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척 오랜만에 편지를 씁니다. 밝고 어두운 곳에서 잘 지내는지 궁금하군요. 저는 생각만큼 잘 지내고 있습니다. 사실 매일 불안합니다. 그래서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늘 불안하니까 불안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늘 불안한데 어쩌다가 불안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왜 불안하지 않지? 하며 더 불안합니다. 그래서 잘 지내려면 언제나처럼 불안한 게 낫습니다.


실은 저만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저의 그런 마음을 인스타 스토리에 올렸던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팔로워 중 몇몇 사람이 나도 그렇다며 메시지가 들어왔습니다. 사실 같은 불안을 안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위로를 받느냐 한다면 그건 또 아닌 것 같습니다. 불안을 공유한다고 해서 나의 등에 붙어 있는 불안이 일어나서 그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가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기주의자라 저만 불안한 게 낫습니다. 그 이유를 물으신다면 지금부터 한 번 곰곰이 생각해보겠습니다.


어느 날 보니 저는 안약을 넣을 때 늘 왼쪽 눈에 먼저 넣기에 한 번은 오른쪽 눈에 넣으려는데 눈꺼풀이 차가운 느낌이 들었습니다. 습관이란 그런 것이더군요. 그때 창밖으로 바다가 보이는 곳에 있었습니다. 바다가 유난히 검푸르고 철썩이는 것이 꼭 드뷔시의 라 메르를 듣는 것처럼 격정적이었습니다. 그리고 멍하게 가만히 보고 있으니 나에게 손짓을 하는 것입니다.


그 손짓이 꼭 당신의 손길 같았습니다. 저는 그저 조금 슬픈 일들이 눈처럼 쌓여 있을 뿐인데 지쳤다는 생각이 하루의 언저리에 닿아 저의 영혼이 몰락하려고 할 때 당신의 손길을 느꼈습니다. 무릎을 꿇고 어딘가로 끌려가는 것처럼 비참한 삶이라 안약 하나 제대로 넣지 못해 그만 달콤한 손짓을 보곤 합니다.


창피함이나 부끄러움도 잊은 나를 발견했습니다. 그저 조금 슬픈 일일 뿐입니다. 어떤 영화에서 가슴에 주름이 잡힌 여자가 생각이 났습니다. 영상 속 여자의 얼굴은 모릅니다. 여자는 누워있고 유륜이 크게 박힌 가슴이 옆으로 처져 있었습니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가슴의 여자는 가슴에 구멍이 나 검은 피가 고름처럼 흐르는 것도 잊은 해 슬픔 속으로 잠들어 갑니다. 여자의 눈은 필시 슬퍼하고 있었습니다. 고통이라든가 아픔이 아니었습니다. 그 눈을 들키기 싫어 카메라는 여자의 구멍 뚫린 가슴만을 보여줍니다. 그렇게 고름처럼 저는 또 줄줄 비어져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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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추운 날 몸을 따뜻하게 데워줄 음식으로 찌개만 한 것도 없다. 호다닥 끓여 먹기에도 찌개가 가장 간단 빠르다. 이렇게 추위가 세상을 덮쳐 꽁꽁 얼게 했을 때 찌개는 몸과 마음에 뜨거운 공구리를 쳐버렸다. 그 뒤로는 휘이이잉 칼바람이 부는 날이면 찌개를 끓여 먹는다.


찌개는 제목처럼 근본 없이 끓여야 맛있다. 이유는 밖에서 몸이 식을 대로 식은 채 들어와서 빨리 찌개를 끓여 먹어야 한다. 냉장고에 있는 것들을 죄다 넣어서 끓이면 된다. 그러나 꼭 있어야 하는 건 두부다. 두부가 찌개에서 뜨거울 대로 뜨거워져 두부를 건져 먹었을 때 입천장이 홀라당 벗겨지는 그 고통과 짜릿함을 동시에 느껴야 몸이 풀리는 듯한 마법이 벌어진다.



참치라도 있으면 넣으면 된다. 꽁치? 꽁치는 고급 재료 속한다. 있으면 넣고 없다 해도 크게 실망할 필요가 없다. 근본 없이 이것저것 넣어서 끓이게 되면 뜨겁고 맛있(다고 느껴지는)는 찌개가 완성된다.


찌개가 보글보글 끓어오를 때 퍼지는 냄새가 있다. 벌써 이 냄새에 한 번 몸은 한 번 녹아내린다. 냉장고에 남은 고기가 있다면 그것도 넣고, 떡국떡도 넣고, 매운 고춧가루를 많이 부어 너무 맵다 싶으면 아이스크림을 넣어도 된다. 찌개나 라면에 아이스크림을 넣으면 모두가 으 하는 표정이지만 먹어보면 아주 맛있어한다. 이건 정말 혁명이다.


어릴  아버지가 겨울에 일하고 힘든 몸을 끌고 으로 곧장   있었던 문을 열고 들어오면 맛있는 찌개를 우리와 함께 밥상에 앉아서 먹을  있다는 작은 기대 때문일지도 모른다. 추운 겨울에 손을 호호 불며 버스 정류장에 아버지를 마중 나가서 아버지가 내리는 버스를 기다리는 그 시간이 우리에게는 신나는 일이었다. 찌개는 아버지에게 큰 위로이자 위안이었다. 근본 없이 끓여 놓은 따뜻한 찌개와 가족이 나를 기다린다는 기대가 하루 종일 노동에 지친 몸을 움직이게 하는 동력인 것이다.  평범함이 평범한 생활이 평범한 식탁이 아버지에게는 특별함이었던 것이다깨지지 않게 하리라.


이런 한 끼의 소중함을 잘 다룬 소설이 레이먼드 카버의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이다. 보통 인간의 삶은 잠깐의 행복한 순간을 연료로 길고 긴 썩 행복하지 않은 시간을 보낸다. 당장 행복하면 영원히 행복할 것 같고, 지금 불행하면 계속 불행할 것만 같지만 인간의 삶이란 그렇지 않다.


아들의 생일에 빵집에 케이크를 주문하면서 무뚝뚝하고 정이 없는 빵집 주인에게 아들에 대한 글귀나 메시지 같은 것을 케이크에 주문하려고 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해서 속상한 엄마와 조용하고 평화롭게 보내는 생활을 행복의 정점이라 여기는 아빠가 있는 평범한 가족의 천진난만한 아들이 그만 차에 살짝 치이고 난 후 병원에서 깨어나지 못하게 되는 이야기. 아들은 죽었는데 빵집 주인은 케이크 찾아가라고 자꾸 전화를 하고. 아이의 엄마는 아들의 죽음이 마치 빵집 주인 때문인 것처럼 느껴져 빵집 주인을 찾아가 아들이 죽었다며 울며 따지고 든다.


그러면서 모두가 다 아는 이야기처럼 빵집 주인은 미안해하며 빵과 커피를 내주며 “이럴 때 뭘 좀 먹는 일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될 거요”라고 한다. 그제야 며칠 동안 먹지도 잠도 제대로 못 잤다는 걸 알게 된 아이의 엄마와 아빠는 갓 구운 빵과 커피를 먹으며 허기를 채운다. 그리고 빵집 주인의 외로움과 어떤 보람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다. 그때 먹었던 빵은 그렇게 비싸고 좋은 빵은 아닐 것이다. 그저 근본 없는 찌개와 비슷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생활 속에서 타인과 매일 작게든 크게든 소통이 되지 않아 늘 화가 나고 짜증이 난다. 상대방은 나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고, 나는 상대방의 말을 듣지 않는다. 이는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 그렇다. 아침에 나올 때 엄마와 말이 통하지 않거나, 친구와 마음이 맞지 않거나, 애인은 연락도 없이 지하고 싶은 대로만 하거나.


그럴 때 근본 없는 찌개를 끓여 사이에 두고 먹다 보면 어느새 소통이 되고 말이 통하게 되기도 한다. 이런 근본 없는 찌개를 불편한 사람과는 먹지 않는다. 아주 가까이 있는 사람, 소중한 사람, 사랑하는 이와 같이 먹는다.


레이먼드 카버의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이야기는 로버트 알트만 감독에 의해서 영화가 되었다. 제목은 ‘숏 컷’으로 1995년 작품이다.


아이의 엄마로는 젊디 젊은 앤디 맥도웰이 나온다. 이 영화에는 지금의 대 스타들의 2, 30대 시절을 볼 수 있다. 앤디 맥도웰을 비롯해서 쇼생크 탈출의 팀 로빈스, 미국 영화계 안에서도 엄청난 미모의 소유자 매들린 스토우. 전 세계를 휩쓴 넷플의 기묘한 이야기 시리즈의 일레븐의 양아빠로 나오는 매튜 모딘, 말해 뭐하겠노 줄리안 무어와 아이언 맨의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까지. 그 외에도 수두룩하다. 3시간이 넘는 시간 이어지지만 이야기에 몰두하다 보면 푹 빠져 보게 된다.


그 이유는 일단 감독이 로버트 알트만 아닌가. 그리고 숏 컷 이 영화를 흐르는 골자는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이지만 레이먼드 카버의 모든 단편 소설을 이어 붙였다. 그래서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아, 이 장면! 같은 흥분을 느낄 수 있다. 영화 속 아주 젊은 줄리안 무어가 발가벗고 나오는데 가리는 게 없음을 알려드림.


영화 [드라이브 마이카]의 하마구치 류스케가 하루키의 단편들을 죽 엮어서 드라이브 마이 카를 연출한 것과 비슷하다. 영화 숏 컷 밑에 달린 댓글 중에 누군가 [세상은 작은 것들이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고 했는데 정말 딱이다. 영화가 그렇고 우리 삶이 그렇다. 그 속에 나의 근본 없는 찌개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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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는 바람이 있다. 바람을 느끼고 싶으면 바다로 온다. 바다에는 바다의 바람이 분다. 자동차를 타고 가면서 창문을 열어 놓으면 부는 바람은 바람이 아니다. 그건 그저 난기류, 터뷸런스 일 뿐이다. 바람에도 입이 있어서 바다를 찾은 사람이 마음에 들면 입으로 속삭여 준다. 너무나 마음에 드는 사람의 잠든 모습은 행복보다는 안타깝게 보인다고 바람은 말한다.


바닷바람은 머리카락을 한 올, 두 올 쓸어 넘긴다. 마치 연인이 머리를 쓰다듬듯이. 바다의 연한 바람은 딱딱하게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주무른다. 바다에 부는 바람의 입은 포용의 마음과 눈물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변심하는 여자처럼 태도가 돌변할지도 모른다. 힘 있게 몰아붙이는 바람일 때도 있다. 그래도 바다를 찾는 이가 마음을 열어 바람의 속삭임을 듣는다면 다른 삶에 대해서 귀가 열린다.


바닷바람이 하는 말은 포세이돈처럼 강압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긋나긋하기도 하고 명랑하기도 하고 발랄하며 엉뚱하기도 하다. 마치 바닷가에 사진 찍으러 와서 나는 누구? 같은 표정의 그녀와 닮았다. 바다에 부는 바람은 우회적이지 않다. 방해자가 없어서 곧장 달려들어 직설화법으로 말을 한다. 빙빙 돌려 우회하여 말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직설법으로 바람이 말을 하지 않을 때가 있다. 그건 바다 위에 또 다른 바람과 부딪히기 때문이다. 바닷바람은 말한다. 실수를 품으로 끌어안는 방법에 대해서. 나는 바닷바람을 사진으로 담고 싶었다. 바닷바람의 색은 필름 색감을 닮았다. 어떤 날의 바람은 너무나 강해서 바다가 아니면 도저히 만날 수 없는 사람을 만나는 기분이 든다. 그러나 너무 깨끗하지 않고 먼지가 약간은 껴 있어서 부예진 바람은 에구구구하며 옷을 터는 것처럼 불어와서 재잘재잘 거리는 바람도 만난다.


바닷바람은 우리를 좀 더 특별하게 만들어준다. 잘 꾸미고 온 자들도 바다에서는 다 흐트러진다. 바람이 심술궂어 입으로 후 하고 신나게 불면 한 껏 꾸미고 온 자들도 속수무책이 된다. 명품으로 치장한 사람들 틈에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가면 곧 특별해진다. 바닷바람은 우리를 그렇게 특별하게 만든다.


바다는 사실 무척 아픈 날도 있지만 절대 말하지 않는다. 언제나 “난 오늘도 무사해”라고 한다. 나를 볼 땐 눈으로 보기보다 마음으로 봐줘,라고 당부하는 것 같다. 치열한 문장들 속에서 살아남는 건 평범하고 일상적인 문장이다. 평범한 것은 실수를 사랑하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다.


내가 무심코 내뱉은 말이 상대방에게 의도치 않은 피해를 줄 수 있다는 것을 바닷바람을 나에게 속삭인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 한다면 고민을 하고 해 버려야 한다고도 말한다. 바람은 말한다. 바다와 한 번 맺은 인연은 눈으로 보이지 않지만 선명하며 꽤 단단하다고 한다. 쉽게 끊을 수 없는 만큼 한 번 끊어지면 다시 이어 붙이기가 힘들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바다와 바람은 우리에게 선물을 하나 준다. 그건 좀 더 상처받는 나, 좀 더 슬퍼하는 나, 좀 더 사고하는 나, 좀 더 고민하는 나를 나에게 준다. 언젠가 힘이 들 때 선물 받은 나를 꺼낼 수 있게 바닷바람은 나에게 포장하지 않는 선물을 준다.


우리는 저녁까지 바닷바람의 이야기를 듣다가 신나게 사진을 찍고 돌아왔다. 아주 평범한 것들. 나의 평범한 일상 속에는 달리기와 바다가 있다. 그리고 사진이 있다. 그리고 글이 있다. 이 모든 것들은 경계가 모호하고 전부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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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로이드 철이의 이야기


인간은 왜 인간을 닮은 안드로이드를 무서워하면서도 집착을 하는 것일까. 얼마 전(2021)에 일본에서 인간과 닮은 안드로이드(라고 쓰고 휴머노이드에 가까운) 오르타 3이 슈퍼 엔젤스라는 오페라 공연에서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인간과 닮았다고는 하지만 얼굴의 앞면만 인간의 모습이고 나머지는 차갑디 차가운 기계의 몸이었다. 게다가 하체는 뱀처럼 붙박이였다.


안드로이드와 휴머노이드의 차이점을 간단하게 말하면 안드로이드는 인간과 닮은, 완전히 같은, 흔히 영화에 등장하는 인간과 구별할 수 없는 인조인간을 말한다. 웨스트 월드 시리즈에 등장하는 호스트들을 안드로이드라 부른다. 반면에 휴머노이드는 안드로이드처럼 인간형 로봇이지만 팔다리가 달린 로봇 같은 형태를 지니고 있을 뿐이다. 인간의 피부나 인간의 얼굴을 그대로 본뜨지 않는 로봇을 말한다. 좀 더 세세하게 말하면 ‘가이노이드’도 있는데 이는 인간 여성형 로봇을 말한다.  


우리나라도 2015년에 인간형 로봇 휴보와 에버를 개발해서 선 보였다. 얼굴은 인형 인형 한 아인슈타인의 얼굴에 몸통은 우주복 같은 모습이었다. 또 하나는 완전한 로봇의 모습이었다. 안드로이드가 아닌 휴머노이드이다. 어쨌거나 모두 인간의 모습을 본뜨고 있다. 2015년에 한국이 어떻든 이 분야에서, 세계 로봇대회에서 우승을 했다.


인간은 휴머노이드를 넘어 안드로이드에 굉장히 집착을 하고 있다. 2017년 미국에서 소피아라는 인간과 아주 흡사한 안드로이드를 선보였다. 우리나라에도 방문해서 한복을 입고 사람들과 대화를 했다. 그때 벤처 장관인가? 박영선 의원과 대화도 하고 그랬던 것 같은데. 소피아는 말을 하면서 표정도 변하고, 상대방을 보며 나이나 남성인지 여성인지 구분도 했다. 소피아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로봇 최초로 시민권을 받았고 모델로 패션잡지를 장식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때 소피아를 보고 사람들은 놀라움과 경이로움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인간과 너무나 닮은 로봇의 모습에 무서워하기도 했다. 소피아는 2016년에 인간의 미래에 대해서 암울하고 비관적으로 이야기를 했다. 바로 인류를 파멸시키겠다고 해버렸기 때문이다. 놀랍도록 무서웠다.


그럼에도 감염병을 앓고 있는 전 세계를 보며 자동화 AI 기술력은 더 진보해야 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사람들은 무서워하면서 왜 인간을 닮은 안드로이드에 집착을 하는 것일까. 이는 인간을 이루고 있는 세포 체계가 잔인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오래전 미래의 모습을 아주 잘 표현했던 공각기동대. 쿠사나기 소령의 이야기였던 1편에 이어 2편에는 눈이 안경에 봉합되어 있던 바트의 이야기다. 거기에 이런 부분에 대해서 잘 언급을 했다.


애완용 로봇이나 가이노이드(가이노이드 또는 팸봇은 남성만을 일컫는 좁은 의미의 안드로이드와 대비되는 여성형의 휴머노이드)는 공리주의나 실용주의와는 관계없는 존재다. 왜 그들의 모습이 인간의 모습이며 인체 이상형을 모방해서 만들어지게 되는 것일까. 인간은 왜 닮은꼴을 만들고 싶어 하는 것일까.


애들은 늘 인간이란 규범을 벗어나 살아간다. 확립된 자아와 자유의지로 행동하는 게 인간의 정의라면 말이다. 인간의 전 단계로서 카오스 속에 살아가는 애들은 대체 무엇일까. 내면은 인간과 다른데 모습은 인간이다. 여자애가 소꿉놀이를 할 때 쓰는 인형은 실제 아기의 대체물이 아니다. 여자애는 육아 연습을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어쩌면 인형놀이가 실제 육아와 비슷할지도 모른다. 즉 육아는, 인조인간을 만들려는 오랜 꿈을 가장 쉽고도 빠르게 실현시켜주는 방법이다.


인간과 기계, 생물계와 무생물계를 구별하지 않았던 데카르트는 다섯 살 때 죽은 딸과 꼭 닮은 인형을 프란신느 라 이름 짓고 엄청 사랑했다. 바로 여기서 인간은 인간과 닮은 안드로이드에 집착하는 이유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보다 먼저 떠난 어린 자식이 너무 보고 싶은데 이미 한 번 죽은 딸은 다시 태어날 수 없다. 하지만 딸과 똑같이 말하고, 행동하고, 표정 짓고, 무엇보다 아빠와 생각을 공유하고 잠들 수 있다면 아마 부모는 어떤 짓이든 할지도 모른다. 자식이 부당한 사고로 죽고 나면 자식을 잃은 부모는 이전의 생활을 버리고 사고 수습을 하기 위해 몇 년이고 전사로 변하기도 한다. 비록 잔인하지만 인간은 인간을 닮은, 어쩌면 인간과 구분할 수 없는 안드로이드를 무서워하면서도 집착하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영화 안테벨룸을 보면 남북전쟁 전에 흑인들을 노예로 두고 부려먹었다. 그리고 현재까지 그 명맥을 이어가고자 하는 미국 백인들이 있는데 그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 것이 안테벨룸이다. 그런 망상 속에 빠진 미국 백인들. 그 수가 아직도 수두룩하다는 것이다. 미국은 인간도 많아서 그런지 아직까지 지구는 네모네모 하고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고 믿고 있는 인간들 역시 엄청나게 많다. 남북전쟁 전에 백인들이 흑인들을 처음 붙잡아서 노예로 두면서 온갖 갖은 악행을 저질렀다는 것은 역사와 여러 영화에서 잘 알고 있다. 또 동물원이나 박물관 같은 곳에서 발가벗겨 전시도 하기도 했다. 일본도 한국인을 그렇게 한 적도 있다. 치가 떨리는 일이다.


동물들을, 인간과 닮지 않은 가축들 역시 노예처럼 부리지만 말 그대로 가축으로 대한다. 그러나 흑인을 노예로 두고 있다면 이는 가축과 같은 취급을 하지만 그 이외의 무엇도 저지르려고 한다. 너희는 인간이지만 인간이 아니다. 인간을 닮았지만 인간처럼 생각하면 안 되고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 이 잔인함. 이 같은 잔인함이 세포를 타고 유전자의 열차에 올라 지금까지 이어지고 앞으로도 이어져 안드로이드에 집착을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웨스트 월드 시즌 1을 보면 너무나 잘 나온다. 원작을 가지고 이미 70년대에 율 부린너 주연으로 한 번 만들어졌기에 이번 웨스트 월드를 보면 인간과 구별을 할 수 없는 안드로이드는 자기 자신이 마치 인간이라 생각을 하지 피부를 이식한 인조인간이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한다. 인간과 똑같이 추억이 있고 밥을 먹고 술을 마시며 배설을 하지만 웨스트 월드 속에 관광하러 온 억만장자들의 진짜 인간들에게 마음대로 유린을 당한다. 아주 처참하게 찢기도 발리다가 결국 죽음을 맞이하기도 한다. 인간은 모든 것을 허용했을 때 착하기보다 악마 같은 본성을 드러낸다. 잔인함이 있는 그대로 돌출하여 나오게 된다.


만약 안드로이드가 인간과 닮지 않았다면, 가축을 닮거나 안드로이드 전 단계인 휴머노이드 같은 깡통 로봇의 형태였다면 인간은 그렇게 잔인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 인간으로 착각하며 지내는 안드로이드 철이의 이야기가 김영하의 소설 작별인사다. 위에서 말한 모든 것이 이 소설에 녹아있다. 실제 인간인 철이의 아버지와 자신이 안드로이드인지 모르는 철이와 그리고 주변 친구들이 미래의 인간사회에서 자신들의 세계로 가기 위한 이야기가 있다.


인간은 얼마나 더 잔인해질까. 요즘 뉴스를 보지 않으려 해도 여러 영상이나 매체를 보면 이토록 인간이 잔인해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법이라는 것 역시 제일 잔인한 것 중 하나다. 법은 나약하고 약자들에게 더없이 강인하고 위압적이고 위협적이다. 법이 언제 한 번 없는 사람들을 위해 존재했던 적이 있었을까. 법은 늘 정의 편에 선다고 하지만 돈과 권력은 정의와 법을 주무르듯 하니 인간은 참 잔인하다. 나도 잔인해지고 싶다. 잔인하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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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일주일 전 포근한 겨울의 아침 집 앞 바닷가에서



어릴 때 어머니는 늘, 항상 치약 좀 아껴 쓰라고 했다. 이상하다, 그놈의 치약은 조금만 짜서 쓰는데 금방 닳아 버리고 만다. 그러면 늘 한 소리 듣는 건 나였다. 치약은 조금만 짜!


이후 사람들은 너도나도 치약을 아껴 쓰기 시작했다. 이 놈의 치약 조금만 짜야지. 그렇게 모든 집들이 치약의 절약에 들어갔다. 그러자 치약회사들은 낭패에 부딪혔다. 치약이 예전보다 덜 팔리는 것이다. 그래서 치약회사 수뇌부들이 모여서 작당 모의를 했다. 그 결과 치약이 나오는 구멍을 크게 만들어 버렸다.


그랬더니 치약이 예전만큼 판매고를 올리는 거였다. 우리는 분명 조금만 쓴다고 생각했지만 구멍이 작았을 때보다 훨씬 많은 치약을 짜 쓰고 있었다. 게 중에는 처음 치약 뚜껑을 따면 밖으로 툭 튀어 나가는 치약도 있었다.


우리는 아무리 똑똑하고 현명하게 생활을 한다고 생각하고 지냈지만 기업은 우리의 머리 위에 있었다. 이걸 알아채기는 쉽지 않다. 세상은 온통 이런 구멍들이 곳곳에 있어서 자타가 공인하는 똑똑한 사람이라도 그 구멍에 자기도 모르게 빠져버리고 만다.


안 그래도 많이 팔리는 소주를 어느 순간 첫 잔은 고시래 해야 한다며 땅바닥에 버리고 둘째 잔부터 소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그 버리는 한잔 덕분에 소주는 훨씬 많이 팔려 나갔다. 고시래는 고수레의 방언 같은 말로 굿을 할 때나 들에서 음식을 먹기 전에 조금 떼어서 귀신에게 먼저 바치면서 하는 소리나 짓을 말하는데 어느 날, 느닷없이 소주에 그게 붙어 버렸다. 항간에는 이 첫 잔의 고시래를 소주 회사에서 흘렸다는 소문도 있었다.


어린이들의 인터뷰는 참 재미있는 게 많은데, 엄마는 늘 화가 나 있어요. 왜 화를 내는지 모르겠어요. 엄마는 우리를 보면 좋은 말을 해요. 좋은 말로 할 때 밥 먹어라, 좋은 말로 할 때 빨리 자라. 그 어린이들이 엄마가 되면 이상하지만 늘 화가 나 있다.


여기서 발전을 하면, 사장님은 왜 아침마다 화가 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아요. 사장님은 기분 좋아야 할 오전에 우리를 보면 늘 화를 내는 걸까요? 사장님이 화를 내는 건 우리 때문이라는데 우리가 뭘 그렇게 잘 못한 것일까요? 하지만 시간이 흘러 내가 사장이 되고 보니 그때 그 사장님이 아침마다 왜 우리를 보며 화를 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생활을 하면서 알게 모르게 꽤나 똑똑하게 처신을 하고 있다고 생각을 한다. 매일 경험치를 쌓으니까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다. 요즘은 물가의 상승으로 인해 전부 가격이 올랐다. 그런데 가격이 오르지 않고 당당하게 마트의 매대를 지키는 과자나 음료도 있다. 그러면 우리는 착한 과자, 착한 음료라고 생각하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기업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는 않다. 바보들이 아니라는 말이지.


똑똑한 우리보다 한 수, 아니 두 수, 세 수 위에 있다. 초코바 같은 경우 원래 50그램인데 사람들에게 착한 분위기를 심어주기 위해 가격은 그대로 둔 채 양을 45그램으로 줄여서 판매를 한다. 용량 따위 사람들은 거의 보지 않는다. 똑똑하고 현명한 사람들도 식품을 구입하면서 뒤에 적힌 성분이나 용량을 꼼꼼하게 전부 읽어보지 않는다. 게다가 글자가 너무 작아서 노안이 오면 에이 하며 아예 쳐다볼 생각을 않는다. 마치, 너 눈이 나쁘면 이런 건 읽지 않는 게 좋을 걸,라고 하는 것만 같다. 이 같은 편법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가격 변동이 없는 과자나 음료를 착한 과자야 하며 서로 공유하게 된다. 아마 우유도 예전에 비해 용량이 많이 줄었다.


인간은 오류 덩어리고 모순적이다. 그걸 잘 알지만 그 사실을 인정하기는 싫다. 받아들이는 건 또 너무 어렵다. DC의 미드 시리즈 샌드맨을 보면 인간의 모순에 대해서 잘 이야기해준다. 인간이 타인에게 연민을 품는 이유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이기적이기 때문이다. 아무 편견 없이 말을 해보면 인간은 그렇게 설계되었고 그렇게 만들어졌다. 그 사실을 체득하면 우리가 생물학적이고 선천적인 이기심을 바탕으로 행동한다는 걸 안다면, 삶을 받아들이기 한결 쉬울 것이다. 인간이 이기적이란 걸 알면 누군가의 행동이나 거짓말에 상처받을 필요가 없어진다. 사람들은 이기적이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인간이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거짓말은 안 좋은 것, 비난 받아야 하는 것, 호러블 한 것으로 배우고, 배웠고 또 가르치고 있다. 거짓말을 하면 안 돼. 연인 사이에는 더욱더 거짓말이 금기시된다. 절대 하면 안 되는 것이다. 거짓말로 인해 망하는 경우를 많이 봐왔고 경험했기에 우리는 서로 진실해야 해.


진실이 하지만 언제나 옳은가. 참 애매하다. 한 아이의 엄마가 오랜만에 외출을 위해 얼굴에 화장을 했다. 거울을 보니 꽤나 화장이 잘 된 것 같다. 화장이 잘 먹히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기분이 좋다. 친구들을 만나서도 열심히 사진을 찍을 테야. 옆에 있는 4살 아들에게 엄마 얼굴 어때?라고 하니 “커!”



우리가 실은 얼마나 모순된 삶을 있는가 하면, 인간이 가장 사랑하는 울타리인 가족을 생판 모르는 이와 만나서 가족을 이룬다. 어릴 때는 모르는 사람은 따라가면 안 되는 존재지만 성인이 되면 아는 사람이 아닌 모르는 사람을 따라가서 만나서 연애를 하고 사랑을 해서 가족이 된다. 완벽한 가족이 되려면 가족끼리 가족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옛날 옛적의 여러 나라 왕족들은 가족끼리 가족을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는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인간은 모순적이게도 모르는 이와 가족을 이룬다. 그리고 원래 가족이었던 부모와는 안녕, 하며 떨어져 지낸다. 자식을 낳고 애지중지 길러 애들이 성인이 되면 마찬가지로 우리 곁을 떠난다. 인간은 유전자처럼 이런 끊임없는 반복의 주기를 살고 있다. 모순에 모순을 거듭해서 모순을 뒤집어서 모순이, 모순이 아닌 것처럼 받아들여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번 코로나(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재유행이 된다고 하는) 사태를 보면 똑똑한 사람, 현명한 사람, 권위적인 사람 모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처음 불어닥친 감염병 앞에서는 많이 알고 있는 지식은 전혀 무용지물이었다. 죽기도 많이 죽었다. 마치 지구가 흘러넘치는 모순 덩어리 인간들을 정리하고 있는 착각마저 들었다.


과학자들에 따르면 태양도 수명이 다 할 때가 온다고 한다. 태양은 질량이 높지 않아서 뭐 이렇게 저렇게 해서 천천히 팽창하다가 펑, 하고 폭발을 하여 수명이 끝나는 날이 오는데 지금으로부터 50억 년 인지, 50억 만년인지 뒤라고 한다. 그때가 되면 태양은 소멸하고 태양계 역시 끝이 난다고 한다. 그때 인간은 정말 어떤 형태가 되어 있을까. 아무래도 진화가 될 때까지 되어서 지금의 모습과는 어떻게든 다를 것이다.


태양의 폭발보다 지금은,

엄마 얼굴 어때?

“커!”가 더 신경 쓰이는 현재,

뭐든 덜 신경 쓰며 살면 참 좋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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