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조깅을 하면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재미가 있다. 오월까지는 달이 반달의 모습이었다가 유월에 접어들어 크고 둥근달이 되었다. 가까워졌다는 말이다. 백석의 시 ‘통영’에도 유월의 풍경이 잘 담겨있다.


[저문 유월의 바닷가에선 조개도 울을 저녁 소라방등이 붉으레한 마당에 김냄새 나는 비가 나렸다]


유월이 되면 태양과 달의 이런저런 합의에 의해 평소보다 가까워진다. 그래서 평소에 38만? 킬로미터 정도의 거리가 -이 거리를 좀 빠르게 쉬지 않고 걸어가면 8, 9년 정도 걸으면 달이 닿을 수 있다. 시속 100킬로로 붕 자동차를 몰고 가면 한 150일 정도 걸린다고 한다- 유월에는 조금 가까워진다.


그렇게 되면 달이 평소보다 훨씬 커 보이고 조수간만의 차가 달라진다. 그래서 바닷물이 한꺼번에 확 빠지고 나면 바위에 붙어 있던 수천수만의 조개가 아가리를 벌릴 때 쩍 하며 나는 소리를 백석은 조개가 울을 유월의 저녁으로 표현했다. 백석은 정말 과학과 미각과 인간의 온갖  감각을 전부 시에 잘 버무렸다.


백석 하니까 생각나는 일이 있는데, 나 예전에 어떤 곳에서 포토샵 강의 제의가 들어와서 한 번 한 적이 있었다. 사실 포토샵이라는 게 앞에서 아무리 주절주절 떠들어봐야 다 쓸모없다. 해보는 게 제일 좋다. 그래서 잠깐 설명을 하고 나머지는 해보게 했다. 그리고 그 시간에 백석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왜, 갑자기, 느닷없이 백석이야기를 하게 되었는지 나도 알 수가 없다. 인간의 일이라는 게 갑자기 방향을 틀어서 가버리는 경우가 있다.


아무튼 귀로는 백석의 이야기를 듣고 눈과 손은 포토샵을 하면 되는 것이니 별 문제가 없다. 백석 이야기는 안도현 시인이 쓴 ‘백석평과’과 자야의 ‘내 사랑 백석’에서 이것저것 생각나는 대로 웅얼웅얼거렸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야기를 너무 재미있어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신이 나서 이야기를 했다. 사람들은 포토샵을 손 놓은 채 백석의 이야기에 빠져들었고 나는 그 뒤로 잘리고 말았다.


비록 그때 잘렸지만 사람들의 말똥말똥한 눈을 나는 보았다. 뭐랄까 사람들은 백석이나 윤동주나 김광섭, 천상병 같은 시인들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 열망 같은 것들이 있었다. 누군가 도화선에 불을 지핀다면 사람들은 활활 타오를 것이다. 어머니들의 가계부 구석에는 자신만의 글과 시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여하튼 달과 지구가 가까운 유월이다. 본격적인 무더위가 덮치기 전, 봄의 허무를 벗고 여름을 기다리는 피부 같은 야들야들 온순한 면모가 가득한 유월인 것이다. 유월에는 달과 구름을 담는 재미가 있는데 조깅하다 멈춰 서서 마냥 그렇게 입을 헤 벌리고 서 있다가는 하루살이가 공격적으로 입 속으로 들어온다. 나도 억지로 많이도 먹었는데 정말 아무 맛도 안 난다. 벌레 맛이라고 하기에도 이상하고 그냥 방구 맛이다.


오늘은 도로에서 신호대기를 하고 있었는데 신호가 바뀌고는 뒤의 차가 붕 와서 나를 박아 버렸다. 쿵 하는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크게 들리고 나의 몸은 앞뒤로 움직였으며 수동기어라 시동이 꺼졌다. 조수석의 가방이 앞으로 밀려 떨어졌고 휴대폰도 떨어졌다. 순간 나는 몸을 살폈고 자동차 시동을 다시 켜봤다. 거의 20년 가까이 조심조심 몰고 다녔는데, 차 안에서 카세트테이프를 듣는 그런 재미가 있는데, 이 모든 게 안 되면 어떡하지. 같은 생각이 순간적으로 휘몰아쳤다.


시동은 잘 들어오고 노래도 다시 잘 나오고 핸들도 잘 돌아가고 나는 내려서 뒤차로 갔는데 뒤차의 여성이 놀라서 꼼짝도 못 하고 있었다. 나를 보더니 그제야 나와서 뒤처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나도 그렇고 여성도 그렇고 놀라서 발 빠른 상황대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여성은 보험을 불러 해결해 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는 도로 한가운데니까 차를 옆으로 뺐다.


차 범퍼를 보니 뭔가 거의 표시도 안 날 정도로 자국이 있었다. 몸은 멀쩡하고 자동차도 그것 외에는 겉으로는 눈에 띄는 사고표시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렇지 않아서 그냥 보험을 부르지 않아도 되니 그냥 가자고 했다. 여성은 범퍼에 자국이 있는데 보험을 불러 갈아야 하지 않느냐고 했다. 나는 아니라고 했다. 차도 오래됐고 눈을 크게 뜨고 자세하게 봐야 보이는 자국인데 괜찮다고 했다. 그래도 여성은 뭔가 조금 의심스러웠던 모양이었다. 이 남자가 혹시 나중에? 그런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워낙에 그런 일들이 많이 일어나니까.


자동차 범퍼가 원래 방어하라고 있는 거니까 점 찍힌 것처럼 표시가 난 건 안 바꿔도 된다. 그래서 그대로 그 도로를 나오게 되었다. 여성은 그래도 모르니 자신의 전화번호를 찍어 주면서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을 꼭 해달라고 했다. 개인적으로는 자동차를 다시 카센터에 넣고 범퍼를 갈고 그 시간에 렌트차를 몰고. 뭐 그런 일련의 일들이 너무 귀찮은 것이다.


인간은 정말 제멋대로 인 존재라 이렇게 매일 글을 쓰는 건 귀찮지 않은데 생활에서 귀찮은 건 정말 귀찮다. 요컨대 샤워를 하는 건 귀찮지 않다. 그런데 씻는 건 너무 귀찮다. 요 앞에 걸어서 갔다 오는 건 정말 미칠 정도로 귀찮다. 일어나서 거기까지 걸어갔다가 걸어오는데 덥고, 습관적으로 마스크를 하고, 아무튼 너무 귀찮다. 그런데 1시간 넘는 거리를 달리는 건 또 귀찮지 않다.


인스타그램의 디엠은 그렇게 귀찮지 않지만 카톡은 귀찮은 경우가 많다. 읽씹, 안읽씹 때문에 따지는 사람들이 카톡에는 있다. 같이 있으면 말하고 싶은 사람이 있고, 말하기 귀찮은 사람이 있다.


여러 번 올린 글이지만 코로나가 덮치고 난 후 강변의 풍경이 세세하게 바뀐 부분이 있다. 코로나 전에는 그렇게 없던 메뚜기들이 엄청 많아졌다. 그래서 재작년에는 메뚜기를 잡아서 다리를 뜯어가며 노는 초딩들이 있었다. https://brunch.co.kr/@drillmasteer/1978


그리고 비가 와도 우산을 쓰며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 아마도 코로나 덕분에 집에만 있어서 살이 쪄서 그럴 것이다. 무엇보다 지렁이가 많아졌는데 조깅코스에 굵고 긴 지렁이가 일이십 마리가 아니라 오십 마리씩 달리는 코스에 나와서 꼬물꼬물 거어 다닌다. https://brunch.co.kr/@drillmasteer/1937


또 11월 겨울에도 아직 겨울잠을 자러 들어가지 않은 뱀들이 똬리를 틀고 강변에 나타나는 일들이 많아졌다. 뱀 하면 천경자 화백의 뱀 그림 ‘생태’가 가장 먼저 생각난다. 서른다섯 마리의 뱀이 서로 몸을 섞고 있다. 환상적이고 애틋하다. 천경자는 뱀을 그리는 여자다. 뱀은 원초적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천경자는 그럼 뱀을 닮았다. 독하면서 아름다운, 미끌거리면서 축축하고 팔과 다리가 없음에도 어디든 갈 수 있는 존재.


바닷가에 살고 있어서 인지 바다의 수평선을 보면 뱀을 닮았다고 생각이 든다. 멀리서 보는 바다는 뱀과 같다. 팔다리가 없어도 불평 한 번 안 하잖아. 늘 어딘가 숨어 지내고 있지만 역사적으로나 현재에도 증오와 미움을 잔뜩 받고 있는 존재. 바다와 뱀의 공통점이지.


그리스 신화에서도 바다는 늘 인간을 괴롭히는 광대하고 육중한 증오의 대상으로 나왔지. 우리가 자주 가는 카페의 컵에 새겨진 사이렌만 봐도 알 수 있지. 사이렌은 예쁜 얼굴을 하고 있지만 뱀 꼬리를 가지고 있잖아. 그 예쁜 얼굴로 선원들을 현혹시켜 바다에 빠져 죽게 만들잖아.


차가운 겨울의 햇살을 튕겨내는 바다의 실루엣은 마치 뱀의 체강을 뒤덮고 있는 비늘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 같다. 매혹적이며 은근하다. 몸을 이루고 있는 색감은 인간의 인공적인 붓질로는 표현해 내지 못할지도 모른다. 보고 있으면 그 컬러의 매혹에 빠져들 것이다. 우울할 때 키리코의 그림을 보자. 그러면 깊은 우울을 느끼고 나면 괜찮아지듯 팔다리 없이도 고개를 들고 어디든 스르륵 가는 뱀에게 눈을 떼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뱀에게 다가가기를 꺼려한다. 오히려 뱀은 우리에게 해를 끼치지 않음에도 뱀을 보면 돌을 던지려고 한다.


천경자는 그런 뱀을 그렸다. 그런 뱀을 닮은 여자다. 생태를 보자. 생생하고 감동적이니까. 뱀이니까. 수평선 너머 이어지는 바다는 뱀의 몸통과도 비슷하다. 쥘 르나르가 뱀에 대해서 그랬다지 “너무나 길구나.” 뱀은 자신의 독 때문에 인간처럼 말이 많지 않다. 바다를 조금 멀리서 보면 뱀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고독하며 품고 다니는 독이자 치유제인 그 액체를 마음만 먹으면 내 몸에 수혈할 수 있도록 말이다. 생태에 대한 이야기는 말이야, 천경자 화가가 생태를 그렸을 때 “뱀을 그리는 여자가 나타났다”였다.


남은 유월은 덜 귀찮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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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한국에서는 여성팬들을 비틀스만큼 몰고 다녔던 록밴드는 부활이 처음이 아닐까 싶다. 항상 비교되던 시나위와 블랙홀 그리고 다른 밴드는 우리는 록!이라는 걸 누가 봐도 아는 의상을 입고 있었지만 부활의 이승철은 머리도 짧고 미소년 같은 모습에 무엇보다 우수에 젖은 눈망울로 희야~를 불렀다.


그야말로 여성팬들을 집 안에서 밖으로 뛰쳐나오게 만든 록 밴드가 부활이었다. 이승철의 부드러운 목소리와 김태원의 터질 것 같은 그로울링의 화음이 부활의 어떤 색깔이 되었다. 전국의 아마추어 록밴드들이 프로 록밴드의 노래를 따라 불렀는데 부활의 이 대조적인 목소리를 따라 부르는 게 힘겨웠던 것이다.


김태원의 이야기는 너무나 많이 알려졌다. 아이의 가정사부터, 나락으로 떨어졌을 때 투게더 같은 아이스크림을 전자레인지에 돌려서 밥 대신 매일 먹었던 일까지. 그래서 몸이 엄청나게 불어버린 일화가 여러 방송에서 소개가 되었다.


김태원이 예전에 예능에 한창 출연을 할 때 그때는 트위터가 지금의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처럼 사람들의 일상소통 창구였다. 그때 누군가 나의 부활 이야기에 댓글로 김태원이 예능으로 나오지 않고 계속 음악만 했으면 좋겠다는 글을 달았다. 예능에만 나오니까 어린아이들이 김태원을 예능인으로만 알고 있다면서 주절주절했다.


하지만 그게 뭐? 어때서? 예능인으로 알려지면 좀 어때? 도대체 그게 왜 문제인가. 예능인으로 알려져서 그 사람이 원래는 기타리스트였어?라고 알게 되면 또 그것 나름대로 괜찮은 거지. 뭐 그런 댓글싸움을 많이도 했었다.


그때는 나도 지금처럼 유순하지만은 않아서 대단히(까지는 아니지만) 공격적이었다. 사람들에게 막 그랬지. 왜? 그럼 변호사가 범죄소설을 쓰는 것도 못하게 하지 그래? 변호사는 변호사 일만 하고, 개그맨들은 라디오 디제이 못하게 하고, 안재욱은 노래 못 부르게 해야지. 라며 나도 대들었다.


그때 사람들과 가장 많이 싸웠던 내용이 ‘먹거리 엑스 파일’이었다. 당시에 먹거리 엑스 파일이 대단한 인기였다. 마치 성역과도 같아서 거기에 문제를 제기하면 큰일이 나는 것이다. 건드리면 안 되는 분위기가 가득했다. 하지만 먹거리 엑스 파일은 이상한 프로그램이었다.


즉, 조미료를 사용하지 않은 식당은 착한 식당이라 칭하고 조미료를 조금이라도 사용하는 식당은 마치 착하지 않은 식당, 장사를 해서는 안 되는 식당으로 매도해 버렸다. 조미료는 몸에 엄청 나쁜 것으로 말했다. 게다가 몰래카메라로 섭외한 음식 전문가들이랍시고 불러다가 그런 편집으로 방송을 했다.


조미료는 간단하게 말해 음식에 들어가면 맛을 중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매워야 할 떡볶이에 조미료가 들어가면 맵기만 하지 않고 맵고 달고 짠맛이 서로 잘 섞이게 만드는 게 조미료가 하는 역할이다. 그래서 조미료가 몸에 나쁘다는 연구결과가 어디에도 나와있지 않다. 지금은 감미료의 종류가 다양하지만 조미료의 주원료가 되는 게 예전에는 다시마였다. 우리가 요리를 할 때 다시마를 우려내서 국물을 만들기도 한다.


어떻든 조미료가 문제라고 먹거리 엑스파일은 말했는데, 그렇게 조미료가 정말 나쁜 것이라면 조미료를 만드는 공장을 공격해야지 왜 일반 식당으로 가서 조미료를 썼네 마네 해서 그곳을 공격하는지. 방송국 지들이 뭔데 착한 식당, 그렇지 않은 식당으로 분류를 하는지에 대해서 글을 올렸다가 정말 많은 공격을 받았다. 그때는 그래서 내가 졌다. 사람들의 맹신이 그렇게나 무섭다. 일단 알아보기보다 내가 믿는 것이 올바름이라고 생각을 하니까 공격이 무서워지는 것이다.


식당이라는 게 사실 매일 같은 맛을 낸다는 것이 어쩌면 이상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날의 습도, 온도, 물기, 시간, 특히 조리사의 컨디션에 따라 음식의 맛은 달라지기 마련인데 맛이 조금 달라지면 이거 큰일이 났다고 생각을 한다. 음식의 맛이라는 게 음식이 가지고 있는 식재료의 맛만 가지고 우리가 맛을 느끼는 건 아니다. 식당의 노란 조명, 옆 테이블의 떠들썩한 분위기와 함께 갓 나온 음식이 풍기는 냄새와 같이 먹으니 맛이 나는 것이다. 식당에서 맛있게 먹은 음식도 포장을 해서 집에서 혼자 먹으면 식당에서만큼 맛이 나지 않는다.


아무튼 그때는 그럴 때라 김태원은 가수만 해야지, 부활만 해야지 왜 예능을 하느냐며 따지는 사람들도 있었다.


김태원은 천재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사실 정말인 거 같다. 김미경 강사, 유명한 김미경 강사가 대학생 때인가 음악에 재능을 보여 작곡도 하고 노래로 밀고 나가려고 했단다. 그래서 혼을 다해 작곡한 곡을 어느 날 우연찮게 김태원이 그 곡을 보더니 그 자리에서 5분 만에 싹 뜯어서 바꿔 주며 이렇게 해야 한다고 하며 가버렸다. 그때 김미경이 그런 천재적인 사람들이 있는 곳이 가요계구나 하며 자신은 포기했다고 했다.


김태원은 괴짜 같은 구석이 많아서 그런지 타인의 노래나 음악을 잘 듣지 않는다. 그래서 김태원의 곡은 창조적이다. 표절시비에 모든 가요가 걸려 있는 요즘 부활의 곡은 거기에서 멀어져 있다. 지금 세상에서 음악이 완전한 창조가 있을 수는 없다. 이미 6, 70년대에 좋은 리듬과 곡은 다 나와 버렸다. 인간이 정말 대단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좋은 곡에서 리듬을 좀 따온 들 사람들은 너그럽게 생각을 할 것이다.


중학교 때 학교까지 걸어갔다가 걸어왔다. 한 40분 정도 걸어야 했다. 등하굣길에 친구가 되어 준 건 미니카세트 플레이어에서 나오는 노래였다. 성적은 바닥을 기었고 친구도 없고 그저 먼지처럼 지내는 중학교 시절은 그야말로 우울의 극치였다. 어딘가 뛰쳐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고 싶지만 그럴 용기도 없는 바보 같은 중학생 시절이었다.


자율학습을 해야 하는데 한 시간만 하다가 도망을 쳐서 간 곳은 음악 감상실이었다. 거기서 디제이가 부활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자신이 고등학생 시절의 80년대 이야기. 사춘기가 심각하게 와버린 디제이는 모든 것이 무의미했을 때 학교에서 학교로, 여학생에서 여학생으로 그리고 남학생으로 열병처럼 번진 부활의 이야기를 들었다. 모든 것이 힘든 학생들에게 위로가 되어준 부활의 노래들.


너 이 노래 들어봤어? 무슨 노래? 부활 몰라? 부활? 그래 부활, 록 밴드인데? 에이 록 밴드는 싫어. 아니야 부활은 달라. 롤링 스톤즈의 믹재거가 레이디 제인을 불렀다면, 부활의 이승철이 희야를 불렀어.라는 이야기를 디제이가 숨을 참아가며 해 주었다.


그런데 그 희야라는 노래 말이야, 17살 소녀의 아름답고 슬픈 사랑의 노래야, 부활의 리더 김태원의 친구 양홍섭이 여자 친구가 백혈병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는데, 그 아픔을 담은 노래가 바로 희야,였어.


디제이가 부활의 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는데 그 자리에 눈물이 뚝 떨어졌다. 나는 부활의 1집 앨범을 사서 희야를 듣고 또 듣고 내내 들었다. 그 가슴아픔 사연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며. 그렇게 먼지 같았던 중학생 시절을 견딜 수 있었다.  


앨범의 뒷면에는 희야에 대한 곡 설명이 있다.

[희야는 17세 소녀의 아름답고 슬픈 사랑의 진혼곡. 특히 마이클 생커도 실패한 기타에 의한 진혼의 종소리를 세계 최초로 개발한 곡이다]


나는 이 진혼이라는 말이 너무 좋아서 언젠가는 나도 글에 써먹어야지. 나의 진혼곡을 만들어야지 하며 생각했다. 1집의 타이틀 곡이 원래는 ‘비와 당신의 이야기’였지만 ‘희야’로 바뀐 것도 그 사연이 깃든 곡이었기 때문이었다.


부활의 희야 https://youtu.be/Fy3OUzgwORE


부활 초기작품을 들어보면 미소년 이승철의 미성의 목소리에 김태원의 기타 연주와 긁어대는 그 강렬한 목소리의 화음을 들을 수 있어서 좋다.


개인적으로는 희야보다 더 좋아하고 미쳐버렸던 노래가 ‘회상 3’이었다. 이 노래를 이승철의 미성으로 부른 버전이 마지막 콘서트다. 하지만 김태원의 온전한 굵은 목소리로 부르는 회상 3은 엄청난 해외 해비메틀 속에서도 단연 나의 가슴에 박힌 곡이었다.


그건 김태원이 목이 아니라 가슴으로 회상 3을 불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힘겹게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는 자신을 저 무대 뒤에서 숨 조리며 바라보는 한 소녀에 대한 이야기 역시 김태원의 부인이라는 걸 안다. 노래 마지막에 나나나 하며 부르는 소녀의 목소리는 김태원 부인의 목소리라고 한다.


소녀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건 오직 이 노래를 부르는 것뿐인 그 오래전 소년이 시간이 흘러 2023년의 늙은 소년이 되어 추억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드럼의 거대한 소리가 공백을 흔들어 깨울 때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흘러 모든 풍경을 흐리게 만들었다. 그 풍경 속에는 나를 바라보는 어린 소녀가 애써 눈물을 참고 있다. 불안하고 앞이 보이지 않았던 그때 가슴을 이렇게나 뒤 흔들었던 김태원의 노래가 나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회상 3 https://youtu.be/-fRov8cqwh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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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치기를 끓이는데 방울토마토를 넣고 오렌지를 넣었는데 옆에서 난리다. 오렌지를 왜 넣냐고. 그러나 막상 완성이 되고 난 후 먹어보면 확 달라진다. 오렌지는 달다, 거기에 짠맛을 흡수해 버리면 단짠의 매력을 잔뜩 가진다. 너무 맛있다. 게다가 과일이건, 채소건 차갑게 먹는 것보다 뜨겁게 조리해서 먹는 게 훨씬 맛있단 말이지. 탕수육 소스를 생각하면 간단하다. 탕수육 소스는 과일로 만드는 경우가 많다. 과일이 많이 들어간다. 그렇게 뜨겁게 만든 소스가 탕수육과 만나서 맛이 두 배, 세 배가 된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과일이 음식을 조리하는데 들어가서는 안 되는 것처럼 생각을 한다. 이를 문화적으로 좀 더 넓혀보면 한때 가수 솔비가 제대로 배우지 않고 그린 그림으로 이름이 알려지고 비싼 가격에 그림이 팔려 나간다고 해서 그쪽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고 사람들이 솔비를 공격하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배우들, 가수들 중에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 많다. 하정우가 대표적으로 그림을 그리고, 하지원도. 그림 때문에 고생고생을 한 조영남도 있고, 이번에는 강원래도 자신이 그린 그림으로 작품전을 했다.


그 짝 계통의 사람들, 미술가들, 그림을 그리는 아티스트들은 입지가 좁아진다며 제대로 배우지 않고(그림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면서-그림이 유통되고 브로커를 어떤 방식으로 통해서 이러쿵저러쿵) 그린 그림들을 전시하고 팔아먹는다고 비난에 가까운 비판을 쏟아냈다. 대표적으로 홍대 이작가, 이규원 화가가 유튜브에 나와서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리고 대중은 누군가를 비난하는 걸 재미있어하고 좋아하기 때문에 우르르 이작가의 말을 응원하기도 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의사가 소설을 써서 소설가로 데뷔를 하거나, 화가가 소설집을 발표하거나, 엔지니어가 장편소설을 썼다고 해서 한국에서 활동하는 프로 소설가들이 그들을 비난하거나 또는 비판하거나 하는 일은 없다. 오히려 새로운 분야에서 전문적으로 일을 하던 사람들이 소설을 발표했기에 읽어 보니 괜찮더라, 같은 말을 하기도 한다. 인기 있는 소설가들, 우리가 좋아하는 김영하 소설가나 태백산맥의 조정래, 왼쪽의 황석영 소설가나 오른쪽의 이문열 소설가 역시 이념이나 사상에 무관하게 소설가가 아닌 사람이 소설을 썼다고 해서 그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소설가들이 새로운 장르의 소설이 10만 부가 팔려 나갔다고 해서 나의 소설 10만 부가 팔리지 않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입지 같은 건 신경 쓰지 않는다.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읽어보면 소설가가 즉 하루키가 한 번은 사린 가스 사건으로 도쿄 지하철 사건을 취재해서 쓴 '언더그라운드'를 두고 일본의 논픽션 전문 작가들에게서 혹독한 비판을 들었다고 했다. 그런데 소설가들은 다른 전문인들이 소설을 썼다고 해서 비판하기보다 오히려 호기심이 발동해서 기회가 닿으면 마주 앉아 소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때로는 격려도 해주고 싶다고 했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소설은 쓰려고 마음만 먹으면 거의 누구라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피아니스트나 발레리나로 데뷔하려면 어릴 때부터 길고 험난한 훈련이 필요하다. 그런데 소설이라면 문장을 쓸 줄 알고 불펜과 노트가 손 맡에 있다면, 자신만의 이야기를 쓸 수 있다면 전문적인 훈련 따위는 받지 않아도 일단 쓰여버린다.


그래서 ‘소설을 누구라도 쓸 수 있다는 건’ 하루키가 보기에, 소설에게는 비방이 아니라 오히려 칭찬이라는 것이다. 소설이라는 장르는 누구라도 마음만 먹으면 쉽게 진입할 수 있는 프로레슬링 같은 것이다. 링도 상당히 널찍하고, 참여를 저지하고자 대기하는 경비원도 없고 심판도 그리 빡빡하게 굴지 않는다. 현역 선수들도 누구라도 다 올라오십시오,라는 기풍이 있다. 개방적이다. 손쉽다고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상당히 대충대충일 수 있다고 하루키는 말했다. 하지만 링에 오르기는 쉬워도 거기서 오래 버티는 건 쉽지 않다. 소설가는 물론 그 점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소설 한두 편 써내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소설을 오래 지속적으로 써내는 것, 소설로 먹고사는 것, 소설가로서 살아남는 것, 이건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보통 사람은 일단 못 할 짓, 이라고 말해버려도 무방할지도 모른다. 거기에는 어떤 특별한 것이 점점 필요해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나름의 재능은 물론 필요하고 그만그만한 기개도 필요하다. 또한 인생의 다른 다양한 일들과 마찬가지로 운이나 인연도 중요한 요소다. 하지만 거기에 더해서 어떤 종류의 자격 같은 것이 요구된다. 어찌 되었던 소설가로 계속 살아남는다는 것이 얼마나 냉엄한 일인지, 소설가는 뼈저리게 잘 알고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소설가는 다른 전문 영역의 사람이 로프를 넘어 소설가로 등단하는 것에 대해 기본적으로 포용적이고 대범한 게 아닐까라고 하루키는 말했다. 자, 올 테면 얼마든지 오시죠,라는 태도를 많은 작가들은 취하고 있다. 혹은 누군가 새로 들어와도 그리 신경 쓰지 않는다. 만일 새로 들어온 사람이 얼마 안 돼 링에서 밀려난다면, 혹은 스스로 내려간다면 아, 가엾게도,라든가, 그럼 안녕히,라고 할 것이고, 만일 그 사람이 노력해서 끝까지 링에 남는다면 그건 물론 경의를 표할 만한 일인 것이다.


소설을 떠나 모든 예술이 진입 장벽은 그리 높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하다가 안 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홍대 이작가는 유명한 연예인들이 그림을 어설프게 그려서 미술가들의 밥그릇을 빼앗아가는 것을 탐탁지 않게 말을 했다. 그러나 대중을 그렇게 너무 띄엄띄엄 봐서는 안 된다. 만약 미술가들이 그런 점이 별로라면 미술가들이 연예 활동을 하면 된다. 대중은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이 그린 그림을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좋아하는 연예인의 모든 모멘텀을 구매하는 것이다. 연예인이 유명해지기 위해 연예인 밑바닥 생활을 하면서 얼마나 개고생을 했나. 그걸 딛고 일어나서 연예인으로 유명해진 다음 그리고 싶은 그림을 언젠가부터 그렸다. 대중은 그 모든 것을 구매하는 것이다.


요즘 가장 말 많고 탈 많은 남태현이 그린 낙서도 팬들은 천만 원에 구입을 한다. 일반인이 봤을 땐 너무나 터무니없는 일이지. 예술계라면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미술계도 그냥 받아들이면 된다. 왜? 이 같은 일들이 그리 오래가지는 못할 테니까.


때로는 상상력으로만 쓰인 소설이나 영화가 비평가들에게 쓴소리를 듣는 경우가 허다하다. 왜냐하면 평소에 뚱딴지같은 생각을 가지고 뚱딴지같은 행동을 하고 말을 하는 예술가가 그걸 글이나 영상으로 표현을 했는데, 너무나 많이 배우고 똑똑하고 현명한 비평가들이- 그들의 생각과 그들만의 시간의 흐름과 그들의 정확한 틀 속에서 상상력만으로 표현하는 결과물을 평가하려니 쓴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모든 건 대중이 알아서 한다. 대중이 우매하기도 하지만 문화의 주도를 이끄는 것 역시 대중이다. 예술가들끼리 좋아서 희희낙락해 봐야 큰 발전이 없을 수 있다. 대중이 좋아해 주고 응원해주지 않으면 전부 허빵이다. 오렌지가 두루치기에 들어왔다고 이상하게 볼 필요가 전혀 없다. 일단 먹어보면 맛있다. 예술이라는 게 뭐 그런 거 아닌가. 내가 좋아하는 화가들, 마를렌 뒤마나 설치 미술가 트레이시 에민 그리고 우국원 화가는 입지 같은 거 따지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너무 유명한 사람들이잖아요,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그들이 가만히 앉아서 그저 붓놀림으로만 유명해지지는 않았다는 걸 그 짝 사람들이 모르지는 않을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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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 점심시간에 밥을 먹고 난 뒤에 교복 바지를 좀 걷어 올린 다음 창가에 건방지게 앉아서 김현식을 듣고 있으면 겁나 멋있었다. 개뿔도 모르면서 김현식의 음악에 대해서 주절주절 거렸다.


이쪽에서는 메탈리카와 메가데쓰를 이야기하고, 저쪽에서는 유리스믹스 파들이 있고, 또 다른 쪽에서는 루나 씨, 엑스 제팬의 히데 파들이 있었다. 아무튼 그 녀석들은 유행하는 가요는 취급을 하지 않았지만 부활, 시나위, 블랙홀에 관해서는 살벌할 만큼 좋아했고, 유치하게 대립을 했다. 생각해 보면 중고딩시절에 나는 음악이 없었으면 어떻게 지냈을까, 하고 생각하면 끔찍하다.


공부도 못하고 잘하는 것도 없고. 아 그러고 보니 미술대회에는 초중시절에 몇 번 나갔다. 그 덕분인지 대학교 때 건축과 아이들의 투시도를 그려주고 밥도 실컷 얻어먹었다. 아무튼 학창 시절에 어른들이 보기에 진절머리가 나도록 음악을 들었다. 뭐 그것밖에 할 게 없었다. 물론 아주 시끄럽고 정신 사납고 멘탈이 와그작 무너질 것 같은 음악들.


그 속에서도 김현식은 독보적이었다. 김현식을 듣고 있으면 여기저기 음악적 분파들도 아무런 소리를 하지 않았다. 김현식 하면 따라다니는 말이 많았다. 전설, 싱어 송 라이트, 진정한 아티스트이자 폭군, 술꾼이라는 것.


술을 조금이라도 마시면 죽는다고 의사가 말했을 정도로 간이 극도로 악화되었다. 술을 더 이상 마시면 안 되지만, 이 앨범, 6집을 녹음하던 중에 술을 마시지 않으면 노래를 완성할 수 없다며 노래를 부를 수 있게 술을 마시게 해 달라고 한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었다.


하지만 결국 6집을 완성하지 못한 채 1990년 11월에 간경화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후배들이 노래를 못 부르면 의자도 집어던질 정도로 노래에 집착했다고 하는데 김현식이 술에 입을 댄 것이 밴드 활동으로 풍부한 음악을 하고 싶었지만 해체하고 난 후 힘든 시기를 거쳤을 때지 싶다.


김현식은 그때 다시 대마초 사건으로 구속이 되는데 그 해가 87년 11월이었다. 김현식은 독기를 품고 4집을 발표하는데 4집의 수록곡들이 무척 좋다. 특히 개인적으로는 ‘언제나 그대 내 곁에’는 정말 좋아 죽을 것 같은 노래다. 그러나 4집의 멋들어진 노래들은 조금 우울하고 어둡고 깊은 그리움과 외로움을 느끼게 하는 노래들이었다. 88년 당시 한국은 올림픽으로 인해 굉장히 붕 떠 있던 시기였다. 김현식의 노래가 대중의 사랑을 얻기에는 무리가 있었던 거지.


김현식은 신촌블루스의 객원보컬로 노래도 부르고, 89년에 나온 ‘비 오는 날의 수채화’의 주제곡을 녹음할 때부터 슬슬 건강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곽재용 감독의 ‘비 오는 날의 수채화’는 그럴 것 같지 않지만 보면 참 재미있다. 곽재용 감독을 가장 잘 나타내는 영화가 ‘클래식’이다. 그리고 ‘엽기적인 그녀’다. 곽재용은 사랑을 늘 다루고 있다. 그리고 그 속에는 곽재용 식 판타지가 있다.


특히 영화 ‘중독’에서는 깜짝 놀랄 정도의 반전이 있었다. 엽기적인 그녀가 탄생되는 배경을 그린 영화, 그 이전의 이야기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도 재미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미래에서 현재로 와 버린 어마무시한 사이보그 그녀, 아야세 하루카를 데리고 만든 ‘싸이보그 그녀’가 정말 곽재용 식 사랑을 잘 표현했다. 이 모든 곽재용 세계관의 시작이 아마도 ‘비 오는 날의 수채화’가 아닌가 싶다.


그 주제가를 요즘 다시 전성기를 맞고 있는 권인하 그리고 강인원, 김현식이 함께 불렀다. 김현식의 가장 매력이라고 하면 바로 우리가 좋아하는 그 허스키한 목소리다. 그로울링으로 거칠게 내뱉는 김현식의 독보적인 목소리가 노래에 젖어들게 만든다. 김현식은 소울, 록에도 어울리지만 블루스에 정말 끝장이었다.


6집에서 한 곡을 고르는 건 너무나 어려운 일이지만 ‘추억 만들기’를 듣자. https://youtu.be/LMNJiA6Xlz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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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고 소주가 한 잔 당기는 날이라 돼지찌개를 한 번 끓였다. 방법은 너무나 간단하게도 물 넣고, 호박 넣고, 두부 넣고, 파 넣고, 양념 넣고 돼지고기 넣고 끓이면 된다. 너무나 간단하다. 뭐 국 간장? 고춧가루? 같은 건 넣지 않는다. 간을 보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경험상 대충 이렇게 끓이면 어느 정도 맛있기 때문에 그냥저냥 맛있다. 돼지고기는 비계가 붙은, 비교적 가격이 저렴한 돼지고기 부위를 잔뜩 집어넣으면 된다. 딱 저렇게 비계가 붙은 고기에서 나오는 기름 때문에 돼지찌개가 끓으면 맛이 좋다. 숟가락으로 밑바닥을 훑으면 두부가 잔뜩 들어있어서 입천장이 홀라당 다 벗겨지며 후후 하며 먹으면 된다.


이런 마이너 급의 비교적 저렴한 돼지찌개 집이 있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그 집의 단골(까지는 아니지만)이었다. 그 돼지찌개 집은 좀 기묘해서 손님의 98%가 남자손님이었다. 2%는 뭐냐? 2%는 남자친구를 따라온 여자 손님이었지만 일단 한 번 와서 먹고는 대부분 다시는 오지 않았다. 허름한 식당으로 새시로 된 여닫이문을 드르륵 열면 오래된 형광등이 아슬아슬 달려 있는 집이었다. 아슬아슬한 형광등만큼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나이가 많은 할머니가 돼지찌개 집주인이었다.


돼지찌개에 들어가는 고기는 썩 좋은 고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돼지찌개 집에서 돼지찌개를 먹는 그 누구도 상관하지 않았다. 돼지찌개 안에 고기가 상당했다. 숟가락으로 휘저으면 거짓말 좀 보태서 국물보다 고기가 더 많았다. 땀을 흘려가며 건져 먹는 맛이 좋았다. 비계에서 흐른 기름이 찌개에 떠 있어서 더 맛있었다.


풍채가 좋고 늘 같은 앞치마를 두르고 있고 머리가 새하얀 할머니가 식당을 했는데 4인용 식탁이 4개가 전부였다. 여자들은 좋아할 만한 분위기의 식당은 아니었다. 하지만 98%가 남자손님인 데에는 그 이유가 명확했다. 춥고 배고픈 겨울에는 정말 좋은 식당이었다. 매콤한 돼지찌개를 퍼서 밥 위에 올려 후룩 먹는 맛이 좋았다. 몸도 데워지고 배도 불렀다. 그러나 여름에는 못 갈 곳이었다. 결정적으로 에어컨이 없었다. 선풍기가 있었지만 여름의 그 찜통 같은 더위를 식혀주지 못했다. 그런 식당이라 손님이 없을 것만 같은데 땀을 뻘뻘 흘리며 돼지찌개를 먹는 남자 손님들은 늘 있었다. 테이블이 4개가 전부라 손님이 많지는 않았지만 절대 끊어지지 않았다.


만약 여름에 남자친구를 따라왔다가는 화장이 전부 홀라당 지워질 정도로 땀이 나고 입은 옷이 땀 때문에 엉망이 되기 때문에 여자 손님들은 오지 않는 집이었다. 주로 남자손님들, 그것도 20대 남자 손님들이 많았다. 식당이 꾸질꾸질하고 초췌해서 어디 바닷가 외진 곳에 있을 것만 같지만 아주 번화한 다운타운의 뒷골목에 위치해 있었다. 오래된 식당으로 그런 식당들이 도시마다 있다. 그리고 다운타운을 가득 채우고 있는 남성 보세 옷 가게나 신발타운, 휴대전화 파는 곳에서 일하는 남자들, 피시방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생, 백화점에서 일을 하는 젊은 남자 직원들이 돼지찌개 집의 주 손님이었다.


그래서 식사시간이 되면 작은 골목으로 들어와서 담배를 한 대 맛있게 피우고 돼지찌개 집으로 들어와 배부르게 먹고 갔다. 가격이 저렴했고 밥은 원하는 대로 퍼 먹을 수 있었다. 한 명이 와도 국밥처럼 돼지찌개 일 인분이 되었는데 두 명의 양이나 한 명의 양이나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저녁이면 돼지찌개에 소주를 마시는 근처 젊은 손님들이 있었다. 눌러앉아서 오랜 시간 마시는 게 아니라 밥을 먹으며 소주를 반주로 후루룩 먹고 나갔다.


우리는 여름에는 가지 않았지만 추운 날이면 가끔 가서 돼지찌개를 먹곤 했다. 이상하지만 썩 맛있지 않은데 맛있었다. 겨울에 가서 보면 자리가 꽉 차서 다른 곳으로 가기 일쑤였지만 자리가 비면 얼른 가서 앉아서 돼지찌개에 밥을 먹었다. 메뉴도 돼지찌개 달랑 하나다. 참 희한한 식당이었다.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켰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할머니가 굽은 등으로 돼지찌개를 팔았는데 어느 순간 가게가 문을 닫았다.


그 골목은 그런 식당이 죽 붙어있는 골목인데 돼지찌개 집이 문을 닫은 후로 다른 식당도 점차 사라졌다. 중간에 코로나가 끼면서 골목에서 오랫동안 자리 잡고 저렴하게 음식을 만들어 팔던 식당들은 대부분 없어졌다.


조금 없어 보이고 덥고, 조금 춥지만 하하 호호 뭐 이런 소리가 가득했던 식당들이었다. 그때에도 물가가 올라서, 같은 소리를 들었지만 할머니는 너네 먹을 만큼 먹고 가,라는 식이었다. 불과 몇 해 전의 일인데 아주 오래전의 일처럼 느껴진다.



오늘의 선곡은 돼지찌개 집에서 티브이로 많이도 봤던, 하염없이 눈물이 나~~ 제아의 후유증이다. 라이브 너무 잘 하는 거 아니야. https://youtu.be/YySS1GOlW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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