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먹고 나면 접시와 그릇에 양념이 한가득


나는 설거지를 밥 먹자마자 해버린다. 설거지를 한다, 가 아니라 해버린다, 에 가깝다. 성격이 급한 탓도 있지만 밥을 먹고 난 후 밥그릇에 물을 부어 놓지 않으면 밥알이,,,, 어휴. 그때는 정말 쇠수세미까지 꺼내야 할 판이다.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숟가락을 놓자마자 들고일어나서 바로 설거지를 해버린다.


또 다른 이유로는 배부르게 먹고 난 후 좀 이따 하지 뭐, 라는 생각에 소파에 등을 대는 순간 뇌는 귀차니즘으로 잠식되어 발가락 하나 까닥하기 싫다. 그러면 설거지가 슬슬 하기 싫어진다. 밥을 먹자마자, 숟가락을 놓자마자 그릇들이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그냥 바로 설거지를 해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매일 조깅을 하는 것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나는 거의 매일 조깅을 한다. 올해는 오늘까지 3일을 빼고 매일 한 시간 정도, 한 시간 반 정도를 달렸다. 그래서 평균 일 년에 355일 정도는 하루에 한 시간 정도 달린다. 그 덕분인지 오래전에 입던 옷도 아직 잘 입고 있다. 매일 조깅을 하고 있지만 조깅하기 직전까지 매일 조깅하기 싫어서 갈까 말까 갈등을 겪는다. 매번 그렇다. 하지만 일단 운동화를 신고 강변으로 나가면 달리게 되고 그러면 심장과 다리에 고통을 주고 그 고통을 즐긴다. 고통을 느끼는 순간이 좋다고 받아들이면 고통이 없이 평온한 날이 별로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조깅을 하면서 고통을 제대로 느끼려고 한다. 아마 헬스장에서 고통스러운 얼굴을 하며 덤벨을 드는 사람들 역시 그럴 것이라 생각한다.


밥을 먹고 숟가락을 놓자마자 일어나서 재빠르게 설거지를 해버리지만 그전까지 늘 갈등이다. 배가 슬슬 불러오니까 그대로 소파에 등을 기대고 푸슈 하며 늘어지고 싶다. 설거지 따위 좀 이따 하거나 미뤄뒀다가 내일 해도 큰 문제가 아니잖아? 흥. 하지만 숟가락을 놓는 순간 일단 일어난다. 그러면 설거지를 해치우게 된다. 설거지도 겨울이라 해서 뜨신 물에 하지 않는다. 겨울이면 더더욱 차갑고 차가운 물에 설거지를 한다. 손에 차가운 고통이 머리로 오는 게 짜릿하다. 나쁘지 않다. 주부습진 같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는데 설거지하는 양이 적다. 그러니 주부습진이니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다.


성격이 급하지만 또 엘리베이터를 타면 내려가고 올라갈 층을 누르고 가만히 있는 편이다. 문 닫힘 버튼을 누르지 않는다. 보통 성격이 급한 사람의 특징을 엘베의 문 닫힘 버튼을 한 열 번은 눌러야 문이 빨리 닫히는 줄 안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는다. 엘리베이터를 앞에 두고는 꽤나 느긋하다. 높이 올라갈 때 중간에 누군가 타서 한 번 멈추어도 그렇게, 솔직히, 마음속으로, 싫어하지 않는다. 생리현상이 급박할 때 한 번 중간에 문이 열리고 누군가 탔을 때 아, 이런 신발. 하고 생각을 한 적은 있지만 이런 일은 극히 드문 일이니까.


또 내가 깔끔한 성격은 아니다. 어떤 부분은 깔끔함을 떨지만 또 어떤 부분은 그 반대다. 자동차 세차는 2년 동안 하지도 않았다. 목숨 걸고 운전을 하고 있는 상황. 하지만 설거지만은 또 다르다. 설거지의 관건은 물기 제거다. 마지막에는 싱크대의 물기를 싸아아악 제거를 해야 속이 시원하다. 싱크대에 물기가 묻어 있으면 아주 지저분하게 보인다. 씻는 건 싫은데 샤워하는 건 좋아하는 것과 비슷할까. 그래서 조깅을 하는 여러 이유 중 하나는 샤워의 명분을 찾기 위함일지도 모른다.


설거지는 깨끗해지는 게 눈에 확 들어오기 때문에 마음이 뻥 꿇리는 것 같다. 붉은 양념이나 고깃기름이 잔뜩 묻은 접시나 그릇이 순식간에 깨끗해지는 모습이 바로 눈에 보이니까 야호! 다. 세상 시원하다. 그런 다음 모든 물기를 싸악 제거한다.


물기 제거는 군대에서 배우게 되었다. 군대에서는 설거지를 하고 물기를 제거하는 것보다 더 스케일이 큰 화장실을 청소하고 그 안의 모든 물기를 제거해야 한다. 화장실의 대변기나 소변기를 물청소를 한 다음 걸레를 들고 손으로 일일이 닦아서 물기를 싹 제거한다. 막내들이 그 일을 하는데 신속하고 정확하게 해야 한다. 빠르게 하지만 아주 깨끗해야 한다. 그래야 점오 시간이 맞출 수 있다. 시간을 끌게 되면 고참들에게 두드려 맞는다. 그래서 물기를 제거하고 나면 땀이 뻘뻘 난다. 그 짓을 매일 한다. 그러나 점오가 끝나면 화장실은 그야말로 화. 장. 실. 이 된다.


막내만 벗어나면 화장실 물기 제거에서 벗어날 수 있는데 재수가 없어서 막내가 오랫동안 들어오지 않으면 매일매일 그 짓을 해야 하는 것이다. 물청소에 미쳐 씻기지 않은 변기의 묻은 똥도 일일이 손으로 다 닦아서 손에 똥독이 올라오는 경우도 있다. 도돌도돌하니 으 할 정도로 독이 오르는데, 그대로 잠이 들었을 때 바로 윗 고참이 연고를 발라주는 장면은 또 가슴이 찡하다.


그래서 이건 순전히 내 생각이지만 설거지는 여자보다 남자가 더 깨끗하게 할 걸. 그럴 거야. 안 해서 그런 거지 못하는 게 아닐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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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통닭인데 옛날 통닭 같지 않은 건 기분 탓이겠지. 아니면 날씨 탓으로 돌린다. 단순히 크기의 문제는 아닌 거 같다. 머리는 기억하지 못하는데 몸이 기억하는 것들이 있다. 손발, 다리나 팔이 어어? 하면서 기억을 재생하기도 하는데 그게 아마도 ‘맛’에도 그런 요소가 들어 있지 않을까 싶다. 맛이라는 건 추억의 절반을 채우고 있지만 절반이나 되는 추억 속 옛날 통닭의 맛은 아니다.


맛이 없어서 그렇지도 않다. 그러니 그냥 기분 탓이거나 날씨 탓이다. 요즘의 옛날 통닭의 맛은 예전의 통닭에 비해 맛은 분명히 좋아졌을 것이다. 뭐 그럴 것이다. 따지고 들면 기름의 신선도나 뭐 그렇지 않을까 싶다. 또 요즘의 옛날 통닭은 꼭 ‘옜날’ 통닭 같다. 메타버스나 멀티버스 속 통닭 같은 느낌이다. 가상세계의 메타버스보다는 멀티버스 쪽이 더 가깝겠다.


평행 우주 속의 여러 시간대의 통닭이 존재하고 조금씩 맛이 다르다. 예전의 통닭은 그렇지 않았는데 같은 모습이지만 요즘의 통닭의 맛에는 약간 매콤한 맛이 있다. 매콤하다, 보다 좀 더 나은 표현이 없을까. 맵싹 하다? 먹다 보면 맵싹 한 맛이 통닭 전체에 입혀져 있다.


요즘의 옛날 통닭은 전문점이 있다. 이름은 조금씩 다르나 가마치, 다마치 같은 프랜차이즈다. 내가 있는 도시에는 오래전부터 전통 시장 안에 통닭골목이 있었다. 마주 보며 통닭집들이 데면데면 주르륵 붙어 있는데 심하지 않은 호객행위가 골목을 다니는 재미를 준다. 일단 좋은 말들의 향연이다.


잘생긴 청년, 예쁜 언니, 여기 들어와서 드셔.

저, 저는 못 생겼는데?

아이구, 아니야. 잘 생겼는데. 들어와서 닭 좀 뜯어.


지나다니면 삼삼오오 앉아서 통닭을 뜯고 있다. 사이다와 함께. 어쩐지 정겹다. 통닭집 안에서 닭을 튀기는 모습을 신기하고 재미있게 보던 때가 있었다. 요즘도 가끔 그 골목에서 닭을 포장해 간다. 근데 옛날 통닭보다는 후라이드다. 통닭 골목의 통닭집 대부분이 후라이드나 양념 치킨을 판다. 집집마다 맛이 조금씩 다른데 튀김옷을 나름의 비법, 방법으로 만들어서 취향에 맞는 통닭집을 찾아서 먹는 맛이 있다.


내가 가는 집은 튀김옷에 카레가루가 들어간다. 맛있다. 요즘은 음식이 전부 매콤하거나 맵다. 그래야 사람들이 좋아한다고 한다. 나는 전혀 맵지 않은 음식이 좋은데 카레가루가 들어간 후라이드는 맵지 않다. 아 그런데 작년부터 여기도 매콤의 기차를 탄 모양이다. 거기서는 아마도 ‘이상하다? 매주 한 번씩 와서 포장해 가던 그 삼촌은 왜 요즘 안 올까?’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가면 약간은 친해지게 되기 때문이다.


통닭 골목의 집들은 오랜 시간 세월을 버텨온 노하우가 있어서 그걸 지키면서 대형 프랜차이즈와 차별을 두며 지금까지 버티고 있다. 사람들도 북적북적 닭을 뜯으며 즐거웠다. 하지만 불황을 모르던 통닭 골목도 코로나를 겪으면서 모습이 바뀌었다.


옛날 통닭을 먹으면서 옛날 통닭 맛은 나지만 옛날은 추억 나지 않는 건 감각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옛날 통닭을 먹으면서 옛날 통닭의 맛을 느끼지 못하는 것도 감각의 문제이다. 문제여서 큰일이군 문제다!라는 건 아니다. 단지 감각이 전달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럴 것이다. 감각이 신경물질을 내보내 뇌의 기억 장치에 도달해서 자극을 해야 하는데 – 말을 하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감각이 도달하지 못해서 자극이 안 되기 때문에 옛날의 맛을 느끼면서도 추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기억의 감각을 건드리지 못하고 있다. 요 근래에 본 ‘웨스트 월드’ 시리즈와 ‘1899’ 시리즈는 확실히 인간의 기억에 관한 스토리가 깔려 있다. 그리고 그 기억은 이 세계를 두 세계나 그 이상의 세계로 나뉜다. 현실 세계를 제외한 다른 세계는 정신의 세계로 몸과 마음을 분리하여 각각 살아간다. 여기서 마음이라는 건 정신을 말한다. 우리는 대체로 마음이 움직인다고 하지만 그건 전부 정신, 머리가 하는 일일 뿐이다. 그래서 오래전 데츠카 오사무(1928)는 아톰의 심장을 가슴이 아니라 머리에 심어 두기도 했다.


우리는 기억하기 싫은 부분이 있지만 기억을 하지 않으려고 하면 할수록 계속 기억되는 경우가 있다. 반대로 기억하고 싶지만 전혀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어떤 실험이나 약물 또는 수술의 방법으로 몸이 죽더라도, 또는 몸은 지금 여기에 있더라도 정신은 또 다른 세계 속에서 그 세계에 맞는 몸을 지니고 살아갈 수 있다. 지금의 기억을 완전히 삭제가 된 채. 그 시기가 1899년도가 되기도 한다.


그건 바로 동시 공체이며 나는 이 세계관을 미드보다 훨씬 전 하루키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 접했다. 감각을 살려 놓으면 몸은 재가 되어 버리더라도 정신의 세계 – 이를 어떤 세계에서는 웨스트 월드라고 할 수 있고, 어떤 세계에서는 1899년의 프로메테우스라고 할 수도 있다. 그 안에서 무한 루프로 살아갈 수 있다. 즉 불멸하는 것이다. 부작용도 있다. 이 부작용이란 마음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기에 불멸할 수 있는 것이다. 음악이 뭔지 모르고 ‘시’라는 것도 모른다. 단지 시간이 되면 밥을 먹고 일을 하고 부부관계를 가지지만 격정적인 쾌락이나 행복의 척도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어쩌면 더 편하다. 게다가 불멸하는 사람들은 그게 슬픈 건지 우울한 건지, 알 수더 없고 알 필요도 없다. 그런 감각 자체가 없다. 이런 부작용이란 여기서 거기를 보는 입장일 뿐이지 그 세계의 사람들은 부작용이라고 느끼지도 않는다. 그 세계의 무한 반복이 되는 것도 인지하지 못하며 불멸한다는 것도 모른다.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세계다.


닭 먹다가 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 하겠지만 감각이란 뭐 그럴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다. 요즘의 미드를 보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너무 말이 되게 잘 만들어서 보다 보면 음 맞아, 하는 부분이 있다.


내가 기억하는 옛날 통닭의 맛에는 맛있다 맛없다, 가 아니라 그 속에는 아버지가 있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통닭을 집에 튀겨 오기도 했지만 그 기억보다는 위에서 말한 시장통 통닭집에서 가족이 앉아서 먹은 기억이 있다. 그렇게 먹는 통닭이 맛있었다. 온통 닭 튀기는 냄새가 풍기는 시장통 닭집 테이블에 앉아 큰 은쟁반에 갓 나온 통닭을 뜯어먹었다. 짜장면이나 삼겹살보다 통닭집에서 외식하는 기분이 더 들었다.


감각이란 너무나 신묘하다. 만약 아픔이 기억되면 아마 인간은 살아가지 못할 것이다. 병에 걸려 죽을 것처럼 아팠을 때, 지금은 다 낫고 괜찮은데 기억이 그 아픔 자체를 기억한다면 끔찍할 것이다. 기억의 역할은 아팠을 그때 그 아픔으로 인해 불편하고 고통스러웠던 나를 기억한다. 아픔 자체는 기억할 수 없고 기억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아픔을 기억을 해버리는 감각적 사고가 나기도 한다. 아마 환지통을 겪는 사람들일 것이다. 뇌는 실제 감각으로 인지해 버린다.


맛에 대한 감각 역시 기묘하다. 음식의 맛은 예전을 기억한다. 맛은 시간이 흘러도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기 때문이다. 맛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날 통닭을 먹는데 옛날 통닭에 대한 기억이 덜 한 것은 역시 감각의 문제다. 나는 닭 먹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그나저나 닭이 너무 작다. 이건 15일이나 살아 있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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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음악적 또는 문화적 지식이나 견해로 적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의식이 가는 대로, 의식이 지 마음대로 흘러가는 대로 적는 것이다.

나 섹스 피스톨즈야 베이스야


나 섹스 피스톨즈의 시드라구 sㅣ드 !


이 똘기 충만한 표정과 온몸에 반항을 덕지덕지 바르고 있는 녀석은 섹스 피스톨즈의 베이스 시드 비셔드다. 너무나 일찍 죽어버린 펑크 록의 신화가 된 인물이다. 시드가 펑크 록의 신화가 된 데에는 딱 저 태도 때문이었다. 이 태도가 펑크를 대변하고 있어서 그렇다. 시드는 섹스 피스톨즈의 원래 멤버가 아니었고 베이스 연주가 똥망이었다. 형편이가 너무 없었다.


그런데 시드와 양대 똘기충만인 보컬인 쟈니가 시드의 이 펑크의 태도! 이 반항적인 태도! 이 자유함의 태도! 를 보고 “신발! 넌 됐다! 이 빌어먹을 그 태도가 마음에 들어. 너 외모 자체가 바로 펑크야! 이 신발아!” 시드는 전설적인 펑크 록 그룹 섹스 피스톨즈의 멤버가 되어 미친 듯이 반항을 분출한다.


난 보컬인 쟈니야


똘기충만


이 반항 반항 충만한 시드는 똘기 가득한 섹스 피스톨즈 안에서도 버거울 정도로 진정한 똘기였다. 베이스를 가르치던 사람은 이런 가망이 1도 없는 놈!라고 했는데, 시드는 무대에 오르기 전에 약을 했고 정신도 안드로메다로 가버려 지 몸에 면도칼로 난도질을 했다.


약에 취해 기자를 때리고 유리잔을 관중에게 던지고, 그 사람은 눈이 멀어 소송에 휘말리고. 정말 엉망진창이었다. 시드의 약물 중독은 낸시라는 여자를 만나면서 더욱 심해졌다. 멤버들은 하루가 다르게 갈등이 심화되었고 쟈니가 멤버들과 막 싸우다가 정규앨범 한 장을 달랑 내고 펑하고 찢어지게 된다.


자~~~~~유~~~~ 분방


음악성이라고는 1도 찾아볼 수 없는 시드는 미친놈처럼 커버 앨범을 발표한다. 그 해가 1978년이다. 그 앨범 안에는 당대 최고의 가수 프랭크 시나트라의 ‘마이 웨이’까지 있었다. 노래도 못 부르고 음악적 재능은 발톱의 때만큼도 없는 시드가 잘 차려입은 관객들 앞에 서고 마이웨이를 부르는데 목소리는 찢어지고 갈라지고 엉망진창으로 부른다.


그런데 웬걸, 관객들이 미친 듯이 좋아한다. 그동안 고전을 다시 부르는 것에 정중이 전부 깨져 버린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해체가 아닌가. 기존의 잘 짜인 틀을 시드가 다 깨버렸다. 하하하. 물론 이건 뮤직 비디오의 모습이다.


https://youtu.be/aLYblRi31vI Sid Vicious - My Way 출처: Karel Bata


권위와 권력의 상징인 양복이라는 것이 영화 ‘아메리칸 지골로’에서 다 해체가 되었다. 영화에는 파릇파릇 리처드 기어가 초년병 신입 디자이너의 의상을 입고 나온다. 디자이너가 손을 번쩍 들고 제가 한 번 영화 의상을 해보겠습니다!


그럼 너가 이번에 해! 그래서 리처드 기어의 몸에 맞는 의상을 제작해서 영화 전반에 입고 나온다. 양복이라는 권위가 다 깨져버렸다. 전 세계 영화 팬들은, 특히 여성들은 아니 정장을 입고도 사람이 이렇게 섹시할 수가 있나! 모두가 영화를 보러 극장에 몰려들었다. 해체가 되었다.


양복은 이후 수트라는 개념으로 불리게 된다. 그 초년병 디자이너가 조르지오 아르마니였다. 아메리칸 지골로에서 아르마니의 수트를 입고 있는 리차드 기어와 탄산수 페리에, 그리고 영상에 흐르는 블론디의 노래는 모든 것을 다 깨부수기에 충분했다.


시드는 근엄의 상징처럼 여겼던 프랭크 시나트라의 마이 웨이를 엉망진창으로 불러 해체시키고 망쳐버렸지만 사람들은 열광이었다. 야호! 그러나 시드 녀석은 일 년 후 1979년 약물로 사망하고 만다. 고작 21살이었다.


The Sex Pistols - Anarchy In The U.K https://youtu.be/cBojbjoMttI 출처: jaroshy


이름도 멋진 섹스 피스톨즈 녀석들의 Anarchy in the UK를 듣고 있으면 마음속 응어리를 박살내고 싶으면서도 미치도록 신난다.


6, 70년대 음악에 한 번 빠지면 헤어 나오기 힘들다. 음악은 예술이고 음반은 산업이라 비즈니스를 무시할 순 없지만 요즘의 철저한 비즈니스 음악의 무한 생산과는 달리, 예술을 하고 싶은 녀석들이 마음껏 지들 하고 싶은 대로 가사를 쓰고 노래를 불러 연주를 하면 음반회사에서 그들의 음악을 널리 널리 보급했다.


요즘 같은 21세기에 ‘늑대가 나타났다’가 어쩐다는 이유로 검열에 노래를 부를 수 없다니! 지금보다 더 암울하고 비관적이어서 더더욱 투항하고 자유를 부르짖는 노래들이 많았지만 예술에 있어서 만큼은 검열하지 않았다. 6, 70년대의 음악은 말 그대로 예술 그 자체였다. 손에 잡히지 않아서 더 빠져들 수밖에 없는 음악들이었다.


섹스 피스톨즈의 미칠듯한 펑크 록을 듣고 있으면 당연하지만 요 앞전에 말한 패티 스미스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섹스 피스톨즈 녀석들 역시 패티 스미스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6, 70년대는 전쟁과 기근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에 전 세계 청춘들이 거리로 나왔다. 그들은 웃통을 벗고 노래를 부르고 밤새 술을 마시며 집시가 되었다. 그에 부흥하듯 펑크 록, 포크, 프로그래시브 등이 짠 하며 나타나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총과 칼보다 음악과 노래가 사람들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섹스 피스톨즈에서 에너지를 다 쏟아내듯 노래를 부르는 쟈니의 파릇파릇한 모습을 보라. 정말 똘끼 충만한 것이 요즘과는 너무나 다르다. Anarchy in the UK를 부르는 쟈니의 모습은 마치 삐딱하게를 부르는 지드레곤이 떠오른다. Anarchy in the UK의 삐딱함이 세대를 거쳐 내려오고 내려와 지디의 삐딱하게 까지 왔다. 어쩐지 분위기도 비슷한 것 같고 너무 신난다. 반항적이게 신난, 신나면서 반항적인 이런 음악은 좋을 수밖에 없다. 삐딱하게 가 많아야 변해야 하는 것들이 변하게 된다.


닮은꼴 말하면 요즘 종횡무진 헤일리 비버는 정말 아버지를 많이 닮은 것 같다. 아니 딸이 아버지를 닮는 게 당연한 거 아니냐.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20대 중후반 정도의 딸이 이토록 아버지를 닮은 건 또 잘 보지 못했다. 왜 그런고 하면 아버지가 할리우드 배우니까 뭔가 대중에 자주 접하는 얼굴은 메이크업을 하고 꾸며진 얼굴을 봐오니까 요즘 인스타그램에 자신이 론칭한 제품을 광고하는 헤일리 비버의 꾸민 얼굴이 아버지를 보는 것 같다.


헤일리 비버의 아버지 스티븐 볼드윈은 또 자신의 큰 형인 알렉 볼드윈을 아주 닮았다. 이들은 4형제인데 모두가 할리우드 배우다. 우리에게는 제일 큰 형인 알렉 볼드윈이 가장 유명한데 그는 이번에 영화 촬영 중에 총기 오발 사고로 촬영감독이 사망한 것 때문에 곤욕을 치르고 있는 중이다. 미국은 한국과 달리 법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면 막 20만 페이지에 달하는 서류를 검토하고 막 막 막 그래서 아무튼 골치 아프다. 전 세계로 전부 방송이 된 조니 뎁과 엠버 허드의 이혼 소송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어마어마어마어마한 서류들.


헤일리 비버는 인스타그램을 하다 보면 중간에 광고로 자꾸 뜬다. 헤일리 비버는 젊은 날의 데릴 한나를 보는 것 같다. 데릴 한나가 요즘은 약물이나 성형 부작용 때문인지 얼굴이 무서운 레슬러처럼 보이지만 블레이드 러너나 인어로 변신하는 스플래쉬를 찍을 때만 해도 세상 예뻤다. 키도 크기 때문에 거인으로 나오는 영화도 있었다. 20대 초반의 데릴 한나는 정말 잡지나 만화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외모였다. 데릴 한나는 20살까지 커다랗고 축 늘어진 곰인형을 늘 안고 다녔다. 그러다가 그때 존 F 케네디 주니어를 만났다.


미국미국한 데릴 한나의 모습


잡지 사진 편집도 절묘하다


세상에서 가장 잘생긴 미남과 세기의 미국적인 금발의 미녀가 만났으니,  그것도 가장 물오른 신예 할리우드 배우와 존 F 케네디 주니어의 만남을 세상은 가만두지 않았다.  두 사람이 파파라치에게 찍힌 사진 중에 존 F 케네디 주니어가 데릴 한나의 손목을 잡고 달려가는 사진이 있다.


데릴 한나는 금발을 휘날리며 오른팔에 옷을 걸치고 존 F 케네디 주니어를 따라가는 사진인데 이 사진이 너무나 유명해서 지금까지 패션잡지에서 많이 오마주 되고 있다.


상징이 되어버린 사진이다


너무 멋있어서 너무 안타까운 사진이다


따지고 보면 시드의 엉망진창 마이 웨이 커버하는 모습도 여러 영화에서 많이 오마주 한 것 같다. 사랑 고백을 하는데 노래를 너무 못 불러 모두가 으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이탈과 음방조 음비관이 난무해도 끝까지 부르려는 모습에 주인공이 눈물을 흘린다던가. 섹스 피스톨즈로 시작해서 케니디 주니어까지 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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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뎅은 왜 맨날 맛있어?


오뎅은 왜 이렇게 맛있을까. 내부자들에서 이병헌은 라면도 맛있게 먹지만 오뎅도 맛있게 먹는다. 두 번째 라면 먹방에서 열심히 씹다가 뜨겁다고 뱉어내는 건 반칙이다. 그러면 안 돼.


그나저나 오뎅을 오뎅이라 하고 싶은데 오뎅이라고 글을 쓰면 이 놈의 맞춤법 검사기가 대번에 어묵으로 바꾸라고 난리다. 흥. 어묵이 표기법으로 맞을지는 모르나 길거리 리어카에서 먹는 싸구려(이젠 그렇지도 않은) 오뎅은 그냥 오뎅이다.


일본에서 들어온 말을 아직 사용하고 있는 말들이 있어서 제대로 된 한국어로 바꿔서 사용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하고 있고 하나하나 바꾸기 시작한 지도 오래되었다. 일본식 한글이 아니더라도 한글도 표기법이 바뀌고 있다. 응답하라 1988을 보면 ~읍니다, 가 ~습니다.로 바뀌었다고 응팔 속에서 엄기영(로 기억하고 있지만 내 기억이 글쎄) 앵커가 말하고 있다. 그래서 진주에게 글자를 가르치던 선우가 ~읍니다, 는 이제 ~습니다, 로 바꿔야 해.라고 한다. 그러면 옆에서 엄마가 “우리 진주 아직 한글도 모를낀데 그냥 그림처럼 그리고 있을 낀데”라고 하면 몇 회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웃음을 진주가 씩 보여준다.


한때 당구장 용어는 전부 일본어였다. 오시, 우라마시, 히끼, 오마시 등. 당구장 안에서 돈을 잃은 한쪽에서 얼마나 많은 탄성과 아쉬움이 터져 나왔던가. 그들과 같이 했던 우라마시.

다이 찢어진다! 300 안 되는 놈은 맛세이 찍지 마라이!

요즘 당구 중계를 보면 이런 말들이 싹 다 한국말로 바뀌었다. 당연히 그렇게 하는 게 맞지만 이상하게도 재미는 떨어지는 것 같다.


중고등학교에서도 바꿔야 하는 말이 있는데 매점, 사물함, 소보로빵이 그렇다. 매점도 일본에서 건너온 말이라 매점은 가게로 불러야 한다고 한다. 아무리 일본말이지만 학교에서 학생들이 매점을 가게로 할 애들이 몇이나 있을까. 사물함도 개인 보관함이라고 해야 한다. 얘, 너 개인 보관함에 나의 수학 책이 있으니 좀 이따 나의 개인 보관함에 좀 넣어줄래?

무엇보다 소보루빵, 소보로빵은 곰보빵으로 해야 한다고 한다. 곰보는 얼굴에 무엇이 난 사람을 좀 얕잡아 보는 듯한 느낌인데 이게 더 이상하다면 이상한 것 아닌가. 얼굴이 달 표면 같은 사람에게 곰보 같은 말을 붙였다. 소보로라는 일본 말은 ‘흩어져 엉클어진 모양’을 나타내는 말이다. 곰보빵보다는 소보로빵이 훨씬 나은 것은 나뿐일까.


학교 안에서 아이들이 “우리 쉬는 시간에 가게 가자, 너 개인 보관함에 딱풀 있니? 오늘 곰보빵 쓸어 버리자”라고 할까 싶다. 정말. 잘도 하겠다.


오뎅이라고 활자를 쓰고 나면 어묵으로 고쳐 쓰라고 나온다. 그런데 오뎅과 어묵은 다르다. 그렇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길거리에서 서서 먹는 건 어묵이라기보다 오뎅이다. 어묵은 생선을 삶아서 살을 으깨서 뭉쳐 쪄서 만들어서 모양도 예쁘고 맛도 오뎅과 다르다. 손이 많이 가고 비싸다. 어쩐지 어묵은 부르주아의 느낌이다. 우리나라 어묵은 일본의 오뎅이 아니라 가마보코에 가깝다. 좀 더 가까운 쪽으로는 한펜이 아닐까 싶다. 생선살을 반달 모양으로 썰어서 낸 것이 한펜이기에 우리나라 어묵탕에 들어가는 어묵의 모양이 한펜에 가깝다. 이들의 역사는 헤이안 시대(794~1192)부터이니 오래되었다.


그러니까 스렙빠는 슬리퍼로 고쳐 쓰라고 나온다. 슬리퍼 하면 이미지가 우아한 아파트의 거실에서 신고 다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하지만 스렙빠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츄리닝 바람에 질질 끌고 동네를 어슬렁 거릴 때 필요한 것이 스렙빠다. 삼디다스를 슬리퍼라고 하기에는 뭔가 많이 좀 이상하다.


이런 오뎅을 꼭 어묵이라고 해야 하나 싶어서 찾아보면 우리의 영원한 아부지, 파 하 하 주인공 최불암 어르신이 하는 한국인의 밥상에서 어묵과 오뎅 편에서 아주 잘 보여준다. 한국인의 밥상, 정말 재미있다.


https://youtu.be/nwgcn58Q6y0 



영상을 보면 일본에서 오뎅이라고 부르는 건 고로 상이 가끔 먹는 그런 가마보코나 한펜을 통틀어 오뎅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우리가 늘 먹는 한국식 오뎅, 저 고불고불한 저 오뎅은 일본에 없고 일본의 오뎅보다 맛이 훨씬 좋아서 일본에서 아주 잘 팔린다고 한다. 우리가 자주 먹는 길거리 오뎅에는 생선살보다는 밀가루가 많이 들어간다.


오뎅과 어묵의 관계는 일본의 멘타이코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멘타이코는 명란젓이다. 일본인들은 이 명란젓이 일본의 음식으로 알고 있다. 대부분 그럴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세계 명란의 90% 정도를 먹어 치우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본은 ‘명란의 날’까지 있다. 하지만 진짜 명란젓 원조인 한국에서는 일본인만큼 명란젓을 먹지 않는다. 그건 국내에서는 명란젓이 비싸기 때문이다. 명란젓은 명태로 만드는데, 까지만 하고.


오뎅탕은 길거리에 서서 후후 불어 먹는 게 가장 맛있지만 집에서 해 먹어도 맛있다. 나는 일본의 한펜에서도 무가 제일 맛있고 한국의 길거리 오뎅탕에서도 푹 익은 무가 젤 맛있다. 일본은 게다가 다이콘이 제일 비싼 축에 속한다. 아마 소힘줄보다 더 비쌀걸. 그런데 아쉽게도 한국에는 무는 팔지 않는다. 매일 가서 오뎅을 후후 불어 사 먹으며 주인장과 친해지면 한 일 년 정도 뒤에 무는 그냥 먹으라고 하면 푹 들어서 먹는데, 아 오뎅 국물을 잔뜩 빨아들인 무는 정말 맛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고등어조림에도, 갈치조림에도 나는 밑에 깔린 무를 먼저 먹는데 그게 본편보다 맛있다. 생각해보니 나의 입맛은 싸구려 입맛이라 요즘에는 동치미 국물에 밥을 말아먹고 소면을 넣어 먹고 무를 아작아작 씹어 먹는데, 무를 원래 좋아하나 싶기도 하다.


좀 우습지만 집에서 오뎅탕을 해 먹을 때 무가 없어도 그냥저냥 맛있게 먹을 수 있다. 오뎅을 넣고, 감자를 넣고 팔팔 끓인 다음에 조미료를 살짝 넣어주면 맛있는 오뎅탕이 된다. 오뎅하면 겨울의 추억이 떠오르지만 너무 길어서 다음에 이야기하기로 하자.

하이구 난리 데이


뭐야? 명란젓은 명란젖이야? 이런 비싼 명란 젓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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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했던 시절 어린이라는 행복의 뒤에 숨어 버리고 나면 가난이라는 것을 모른다. 겨울의 일요일 아침이면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불을 걷으며 우리를 깨우면 우리는 그대로 이불에서 빠져나와 밥상에 둘러앉아 아침밥을 먹었다. 된장국에 두부는 일요일 아침에 우리 가족을 모으는 단단한 음식이었다.


틀어놓은 티브이에서는 기억나지 않는 일요일 아침 프로그램이 나오고 있었는데 아마도 어린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이었을 것이다. 만화나 인형이 나오는. 엄마는 된장국에 밥을 말아서 동생의 입에 넣었다. 동생은 티브이에 시선을 빼앗겨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된장국에 밥을 말아서 숟가락 위에 올리고 그 위에 두부를 잘라 올려서 먹는 맛이 좋았다.


창문은 월동준비로 단단하게 찬바람을 막고 있었고 창을 투과한 것은 오로지 따뜻한 겨울의 빛이었다. 그 빛이 밥상을 둘러싼 우리 가족에게 내려앉았다. 추운 겨울이지만 그건 티브이 속 뉴스에서나 하는 말이거나 집 밖의 이야기였다.


특별할 것도 없는 아침식사 시간은 짧지도, 그렇다고 길지도 않게 가졌다. 뜨거운 된장국에서 김이 피어올랐다. 천장까지 닿지는 않았지만 그 분위기가 좋았다. 창으로는 겨울의 햇빛이, 된장국에서는 김이 따뜻한 겨울을 말해 주었다. 주인집에서 귤을 한 봉지 가져다주었다.


이 맛있는 냄새는?


된장국인데 좀 떠 드릴까요?


아이구 좋지, 된장국 냄새가 좋네.


주인집 아주머니는 여고에서 매점을 운영했다. 그래서 놀러 가면 매점 안에서 보는 여고생들, 누나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점심시간에 우르르 나와서 맛있는 과자와 음료를 놓고 이야기하는 그 모습은 언제나 좋다. 주인집 아주머니에게는 딸이 있었고 그 딸이 그 여고에 다니고 있어서 우리를 왕왕 데리고 다녔다.


조깅을 하면서 그 동네에 가보니 동네 자체가 싹 없어졌다. 너른 들판처럼 바뀌고 아파트가 들어설 것이다. 그래도 몇 해 전까지 조깅을 하면 어린 시절을 잊지 못해 가끔 그 동네를 거쳐 오면서 사진을 찍어 두었다.


그 골목길, 그 동네의 풍경들.


그리고 서서히 동네에서 사람들이 빠지는 모습을 지켜봤고 허물어지고 완벽하게 없어진 모습까지 봤다. 한 동네의 역사가 사라졌다. 누군가에게는 아무것도 아닐지 몰라도 어떤 사람에게는, 나에게는 추억이 종합 선물세트만큼 많은 동네라서 이상한 기분이 든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안타까운 것만은 아니다. 제대로 보존이 되지 않는 오래된 것들은 전통보다는 나쁜 관습 같은 것이라 새로운 것으로 바뀌는 것이 낫다고 본다.


된장국과 두부는 지금도 늘 먹고 있고 늘 먹을 때마다 맛있다. 하지만 맛은 추억에 기인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때의 분위기는 나지 않는다. 그때는 어린이였고 가족이 한 밥상에 둘러앉아 있었으니까.


한 가족이 밥상에서 모두 모여 밥을 먹을 수 있는 시간은 고작 몇 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지난 후에야 알았다. 된장국과 두부는 참 맛있는데 이렇게 맛있고 간단한 음식은 얼마나 더 먹을 수 있을까.

친구가 살던 집인데 우리는 옥상에서 옥상을 목숨을 걸고 건너 다녔다. 그 친구는 쌍둥이 아빠가 되었다.


양팔을 벌리면 마치 닿을 듯한 좁은 골목길


바로 위 사진의 다른 버전


달동네의 모습이다


골목이 미로처럼 이어지는 동네


서서히 철거가 되기 시작하고


동네 점빵이었는데 철거 때문에 사람들이 빠져나갔다


저기 보이는 아파트들이 밀려온다


위의 모든 골목이 올해 들어 이렇게 변했다


그리고 마을에 사람들이 싹 빠져나간 여름의 어느 날, 온도가 거의 32, 3도를 육박하는 날에 조카와 옛날에 살던 집을 찾았다.

센과 치히로에 나오는 마귀 숲 같은 느낌 ㅋㅋ


귀신 숲 같은 옛날 집에서 빛이 조카의 얼굴에 내려앉았다


사람이 빠져나간 자리의 주인은 녹색의 풀과 나무가 사람의 자리를 대신한다


저 사진이 너무 좋아서 흑백으로 출력해서 컴퓨터에 부착



오늘의 선곡은 뉴 올리언즈 출신의 전설적인 세션, 피아니스트 앨런 투세인트의 I WAVE BYE BYE https://youtu.be/HAGySWhFOjg  <= 앨런 투세인트 - 주제


음악이 정말 너무 좋아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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