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의 단편소설집으로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은 고베 지진을 주제로 만들어졌다. 총 6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단편인데 장편 같은 소설들이다. 문학사상사에서 출간된 이 책의 추천의 말을 장석주 시인이 썼다. 장석주 시인도 이 책에 수록된 소설은 장편소설을 읽는 것 같다고 했는데 정말 읽어보면 장편 소설처럼 느껴진다.

소설 속 인물들은 고베 지진으로 인해 단절과 고립으로 기어 들어간다. 또는 들어가 있다. 그리고 거기에서 나오게 된다. 절망의 저 끝으로 가면, 절망의 끝으로 가야만 희망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수록된 소설 중에 ‘벌꿀 파이’는 ‘패밀리 어페어’나 ‘장님 버드나무와 잠자는 여자’, ‘개똥벌레(반딧불이)’와 궤를 같이 하는 소설이다. 리얼리티며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하루키 식으로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패밀리 어페어는 너무 좋아서 몇 번을 읽었는지 모른다. 하루키가 이렇게나 유머러스하다니! 하는 부분으로 채워진 소설이었다.


이 단편집에 수록된 ‘벌꿀 파이’의 주인공 준페이는 하루키 자신을 투영했다. 아마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와 ‘1973년의 핀볼’을 쓰고 난 후 문단에서 받은 모질함?에 대해서 준페이라는 주인공을 빌려 내뱉고 있다. 준페이는 소설 속에서 나약한 인간이지만 강함을 지니고 있는 인물이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소설을 쓰자고 준페이는 생각한다. 날이 새어 주위가 밝아지고, 그 빛 가운데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꼬옥 껴안고, 누군가가 꿈꾸며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소설을, 하지만 지금은 우선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서 두 여자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상대가 누구든, 정체 모를 상자 속에 처넣어지게 해선 안 된다. 설사 하늘이 무너져 내린다고 해도, 대지가 소리를 내며 갈라진다고 해도.’ -벌꿀파이 중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소설은 ‘개구리 군, 도쿄를 구하다’이다. 보잘것없고 평범하기 그지없는 회사원 가타키리에게 어느 날 개구리가 나타나 도쿄를 구하자고 한다.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가타키리는 거절을 하지만 결국에는 개구리 군을 도와 악의 화신은 지하에 사는 지렁이를 물리치고 도쿄를 구해낸다. 읽는 내내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이 소설이 너무 좋아서 이보다 좀 더 길게 이 소설의 오마주를 써서 계간지에 보냈던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마음에 든다며 그 소설이 실리게 되었다. 오마주한 소설은 여기 브런치에도 있으니 혹시 보고 싶으시면 ‘그리즐리 씨, 고마워요’를 읽으시면 됩니다.

https://brunch.co.kr/@drillmasteer/3088


사람들은, 아니 이전의 전문가들(문학평론가들을 비롯해서 말하기 좋아하는 샌님 같은 문학가들)은 하루키의 소설은 영상으로 옮기기에 애매하고 이상하다는 평을 많이 내놓았다. 그래서 영화로 만들 수가 거의 없다는 식으로 말을 많이 했다. 하지만 지금 현시점에서 보면 하루키의 소설만큼 영화가 많이 된 소설가도 잘 없다.


또띠븐 킹이라 불리는 스티븐 킹이나 러브 크래프트는 미지의 세계, 초현실, 기괴한 괴물이나 유령 등이 나오는 이야기니까 주로 영화가 되는 경우가 많은 것을 제외하고 하루키의 소설만큼 영화로 많이 된 소설도 없다. 무엇보다 하루키의 소설은 여러 나라에서 영화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게 신기하다면 신기한 일이다.


‘신의 아이들은 춤춘다’는 2007년 로버트 로지볼이라는 감독이 조안 첸 주연의 영화로 만들었다. 2008년에 폼 플린트 감독의 ‘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 여자아이를 만나는 것에 대해’가 만들어졌다는데 포스터도 찾을 수 없고 영상도 찾을 수 없어서 아쉽다. 2010년에는 카를로스 쿠아론 감독, 스파이더맨의 그녀 키얼스 던스턴 주연의 ‘빵 가게 재습격’도 만들어졌다. 이 영화에 하루키는 원안으로 참여를 하기도 했다.


이미 1980년에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가 오오모리 가즈키 감독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졌다. 이 부분을 하루키는 에세이 ‘작지만 확실한 행복’에서 언급을 했다. [오오모리는 효고 현에 있는 아시야 시립 세이도 중학교의 나의 3년 후배이며, 내가 쓴 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가 영화화되었을 때 감독을 맡은 사람이기도 하다]라고 했다.


그뿐이 아니다. 드라이브 마이카, 버닝, 하나 레이 만, 토니 타키타니, 상실의 시대. 이렇게나 많은 영화가 그의 소설이 원작이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가 영화가 되어 나온다면 정말 좋아 죽을 것 같다.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


빵 가게 재습격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이 소설집의 수록은 아니지만 소설만큼 좋았던 영화 하나 레이 베이의 예고편을 올려본다 https://youtu.be/W9O5RXGzrao


하나레이 베이는 우리나라에서 '하나레이 만'으로 하루키의 단편 소설집 '도쿄 기담집'에 실린 단편소설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 하나레이 베이를 한 번 더 봤다. 마지막 사치가 타카시의 헤드셋을 쓰고 음악을 들었을 때 감정이 순식간에 바뀐다. 그 감정을, 사치의 마음이 화면을 뚫고 나왔다.


내 마음에 뚫린 공백은 나도 알 수 없다.

길을 잃어버려 뱅뱅 맴도는 느낌일 뿐이다.

이 공허하고 손에 닿을 것 같은데 끝에 도달할 수 없는 이 기분을 어떻게 할까.

나는 10년 동안 무엇을 위해 살아온 것일까.

나는 지금 누구이며, 지금 이전에는 누군가의 엄마였고 어떤 남자의 아내였다.

등신 같은 남편이 듣던 헤드 셋이 아들을 건너 내가 결국 듣고 있다.

앞이 보였던 내 인생을 깡그리 망가트리고 깨버린 내 삶에 들어온 남자들을 증오한다.

나는 그들을 사랑하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다.

그 남자들은 나에게 먼지만큼도 행복을 주지 않았다.

타카시를 가진 것을 알고도 마약에 빠져 있던 남편도, 남편의 모습을 그대로 물려받은 타카시도 어쩌면 내가 원하는 바대로 신이 있다면 신이 데리고 가버렸다.

낡은 티브이처럼 죽은 후에도 하얀빛이 화면 위로 깜빡깜빡 헤매다가, 어느 날 갑자기 뚝 끊어지는 경우처럼 나쁘지는 않다.

하지만 좋은 것만은 아니다.

성실하게 설명하려고 하면 할수록 불성실한 먼지가 안개처럼 가득 껴서 주변을 떠돈다.

남편과 타카시를 떠올리면 그렇다.

불성실한 공기다.

입구는 있지만 출구는 없는 이미 들어와 버린 내 인생의 낙인 같은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 내가 내 인생을 송두리째 망가트린 그 남자들이 듣던 헤드 셋을 끼고 음악을 듣는 순간 나는, 나도 모르는 새 그들이 내게 소중하다는 것을 알았다.

욕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나도 모르는 새.

그리고 눈물이 한 방울 흘렀다.

소리 내어 울고 싶지만 나는, 나는 바보라서... 다리 한쪽이 잘린 일본인 서퍼를 본 순간 나는 내 마음속의 공백에 대해서 알 수 있었다.

내 자신이 먼 옛날에 죽어 풍화되어 바짝 말라버린 거대한 생물의 미궁과도 같은 체내를 방황하고 있는 듯한 느낌에서 나는 시간의 구멍을 빠져나와 그 한가운데에 쑥 빠져버렸지만 타카시가 듣던 음악을 듣는 동안 나는 다리 한쪽이 없는 서퍼가 타카시라는 확신이 들었다.

타카시는, 내 아들은 10년 동안 나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당신의 소중한 아들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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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반건조 가자미를 잘 말리면? 아니 조금 삭히면 홍어처럼 킁 하고 비릿한 맛이 나면서 아주 풍미가 오른 맛있는 가자미가 된다. 기름을 두르고 프라이팬에서 잘 구워주면 기존의 부드럽기만 한 가자미에서 맛볼 수 없는 풍부한 아미노산의 맛이 확 난다.


사실 아미노산의 맛이 뭔지는 모르지만 보통 우리가 먹는 부들부들한 가자미 구이 맛보다는 훨씬 맛있다. 개인적으로는 그렇다. 그 속에 느껴지는 또 다른 맛이 아미노산의 맛이라고 하자.


구을 때 방울토마토도 같이 구우면 좋다. 토마토는 한 15개 정도를 같이 굽는다. 토마토에 가자미의 쿰쿰한 비릿함이 기름과 잘 버무려져서 토마토 역시 풍미가 확 난다.


이 정도의 비릿한 맛이 나는 생선구이가 나는 좋다. 예전에 비해서는 비린맛을 덜 찾아 먹게 되었는데, 예전에는 친구들이 으 할 정도로 비린맛을 좋아했었다. 대학교 자취를 할 때 왕왕 사 먹었던 음식이 꽁치통조림이었다. 자취생이 간단하게 먹기에 제일 좋은 식품이었다. 너무 좋아. 나는 꽁치통조림으로 요리를 해 먹지 않았다.


그냥 뚜껑을 따서 그대로 밥에 비벼 먹었다. 꽁치통조림은 그대로가 제일 맛있다. 찌개에 넣고, 국에 넣고 하면 꽁치의 그 맛있는 비린맛이 사라져서 별로였다. 그래서 자취방에서 술을 먹다가 만취에 가까워져 아이들이 안주를 찾을 때면 꽁치통조림을 통조림 그대로 버너에 살살 보글보글 데워서 그걸 안주삼아 먹었다.


그다음 날 아침 눈을 뜬 녀석들이 우웩 우웩 하면서 밖으로 뛰쳐나갔다. 방 안에 온통 꽁치 비린내 때문에 미치겠다는 것이다. 그 뒤로 일주일 동안 녀석들은 자취방에 놀러 오지 않았다.


홍어를 삭히면 어째서 그런 킁 한 맛이 다른 생선에 비해 많이 나느냐 한다면 홍어는 온몸으로 소변을 배출하기 때문에 항아리 같은데 넣고 하루만 지나도 톡 쏘는, 킁 한 맛이 난다는 말이 있었다. 홍어를 라면에 넣어서 먹어보면 라면에 홍어의 맛이 배이는데 라면을 먹을 때마다 입안이 팡팡 터져서 또 홍어의 맛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사족을 못쓴다.


하지만 정확하게 홍어의 맛, 이건 비린내가 아니다. 꽁치 비린내, 고등어 비린내가 비린맛이라고 생각한다. 고래고기에서 비린내가 많이 난다. 포유류이기 때문이다. 고래는 차가운 바다에서 살아가려니 기름이 온몸을 덮고 있어서 전문가가 잘 삶아내지 않으면 비린내가 한 달 넘게 갈지도 모른다. 내가 사는 곳이 고래의 도시라서 예전에는 전통시장에서 고래고기를 삶아서 수육으로 팔았다.


전문점에서 먹으면 고래고기는 엄청 비싸다. 마음대로 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마트에서도 가끔 돌고래 수육을 팔기도 했는데 돌고래 수육을 권장하지 않는다. 돌고래는 하루에 몇 천 킬로미터를 이동을 해야만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동물인데 그러다 보니 오염된 바다에도 들어가고, 그래서 돌고래의 몸속에는 수은 성분이 아주 많다. 결론적으로 요즘에는 고래고기 자체를 웬만하면 먹지 말기를 바란다. 고래고기 아니라도 먹을 거 많잖아.


어떻든 홍어의 톡 쏘는 맛과 생선의 비린맛은 조금 다른 것 같다는 게 내 생각이다. 요즘은 손질된 고등어구이가 잘 나오는데 구워서 이틀 정도 지나서 먹으면 내가 딱 좋아하는 맛이 난다. 비린맛이 많이 나는 것이다. 그래서 회도 활어회보다 숙성회가 훨씬 맛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그렇게 비린맛을 찾아서 먹지는 않는다. 입맛이 어린이 입맛으로 바뀌었다. 너무 비린맛이 나면 어? 하게 되었다. 그래도 사진에서처럼 반건조 꾸덕한 가자미 구이의 살짝 킁 한 맛이 나는 비린맛은 좋다.


오늘 라디오에 아이들의 방학으로 자유는 물러갔다는 사연이 엄청 많이 올라오는데, 여름 방학에 밖에서 새까맣게 될 때까지 놓다가 집에 들어오면 씻고 저녁을 먹을 때 물에 밥을 말아서 숟가락으로 밥을 뜨면 엄마가 반건조 가자미 구이를 젓가락으로 뜯어서 올려주었다. 그때는 그게 비린맛인지 무슨 맛인지도 모르고 맛있게만 먹었다.


잘 말리면, 그냥 베란다에 걸어두면-해가 들지 않는 부분에- 꾸덕해지는데 가자미를 구우면 냄새에서는 비릿한 냄새가 나지 않고 맛에서만 그걸 맛볼 수 있는 스킬이 생긴다. 그래서 결론은 조금 짭조름하니 물에 밥을 말아서 같이 먹으면 너무 맛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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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든 레이크는 2008년에 나온 공포영화에 가깝다. 인간이 어디까지 잔인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이 영화는 실제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 뎀인가? 하는 제목의 영화를 다시 영국 버전으로 만든 영화다.


영화의 여자 주인공은 초등학교 교사다. 애인으로 마이클 패스벤더가 나온다. 두 사람이 호숫가에 갔을 때 그 동네에서 개판으로 생활하는 10대 초반의 아이들, 잼민이들이 놀고 있다. 제니는 스티브에게 그 자리를 피해서 다른 곳으로 가자고 한다. 하지만 스티브는 괜찮다며 호숫가에서 일광욕을 즐긴다.


잼민이 들은 제나를 희롱한다. 개로 위협하고, 망원경으로 몸을 훑고. 초등학교 교사인 제나는 학교에서 내놓은 잼민이들의 심리를 아니까 호숫가가 경치는 좋으나 다른 곳으로 스티브에게 말하지만 잼민이들에게 질 수 없는 스티브가 주의를 준다. 그리고 점점 가열되어서 잼민들에게 스티브가 처참하게 죽는다.


제니를 잡아서 사진을 찍고 희롱하고 죽이려는데 제니가 탈출해서 몹시 더러운 썩는 냄새가 나는 쓰레기 통에 몸을 숨겨 도망을 가서 마을의 사람들에게 구조가 된다. 구조되어서 경찰을 기다리는 그 집이 잼민이 들 중 스티브를 죽인 아이의 집이었다.


이 영화는 루마니아의 실제 잼민이들이 살인을 저지른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2002년 시월에 루마니아의 한 지역에서 여자 시체 두 구가 발견되었다. 어머니로 보이는 여자는 흉기에 살해되었고 딸은 질식사로 추정되지만 당일 엄청난 비로 범인의 모든 흔적이 지워졌다. 5일 뒤에는 인근 숲 속 저택에 살고 있는 젊은 남녀의 사체도 발견되는데 범인은 10대 잼민이 들이었고 범행 동기가 장난이었다고 해서 유럽 전역에 충격을 주었다.


이 영화도 보면 심각할 정도로 분노가 몰려온다. 화가 막 난다. 영화 속에서 범행을 저지르는 잼민이들의 부모들 역시 살인자인 아들을 살리려고 제니를,,, https://youtu.be/rJkO9HBXuhc


근래에 정신줄 놓아버린 잼민이 들 때문에 초등학교 교사가 구타를 당하고, 한 학교의 교실에서 끔찍한 선택을 한 사건이 보도되었다. 잼민이 들도 문제지만 그 부모들의 대응이 보도되면서 사람들의 공분을 자아내고 있다.


나는 대략 십 년 전부터 서천석 박사의 강의와 책을 좋아해서 그가 말하는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 그가 바라보는 아이들의 방향과 어른과의 차이를 주의 깊게 듣고 보았다. 그래서 서천석 박사가 하는 말을 여러 글에서 소개를 했다.


아이들은 기본적으로 우울하다. 그 이유는 무력하기 때문이다. 눈을 떠서 하는 모든 것들이 부모를 비롯해 타인에 의해 움직이고 먹게 된다. 아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샐리 만의 사진에 그런 모습이 있다. 여성으로 최고의 사진가 반열에 오른 샐리 만의 초기 작품인 자신의 세 아이들을 담은 사진을 보면 아이들의 웃고 있는 사진이 거의 없다. 쉬르리얼리즘의 세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현실인데 비현실적이다. 그저 미스터리하고 신비하고 인간 본연의 모습을 보여준다. 굉장하다. 사진으로 그런 것들을 표현해내고 있다.

어떻든 아이들은 불완전한 존재로 기본적으로 그루미 하다. 말 잘 듣고 착하게 지내다 어쩌다가 실수를 하거나 잘못을 하게 되면 혼나게 되고, 또 이러다가 나중에 뭐가 되려고 그러니, 같은 소리를 듣게 된다.


만약 어른이 그런 소리를 듣게 되면 그렇게 말을 사람과는 다시는 보지 않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아이는 그럴 수가 없다. 아이에게 그런 소리를 하는 사람은 대체로 부모다. 친구나 학원 선생님이나 태권도 관장님은 그런 소리를 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보는 영화를 만들 때 어린이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어린이 영화를 만들면 영화는 실패한다. 성인이 어설프게 연기를 하는 어린이 영화가 어린이들이 좋아할 거라는 망할 마인드로 만들면 아이들은 외면한다.


아이들이 보는 영화가 유치해도 된다는 마인드를 가진 영화인들이 아이들이 보는 영화를 만들면 안 된다는 말이다. 아이들이 보는 영화라고 해서 유치해도 된다는 생각은 접어야 한다.


성인, 그 이상으로 진지하고 디테일에 신경을 써서 아이들이 보는 영화를 만들어야 아이들이 마음을 조금 연다. 미취학아동 그 이전의 아이들이 보는 영화나 만화에는 방귀나 뀌고 똥이나 먹고 하면 먹힐지 모르나 그 이상 아이들은 그런 유치함을 영화 속에서까지 원하지 않는다.


유치원생 정도의 미취학아동을 성인이 대할 때 남자친구와 결혼할 거야? 여자 친구와 결혼할 거야? 같은 질문은 아주 잘못된 질문이라고 한다. 아이들은 이런 어른들의 관점에서 보는 로맨스가 없다고 서천석 박사는 말하고 있다. 어린이가 그런 질문을 받으면 남자친구와 결혼을 해야 하는 건가? 남자친구가 있어야 하는 건가?라고 생각을 한다. 즉 일찍부터 어른들의 프레임에 들어오게 하는 질문을 어른들은 무의식적으로 한다는 것이다.


서천석 박사의 책을 보면 아이는 무력하기 때문에 대체로 부모의 요구대로 움직인다. 그러다 보면 아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기에 아이도 스트레스를 받는다. 밤에 하품을 하면서도 잠을 자지 않으려고 하는 아이는 그날 스트레스가 강하다는 말이라고 한다. 그럴 때 대체로 부모나 할머니는 우유를 먹이고 잠을 재우려 하는데 그러지 말아야 한다고 한다.


서천석 박사는 라디오에 많이 나오던 때가 있었고 방송에서도 볼 수 있어서 좋았는데 어느 날 방송에서 볼 수 없었다. 아마도 자신의 본분으로 돌아가는 게 낫겠다 싶었을 것이다. 메스미디어는 과장과 자극을 원료로 끝을 모르고 달려가는 폭주기관차와 같다. 자신이 내려오지 않으면 폭주기관차에 올라탄 채 끝도 모르고 달렸을 것이다.


서천박 박사는 아마 그 사실을 인지하고 방송계를 떠났을지도 모른다. 그런 서천석 박사가 금쪽이 설루션을 비판하는 내용이 보도되면서 내용을 읽지 않은 채 사람들은 서초교사 사망은 오은영 탓? 같은 짤과 밈을 만들고 있다.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15/0004870907?sid=102


이미 사람들은 자극과 과장을 통해 관심을 받고 싶어 하는 수위가 극에 달해있다. 클릭과 조회수를 위해서라면 어떤 영상이나 말을 짜깁기해서 올릴 수 있다.


아이와 부모는 천차만별이고 전부 제각각인데 이 아이에게 적용한 설루션을 일부 부모들이 자신의 아이에게도 적용하려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있다. 집에서 아이 하나를 케어하고 훈육하는 것과 교실에서 여러 명의 아이들을 교육하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니까.


오은영 박사가 티브이 프로그램에 나무 많이 나오니까 이제 그만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반, 오은영 박사의 설루션이 좋으니 그냥 계속 보고 싶다는 사람들이 반 정도 된다고 했을 때 방송 제작자 측은 사람들이 열광하고 모여들고 시청률이 좋고 가만 둬도 자극적으로 보이는 행동을 하는 아이들이 넘치는 방송을 끊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들의 관심이 전부 메말라갈 때까지 쪽쪽 빨아먹을 집단이 방송국이다.


한 정신의학박사는 부모와 아이의 문제가 일어났을 때 아이에게 집중을 하는 오은영 박사에 비해 그는 부모에게 집중을 해야 한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얼마 전 10년 차 초등교사가 오은영 박사에게 하는 말을 올려본다. 스압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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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하루키의 사소설 격인 ‘일인칭 단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자. 하루키의 장편소설이 아직 국내에 출간이 되지 않아서 한국 출판물로는 하루키의 단편 소설집 ‘일인칭 단수’가 제일 마지막에 나온 소설집이다.


소설집 속에 수록된 소설, 위드 더 비틀스는 두 번 정도 읽었다. 크림은 많이 읽었다. 한국 출판물이 나오기 전에 번역책자를 만들어 봤기 때문에 꽤 여러 번 읽었다. 적어도 15번은 넘게 읽은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기억이 아스라이 저 멀리.


시나가와 원숭이의 고백도 많이 읽었다. 시나가와 원숭이의 고백은 15년 전에 나온 시나가와 원숭이의 후편이다. 시나가와 원숭이도 나이가 많이 들었다. 하루키가 여행 중에 만나서 고백을 듣는 이야기다. 시나가와 원숭이는 단편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중국 배우 후거가 재해석을 해서 영화로 만들었다. 꽤 잘 만들었다. 시나가와 원숭이가 이름을 훔쳐가는 이야기로, 현실에서 이름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하고 있다.


누군가의 남편, 누군가의 엄마, 누군가의 딸로 불리며 조금씩 주위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게 되다가 결국 자신도 자신의 이름을 모르게 되는, 아무튼 소설을 읽으면 재미있다.


이 시나가와 원숭이는 하루키가 아버지에 대해서 쓴 '고양이를 버리다'에도 등장한다. 첫 시작에 시나가와 원숭이가 나타나서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이름과 성, 둘 중에 하나의 선택권을 주겠다. 무라카미와 하루키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면 너는 무엇을 택하겠나,라며 등장한다.


하루키의 글을 읽어보면, 특히 소설을 읽어보면 예전 소설들이 최근의 소설로 이어지면서 전부 연결이 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시나가와 원숭이처럼 같은 문장을 여러 소설에 사용하기도 하며, 와타나베 노보루라는 이름도 여기저기 소설에 등장한다. 이 이름은 꽤 부정적이고 호러블 한 인물의 이름으로 주로 쓰였는데 하루키의 절친 안자이 미즈마루 씨의 본명이다.

일인칭 단수는 소설이라기보다 거의 에세이에 가깝다. 일인칭 단수를 읽어보면 위에서처럼 아내는 혼자서 중국음식을 먹으러 간다. 왜냐하면 주인공은 중국음식을 전혀 먹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중국음식에 들어가는 향신료 때문에 알레르기가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주인공의 아내는 중국음식이 먹고 싶어 지면 중국음식을 못 먹는 주인공 때문에 친한 여자 친구들을 불러내서 먹으러 간다고 했다.라고 마치 남에게 말하듯 했지만 그건 하루키 본인의 이야기다.


일인칭 단수에는 주인공이 하루키 본인이라고 나오지 않았지만 우리는 확실하게 주인공이 하루키 본인이라는 것을 안다. 만약 처음 일인칭 단수를 읽는 사람이 내가 하는 말을 듣고 아니 무엇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 라며 따지듯 묻는다면 대답할 수 있을 정도다.

하루키의 일상의 여백을 읽어보면 확실하게 소설 일인칭 단수에 나온 문장이 그대로 주욱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에세이에 중국음식을 전혀 먹지 못해서 하루키는 아내에게 핀잔을 들었던 이야기, 그리고 아내가 몰래 중국음식이 아닌 척하며 하루키에게 먹이려 했지만 실패하고 만 이야기, 그리하여 아내는 중국음식이 먹고플 때는 친구들과 간다는 이야기를 죽 써놨다.

하루키는 여러 글에서 자신은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이전에 피터캣을 운영하면서 담배도 하루에 한 갑씩 피우고 먹는 것도 가리지 않고 먹었다고 했다.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서 그런 생활방식으로는 전혀 글을 쓰는 패턴을 찾을 수 없어서 기름기 있는 음식을 멀리하고 달리기를 하며 담배를 끊어 버렸다고 했다.

그리하여 위의 에세이에서 아내가 라면이 먹고 싶은데 하루키는 라면을 먹지 못해서 결국 혼자서 라면을 먹다가 “나이가 들어서도 혼자 라면을 먹으러 오는 여자만은 되고 싶지 않다”라는 말을 옆에 테이블에서 들었다고 하루키에게 마구 화를 냈다.


그런데 혼자서 라면을 먹는 40대 여인이 어때서 그럴까. 나 돼지국밥 집에 한창 다닐 때 홀로 국밥을 맛나게 먹는 여성들이 얼마나 많았는데. 소주병도 앞에 두고 면사리도 넣어서 야무지게 먹는 모습이 이상하지 않았는데.


하루키는 이렇게 먹는 것 때문에 세계를 돌아다니며 취재 겸 여행을 하면서 곤란한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으로 먼 북소리에도 잘 나와있고, 태엽 감는 새의 연대기 속의 노몬한과 만주 이야기를 보고 잡지사에서 실제로 가보지 않겠냐 해서 여행길에 오르게 되어서 쓴 하루키의 여행법, 우천염전에도 잘 나와있다.


여행지에서 먹는 것이 안 맞아서 불만 섞인 말을 내뱉는 모습부터 쇠파리, 구더기, 철조망, 국경까지 긴박한 이야기도 잘 나온다. 그러면서 노몬한 전투에 대한 이야기도 빠트리지 않고 한다.


[해가 지면 몽고의 하늘은 별들로 뒤덮인다]로 시작해서 [피투성이의 싸움을 벌이고, 그곳에서 수만 명이나 되는 병사들이 총에 맞고 화염 방사기에 불태워지고, 탱크의 캐터필러에 깔려 죽는다며 생매장을 당하고 또 그것의 몇 배나 되는 사람들이 깊은 상처를 입고 팔이나 다리를 잃었을 거라고 생각하니 참으로 암담한 심정이다]라고 쓴 부분을 읽으면 하루키식 유머만으로 이루어진 여행기가 아니라는 것이 느껴져서 좋다.


이런 기록은 장편 소설 태엽 감는 새의 연대기에 잘 나온다. 포로의 가죽을 조금씩 벗기는 이야기, 전투 중에 버려진 군인들을 처리하는 방법. 전쟁의 아이러니가 바로 평화를 위해 서로의 몸에 총을 겨누고 총구멍을 낸다는 것이 잘 드러난다. 모순인 것이다. 온통 모순으로 점철된 처절한 모습까지 소설에 잘 녹아있다.


어떻든 일인칭 단수는 에세이에 근접한 소설, 사소설인 것이다. 특히 아내에 대한 부분은 실제 하루키의 아내 요코 여사에 관한 이야기다.


하루키는 그간 아내에 대해서 대체로 함구하고 있지만 일상의 여백을 읽으면 아내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이래도 돼? 할 정도다. 아내가 갑자기 일정을 바꾸자고 하는 바람에 난처했는데 이유가, 아내가 읽는 책에 빠져서 책에 나오는 곳으로 갑자기 사자고 해서 혼났다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아내에게 핀잔을 들은 이야기를 마치 수다를 떨듯 주절주절하고, 또 하루키 자신은 바빠서 취재를 가지 못하니 사진기사 겸 조사원을 파견하는데 그 사람이 아내였다는 이야기까지.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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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는 집에 가는데 비가 너무 쏟아져서 불안하고 무서웠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비가 쏟아지더니 좀 비가 줄어드나 싶더니 다시 엄청나게 하늘에서 쏟아졌다. 집으로 가는 30분 정도가 완전히 긴장의 연속이었다. 해안도로는 비가 이렇게 쏟아지면 한 차선에 물이 가득 들어차서 차들이 다른 차로로 옮긴다고 거북이 운행이고 해안도로 옆의 바다는 곧 들이닥칠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이번을 비롯해서 세 번 정도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에 고립되거나 도로 위에 있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에도 엄청난 비 때문에 도시가 물난리가 나고 전국이 떠들썩했는데 어제처럼 무섭거나 전혀 불안하지 않았다.


한 번은 비가 도심지를 집어삼킬 만큼 내렸을 때 움푹 파인 도로에 빗물이 가득 고여 있는데 그곳을 지나가다가 차가 그대로 퍼지고 말았다. 그때 차는 사촌형이 차를 구입하기 전에 몰아 보라고 던져 준 중고차였다. 수동기어에 고장도 잘 나지 않아서 잘 몰고 다녔다. 붕붕 가다가 빗물이 고인 도로에 그대로 멈추고 말았다. 시동은 걸리지 않고 보험사에 전화를 하니 전부 출동을 해서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말만 들었다.


그러나 무섭거나 두려운 마음이 별로 들지 않았다. 좀 외진 곳이라 도로에 나밖에 없었지만 도심지 안이고 보험사가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오겠지 같은 생각 때문인지 그냥 차 안에 가만히 있으면서 문자나 주고받고 있었다. 그런데 한 40분 정도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서 바퀴가 물에 잠기고 차가 둥둥 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미련한 건지, 무섭다는 생각은 들지 않고 창밖으로 펼쳐지는 비가 쏟아지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내가 있는 도로의 중간이 밑으로 움푹 파여서 그렇지 여기만 벗어나면 도로로 나갈 수 있고 주위는 전부 아파트 단지고 곧 보험에서 출동할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다.


또 한 번은 남이섬으로 가는 도중에 억수 같은 비가 쏟아졌다. 그때는 일행과 함께 여행 중이었고 가평인가, 아무튼 어딘가에서 남이섬으로 이동을 하는 중이었다. 오전이었고 산속에 난 길을 따라 이동을 하는데 엄청난 비를 맞이했다. 비가 차 천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드럼소리처럼 컸다. 산 중간을 관통하는 구불구불한 도로 옆의 개울이 막 흘러 넘 칠 정도로 비가 많이 왔다.


옆 자리에서 일행은 너무나 겁을 집어 먹고 있었고 불안해해서 나까지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그냥 이대로 도로만 잘 나가면 마을이나 뭔가가 나올 것 같았다. 내비게이션도 10분 정도만 가면 식당들이 있는 곳이라고 해서 뭐 그다지 크게 불안하지 않았다. 엇 그런데 산에서 토사가 흘러내려 도로를 막은 것이다. 지금까지 한 시간 넘게 구불구불한 도로를 달렸는데 공포영화에서처럼 지나갈 수가 없는 것이다.


내려서 치워볼 요량으로 차밖으로 나오자마자 물벼락을 맞아서 그야말로 다 젖어 버렸다. 차 안에 들어오니 에어컨 때문에 춥고, 에어컨을 끄자니 성애가 가득 끼고. 옆에서 일행은 무서워서 곧 울음이 터지기 일보직전이고. 아무튼 어쩔 수 없이 차를 돌려 다시 왔던 길로 나와야 했다. 그때를 생각하니 또 짜증이 나네.


나는 조깅을 할 때에도 갔다가 반환점에서 돌아올 때 더 먼 거리라도 절대 왔던 길로 되돌아오지는 않는다. 아무튼 갔던 카페에 가고, 읽었던 책을 읽고, 먹었던 음식을 먹는 회귀성이 강한 인간인데 조깅을 하면서 왔던 길로 되돌아오는 경우는 없다. 그런데 한 시간이나 달려서 왔던 산속의 구불구불한 도로를 다시 돌아 나와야 했다.


일행 때문에 운전도 조심조심해야 했다. 비가 앞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쏟아졌기 때문에 위험했다. 만약 지금 그랬다면 나는 정말 그대로 울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그때에는 한 시간을 다시 돌아 나오다 보니 빗줄기가 좀 줄어들었고 들어올 때는 보지 못했던 식당 하나를 발견하고 그대로 그 안으로 들어갔다.


물론 손님은 한 명도 없었다. 식당은 아직 장사를 하지 않는 분위기였고 주인내외가 나왔는데 우리의, 아니 나의 몰골을 보더니 테이블에 앉게 하더니(테이블이 홀에 두 개가 있고 옆에 신발을 벗고 올라가는 방처럼 생긴 그런 곳에 우리를 앉게 했다) 물을 갖다 주었다. 그리고 지금은 반계탕 밖에 안 되는데 괜찮냐는 것이다. 우리는 반계탕을 달라고 했다.


반계탕 두 그릇을 주문했는데 만두까지 주인내외가 주었다. 반계탕 국물이 들어가니 비와는 상관없이 몸이 확 풀어졌다. 닭고기의 살을 뜯어먹고 일행은 호기롭게 소주까지 한 잔 마셨다. 그제야 일행은 안심을 하는 표정이 되었다. 그때 우리는 식당을 둘러봤다. 식당은 들어오는 문 반대편으로는 개울로 나가는 문이 크게 있었다. 개울로 나가면 발도 담글 수 있고 평상도 있고, 그렇게 예쁘게 되어 있었다.


우리는 반계탕을 다 먹었는데도 주인내외는 비가 줄어들 때까지 있다가 가라고 했다. 그래서 개울이 있는 곳으로 나와서 비막이 밑에서 운치를 즐겼다. 주인내외가 자식들을 다 키우고 둘이서 작은 식당을 하는데 여러 이야기를 해주었다. 우리는 집으로 돌아갈 때 다시 들려서 반계탕을 먹자고 했는데 그러지는 못했다. 그때 비가 엄청나게 쏟아졌는데 무서운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니 몇 해 전부터는 무서운 것들이 많아졌다. 엊그제는 오후부터 비가 엄청나게 왔다. 아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조깅이고 뭐고 평소보다 일찍 나왔다. 일찍 나오는 것도 바로 나오지 않고 창으로 이렇게 보다가 빗줄기가 조금 줄어들었을 때 나왔는데 10분 정도 차를 모는데 그야말로 쏴아 쏟아졌고 30분이나 그대로 지속되었다. 내가 예전과 다른 것은 너무 무섭고 불안하다는 것이다. 나는 어쩌다가 이지경이 되었을까.


어린 시절부터 바닷가에 살면서 바다에도 늘 들어가서 빠지기도 하고, 헤엄을 쳐서 그런지 바다에 대한 무서움 같은 건 1도 없었는데, 언젠가부터는 바다에 발가락도 담그지 않게 되었다. 운전하는 걸 좋아하고 서울 가는 것을 좋아해서 몇 해전까지만 해도 부웅 고속도로를 타고 열심히 생생 달려 서울로 가서 백남준 아트전을 꼭 보고 내려왔다. 하지만 이제는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도 싫고, 사람이 많은 곳에 가는 것도 별로다. 백남준? 이전에 나만큼 본 사람도 없을 테니까 지금은 인터넷으로 보면 된다는 식이다.


폭포수처럼 내리던 비가 그치고 그 자리에 무지개가 떠 올랐다. 무지개는 보통 금방 없어지는데 좀 지켜보고 있으니 옆에 작은 쌍무지개도 떴다. 그러더니 무지개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무지개 본연의 색을 다 버리고 밝게,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밝게 빛나는 것이다. 나는 그 모습이 황홀하기도 또 불안하기도 했다. 무지개가 이래도 돼? 할 정도로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무지개는 시인들이 시에도 많이 적용시킨다. 무지개가 일곱 가지 컬러를 버리고 밝게 빛나는 걸 보니 누군가 무지개 밑에서 일곱 가지 색만 빼가서 무지개가 화가 나서 저렇게 빛을 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일곱 가지 색을 떡에 넣어서 무지개떡으로 만들고, 하나씩 컬러를 떡에 넣어서 갖가지 색이 나는 송편을 만들기도 했다.


무지개는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오래도록 머무르다 그렇게 사라졌다. 지금은 소강상태지만 아직 비가 완전히 물러간 건 아니다. 이번 사태를 보니 비가 많이 와서 물이 차오르는 차에 있으면 얼마나 두렵고 무서울까. 어른이 되니까 강해지는 게 아니라 점점 약해지고 불안이 주위에 가득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 같다.





오성인 시인의 말


나이를 먹는 일은 진화의 일종일까.

어른이 되려면 슬픔을 먼저 이해해야 했다.

슬픔을 외면한 대가로 불면에 시달릴 때마다 아직 꺼내 놓은 적 없는 죄책감들을 뒤적였다.

잠은 죽음에서 파생된 말이라고 생각했다.


2023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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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스는 맨홀 2023-07-20 14: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무지개 보기 힘들었는데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