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면 찾아서 보게 되는 폴라 익스프레스. 폴라 익스프레스를 극장에서 처음 본 것이 아니라 디지털영화관에서 봤다. 그러니까 시설이 좋은 비디오방 같은 곳에서 봤다. 요즘은 롯데시네마도 비디오방만큼의 규모로 영화를 볼 수 있는 곳이 있다. 대략 스무 명 정도가 앉아서 보는 상영관인데 티켓 팅 하는 곳도 로컬 카페의 카운터처럼 되어 있다.


처음 폴라 익스프레스를 봤을 때 너무 좋아서 한 번도 보고 나오니 새벽이었다. 생각해보면 시설이 좋았다고 해도 비디오방 같은 곳의 입구는 좁고 구불구불 미로 같은 복도에 전부 밀실 구조라 불이 나면 사망이다. 요즘 일본의 좋은 인터넷룸 같을지도 모르겠다. 일본의 어떤 인터넷 룸은 시설이 아주 좋다. 침대도 있고 컵라면도 끓여 먹을 수 있다. 기존의 인터넷 룸은 천장이 뚫려 있고 파티션이 칸막이로 되어 있고 한 사람이 겨우 앉거나 누울 수 있는 구조인데 요즘은 그런 시설에서 벗어난 곳들이 있다. 에어컨도 달려 있고 무엇보다 하룻밤에 한국 돈으로 이만 원 정도 하기 때문에 여행객들이 즐기기에도 좋다. 하지만 역시 불이 난다면 꼼짝 마라다.


소방훈련을 받으면서 몸으로 느끼게 된 사실은 음식점에서 식사를 할 때 출입구와 가까이 있는 자리가 좋다는 것이다. 괜히 분위기 탄다고 구불구불 저 안쪽 깊은 자리는 피하는 것이 좋다고 소방대원들은 훈련을 할 때마다 말을 하고 있다.


어쨌거나 겨울이다. 공기가 달라졌다. 가을의 그 느낌에서 벗어났다. 겨울에는 폴라 익스프레스를 봐야 한다. 폴라 익스프레스 같은 기차를 한 번 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어린 시절에는 늘 했었다. 그때에는 폴라 익스프레스가 없으니 만화 속 기차나 말괄량이 삐빠가 모는 그 희한하고 요사스러운 자동차를 타고 싶었다. 삐삐가 아무거나 연로 통에 집어넣으면 막 달렸고 슈펑크를 찾았던 삐삐와 토미, 아니카가 접착제 아저씨에게 받은 접착제를 자동차에 넣으니 자동차가 슈퍼카가 되어 속도가 엄청났다. 야호.


이는 후에 백 투 더 퓨처에서도 맥플라이를 드로리안에 태우고 브라운 박사가 연로 통에 아무거나 집어넣는다. 그리고 하늘로 슝 가버린다. 삐삐도 양손으로 날갯짓을 하니 차가 공중으로 붕 떠서 날아간다. 차는 오픈카지만 차 안에 있으면 무서운 외부와 단절이 될 것만 같은 그 기분이 폴라 익스프레스에도 있다.


조카가 어릴 때 집 거실에 텐트 같은 것을 치고 그 안으로 깊게 들어가서 나오지 않는 심리와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미드 ‘이블’에서도 주인공 크리스틴의 네 명의 꼬꼬마 아이들이 있는데 무서운 영화를 볼 때 꼭 이렇게 텐트처럼 이불을 치고 그 속에 네 명이 욱여 들어가서 꼼지락꼼지락 영화를 본다. 그런 기분을 어른이 되어서도 폴라 익스프레스를 보면서 느낄 수 있다. 밖에는 몹시 추운 겨울의 눈이 펑펑 내리고 있지만 폴라 익스프레스 안은 너무나 따뜻하고 아늑하다. 게다가 아주 맛있는 핫코코아까지 제공된다. 안과 밖, 추위와 따뜻함, 무서움과 아늑함이 기차의 창을 사이에 두고 공존한다.


자동차를 처음 장만하고 겨울에 집 앞 바닷가를 돌면서 밤바다의 사진을 꽤 찍었다. 여자 친구에게 카메라 작동 법을 알려주고 차에서 내리지는 않고 창문을 조금 열어서 조수석 쪽에 난 바다를 야금야금 사진으로 담는다. 조리개 값이라든가 셔터 스피드 같은 수치를 조절해서 카메라가 움직이지 않게 고정하고 어두운 밤바다에서 빛을 찾아 빨아 당길 때까지 기다리는 맛이 있었다. 겨울의 밤바다에는 칼바람이 불고 날이 너무 춥지만 우리는 무릎에 담요를 덮고 차 안에는 히터가 나오기 때문에 패딩 같은 외투는 벗어서 뒷자리에 있었다. 차 안에서 커피를 홀짝이며 밤바다를 카메라에 담고 다 찍었다 싶으면 또 조금 바다를 타고 장소를 이동한다. 그런 느낌이 좋았다.


폴라 익스프레스를 타는 순간 외부와 단절된 세계로의 모험이 시작된다. 신나지만 주인공은 폴라 익스프레스 안에서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 의심을 한다. 나 또한 초등 2학년 때 교실에 크리스마스 장식을 맡아서 했는데 나는 그만 장식 중에 주머니에 들어가는 작은 산타 인형을 한 마리 들고 와버렸다. 훔친 것이다. 나는 이제 큰일 났다. 나는 산타 할아버지에게 혼이 날 것이다. 나는 초등 2학년 때까지 산타를 믿고 있었던 것이다. 맙소사다.


믿음이라는 건 인간사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 요즘에 많이 든다. 믿음이 없인 하루도 지낼 수 없는 시대에 와 있는 것 같다. 내가 속한 회사, 상사, 동료, 친구,  종교, 권력자 그리고 가족에 대한 믿음이 깨진다면, 특히 나에 대한 믿음이 없어지면 이 세상은 지옥 그 자체일 것이다.


폴라 익스프레스에는 눈을 뗄 수 없는 장면이 많지만 개인적으로 압권은 마지막에 스티브 타일러가 나와서 노래를 부른다는 것이다. 스티브 타일러는 에어로스미스의 보컬이다. 입큰 로커로 치면 믹 재거도 있고, 배철수도 있지만 스티브 타일러가 제일 뭐랄까 비주얼 적으로 멋있다. 개인적인 생각이다.


싸이가 미국 진출에 성공하며 여러 할리우드 셀럽들과 사진을 같이 찍었는데 나는 스티브 타일러와 함께 사진을 찍은 게 참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티브 타일러는 현재 74살이지만 너무 멋있다. 그 정통 미국적인 록 사운드를 하는 밴드의 보컬에, 주렁주렁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스타일과 헤어, 평생 살도 안 찌고 그런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니. 놀라움을 만끽하려면 스티브 타일러를 보면 된다.

스티브 타일러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가 리브 타일러다. 리브 타일러의 아버지니까. 에어로 스미스의 명반이라 꼽히는 11집 ‘겟 어 그립’의 노래의 뮤직 비디오에 리브 타일러가 나오면서 수면 위로 떠오른다. 당시 가장 핫 한 배우 알라시아 실버스톤과 함께 ‘크레이지’ 뮤직 비디오에 등장하는데 말 그대로 크레이지 한 영상과 미모로 전 세계를 사로잡았다.


당돌하고 섹시한 여고생 둘이 일상을 벗어나 일탈하는 이야기다. 모든 노래들이 스토리 형식으로 이어지는데 에이로 스미스의 뮤비는 곤센 로즈의 뮤비와 더불어 인기가 어마어마했다. 리브 타일러와 스티브 타일러의 이야기가 기가 막힌데 하려니 귀찮다. 지금은 폴라 익스프레스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또 이 부녀간의 이야기는 검색하면 여러 곳에서 상세하게 해 놔서 찾아보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스티브 타일러가 폴라 익스프레스에서 엘프로 나와서 하드 록을 불러서 개인적으로는 핫 한 장면이다. 그러더니 훗날 리브 타일러는 반지의 제왕에서 진짜 엘프가 되어 버린다. 자꾸 이야기가 샛길로 빠지기 때문에 여기서 그만하고 겨울이니 폴라 익스프레스를 보자, 뭐 그런 이야기.


그래서 오늘의 선곡은 폴라 익스프레스의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를 올리고 싶었으나 내적 갈등으로 인해 결국 에어로 스미스의 크레이지를 ㅋㅋ https://youtu.be/NMNgbISmF4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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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김치를 금방 담그는 자리에는, 특히 김장김치는 담그는 그 자리에는 수육이나 굴이 있다. 그래서 그 옆에서 아이들은 야금야금 받아먹는 재미가 있다. 나는 이상하게도 금방 담근 김치를 굴이나 수육이 아닌 그냥 밥과 함께 먹는 맛을 좋아한다.


익은 김치에게서는 절대 끌리지 않는 곡기의 유혹이다. 배추에 아직 양념이 스며들지 않고 겉에서 맴돌지만, 그 겉도는 맛이 밥과 함께 먹고프게 한다. 그래서 김치를 바로 담그면 다른 반찬은 필요 없다. 김장김치를 갓 담가 먹을 때에도 수육도 생굴도 전혀 필요 없다.


넌 참 특이하구나, 이 말을 어릴 때에도 들었는데 지금도 가끔 듣는 말이다. 이 말이 생각이 많아진 어른이 되었을 때에는 넌 참 이상하구나, 로 받아들였다. 어떻든 나는 특이하게도 갓 담근 김치에는 밥이 필요했다. 이렇게 밥에 척 걸쳐 먹는 맛이 좋다.


이런 맛은 김치를 갓 담갔을 때만 가능한 맛이다. 여기에 끼어들 수 있는 건 맥주뿐이다. 그 외에는 어떤 것도 서번트로 낄 수 없다. 식사를 할 때 반드시 자리에 앉아서 먹도록 우리는 배웠다. 그런데 나는 위에서 말한 대로 특이하게도 식탁에 밥과 김치만 꺼내 놓고 일어서서 김치를 밥에 말아서 후딱 먹는 걸 좋아한다. 일어나서 빠르게 먹으면 뭐가 어떻니 같은 말을 듣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앉아서 먹을 때보다 일어나서 먹는 게 위에 훨씬 덜 부담이지 않을까 싶다.


영화 속에서도 김치와 밥으로 아주 맛있게 먹는 장면이 있다. 영화 '똥개'다. 김치를 막 담그고 있는데 대득이가 쳐들어 온다. 영화 속 대사가 이렇다.

https://youtu.be/E25gzcJnLMk <= 영화 똥개 김치 먹방 영상출처: 돼지감자


똥개: 뭐고?

대뜩이: 니가 똥개가 난 대뜩이다. 니가 선배들이 개 잡아 뭇따꼬 선배들을 개패듯이 패뿟는거 맞나?

똥개: 뭐어?

뚱띠: 니가 하도 잘 친다캐서 실력의 자웅을 겨뤄보러 왔따.

똥개: 나는 싸움 안 한다.

대뜩이: 니는 그래 개판치고도 아버지가 짜바리라가 징역 안 갔다메.

똥개: 뭐라고?

대뜩: 니 엠제이케이라고 아나?

똥개: 그기 뭔데?

뚱띠: 니 맨크로 학교 댕기다가 짤린 아들끼리 맹그른 순수청년봉사단체다. 니가 지면 무조건 가입해야 되고 이기믄 안해도 된다. 우짤끼꼬.

똥개: 느그,,, 점심 무긋나.

뚱띠: (바로) 아직 안 뭇따. 와?

똥개: 그라믄 김치에다 밥 좀 묵고 하자. 어차피 싸움도 힘이 있으야 할 꺼 아이가.

[김치에 밥을 엄청 맛있게 먹는다]

원래 이름이 대뜩이가.

대뜩: 아니 대득이다 한대득. 그래도 그냥 대뜩이가 편하다.

똥개: 엠제이케이? 거 뭔 뜻인데.

대뜩: 으응 잉그리 약자다. 밀양 주니어 클럽



그리고 똥개가 갓 담근 김치를 매워서 땀을 뻘뻘 흘려가며 먹는다. 오직 밥과 김치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맛을 잘 안다. 갓 버무린 김치가 밥과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영화 속에서 똥개가 김치를 담글 때 빨간 고무통에서 양념을 비빈다. 이 빨간 고무통이 정감이 있어서 김치를 담글 때 사용한다고 영화에 나오지만 사실은 음식이 묻으면 안 되는 아주 위험한 고무통이다.


예전에는 마당에서 여럿이 모여 김장을 할 때 큰 빨간 고무통에 김치를 담아서 양념을 버무리고 속을 채웠다. 이 빨간 고무통은 일종의 김장 공정에 빠져서는 안 되는 김장도구였다.


이 빨간 고무통이라는 건 만능이었다. 여름에는 물을 받아 물놀이도 했고, 김장을 담글 때에는 김치를 재우고, 씻고, 버무리고. 하지만 그 당시에는 이 빨간 고무통을 그렇게 사용하면 안 된다는 걸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무지했던 것이다.


열심히 일주일 동안 석탄을 캐느라 먼지 때문에 목이 칼칼한 서민들이여, 삼겹살을 구워 먹어라, 그러면 고기 기름이 먼지를 싹 내려줄 것이다. 우리네 아버지, 어머니들은 그 말을 철썩 같이 믿고 주말이 되면 집집마다 삼겹살을 구워댔다. 석탄의 먼지는 코로 들어가 폐로 가고, 고기는 입으로 들어가 위장으로 가는 것임을. 우리는 그 뻔한 이치를 모르거나 망각한 채 삼겹살의 기름이 몸속의 먼지를 씻겨 줄거라 믿었다.


더 거슬러 올라가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한국군이 돌아와서 고엽제 후유증으로 시달리고 있다. 이는 성석제 소설 ‘투명인간’에 잘 나와 있다. 미군이 던져준 고엽제가 소독이 잘 된다며 머리에 뿌리고 얼굴에 크림처럼 발랐다. 이렇게 하면 베트남에 널려 있는 병균이 죽겠지. 이 철석같은 믿음은 후에 사람을 이유 없이 병균처럼 사망케 했다.


가끔 살균제의 겉면에 살균 100%라고 적혀 있으면 균을 100%로 죽인다는 말인데 그것이 인간에게도 좋을 리는 없다.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살아가지만 종이가 들어갈 그 좁은 틈으로 무지는 들어와서 우리의 삶을 조금씩 망가트린다.


십여 년 전에 친구의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폐암 말기였다. 가족력도 없고, 주위에 담배를 피우는 사람도 없고, 뭔가를 태우는 곳 근처에 살지도 않았다. 느닷없는 죽음이었다. 폐가 암으로 공격받아 검게 점령당하려면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할 텐데. 생각할 수 있는 합리적인 의심은 김장을 담글 때 등장하는 빨간 고무통이었다.


긴 세월 동안 어머니는 빨간 고무통에 김치를 재워놓고 양념을 무치고, 물김치도, 동치미도, 음식의 대량화는 전부 빨간 고무통을 사용했다. 뜨거운 양념도 거기서 버무리고. 그 시간이 몇십 년이었다. 불과 2년 전 KBS 다큐 3일에서도 전통시장에서 순대를 만들 때 빨간 고무통에서 순대 양념을 버무리는 장면이 나온다. 링크를 걸고 싶지만 또 그분들 생계가 있으니까. 이 고무통은 음식을 직접 닿으면 안 된다. '식품용'라고 되어 있는 스테인리스 대야나 플라스틱 대야를 사용해야 한다.


빨간 양념의 김치를 대동해서 붉은 대야의 습격이 반 세기 동안 한국을 덮쳤다. 여기에 신파를 붙이면 빈익빈 부익부가 된다. 부자들은 이 죽일 놈의 빨간 고무통을 사용하지 않는다.


어떻든 갓 담근 김치는 맛있다. 총각김치가 있다면 물에 밥을 말아서 한 손에 깍두기를 들고 씹어 먹는 맛도 좋다. 보리차였으면 더 좋겠다. 보리차에 밥을 말아서 먹어본지도 까마득하다. 어릴 때 그렇게 밥을 먹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그게 무슨 맛일까 싶었지만 나중에 그렇게 먹어보니 아 정말 맛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단점이라면 맛있으니까 계속 먹게 된다. 총각김치 큰 깍두기에 젓가락 하나를 푹 꽂아서 보리차에 만 밥을 떠먹으며 우걱우걱 씹어 먹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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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2-11-16 13: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교관님 김장하신 겁니까? 김치도 할 줄 아시나요? ㅋ
근데 영화 안 봤는데 고무 다라이에 김치 정말 오랜만에 보네요.
고무 다라이에 뭐 음식해 먹는 거 아니라는데.
옛날에 그런 게 어딨어요? 다 해 먹고 살았지.ㅋㅋ

교관 2022-11-19 12:01   좋아요 0 | URL
옛날에 그런 게 없었어요? ㅋㅋㅋ 스텔라님 저보다 옛날사람? ㅋㅋ
 


비가 오고 난 후 날이 좀 쌀쌀해졌다고는 하나 조깅을 하면 너무 덥다. 땀이 옴팡지게 난다. 패딩 때문이다. 일기예보에서 하도 쌀쌀해진다, 추워진다고 하니 조깅 코스에 사람이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물론 시야 안에 사람이 없는 것이지 또 좀 달리다 보면 사람들은 나와서 운동을 하고 있다. 평소보다 사람이 부쩍 줄었다는 말이다.


사실 일직선으로 아주 긴 거리로 되어 있는 강변의 조깅 코스에 사람이 없는 게 달리기에는 좋다. 왜냐하면 3명, 4명이서 횡대로 일렬로 서서 천천히 걷는 사람들이 꼭 있기 때문이다. 달리다가 그런 사람이 앞에 있으면 지나치기 위해서 멈췄다가 다시 달려야 하는데 달리는 리듬이 깨진다. 가끔 목까지 제발 횡대로 일렬로 천천히 걷지 말아 달라고 하는 말이 차오른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이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라 잠시 멈춰서 그들을 지나쳐 가면 그만이다.


달린 지 오분이 지나면 등에서 땀이 난다. 패딩 때문인데 쉬지 않고 그 상태로 15분 정도를 더 달리면 땀에 옴팡 젖는다. 그렇게 달리다가 산스장 같은 곳에서 몸을 풀어 준다. 그때 몸을 있는 힘껏 잡아당기고 늘어트릴 때 그 쾌감이 있다. 산스장에 정수기가 그동안 있었는데 이제 시에서 전부 싹 치웠다. 태풍이 올 때마다 강물이 불어나서 정수기를 다 쓸어 버리기 때문이다. 잘 치웠다고 생각된다. 오밤중에는 다 같이 마시라는 물을 몇 리터씩 들고 가는 사람도 있다. 저녁에는 그럴싸하게 사람들한테 좋은 면만 보여주는 척 운동하지만 밤이 깊으면 사람들 몰래몰래 큰 통으로 물을 받아간다. 나는 그걸 동영상으로 다 찍어놨다. 아주 미운 사람이다. 그런데 정수기를 다 치운다고 했을 때 그 사람이 사람들을 모아놓고 시청을 욕하며 큰 소리로 화를 내는 모습이 선하다. 참 잘 된 일이다. 흥.


가을로 접어들면서 산스장 벤치에 바람막이를 쳐놨다. 그곳으로 노부부가 와서 앉았다. 할머니의 거동이 불편해서 바퀴 달린 휠체어 같은 의자를 천천히 밀어서 걸었고 그 옆에서 할아버지가 할머니가 넘어질세라 할머니를 보호하며 딱 붙어서 왔다. 그렇게 바람막이 안 벤치에 앉기까지 느릿느릿 천천히 겨우겨우 도달해서 앉았다.


앉은 다음에는 할아버지는 분주했다. 할머니의 어깨를 계속 주물렀다. 그리고 살가운 대화들이 오고 갔다. 누군가 들으면 아무것도 아닌 일상적인 이야기들.


“걸어오느라 수고가 많았다, 바람이 이렇게 많이 불어서 앞으로 못 나오겠다, 저기 저 불빛이 참 아름답게 보인다” 같은 말을 하며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어깨를 계속 주물렀다. 할머니가 이제 그만 주물러요, 할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그만하라고 몇 번이나 말해서 주무르는 걸 관둔다.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얼굴에 얼굴을 딱 붙이고 이야기를 했다. 혹시라도 추울까 봐 뺨을 비비기도 했다. 어깨를 주물렀던 할아버지의 오른손은 언제나 할머니를 지키겠노라, 어깨 뒤 벤치에 걸치고 있다. 노년의 뒷모습이 아름답다.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살뜰히 아끼고 보호막이 되어 주었다. 할머니의 몸은 불편해 보였지만 얼굴은 행복해 보였다.


나는 늘 비슷한 시간에 비슷한 거리를 달리는데 그러다 보면 자주 보게 되는 사람들이 있다. 노부부는 매일은 아니지만 항상 이 시간쯤 이곳까지 걸어와서 벤치에 앉아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다. 별거 아닌 대화지만 소중한 이야기들. 이제 날이 점점 추워지면 나오지 못한다.


잘 아는 아파트 옆 집에 사는 사람도 매일 보지 않는데 조깅을 매일 하러 나오면 거의 매일 보는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매일 몇 년을 보다 보면 서로 얼굴은 알지만 아는 척 하기는 어색한 사람들이 있다. 그렇지만 또 안 보이면 왜 오늘은 안 나왔지? 하는 생각이 든다.


매일 나오면 매일 다른 풍경들을 본다. 같은 풍경이지만 계절에 따라 시간에 따라 모습이 조금씩 변해 있다. 그에 따라 사람들 역시 매일 다르고 매일 조금씩 변하고 있다. 그것이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던, 내면의 모습이던. 그런 모습을 밀사의 눈초리를 하고 관찰하는 건 꽤나 흥미로운 일이다.


밖으로 나오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이다. 매일 나오지 않으면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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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의 시간은 인간의 시간에 비해 빠르게 흐른다. 그렇지만 인간처럼 아등바등하지 않는다. 언제나 느긋하게 앉아 있거나 잠을 자고 있다. 그러나 생존을 위해서 눈치껏 살아가야 하는 고양이도 있다. 어떻든 태어나졌으니 어떻게든 살아야 하고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이건 몹시도 중요한 문제다. 특히 사회성이 결여된 인간에게는.


그런 인간도 그렇지만 고양이에게도 이는 중요한 문제다. 고양이는 신진대사가 빨라 오래 살지 못하면서도 그들의 삶은 느릿하게 흐른다. 마치 블랙홀 경계의 '사건의 지평선'에서 처럼 아주 천천히, 마치 멈춰 있는 것처럼 흐른다. 그림자가 햇살을 따라 움직이듯 천천히 고양이는 생을 보낸다. 그런 모습을 보며 고양이보다 오래 살 인간은 고양이와 같은 마음을 지니지 못한 채 바라보기만 한다.


고양이는 우리가 볼 때 기분이 나쁘게도 너무나 편안하게 비스듬히 누워있다. 그러다가 다리를 허공에 들면 드러나는 은밀한 부위도 참 고양이스럽다. 고양이에게 복잡하고 난잡한 인간사는 불필요하다. 매일 낮잠 잘 곳을 물색하고 추위를 피할 수 있는 자리가 고양이에게 먹고사는 일이다.


집집마다의 비밀을 고양이는 알면서도 인간에게 말하지 않고 숨긴 채 볕이 드는 곳에 누워 늘어지게 낮잠을 자며 소변을 통해 그 비밀을 배출한다. 인간이 보기에 가끔씩 꼬리를 움직이는 것으로 낮잠을 즐긴다는 것을 아는 정도다.


고양이는 햇살로 된 얇은 이불을 덮고 잠들다 눈을 뜨면 변색되는 풍경을 천천히 구경한다. 그렇게 누워있는 고양이를 보면 다리와 배 사이 야들야들한 부분에 손가락을 넣어 슬슬 비비고 싶어 진다. 졸음에 겨워 눈을 반쯤 뜬 고양이를 보면 나 역시 고양이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만 같다.


나에게 꼬리가 있다면 견고한 인간의 감정을 벗은 채 슬슬, 천천히 움직여 등까지 꼬리를 올려 누군가를 즐겁게 해 줄 텐데.


고양이의 시간은 장소에 영향을 받는다. 전통시장의 고양이는 낮동안 시장에 오가는 사람들을 피해 다녀야 하기 때문에 늘 주위를 살피는 눈치 고양이가 되었다. 그리하여 야간에 시장에서 고양이를 마주하면 그들의 시간은 역시 빠르다.


그러나 노인에게 사랑을 잔뜩 받는 노인정의 고양이 '하루'의 시간은 천천히 흐른다. 자신을 좋아해 주는 할아버지에게 애교도 부리고 오전에 먼저 나와 할아버지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다가 할아버지가 아는 체 다가오면 살갑게 대한다.


노인과 고양이는 시간의 공유를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노인의 시간도 빠르게 흐른다. 노인의 시간도 눈 깜짝할 사이에 뒤로 가버리고 만다. 하지만 노인은 젊은 사람이나 중장년층에 비해 항상 느긋하다. 시간을 닦달하지도 않으며 이미 시간을 두려 하지도 않는다.


할아버지는 고양이 '하루'와 시간을 공유한다. 할아버지는 하루에 한 가지 이상 볼일을 보지 않는다. 하루에 반드시 해야 하는 하나의 일은 고양이 '하루'에게 밥을 주는 일이다. 고양이 '하루'도 하루에 하나의 일만 한다. 그건 할아버지가 주는 밥을 먹는 일이다.


그리고 부른 배를 부여잡고 느긋하게 볕이 드는 곳을 찾아 추위가 덮치기 전까지 발라당 누워 쿨쿨 잠을 잔다. 할아버지는 그 모습을 느긋하게 바라본다. 고양이와 나는 같은 세계에서 다른 삶을 살아가지만 둘 다 어떻게든 생을 살아내야 한다. 그것이 나와 고양이가 이 세계에서 만나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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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스트는 어릴 때 어머니가 집에서 계란물을 입혀 구워서 설탕을 발라주던 토스트가 가장 생각이 난다. 식어도 식은 대로 맛있었던 토스트였다. 토스트 계의 입문이 어머니의 계란물 입힌 토스트였다. 그런 토스트는 제과점에서도 가끔 팔았다.


두툼한 토스트는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면 화이트 컬러 사무실이 밀집한 빌딩 밑에서 출근 전에 서서 후다닥 먹는다. 토스트는 어쩐지 천천히 음미하면서 먹기보다는 빠르고 신속하게 호다닥 꿀꺽 먹어치우는 것이다. 그런 맛이 있는 것 같다.  사실 어떤 음식이든 호다닥 먹는 모습이 아주 맛있게 보인다. 국밥이 맛있게 보이는 이유도, 라면이 맛있게 보이는 이유도 그래서 일지도 모른다.


내가 조깅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는 이런 토스트를 만들어 파는 것이 두 군데 있는데 한 군데는 저녁 6시면 문을 닫아 버린다. 나는 먹을 수 없다. 예전에는 밤까지 이모님 두 분이서 열심히 토스트를 굽고, 김밥을 말고 오뎅을 끓여 팔았는데 오전에 출근하는 사람들이 몰리면서 오전 장사가 잘 되어서 저녁에는 일찍 문을 닫게 되었다. 서서 토스트를 먹으며 오뎅 국물을 같이 마시는 맛이 있다. 오뎅 국물과 함께 토스트를 먹는 게 맛있는데 못 먹게 되었다.


두 군데 중 한 군데는 시장 안에서 토스트를 만들어 파는 리어카다. 전통시장은 변혁의 바람을 타고 천장에 전부 거대한 아케이드가 설치되어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방해받지 않고 먹을 수 있다. 토스트 리어카만 빼고 떡볶이 리어카들이 일렬로 죽 늘어서 있는 시장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우글우글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아케이드 덕분에 비바람과 눈이 오면(남부지방의 바닷가라 눈이 거의 오지 않지만) 뭐랄까 눈을 맞으며 먹는 토스트가 더 맛있을지도 모른다. 찬 바람이 심할수록 우리는 뜨겁고 부드러운 것을 찾게 되니까. 대형마트들이 곳곳에 들어서고 나더니 언젠가부터 전통 시장의 활기가 주춤하더니 코로나를 거치면서 대부분 일찍 문을 닫는다. 심지어는 늘 사람들이 서서 떡볶이를 먹던 리어카들도 일찍 집으로 들어갔다.


오직 전통시장 안에 있는 토스트 리어카만 늦은 밤까지 홀로 장사를 한다. 시장표 토스트는 너무 맛있다. 익히 알고 있는 그런 맛이다. 그래서 맛있다. 계란에 각종 야채를 넣어서 휘휘 저어서 불판에 지단으로 만들어서 버터에 구운 빵 사이에 넣고 케첩과 설탕을 뿌려서 준다. 우리기 잘 알고 있는 그런 토스트다. 맛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잘 먹게 되지 않는다. 참 이상하다. 왜 그럴까. 늘 의문스러운 것들은 알 수 없는 것들 뿐이다. 알 수 없는 것들은 언제나 의문스럽다.


여기서는 서서 먹지 않고 포장을 해 온다. 조깅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들러서 서서 먹기에는 늦은 시간이고, 무엇보다 토스트 리어카를 제외하고 양 옆으로 죽 늘어서 있는 떡볶이 리어카들은 전부 문을 닫아서 황량하다. 여기에는 토스트만 구워 팔기 때문에(시원한 캔 음료도 있지만) 오뎅 국물 같은 건 없다. 겨울에도 예전만큼 춥지 않다. 조깅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라 나는 몸이 후끈해서 더 그럴지도 모르겠다.


겨울에 썩 춥지 않고 가을인데 춥고, 맛있는데 사람들이 먹지 않고 늦게까지 장사를 해도 먹고사는 것이 힘들다. 이상하다면 참 이상하다.


햄버거도 토스트도 두툼한 것이 좋다. 두툼한데 그 안에 치즈를 또 넣어서 먹으면 더 좋다. 거기에 계란 스크램블을 곁들인다. 완벽하다. 손으로 들고 먹기에 벅차다. 벅찬 게 좋다. 평소에 벅차게 먹지 않기 때문에 한 번 이렇게 벅차게 먹고 싶을 때 벅차게 먹자.


이런 분위기는 미국의 데니스가 생각난다. 데니스는 24시간 오픈이고 벅찬 팬케익이나 두툼한 햄버거와 감자튀김 같은 것을 파는데 두툼한 토스트에 갖은 소스를 뿌려 헤비 하게 먹고 나온다. 데니스의 모습은 하루키의 소설 ‘어둠의 저편’ 첫 장면부터 나온다. 우리나라에는 데니스가 없는 것 같지만(또 있을지도 모르지만) 일본에는 데니스가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소설 속 두 주인공이 야심한 밤에 데니스에서 만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두툼한 토스트를 쓱 썰어서 포크로 집어서 입에 크게 넣어서 먹는 맛이 좋다. 여기에 어울리는 음료는 뜨겁고 진한 커피다. 물론 밖에서 서서 먹게 된다면 오뎅 국물이 어울리지만. 입에 가득 넣고 냠냠 먹으며 진한 커피 한 모금을 마시면 좋다. 야채? 야채보다는 치즈를 하나 더 넣자. 벅찬 토스트이기 때문에 벅차게 먹어야 한다. 야채 따위 절대 한 접시에 곁들일 수 없다. 사실 토스트 사이에 들어있는 계단 지단 속에 당근이나 파 같은 야채가 있다. 데니스에는 오직 밀가루와 당분으로 된 팬케이크지만 시장표 토스트는 그 나름의 균형을 맞추고 있다. 나쁘지 않다. 그래서 벅차도 괜찮다.


접시 위에 긴 소시지 하나가 있다면 더 좋을 텐데. 소시지를 칼로 썰어 먹는 맛도 좋다. 코로나 전에는 수제 소시지를 삶아서 파는 전문점에서 왕왕 사 먹었는데 그곳이 사라지고 난 후에는 가끔 줄줄이 비엔나소시지만 먹는다. 줄줄이 비엔나소시지라도 접시 위에 올려 여백을 다 가릴 걸,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천천히 먹으면서 즐거운 소설을 읽는 것이다.


소설 속에서는 한 마을에 고양이 떼가 출몰해서 수천 마리가 주인공이 사는 집 근처에 빙 둘러서 그곳을 쳐다보고 있고, 그 고양이 떼를 수습하러 온 질병관리본부에서 파견한 방역복을 입은 사람들 조차 고양이들을 어쩌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굉장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다 일찍 문을 닫고 저어기 토스트 리어카만 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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