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젤링이 어울리는 계절


카푸치노를 마시고 나면 컵에 이런 띠 같은 게 보인다. 몇 해 전에 소지섭이 맥주 광고에서 엔젤링을 유명하게 만들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엔젤링에 대해서 열심히 검색을 해보았는데 맥주의 엔젤링이라는 것은 찾을 수 없었다. 물론 나의 검색 능력 때문이겠지.


그러다가 한 블로그 중에 봉군이라는 블로거가 맥주에 관해서 모든 것을 알려주고 있는데 그 사람이 구글링을 통해서 엔젤링을 찾아본 모양이었다. 결과적으로 광고에서 맥주 엔젤링 띠는 훅 하게 만드는 그저 광고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카푸치노를 마시고 나면 컵에 이렇게 엔젤링 나타난다. 이 엔젤링은 왜 나타나는 것일까. 이건 카푸치노에 들어가는 성분 때문이라고 한다. 카푸치노를 마시고 이렇게 엔젤링 띠가 나타나지 않고 그저 컵 안쪽 면에 흘러내리는 모습이 보이는 카푸치노도 있다.


카푸치노에는 커피 외에 우유가 들어간다. 우유는 데웠을 때, 그러니까 온도가 올라갔을 때 맛의 미묘함이 우유회사마다 다르다고 한다. 저지방을 쓰면 카푸치노 속에서 스팀기가 작동을 했을 때 변성을 가져오기에 많은 바리스타들은 각 회사에서 받아온 우유를 가지고 좀 더 맛있는 카푸치노를 만들기 위해 노력을 엄청나게 한다고 한다.


저 엔젤링 띠는 우유 속의 포화지방의 함량이 최소화되었을 때, 가벼워진 지방이 띠를 형성해서 커피 잔의 벽면에 붙어 있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려면 거품의 양과 질감에 대해서 신경을 써야 하고 우유의 온도를 예민하게 맞춰야 한다. 이런 카푸치노 한 잔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커피에서 눈을 떼지 않고 커피를 만들어내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 커피쟁이가 만든 커피라면 한 잔이 주는 맛과 기쁨은 배가 될 것이다.


반대로 띠가 형성되지 않고 흘러내린 카푸치노는 지방의 성분이 많을 것이고 커피의 신맛을 죽이는 역할을 하여 카푸치노의 맛이 달리지기도 한다. 이렇게 온도차에 따른 우유가 들어가서 커피의 맛을 살리려고 노력하는 바리스타들은 스팀기에 주목을 한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받아온 커피 머신의 스팀기 주둥이를 특별하게 주문해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 특별한 스팀 주둥이를 주문하는 곳은, 개인이 커피를 만들어 파는 작은 가게인데 그곳 주인이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맛있는 카푸치노 하나를 만들기 위해 고심을 하다가 스팀기의 주둥이에 이유를 붙여 자신이 그 스팀기 주둥이를 주철로 직접 만들었다고 한다.


그 소문이 알음알음 퍼져 카푸치노에 목숨을 건 바리스타들은 제작을 요구하고 그 주문받은 주철로 만들어내고 있다고 하니 카푸치노의 세계도 굉장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저 몇 천 원 내고 마시는 이 한 잔의 카푸치노 속에 이런 숨은 노력과 꾸준함이 있었다니.


바야흐로 카푸치노가 어울리는 계절이다. 이런 날 카푸치노 한 잔은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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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넓은 세상에서 주인공은 아니다, 그러나 내가 손을 뻗고 손이 닿는 곳에서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어떤 좌절을 맛보았고, 어떤 노력을 했을까.

이 세상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는 건 일찌감치 일아버렸다. 그러나 내가 속한 학교, 회사에서조차 나는 티 안 나는 변두리 인생일 뿐 단 한 번도 주인공이었던 적이 없다.

주인공이 될 필요는 없어, 주인공을 늘 할 수는 없잖아? 그러나 내가 쓰는 글 속에서는 내가 주인공일 수 있는데도 나의 글 안에서조차 나는 주인공 주위를 맴도는 주변인일 뿐이다.

분명 어린 시절 모든 것이 나의 중심으로 돌아갔다. 이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뱅뱅 맴도는 것 같았다. 내가 중심, 주인공이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는 순간이 온다.

지옥의 화원, 이 영화를 한 줄로 말하자면 ‘만화 같은 등장에 만화 같은 강인함에 만화 같은 전개가 있는 병맛 영화‘다. 이 과함의 분출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오랜만에 실컷 웃을 수 있다.

대괴수 에츠코의 과한 립스틱마저도 계산된 터치로 그려낸 캐릭터들의 병맛 과한 일본식 대사와 엔도 케이지가 오피스 레이디로 나타나는 이 기기괴괴하고 과한, 폭발하는 병맛 꽉 찬 영화를 보며 드는 생각은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이라는 것이다.

가정에서, 친구들 무리에서, 내가 다니는 학원에서 심지어 단짝인 친구와 나 사이에서도 주인공은 내가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이 온다. 설령 주인공이더라도 그 자리를 내줘야 하는 순간, 바로 그 순간이 온다.

만화 주인공 특유의, 뭘 잘 못하지만, 천진난만해서 어딘가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를 만들었고 주인공처럼 누구보다도 강해 보이자라고 항상 마음에 새겼다. 하지만 나는, 지고 말았다.

나는 결국, 주인공이 될 그릇이 아니었다. 나 같은 건 어차피 만화에서 흔한 아슬아슬하게 져서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는 조연에 불과했다. 지금까지 주인공인 척했던 내가, 말도 안 되게 부끄러웠다.

이 영화는 두 가지의 관객으로 나뉜다. 뭐야 씨발라먹을 수박 새끼 같은 영화라며 뛰쳐나가는 관객과 하하하 역시 B급이 좋아, 과한 병맛이 좋아, 하며 보다가 나처럼 그 안을 잘 벌려 각성하게 되는 관객.

비록 주인공은 아닐지라도 시선을 달리보면 내가 서 있는 이 자리에서 나는 또 다른 주인공인 것이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지금처럼 열심히 싸우면서 재미있게 지내는 것이다.

영화는 마지막 뜻밖의 전개로 흘러간다. 영화 죠시스(여자들)처럼 온통 병맛이 영화를 꽉꽉 메우는데 잘 보면 꽤나 재미있는 포인트가 있는 ‘지옥의 화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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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전부 하나의 포즈로 사진을 찍어요?


2주 전 일하는 건물 로비에 크리스마스트리 포토존이 생겼다. 나는 바로 트리가 보이는 곳에서 일을 하기에 로비를 지나치며 포토존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을 2주 동안 내내 봤다. 아이들과 함께 건물에 들어온 엄마아빠들은 어김없이 아이들을 앉히거나 트리 옆에서 사진을 찍었는데 전부 아이에게 카메라를 보라고 하여 똑같은 포즈로 사진을 찍었다.


대체로 아빠보다 엄마가 아이들의 사진을 찍어 주었는데 백 퍼센트에 가깝게 아이들에게 카메라를 보라고 하여 사진을 담았다.


자, 여기 봐, 여기 좀 봐. 폰 보자.


나이가 6, 7세 정도 된 아이들은 그동안 엄마에게 많이 사진을 찍혀봐서 가만히 훈련된 미소를 짓고 카메라를 봤다. 그러나 나이가 어린아이들, 2살 정도, 그 미만의 아이들은 카메라를 보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들이었는데도 반드시 카메라를 보라고 해서 사진을 찍으려고 했다.


이상하다, 굳이 아이가 카메라를 보지 않고 고개를 돌리고 있어도, 뒷모습이라도 그것대로 사진을 찍으면 자연스러워 보이고 드라마틱하게 나올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모든 어른들이 아이들의 눈높이보다는 약간 구부정하거나 똑바로 일어서서 아이의 사진을 담으니 카메라가 밑으로 내려다보는 구도로 찍었다. 아마 태그로 들어가서 이 트리를 배경으로 찍은 아이들 사진을 보면 전부 비슷할 것이다.


아이들의 얼굴은 전부 다른데 모두가 비슷한 구도와 비슷한 모습을 사진이 찍혀 있는 건 어째 생각해도 이상하다. 어색하게 훈련된 미소와 아이들을 조금 내려다보는 듯한 카메라의 구도는 완벽하게 어른이 바라는 사진인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이 커서 지난날의 사진을 보면 왜 나를 이렇게 찍었어?라고 한다.


어떤 아이들은 너무나 순수해서 지나가면서 산타에게 인사를 한다. 오늘은 어떻게 지냈어? 라며 평소 친구에게 하듯이 말을 건넨다. 그때 말을 건넬 때의 모습을 카메라로 담으면 아주 멋진 사진일 텐데, 그런 아이를 돌아서게 해서 미소 짓게 만든 다음 카메라를 보기 바라며 사진을 담는다.


물론 엄마의 입장에서 아이의 얼굴이 환하게 나오는 사진을 담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폰 갤러리를 보면 아이의 사진이 전부 비슷하다. 엄마의 눈에는 비슷하게 보이는 모든 사진 하나하나가 전부 소중하고 다르게 보이겠지만 사진에서 엄마의 사랑을 소거하면 너무나 재미없고 다 같은 사진일 뿐이다. 한 번쯤은 자유로운 아이의 모습을 담아도 된다.


아이의 사진으로 너무나 유명한 ‘천국의 정원으로 가는 길’은 유진 스미스가 자신의 아이들 모습을 담은 사진이다. 아이들이 어딘가를 향해 아장아장 걸어간다. 그 뒷모습을 담았다. 제목처럼 정말 천국으로 가는 것만 같은 기분이다.




카메라를 응시하며 아이들 사진을 담는 작가 중에 셀리 만이 있다. 셀리 만은 자신의 아이들의 모습을 담았는데 이렇게 카메라를 응시하는 모습을 담아내기까지 많은 과정이 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게 사진을 담고 있다. 마치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겠다는 듯이.




또 사진 저널리스트, 다큐 사진작가 메리 엘렌 마크 역시 카메라를 응시하는 인물을 많이 담았는데 다큐 사진의 특성이 짙게 드러난다. 메리 엘렌 마크는 사회의 어두운 부분을 빛으로 잘 표현한 사진작가라고 나는 늘 생각한다. 그녀는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을 검수하기도 했다.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 영화를 보면 아주 짧게 메리 엘렌 마크가 나온다. 그녀는 비교적 우리와 오랫동안 같이 살아있다가 몇 해 전에 죽었다.




모두가 사진작가가 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누구나 사진작가이기도 하다. 이제 사진이라는 건 한 개인이 매일 수십 장씩 찍으니까 현재는 더 이상 전문가의 영역이 아니게 되었다. 나의 가족, 내가 사랑하는 이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고 기록한다. 이 만큼 추억하기에 좋은 매개는 없다. 내 아이의 모습을 담을 때 눈높이만 맞춰보자. 그러면 시간이 지난 후 그 아이가 조금 컸을 때 꽤나 드라마틱하게 추억할지도 모른다.

너 코


내 코



뭐 어쩌라고


디자인해 봄



출력해 봄



그나저나 트리 그렇다 쳐도 크리스마스는 너무나 기묘해서 하루만 지나면 캐럴이 듣기 싫다고하루 종일 나오는  캐럴들트리는 내년에 치우더라도 캐럴은 그만  틀어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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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2-12-29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담배 피는 포스가 장난이 아닙니다. 포스가 함께 하길...

교관 2022-12-30 11:44   좋아요 0 | URL
네 ㅎㅎ 그럴게요
 



어릴 때부터 단팥죽보다 팥죽이 좋았던 나는 일주일 내내 팥죽만 먹으라고 해도 넵! 하며 대답을 할 정도였다. 나에게는 그런 음식이 몇 있다. 사람들은 질린다는데 절대 질리지 않고 몇 날 며칠을 매일 먹어도 좋을 음식들.


나는 카레도 그런 음식이라 일주일 내내 질리지 않고 먹은 적도 있었다. 그때는 대학교 때 자취할 땐데 친구들은 일주일 내내 카레만 먹는 나를 보며 몸에서 카레 냄새난다고 실부라 했지만 자취에 찌든 홀아비냄새나는지들보다 나았다. 고 생각했다. 뭐 도긴개긴이지만.


팥죽에 동치미 무는 정말 찰떡궁합이다. 따뜻한 팥죽을 먹고 시원한 동치미 국물을 한 숟가락 떠먹고 무를 아작아작 씹어 먹는다. 나에게 있어 가장 완벽한 팥죽먹기다. 팥죽을 먹을 때에는 붉은 김치 말고 열무김치나 동치미가 잘 어울린다. 뭔가 과학적이거나 이유는 없다. 그저 그런 느낌일 뿐이다.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팥죽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 그 말은 어릴 때에도 팥죽은 집에서 거의 먹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어릴 때에도 단팥죽이나 호박죽보다는 그냥 팥죽을 좋아했다. 역시 외할머니 때문이었다. 나의 외할머니.


이 세상에 외할머니는 딱 한 명뿐이다. 할머니는 많지만 외할머니는 오직 한 사람뿐이다.


나의 외할머니에게는 많은 손주들이 있었지만 유독 나와 친밀한 관계가 된 것은 내가 4, 5살 즈음 집안 사정으로 부모님과 떨어져 외가에서 외할머니와 2년 정도를 같이 살게 되었다. 매일 밤 엄마가 보고 싶다고 눈이 퉁퉁 부을 정도로 울었다. 그럴 때 외할머니는 나를 달래야 했다. 기억은 안 나지만 사진을 보면 나는 그렇게 서럽게 울고 있었다.


동네 아이들과 어울리려고 하면 나는 멀리서 온 엄마 없는 놈이라고 따돌림을 당해서 아이들에게 덤벼들다 맞아서 울었다. 그럴 때 외할머니가 원더우먼처럼 나타나서 나를 구해 주었다.


할머니는 울고 있는 나의 등을 슬슬 문질러 주며 팥죽을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어 주었다. 처음에는 아무 맛도 나지 않고 싫어 죽을 것 같은, 팥 맛만 나는 팥죽이었는데 어느 순간 외할머니와 나란히 앉아 팥죽을 맛있게 먹었다. 시간이 흘러 초등학생이 되었을 때 외할머니가 집에 오시면 3,40분 정도 걸어서 전통시장까지 가서 팥죽 골목에 앉아서 팥죽을 먹곤 했다.


그 팥죽골목이 아직까지 있어서 조깅을 하고 오면서 둘러 오더라도 그곳으로 오곤한다. 그곳에 가면 외할머니의 등이 보이기도 하고, 나란히 앉아서 팥죽을 먹으며 웃던 외할머니가 떠오르기도 한다.


팥죽을 한 숟가락 떠먹고 나면 외할머니는 동치미 국물을 꼭 먹였다. 혹여 팥죽이 목 막히게 하지나 않을까 싶어 동치미 국물을 떠 나를 먹였다. 나의 완벽한 팥죽 먹기는 이렇게 형성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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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째 한파가 계속되고 있다. 그 와중에도 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정도를 달렸다. 강변의 조깅 코스에 사람이 1도 보이지 않고 바람이 없으면 그나마 뭔가에 수긍하며 적응을 하며 달리겠지만 바람이 심하게 불면 아무 생각이 없다. 진정 아무런, 아무 생각이 없어진다. 정말 머리에서 생각자체를 아예 하지 않기를 바란다면 한파 속, 바람이 심한 날 달려보는 걸 권합니다.


여기는 남부지방이고 눈은 거의 볼 수 없는 곳이라 윗지방의 한파보다는 덜 춥다고 생각하는데, 그래서 조깅을 할 때 다리는 얇은 레깅스 한 장에 체육복 반바지를 입고 달리는데 조깅을 하면 몸이 달아오르기 때문에 문제가 될 건 없다. 그런데 며칠 동안은 정말 추웠다. 장갑을 끼고 조깅을 했지만 손가락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아프고 감각이 없어서 조깅이 끝나고 들어와서 손이 녹으면서 검지 손가락이 아프기 시작하더니 아직까지 불에 댄 것처럼 꾸덕꾸덕한 느낌이 드는 게, 여기서 심해지면 동상이 걸리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한 건, 참으로 이상한 건 2018년에도 한파가 왔고, 그때에도 몇 년 만에 한파 같은 뉴스가 있었고, 나는 여전히 그때에도 조깅을 했다. 조깅을 하면서 찍은 사진들과 글을 보면 강에 얼음이 꽁꽁 얼어 있어서 보기만 해도 정말 추워! 가 절로 나와는 풍경이었다. 그럼에도 조깅을 하면 몸이 후끈해져서 마지막 까지 훅훅하며 달려서 들어왔다고 되어 있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이렇게 춥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요 며칠 한파라고 하지만 2018년처럼 강물에 심하게 꽁꽁 얼지도 않았다. 그런데 왜 그때보다 이렇게 추운 걸까.


생각해보면 내가 그때보다 나이를 먹어서 그런 것이다.라고만 생각을 했는데 사람들도 그때보다 지금이 더 춥다고 하는데 이유는 그때에 집 안의 보일러 온도가 요즘처럼 이렇게 내려간 적은 없었다고 한다. 2018년의 한파에는 차가운 냉기가 가득했지만 요즘의 한파에는 저 어디서 불어오는 찬 바람 때문에 체감이 더 드는 건지도 모르겠다.


엊그제는(검지 손가락의 감각이 없을 때) 얼마나 추웠는지 조깅을 하고 들어오면서 찐빵을 사 왔는데 사들고 들어오는 10분 만에 그 뜨거운 찐빵이 싸늘하게 죽어 버렸다. 게임오버였다. 아무튼 추운 것이다. 추운 날 조깅을 하면 분명 그에 대한 보상이 따랐다. 몸이 달아오르며 심장이 펌프질 하여 뿜어내는 피가 혈관을 타고 마구 돌아다니며 손끝과 발끝으로 퍼지는 그 기분을 느끼는 것도 아주 좋고, 다리가 추웠다가 한파에 적응이 되어 가는 것도 좋고, 한파가 불어닥쳐 모든 것이 차갑게 변하는 강변의 풍경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요 며칠 동안 폰 화면 터치는 하고 싶고 장갑은 벗기 싫고.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이 그저 달리는 와중에 근간에 들은 이야기들이 추위와 함께 떠 다녔다. 3교대를 하는 직업이거나 밤을 새우는 직업을 가진 여성은 그렇지 않은 여성에 비해 유방암에 걸릴 확률이 높다고 한다. 홀리오 이글레시아스의 멋있음을 따라한 사람이 박영규가 아닌가. 박영규가 예전 카멜레온을 부를 때는 홀리오 이글레시아스의 한국버전을 보는 것 같았다. 뻐꾸기는 탁란을 한다. 욕정이 타오르는 여자의 해소가 불가피할 때 여성은 비극의 시인이 된다. 삶은 포기하는 게 아니야.


이런 맥락도 없고 근간에 들은 이야기들이 이미지가 되어 한파 속 조깅을 하는데 나의 동무가 되어 주었다. 뻐꾸기 얘기가 나왔으니 세상에서 가장 얄미운 생물이 있다면 뻐꾸기를 따라올 수 없을 것이다. 뻐꾸기는 탁란을 한다. 자신이 알을 품지 않고 다른 새의 둥지에 뻐꾸기 지 알을 맡긴다.


그런데 아무 새의 둥지에 맡기는 게 아니라 모성애가 아주 깊은 새의 둥지를 골라서 그 안에 자신의 알을 넣어둔다. 그때 자신을 알을 넣는 대신 원래의 알을 밖으로 버려서 깨버린다. 참 못된 놈이다. 더 기묘한 건 그 안에서 뻐꾸기 새끼가 부화를 하잖아? 그러면 어미가 먹이를 구하러 갔을 때 원래 새의 새끼를 뻐꾸기 새끼가 밀어 내서 떨어트려 죽여 버린다.


본능적으로 그 짓을 하는 것이다. 그때 다른 새끼를 밀어 내기 좋게 뻐꾸기 새끼의 등에 오목하게 되어 있어서 그 오목한 곳으로 원래 새의 새끼를 담아서 밀어낸다. 유전적으로 그렇게 생겨먹은 새가 뻐꾸기다. 그렇게 붉은 머리오목눈이 같은 모성애가 강한 새가 뻐꾸기 새끼를 자기 아기로 알고 열심히 키우는데 다 크고 나면 새끼가 어미의 몸 세 배나 된다. 그래도 먹이를 찾아와서 먹이는 아주 이상하고 얄궂은 세계에 뻐꾸기라는 놈이 있다.


홀리오 이글레시아스는 키도 크고 수트가 잘 어울리는 데다 노래까지 너무나 멋지게 부른다. 홀리오 이글레시아스가 '헤이'를 영어보다 더 꼬부라진 스페인어로 부르면 뭇여성들이 그저 넘어가버린다. 여성들이 모이면 홀리오 이글레시아의 칭찬을 하는 바람에 뿔이 나버린 사람이 하루키가 아닌가.


하루키는 에세이에서 ‘나는 그 인가 있다는 가수가 싫다’라는 챕터에서 홀리오 이글레시아스가 인기가 있는 이유는 멋지고 잘 생긴 탓도 있고 노래도 잘 부르지만 사상적으로 텅 비어 있다는 데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닐까.라고 했다.

사실 근본 없이 하는 게 더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근본 없는 음식이라든가. 근본 없이 처음 시도하는 영화라든가, 즉 형식의 굴레에 들어가 있지 않고 비록 하늘에 한 번 선을 긋고 사라질지라도 궤도에서 이탈하는 별똥별에 사람들은 열광할지도 모른다. 옆에 안자이 미즈마루 씨의 삽화가 더 적극적으로 비꼬움을 웃음으로 표현하고 있다.


하루키: 내가 이런 식으로 말하면 홀리오 증후군의 여성들은 “그럼요, 무라카미 씨야 그렇게 생각하겠죠” 하고 악의에 찬 말을 한다. 그런 말을 들으면 왠지 내가 유달리 미남을 싫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맞다(웃음). 하루키는 미남을 싫어하는 것이다. 그건 비록 하루키뿐만 아니라 보통의 얼굴?을 가진 남자들은 미남 연예인들을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 여자들은 끊임없이 김태히와 송해교를 자신과 비교하며 누가 더 우월한 얼굴을 가진 지 꼭 묻지만 남자들은 또 그러지는 않는다. 우리 모두는 마음속에 있는 진실을 입 밖으로 전부 내뱉을 수 없는 그런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다.


홀리오 이글레시아스 하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그의 아들 이야기다. 아들도 스페인의 유명 가수인 엔리케 이글레시아스다. 얼굴도 잘 생기고 명문 캠브리지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졸업 후에는 레알 마드리드에서 종횡무진 활동한 축구선수였던 아버지의 우월한 유전자를 물려받아 키도 190이 넘고 멋지다. 스페인을 대표하는 가수지만 아버지만큼 인기가 없다.


그런 엔리케는 아버지와 사이가 무척 안 좋기로 유명하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이 엔리케라는 이름이 우리가 들으면 그럴싸하고 멋있지만 우리로 친다면 철수, 만수처럼 그저 재빨리 지어 버린 그런 이름이다. 아키코, 러시아의 쏘냐 같은 이름이다. 명자, 순자처럼 촌스럽다고 느끼는 이름이 엔리케 라는 이름이다. 홀리오 같은 슈퍼스타는 전 세계를 돌며 공연을 한다. 그러다 보면 여성들과 많은 만남을 가진다. 그러다 보면, 까지만 말하자.


아무튼 하루키는 이래저래 홀리오 이글레시아시를 질투한다. 여성들이 모이기만 하면 하루키 얘기가 아닌 홀리오 얘기를 하니까. 어쨌거나 올해도 남은 날들을 쉬지 않고 조깅을 한다면 360일 이상 매일 한 시간 이상 조깅을 한 셈이다. 나는 그렇게 빠르게 달리지 않아서 조깅을 하다 보면 열심히 달리는 조깅무리에게 따라 잡힌다. 그러나 무엇보다 끝까지 걷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날씨에 굴복하지 않고 아직까지는 매일 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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