참을 수 없을 만큼 정직한 부재. 뒤늦게 밀려오는 더딘 슬픔. 황동규 시인은 시집 ‘꽃의 고요' 곳곳에서 너무나도 더디게 마냥 더디게 왔다가 가는 슬픔을 보여준다. 슬픔이 얼마나 더딘지 자신도 죽고 나서 얼마 동안 숨 죽이고 이 세상에 그냥 남아있을 것 같다고 고백한다.


불을 끄고도 어둠 속에 얼마 동안 형광등 형체 희끄무레 남아 있듯이 눈 그치고 길모퉁이 눈 더미가 채 녹지 않고 허물어진 추억의 일부처럼 놓여 있듯이 봄이 와도 잎 피지 않는 나뭇가지 중력마저 놓치지 않으려 쓸쓸한 소리 내듯이 슬픔은 늘 그렇게 한 박자 늦게 와서 불현듯 뒤통수를 치고 만다. 이제 유통기한 다 지났다 싶어 방심할 때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서 불시에 사람을 사로잡고 만다. 나흘 몸살에 계속 어둑어둑해지는 몸으로 괴괴한 저녁을 맞고 있는 누군가를 생각한다. 세상에 아무리 화내도 그의 실핏줄은 캄캄하고 세상이 아무리 요란해도 그의 귀엔 텅 빈 바람소리뿐이다.


어제 첫 발인이 시작된 뒤, 오늘도 희생자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표정 잃고 망연자실한 모습을 보았다. 한줄기 바람에 준비 안된 푸른 잎들이 날려가듯 생로병사로 이어지는 삶의 끝을 채 못 보고 저 하늘로 날아가버린 그 사람. 그 사람이 남긴 더딘 슬픔은 이제야 겨우 발을 떼고 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슬픔이라는 건 생활에서 멀리해야 할, 기쁨이나 좋은 것에 비해 그렇지 못한 것으로 배우거나 알고 있다.


슬퍼하지 마, 이거 먹고 잊자, 저거 하면 슬픔을 좀 잊지 않을까?


지내보면 알겠지만 이렇게 한다고 해서 마음에 들어온 이 더딘 슬픔이 잊어지지 않는다. 슬픔은 꼭 더디게 오고 그렇게 마음을 점령한 슬픔이 쉽게 빠져나가지 않는다. 그러나 이 슬픔의 감정을 몹쓸 것으로 간주해서는 안된다. 기쁜 감정이 행복한 것은 슬픔을 느끼기 때문이다.


'인사이더 아웃'에서 슬픔이는 가만히 곁에 있어준다. 그리고 조용히 이야기를 들어주고 한 번 안아준다.


이번 사태에, 또는 누군가의 영원한 부재 때문에 슬프다면 열심히 슬퍼하자.

그건 인간이라는 증거니까.

그렇다고 덜 아프고, 더 아픈 것을 비교해서는 안 된다.

슬픔은 강요받아서는 안 된다.

랑하는 이의 부재 때문에 오는 슬픔이라면 더디게 온다.

그래야 한다.

그래야 슬픔 덕분에 부재한 존재를 오랫동안 느끼니까.




마이클 잭슨의 얼쓰 송 https://youtu.be/XAi3VTSdTxU 영상출처: Michael Jack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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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 라디오를 듣는데 날이 추워져서 집 정리를 하던 중에 크리스마스트리를 꺼내서 설치를 해버렸다는 사연을 들었다. 이 사연도 일주일 전의 일이다. 일찍부터 설치해서 길게 크리스마스 기분을 느끼고 싶다는 거였다. 이런 마음은 보통 어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 어른들 중에서도 아직 아이의 마음을 놓치지 않고 있는 어른들이 그렇다. 그런 어른들이 크리스마스의 기분을 길게 끌고 가고 싶은 것이다. 라디오를 들으며 어쩜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월 중순이 지나면 나는 일하는 곳에 캐럴을 틀어 놓는다. 빙 크로스비, 넷 킹 콜, 루드 밴드로스, 팻 분, 머라이어 캐리 등 오래된 캐럴을 들으면 거짓말처럼 따뜻하다. 오래된 캐럴이 아니라 새로운 캐럴을 듣고 싶어도 언젠가부터 캐럴은 새롭게 잘 나오지 않는다. 시즌이 되면 매년 내놓았던 때가 있었다. 아무래도 겨울에는 크리스마스가 있고 시즌이 되면 그 예전을 떠올리게 된다. 오래된 캐럴은 하이얀 털로 품속에 들어있는 기분이다. 빙 크로스비와 팻 분은 서른 살 가까이 차이가 나는데 팻 분은 아직 살아있다. 개인적으로 이 두 사람의 캐럴이 주는 따뜻한 기분이 참 좋다.


대학생 때 자취를 했다. 그때에도 나는 11월부터 크리스마스 기분을 내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뭐야? 벌써?라고 했지만 막상 같이 분위기를 타곤 했다. 일찍부터 나의 자취방과 우리가 자주 모이는 곳에 장식을 미리 해놓고 캐럴을 듣곤 했다. 크리스마스가 되기 전에 학기가 끝나고 모두가 집으로 갔지만 그때 우리는 크리스마스를 같이 보내고 집으로 가자,라고 해서 자취를 하는 아이들 모두 남아서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게 되었다.


느슨하게 해 놓은 장식도 촘촘하게 바뀌어 가고 본격적으로 캐럴을 매일 들으며 크리스마스 기분을 시즌 내내 느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기 전까지 매일 밤마다 맥주를 홀짝이며 우리는 희희낙락했다. 우리는 식영과, 건축과로 이루어졌는데 보통 매일 모이면 10명 가까이 되었다. 게 중에는 커플도 있었다. 걔네가 커플이 된 계기가 둘이 썸을 탈 때 내가 나의 자취방을 그 두 사람에게 내주었다. 그래, 어디 한 번 둘이 밤새도록 잘해봐,라고 해서 커플이 되었고 왕왕 자취방을 빌려주기도 했다. 이 부분도 지금의 나를 생각하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방을 그대로 내주다니, 맙소사다.


같은 과 친구 중에 술만 취하면 집으로 가지 않고 나의 자취방에서 하룻밤 자고 가던 놈이 있었는데 오전에 일어나면 깨끗한 나의 팬티를 입고 갔다. 근데 그 녀석은 나보다 덩치가 두 배가 커서 한 번 입고 세탁해서 나에게 되돌려주었지만 헐렁해져 버리는 일이 꽤 있었다. 나의 자취방에는 생활의 냄새는 소거되어 있었다. 나는 집에서 음식을 해 먹는다던가, 술을 마신다던가 그런 건 없었다. 음반이 조금 있었고 소설책이 조금 있을 뿐이었다. 커플 녀석들은 나의 자취방을 이상하게도 좋아했다.


그렇게 크리스마스이브가 되었다. 이브가 되었다고 해서 딱히 그 전날과 다를 건 없지만 분위기만은 최고조였다. 맥주가 가득했고 크리스마에 어울리는 음식을 준비하려고 여자애들과 우리는 분주했다. 주방에서 뭔가를 하려고 하는데 나의 자취방에서 커플로 탄생한 이 녀석들이 헤어진 것이다. 그날, 하필 그날 헤어진 채 여자애가 울면서 우리에게 매달렸다. 슬슬 불안했다.


식영과 애들이라 케이크를 만들 줄 알아서 외국에서처럼 같이 케이크도 만들고 쿠키도 굽기로 했는데 여자애들은 우는 그녀를 달래기에 바빴다. 그러다 점점 시간이 흘러 흘러 결국 케이크 만들기는 물 건너 가버렸다. 우리가 전부 모였을 ㄷ대는 술과 술과 술, 술만이 상위에 가득했다. 첫사랑의 아픔은 참 힘들다. 처음은 뭐든 정말 이상하다. 신은 인간에게 왜 이런 시련을 줄까. 그 시련에 우리까지 왜 집어넣는 것일까. 사랑 ㄷ대문에 행복한 기억은 왜 이렇게나 짧고 좁고 얕고 옅을까. 처음이 주는 기쁨은 크지만 슬픔 역시 감당하기 힘들다. 커플 중에 그 녀석은 집으로 가버렸다.


이제 음식을 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했다가 그 시련의 화살은 우리에게 까지 닿았다. 따가웠다. 하지만 우리는 주점을 하면서 부추전을 만들어서 팔았던 경험이 있다. 그래, 밀가루가 잔뜩 있고 고기도 있고, 냉장고에 부추도 가득 있으니까 부추전을 만들어 먹자. 그렇게 해서 크리스마스이브에 부추전을 잔뜩 부쳤다. 기름 냄새가 너무나 가득했다. 부추전이 맛있을까, 생각했지만 어떻든 만들어 놓고 나니 아이들은 젓가락으로 신공을 펼쳐 무슨 맛도 모른 채 부추전을 홀라당 먹어 치웠다. 부추전은 막걸리와 어울린다지만 맥주와도 잘 어울리고 소중하는 궁합이 잘 맞았다.


한쪽에서 전 부치고, 부쳐 내놓은 부추전은 바로바로 없어지고. 부추전을 구워 먹는 묘미다. 그때에도 캐럴은 빙 크로스비와 팻 분, 머라이어 캐리였다. 창문 하나 열면 너무나 추워서 오들오들 거릴 정도로 찬 바람이 불지만 창문 안쪽에서 우리는 아주 즐겁고 재미있게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만끽했다. 소풍 김밥처럼 그런 시간도 인생에서 아주 잠깐이다. 행복한 순간은 너무나 빨리 지나가 버린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의 행복한 감정을 가지고 여러 날들의 불행한 날들을 견딜 수 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추억을 많이 만들어 놓으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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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원작자 카포티는 자신의 소설이 영화가 된다고 했을 때 주인공으로 메릴린 먼로를 추천했고 그녀가 아니면 허락할 수 없다고 했다.

영화 속에서 보이는 그녀의 퇴폐미를 걷어내면 순수하고 맑은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얼굴만 예쁜 것이 아니라 머리까지 똑똑하다. 자존심 강한 카포티는 영화사의 설득에 결국 허락을 하고 말았지만 메릴린 먼로의 진가를 아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이었다.

블론드 이 영화는 ‘좀비’로 우리에게는 좀 더 유명한 조이스 캐럴 오츠의 소설을 가지고 영화로 만들어서 그런지 온통 먼로의 불행하고, 불행에, 불행의 연속인 영화다. 오물 같은 어머니에게 마저 사람의 취급을 받지 못하다가 결국 연예계의 삶이란 불행의 끝을 보여주는 똥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불행이 좀 잠들면 불운이 그 자리에 파고들고 불운이 불러가면 그 자리에 불행이 들어온다. 영화 속에는 진짜 같은 가짜가 마치 진짜인 듯하게 사람들로 하여금 먼로를 여기게 만들고 있다.

그래서 이 영화의 감독은 먼로의 불행으로 돈을 만지려는 그런 불순한 생각이 보이는 것 같다. 한 마디로 기분이 아주 더러워지는 영화다. 이런 영화가 세기를 놀라게 했던 먼로를 향한 경외를 보여주기나 할까.

세기에 나올지 말지 한 스타의 삶을 고작 미국의 연예인 고장에서 한낱 망가진 삶으로 나타낸 영화가 무슨 전기 영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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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월요일. 10월 31일)의 하늘과 집 근처의 풍경은 그야말로 달력 속의 한 모습처럼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차들도 다니지 않아서 한참 서서 구름과 하늘과 붉게 물들어 가는 가로수의 모습을 눈으로 담았다. 자연은 어제 무슨 일이 있었어?라고 하는 것처럼 대수롭지 않은 듯 인간의 마음과는 다른 모습으로 인간 앞에 나타났다. 마치 약 올리기라도 하듯이 아주 밝은 얼굴을 한 채 나타났다. 너무 맑고 화창한 날이 어쩐지 밉기만 하다. 나는 겨울을 담배 연기만큼 싫어하지만 겨울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계절이 또 한 번 얼굴을 바꾸려고 한다. 이런 시기에는 옷 입기가 참 애매하다. 조금만 두꺼운 옷을 입고 나오면 더워서 등에서 땀이 나고, 조금만 얇게 입고 나오면 아침저녁으로는 으슬으슬 춥다. 저녁에는 조깅을 하기 때문에 그 후에는 문제가 없다. 어떻든 조깅을 한 후에는 무척 더워서 돌아오는 길에 아아를 한 잔씩 마시고 있다. 그것도 1000cc. 어떻든 요즘도 매일 저녁에 8킬로미터에서 10킬로미터 정도를 달리고 있다. 반환점에 가면 아무튼 땀이 엄청난다. 아마 패딩을 일찍 꺼내서 입고 달려서 그럴 것이다. 그래서 반환점에서 근력 운동을 한 20분 정도 하는데 녹초가 되어 버린다.


조깅을 하려고 나서기 전까지는 아주 하기 싫은 마음이 커다랗게 부릉부릉 시동을 거는 날씨다. 뇌의 한쪽은 저녁에는 조금 쌀쌀한 게 어딘가에 들어가서 등을 구부리고 책이나 보면서 진하고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마시기를 권한다. 그 경계에서 매일 고민한다. 그러나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일단 강변으로 나서면 슉슉 하며 매일 달리는 패턴으로 숨을 쉬며 달려간다. 달리고 난 후 5분 정도만 지나면 후끈후끈하다. 그러면 이어폰으로 들리는 음악을 들으며 이것저것 잡생각을 하거나 아무 생각 없이 앞만 보며 달리게 된다. 가을과 겨울의 경계에서 고민을 하는 건 나뿐만이 아닌 것 같다. 그런 생각이 드는 건 일주일 전에 비해 조깅 코스에 거의 사람들이 없다. 이제 추운 겨울이 지날 때까지 동면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많다.


며칠 전에는 독감 예방 주사를 맞았는데 절대 조깅 금지라고 해서 그날은 달리지 않았다. 코로나가 한창 기승일 작년에는 독감 예방 주사는 안 맞았다. 그 이전에는 매년 계속 맞았는데 맞은 날에도 지치지 않고 조깅을 했었다. 목욕만 하지 않았지 실컷 달렸다. 그런데 작년 화이자 백신 1차를 맞고 후유증을 앓고 난 뒤로는 병원에서 하지 말라는 건 하지 않고 있다. 그때 오른팔에 맞았는데 팔을 들 수 없을 정도로 아팠는데 그게 하루도 쉬지 않고 몇 개월을 갔다. 타이레놀을 먹고 파스를 붙이고, 뿌리고 매일 주물러도 몇 개월을 팔이 떨어져 나가는 고통을 겪었다. 이 이야기도 여러 번 적어서 민망하지만 나 백신 1차 맞고 후유증을 앓았소,라고 말하고 싶다.


지금은 다 나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이후로 미는 힘은 괜찮은데 당기는 힘을 줄 수가 없다. 팔 굽혀 펴기는 괜찮은데 턱걸이처럼 당기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처음에는 이것 때문에 한 5분 정도 고민을 했다. 계속되던 것이 안 되게 되었을 때 오는 현타의 대미지가 컸는데 뭐 어때, 미는 힘이라도, 같은 생각을 하고 그냥 받아들이고 나니 괜찮아졌다. 그런 건 사는데 큰 문제가 아니다.


나는 아픈 게 정말 싫다. 아플 기미가 보이는 것도 아주 싫어한다. 그래서 감기 기운이 저 끝에 왔다 싶으면 미리미리 약을 먹어서 안 걸리게 하는 편이다. 어릴 때는 아프면 엄마에게 안겨 어리광도 부리고 보살핌을 받았고, 학창 시절에 아프면 조퇴하고 집에 일찍 갈 수도 있고, 역시 아파서 누워있으면 이것저것 맛있는 음식도 일어나자마자 먹을 수 있었지만 어른이 되고 난 후에 아프면 나만 손해다. 무엇보다 아픔 그 자체가 너무 싫다. 어떻든 그동안 독감 예방주사 때문인지 독감에 걸린 적도, 조깅 덕분인지 코로나도 걸리지 않고 무사통과를 했다.



여기는 반환점


분명 흑백사진인데 흑백사진 아닌 것처럼 보인다. 2022년인데 2Q22년처럼. 흑백사진은 컬러 사진이 갖지 못하는 매력이 있다. 윤주영 사진작가의 어머니 시리즈를 보면 아주 드라마틱하다. 사진 한 장인데 사진 속 인물의 역사가 필름처럼 촤르르 지나가는 것 같다. 유진 스미스도, 앙리 카르티에 브레숑도, 로베르 두아노의 사진들을 보면 정말 흡입력이 강하다. 흑백이라 그 장점이 드러난다. 그러나 흑백사진은 흑과 백으로만 이루어져 사실 담아내기가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다.



흑백으로 캔디드 느낌을 내 봤다


로베르 두아노는 피카소의 친구라서 피카소의 사진도 많이 담았다. 아주 익살스러운 사진들이 있는데 좋다. 아이들을 담은 사진도 많아서 보고 있으면 흐뭇하다. 두아노는 그런 행복하게 보이는 사진들을 많이 담았는데 가장 유명한 사진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보이는 사진이 바로 두아노가 담아낸'시청 앞에서의 키스’다. 이는 너무나 유명해져 버려 2017년에는 ‘파리 시청 앞에서의 키스: 로베르 두아노’라는 영화까지 나왔다.


어쩌면 이 세상은, 지구는, 이 세계는 이 사진을 기점으로 해서 ‘사랑이라는 것은 키스'라는 방정식이 성립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고작 사진 한 장인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 고작 사진 한 장이 전 세계 사람들이 자신의 잃어버렸던 사랑에 대한 꿈을 찾게 만들었다. 너무나 자연스럽고 사랑스럽고 행복해 보이는 시청 앞에서의 키스는 사실 연출이다.


두아노의 연출에 의해서 만들어진 사진이었다. 당시에는 두아노가 저널리스트였다. 라이프지에 기고하기 위해서 회사의 청탁을 받아서 연극을 공부하던 젊은 남녀에게 약간의 돈을 주고 시청 앞에서 연출을 시켰다. 이 사진이 유명해지고 시간이 흘러 사진 속의 주인공이 자신이라며 나타나서 돈을 요구하는 해프닝이 많았다. 사실이 알려지자 실제 주인공 프랑수와즈는 할머니가 되어 원본을 들고 나타나서 증명을 하기도 했다. 검색을 해서 찾아보면 이런 이야기들이 많다. 두아노는 사실 그전에 연출된 사진이라고 잡지사에 말을 했지만 대중은 너무 앞서 나가 있었다. 그러니까 대중은 믿고 싶은 것을 진실이라고 생각을 해버리는 것이다.



사진이 왜 이렇게 작아졌는지 모르겠음


길고양이도 계절의 죽음을 아는지 이제 마지막 따뜻한 햇빛을 받을 테야, 라는 듯 따뜻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있다. 사람들이 바로 앞을 지나가도 흥, 하며 할 테면 하라지, 같은 마음으로 햇빛을 받고 있다. 요즘은 우리 동네에서 길고양이들이 로드킬을 당한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코로나 전까지만 해도 해안도로에는 3일에 두 번 꼴로 길고양이가 배가 터진 채 죽어 있는 모습을 봤었다. 하지만 요즘에는 로드킬 당한 고양이가 보이지 않는다. 아주 좋은 현상이다.



이 꼬마 자동차 붕붕 두 대는 이제 할 일을 다하고 화분 대용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두 대는 친구일까. 얼마 전에 강호동이 나와서 르세라 핌의 사쿠라와 이야기를 하는 유튜브를 봤는데 강호동이 사쿠라에게 우리 친구 아이가,라고 했더니 사쿠라가 우리는 5년에 두 번 만났는데 친구일까요?라고 했다.


일전에 10년 만에 찾아와서 우리 친구니까 친구로서 나에게 뭔가를 부탁을 했다. 우리가 친구일까? 고등학교 때야 같이 지냈지만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연락 한 번 하지 않고 지내다가 이제 와서 우리 친구잖아?라고 하는 게 뭔가 이상했다.


사쿠라는 강호동에게 친구는 어디까지가 친구라고 하는지 물었다.


우리는 친구를 좋아한다. 죽고 못 사는 친구도 있고 친구 덕분에 웃고, 친구 때문에 울기도 한다. 친구가 없으면 나 죽는다고 하는 사람들도 많다. 친구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친구일까. 학창 시절에는 친구가 분명하게 있다. 매일 교실에서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밥을 같이 먹고. 친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성인이 되고 어른이 된 후에는 그때만큼의 생각을 가지기 힘들다. 만나고 연락하는 문제보다 친구를 친구로 얼마나 생각하느냐에 대해서 접근해야 한다. 아내가 친구를 싫어할 수도 있고, 반대로 아내가 자신보다 친구를 더 좋아할 수도 있다.


김영하는 “살아보니 친구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라고 했는데 나는 그 말에 전적으로 동감하는 편이다. 잘못 생각했다. 친구를 훨씬 덜 만났으면 내 인생이 더 풍요로웠을 것 같다고 김영하 작가는 말했다. 쓸데없는 술자리에 너무 시간을 많이 낭비했다. 맞출 수 없는 변덕스럽고 복잡한 여러 친구들의 성향과 어떤 남다른 성격, 이런 걸 맞춰주느라 시간을 너무 많이 허비했다. 차라리 그 시간에 책이나 읽을 걸. 잠을 자거나 음악이나 들을 걸. 그냥 거리를 걷던가. 결국 모든 친구들과 다 헤어지게 된다. 고 했는데 내가 딱 그렇다.


나는 회사를 다닌 적도 없고 모두가 아무 때나 들어올 수 있는 곳에서 일을 해서 그런지 한 동안 친구들이 뭔가 일이 있거나, 술 생각이 나거나, 여자와 싸우거나 하면 그저 문을 열고 들어 와서 일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술집으로 갔다. 물론 그때는 나 또한 술자리가 좋아서 열심히 이야기를 듣고 술을 마셨다. 정말 시간을 그냥 허비한 샘이다. 나는 분명 소설을 좋아하는데, 좋아하는 소설은 혼자서 읽어야 하는데 잠을 자는 시간 빼고는 소설을 읽을 수 없었다. 정말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은지 늘 주위에는 친구들이 북적거렸다. 그 사실을 잘 알 수 있는 것이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친척들이 3일 동안 친구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이 오는 것이냐며 물었다. 나도 잘 알 수가 없었다. 정말 장례식장이 북적거렸다.


그러나 지금은 전부 연락을 하지 않는다. 나도 글을 쓰고 싶어서, 소설을 한 번 적고 싶어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가 저녁 상을 물리고 밤에 조금씩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잠을 몇 시간 못 잤고 건강도 별로 였다. 그러나 친구들은 이전처럼 매일 찾아왔고. 그래서 슬슬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다. 소설을 쓰고 싶다고 해봐야 전혀 들어줄 것 같지 않아서 다단계를 한다고 진지하게 말을 했다.


그리고 저녁에는 친구들을 점점 만나지 않고, 약속도 하지 않고, 전화도 받지 않아서 그들은 내가 정말 다단계에 빠진 것 같다며 나를 피했다. 그러면서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나는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어 본 적이 없다. 물론 연락도 내 쪽에서 먼저 하지 않았다. 어쩌다 보니 전시회를 몇 번 가지게 되었고 밀리의 서재로 전자출판도 하게 되었고 그래픽으로 디자인을 하고 그림도 그리다 보니 느닷없이, 10년, 15년 만에 자신의 아이를 데리고 와서 좀 뭔가를 부탁하기도 했다.


모든 선택의 밑바탕에는 포기가 있다. 친구와의 만남을 선택함으로써 우리는 자신을 들여다볼 시간과 취향에 귀 기울이는 시간 그리고 영혼을 풍요롭게 만드는 시간을 잃는다. 김영하 작가는 20대에 너무 많은 시간을 들여 친구를 만난 것을 후회한다고 전했다. 습관적으로 약속을 잡거나 심심할 때 그저 친구와 연락하는 게 습관이 되었다면, 지금 자신의 내면을 채울 시간을 서서히 잃고 잇는 것과 다름없다고 했다.


그러나 친구가 있어서 자신이, 자기 자신이 채워진다면 친구는 분명 필요하다. 나는 김영하 작가의 말처럼 많은 친구들이 있었고 너무 많은 시간을 친구들과 보낸 것을 후회한다.



저녁에 온도가 떨어져 사람들이 안 나옴


야, 너 혼자 그렇게 밝기 있기 없기


요즘은 조깅을 하고 돌아올 때면 저기 저 위에서 혼자서만 밝게 빛나는 별을 매일 본다. 그리고 매일 한 컷씩 담아본다. 너 혼자 너무 밝게 빛나지 말길, 너 혼자 너무 빛나며 울지 말길,라고 속으로 말을 하면서 말이다.


너무 더워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나는 다리가 너무 굵은데 엘베 샷에서는 늘 날씬하게 다리가 나와서 좋다. 자꾸 찍자!


파란 양말 신어서 한 컷


오늘의 선곡은 그린 데이의 9월이 끝나면 깨워주세요 https://youtu.be/FUDNfZhAvCI영상출처: 희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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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2-11-01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그럼 실제는 저런 각선미가 아니란 말씀입니까? 아, 이런ᆢ
저도 화이자 맞았는데 전 2차에만 좀 그런 느낌이 있었지 대체로 나쁘진 않았슴다. 근데 교관님 굉장하셨네요. 근데 4차는 안 맞고 있습니다. 모쪼록 무탈하게 겨울이 지나가 주길 바랄뿐입니다.ㅠ

교관 2022-11-02 11:46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 저의 각선미에 관심을 이렇게나요 ㅋㅋㅋㅋ 저기 사진에도 다리는 아주 굵게 나왔는데요 ㅋㅋㅋ
 


도시락 컵라면을 오랜만에 먹었다. 맛이 옛날에 먹던 맛 그대로 있었다. 가격도 다른 컵라면에 비해, 제일 작은 튀김우동 컵라면이나 사리곰탕 면에 비해서 저렴했다. 작은 컵라면도 이제 천백 원이나 하는데 도시락 컵라면은 구백 원이 채 되지 않았다.


도시락 컵라면은 고등학교 때 정말 질리도록 먹었다. 일주일에 3, 4번은 도시락 컵라면에 밥을 말아서 먹었을 것이다. 나는 고등학교 때 독서실에서 한 달 정도 지낸 적이 있었다. 물론 공부를 하기 위해서 독서실에서 먹고 자고 한 것은 아니고 그저 버스를 타고 북적북적 학생들 틈에 끼어 40분 이상 등하교를 하는 것이 싫어서였다. 지금의 나로서는 도저히 생각도 할 수 없고 지금의 나와는 너무나 달랐다.


내가 다니는 고등학교는 여러 학교가 같이 있는 곳에 있어서 수많은 학생들이 우글우글했다. 게 중에는 김태희가 나온 여고도 있었다. 나는 사진부로 우리의 아지트가 김태희가 나온 여고의 뒷골목에 있는 투다리였다. 단속이 뜨면 투다리 이모가 주방에 우리를 숨겨주었다.


아무튼 등교를 위해 아침에 버스를 탔는데도 여러 학교의 아이들이 바글바글 하니까 저녁의 냄새가 났다. 여고가 둘, 남고가 둘, 중학교가 몇 개나 붙어 있어서 버스를 잘못 타면 좋은 냄새 대신 그런 홀아비 청소년의 냄새를 맡으며 40분을 으 한 상태로 가야 한다. 하교는 좀 달랐지만 비슷했다. 그때 나에게서도 이런 냄새가 나는 거 아니야? 하며 독서실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독서실 생활이 더 한 냄새를 풍기게 만들었고 독서실에서 잠다운 잠은 전혀 자지 못했다. 그래서 잠은 주로 수업시간을 이용했다.


생각해보니 공부를 한 기억이 없다. 부모님을 잘 도 속였다. 공부한답시고 독서실로, 일요일에 학교로. 돈 좀 주세요.라고 해서 얼마씩 받은 돈을 아껴서 필름을 구입하고, 사진을 찍고, 선배에게 맞고, 점심시간에 놀고, 쉬는 시간에 먹고, 수업 마치면 교류하는 여자 학교 애들과 명목상 만나서 놀고. 공부를 했다는 기억이 전혀 없다. 그래도 미술 시간만큼은 또 열심히 해서 미술 점수는 잘 받았지만 그건 다 중학교 시절 얘기다. 고등학교, 특히 인문계 고등학교에서는 미술 시간 따위 자율학습이거나 없다.


친구 중에는 밥만 도시락으로 싸오는 놈이 있었다. 아주 큰 도시락 통에 밥만 넣어서 온다. 밥만 들고 학교에 가면 뭐든 어떻게 된다는 주의였고 맞아떨어졌다. 반찬을 집어 가도 화를 내는 아이들은 거의 없었고, 그 녀석의 밥을 몰래 먹어도 그 녀석 또한 신경도 쓰지 않았다.


내가 독서실에서 먹고 자는 동안 학교 매점에서 도시락 컵라면을 두 개 사서 하나는 그 녀석을 주고 그 녀석은 밥을 반 덜어서 나의 도시락 컵라면에 넣어 주었다. 그렇게 자주 먹었다. 도시락 컵라면에 밥을 말아서 먹을 뿐인데 점심시간에 먹는 그 맛은 정말 맛있었다. 먹고 나서 점심시간에 뭐 좀 놀고 나면 배가 금방 꺼졌다. 그때의 사진을 보면 말라도 참 말랐다. 아이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면 당최 살이 찐 아이들이 없었다. 그러니까 그만큼 공부와는 참 거리가 먼 고등학교 생활을 했다는 말이다.


지금은 가만히 앉아서 책 보는 게 참 좋은데 그때는 공부하면 왜 그렇게 질색팔색을 했을까. 자율학습시간에도 제대로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고 앉아 있던 적이 별로 없었다. 무서운 선생님이 야자 감독을 할 때에도 아이들과 눈이 맞으면 뭐 어때, 라며 간도 크게 도망을 갔다.


분명 다음 날에 걸려 엉덩이를 몽둥이에 내줘야 하는데도 그때는 헤헤 거리며 목숨 걸고 야자를 도망쳐 간 곳이 고작 투다리나 오락실이나 교류하는 여고의 사진부 암실이었다. 투다리에서 생맥주를 실컷 마시고 나와서도, 오락실에서 열심히 오락을 하고 나와서도, 사진부 암실에서 시답잖은 사진 이야기를 하다가 나오면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도시락 컵라면을 먹었다.


이상하다, 다른 컵라면도 먹을 법 한데 모두가 약속이나 한 듯 도시락 컵라면이었다. 그것에 여자 남자 할 것도 없었다. 오랜만에 먹어본 팔도 도시락은 뚜껑에 쓰여 있는 대로 세월이 지나도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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