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지는 1집을 들고 나오면서 대한민국의 온갖 유행을 전부 갈아엎었다. 가장 눈에 띄는 유행은 옷에 상표를 떼지 않고 달고 다녔다는 것이다. 거기에 벙거지 모자가 유행이었다. 유튜브로 옛날 티브이 서태지에 관한 영상을 보면 정말 대단했다.


누군가 자신이 녹화해 놓은 영상을 올려놓은 것이 있는데 초딩들이 우르르 나와 서태지와 아이들에게 전부 1 문하고 1 답을 얻어내는 영상도 있다. 이 영상에 사회를 보는 남녀 중에 여자 엠씨는 영화 '이장과 군수'에서 차승원의 첫사랑이었던 이현경이다. 남자는 개그맨 김은우.


뜬금없지만 그 시절과 지금을 비교해 보면 양현석과 이주노는 살도 찌도 얼굴도 커지면서 많이 변했는데 서태지는 거의 변함이 없는 게 신기하네. 얼마 전에 이치현도 봤는데, 이치현도 70살이 다 되었는데 외모의 변함이 별로 없어서 놀랐다.


영상을 보니 1집 활동을 하면서 일본에서도 공연을 하며 방송 활동을 했는데 일본의 어린 사람들? 거의 초등학교 정도 되는 아이들에게 많은 사인을 해주는 모습도 있었다. 좀 묘하네. 아무튼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전부 서태지와 아이들의 회오리춤을 따라 하곤 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이렇게 국민적 인기를 끈 것에 대해서는 아마도 사람들의 갈망 때문일지도 모른다.


가요는 많았지만 가요가 아직 팝을 따라가지 못한다고 생각을 하던 시절이었다. 팝이 표현해 내는 풍부한 음악적 서사를 가요는 무리였다. 지금도 좋아하는 아티스트 공연에 몰려가지만 – 얼마 전 조용필의 공연에 5만 명이 모였다. 정말 엄청나다 – 예전에도 가수들이 공연을 하면 전국에서 몰려들었다.


세계적으로 미국의 팝이 판을 치고 있었고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가 한국에 세계적인 보이 그룹 ‘뉴키즈 온 더 블록’이 공연을 오게 되었다. 1992년 2월 17일 올림픽체조경기장에서 초유의 공연이 개최되었다.


당시 서라벌레코드 초정으로 이 어마어마한 공연이 성사되었다. 그러나 대참사가 일어나고 말았다. 뉴키즈가 공연을 해야 할 시간에도 나타나지 않자 사람들은 지치기 시작했고 불만을 터트렸다. 그러다가 뉴키즈가 등장했는데 팬들이 미친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몰리면서 앞자리의 사람들이 쓰러지고 밟히는 사고가 일어났다. 거기에서 여고생 한 명이 숨지는 사태가 발생했다.


공연은 수습 후 계속되어서 새벽에 끝났다. 당시에 사고 소식이 티브이 뉴스를 통해 전국으로 보도되자 놀란 팬들의 부모들이 공연장으로 갔지만 뭐 제대로 연락을 주고받을 수 없었다. 뉴스로 보도된 장면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충격이었던 것이다.


뉴키즈를 보러 온 한국 팬 천 명이 소리를 지르며 몰려들었고 사람이 깔리는 모습이나 시설 집기가 파손되는 모습까지 방송이 되었다. 이로 인해 서라벌 레코드 대표는 구속이 되었다. 후에 서라벌레코드 회사는 그해 9월에 부도가 나고 만다. 그리고 2004년까지 버티다가 결국 폐업을 하고 만다.


그렇게 팝에 대한 갈망과 갈증으로 인해 대참사를 겪은 대한민국에 그해 4월, 신예 한국 보이 그룹이 티브이를 통해 사람들 앞에 나타나게 된다. 바로 서태지와 아이들이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뉴키즈 온 더 블록에 쏟아져 있던 관심을 가져오는데 무리가 없었던 것이다.


당시 팝의 흐름은 힙합이었다. 크리스 크로스가 세계적으로 나타났고, 지금은 엄청난 아티스트가 되어 버린 티엘씨부터 힙합이 강력한 파도처럼 밀려오는 시기였다. 그에 맞게 서태지와 아이들이 힙합에 댄스를 섞고 배경에는 록이 사운드를 받쳤다.


그렇게 해서 1집의 인기를 뒤로 하고 서태지와 아이들 2집이 나왔는데 우려와는 다르게 1집만큼 인기를 끌게 되었다. 2집은 본격적인 힙합에 한국적인 정서를 섞어버린 하여가를 선보였다. 그야말로 한반도를 강타했다. 티피코시에서는 서태지와 아이들과 계약을 맺고 광고를 했고 서태지의 패션은 거리를 물들였다.


처음으로 엑스세대가 등장했고 그 명맥이 이어져 지금은 엠지세대까지 불리고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정해놓고 부르는 게 별로다. 대부분 본인들도 별로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엠지야, 민지야,라고 말로 하는 사람들은 전부 꼰대들처럼 보인다. 엠지세대는 그 누구도 자신을 가리켜 우리 엠지세대야, 우리 제트세대야, 하고 하지 않는다.


티피코시는 서태지와 당시 김남주 등 협연으로 인기를 끌다가 세대가 변해감에 따라 거의 사라졌다가 요즘 다시 론칭을 하고 있다고 한다. 유행이란 그렇게 돌고 도는 거란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에는 몰랐다가 후에 1집의 난 알아요가 밀리 바닐리의 ‘걸 유 노우 잇’를 따라 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많았다. 표절시비와 무관하게 좀 웃긴 건 밀리 바닐리는 공연에서 대부분 노래를 직접 부르지 않고 립싱크를 했다고 한다. 아마 한 번도 실제로 불러 본 적이 없다고 했지. 서태지와 아이들 2집에서는 ‘우리들만의 추억’의 음이 꼭 오락실에 있는 보글보글의 음악과 비슷하게 들린다.


나는 2집에서 ‘죽음의 늪’이 너무 좋다. 그 노래를 들었을 때 시작할 때 두구두구당 하며 시작되는 음악이며 죽음의 늪이라는 게 마치 나를 보는 것 같은, 내가 정말 싫어하는 사람이 있는데, 아주 나쁘고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 그 사람이 어느 날 밤 저기에 보이는데 조심 다가가서 보니 그 사람이 바로 나였다는 그런 느낌이 드는 노래다. 혼자 이 가사가 말하는 이야기는 철학적이야,라며 너무 좋아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한 곡을 고르면 ‘죽음의 늪’이다.


제로 콘서트에서의 죽음의 늪. 몸을 때리는 굉장한 사운드가 너무나 좋다. https://youtu.be/Z-CIagrd29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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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관통하는 결락의 결정체, 배위와 모순, 사랑을 하면서 환희와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이 미친 음악, 말러의 아다지에토는 많은 영화인들이 영화에 사용하고 있다. 아다지에토가 영화 역사상 가장 잘 어울렸던 영화가 ‘베니스에서의 죽음’이었다.


하지만 영화의 숨결 자체가 아다지에토를 떠올리게 하는 영화가 박찬욱의 ‘헤어질 결심’이다. 말러 교향곡 5번 4악장 아다지에토의 선율이 몹시 아름답고 마음을 지그시 누르는 이유는 타악기나 관악기가 사라지고 현악기로 연주되기 때문이다.

헤어질 결심이 말러 교향곡 5번의 4악장 아다지에토와 한 몸인 이유는 헤어질 결심이 서래의 이야기이며, 아다지에토가 서래를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러는 아다지에토를 사랑하는 아내 알마 쉰들러를 위해 사랑으로 충만한 마음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1910년 병으로 쓰러질 때까지 이 곡을 수정에 수정을 거쳤다.


알마는 1902년 말러와 결혼을 하지만 알마는 독일 예술 학교인 바우하우스 이념의 창시자인 그로피우스와도 사귀고, 화가 코코슈카하고도 사귄다. 그의 엄청난 그림 ‘바람의 신부’ 속 여인이 알마 쉰들러다.


처음 말러가 알마를 위해 아다지에토를 작곡했을 당시에는 이 곡은 그야말로 사랑으로만 충만했다. 하지만 수정에 수정을 거듭할수록 불안, 사라지는 것, 잊힘, 그리움, 죽음이 곡에 스며들게 된다. 사랑을 하게 됨으로 그 행복 속 결락과 죽음을 보게 된다.


헤어질 결심의 서래가 알마를 쏙 빼닮았다. 영화 초반 서래의 남편이 산에 오르면서 이런 대사를 한다. “말러 교향곡 5번 1악장부터 듣기 시작하면 4악장이 끝나갈 무렵 산 정상에 오른다. 그리고 산 정상에서 5악장을 듣고 내려온다.” 하지만 마지막 5악장은 듣지 못한 채 추락사하고 만다.


아다지에토는 산으로 시작해서 바다로 끝난다. 헤어질 결심 역시 산으로 시작해서 마지막 바다에서 끝이 난다. 영화 속 미장센을 들여다보면 문형과 색감에서 잘 드러난다. 서래 집 벽지는 산인지 바다인지 모호하다. 박찬욱 사단으로 불리는 류성희 미술감독의 작품이다. 류성희 미술감독의 손을 거치면 영화 속 미장센이 마치 움직이는 예술품으로 보이는 마법이 펼쳐진다.

류성희 미술감독과 박찬욱

류성희


아다지에토는 카타르시스인 동시에 죽음을 표현한다. 불꽃처럼 만개하는 동시에 소멸하는 삶을 드러내고 있다. 영화에서 안개가 잔뜩 낀 산과 바다를 표현했다. 말러의 아다지에토는 헤어질 결심의 테이크 테이크 사이의 결, 그 숨결 사이에 녹아있다.


클래식 마니아인 박찬욱은 8년 전 탕웨이가 코오롱 스포츠 광고에 말러의 아다지에토와 함께 등장하는 모습을 보고 반했을 것이다. 그리고 내내 시나리오를 생각하고 생각하다가 헤어질 결심의 마지막 장면에 그 장면을 오마주 했다. 코오롱 스포츠 광고 속 흐르는 아다지에토의 탕웨이는 너무 예쁘다. 헤어질 결심에 아다지에토가 흐른다. 서래는 말한다.


날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당신의 사랑이 끝났고,

당신의 사랑이 끝나는 순간 나의 사랑은 시작되었죠.


편집을 너무 잘했다. 영화 이야기와 아다지에토가 절묘 https://youtu.be/-MF0hJNqk2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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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많은 소설 속에 드러나는 인간 내면의 깊은 감정 중에 결락이 많이 나온다. 결락이란 말 그대로 있어야 할 부분이 빠져서 떨어져 나간 것을 말한다. 그래서 하루키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마음의 한 부분이 떨어져 나가고 난 뒤 심각한 결락감을 느끼고 그 공백을 채우려 안간힘을 쓴다.


이 결락을 가장 잘 느끼게 하는 음악이 말러의 아다지에토이며, 결락감을 견딜 수 없어하는 주인공이 나오는 영화가 ‘베니스에서의 죽음’이다. 말러리안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는 말러의 교향곡 아다지에토가 영화 내내 흐르는데 요동치는 가슴을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된다.

어째서 아다지에토는 이토록 마음을 뒤흔들어 놓을까. 말러는 아다지에토를 1901년에 작곡을 했는데, 그때 41살의 말러는 작곡가, 지휘자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다. 당시 최고의 여인, 말러보다 19살이나 어린 작곡자이자 사교계의 여인 알마 쉰들러의 사랑을 얻게 된다. 말러는 알마에 대한 사랑을 담아서 아다지에토를 작곡하고 그녀에게 헌정했다.


음악이, 그리고 그 울림이 당신을 향한 나의 열망을 더욱 이끌어낸다면, 당신은 매일 아침 이 곡을 듣게 될 것입니다. 당신을 향한 당신을 위한 모든 것은 내 안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알마 – 말러로부터


그런데 이 사랑하는 곡이 어째서 베니스에서의 죽음에 쓰이면서 영화를 명작으로 만들고, 이후 수많은 모순의 사랑을 담아내는 영화에 등장했을까. 알마에 의하면 말러는 늘 죽음을 생각하고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했던 사람이라고 했다.


베니스의 죽음은 71년의 영화로 주인공 구스타프 에센바흐는 점점 몸이 쇠약해져 가기 시작해서 베니스로 요양을 오게 된다. 지휘자로 명성을 떨치던 에센바흐는 대중에게 버림받고, 아내마저 자신을 인간 취급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에센바흐는 살아갈 의미를 잃어버린 채 결락감에 하루하루를 보낸다.


에센바흐는 아름다운 죽음을 생각한다. 자신의 몸보다 자신의 예술이 죽어가는 것에 대한 결락은 에센바흐의 몸과 마음에 곰팡이를 피우게 한다. 이렇게 꺼져가는 마음을 다시 뛰게 하는 건 베니스에서 만난 아름다운 소년 타지오였다. 너무나 아름다운 미소년에서 자신의 결락의 공백을 메워줄 무엇을 보았다.

이 미치도록 아름다운 소년에게 에센바흐는 몸과 마음을 전부 사로잡혀 버린다. 소년 때문에 좌절이 오고, 소년 덕분에 희망이 번갈아 찾아오면서 말러의 아다지에토가 흐른다. 모순이 동시에 공존하는 이율배반의 미학을 아다지에토가 보여주고 있다. 그 사이의 결이 너무나 섬세하여 새벽의 몽환화가 사람의 손끝에 놀라 꽃을 틔울 정도로 섬세한 음악이 아다지에토이다.


이 영화는 토마스 만의 소설을 비스콘티 감독이 구스타프 말러를 모델로 하여 원작의 작가를 영화 속에서 작곡자이자 지휘자로 변경했지만 이 영화는 지금까지 너무나 좋은 영화로 남아있다.


아다지에토에는 미칠 것 같은 결락과 아름답게 죽음을 맞이할 용기와 마음속에서 요동치고 멈추지 못할 것 같은 사랑의 감정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이 아다지에토가 영화 ‘베니스의 죽음’보다 더 영상과 한 몸이 된 작품이 있다. 영화의 모든 장면과 내용, 그리고 주인공들이 내쉬는 숨결에 붙어서 아다지에토가 느껴지는 영화가 바로 ‘헤어질 결심’이다.


https://youtu.be/JvQewVDzvG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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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신부

영화 포스터


말러가 한평생 사랑한 여인, 검은 밝음과 하얀 어둠을 지닌 여자 알마 쉰들러, 결혼 후 알마 말러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가 바람의 신부다. 그리고 화가 코코슈카의 그림의 제목이기도 한 바람의 신부. 그림 속 격정적 사랑을 나누는 두 사람이 코코슈카와 알마다.

바람의 신부


이 영화에 나오는 알마와 말러 그리고 코코슈카는 실물과 싱크로가 대단하다. 알마는 루살로메를 닮았다. 릴케의 사랑을 받았지만 니체의 사랑도, 프로이트의 사랑도 받았던 루. 그런 루와 닮았다. 루와 알마는 어린 나이에도 당대 최고의 시인이며 문학가, 작곡에도 능력을 보였다.


알마는 화가, 작곡가, 지휘자, 건축가와 사랑을 했다. 클림트, 쉰베르크, 쳄린스키 등. 알마는 그림 ‘바람의 신부’처럼 바람과 같은 삶을 살았다. 40세까지 독신으로 저녁 자리에서도 작곡만 하는 말러를 알마는 만난다.  말러 교향곡 1번을 듣고 [금관이 과도하여 주된 멜로디가 없다. 문명화되지 않고 주제가 복잡하고 반복이 너무 많다. 지나치게 이국적이다] 같은 막힘없이 말러의 음악을 비평했다. 말러는 이 당돌한 어린 아가씨에 반하게 되어 둘은 사랑에 빠진다.


알마는 쳄린스키와 만나고 있었지만 말러에게 반해 23살 꽃 같은 나이에 19살 차이가 나는 말러와 결혼을 한다. 결혼을 하며 알마는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포기한다. 그녀가 얼마나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냐면 말러의 교향곡 리허설을 듣고 그 선율을 바로 피아노로 연주해 버릴 정도였다. 알마는 모든 재능을 포기하고 말러의 아내로 두 딸의 엄마로 지낸다.


하지만 큰 딸을 잃고 난 후 알마는 조금씩 심경의 변화가 찾아온다. 알마의 아버지는 당시 비엔나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 에밀 야곱 쉰들러였다. 그 예술적 재능을 물려받았지만 말러는 자신을 묶어 두려고만 했다. 완벽주의자 말러는 알마를 마치 선생님이 학생을 훈육하듯 대했다. 알마는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비서처럼 부려먹는 것이라 여기고 건축가 그로피우스와 바람을 피운다. 하지만 말러를 배반할 수 없어 곁을 지킨다.


그러나 사랑을 빼앗겼다고 생각한 말러는 지병이 악화되어 51세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사랑과 배반, 불안, 아름다운 죽음을 느낀 말러는 알마에게 헌정한 아다지에토를 죽기 직전까지 수정하고 수정했다. 알마는 말러가 죽고 그로피우스와 결혼하려 하지만 건축가의 어머니 반대로 무산된다. 그리고 코코슈카를 다시 만나게 되면서 그림의 모델이 되어 주면서 불같은 사랑을 나눈다.


알마는 코코슈카의 온 마음을 뒤 흔들었다. 그림 바람의 신부는 코코슈카의 그림 중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바람의 신부는 두 사람의 불 같은 사랑을 가슴에서 그대로 뿜어져 나오는 거친 화풍으로 그렸다. 코코슈카는 오스트리아 표현주의 운동의 대표라 불리는 화가였으며 미술계의 프로이트라 불렸다. 알마는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읽어가며 코코슈카를 이해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불같은 사랑을 나누던 두 사람은 이어지지 못한다. 코코슈카가 군대를 가면서 헤어지게 된다. 알마는 코코슈카가 군대에서 총상으로 사망했다는 소문을 듣고 건축가와 다시 만나 결혼을 하여 아이를 갖게 된다. 후에 살아서 군에서 돌아온 코코슈카는 알마가 결혼했다는 소식을 듣자 그녀를 잊지 못하고 병적으로 그녀를 갈망하여 알마를 닮은 사람만 한 인형을 제작해서 데리고 다니며 같이 생활했다. 이 인형은 검색을 하면 볼 수 있다.


알마는 건축가와의 결혼생활이 오래가지 못했다. 잦은 해외 출장과 함께 아들이 친부인가 하는 문제에 시달린다. 그러다가 시인이자 소설가인 프란츠 베르벨에게 빠져들어 10년 동안 동거를 하다 결혼을 하게 된다. 알마 쉰들러는 그렇게 해서 얻은 이름이 ‘알마 마리아 말러 그로피우스 베르펠’이 된다.


알마는 자신의 남자들이 걸작을 남기지 않으면 사랑을 받아주지 않았다. 알마는 코코슈카와 함께 지낼 때에도 말러의 두상 조각품과 사진을 집에 걸어 두었고, 건축가 그로피우스와 지낼 때에는 코코슈카가 그린 자신의 나체 소묘를 벽에 걸어 두었다. 같이 사는 남자들이 그것에 불만을 드러내면 알마는 “그들은 내 삶의 일부였다고”라고 일축했다.


영화는 알마가 작곡한 가곡을 발표하면서 끝이 난다. 알마의 첫 입술을 훔친 사람이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다. 클림트의 ‘키스’ 속 여인이 알마 쉰들러다.

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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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노 요코의 바닷마을 다이어리


우리에게는 카우보이 비밥 ost로 잘 알려진 음악가 칸노 요코는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음악도 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칸노 요코도 말러의 교향곡 아다지에토를 무척이나 좋아하지 않았을까.

마지막 네 자매가 바닷가를 거니는 엔딩 장면에 마지막을 장식하는 음악이 흐른다. 그 엔딩 곡을 듣고 있으면 네 자매가 살아오면서 지치고 부딪히고 힘들어하면서 불안을 딛고 가족이 되어 가는 모든 순간이 필름처럼 지나간다.


막내 스즈와 세 언니들은 전혀 닮지 않았는데 같이 지내면서 점점 하나둘씩 닮은 점을 알아간다. 매사에 꾹꾹 참고 견디는 건 큰 언니 사치와 닮았고, 술을 마시고 용감해지는 건 둘째 언니 요시노와 닮았다.


낚시를 즐기는 셋째 언니 치카는 스즈가 아버지와 함께 낚시를 자주 했다는 말을 듣고 비로소 처음 본 동생과 기억이 없는 아버지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이어져 있다는 생각이 든다. 치카가 만든 어묵 카레를 먹으며 스즈는 아버지와의 추억이 1도 없는 치카 언니와 아버지와의 추억으로만 가득한 스즈는 그것을 공유한다.


이 모든 이야기가 칸노 요코의 마지막 엔딩곡에 스며들어 흐른다. 음악의 분위기도 말러를 닮았다. 이 영화는 영화 시작 18분부터 가슴이 따뜻해지더니 마지막까지 그 따뜻함을 유지한다.


온 마을 사람들이 스즈를 있는 그대로 가족으로 받아준다. 고래 뱃속 같은 작은 마을의 사람들은 스즈를 가족처럼 대한다. 누군가 세상을 떠나면 모두가 하나같이 슬퍼한다. 떠난 사람은 남겨진 사람들이 기억해 주고 남겨진 이들은 서로를 위로한다. 피를 나누지 않아도 그들은 가족이 된다. 그런 가족에게 스즈는 사랑받는다. 보는 이들도 스즈를 통해서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칸노 요코의 엔딩 곡은 마지막 네 자매의 이야기가 The end가 아니라 The and로 끝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 같다. https://youtu.be/O6R9av6Zj4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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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디지에토와 탕웨이를 가장 어울리게 담아 놓은 영상이 바로 거의 십 년 전 코오롱 스포츠 광고 영상이다. 바다와 탕웨이가 펼치는 아다지에토를 보며 박찬욱 감독은 이미 탕웨이의 사랑을 표현하리라 마음을 먹고 있었을 것이다. 말도 못하게 예쁘게 나오는 분당댁 https://youtu.be/tNKxAoi-MT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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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깅을 하다가 운이 좋으면 얄읏한 공을 발견한다. 얄읏한 공은 노순택 사진작가의 연작 사진 다큐 시리즈다. 나는 오래전에 얄읏한 공 사진전을 보러 가는 것을 좋아했었다. 내가 평소에 가끔 만나는 얄읏한 공은 사진다큐에 나오는 공은 아니지만 자연이 만들어 놓은 얄읏한 공이다. 노순택 작가의 얄읏한 공은 미군이 만들어 놓은 공으로, 미국의 눈으로 마치 대추리에 살아가는 사람들, 즉 한국을 감시하는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사진 하나하나가 전부 감시자의 눈처럼 보인다. https://brunch.co.kr/@drillmasteer/585#comment

하지만 내가 조깅을 하면서 만나는 얄읏한 공은 사람들을 감시한다는 느낌보다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으려는 듯한 모습처럼 보인다. 나 오늘 하루 고생했으니 이제 곧 사라져, 나에게 인사를 해줘. 곧 사라진단 말이야,라고 말하는 것 같다.


신은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인간에게 보여주는구나.라고 누가 말했다. 신? 신이 정말 있나? 하느님? 과연 있기나 한 걸까? 얼마 전에 러셀 크로우가 나오는 엑소시스트 더 바티칸을 봤다.

이 영화를 보면서 든 생각은 신은 실제로 존재하는가, 그렇다면 악마는 진짜로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은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악마는 존재한다-이다.


악마는 정말로, 실제로 있다. 신천지 정명석이 악마가 아닌가.


크리스천에게 신은 실제로 존재하는가 물으면 존재한다고 한다. 악마 역시 존재한다고 한다. 그럼 내가 묻는다. 신은 어째서 악마를 가만 내버려 두는가. 하느님 왜 정명석을 가만 내버려 두지? 전광훈 같은 사람은 하느님을 욕보이고 마치 자신의 아래에 있는 것처럼 말했다. 그런데도 신은? 하느님은? 그 잘난 가드는 어디에 있나?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왜 이런 악마를 가만 내버려 두는가.


주위의 크리스천에게 이런 질문을 해서 얻은 해답이라고는 그들도 사실 모른다,라는 결론을 얻었다. 어쩌면 진실하게, 진정 미칠 정도로 하느님은 믿지 않는지도 모른다. 대부분 하느님의 소리를 들었다고 하지만 그 하느님이 실존하는 악마들을 그냥 왜 내버려 두는지, 하느님의 이름을 빌려 악마짓을 하는 목사들은 왜 그냥 두는지 물으면 대답들이 뻔했다.


만약 정말 뼛속까지 신을 믿고 있다면 광적인 크리스천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유사종교의 교도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적당히 또는 적당히보다 조금 더 하느님을 믿을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들이 많아서 하느님이 기분 나빠서 악마들에게 응징을 하지 않고 있는지도 모른다. 고로 신은 세상에 없지만 악마는 존재한다는 것이다. 목사들도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보다 자신의 말을 많이 하고 믿음보다는 교회의 이익을 위해 십일조 하기를 바라는 목사들이 많다.


매달 월급에서 70만 원씩 십일조 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는지 모르겠다. 이 정도면 교회에서 막아야 하지만 그러지 않고 오히려 얼씨구 한다. 목사가 악마일지도 모른다. 이 영화에서 넌지시 돌려 그걸 말하고 있다.


만약 믿음으로 인해 신과 악마가 나타나는 것이라면, 그리하여 나타난 그것들이 믿는 이들의 믿음으로 힘이 강해지는 것이라면, 그래서 이 세상에는 악마는 더 많이 나타나는 것이라면 사람들은 신 보다 악마를 더 믿는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다른 이들의 불행을 보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유명인들이 하는 말 중에 가장 이상한 말이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가자,라고 하는 말이다. 도대체 어떻게 모두가 행복할 수 있을까. 절대 모두가 행복할 수 없고 모두가 행복하다면 모두가 불행하기도 한 것이다. 소수의 행복한 자들이 다수의 불행한 자들을 보며 즐거워하는 것이 이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광신교도들을 보며 저들은 미쳤다고 말하지만 저들의 입장에서는 신을 덜 믿는 신도들과 그 외의 사람들이 미친 것이다. 만약 광신교도들이 잘못된 교리를 받아들여서 생활하고 있다면 신에게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신은 그들에게 벌을 내리지 않는다.


그러니


만약 진짜 신이 있다면 그래서 신이 나타난다면 - 신을 믿는다는 목사들, 또 신을 열렬히 믿는 크리스천 앞에 진짜 신이 나타난다면 그들은 신 앞에서 불안해하고 큰 두려움에 떨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믿는다는 신에게 거짓말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신이 어느 날 나타나서 악마들을 없애기 시작했다면 신을 믿었던 목사들, 크리스천들 역시 매일 밤 내일 내 차례가 아닌가 하며 벌벌 떨며 지낼 것이다. 하지만 걱정할 것 없다. 악마는 앞으로 더 늘어나지만 신은 세상에 절대 나타나지 않는다.신이라는 건 없기 때문이다.

얄읏한 공처럼 아름다운 광경은 신이 만든 것이 아니라 지구와 구름, 대기와 태양의 거리와 우주 속 먼지 같은 것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신은 무슨 얼어 죽을. 전쟁하나 막지 못하는 신을 무슨 개똥 같은 신이라고 할 수 있나.


붉게 이글이글거리며 주위를 온통 오렌지빛으로 물들이는 얄읏한 공은 어떻든 아름답다. 조깅을 하러 나오지 않으면 볼 수 없기에 얄읏한 공을 보기 위해서라도 조깅을 하러 나와야 한다,라는 말은 조금 거짓말이지만 어떻든 밖으로 나오지 않으면 볼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오뉴월은 금계국의 계절이다. 작년 이맘때에도 강변을 수놓은 금계국의 예쁜 모습에 사진을 팡팡 찍었던 기억이 있다. 금계국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다. 바람에게 전하는 말을 하는 것처럼 금계국들이 춤을 춘다. 이렇게 예쁜 색을 가진 금계국을 보니 한 이야기가 떠오른다.


며 칠 동안 몸에 근육통이 온 것처럼 몸이 뻣뻣하고 경직되어 있고 너무 피곤했다. 일을 하다가 시시때때로 졸다가 상사에게 핀잔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상사는 이해해 주었다.


이봐, 신혼이라 이거지. 좋을 때지.


결혼한 지 4주 정도가 지났다. 결혼하기 2주 전부터 같이 생활을 했으니 6주 정도를 같이 잔 샘이다. 혼자 잠을 잘 때에는 몰랐지만 둘이 같이 잠을 자고 나면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다. 별다른 이유는 없다. 몸을 부스럭거리며 움직이기도 힘들고 섹스 후 품에 파고든 아내를 살짝 밀어내고 편안한 자세로 잠이 드는 것 또한 힘들었다. 어떻게든 잠이 들면 해결되겠지 생각했지만 잠은 새벽이나 되어서 피곤에 의해 잠시 잠들었다가 출근 시간에 일어났다. 일어나면 목이 뻣뻣하고 팔을 드는 게 버거웠다.


아주 큰 침대를 넣을 수는 없고 작은 침대 두 개를 넣어서 잠이 들 때에만 따로 자면 좋은데 아내에게 꺼내기 힘든 말이었다. 그런 말을 했다가는 아내가 마음이 다칠까 겁이 난다.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나의 몸은 점점 힘들어져 갔다. 아내도 그런 나를 눈치챘는지 언젠가부터 노란 차를 끓여서 잠들기 전에 나에게 주었다. 차는 따뜻했고 몸은 편안해졌다. 그렇게 몇 날 며칠을 보낸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떴는데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일어나는데 몸이 너무 무거워 겨우 일어나 앉았는데 침대에 앉아 있다는 느낌이 이상했다. 거울을 보니 몸이 온통 노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점점, 나는.

이 사진에는 얄읏한 공이 보이지 않지만 오렌지 빛으로 물들어가는 풍경은 역시 신비롭다. 비만 오지 않으면 어머님들이 저 자리에 늘 모여서 하나 둘 큰 소리를 내면서 으쌰으쌰 하며 운동을 한다. 리더가 소리를 크게 내야 한다고 해서 어머님들이 정말 큰 소리를 낸다. 꼭 군대에서 조교가 소리 안 내냐! 하면 구보를 하면서 하기 싫어 죽겠는데 모르겠지 하고 나 혼자 소리를 안 냈는데 귀신 같이 알고 소리 질러! 하는 것과 비슷하다. 리더 어머님은 마치 조교처럼 단상 위에서 어머님들을 향해 소리를 내면서 몸을 흔들어야 한다고 외친다.

하늘은 매일 다르다. 매일 다르다는 걸 보려면 매일 나와서 달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걸 알 수 없다. 지금 이 맘 때에만 딱 볼 수 있는 노을의 색감과 구름의 흐름이다. 곧 6월이 흘러가고 무더위가 본격적으로 지구를 덮치면 아주 뜨겁게 타오르는 붉은 노을이 저녁 시간의 하늘을 장식할 것이다.

겨울의 혹독한 추위를 견디며 달려서 봄이 되었건만 봄에는 짙은 황사 때문에 마스크를 벗지 못하고 헉헉 거리며 달리다가 황사가 물러가니 질 나쁜 초미세먼지와 최악의 미세먼지가 괴롭혔다. 먼지의 습격을 피해 5월에 이르렀는데 이제는 강변에 나타나는 엄청난 하루살이 때문에 마스크를 또 벗지 못한다. 날파리는 여지만 보이면 입으로 들어온다. 몸을 풀고 있으면 바로 옆에서 날파리떼가 부우우우 우웅 하며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비행을 하고 있다. 이제 하루살이 떼가 사라지면 본격적인 무더위를 견디며 달려야 한다. 인생 쉬운 게 없구만.

주머니에 폰이 있어 좋은 세상이다. 쓱 꺼내서 쓱 찍으면 된다. 그러면 이렇게 예쁜 모습을 담을 수 있다. 좀 더 괜찮은 폰이었으면, 신형 폰이었으면 더 멋지게 담을 수 있는데 하는 욕심은 사라지지 않지만 곧바로 뭐 어때, 하는 생각이 든다. 요즘의 날씨는 아주 변덕이 심한 시어머니 같다. 낮에는 맑은 거 같은데 저녁에는 너무 할 만큼 싸늘하다. 이젠 감기가 걸리면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주위의 반응도 그리고 감기로 인해 나타나는 현상도. 어제는 감기가 걸린 한 대학생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기침이 너무 심하게 나고 가래가 끊어지지 않았다고 했다. 가래가 낀 기침이 심하게 나면 폐에 타격을 줄 수 있다. 아무튼 요즘은 감기를 조심해야 한다. 마스크도 하지 않고 아가리를 온통 개방해서 실내의 공공장소에서 기침을 하는 인간이 있다면 그 입에 말벌을 집어던지고 싶다. 나 왜 이렇게 못돼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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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 신작 장편 소설 인터뷰 - 거리와 그 불확실한 벽


하루키 신작 장편 소설 인터뷰 – 4월


신작 장편 소설 ‘거리와 그 불확실한 벽’에 대해서 버즈피드 일본판에서 인터뷰를 한 것이고 원문을 보고 싶다면,라고 해도 원문은 아무도 안 볼 테니 그냥 인터뷰를 옮겨 본다. 하루키 찐 팬인 파인딩 하루키의 사이트에 들어가도 인터뷰 전문을 다 볼 수 있다. 잘 알겠지만 이 신작은 오래전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속 하나의 이야기로 발전된 것으로 미완성 소설이었는데 이번에 재 집필하여 출간하게 된 것이다. 이하 질문 표기 없이 하루키의 답변으로만.


코로나가 일본을 덮친 2020년 3월 초 이 소설을 쓰기 시작하여, 3년 정도 걸려 완성했습니다. 외출하는 일도 거의 없고, 장기 여행을 하는 일도 없는 그런 상당히 이상한, 긴장을 강요받는 환경 속에서 매일  이 소설을 끈질기게 쓰고 있었습니다. 마치 꿈 읽기가 도서관에서 오래된 꿈을 읽는 것처럼 말이죠.


미완성인 이 소설을 재 집필한 것은, 1973년의 핀볼까지 쓰게 되었고, 그 이후에 ‘거리와 그 불확실한 벽’을 썼으니 실질적인 세 번째 작품입니다. 당시에는 제가 정말 쓰고 싶었던 세계를 그리려고 시도했지만 아직 작가로서의 기술력이랄지 부족했습니다. 쓰고 싶은 것은 있었지만 전혀 쓸 수가 없었어요. 이런저런 사정까지 겹치면서 어중간한 형태로는 발표할 수 없었고, 그 당시에도 문예지에 발표하고 굉장히 후회했었습니다. 언젠가 제대로 된 형태로 완전히 끝맺음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목에 생선 가시가 걸린 것처럼 말이죠.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다 쓰고 나서도 ‘앞으로 2년만 더 기다려보자’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좀 더 깊이가 있는 것을 쓸 수 있겠지 생각했습니다. 드디어 다시 한번, 매듭을 짓지 못한 그 이야기와 마주 서자라는 결심이 섰던 거죠. 문장을 쓰는 기술도 그동안 많이 발전했을 거고요.


[하루키는 그 시점이 해변의 카프카를 쓰고 난 후라는 이야기를 인터뷰로 길게 한다]


80년대 문예지에 발표했던 제목과 이번 시작의 제목을 그대로 가져간 이유는 이 제목을 좋아했어요. 처음 쓸 당시의 작품 자체는 만족하지 못했지만, 이 제목만은 마음에 들어왔어요.


2015년 또 다른 인터뷰에서 다시 쓰고 싶은 작품은 없냐는 독자의 질문에 하루키는, 한 번 그런 적이 있는데 하지만 저는 앞으로는 더 이상 어떤 작품을 다시 쓰는 일은 없다고 한 부분에 대해서 질문을 받자 “제가 그런 말을 했던가요? 무책임한 말을 해버렸군요. 하하”


80년대 최초 버전인 '거리와 그 불확실한 벽‘의 스토리가 이어지는 것에 대한 질문을 받은 하루키는, 1부에 해당하는 이야기를 완전히 다시 새롭게 쓰면서 저 스스로도 제대로 다시 쓸 수 있게 되었다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과연 이것만으로 다시 쓰는 의미가 있을까'라는 의문을 가졌죠. 이런 의문이 남았기 때문에 일단 그렇게 1부만 다시 쓰고 그대로 두었습니다. 원래 다시 쓴다고 해도 발표를 하든 안 하든 상관없이 저 스스로 납득하기 위해서 쓴 것이니까요. 그렇게 반년 정도가 지나가면서 왠지 계속 이야기를 쓰고 싶어 지면서, 그 이야기에 다시 푹 빠져 버렸어요. 중년이 된 주인공이 이끄는 노인이 등장하고, 10대 소년이 나오죠. 결과적으로는 3세대가 입체적으로 얽히게 되는 전개가 됩니다.


2부는 내일, 아니 다음에.

https://www.buzzfeed.com/jp/harunayamazaki/haruki-murakami-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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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와 고로의 대담


무라카미 하루키가 이나가키 고로의 방송에 나와서 음악과 소설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이나가키 고로는 스맙의 멤버다. 영화배우로 가수로 종횡무진한데 스맙의 최고는 뭐니 뭐니 해도 기무타쿠. 이나가키 고로는 북 버라이어티 방송을 하고 있는데 게스트로 문인을 초대해서 방송을 한다. 거기에 하루키가 나와서 대담을 거쳤다.


이 방송에서 하루키와 고로는 ‘드라이브 마이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영화 속 음악을 한 곡 튼다.


또, 내가 너무나 사랑해 마지않는 소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하고 스키터 데이비스의 1962년의 곡 ‘디 앤드 오브 더 월드’를 튼다. 이 노래는 들어보면 누구나 다 아는 노래다. 이 노래 한 곡으로 스키터는 세계적인 가수가 되었다. 이 노래도 비틀스의 노래처럼 전 세계 어느 라디오에서 쉬지 않고 흘러나오고 있을 곡이다.


‘노르웨이 숲’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며 빌 에반스의 ‘왈츠 포 데비’를 튼다. 빌 에반스는 재즈 밴드와 함께 자신이 피아노로 ‘왈츠 포 데비’를 연주하는데 지금, 늦가을의 햇살이 힘을 잃어 벤치와 나뭇가지에 늘어질 때 들으면 정말 좋은 곡이다.


글렌 굴드 버전으로 베토벤 3번 협주곡 Op. 37도 나온다. https://youtu.be/G7EEACEefH0

이 방송을 듣고 있으면 서글서글 하루키와 고로는 나이를 초월하고 꽤 아이 같은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세계는 다중적이고 그 다른 세계를 이어주는 건 소설이라는 걸 두 사람은 여실히 알고 있는 것 같다. 방송은 2021년 10월에 방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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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라디오 에피소드


하루키가 라디오 방송을 직접 하면서 두 달에 한 번씩 하던 라디오 방송을 한 달에 한 번씩, 애정을 가지고 하면서 소소한 자신의 이야기, 주변의 이야기를 했다. 출처는 파인딩 하루키 사이트입니다.

하루키가 소설에 관해서 이야기를 한 부분도 있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3년의 핀볼, 노르웨이의 숲,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에 대해서 언급을 했는데 소설에 관해서는 이전에도 많이 이야기를 했기에 여기서는 다루지는 않겠다. 원본 사이트를 보면 재미있는 에피가 많다. ‘고양이를 씻기는 방식‘ 라든가, ‘스시, 소바 가게 이야기’등은 재미있다.


소바 가게 이야기 - 하루키


이번에도 역시 때때로 소바 가게 카운터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가볍게 손잡이를 잡고 메밀국수에 보리소주를(하루키도 이제 보리소주를 마시기도 하나 보다) 곁들이고 있었죠. 꽤 좋지 않나요? 제 옆으로 남은 3개 정도의 카운터 자리에 남녀 손님이 앉아 있었습니다. 남자는 40대, 여자는 20대 후반 정도로, 어떤 사이인지는 모르겠지만 계속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답니다. 그래서 듣고 싶지는 않았지만(큭큭 만약 남녀의 은밀한 이야기였다면 듣고 싶어서 보리소주를 더 주문했을까) 그들의 목소리가 제멋대로 들어와 버리니까 어쩔 수 없이 듣게 되었죠. 그런데 책에 대한 이야기가 갑자기 제 이야기로 옮겨갔고 이후 제 작품에 대한 싫은 소리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거 곤란해졌는걸’이라고 생각이 들었지만, 거기서 일어나 버리게 되면 뭔가 눈에 띌 거고 주문한 요리도 아직 나오지 않았고 어쩔 수 없이 한쪽 팔꿈치에 얼굴을 숨기며 가만히 있었답니다. (그런다고 하루키를 몰라볼 수 있을까) 그 남자 손님은 제 소설의 어떤 부분들이 얼마나 지루한가에 대해서 동석한 여성에게 얘기해 주고 있었죠. 그런데 전 괜찮았습니다. 작품이 비판받는 거야 당연한 일이니까요. 칭찬받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거죠. 그렇게 한창 얘기를 계속하다가 문득 그 남자 손님이 제 소설 모두를 독파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게다가 이야기의 세세한 부분까지 기억하고 있는 것이었어요. 두 사람의 대화에 불쑥 껴들면서 ‘그렇게 싫으면 확실하게 아예 읽지 않으면 좋지 않을까요?’라고 얘기하고 싶지만, 뭐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었죠. 도대체 뭘까요?


라면서 하루키는 소바를 먹었다란 느낌이 없을 정도로 말이죠.라고 했다. 하루키의 이런 주변의 작은 일들에 관한 에세이를 읽으면 늘 드는 생각이지만 저 두 사람은 어떻든 간에 이렇게 알려졌다는 것이다. 누군가, 이봐 지난번 무라카미 라디오에 사연 나온 남자 너 아니야? 너 매일 몰래 구석에서 하루키 소설을 읽고 있더니 비난만 가득하려고 읽었던 모양이군. 같은 소리를 들을 수도 있고. 어머 그 에피소드에 나온 여자가 저 라구요. 하지만 애인에게 들키면 큰일인데 어떡하지. 같은 일들이 휙휙 지나간다.


에피소드를 읽으면서 하루키가 소개하는 음악을 같이 듣는 것이 무엇보다 좋다. 별다른 이유는 없다. 하루키가 소개하니까 들으면 좋은 것이다.



하루키가 소개하는 음악

https://youtu.be/AIyiQISJy_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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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 현관문을 열고 나오면 우리 아파트에는 복도에 늘 맛있는 냄새가 머물러 있다. 도대체 어떤 집에서 하루는 짜파게티, 하루는 김치찌개, 하루는 고기를 굽는 걸까. 오늘은 달걀프라이 냄새가 엘리베이터를 못 타게 했다. 아는 맛이라 그런지 계란프라이의 냄새는 위장을 쥐어짠다. 평일의 아침은 느긋하지 않다. 하지만 이 냄새는, 프라이팬 위에서 기름에 노릇하게 익어가는 그 냄새는 나를 안달 나게 만든다.


나에게는 나의 친구와 결혼을 한 영국 친구가 있다. 이름은 죠. 죠가 하루는 달걀이 맞는지 계란이 맞는지 물었다. 둘 다 맞다. 왜 이렇게 완전히 다른 단어를 두 개나 사용하나?라고 물어서 내 멋대로 대답을 했다. 계란은 가정집에서 가족들끼리 계란으로 만든 음식을 먹을 때 계란이라 부르고, 달걀은 식당에서 달걀로 만든 음식을 주문할 때 달걀이라고 부른다고 말해버렸다. 그랬더니 의심 적게 봤지만 뭐 어때. 달걀이나 계란이나.


그래서 한 번 찾아보니 둘 다 ‘닭이 낳은 알’이지만 계란은 한자가 있다. 그러나 달걀은 한자가 없고 온전하게 우리말로 되어 있다. 이를 두고 한때 방송에서 계란을 달걀로 순화해서 바꾸려고 한 바가 있지만 현재는 둘 다 똑같이 사용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렇게 바뀐 음식이름이 몇 개 있다. 기묘하고 괴랄한 이름으로 바뀐 자장면이 있고, 도무지 머릿속에 형태가 떠오르지 않는 닭볶음탕. 닭도리탕은 뾰롱하며 음식이 화악 떠오르는데 닭볶음탕은 뭐야. 자신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달걀 사진을 보여주며 뭐냐고 물으면 달걀이라고 하는 사람이 많을까 계란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을까. 이거 한 번 실험해 보면 재미있다.


박찬일의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를 보면 달걀을 몹시 좋아하는데 주치의에게 달걀을 많이 먹으면 안 된다는 말을 듣고 달걀에 대한 아쉬움을 말했다. 달걀은 삶은 계란으로 먹으면 맛있다. 나는 삶은 달걀을 매일 2개씩 먹는다. 그게 한 끼다. 삶은 달걀은 포만감을 준다. 보통 달걀 요리라고 하면 어딘가에 곁들여 먹는 음식이라는 느낌이 강하지만 삶은 달걀은 오롯이 그 자체의 맛으로 즐길 수 있다.  


예전의 영화를 보면 기차에서 삶은 달걀을 입에 가득 넣고 사이다를 먹는 장면이 많았다. 아주 슬픈 삶은 달걀이 나오는 영화가 ‘삼포 가는 길’이다. 그 속에서 젊은 문숙이 연기하는 백화가 먹는 삶은 달걀이다.


황석영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삼포 가는 길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설원과 문숙의 활달한 모습이 잔상을 따라 계속 맴돈다. 웃으며 소리를 지르고 거칠게만 살아와서 거침없이 욕을 하고 미친 것처럼 만개한 꽃과 같은 백화를 보면 마음 깊은 곳에서 슬픔이 올라온다. 백화에게는 어떠한 특질이 있다.


신들린 것처럼 문숙은 연기를 한다. 그 당시를 보면 세련된 대사에 세련된 영상이다. 삼포 가는 길의 이야기를 빛나게 하는 건 문숙이다.


뭐? 화냥년? 그래 난 화냥년이다. 화냥년이야. 더러운 년이라구. 더럽고 썩고 썩은 년이라고. 난 너희들 사내놈들한테 살이 빠지도록 팔고 사는 년이라고. 그게 왜 내 잘못이냐고, 왜!라고 울부짖은 백화의 모습에 보는 이들은 빠져들고 같이 무너진다. 익살스러운 대사도 많다. 백일섭과의 대화는 웃음의 포인트가 많다.


야, 너 몇 살 쳐 자셨냐?

흥, 화류계에서 누가 나이 따져서 언니 동생하는 줄 아나? 마신 술잔하고 사내 숫자로 셈하는 거야, 요 병신아.

농땀, 미얀마얀 재송해용. (치마를 들춰 올리며) 어때 마음에 들어?

헤헤 지랄로(백일섭의 특징을 잘 말해주는 대사다).


같은 대사들이 재미있다. 마지막 달걀을 주는 장면은 참 촌스럽지만 슬픈 장면이다. 백화가 받은 삶은 달걀은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삶은 달걀이다. 백화는 삶은 달걀을 먹으며 꿋꿋하고 거칠게 앞으로도 살아갈 것이다. 욕쟁이 백화와 풋풋한 점순의 모습을 동시에 지닌 채.

삼포 가는 길은 춥고 고되기만 하다. 발가락은 눈밭에 빠지는 바람에 떨어져 나갈 것 같지만 함께 삼포로 가는 일행이 있어 참고 견딜 수 있다. 하지만 그토록 바라던 삼포는 이미 사람이 살 수 있는 안온한 곳이 아니었고 낯설기만 한 곳이 되었다. 또다시 뜨내기의 길만이 앞에 놓일 뿐이다. 마치 하루키의 주인공들을 보는 것만 같았다. 지금 이렇게 하는 모든 일이 이미 정해져 있는 것처럼. 일상에서 밀려나버린 주인공은 나의 모습인 동시에 내 주변의 모습이었다. https://youtu.be/F2k8ZFPRXa4 

〈삼포 가는 길〉 블루레이 출시 기념 주연배우 문숙 특별 인터뷰 "마지막 장면은 검열 때문에 들어간 거예요"


그리고 근래에는 마녀의 김다미가 삶은 달걀을 기차에서 입 안 가득 넣고 우물우물 먹었다. 그렇게 먹다가 목으로 넘기면 버석하고 갑갑한 목을 메이게 하며 조이는 자극을 준다. 이 기분이 미묘하게 삶은 달걀의 맛을 더 살린다. 그때 필요한 건 탄산! 사이다가 필요한 것이다. 쏴아아아아. 캬아.


요네하라 마리의 ‘미식 견문록’을 읽어 보면 서문에서도 [아버지가 삶은 달걀 껍질을 까주신다. 내가 하나를 먹으면 또 하나를 까주신다. 아, 얼마나 행복한지. 그 달걀도 홀랑 입속으로 넣는다] 달랑 두 줄이지만 요네하라의 글 속에는 미소를 짓게 만드는 위트와 추억이 있다.


신기하게도 인간이 언제부터 달걀을 먹었는지 모른다고 한다. 확실한 것은 달걀이 인간계에 들어옴으로 해서 요리의 신기원이 열렸다고 박찬일은 말했다. 과자, 아이스크림에는 반드시 들어간다. 노른자와 흰자로 분리되는 두 가지 다른 성질 덕분에 인간의 화려한 미식의 세계가 바다처럼 펼쳐진 것이다. 크렘 브륄레, 슈크림, 커스터드를 넣은 샌드가 노른자의 마력이라면, 한없이 부풀어 올라 미식의 허영을 충족시켜 주는 수플레, 중독성 강한 마카롱 같은 과자는 흰자의 무한 변신으로 가능해졌다고 한다.


달걀 프라이의 진수는 예전의 중국집에서 웍으로 튀겨낸 프라이다. 달걀이 기름에 들어가자마자 놀라서 튀겨진 듯, 흰자의 겉은 바삭하게 그러나 질기지 않고, 노른자는 밑면으로부터 윗면까지 익힌 정도가 그러데이션으로 퍼진, 그래서 웰던에서 레어까지 노른자의 층위가 만들어진 프라이가 정녕 달걀 프라이인 것이다. 오로지 볶음밥에 같이 놓을 수 있는 진정한 중국집의 숨은 맛이었다.


언젠가부터 중국집 볶음밥이 대부분 프랜차이즈화 되어서 머리 밥은 볶아 놓고 있다가 주문이 들어오면 그때 데워서 스크램블과 짜장으로 볶음밥의 이상한 맛을 가려 버렸다. 짜장 따위는 감히 중국집 볶음밥에 낄 수 없는 존재였다. 오직 달걀 프라이와 후추가 들어간 달걀국이었다. 그런 동네 중국집을 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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