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이 되면 담배냄새가 좋아진다. 나는 담배도 피우지 않지만 11월의 담배냄새는 나쁘지 않아. 11월의 담배냄새는 시월과는 다르고 유월과도 다르다.


가을을 지나 겨울의 초입이 되면 담배냄새에 냉소가 가득해지는 것 같아. 이른 오전에 세탁소 앞에서 스팀연기와 함께 세탁소 주인이 피우는 담배 냄새가 슬슬 좋아져.


엑토플라즘처럼 위로위로 올라가는 푸른 담배연기는 마치 바슐라르가 말하는 촛불의 욕망일지도 몰라.


담배냄새에는 일종의 불협화음이 있는데 11월이 되면 그 불협화음에 동참하는 기분이 들어. 11월이 되면 담배냄새가 좋아져. 자연스럽게 시가렛 애프터 섹스의 노래가 떠오르지.


나는 어째서 담배를 피우지 못할까. 담배를 피울 수 있다면 11월에 내가 피우는 담배냄새를 맡으며 괜찮은 하루를 보낼 수 있을 텐데. 담배를 아주 맛있게 피우는 친구가 있었지. 특히 겨울에 담배를 피울 때면 그 녀석 입에서 굉장한 양의 연기가 나왔거든. 


특히 가로등 밑에서 담배를 피우면 못생겼지만 그렇게 그 녀석이 멋지게 보였지. 따라 하고파서 담배를 억지로 피우면 나는 먹은 것들을 전부 토하고 말았지. 만취해서 토하는 건 괴로워도 받아들일 수 있지만 정신이 살아있는데 토하는 건 세상 괴로운 일이라는 걸 알았어. 거의 죽음 직전이었어. 


담배는 그야말로 가까이 있지만 너무나 먼 기호였던 거지. 나에게는 말이야. 겨울의 담배냄새가 그렇게 나쁘지 않게 느낀 건 그때부터였을지도 몰라. 친구는 고민에 휩싸인 영화 속 주인공처럼 술을 한 잔 마시고 가로등에 기대어 담배를 피웠지. 나는 그 녀석의 말을 듣기보다 그 푸르스름한 연기와 냄새에 빠져들어가고 있었어. 


담배냄새라는 건 몹시도 이상하여 흡연자들도 담배냄새는 싫어하기도 하잖아. 그런데 나는 담배도 피우지 않는데 11월의 담배냄새를 좋아하고 있어. 잘 설명은 못하겠지만 화장품냄새와 향수냄새와 함께 섞여서 나는 담배냄새는 묘한 질감을 가지고 있는 거 같아. 좋다는 말이야. 나쁘지 않아. 모든 여성이 피우는 담배냄새가 좋은 건 아니야. 모든 계절에 나는 담배냄새가 좋은 건 아닌 것처럼 말이야. 


부러운 일상적인 모습이 여럿 있지만 식사 후에 맛있게 담배를 한 대 피우는 모습처럼 부러운 모습도 없어. 그들의 얼굴에는 어떤 안도감이 잔뜩 있잖아. 무릇 꽁초 오상순 시인의 시 하나가 생각나네. 나는 그 시가 너무 좋더라고. 


웃는 사람 따라서

웃지 못함은

고통이다

그러나

우는 사람 위하여

울지 못함은

더 큰 고통이다


11월이다. 11월이 되면 담배냄새가 좋아진다.



Cigarettes After Sex-Apocalypse https://youtu.be/5ey60YJmjQE?si=RxaH6zWPEQV2lbM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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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재미있다. 굿이다. 미스터리 스릴러 추리물은 스페인이 최고다. 넷플릭스가 가장 잘하는 게 이런 시리즈다. 8부작인데 눈을 뗄 수 없다. 보통 일을 하면서 영화를 보는데 이 시리즈는 한눈팔지 않고 보게 되었다.

진짜 재미있었던 인비저블 게스트를 8부작으로 보는 느낌이다. 주인공도 인비저블 게스트의 주인공이 나온다.

매 회마다 떡밥이 하나씩 풀어지며 다음 회가 당연하지만 너무 궁금해진다. 스페인 스릴러 추리물이 괜찮은 점은 촘촘한데 답답하지 않고 빠르게 진행된다는 점이다.

미드처럼 고구마가 거의 없다. 8부작이라 길지 않기 때문에 매 회가 긴장과 스릴이 넘친다. 거기에 잔인함은 기본이고 고어적인 부분과 인간이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추악한 짓도 가감 없이 보여준다.

무엇보다 미드나 할리우드 영화에서처럼 피씨가 없다.

미드가 언젠가부터 정치적 올바름으로 흑인, 인도인, 아랍인 등 골고루 등장시켜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인지 계속 엉망이 되는 영화가 많은데 스페인 스릴러에는 딱 그짝 사람들만 나온다.

등장인물이 많이 나오지만 전혀 헷갈리지 않는다. 매 회에 등장인물의 과거와 현재를 자세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지루하지 않다.

줄거리는 간단하게 이야기를 할 수 없어서 패스. 예고편을 보고 대충 넘겨짚거나 드라마 정보를 보거나.

이야기는 사고로 사람을 죽인 주인공이 출소 후에 만난 아내와 새 출발을 하려는데 아내가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아내가 아니면서 온통 꼬이는 일에 휘말리는데 엄청난 일에 말려들어 범인으로 몰려 다시 감옥에 갈 판.

반전에 반전에 반전에 반전이 반전을 하는데 그게 다 설득이 된다. 도대체 원작 소설은 얼마나 재미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이 정도로 촘촘하게 이야기를 만들려면 얼마나 조사하고 얼마나 똑똑해야 할까.

곧휴는 물론이고 자극과 잔인함이 강한 장면이 꽤 있으니까 혼자서 보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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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며칠 있다가 큰 이모의 비보도 듣게 되었다. 코로나가 세계를 덮치고 있었다. 포항에서 장례식을 했는데 포항에 무서운 코로나 방역 때문에 장례식에 사람들이 모일 수 없었다. 큰 이모는 가족이 없다. 이모부와 결혼하자마자 사별 후에 혼자서 죽 지냈다. 내가 어린 시절, 4살, 5살 즈음 집의 형편이 좋지 않아서 나는 큰 이모에게 보내져서 지내게 되었다. 나는 아직 어렸고 밤이 되면 엄마가 보고 싶다고 울었다. 그러나 낮이 되면 동네에서 아이들과 놀았다. 그러다가 오토바이의 연통에 무릎이 닿아 댄 흔적이 있다.


일을 하게 되면서 큰 이모에게 매달 5일이 되면 오만 원씩 용돈을 보내드렸다. 명절이 낀 달에는 오만 원을 더 보내드렸다. 용돈을 보내면 항상 촌에서 김치나 문어 같은 여기서는 보기 힘든 음식을 보내주었다. 용돈을 보내면 용돈으로 사용하라고 말해도 큰 이모는 막무가내였다. 그러다가 5일에 용돈을 깜빡하고 보내지 못하면 무슨 일이 있냐는 연락이 오기도 했다. 내가 깜빡한 것이다. 그리고 용돈을 보내면 큰 이모는 안심을 했다. 큰 이모가 돌아가시고 조촐한 장례식을 마치고 큰 이모의 방을 정리하다가 큰 이모의 통장이 나왔다. 거기에는 내가 용돈으로 보내준 돈을 한 번도 꺼내서 사용하지 않으셨다. 


내가 용돈을 보내면 우체국으로 가서 카운트하는 그 낙으로 한 달을 보내셨다. 아플 때 방구석에서 혼자서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큰 이모는 어떤 삶을 살고 있었을까. 큰 이모의 죽음은 나에게 한동안 심한 우울감을 안겨주었다. 어제까지 룰루랄라 지내다가 오늘 느닷없이 잠들어 깨지 않는 죽음. 그것이 진정한 죽음이지만 신은 인간을 그렇게 편하게 죽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고통과 아픔을 잔뜩 안겨 준 다음에 서서히 죽음으로 내 몬다. 그리고 스스로 죽음을 택한 그 사람 때문에 요즘도 머리에 바늘을 맞는 느낌이 가끔씩 든다. 생글생글 내 앞에서는 주절주절 열심히 떠들었지만 실은 그게 고통을 잊으려고 발버둥 치는 거였다. 하지만 나는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다인 줄만 알았다. 그건 비극이었다. 비극이라는 말을 가끔 내뱉지만 실제로 비극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인터넷에서 마음을 같이 하는 사람들을 모아서 테이프로 창문을 꽁꽁 막은 뒤 연기를 피웠다. 응급실로 실려 갔지만 결국 깨어나지 못했다. 길게 적고 싶지만 적다 보니 우울해진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는 원론적인 말보다 죽음이 가까이 왔을 때 질질 끌지 않고 한 번에 딱 죽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죽음은 질환과 비슷하다. 넘어져 어딘가 한 번에 골절되는 것보다 질환에 걸리면 서서히 더 크고 깊게 질질 끌게 된다. 죽음이란 그런 질환과 비슷하다.


60년대를 늘 동경한다. 60년대 일어난 음악, 미술, 디자인, 사진, 문학을 사랑한다. 그 시대를 청춘으로 살아온 사람들은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70년대를 넘어오면서 문화는 르네상스를 누린다. 그 중심에서 마음껏 그 세계를 누렸다면 그건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굉장한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그 시대를 청춘으로 보내고 코로나 직전에 나이가 들어서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이 가장 부럽다. 오늘 이후는 오늘 이전보다 분명하지만 생활하기에 어려워질 것이다. 


말 한마디, 단어 하나에 촉을 세우고 덤벼드는 일이 비일비재한 세상이 될 것이다. 기후는 망가질 대로 망가져 여름은 2024년 여름이 시원했다고 느끼게 되고 겨울은 혹독해진다. 비만 오면 강이 범람하고 70년대에 만들어진 도로는 이제 수명이 다해서 크고 작은 포트 홀이 뚫릴 것이다. 가장 큰 변화는 사람들이 인간관계에 혐오를 느끼고 관계 맺기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은 죽고 나면 어제가 된다. 인간의 삶이라는 게 하루를 죽여 가는 것이다.


눈이 내리지 않는 지역인데 11월에는 눈이 내렸으면 좋겠다. 눈은 죽음을 말한다. 눈이 내리면 모두가 눈을 맞는다. 눈은 아파트에도 학교에도 교회도 절에도 똑같이 눈이 내린다. 노인도, 어린이도, 어른도 남자도 여자도 다 눈을 맞는다. 모두 다 죽는다. 눈은 곧 죽음이다. 눈이 내린 하얀 그것은 사후 세계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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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때 질질 끌지 않고 한 번에 딱 죽고 싶다는 생각을 열두 천 번은 한다. 죽는다고 생각하면 너무나 막막하고 겁이 나고 알 수 없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하얘진다. 그래서 잠이 들어 그대로 눈을 뜨지 않았으면 제일 좋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말을 하면 여러분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내 주위를 보면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서 생각을 하지 않는다. 가끔 넌지시 죽는 것에 대해서 우회하여 말을 꺼내면 생각해보지 않아서 잘 모른다고 했다. 물론 주위 사람들이 그렇게 친한 사람들은 아니다. 그저 생활하면서 같은 건물에서 인사를 하며 매일 보는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내가 죽음에 대해서 질질 끌지 않고 바로 죽음으로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에 사람들은 나도 그렇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어쩌면 나만큼 생각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아니면 나보다 더 죽음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가지고, 많이 생각했을 수도 있다.


나는 지금까지 여러 죽음을 봤다. 죽는 순간의 모습을 본 건 아니고 나의 가까이 있던 사람들이 죽었다. 죽음은 곧 헤어짐이다. 헤어진다는 말은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말로 나는 받아들였다. 이별은 어쩌다가 어느 시점에 다시 만날 수 있는 느낌이지만 헤어진다는 말은 더 이상의 만남은 없다는 느낌이 강하다.


글을 쓰면서 등장인물을 여럿 죽였다. 어쩔 수 없이 죽음에 대해서 떠올려야 했다. 글을 적어야 하니까. 그래서 죽음이 있는 여러 소설을 읽었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내게 와닿지 않아서 구구절절하게 적지 못했다. 그렇다고 죽었다,라고 간결하게 끝을 내기도 너무 싫었다.


나의 아버지는 질질 끌다가 죽음을 맞이했다. 고통으로 점철된 많은 날들을 보내다가 마지막에 가서야 가래를 뱉어내지 못할 정도로 폐가 망가져 죽음을 맞이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2년 동안 대학병원의 입원실에서 밤새 간이침대에서 잠을 자면서 아버지를 돌보았다. 오전에 의사가 왕진을 돌 때 어머니가 교대를 하러 오시면 나는 씻고 일을 하러 가서 저녁에 병원으로 와서 밤을 보냈다. 아버지는 고통이 점점 깊어져 갔지만 나을 수 있다는 알량한 희망을 버리지 못했다. 그러나 나아서 나온다 한들 생활은 엉망이 될 것이다. 점점 지쳐갔다. 입던 옷을 계속 입고 양말을 이삼 일씩 신었다. 집이 있되 집이 없는 사람 같은 꼴이 되었다. 어머니 역시 병간호를 하느라 혈압이 190까지 오르고 모든 것이 힘들었다. 아버지가 중환실에 입원을 하면 오히려 나았다. 면회가 안 되기 때문에 밤에 그냥 잠을 잘 수 있었다. 


신경을 쓰지 않고 밤새 잠이 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게 행복이었다. 평소에는 그런 것 따위 쳐다보지도 않지만 그때는 그랬다. 중환자실에 입원한 환자 가족들이 쉴 수 있는 방이 있었다. 큰 방인데 그 방에는 환자 가족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앉아서 잠을 자거나 중환실에서 환자가 나오기만을 기다리는 그런 방이었다. 나는 그 방에서 며칠 잠을 잤는데 이불도 없고 베개도 없어서 모두가 잠든 시간에 들어가서 그냥 신발도 벗지 않은 채 발은 현관에 내고 방 위에 누워서 잠을 잤다. 방에는 보일러가 돌아가고 있어서 그렇게 춥지 않았다. 하지만 새벽 5시에는 보일러를 끈다. 잠이 들었지만 잠이 들었다고 느끼지 못하는 잠. 그런 잠 속에서 그래도 깨지 않고 계속 자고 있는데 한기가 드는 느낌이 들었다. 아 보일러를 끈 모양이다. 일어나야지 했지만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런데 또 따뜻함이 몰려왔다. 이상하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좀 깊은 잠 속으로 빠져 들었다.  


포근한 깊은 잠이 나의 몸을 따뜻하게 해 주었다. 그럴 리 없지만 나는 이대로 잠의 세계에 빠져들어 깨어나지 않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수선하고 아무리 해도 정돈되지 않는 삶, 꼬이고 꼬인 생활 속에서 만나는 따분한 사람들. 이대로 깨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한순간에 사라졌으면 하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뭐 어때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죽음으로 가는 여행을 할 뿐이다. 하지만,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된다. 아직 아버지가 중환자실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다. 아버지를 놔두고 먼저 깨어나지 않는 건 너무나 비겁한 짓이다. 그날 눈을 떠보니 한 가족의 할머니가 내가 너무 오들오들 떨면서 잠을 자니 두꺼운 이불을 두 겹이나 덮어 주었다. 나는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방을 나왔다. 


아직 중환실의 면회 시간은 아니었다. 12월 중순. 벌써 이 년째. 아버지를 떠올리면 어린 시절 나를 데리고 다니며 장난감을 같이 만들며 즐거웠던 기억 밖에 없다. 중학생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아버지와 대화가 끊어지고 멀어지게 되었다. 둘이 같이 집에 있게 되어도 서먹하기만 했다. 아버지에게는 가족 밖에 없는데 손을 뻗으면 아버지가 있지만 거리가 너무 멀어져 버렸다. 개를 그렇게 싫어하시던 아버지도 집에서 키우는 개와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보고 싶어서 집으로 달려왔다. 개 역시 아버지를 제일 좋아했다. 생신이라고 호텔에서 식사를 하다가도 개가 보고 싶다며 다 먹지도 않고 그대로 집으로 가버렸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개는 오지 않는 아버지를 현관에서 몇 날 며칠을 기다렸다. 죽음이란 그렇게 사람과 사람이 헤어지는 것이다. 영영 보지 못하게 된다. 그게 싫다면 관계를 만들지 않으면 내가 죽어도 헤어지는 것에 대한 아픔이 덜 할지도 모른다.


코로나 시기에 친구가 사고로 죽었다. 아직 어린 아들을 구하려다 그만 죽고 말았다. 사고라는 건 그렇게 일방적이다. 여지를 두지 않는다. 죽는 사람은 죽고 마는 것이다. 친구가 죽은 것은 나에게는 기묘한 충격이었다. 친구와 그렇게 친한 게 아니었다. 같이 어울렸지만 나와는 맞는 구석이 없었다. 그러나 같이 일을 하면서 서로 맞는 구석이 없는 게 일을 하는 것과는 별개라는 걸 알았다. 우리는 꽤 잘했다. 파트가 나눠져 있어서 서로 맡은 파트를 열심히 했다. 정확하게는 친구가 사장이고 내가 밑에서 일하는 직원이었다. 


친하지 않더라도 서로 맞는 구석이 없더라도 일은 그렇게 몇 년을 같이 하게 되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매일 보다 보면 정이라는 게 든다. 그런 친구가 사고로 죽어버린 일은 나에게는 알 수 없는 무력감을 잔뜩 안겨 주었다. 잠이 들어 꿈을 꾸면 예전 세월호 때 꾸던 꿈이 연장이 되었다. 배 안에서 물이 점점 차올라 숨이 막혀 컥컥하다가 고통스러워 잠에서 깨어난다. 친구는 어린 아들 둘을 구하려다 물에 빠져서 나오지 못했다. 물이 점점 나의 몸속으로 기어들어와 숨이 콱 막히는 그 기분 나쁜 느낌을 잠이 들면 느끼게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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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을 삼키면 속이 따끔따끔한 게 병원에서도 아무런 이상을 찾지 못했다.

그리움인가? 내 그리움을 가을바람에 말려 본다.

날이 좋아 바닷가에서 눈을 감고 저곳을 바라보니

아, 글쎄 문정희 시인이 그리움을 말리고 있었다.

나 또한 우기에 축축해진 그리움을 모처럼 꺼내 가을바람과 가을 햇살에 말렸다.

바다도 파랗게 질려있고,

하늘도 질린 얼굴에 햇살은 참 좋아 울고 있는,

미세 먼지 하나 없이 이리저리 호롱 호롱 불어오는 가을바람에

발가락을 드러내고 그리움의 이불을 말리고 나니

마른 그리움에 그대의 언어가 군데군데 노랗게 스며들어 있었다.


얼룩 https://youtu.be/tYnC5liuM4s?si=5FjNaZVpND3Nz4h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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