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팔의 정봉이가 심장 때문에 수술을 하고 난 후 몸을 회복하는데 힘이 드는 가운데 정팔이가 병실에 오니 정봉이가 다 죽어가는 소리로 정팔이에게, 너 코피 나는 건 괜찮냐고 묻는다. 그 장면은 기억에 참 많이 남는다. 가족을 가장 잘 표현한 장면이었다.


가족.

가족 하면 눈물이 먼저 나오는 사람이 있고, 한숨이 먼저 나오는 사람도 있다.


MBC 스트레이트 2023 청년보고서 ‘희망금지’ 편을 보면 2, 30대 고독사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작은 집에서 고독사한 삼십 대 여성의 유품을 찾아가라고 그녀의 아버지에게 연락을 하니 찾아갈 것이 없어 전부 태워달라고 했다. 그렇게 30대 여성은 누구도 기억하지 못한 채 쓸쓸하고 고통스럽게 홀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f_AZQvPkkhc


YTN기사 중 ‘가족 돌봄 청년, 친구들보다 7배 더 우울하다’라는 기사가 있다. 청년인데 가족 중 장애를 가지거나 중병을 가진 가족을 돌보며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청년의 삶의 질은 무척 심각하다.

https://www.ytn.co.kr/_ln/0103_202304261646136914


기사에도 나오지만 열에 여섯은 우울증을 겪고 있다. 또 우울증을 겪는 대부분은 제대로 된 치료나 상담조차 받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그들을 다 이해하는 건 아니지만 조금은 이해한다. 나 역시 청년 시절 아버지 병간호를 2년 정도 했었다. 두 번의 크리스마스를 병실에서 보냈다. 병원 앞에 호텔이 있는데 병실에 난 창으로 보이는 반짝이는 호텔의 불빛을 보며 두 번의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낮에는 일을 하고 저녁에 병원으로 와서 낮동안 병간호를 한 어머니와 교대를 했다. 밤새 간이침대에서 잠이 드는 건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다. 새벽에 아버지가 뒤척일 때는 자동적으로 일어나서 아버지를 살펴야 했고 이상이 있다면 간호사를 호출해야 했다. 잠을 거의 잘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오전에 어머니가 교대하러 오시면 출근하기 전에 잠시 눈을 좀 더 붙이고 출근하곤 했다.

잠은 늘 부족하고, 부족한 잠이 누적이 되니 여기가 어디인지 내가 누구인지, 그런 상태가 된다. 하지만 몇 개월이 지나면 적응이 되고 몸이 너무 피곤하여 모두가 잠이 든 새벽 병동을 확인한 후 쿨쿨 간이침대에서도 잘도 뻗어 잤다. 얼마나 달콤하냐면 몇 분 잠든 것 같은데 벌써 아침이라 사람들이 오고 가고, 병실에 불이 들어오고, 간호사들이 다녔다.

처음에 간이침대에서 잠이 들어 일어나면 9세의 기운 좋은 남자아이가 몽둥이로 여기저기 때린 것처럼 몸이 욱신거렸지만 적응은 이딴 모든 것들을 해결을 해준다. 일 년 동안은 아무 생각이 없었다.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생각도 없었고 나을 길이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보며 낫기를 바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처음 크리스마스를 병실에서 보낼 때, 든 생각은 작년까지는 친구들과 여자애들과 함께 즐겁게 크리스마스를 보냈는데 내년에는 여기를 벗어나서 그렇게 보내겠지. 하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2년 병실 생활을 하는 동안 몸은 몸대로 정신은 정신대로 피폐해져 갔다. 보험이 되지 않는 수술을 할 때에는 벌어 놓은 돈을 전부 부어야 했고, 무엇보다 수술의 도장을 받을 때에는 어머니도, 여동생도 아닌 아들인 나의 선택이 가장 중요했다. 그런 압박이 심했다.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반나절을 병실에서 병시중을 드느라 혈압이 190까지 올라가기도 했다. 한 마디로 엉망진창인 것이다. 생활이란 것이 없다. 그저 일하고 일 끝나면 병원으로 가는 것이다. 그나마 일 할 때가 좋다. 그러나 어머니의 전화번호가 폰으로 뜨거나, 병원의 전화번호가 폰 화면에 뜨는 순간 가슴은 요동치기 시작했다.

숨소리와 신음소리로 들끓는 병동도 밤이 되면 고요해졌다. 나는 2년 동안 모두가 잠이 든 병동을 보며 간이침대에 엎드려 그날그날 글을 썼다. 글이라고 하기에는 거창하고 그날의 일들을 메모를 했다. 아버지가 중환자실에 들어가면 내가 할 일이 없기에 대기실에서 책을 읽었다. 그렇게 쓰고 읽은 책과 글이 꽤 많았다. 만약 그렇게 하지 못했다면 나는 아마 못된 자식처럼 도망쳐버리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가족이란 무엇일까, 같은 것에 대해서 생각이 드는 건 아버지는 2년 병실 생활 끝에 돌아가셨다. 만약 1년 더 병실 생활을 했다면 집을 팔고, 빚을 내야 했을 것이다. 모두가 다, 너는 빚이 없어서 다행이야,라고 말하는데 정말 다행일까.

기사에서 처럼 저렇게 끝이 보이지 않는 중증환자를 가족으로 둔 청년들의 삶에서 질이라는 건 찾아볼 수 없다. 밑바닥을 기어 다니고 있을 것이다. 설령 겉으로 표를 내지 않으려 할 뿐이지 힘들다고 말도 못 할 것이다. 눈을 감으면 보이는 그게 자신의 미래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런 건 힘내라 같은 말은 그렇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버지가 고작 2년 병실에 있을 때 과일 같은 거 사 오는 친구에게 이거 말고 기저귀를 사가지고 오라고 했다. 누구라도 이렇게 한 글자, 한 문장으로 적어서 계속 노출을 하여 공론화시켜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하게 만드는 방법이 지금으로서는 최고의 방법이며 최선의 선택이다. 기사를 보면 알겠지만 정부에서 돌봄 청년 실태 조사가 이번이 처음이다.

사람들은 생각만큼 남 일에 관심이 없지만 생각보다 타인을 돕고 싶어 한다. 하지만 알아야 도움을 줄 수 있다. 엄마 아버지를 병간호 잘한다고 효녀, 효자 같은 말로 퉁 치려 하는 관습은 이제 사라져야 한다. 가족이 힘에서 짐이 되는 건 한 순간 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속에 내가 속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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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 조깅을 하러 강변으로 나오면 초파일의 등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 이제 곧 부처님 오신 날이구나. 일전에 오랜만에 김밥을 먹었는데 초등학생 때 부처님 오신 날이 생각이 났다. 추억의 절반은 맛이라더니 정말 그런 것 같다. 음악과 음식은 추억과 너무나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마치 악마와 계약을 한 것처럼 말이다. 이걸 먹으면 그때가 반드시 떠오를 거야!


초등학생 때 부처님 오신 날은 신나는 날이었다. 생각해 보면 크리스마스보다 더 좋았다. 같은 공휴일이지만 성탄절은 겨울방학 안에 있었고, 초파일은 평일의, 그것도 좋은 봄날에 있었다. 초파일이 월요일이었던 적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월요일이 초파일이면 정말 좋지 아니한가.


크리스마스는 끝나면 허무한 마음이 따라다니는데 초파일은 끝이 나도 털끝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털끝하나 흔들리지 않았다는 말은 무슨 말일까. 성탄절은 한 달 전부터 온통 캐럴로 분위기를 하늘 저 위까지 띄우고는 만개했을 때 그대로 펑 터져버려 아주 허무했다. 고작 하루 차이인데 25일과 26일은 너무나 동떨어진 세계였다. 크리스마스 하루 지나서 듣는 캐럴은 듣기 싫었다. 그에 비해 초파일은 그런 의미부여가 없었다.


무엇보다 어릴 때 초파일이 다가오면 초파일 전 날에 거리 퍼레이드를 했다. 그걸 보는 재미가 있었다. 지방에는 일본처럼 지역 축제가 늘 있었다. 유월에는 70년대부터 시에서 하는 불꽃놀이가 있었다. 그 규모가 꽤 컸다. 규모가 크다는 말은 시간적으로 꽤나 길게 불꽃놀이를 했다는 말이다. 불꽃놀이가 시작하면 동네의 공터 같은 작은 공원에 가족들이 다 나와서 자리를 잡고 음료와 빵이나 맥주를 마시며 밤하늘을 수놓은 불꽃을 보며 즐거워했다. 그 불꽃놀이가 끊어지지 않고 매년 유월에 계속되다가 코로나로 인해 끊어졌다. 올해는 하려나.


불꽃놀이는 애써 혼자서 보러 가지는 않는다. 모양도 크기도 컬러도 아름답고 다 다르지만 불꽃놀이가 끝나면 불꽃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불꽃놀이를 같이 봤던 누군가는 기억이 난다. 목마를 태워준 아빠가 기억나고,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가면 그 사람이 기억이 난다. 불꽃놀이는 내밀한 기억 속에 같이 했던 누군가를 소중하게 추억한다.


초파일의 밤 퍼레이드도 그렇다. 어릴 때 동네 친구들과 퍼레이드를 보며 어디까지 졸졸 따라가며 즐거워했다. 그중에 도형이도 있었다. 부처님에 관한 코스튬과 각종 개조한 차량의 행렬을 보는 게 좋았다. 마치 놀이동산의 디즈니 캐릭터의 행렬처럼 말이다. 우리는 신나서 따라다녔다. 초파일 전날 학교에서는 서유기 영화를 보여주었다. 지금이야 서유기가 너무나 많은 버전으로 우후죽순 나와서 재미가 없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손오공의 신공을 보는 것은 어린 우리의 눈에는 너무나 재미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밤에는 퍼레이드를 보느라 재미있었고, 다음 날 초파일에는 늦잠을 잘 수 있었고 하루 종일 놀 수 있었다. 초파일에도 하루 종일 티브이를 했고 서유기를 보여주었다. 서유기 영화, 드래곤볼의 만화, 만화책, 게임은 우리의 최대 관심사 중 하나였다. 5학년 때인가, 초파일에 이른 아침부터 도형이가 우리 집으로 놀러 왔다. 동생과 나는 자고 있었는데 우리 엄마와 함께 도형이가 김밥을 말고 있었다. 도형이는 김밥을 말면서 날름날름 집어 먹었다.


부스스 일어났을 때 아버지는 회사에 일찍 가셨고 엄마는 볼일이 있다며 김밥을 잔뜩 말아 놓고 나가시고 없었다. 도형이가 접시에 김밥을 잔뜩 올려 들고 와서 티브이를 보자고 했다. 동생과 나는 일어나자마자 김밥을 먹으며 티브이를 봤다. 아마 티브이에 서유기가 하고 있었겠지. 엄마는 사이다를 냉장고에 사 넣어두셨다. 우리는 김밥을 볼이 터져라 입에 넣어서 먹다가 사이다를 한 모금 마셨다. 김밥은 소풍 때만 먹었는데, 이렇게 김밥을 먹으니 풍요로운 맛이었다. 그때는 아마 그런 맛을 몰랐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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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는 영혼과 영혼을 이어준다.

그리하여 키스를 끝내면 미련이 남아서 여운을 놓치지 않으려고 이어진 영혼을 좀 더 느끼려 한다.


계절과 계절의 키스도 그렇다.

계절과 계절이 만나는 경계가 지나면 마지막까지 남아서 지난 계절을 붙잡는 것들이 있다.

가을과 겨울이 만나 어딘가 뒹굴고 있는 낙엽이 그렇고,

겨울과 봄이 만나 느닷없이 내리는 4월의 눈이 그렇고,

봄과 여름이 만나 밥상 위에 오른 봄나물이 그렇고,

여름과 가을이 만나 아직 빠지지 않은 야외수영장의 물이 그렇다.


계절과 계절이 만나 키스를 해도 그런데

사람과 사람의 키스는 두 사람을,

영혼과 영혼을 이어준다.


정현종 시인의 말처럼 사람이 온다는 건

그 사람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가 함께 온다.

그 사람의 부서지기 쉬운 영혼이 삶에 부딪히면서

슬픈 영혼이 말하지 못할 미래의 아픔까지,

키스를 통해 위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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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며칠 동안 계속 핑크 플로이드의 음악을 틀어 놓고 있다. 그래봐야 유튜브로 틀어 놓는다. 등 뒤로는 기묘하지만 라디오가 계속 나오고 있고 앞으로는 라디오보다 큰 소리로 핑크 플로이드의 음악이 나오고 있다. 이틀은 더 펄스 공연을 틀어서 들었고, 오늘은 디비전 벨 앨범의 곡들을 계속 듣고 있다. https://youtu.be/Nc7bHU6ylvM


나 예전에 이 앨범을 엘피로 구입을 했었다. 그때 내가 무슨 음악을 안다고(뭐 지금도 모르지만) 핑크 플로이드의 디비전 벨 앨범을 구입해서 너무나 기쁜 마음으로 어린놈 주제에 주말이면 몇 시간씩 거실의 벽에 기대어 앉아 헤드폰으로 디비전 벨 앨범을 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 이전에 핑크 플로이드의 앨범이 두 개 더 있었다. 가장 유명한 앨범과 또 하나 있었다. 그 두 개는 카세트테이프였다.


그래서 친구들이 불러도 주말에 나가지 않고 집구석에 앉아서 등을 구부리고 핑크 플로이드의 디비전 벨을 들었다. 음악은 기묘해서 듣고 있으면 그때의 기억들이 떠오른다. 기시감이 굉장하다. 나는 형이나 누나가 없었기 때문에 오직 라디오와 음악 감상실에서 음악을 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가요를 좋아하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팝이나 강력한 음악에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를 뚫고 핑크 플로이드가 들어왔다. 로저 워터스의 이야기, 황제로 군림하던 그가 나가고 데이비드 길무어가 7년 만에 낸 앨범에 관한 이야기. 이런 가십은 몰입하게 만드는 이야기였다.


시간이라는 건 정말 알 수 없다. 시간은 때때로 사람을 조급하게 하거나 불안하게 한다. 그런 시간이 존재한다. 학창 시절에 일요일 오후 3시가 되면 불안하기 시작했다. 나는 얼마나 학교에 가기 싫었으면 일요일 오후 3시부터 불안했을까. 그때의 불안은 당시에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강해서 혼자서 마당의 무화과나무 밑에 앉아서 오후 3시를 미워하고 있었다. 그런 불안을 완화시켜 준 것이 핑크 플로이드 음악이었다.


일요일 오후 3시는 토요일 오후 3시와 너무 다르다. 금요일 오후 3시와도 다르며 월요일 오후 3시와도 다르다.


자율학습이 비교적 일찍 끝나는 토요일은 오후 3시가 되면 마음이 풍요로웠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토요일이었으니까. 자율학습이 없어서 1시에 수업을 마치면 강원분식에서 라면 곱빼기를 한 그릇 먹었다. 분식집 티브이에는 벅스 바니가 하고 있었다. 토요일 오후 하교 후 강원분식집에서 벅스 바니를 보며 먹는 라면 곱빼기는 정말 행복이었다.


4월의 봄, 토요일.

라면을 먹고 나오면 2시에서 3시 사이였다. 집으로 걸어서 왔다. 버스를 타야 하지만 토요일은 계속 걸었다. 도로에서 올라오는 아지랑이 냄새며 사람들의 봄옷이며, 전통시장의 넘쳐나는 봄기운이 토요일 오후 3시를 만끽하게 했다.


그러나 그 행복한 시간은 너무나 빨리 지나가 버렸다. 일요일 오후 2시까지는 괜찮다. 몸도 마음도 오후 2시부터 어떠한 구멍 속으로 서서히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든다. 그 때문에 일요일에 낮잠을 자지 않았다. 잠이 들어 버리면 어김없이, 대책 없이 몰아치듯 오후 3시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내 속에 있는 알 수 없는 무력감으로 일요일 오후 시간을 완전히 망쳐버리고 만다. 일요일 오후 3시는 그렇게 학창 시절의 어떠한 부분에서 불안을 잔뜩 가져다 준 시간이었다. 그럴 때 차분하게 핑크 플로이드의 음악을 들었다. 요즘도 그렇지만 하이 홉스에 와서 엄청난 마음의 차분함과 떨림을 동시에 느꼈다.


그래도 그때는 요즘처럼 이렇게 대기질이 엉망이거나 미세먼지로 마스크를 하고 다니지는 않았다. 우리가 생각하는 기존의 상식이 깨지고 있는 요즘이다. 학생들이 약을 구해서 약을 하는 이야기가 뉴스에서만 일어나는 일인 줄 알았는데 주위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났다. 학생의 부모는 천청벽력을 맞이했다. 요즘의 학생들은 내가 학생 때 느꼈던 일요일 오후 3시의 불안보다, 더 한 불안을, 몇 배는 더 큰 불안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약을 오래 하다 보면 약을 끊었다 해도 약을 하기 이전의 생활로 돌아가지 못한다. 맛있게 먹었던 과자나 음료가 아무 맛도 느낄 수 없게 된다. 사람들을 만나도 의욕이 전혀 없고 해서 뭐 하나 같은 허무가 늘 깔려있다. 생활이 힘든 것이 아니라 생활이 안 된다.


경북 고령 같은 고장에는 젊은 사람들이 다 빠져나가고 평균 연령이 54세라고 한다. 문제는 농사짓는 일을 거의, 대부분 동남아 사람들이 한다. 그러다 보니 다문화 가정이 많은데 오죽하면 한국인 드문 시골 고장의 학교에 다문화 아이들이 전부라 한국인 아이가 따돌림을 받기도 한다고 한다.


학령인구의 감소로 지방대학교가 폐교되는 이야기를 한 번 적었었다. https://brunch.co.kr/@drillmasteer/3437


이 심각함을 영상으로 보면 더 충격이다. 유튜브에 폐교가 되어 유령 마을이 된 모습을 보여주는 영상도 많다. https://youtu.be/kRo-s1NEyNQ


썩 왕래가 없는 아는 친구가 아이가 열이 펄펄 나서 소아과를 갔는데 한 시간이 넘도록 대기를 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제 겨우 말을 하는 아이가 아파서 기진맥진한 모습으로 병원 대기실에서 기다리는데 부모는 속이 타들어가는 것이다. 간호사들은 간호사들대로 힘들고, 아이는 아이대로, 아이의 부모는 부모대로, 의사는 의사대로 힘들고 피곤한 것이다. 너는 진짜 아이가 없어서 모른다고 하는데 속으로 맞아, 난 알 수가 없지.


일요일의 저녁은 금방 지나갔다. 어제와 다를 바 없는 오늘이었다. 어제와 지금이 다른 점이라면 먼지가 조금 걷혔다는 것이다. 온 세상에 부옇고 부연 대기의 최악 상태였는데 오늘은 먼지가 조금 걷혔을 뿐인데 이렇게 하늘이 다르다. 하늘의 구름의 층위가 마치 질 좋은 마블링의 단면을 보는 것처럼 다 드러났다.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어차피 하루는 지나가고 오늘과 크게 다르지 않은 내일이 펼쳐질 것이다. 오늘 평안하고 고요하게 지나갔다면, 오늘과 다르지 않을 내일도 무료하지만 고요하고 아무 일 없이 지나간다는 말일지도 모른다. 그 정도면 덜 불행한 것이다. 거기에 핑크 플로이드의 디비전 벨 앨범을 듣는다면 조금 행복한 날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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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참 눈물이 없네,라는 말을 예전에도, 지금도 듣는데 그건 정말 잘 모르는 말이다. 사람들 앞에서, 누구 앞에서 눈물을 흘릴 일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다. 나이가 들수록 눈물이 나는 포인트가 늘어간다.


단지 아이처럼 넘어져서 아파서 울지는 않는다. 잘 넘어지지도 않지만, 일단 한 번 넘어지면 어른은 너무 쪽팔린다. 아픔을 느끼기 전에 이 난관을 어떻게 수습하지 같은 생각이 먼저 든다. 나는 조깅을 하다가 넘어진 적이 있었는데, 누군가 조깅 코스로 팍 들어오는 바람에 피하다가,,, 아무튼 넘어지면 재빠르게 자리를 벗어나는 게 나에게는 관건이었다.


그런 어른들도 근래에 코로나에 걸려 아파서 우는 경우를 봤다. 나는 코로나를 아직 걸리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나 역시 걸리면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 같고 굉장한 고통으로 훌쩍 눈물을 흘릴 것 같다.


하지만 이런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어른이 되어서 눈물을 흘리는 경우는 좀 다른 곳에 있다. 감정을 건드리는 포인트에 눈물을 많이 흘린다. 보통 소설을 읽다가, 영화 또는 드라마를 보며 눈물을 흘린다. 주인공의 이야기에 빠져들어 몰입을 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주인공이 슬퍼하면 같이 슬퍼하고 기뻐하면 같이 기뻐한다. 그리고 다음 날 전부 모여서 그 전날 드라마에 대해서 수다를 떨며 그 감정을 공유한다.


나의 경우는 소설을 제일 많이 읽고 있지만 소설을 읽고 눈물이 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영화를 봐도 그렇고, 드라마를 봐도 눈물의 포인트에 그냥 넘어간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노래를 듣고 눈물을 꽤 흘리는 편이다. 노래를 듣다가 가사에 나도 모르게 빠져버리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가사 앞뒤로 서사가 보이면서 주인공의 삶에, 또는 가사와 곡을 쓴 작곡가에게 이입을 하게 된다. 요컨대 이문세와 이소라의 ‘슬픈 사랑의 노래’가 그렇다.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눈물이 나오는 건 아니고 잘 설명할 수 없지만 나만의 분위기가 잡혀 있을 때 눈물이 나오는 것 같다.


이 노래는 이영훈이 가장 사랑하는 곡이고 내 생애에 다시 작곡하기 힘든 곡이라고 했다. 86년에 자곡을 시작해서 6년 만에 멜로디를 완성했다. 그리고 그 멜로디에 맞는 가사를 쓰는데 또 4년이나 걸렸다. 10년에 걸쳐 노래 하나가 탄생했다. 그런 스토리가 슬픈 사랑의 노래를 부르는 이문세와 이소라의 목소리에 붙어 있어서 어떤 감정의 연약한 부분을 건드리면 눈물이 흐른다.


하지만 노래를 듣고 눈물을 흘리는 이유를 이렇게만 단정하기에는 애매한 점이 있다. 그건 팝을 듣다가 눈물이 흐르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내가 팝의 가사를 아는 것도 아니고, 스토리를 알 수 있지도 않다. 정말 설명할 수 없는 게 노래라는 생각이 든다.


혼자서 영화를 보다가 눈물이 나오는 포인트가 있는데 그건 무척 드문 일이다. 노래를 듣고 눈물을 흘리는 경우보다 빈도수가 낮다. 나는 영화를 무척 많이 보는 편이다. 장르도 특별하게 가리지 않는다. 독립영화부터 좀비물이나 고어물까지 두루두루 다 본다. 삼일에 두 편을 보는 편이다. 아주 많이 보는 편인데 최근에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린 기억은 없다.


보통 4월이 되면 장국영의 영화를 답습하듯 보게 되는데 좋아하는 장국영이 나온다고 해서, 장국영이 살아있지 않아서, 장국영의 모습을 영화 속에서만 본다고 해서 눈물이 흐르지는 않는다. 그런데 일마 전에 다시 본 록키 발보아의 이야기, 록키 1을 보고 눈물이 많이 흘렀다. 록키는 정말 뒷골목의 지질한 인생이었다. 못 배우고 껄렁하고 고리대금업자의 뒷일이나 하면서도 돈을 제대로 받아내지도 못한다. 그들이 불쌍해서. 두목이 때려주라는 것도 잘 못하는, 좋아하는 여자에게 농담이나 내뱉는 뒷골목의 쓸쓸함과 페치카의 따뜻함을 동시에 지닌 록키 발보아의 이야기.


록키는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70년대 필라델피아로 왔다. 돈을 걸어 내기를 하는 3류 복서장에서 몸을 혹사시킨다. 당시 미국은 기회의 나라였다. 필라델피아는 미국 독립의 성지이며 그 해가 독립 200년이 되는 해였다. 미국은 기념을 하기 위한 이벤트가 필요했는데 크리드와 록키의, 슈퍼 복서와 삼류 복서의, 신과 인간의 대결을 부추긴다.


록키는 배운 것 없고 배우기 싫어서 몸으로 되는대로 먹고살자, 같은 정신과 투박한 말투인데 영화가 진행될수록 그 말투가 친숙해진다. 록키는 에드리안을 순수하게 사랑하는 마음이 드러나는 장면이 있는데 점점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배우기 싫어하는 록키가 그녀에게 다가가기 위해 쓸쓸한 집에서 거북이와 금붕어에게 농담 연습을 하는 장면이 찡하다.


어둡기만 한 필라델피아 골목은 록키의 앞날과도 같다. 눈을 감으면 보이는 세계, 그것이 록키 발보아의 미래였다. 하지만 록키는 자신도 힘들고 앞이 보이지 않지만 친구의 여동생을 악의 소굴에서 데리고 집으로 바래다주고, 주위를 돌아보며 사람들을 챙긴다. 그러면서도 새벽마다 시합을 위해 조깅을 할 때 시장 상인들이 록키에게 사과를 던져 준다.


눈물이 펑펑 흐르는 장면은 마지막 크리드와의 시합이다. 너무나 멋진 장면이다. 판정승을 한 크리드. 사람들은 록키에게 재시합을 묻는다. 록키의 얼굴은 마치 찰흙을 벽에 던져 흘러내리는 얼굴로 애드리안을 큰 소리로 찾는다. 군중 속에서 모자를 잃어버리고 록키에게 안기는 애드리안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장면이 가슴을 몇 번이나 두드린다. 록키는 승리하지 못했다. 하지만 진정한 승리가 무엇인지 사람들에게 알려 주었다. 꼭 이기지 않아도 이길 수 있다는 걸 보여주었다. 너무너무너무 좋은 영화다.


당시에 록키를 실제 권투선수로 착각했던 사람들도 많았다. 영화 속 사과를 던져주는 것도 실제로 권투 선수로 알고 록키에게 던져 주었는데 그대로 영화에 삽입이 되었다. 요즘도 어떤 사람들은 록키를 실제 권투 선수 역사에 있는 실존 선수로 알고 있다.


록키를 몇 번을 봤다. 지치고 쓰러질 때 록키의 주제가는 많이 이들에게 어김없이 힘을 주었다. 저 필라델피아 광장의 계단으로 뛰어 올라가 양손을 높이 든 록키가 되어, 보이지 않던 앞도 보이게 될 것만 같다. 록키보다 더 멋진 사람은 코치였다. 록키의 모든 캐릭터가 눈물의 포인트다. https://youtu.be/K-YSlyhSues Rocky1 트레이닝 장면과 끝부분. -노래 : 록키 테마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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