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격이 급한 나의 탓도 있지만 주위에 물어봐도 대부분 나처럼 예능 프로그램에서 시간 끌기 위해 반복된 장면을 너무나 싫어했다. 이 수박 씨발라먹을 것 같은 반복된 장면이 예전에는 세 번이었다. 그때에도 와 씨 너무 많이 반복하는 거 아니야! 젠장! 했는데 언젠가부터 반복된 장면이 여섯 번이나 나오는 것이다. 그 뒤로 예능은 바이바이다. 모든 예능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대부분 거기서 거기다.


언젠가부터 보는 스릴러 드라마나 영화가 전부 답답하다. 답답한 전개에 개연성이라고는 1도 없는, 갑갑한 캐릭터들이 보는 사람 속 터지게 한다. 영화를 하도 많이 봐서 그런지 갑갑한 경찰 캐릭터들은 답답하고 갑갑하다. 왜 여자 경찰 혼자서 전기충격기 하나 달랑 들고 사이코패스들이 우글거리는 곳에 가는지, 가서는 뭐 이렇다 할 방어나 공격 한 번 못하고 켁 기절해서 잡히기나 하고. 변호사는 왜 갑갑하게 아내를 겁탈하려는 점장의 말에 부들부들 떨기만 하고. 답답하게 만드는 고질병은 고쳐지지 않을 것 같다.


발레리나에 대해서 다시 한번 말해보자


발레리나는 정말 요즘 한국에서 나올 수 없는 굉장한 영화다. 아마 이런 엄청난 영화는 앞으로 한국에서 나오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니까 90년대 중경상림이 떠오르는 기기묘묘한 색감과 한국적이지 않은 한국의 공간이 전종서를 한껏 돋보이게 한다. 거기에 전종서 그 특유의 감정이 빠진 목소리가 묘한 매력을 발산한다.


카메라는 옥주의 눈동자, 전종서의 눈동자를 클로즈업한다. 카메라는 말한다. 영상을 통해서 이 영화는 말이야 전종서를 위한, 전종서를 위해, 전종서에만 어울리는 영화야.


한국영화에서 가장 미친년을 미친년답게 연기하는 전종서가 이번에 더욱 미쳤지만 이 미침에 전종서가 아니면 안 되는 이유를 잔뜩 색감과 카메라 움직임과 대사에 욱여넣었다.


김무열이 나오자마자 나불거리기도 전에 이마에 총구멍을 내며 죽이는 장면은 뭐야? 통쾌하잖아? 그리고 곧바로 전종서를 여자 존윅, 베아트릭스 키도, 졸트(포스터는 졸트를 따라한 것 같애) 화 시킨다. 얼굴에 튄 피 역시 마구잡이가 아닌 전종서의 얼굴이 드러나는 피튀김이다.


이 영화가 굉장한 이유는 감독이 여자 친구인 전종서를 위해 선물로 바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영화평론가 라이너의 말처럼 내가 감독인데 일반인들이 여친에게 해 줄 수 없는 기념일 서프라이즈로 너를 위한 영화를 만들게.


그동안 이런 굉장한 영화가 있었나? 생각해 봐도 없다. 여친을 위한 감독의 콘체르토. 헤어지더라도 이 영화의 잔상이 어디든 따라다닐지도 모른다. 영화적으로 답답하지 않게, 여배우들 중에 절대 하지 못하는 무자비한 액션이 아름답게 나올 수 있게 해 주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돋보이는 영화, 똘기 있는 연기자와 천재 소리를 듣는 감독 커플이 펼치는 커플 꽁냥꽁냥 피칠갑 영화 발레리나다.


나는 요즘 안철수가 너무 좋다. 안철수 전에는 김행, 김행 님 - ’김‘은 빼고 행님을 너무나 좋아했다. 왜냐하면 경주마처럼 앞만 보며 달려가기 때문이다. 전혀 주위를 보지 않는다. 오직 앞만 보며 자신이 하고 싶은 말, 해야 하고자 하는 말만 한다. 이 험한 세상에 살아가는 방법을 안다. 작금의 세상에서 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거짓말을 위한 거짓말을 하고, 그 거짓말을 덮기 위해 거짓말을 아무렇지 않게, 전혀 마음에 걸리적 거리낌 없이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사람이 이 세상을 잘 살아가는 것이다. 그 어려운 걸 글쎄 행님이 하고 있었잖아. 너무 좋아. 근데 끝까지 앞만 보며 달려갈 줄 알았는데 사퇴하겠데. 와 씨, 너무 실망이다. 끝까지 밀고 나가서 장관이 되어야 그 이후의 일들이 흥미롭게 진행될 텐데. 사퇴문에 국민에 대한 이야기는 1도 없고 누군가에게만 미안하다고 하네.


그런데 안철수가 나타났지 모야. 안철수는 정치가가 아닐 때에는 너무나 총명하고 인물도 좋았는데 정치를 하고부터는 바보가 된 것 마냥 헤헤 얼굴이나 인상도 기기괴괴해지면서 점점 바보가 되어간다. 이준석을 걸고넘어지면서 이번 선거 도우미를 그렇게 대대적으로, 어울리지도 않는, 자기도 어색해하며 “지랄하다, 자빠졌다”를 해 놓고선 이준석이가 예언한 표 차이를 자신도 예상했데. 안철수는 착한 바보라서 거짓말을 하면 너무나 티가 난다. 그 정도 표차이가 나는 걸 예상했다면 거기 가서 그렇게 유세를 펼치진 않았겠지. 온 국민의 관심을 받았던 안철순데 페북에 쓴 글에 맞춤법이 그게 뭐야. 훼손을 회손이라니, 그 짤막한 문장에 이런 오탈자가 도대체 몇 개야. 정말 손가락 잘렸나. 늘 잠잠하다가 뭔가 선거 때만 나타나서 권력에 무릎 꿇고 배신당하고 어딘가 번지수 잘못짚어서 허당질 하고 있는 안철수 보는 재미가 예능프로그램보다 훨씬 재미있잖아. 제발 팽 당하지 말고, 행님처럼 자진해서 뒤로 물러가지 말고 끝까지 버텨서 자주 안철수 당신을 볼 수 있게 해 줬으면 좋겠다.


그래서 안철수랑 발레리나는 무슨 상관인데?라고 묻는다면 상관은 없다. 꼭 상관이 있어야 하나 싶다. 발레리나라는 제목도 영화 내용과 전혀 상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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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

잔잔하게 영화가 흘러가는데 지나고 보면 진폭이 커서 약간 숨이 가쁜 영화다. 마지막 장면은 오 하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강렬했다. 영화 속 한 장면이 한 남자를 온통 말해주고 있어서 감동을 했다.

마그리트의 그림, 이름을 버린 두 남자의 뒷모습 뒤에 서 있는 키도 역시 자연스럽게 스며들 것 같은 마지막 장면. 정말 강렬했다. 하루키의 단편소설 시나가와 원숭이에서도 사람의 이름을 훔친다. 이름을 훔치고 나면 그 사람의 대부분을 소유하게 된다. 의미적으로 그렇다.

이름을 버린다는 건 자신의 모든 것, 신분을 버리는 것이다. 신분을 버리게 되는, 버려야 하는 개인적인 엄청난 이유가 있다. 유전자처럼 따라다니는.

안도 사쿠라는 다른 영화에서도 그렇지만 연기가 뛰어나서인지 안도 사쿠라가 울면 몰입하게 된다. 이름을 버린 한 남자를 남편으로 알고 살았던 여자에게 변호사 키도가 찾아와서 남편이 남편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면서 누군지 찾아가는 미스터리다.

영화는 아주 좋고, 몹시 좋다. 자신의 정체성, 바꿀 수 없는 유전자, 대중 속의 고립, 외도, 무시, 재일, 무시, 편견이 서서히 조여오듯 압박하는 게 영화 속 주인공들이 사실 나와 별반 다를 게 없어서 놀라게 된다.

우리는 사실 신분을 버리고 다른 사람으로 매일 살아간다. 가족과 있을 때, 일을 할 때, 그곳에 갔을 때, 인스타그램의 나, 모임에서의 나는 전부 다른 사람이다. 어떤 신분이 진짜 나인지 나 조차도 알 수 없다.

일본 영화계가 망했다 해도 수작은 계속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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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보고 영화 자체도 감동이지만 장예모 감독에 대한 알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 요즘에, 중국 사회에서 체재에 반하는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더불어 이번 아시안게임에서 한중 축구전에서 패배한 중국 선수들에 대해서 중국 해설자들의 해설 역시 한국 축구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 축구에 대한 비판과 발전이 필요한 부분을 말했다.  


역시 탁구 선수들의 매달을 수여하는 방송에서 금메달을 따고도 얼굴이 굳은 중국 선수들을 안타까워하며 메달의 종류에 상관없이 즐거워하며 행복해하는 한국 선수들을 축복하는 중국 해설자들이었다.


그동안 얄팍하게 알고 있던 중국은 그들의 체재에 반하는 언행, 언동을 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구속이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면 코로나 때 의사, 기자들은 비록 구속될지언정 제대로 된 정보를 알리려고 했다. 후에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없었지만 그들은 끊임없이 무서운 바위에 계란인 자신의 몸을 던졌다.


이번 부국제의 판빙빙을 보라. 그렇게 중국정부에 탄압을 받았지만 이주영과 함께 영화를 찍고 레드 카펫을 밟았다. 이런 사람들이 중국을 건강하게 만들 것이다.


이 영화 제목 ‘원 세컨드’는 30분 정도 지나면 왜 제목이 그런지 알게 된다. 이 영화는 많은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당연하지만 시네마천국의 알프레도와 토토가 떠오르고, 조지 오웰의 1984 속 윈스턴이 살아가는 세계도 떠오르고 인도영화 천국의 아이들도 떠오른다.


장이머우, 우리에게는 장예모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중국 감독. 첸 카이거와 함께 거장으로 불렸으나 홍콩 반환 이후 중국정부가 원하는 영화를 만들어낸다는 소리를 들었다. 첸 카이거의 패왕별희는 아시아를 넘어 세계를 울렸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그의 영화는 빛을 잃어갔다.


장이머우 역시 붉은 수수밭에서 세상의 조명을 받았고 영웅에서 재능이 아직 남아 있었다. 하지만 역시 그레이트 윌 같은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점점 빛이라는 것이 소멸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 영화 ‘원 세컨드’에서 – 과연 지금 시대에, 현재 시대에 장예모 감독은 자신이 하고픈 이야기를 만들었다. 우리나라도 예전보다 방송이 더 열약해졌다.


예전 김혜수 토크쇼에 나훈아가 나왔을 때 김혜수가 웃으며 여러 번 이혼한 것에 대해서 묻고 나훈아가 대답하면서 풍자 섞인 말들이 오고 갔다. 그런데 지금 이런 이야기를 공중파에서 할 수 있느냐 한다면 그러지 못한다. 한석규, 최민식 주연의 영화 넘버 3의 길거리 포스터에서는 한석규가 가운데 손가락을 올리고 있는 장면이 크게 있다. 하지만 요즘 그렇게 했다가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더불어 풍자로 정부를 비판하는 예능이나 토크 쇼 방송은 공중파에서 전부 사라졌다.


중국은 예전부터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우리나라 보다 더 정부의 간섭이 심하다. 강력하다. 영화계에도 칼바람이 불었다. 성룡도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아들 때문에 중국 정부에 굴복하고 말았다.


첸 카이거와 함께 장예모 역시 무너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영화 원 세컨드를 보면서 장예모라는 감독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했다. 더불어 주연을 맡았던 배우들 역시 생각했다.


주인공 장주성은 딸이 영화에 등장한다는 소리에 감옥에서 탈출하여 영화를 상영하는 마을에 온다. 딸은 영화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영화시작 전 중국뉴스를 보여주는 영상에 등장한다. 그 속에 1초 동안 나온다.


당시의 중국은 마오쩌둥이 집권하고 있었던 1960년대다. 나이를 떠나 모든 인민이 전부 먹기 위해, 살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한다! 운동을 해야 한다! 같은 분위기가 강했다.


아이들도 즐겁게 쌀 가마니는 나른다고 뉴스 속 내레이션이 나온다. 그 1초 안에 주인공 장주성의 14살 딸이 쌀가마니를 울러 매고 웃으며 스쳐간다. 장주성은 그 장면만 몇 십 번을 돌려 본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딸의 모습, 그 딸이 웃으며 무거운 쌀가마니를 나르고 있다.


장주성은 말한다. 고작 14살이다. 14살 여자 아이가 즐거워서 저 무거운 쌀가마니를 나르고 있을까. 장주성은 어린아이까지 사회 운동에 동원하는 중국정부를, 이 중국이라는 나라의 체재에 분노 같은 것을 느낀다. 그 짧은 대사는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 편에서 시저가 했던 한 마디만큼 강하게 느껴졌다.


소녀는 어린 동생이 태워버린 필름으로 만든 전등갓 때문에 필름을 훔쳐 그것을 다시 만들려고 하고, 그 필름 속에 장주성 딸의 1초 영상이 있다.


1초는 너무 하찮지만 그 1초가 모여 영화 한 편이 된다. 1초만 나오는 딸의 모습을 보기 위해 목숨을 건 한 남자와 동생을 위해 필름을 훔치는 한 소녀의 이야기가 처절하고도 아름답게 펼쳐진다.


희망이라고는 1도 보이지 않는 중국의 시골 마을 사람들은 모여서 영화 한 편을 보는 게 삶의 낙이다. 그 영화 필름을 운반하는 도중에 딸을 위해 탈주한 남자와 동생을 위해 필름을 훔친 소녀가 만나서 서로를 위해주는 이야기다. 아주 재미있다. 소녀 역의 2000년 생인 류 하오춘은 라이드 온에서 성룡의 딸로 나와서 연기를 했고 성룡에게 존경의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장예모 감독의 영화에 대한 집념과 애정이 보이는 영화 '원 세컨드'였다.


예고편 https://youtu.be/0v5B7ujnfao?si=UWHM4eOSRkt-zZ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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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공주 엘자가 있기 전 저짝 불란서에도 엘자가 있었다. 엘자 륑기니. 오늘처럼 가을의 흐린 날에 잘 어울리는 불란서 노래, 샹송이라 하기에는 팝적이고, 팝이라 하기에는 불란서의 분위기가 확 나는, 파트리샤 카스와 다른 엘자가 있었다.


파트리샤 카스가 한국에 와서 노래를 부를 때 그 무대의 사회를 배철수가 봤는데 그 영상을 유튜브에서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네.


엘자 하면 글렌메데이로스가 따라오지만 그녀의 앨범을 들어보면 이야 노래 정말 좋아,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엘자를 검색해 보면 어린 시절부터 노래를 부르고,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 어쩌고 하는 이야기들이 죽 있다.


우리가 엘자를 알게 된 건 글렌메데이로스였다. 중고등학생 때 집만큼 들락거렸던 음악감상실에서 디제이가 글렌메데이로스의 음악을 뮤직비디오로 틀어주면서 엘자의 이야기도 같이 해 주었다. 세계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글렌메데이로스를 좋아하던 프랑스 소녀가수가 직접 글렌메데이로스를 몰래카메라 형식으로 만나면서 두 사람은 듀엣 곡을 부르게 되고 그 곡은 우리가 있는 이 도시의 바닷가까지 울려 퍼지게 되었다.


엘자와 글렌메데이로스의 만남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글렌메데이로스의 이야기를 할 때 했으니 여기서는 생략.

https://brunch.co.kr/@drillmasteer/2618


두 사람의 꿀 떨어지는 듀엣곡 Un roman d'amitie https://youtu.be/8dOxNAHMsvw?si=NR6KIU0HCsjQkn4W


두 사람의 듀엣곡은 정말 사랑스럽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곡이 있나 싶을 정도다. 그래서 두 사람은 결국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그렇게 오래가지는 못했지만. 두 사람의 현재 모습도 검색을 하면 다 볼 수 있다.


아무튼 우리에게 불란서 노래를 가장 많이 듣게 해 준 가수가 엘자였다. 추석이 지나고 가을 속으로 흘린 날이 덮치면 그때나 지금이나 알 수 없는 기시감에 시달리고 조금은 우울했다. 그럴 때 그때는 하교하면 졸졸졸 음악감상실에 들어갔다. 학교 뒤에서 음악이나 내내 듣는 그런 놈들끼리 마음이 맞아서 음악 감상실에 앉아서 굉장히 큰 화면으로 보는 뮤직비디오는 재미있기만 했다.


엘자는 현재도 가수로 활동을 하고 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키가 너무 커버려서 목소리가 예전만큼 나오지 않는다. 엘자나 글렌메데이로스의 음악을 들으면 거짓말처럼 그 당시로 확 돌아가는 착각이 든다. 교복을 입고 가방을 메고 학교에서 나와서 쫄래쫄래 음악감상실에 가곤 했던.


살아보지 못했던 60년대의 음악, 루 리드나 데이빗 보위, 제니스 조플린의 노래를 들어도 이상하지만 그 당시로 가는 착각이 든다. 음악은 그런 알 수 없는 마법을 부린다. 그런데 제이슨 데룰로나, 올리비아 로드리고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 현실감각이 사라져 버린다. 현재의 음악인데 음악을 듣고 있으면 현재는 바람에 날리는 가루처럼 날아가 버리는 착각이 든다. 우리나라의 김추자의 노래를 들어도 그렇다. 김추자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건물이 막 바뀌면서 예스러운 풍경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물론 착각이지만. 함중아의 노래를 들어도 그렇다.


얼마 전에 존윅의 프리퀄, 존윅 이전의 이야기 윈스턴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콘티넨탈을 보는데 영화 속에 데이빗 보위, 루 리드 등을 언급을 한다. 음악이란 아무튼 묘한 힘을 지니고 있다.


엘자 륑기니는 조용한 노래만 부를 것 같지만 90-91년 투어 공연 영상을 보면 무척 섹시한 옷을 입고 댄스곡도 부른다. 댄스곡이라고 하기에는 뭣 하지만 전기기타와 드럼이 뒤를 받쳐주고 격렬하게 몸을 흔들며 무대를 장악해 가며 가냘픈 몸으로 섹시하게 노래를 부른다.


오늘은 날이 무척 흐리다. 이러다가 하늘에서 뭔가가 일어날 것만 같다. 중학생 때에도, 고등학생 때에도 이런 날에는 엘자 같은 음악을 찾아서 들었는데 그럴 때의 기분이 든다. 문득 든 생각이지만 세상에 나와있는 음악은 몇 곡이나 될까. 그리고 인간은 음악에 왜 이렇게 열광을 하고 목을 매다는 것일까.


엘자의 투어 공연 영상 중에는 제니스 이안의 At seventeen를 부르는 영상도 있다. 나의 아저씨 14화에 박동훈이 정희와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에서 제니스 이안의 At seventeen이 배경음악으로 나온다. 정희가 살아있음을 느끼고 싶어서,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려고 가게 앞에 앉아서 하루를 여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를 듣는다. 그때 지안이 옆에서 십 분 동안 같이 있어준다.


그렇게 죽 이어지는 이야기 속에 제니스 이안의 엣 세븐틴이 흘러나온다. 엣 세븐틴은 제니스 이안이 17살에 겪었던 일로 예쁜 소녀들에게 관심을 주는 사람들로 인해 열일곱 소녀가 겪어야 했던 사랑에 대한 좌절을 이야기하는 노래다. i learned the truth at seventeen로 시작을 한다. 당시 제니스 이안의 목소리에는 쓸쓸함이 가득 묻어있다. 나는 열일곱 살에 진실을 알아 버렸어,라며 제니스 이안은 그 특유의 쓸쓸함으로 그때 받은 사랑의 좌절을 노래한다. 깨끗하고 맑은 얼굴을 가지고 지난 사랑의, 당시에 받은 좌절을 쓸쓸하게 노래한다.


그건 마치 정희를 보는 것 같다. 언제나 자신감에 차 있는 정희는 혼자가 되면 더없이 쓸쓸하고 외롭다. 잠드는 것이 무섭고 아침에 눈을 뜨는 것조차 버겁다. 사랑의 좌절이 정희를 그렇게 만들었다. 누군가 정희를 안아주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려 버릴 것만 같다. 그건 아마도 정희 옆에서 십 분 동안이나 같이 있어줬던 이지안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제니스 이안은 14살에 데뷔해서 75년에 엣 세븐틴으로 빌보드 1위에 오르고 75년 전체 히트곡 랭킹에서 19위를 차지한다. 그 쓸쓸함이 묻어나는 제니스 이안의 노래를 엘자가 부른다. 잘 부른다.


제일 많이 들었고, 제일 많이 알려진 노래가 아닌가 싶다 Mon cadeau https://youtu.be/2IhQj4G009M?si=a2a8JmBpBxCQT4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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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넘버 3에서 재떨이와 야쿠자 이인자와 룸의 살벌한 대기에서 야쿠자가 홍콩도 중국에 반환되었는데 독도도 일본 땅이라고 우긴다. 그래서 재떨이가 독도는 우리 땅 노래를 한 번 읊으면서 독도가 누구 땅이냐고 재차 묻는 장면이 있다.


영화가 나온 게 97년돈데 독도가 일본땅이라고 하면 조폭건달도 열받아서 독도는 한국땅이라고 소리를 질렀다. 예전에 안정환이 일본 리그에서 뛰고 있을 때 경기에 출전하러 경기장에 들어가는데 기자가 독도는 어느 나라 땅입니까!라고 물으니 1초도 망설임 없이 독도는 한국땅!라고 했다.


최근에는 일본 구독자가 취소하든 말든 쯔양이 자신의 영상 자막에 독도는 한국땅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근래에 먹고사는 게 힘들어서 다른 곳에 눈을 돌리지 못하는 분위기지만 미국이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했는데 받아들이는 이 분위기 정말 이상하다. 이러다가 영화 속 조폭들도 독도는 한국 땅이라고 했는데 이제는 그렇게 말했다가는 이상하게 몰고 가지는 않을까.


영화 이야기가 나온 김에 예전 영화 중에 ‘주홍글씨’라고 있다. 이 영화를 찍고 이은주가 목숨을 끊었다. 영화를 보면 엄지원이나 이은주는 그 역할 때문에 첼로나 피아노나 노래나 엄청나게 연습을 했을 것이다. 이 영화 때문에 이은주 배우를 잃었다.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뭘 말하는지 모호하고 그저 야하고 변태적인 모습에만 초점을 둔 장면만 가득하게 보인다.


이 영화는 김영하 소설가의 ‘사진관 살인사건’이 원작이다. 정확하게는 99년에 티브이 단막극으로 먼저 ‘사진관 살인사건’이라는 동명제목으로 원작을 극화했다. 단막극은 김영하의 소설대로 흘러간다. 사진관에서 남편이 죽고 그의 아내가 의심을 받는다.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아내, 지경희 역으로 김서라가 나오고, 그녀를 조사하는 형사로 김갑수가 나온다.


이 이야기는 겉으로는 살인사건의 범인을 찾아가는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인간의 욕망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김갑수 즉 김형사의 아내는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웠고 김 형사는 아내와 바람을 피운 남자의 머리에 총구멍을 대고, 남자는 오줌을 줄줄 싸고, 아내는 불륜 남자가 싼 오줌이 묻은 이불을 맨발로 빤다. 그 후로 아내는 영혼이 나간 것처럼 행동을 한다. 다른 사람이 된다.


지경희를 취조하는 과정에서 그녀와 그녀의 사진을 담으면서 사진관에 자주 오는 아마추어 사진가도 등장하는데 이들 모두 겉으로는 내뱉을 수 없는 또 다른 욕망이 있다. 그건 김 형사 역시 마찬가지다.


참고로 방탄소년단의 정국이 낸 세븐의 내용은 말랑말랑한 내용이 아니다. 일주일 동안 지쳐 쓰러질 때까지 사랑을 나누겠다는 이야기다. 마지막까지 다 짜내서 밤마다 사랑을(아주 순화해서 하는 말이지만) 한다는 아주 야하고 무척 야한 이야기다.  


마돈나가 세상에 야한 노래를 들고 나왔을 때 인간의 욕망을 이렇게 노래로 표현하는 걸 막지 마라, 니들이 나를 막아도 나는 하겠다. 라며 마돈나는 자신의 노래와 뮤직비디오에 자신만의 세계를 과감하게 가감 없이 담았다.


무척이나 야해서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은데 스펀지에 물이 스며들듯 노래를 들어보면 세븐이나 마돈나의 노래나 자연스럽게 흡수가 된다. 그건 아마도 아티스트의 재능이 그 역할을 가능하게 했기 때문일 것이다.


김영하의 소설 ‘사진관 살인사건’을 읽어도 그렇다. 전혀 야할 것 없는 이야긴데 읽으면 이야기 그 너머의 인간의 욕망에 대해서 손으로 만지고 있는 느낌이 든다. 왜 그러냐 한다면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욕망이 있다. 내 것이 있지만 내 것이 아닌 것에 대한 성적 호기심도 있고, 말로 꺼낼 수 없는 나만의 성적 판타지도 있다. 이 욕망은 본능에 가까운 것으로 사회생활이 부족할 정도로 인지가 안 되는 사람도 성적욕망을 푼다. 풀어야 하고.


예술이란 이런 욕망을 드러내기를 주저 없이 하지만 거부감 없이 자연스럽게 녹아들게 해야 한다. 안 그럼 외설이 되니까.


단막극과 소설의 마지막은 좀 다르게 끝이 난다. 소설의 마지막에는 김 형사가 아내의 맨발을 만지면서 끝난다. 그 더러운 이불을 빤 아내의 발을 만지면서. 이 이야기는 지경희와 사진작가, 그리고 김 형사. 이 세 사람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등장하는 네 명의 남녀가 인간을 대변하듯이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망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https://youtu.be/vBDwGgQqs2Y?si=qc98NaSgu7NW1w0y


소설도 무척 재미있고 단막극도 아주 재미있다. 잘 만들었다. 그러나 몇 년 후에 영화 주홍글씨로 다시 나오면서 비극이 된다. 주홍글씨는 원작이나 단막극처럼 자연스럽게 스며들지 못한다.


변혁 감독이 김영하 소설가의 ‘사진관 살인사건’과 ‘거울에 대한 명상’ 단편 소설을 섞어서 만드는 바람에 이도저도 아닌 영화가 되어 버렸다.  


욕망을 드러내는 방식이 위에서 세븐이나 마돈나, 김영하 원작 소설이나 단막극과는 다르다. 표층적으로 드러나는 방식이 너무 과하다. 그저 ‘거울에 대한 명상’으로만 영화를 만들었으면 어땠을까.


거울에 대한 명상은 동성연인인 두 여자와 그 여자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한 남자의 이야기. 두 여자는 학창 시절에 같은 아픔을 가지고 있다. 아픔을 나누면서 두 여자는 사랑을 한다. 그런데 한 여자가 그를 만나면서 두 여자의 사랑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거울이라 여겼던 한 여자의 배신으로 한 여자는 보란 듯이 그와 결혼을 한다. 그는 버려진 차 트렁크에서 한 여자와 갇혀 죽으면서 세상에 거울은 없다고 소리를 지른다.


주홍글씨는 이런 바탕으로 시작하여 그 속에 사진관 살인사건이 벌어지면서 드러나는 인간의 욕망, 그 설명할 수 없는 건조하면서도 축축한 인간의 속내를 말하는 이야기다. 김영하 소살가의 이 소설은 단편 소설집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에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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