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고 소주가 한 잔 당기는 날이라 돼지찌개를 한 번 끓였다. 방법은 너무나 간단하게도 물 넣고, 호박 넣고, 두부 넣고, 파 넣고, 양념 넣고 돼지고기 넣고 끓이면 된다. 너무나 간단하다. 뭐 국 간장? 고춧가루? 같은 건 넣지 않는다. 간을 보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경험상 대충 이렇게 끓이면 어느 정도 맛있기 때문에 그냥저냥 맛있다. 돼지고기는 비계가 붙은, 비교적 가격이 저렴한 돼지고기 부위를 잔뜩 집어넣으면 된다. 딱 저렇게 비계가 붙은 고기에서 나오는 기름 때문에 돼지찌개가 끓으면 맛이 좋다. 숟가락으로 밑바닥을 훑으면 두부가 잔뜩 들어있어서 입천장이 홀라당 다 벗겨지며 후후 하며 먹으면 된다.


이런 마이너 급의 비교적 저렴한 돼지찌개 집이 있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그 집의 단골(까지는 아니지만)이었다. 그 돼지찌개 집은 좀 기묘해서 손님의 98%가 남자손님이었다. 2%는 뭐냐? 2%는 남자친구를 따라온 여자 손님이었지만 일단 한 번 와서 먹고는 대부분 다시는 오지 않았다. 허름한 식당으로 새시로 된 여닫이문을 드르륵 열면 오래된 형광등이 아슬아슬 달려 있는 집이었다. 아슬아슬한 형광등만큼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나이가 많은 할머니가 돼지찌개 집주인이었다.


돼지찌개에 들어가는 고기는 썩 좋은 고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돼지찌개 집에서 돼지찌개를 먹는 그 누구도 상관하지 않았다. 돼지찌개 안에 고기가 상당했다. 숟가락으로 휘저으면 거짓말 좀 보태서 국물보다 고기가 더 많았다. 땀을 흘려가며 건져 먹는 맛이 좋았다. 비계에서 흐른 기름이 찌개에 떠 있어서 더 맛있었다.


풍채가 좋고 늘 같은 앞치마를 두르고 있고 머리가 새하얀 할머니가 식당을 했는데 4인용 식탁이 4개가 전부였다. 여자들은 좋아할 만한 분위기의 식당은 아니었다. 하지만 98%가 남자손님인 데에는 그 이유가 명확했다. 춥고 배고픈 겨울에는 정말 좋은 식당이었다. 매콤한 돼지찌개를 퍼서 밥 위에 올려 후룩 먹는 맛이 좋았다. 몸도 데워지고 배도 불렀다. 그러나 여름에는 못 갈 곳이었다. 결정적으로 에어컨이 없었다. 선풍기가 있었지만 여름의 그 찜통 같은 더위를 식혀주지 못했다. 그런 식당이라 손님이 없을 것만 같은데 땀을 뻘뻘 흘리며 돼지찌개를 먹는 남자 손님들은 늘 있었다. 테이블이 4개가 전부라 손님이 많지는 않았지만 절대 끊어지지 않았다.


만약 여름에 남자친구를 따라왔다가는 화장이 전부 홀라당 지워질 정도로 땀이 나고 입은 옷이 땀 때문에 엉망이 되기 때문에 여자 손님들은 오지 않는 집이었다. 주로 남자손님들, 그것도 20대 남자 손님들이 많았다. 식당이 꾸질꾸질하고 초췌해서 어디 바닷가 외진 곳에 있을 것만 같지만 아주 번화한 다운타운의 뒷골목에 위치해 있었다. 오래된 식당으로 그런 식당들이 도시마다 있다. 그리고 다운타운을 가득 채우고 있는 남성 보세 옷 가게나 신발타운, 휴대전화 파는 곳에서 일하는 남자들, 피시방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생, 백화점에서 일을 하는 젊은 남자 직원들이 돼지찌개 집의 주 손님이었다.


그래서 식사시간이 되면 작은 골목으로 들어와서 담배를 한 대 맛있게 피우고 돼지찌개 집으로 들어와 배부르게 먹고 갔다. 가격이 저렴했고 밥은 원하는 대로 퍼 먹을 수 있었다. 한 명이 와도 국밥처럼 돼지찌개 일 인분이 되었는데 두 명의 양이나 한 명의 양이나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저녁이면 돼지찌개에 소주를 마시는 근처 젊은 손님들이 있었다. 눌러앉아서 오랜 시간 마시는 게 아니라 밥을 먹으며 소주를 반주로 후루룩 먹고 나갔다.


우리는 여름에는 가지 않았지만 추운 날이면 가끔 가서 돼지찌개를 먹곤 했다. 이상하지만 썩 맛있지 않은데 맛있었다. 겨울에 가서 보면 자리가 꽉 차서 다른 곳으로 가기 일쑤였지만 자리가 비면 얼른 가서 앉아서 돼지찌개에 밥을 먹었다. 메뉴도 돼지찌개 달랑 하나다. 참 희한한 식당이었다.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켰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할머니가 굽은 등으로 돼지찌개를 팔았는데 어느 순간 가게가 문을 닫았다.


그 골목은 그런 식당이 죽 붙어있는 골목인데 돼지찌개 집이 문을 닫은 후로 다른 식당도 점차 사라졌다. 중간에 코로나가 끼면서 골목에서 오랫동안 자리 잡고 저렴하게 음식을 만들어 팔던 식당들은 대부분 없어졌다.


조금 없어 보이고 덥고, 조금 춥지만 하하 호호 뭐 이런 소리가 가득했던 식당들이었다. 그때에도 물가가 올라서, 같은 소리를 들었지만 할머니는 너네 먹을 만큼 먹고 가,라는 식이었다. 불과 몇 해 전의 일인데 아주 오래전의 일처럼 느껴진다.



오늘의 선곡은 돼지찌개 집에서 티브이로 많이도 봤던, 하염없이 눈물이 나~~ 제아의 후유증이다. 라이브 너무 잘 하는 거 아니야. https://youtu.be/YySS1GOlW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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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를 매일 듣는데 한 라디오 사연에 20년 지기 친구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20년 지기 친구인데 빌려준 돈을 가지고 영영 달아나 버렸다는 그런 사연이었다.


나는 그 사연을 들으며 생각했다. 도대체 왜 사람들은 연수에 그렇게 매달리는 것일까. 연수가 오래되면, 특히 인간관계에서 알고 지낸 기간이 길면 어째서 친밀한 사이라고 믿어버리는 걸까.


20년 지기 친구라고 해도 20년 동안 몇 번을 만났을까. 가끔 티브이에서 우리는 1년에 한 번 만나는 사이지만 매일 보는 사이처럼 너무나 친밀해요, 같은 연예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연예인들은 우리와 너무나 동떨어져서 그런지 뭐 그렇다고 하자.


고등학교 때 친구가 찾아와서 나에게 뭔가를 부탁했다. 만약 이 친구가 4개월 전에 만난 사회의 친구이고 4개월 동안 주욱 만나는 사이라면 나는 얼마든지 그 부탁을 들어줄 의향이 있다.


그러나 고등학교 때 친구라도, 설령 그 당시에 죽고 못하는 친구였다고 해도 10년 동안 연락이 없다가 느닷없이 나타나서 우리 친구잖아?라고 하는 건 뭔가 이상하다. 내가 그전에 뭔가를 부탁했거나, 손을 내밀었다면 모를까.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 지내면서 – 아버지가 병원생활을 2년 동안 할 때에도, 그리하여 나의 생활이 무너졌을 때에도 친구들에게 뭔가를 부탁하거나, 손을 내밀지 않았다. 특히 돈에 관한 것은 누구에게도 빌려달라고 한 적도 없고 빌려준 적도 없다. 좀 이상하게 살아와서 그런지 아직 대출도 한 번 없다.


라디오의 사연에서 20년 지기 친구라고 치고, 그 친구와 20년 동안 몇 번 만났을까. 매일 한 시간씩 만날까. 성인이 되면, 그리하여 각각 가정을 이루고 나면 힘들다. 그래서 인간은 어쩌다 만나서 수다를 떨며 가정생활의 스트레스를 푸는 것이다.


그럼 여기에서 친구보다 더 밀접한 관계인 가족, 부모나 형제자매가 친밀한 관계인가. 정희진 작가는 [한국 사회에서 가장 문제적인 제도, 가장 부패한 제도, 가장 비인간적인 제도는 가족이다. 가족은 곧 계급이다. 교육문제, 부동산 문제, 성차별을 만들어 내는 공장이다. 부(자본) 뿐만 아니라 문화, 자본, 인맥, 건강, 외모, 성격까지 세습되는 도구다. 간단히 말해 만악의 근원이다]라고 했다. 물론 지나친 부분이 없지 않아 있지만 성인이 되어 갈수록, 나이가 들어 갈수록 가족은 힘이 되기보다 짐이 되는 경우가 많아진다.


김소연 시인도 가족에 대해서 [우리는 아주 친밀한 사람에게 ‘가족 같은 사람’이라는 말을 특별하게 사용하고 있지만, 실재하는 가족은 특별함을 일찌감치 지나쳐 온갖 문제가 산적한 집합체가 되어 있다. 우리들 내면에 간직된 상처의 가장 깊숙하고 거대한 상처는 대부분 가족으로부터 얻은 것이다]라고 했다.


가족도 그런데 고작 20년 지기 친구라고 해서 친밀한 관계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을까. 인간은 연수로 묶어서 관계를 결정짓은 일을 그만두어야 한다. 인간은 이상하게도 친구를 좋아한다. 친구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친구일까. 학창 시절에는 친구가 분명하게 있다. 매일 교실에서 만나 이야기를 하고 밥을 같이 먹고 같이 놀고 같이 자니며 비밀을 공유한다.


부모보다 선생님보다 당연하지만 친구가 좋다. 여자 친구에게 하지 못하는 말도, 남자 친구에게 열받는 일도 친구끼리는 같이 나눈다. 그러나 성인이 되고 어른이 되어 갈수록 그때만큼의 생각을 가지기는 힘들다. 오로지 친구만 생각하기에는 눈앞에 닥친 일들이 많고 해결해야 하는 일들이 매일 넘치기 때문이다. 만나고 연락하는 문제보다 친구를 친구로 얼마나 생각하느냐에 대한 문제가 성인이 되면 상기해야 한다. 아내가 친구를 싫어할 수 있고, 반대로 아내가 자신보다 친구를 더 좋아할 수도 있다.


김영하 소설가는 [살아보니 친구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라고 했는데 나는 그 말에 전적으로 동감하는 편이다. 친구를 훨씬 덜 만났더라면 내 인생이 더 풍요로웠을 것이라고 김영하 소설가는 말했다. 쓸데없는 술자리에 너무 시간을 많이 낭비했다. 맞출 수 없는 변덕스럽고 복잡한 여러 친구들의 성향과 어떤 남다른 성격, 이런 걸 맞춰주느라 시간을 너무 많이 허비했다. 차라리 그 시간에 책이나 읽을 걸. 잠을 자거나 음악이나 들을 걸. 그냥 거리를 걷던가. 결국 모든 친구들과 다 헤어지게 된다.라고 했는데 공감이 너무 간다.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낸 친구라고 해서 정녕 친구인가. 그것에 대해서 한 번 생각을 해본다. 운동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 하루에 한 시간 정도 조깅을 한 지 10년 정도 되었다고 하면 모두가 와 대단하네, 같은 말을 한다. 그러나 이렇게 말을 하는 사람들은 조깅을 전혀 해보지 않거나, 1, 2년 정도 하다가 그만둔 사람들이다.


여기서 1, 2년 조깅을 했다,라고 하지만 그 1년 동안 얼마나 달렸는가 따져보면 참담한 수준일 것이다. 일주일에 3, 4일씩 달려도 1년이 지나면 1년 달렸다고 퉁 친다. 하루에 30분 정도, 2킬로미터를 달렸어도 매일 많은 거리를 달렸다고 퉁친다.


그날 한 운동은 그날로 잊어야 한다. 오늘 조깅을 8킬로미터 달렸다면 그건 오늘로 끝인 것이다. 그걸 죽 끌고 다니며 나 얼마나 달렸네, 운동했네 같은 말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일 년을 꼬박 한 시간 이상씩 조깅을 해도 명절에 이틀 정도 방구석에서 맛있는 거 먹고 나면 이전에 아무리 조깅을 했다고 해도 무용지물이다. 배가 나오고 등살이 붙는다.


그러니 연수로 뭔가를 보상받으려는 그 이상한 일반화에서 벗어나야 한다. 친구는 있으면 좋고 없으면 그만인 친구가 괜찮은 친구다. 친구라고 해서 죽고 못 살고 없으면 안 되는 건 사춘기 때나 어울린다. 아니다, 요즘은 그것도 별로다. 요즘은 예전처럼 친구가 힘들다고 하면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보다 약을 권하는 친구들이 늘어났다.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서 가장 마음에 든 장면은 두 덩어리의 돌멩이가 되었을 때다. 돌은 겉과 속이 같다. 인간은 겉과 속이 같은 사람이 없다. 얼굴은 참 착한 표정을 하고 있지만 그 속은 알 수가 없다. 그러니 20년 동안 알고 지낸 친구도 돈을 빌려 도망을 가지. 그러나 돌이 되었을 때는 순수하게 겉과 속이 같은 사람이 된다. 친구라면 적어도 돌멩이 같은 친구가 나에게도, 또 상대방에게도 옳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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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뉴스를 본 사람들 백 퍼센트에 가깝게 기자의 직업정신과 걱정과 함께 극한 직업에 대한 댓글이 이어졌다.


엄청난 하루살이 떼가 나타났다. 사람에게는 아무런 해를 주지 않는다며 기자는 투철한 직업정신을 발휘했다.


그러면서 정부 관계자의 인터뷰가 나왔다. 병충해가 없고, 입이 퇴화해 사람을 물지 못하며 주 서식지가 상수보호구역인 한강이라 약품을 뿌릴 수가 없다고 했다.


그렇다는 말은 조금 거짓말을 보태서 동양하루살이 떼가 나타난 엄청난 곳을 지나가야 한다면 기자처럼 몸에 수백 마리를 붙이고 지나가라는 말이다. 아무런 인체에 해를 끼치지 않기 때문에 그냥 잔말 말고 지나가라는 거다.


이 사진의 뉴스는 한 일주일 전인데, 5월 28일 자 뉴스에도 동양하루살이 떼에 관한 기사가 있다. 앵커의 첫마디가 ‘도심 곳곳에서 하루살이 떼 습격으로 시민들이 고통을 호소하고 있습니다’였다.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7686185&ref=A


인체에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데 사람들은 고통을 호소하는 것이다. 그러나 관계당국은 해가 없으니 그냥 살아란 말이야, 너희들 도대체 뭐가 문제야?라고 하는 것만 같다.


벌레라는 게 인체에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더라도 한 마리가 붕 하며 나타나도 기겁을 하게 된다. 이 동양하루살이는 벌레 중에서는 3센티미터, 날개를 펴면 5센티미터로 꽤 큰 편이다.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더라도 공포는 충분하다. 개체가 상상이상이 되면 인간은 공포를 심하게 느낀다. 나는 이 길을 지나가야만 집에 갈 수 있는데 그 길의 풍경을 바꿔버릴 정도로 하루살이 떼가 있다면 이 길을 지나갈 수 있을까.


동양하루살이라고 검색을 하면 밑에 동양하루살이 기자도 검색어로 나타난다. 그리고 함민정 기자의 기사가 엄청 많다. 모두가 프로정신에 대단하다는 글이다. 무슨 수당을 더 주는 것도 아닌데 프로정신이 정말 대단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정보를 전달하고 있다.


이런 장면은 양봉하는 곳에서나 봤고 영화 속에서나 봤지 2023년 5월에 뉴스로 이런 모습을 보다니 앞으로 또 무슨 일이 뉴스로 나올지 참으로 기대되는 세상이다.

너무 화재가 된 나머지 극한직업을 뛰어넘은 함민정 기자의 뒷 이야기.

https://news.jtbc.co.kr/article/article.aspx?news_id=NB12127670


이 기사가 나간 후 지자체에서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방향으로 하루살이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려고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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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미리예채파를 보는데 리정( 개인 퀘스트 실패 ㅋㅋ)이 티엘씨를 알고 있어서 놀랐다. 그리고 티엘씨의 춤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했다. https://youtu.be/nj_IcXi3puU


혜미리예채파는 요즘 보는 가장 재미있는 프로그램이다. 정치인과 정부에 염증을 느끼다 못해 욕이 나올 정도로 답답해서 눈과 귀를 닫기로 했다. 정치에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정치인 놈들은 내내 그러는데 전부 지들 밥그릇 챙기려고 하는 말처럼 들린다. 내가 사는 곳은 바닷가라 바닷가의 어민 들은 일본의 오염수 방출에 대해서 걱정과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닌데 전혀 씨도 먹히지 않고 야당은 지들 내부총질하느라 국민들 시름은 나 몰라라 하고.


이런 와중에 눈을 돌리니 혜미리예채파가 하네. 어깨탈골 언니 혜리의 백만 개 건치웃음폭탄부터 한 다면 하는 여자 조미연, 어딘가 백치미가 가득한 리정, 사고뭉치 오리 예나, 그리고 그녀의 앙숙 쌈아치 채원, 이 특급 아이돌 틈에서 전혀 꿀리지 않고 큰 웃음을 주는 진정이 안 되는 파트리샤까지. 넘나 재미있는 것이다.


이 예능을 보는데 티엘씨의 음악이 나오며 리정이 춤을 추고 다른 멤버들도 몸을 흐느적거리며 춤을 추었다. 그때 나온 노래가 티엘씨의 크립이었다. 몹시 자유한데 절제가 가득한 음악이다. 뮤직비디오를 보면 최고로 잘 나갈 때의 티엘씨 모습이 담겨있다.   https://youtu.be/LlZydtG3xqI


90년대 남자들이 꽉 잡고 절대 놔주지 않았던 힙합의 판도에 와그작 하며 금을 내버린 멋진 언냐들 티엘씨의 이야기는 너무나 많은 곳에서 하고 있고, 특히 늘 그렇듯이 유튜브 복고맨 같은 전문 팝스타를 다루는 채널이 있으니 가서 보면 티엘씨 역사에 대해서, 그들의 음악에 대해서 알 수 있다.


음악적으로 뉴 잭 스윙이나 힙합이니 알엔비 같은 용어는 잘 모르니까 티엘씨의 음악에 대해서 논하는 건 넘어가자. 티엘씨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이렇게, 이렇게 어깨와 머리가 자동으로 움직인다. 티엘씨의 음악의 장점은 칼군무를 하는 요즘 아이돌의 춤이 아닌 그저 몸이 알아서 움직이면 된다는 것이다.


티엘씨는 미용실에서 출발했다고 할 수 있다. 그녀들은 왜 남자들만 펑퍼짐한 힙합적인 옷을 입고 노래를 부르냐며 우리도 할 수 있다며 두 사람이 들어가도 될 법한 큰 티셔츠와 펑퍼짐한 바지를 입고 나타났다. 1집을 들고 나오자마자 아마 세계가 술렁거렸을 것이다. 악동 같은, 말괄량이 세 명이 나와서 그저 몸이 가는 대로 춤을 추며 노래를 불렀다.


이 언냐들 하면 의상을 빼놓을 수 없다. 이전의 힙합 보이들은 흑인에 하얀 티셔츠와 검은 옷 같은 매치만 했지만 티엘씨는 그야말로 컬러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의상을 입었다. 마치 옷에 미술을 해 놓은 것 마냥 알록달록 파스텔 톤 한 가득이었다. 입술도 튀는 색으로 메이크업을 했다.


티엘씨는 승승장구해서 악동 같은 이미지에서 아티스트가 되었다. 그녀들이 발매한 앨범 기록은 내내 깨지지 않다가 후에 데스티니스 차일드에 이르러 깨졌다. 티엘씨는 굉장한 가수임에도, 엄청난 노래를 불렀음에도 흑인이라서 차별을 받았다.


HBO에서 만든 ‘러브크래프트 컨트리’에서도 흑인들에 대한 차별에 대해서 잘 나온다.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무차별로 차별을 당한다. 리브 크래프트의 세계관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너무나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이야기다. 러브 크래프트의 그 무시무시하고 기괴하고 공포 가득한 괴물들이 몽땅 나온다. 50년대의 미국은 흑인들에게 아직 무법천지였다. 인종차별을 해도 되는 지역이 있어서 그 지역을 흑인이 지나가면 백인들이 총을 쏘고 한다. 주인공 조나단 메이어스는 한국전쟁에 참여한 것으로 나온다. 그래서 한국에 대한 이야기도 중간중간 나온다.

무엇보다 80년대 할리우드의 공포 영화를 장식했던 러브 크래프트의 그 무시무시한 호러가 이 시대의 화려한 그래픽으로 재탄생되었다. 흑인 차별에 관한 것 중에서 이번 인어공주 에리얼도 차별을 당하고 있다고 하는데 인어공주는 흑인이라서 안 된다고 하는 게 아니라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사람들이 말하는데 난데없이 흑인차별로 몰아가고 있는 것은 좀 이상한 흐름이다.


다시 티엘씨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대한민국은 한창 한일월드컵에 열을 올리고 있었던 2002년 4월에 레프트아이가 자동차 사고로 사망하게 된다. 충격이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거의 10년 가까이 독보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티엘씨가 레프트아이의 죽음으로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해 한국은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루었고 11월 티엘씨는 레프트아이가 없는 채로 4집을 발표한다. 뭐 4집이 생각만큼 세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고 하지만 그 앨범에 있던 노 스쿠버는 노래 잘알못인 내가 들어도 최고다.


티엘씨 아무튼 엄청난 그룹이었음.


앨범 속 가장 대중적인 노래가 되었던 왓 어바웃 유 프랜 https://youtu.be/92gHq1s6G-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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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저녁의 향연이 이어지는 계절이다. 날이 선선해서 달리기에 너무나 좋은 요즘이다. 한 시간 정도 달리고 나면 온몸이 땀에 젖어 있는 것 역시 기분 좋다.

색감이 묘한 저녁이다. 화면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이쪽과 비슷한데 다른 세계가 있는 것 같다. 그쪽 세계는 이쪽 세계와 거의 같은데 조금 다르다. 그 다른 조금의 부분이 너무나 크고 무섭게 다가온다. 그쪽 세계에 있는 나는 지금의 나와 똑같이 생겼지만 음식을 먹을 때 입으로 먹는 게 아니라 배가 갈라지고 그 안에서 괴물 같은 입이 튀어나와서.


쓸데 없는 생각을 뒤로 물리고 다시 달려가자. 으샤으샤.

이렇게 유랑하는 달의 모습을 담을 때는 단렌즈인 아이폰 8을 원망해 본다. 최신 휴대폰이라면 이 모습을 너무나 예쁘게 담을 수 있을 텐데.


이상일 감독의 '유랑의 달'을 봤다. 이상일 감독은 식스티 나인과 훌라걸스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영화가 어둡다. 이번 유랑의 달을 끝내고 이상일 감독이 배우 송강호와 화상으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영상이 유튜브에 있다. 한국어가 조금 서툴지만 송강호를 형님이라 부르며 영화 이야기를 풀어내는 모습이 소탈하게 보였다.

 

이 영화는 슬픈 이야기며, 아픈 이야기고, 안타까운 이야기다.

이야기를 반영이라도 하듯 색감이 차갑고 초연하다. 기생충의 느낌이 나는 것은 아무래도 기생충 촬영감독이 촬영을 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축축하고 차가운 대지 위에서 건조하고 따뜻한 부분을 내주는 건 다름 아닌 자신과 비슷한 결핍 인간이다.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을 겨우 만났는데 사람들은 그런 우리를 벌레 보듯 본다. 그리고 그 시선은 점점 더 크고 넓어지고 확대된다. 하지만 달은 처음부터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달이 웃고 있다. 달은 너와 나를 연결시켜 준다.


아니라고 하지 못한 말은 그대로 사실이 되어 사람들은 이야기조차 들으려 하지 않는다. 결핍 때문에 떠났지만 결국 결핍이 그리워 다시 결핍의 자리로 돌아오는 카나시이 하나시다.


장애라는 건 아픈 게 아니라 불편한 것이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며 욕을 하고 삿대질을 하며 마음대로 생각하는 그 사람들이 장애가 있는 것이다.라고 영화는 말하는 것 같다.

빗자루가 있다면 옆구리에 차고 강변으로 나가서 슥슥 구름을 쓸어서 담아 오고 싶다. 그래서 비닐에서 꺼낸 구름의 반은 집의 천장에 뿌려 놓고 반은 설탕을 뿌려서 솜사탕을 만들어서 먹고 싶다. 뭐? 먼지 때문에 구름이 더럽다고? 그래서 설탕을 넣는 거야. 하얀 그리움에 눈물이 흘러내리면 먼지 같은 것도 전부 사라지니까.


이제 저 연등도 일 년 뒤에나 볼 수 있겠지. 한 달 동안 잘 봤다. 연등들아. 구름을 빗자루로 쓸어서 담아 오고 싶은 저녁의 풍경이었다.

구름이 또다시 그림을 만들어냈다. 놓칠 수 없는 풍경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작은 희망이 없어서였을까. 별이 궤도에서 또 이탈해서 나 돌아갈래, 하며 한 번 멋지게 폭발을 하며, 셀 수도 없을 만큼 수억 개의 별 중에 존재를 각인시키고 사라진 별의 흔적일까. 이럴 때 김중식 시인의 시 ‘이탈한 자가 문득’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단 한 번 궤도를 이탈함으로써

두 번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할지라도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

그 똥, 짧지만,

그래도 획을 그을 수 있는,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을

구름과 새와 유랑하는 달을 담아냈다. 물론 신형폰의 유혹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지만 그래도 꽤 해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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