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인데도 주말 같지 않은 건 나이 탓일까. 아니면 평일 주말 경계 없이 하는 일의 스타일 때문일까. 이미 오래전에 주말에도 주말 같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어릴 때 주말은 그야말로 주말이었다. 아버지가 일찍 퇴근하고 오시는 걸 기다리는 시간도 즐거웠고, 주말에는 평일보다 좀 더 맛있는 음식으로 저녁을 먹었다. 요컨대 새로 구입한 전기프라이팬으로 고기를 구워서 마당의 평상에서 밥을 먹었다. 그러면 옆 집에서도 고기냄새에 이끌려 나와서 다 같이 앉아서 먹기도 했다. 주말이라 다 같이 평상에 앉아서 고기를 구워 밥을 먹으며 어른들은 술잔도 기울였다.


마당에서 밥을 먹으면 마당의 주인이었던 깜순이도 신이 나서 마당을 여기저기 분주하게 뛰어다녔다. 밤이 깊어지면 옆 집 아주머니가 해주는 귀신 이야기에 몸 둘 바를 모르기도 했다. 웍! 하는 소리에 우리는 꺄악 하는 소리를 내고 벌벌 떨었다. 주말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평상의 양 끝으로 모기향을 피웠다. 모기향이 타들어가는 냄새는 이상하지만 좋았다. 모기향 하나가 다 꺼져갈 때면 관아, 모기향, 하면 내가 알아서 하나를 더 불 붙였다.


분명 방학이라 평일 주말 개념이 없을 텐데도 주말에는 주말 만의 분위기가 집 안에 가득 있었다. 밤공기도 주말이라 달라 보였다. 주말에는 주말에만 하는 티브이 프로그램을 보는 재미도 있었다. 여름이니까 주말 저녁에는 특집 공포물이 나왔다. 더울 텐데도 이불을 코밑까지 끌어당겨 티브이 화면 가득 펼쳐지는 귀신들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일요일 오후 2시가 지나면서 슬슬 주말이 지나간다는 생각에 남은 일요일 오후를 더 열심히 놀았다.


요즘 아이들은 어떨까. 주말이 주말 같지 않을까 아니면 내가 어렸을 때처럼 주말 만의 기분을 만끽할까. 주말이 주말 같지 않은 요즘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건 요즘에도 일요일 오후 2시가 지나면 이상하지만 허 한 기분이 든다. 주말에도 주말 같은 기분이 들지 않았던 때는 여행이나 서울에 놀러 갔을 때였다. 예전에는 일 년에 두 번씩 서울에 갔다. 백남준 아트 센터에 가기 위해 나는 상경을 하여 며칠씩 머물다 오곤 했다. 그럴 때 주말이 껴도 주말 같지는 않았다. 집에서 보내는 주말과 다르게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대학교 때는 신림동에 있는 대학교에 다니는 친구가 신림동 순대타운에서 알바를 하고 있어서 낮동안 돌아다니다가 저녁에 친구 알바하는 곳에서 일을 도와줬다. 일 마치고 사장님에게 얻은 순대와 고기로 친구와 새벽까지 술을 마셨다. 친구는 해병대 입대를 앞두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친구는 낮에는 신림동 분식집에서 알바를 하고 저녁에는 순대타운에서 알바를 했다. 새벽까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몰라도 오랜만에 만나서인지 신나게 이야기를 했다.


우리는 잠이 와서 혜화동에 있는 서울대학병원 로비에서 잠을 잤다. 잠에서 일어나 보니 친구는 없고 나는 환자 가족인 양 어물쩍 병원에서 세수를 하고 부천에 있는 작은 이모댁으로 가서 샤워를 하고 부족한 잠을 잤다. 이모는 나에게 작은 딸냄 방에서 자라고 했다. 당시 이모의 아파트는 60평인가 어리어리해서 방도 더 있는데 작은 딸냄 방에서 자라는 것이다. 이모에게는 딸만 둘인데 침대가 너무 깨끗해서 마구 어지럽히며 잠들기 미안하네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대로 뻗어서 잠들었다.


또 하루는 친구와 밤새 술을 마시고 첫 지하철을 타고 1호선을 타고 끝까지 가면서 잠을 잤다. 어느 날은 지옥철을 보여준다며 이른 오전에, 가장 바글바글한 시기에 친구는 나를 지하철에 태웠다. 사람을 구경하는 것은 언제나 재미있다. 하하 죽는 줄 알았다. 사람에게 끼여서 밀려 지하철에 올라탔다. 친구는 적응이 되었는지 그 속에서 잘도 버티고 서서 한 손으로 문고본 책을 읽었다. 서 서울에는 역시 능력자들이 많구나. 아라한 장풍대작전이 그저 나온 영화가 아닌게벼.


주말이어도 주말인지도 모르게 돌아다녔다. 어떤 해에는 과천에 갔다. 주말이었다. 주말에만 경마장이 열리기 때문이다. 경마장은 대단했다. 입구부터 출제 예상 문제집을 팔고 그날 달리는 말도 미리 구경할 수 있었다. 본다고 나는 알 수 없었지만 사람들은 모여들어 말들의 상태를 살폈다. 돈을 거는 방식이 세 가진가, 그렇게 있었다. 단승식, 복승식 또 뭐 있는데, 아무튼 가장 기본 액수로 걸고 경기장 안으로 들어갔는데 우와 콘서트장은 저리 가라였다. 어마어마한 인구가 빼곡하게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경마가 시작되고 말들이 골인 지점으로 들어올 때는 사람들의 어우우 하는 소리가 우뢰처럼 들렸다. 사람구경은 역시 재미있다.


그날 경마장을 나와서 미술관과 동물원을 구경했다. 춘희의 그 오오오오오 맛있어 하는 영화, 미술관 옆 동물원을 재미있게 봐서 동물원과 미술관을 다 갔다. 그때가 오월의 나른한 오후였는데 동물원의 동물들이 죄다 낮잠을 자느라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역동적인 모습을 딱 본 게 하마였다. 하마는 낮잠을 자지 않고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우리 쪽으로 엉덩이를 돌리더니 똥을 엄청나게 싸질렀다. 하마는 똥을 싸지르면서 꼬리를 모터 달아 놓은 것처럼 흔들어 재꼈다. 무엇보다, 무엇보다 똥색이 녹색이었다. 초 역동적이었다.


신기했던 건 낮잠 자는 표범 우리 밖에 고양이가 배를 보이며 누워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개미핥기 가까이서 본 게 동물원을 돌아다녀서 본 게 다였다. 나와서 점심을 사 먹고 미술관에서 반나절을 보냈다. 미술품이든, 사진이든, 조각품이든 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지 모른다. 백남준 아트도 그렇다. 뭐 알지도 못하는데 나는 백남준의 세계에 깊게 빠졌었다. 주말에 서울에 올라갈 수 없으니 방학에 몰아서 가곤 했고, 대학교 졸업 후 몇 년 동안 그런 일들이 계속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칼로 두부를 싹둑 자르듯 뚝 끊어졌다. 그래서 그런지 주말이라는 기분도, 주말이 되었지만 칼로 잘려 나가 버린 것 같다. 라디오를 들으니 어떤 집에서는 주말마다 아빠가 아이들을 데리고 주말 캠핑을 간다고 했다. 그러면 아이들은 주말을 몹시도 기다리지 않을까. 아이 때에는 집 거실에 텐트를 쳐놔도 마치 우리만의 아지트에 온 것 같아서 재미있는데 캠핑을 가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주말이 주말 같지 않게 느껴지는 건 날씨 탓이다. 날씨 때문이야. 날씨가 그래서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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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단편 ‘치즈 케이크 모양을 한 나의 가난’을 보면 주인공은 아내와 결혼을 하고 아주 저렴한 가격에 단독주택에 입주하게 되어서 기뻤다. 단독주택에 방도 몇 개나 있고 비록 작지만 마당도 있어서 고양이도 키울 수 있어서 좋았다. 하지만 단독주택의 집세가 이렇게 저렴한 것은 다 이유가 있어서다.


치즈케이크처럼 생긴 주택 양옆으로 철길이 나 있고 하루에도 수시로 지하철이 지나갔으며 시끄러워서 기차가 지날 때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양옆으로 동시에 기차가 지나갈 때면 식탁이며 집이 온통 덜덜거렸다. 그런데 기네스북에 나올 만큼 가난했던 치즈케이크를 닮은 그 집에 살 때가 행복했다고 한다.


소설이라고 하지만 하루키 본인의 이야기로 사소설에 가깝다. 치즈 케이크를 닮은 철길 사이의 주택은 구글로 검색을 하면 하루키가 신혼을 보냈던 그 집이 나온다. 츄오센과 고쿠분지 사이의 삼각형 토지에 있는 집이다. 아니 집이었다. 소설 속에서 고풍스러운 집이라고 했는데 정말 그렇게 보였다. 현재는 현대식 건물이 들어섰다.


소설 속에서 하루키는 이부자리와 옷가지, 식기, 전기스탠드, 몇 권의 책 그리고 고양이 한 마리가 재산의 전부였다. 그만큼 가난했다. 돈이 없으면 없는 대로 인생은 지극히 간단해진다. 겨울에 해가 지면 하루키는 아내와 고양이를 안고 이부자리 속으로 들어갔고 아침에 나오면 부엌의 싱크대가 얼어붙어 있었다.


그렇지만 가난이라는 불행 속에서도 봄이 오면 근사해져서 세 명(고양이 포함)이 나른한 봄볕에 작정하며 얼굴을 내밀었다. 그리고 하루키는 그 당시를, 우리는 젊고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었고 햇볕은 공짜였다.라고 했다.


이런 모습을 상상하면 무라카미 라디오에도 나왔던 ‘look for the silver lining’이 생각난다. 쳇 베이커 버전도 있는데 물에 불린 찰흙을 만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오늘은 쳇 베이커 버전이 아닌 모던 포크 콰르텟 버전을 듣자. 신나고 흥겹다. 음악의 다양함과 질에 대해서 새삼 놀라게 된다.


노래는 접시를 닦는 인생이라도 행복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당신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접시와 쟁반에서 빛이 날 때까지 당신을 하루하루를 갈고닦을 것이라고 한다. 정말 멋진 '시'다. 비록 치즈 케이크 모양처럼 가난할지라도 오전에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 서니사이드업을 만들면서 들으면 좋을 노래다.



MFQ - Look For The Silver Lining https://youtu.be/wNfRa6wKaQ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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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자동차 기름값이 거의 1800원대가 되었다. 5월에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 화가 나니까 화를 낸다고’라는 글에서, 넷플 시리즈 ‘성난 사람들 비프’를 이야기하면서 8월 이후에 기름 값이 올라 더 분노를 배설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이라고 예고했었다. 나 같은 하찮은 인간도 이렇게 앞일이 보이는데 전문가들의 눈에는 얼마나 답답한 미래가 보일까. https://brunch.co.kr/@drillmasteer/3726#comments


라면 값 50원 내려가고 모든 것이 다 올랐다. 그러다 보니 무인 밀키트 파는 곳이나 무인 아이스크림 점에서 도둑질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우리는 외국과는 달리 카페에서 노트북과 휴대전화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화장실에 다녀와도 아무렇지 않은 그런 나라다. 그런데 길거리에 있는 이삿짐도 그냥 들고 가 버리는 사람들이 늘어난 나라가 되었다.


어제는 식당주인을 성폭행하려다 죽여 버린 60대에게 징역 30년이 선고됐다고 한다. 법은 어째서 일반인들의 도덕적 관점과 전혀 달리 판결이 되는 걸까. 우리나라는 대 범죄자들이 형을 살고 있는 청송 교도소라고 있지만 외국처럼 들어가면 벌벌 떠는 그런 교도소는 아직 없다. 구치소는 어떤 재소자에게는 오히려 위험에서 멀어져 있고 밥도 잘 나오고 편하게 지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내가 구치소에서 근무를 2년 해봐서 좀 안다.


지난번에 이야기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 화가 나니까 화를 낸다고’에서 말한 것처럼 현대인은 분노가 조금씩 쌓여 간다. 자신이 알게 모르게 조금씩, 야금야금 쌓여 가다가 곪는다. 곪을 대로 곪고 곯아 있다가 이상한 곳에서 터져 버린다.


분노는 주로 가까이 있는, 자주 만나는 사람들에게 쌓여 간다. 무시를 당한다거나, 따돌린다거나, 나의 부모를 욕한다거나, 나의 결점을 가지고 재미있어한다거나. 점점 분노가 쌓여간다. 그러다가 참지 못하고 터져 버리는데 분노하는 사람에게 터지는 게 아니라 아무 상관없는 불특정 다수에게 분노를 표출한다.


사람들은 분노를 참지 않게 되었다. 화가 나면 한 번 참을 법도 한데 그대로 화를 내뱉는다. 어느 날 여중생이 아버지를 살해하는 일이 일어났다. 아버지는 공부는 하지 않고 방에만 틀어박혀 게임만 하는 중학생인 딸을 경멸했다. 딸은 학교에서 몸무게가 많이 나간다는 이유로 따돌림당하고 폭행까지 당했다. 그 사진을 찍혀서 아이들에게 내내 놀림을 받았다. 그럴 바에는 학교에 가지 않는 편이 낫다. 하지만 집에 아버지만 들어오면 학교에서 아이들이 괴롭히는 것보다 더 심한 말을 한다. 미쳐버릴 것만 같다. 다 죽여버리고 싶다. 다 죽여버리고 나도 죽어버리면 그만이다. 이런 세상에서 이렇게 살아서 뭐 하냐.



곡비


이 영화 곡비 본 사람이 있을까. 대만 좀비 공포 영화로 수위가 상당하다. 좀비라고 하기에는 뭣 한 것이,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나서 좀비처럼 사람을 물어뜯지만 말도 하고 정신도 제대로 박혀있다.


앨빈 바이러스라고 하는 바이러스는 뇌의 변연계를 변이 시킨다. 고로 인간이 교육과 훈련으로 잠재우고 있던 본능이 억제가 되지 않아서 분노가 들끓게 되고 폭력과 성적 욕구를 참지 못하게 된다.


여자친구와 함께 살고 있는 주인공은 집에서 보이는 다른 집 옥상에 멍하게 서 있는 노인을 보게 된다. 노인을 불러서 돌아보는데 상태가 심각해 보였다.


여자친구를 오토바이로 지하철까지 태워주고 늘 들리는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아까 그 노인이 들어왔다. 그러더니 갑자기 음식을 튀기는 뜨거운 기름을 종업원 얼굴에 붓더니 녹아내리는 얼굴을 뜯어서 노인이 먹었다.


그때부터 점점 바이러스를 퍼져나갔다. 앨빈 바이러스는 인간이 가지는 극도의 분노를 드러낸다. 그저 폭력성과 성적 욕망으로 물들어가는 자신을 알게 되기에 입은 웃고 있지만 눈에서는 눈물이 흐른다. 눈물이 말라갈 때 눈동자가 검게 변하면서 바이러스에 점령당한다.


분노에 찬 감염자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지하철에서 옆에 있는 사람의 옆구리를 웃으면서 쑤신다. 다른 감염자는 물어뜯고 또 다른 감염자는 그저 성적 욕망을 풀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장기가 쏟아져 내리는 등 물어뜯어 씹고 즐기고 맛보는 적나라한 모습들이 나타난다. 우산으로 눈을 쑤시고 또 그 눈에 욕망을 풀기도 한다.


인간에게 분노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이 바이러스는 침투한다. 짐은 캣을 지하철에 바래다주고 이 사달이 난 세상에서 캣을 찾으러 가려고 하다가 짐도 바이러스에 걸린다. 마지막 철장을 사이에 두고 짐은 캣을 사랑한다고 말하는데 바이러스에 물든 짐의 사랑은 캣의 가죽을 벗겨 먹어 버리고 싶은 게 짐의 사랑인 것이다.


요즘 분노를 참지 못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그저 분노를 표출하고 싶은 것이다. 여자고 남자고, 늙은 사람이고 대상도 모호하다. 그저 칼을 휘두르는 것이다. 칼을 휘두르는데 몽둥이로 범인을 때려잡지도 못한다. 정당방위도 형성이 안 된다.


그래서 이 영화 끝에 가서 어떻게 될까. 감독은 캐나다 사람인데 대만에 오래 거주하다 보니 이런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었다고 한다. 감독상부터 여러 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만큼 꽤나 여러모로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 ‘곡비’였다.  https://youtu.be/t4vSwRinxIs


이 영화를 보면 지금 분노를 참지 못하고 표출하는 사람들의 모습처럼 보인다. 이런 분노가 한 번 이뤄지면, 그 분노를 표출한 사람에게 칼에 찔려 죽음에 이르렀어도 이 분노가 미디어를 타고 퍼지게 되면 모방범죄가 나타나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나는 분노에 어떨까. 이렇게 주절주절 말을 하고 있지만 나는 분노가 없을까. 나 역시 분노에 취약하다. 분노가 확 올라올 때가 있다. 나 같은 인간이라고 해서 분노가 없을 수 없다. 아니 나 같은 인간이기에 늘 분노가 차 있다. 이러다가 나도 언제 어느 순간에 한 번 터질 수도 있다. 나는 누군가와 싸움을 하는 게 너무 힘들어하는 축에 속하는 사람이다. 싸운다고 소리를 지르고 에너지를 낭비하는 게 너무 싫다. 그러다 보니 어지간한 안 좋은 소리를 들어도 그냥 꾹 참고 넘어가는 편이다. 이런 나 같은 인간이 참다 참다 어느 순간 터지게 되면 분노가 폭발할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 매일매일 쌓이는 분노를 배출하는 방법은 매일 조깅을 하고, 이렇게 매일매일 조금씩 글을 쓰는 것이다. 글을 쓰면서 조금씩 쌓인 분노를 배설하듯 배출해버리고 만다. 그러다 보니 매일 쓰는 글의 분량이 많다.


정부는 살기가 편해졌고 마음껏 다니라고 하지만 길거리에 장갑차가 등장하는 시기까지 와 버렸다. 살기가 편해졌는데 사람들의 분노는 더 늘어났고 깊어졌다. 분노해야 할 대상은 분명히 있다. 명백하게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는 분노해야 할 대상에는 분노하지 않는다. 그저 불특정다수에게 나의 분노를 표출할 뿐이다. 그게 무섭다는 것이고, 그 대상이 내가 될까 봐 불안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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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소설을 쓰고 있지만


하루키의 에세이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의 챕터 중에 ‘일단 소설을 쓰고 있지만’라는 챕터가 있다.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의 겉표지를 보면 사자가 채소를 먹고 있다. 사자 앞에는 얼룩말과 여우가 ‘사자가 채소를 먹네?’ 같은 표정?으로 있다.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라니. 그래서 그런지 표지의 삽화를 보면 사자가 말랐다. 역시 채식주의자 하루키 사마.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초식동물은 대부분 덩치가 거대하다. 코끼리, 하마, 기린 같은 동물은 사자의 몇 배에 이른다. 또 초식동물은 눈이 얼굴의 옆에 붙어있고 육식동물은 인간처럼 얼굴의 앞에 붙어있다. 그래서 사실 이 에세이의 표지 그림을 보고 유추해 볼 수 있는 사실은 사자가 계속 마르기 때문에 채식을 하기로 결심을 했을지도 모른다. 초식동물은 전부 거대하니까. 사자도 빼빼 마르면 우습게 보이니까.


이 에세이의 ‘일단 소설을 쓰고 있지만’의 챕터 내용은 하루키의 넋두리 같은 것이다. 삼십 년 넘게 소설을 쓰고 있지만 작가들과의 교류가 없다던가, 즉 문학에 관련된 작가들과는 교류가 없고, 문단의 모임에도 나가지 않고, 비평가와 그럭저럭 화기애애하게 환담을 나누고 헤어졌는데 하루키를 씹어대는 비평을 했다 던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야기들이다.


지난번에도 이야기를 했지만 소설가를 언젠가부터 ‘작가님’이라고 부르게 된 걸까? 옛날에는 그러지 않았다고 하루키는 말한다. 예전에 언제였던가 김영하가 자신을 소개할 때 소설가 김영하입니다,라고 하는 것 같았는데. 저는 작가 누구누구입니다, 보다 저는 소설가 누구누구입니다, 가 훨씬 정체성이라든가 더 나아 보이는데.


그림 그리는 화가도 작가님, 사진도 사진작가님, 공예품 만드는 사람도 작가님이다. 하루키도 ‘채소가게님’ ‘생선가게님’ 같은 느낌이라고 했다. 가수도 가수라고 부르는 게 제일 좋은 거 같은데 가수보다는 아티스트, 싱어송라이터 같은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 가수 = 노래 부르는 사람, 제일 좋은 거 같은데 가수를 가수라 하는 게 어감이 뭔가 이상한가.


요리사 박찬일도 셰프 같은 명칭보다는 자신은 요리사로 불리기를 바란다고 했는데, 요리사가 요리하는 사람에게 제일 딱 인 명칭 같다. 그런데 또 생각해 보면 음악가에게는 작가라는 호칭이 붙지 않는다. 아마 배나 비행기에는 이름이 붙지만 버스나 택시에는 이름이 붙지 않는 것과 비슷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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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 온 더 쇼우의 다무라 카프카 녀석은 오시마 상이 마련해 준 숲 속의 조그만 산장에서 홀로 며칠을 지낸다. 그때 군인 두 명을 만난다. 다무라 녀석은 홀로 지내면서 자신을 달래기 위해 라디오 헤드의 kid A 앨범을 듣는다.


15살이 듣기에는 무척이나 까다롭고 어려울 수 있다고 생각이 들다가도 다무라 녀석은 보통의 15세가 아니다. 외적으로는 고등학생정도로 보이며 터프한 소년에, 아버지를 저주하고 있으며 가출을 위해 손목시계 하나까지 철저하게 계산하는 녀석이다. 친구도 없고 운동을 좋아하며 외롭지만 고독을 보내는 방법을 안다.


키드 에이 앨범은 모든 노래가 좋다. 키드 에이는 연주도 마치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들린다. 외계의 한 지점에 교신을 하는 듯한 음악처럼 들리기도 한다.


인터뷰집 ‘작가란 무엇인가’의 하루키 편을 보면, 라디오 헤드가 kid A 앨범에서 자신을 언급해서 기분이 좋다고 인터뷰를 한다. 라디오 헤드는, 그러니까 톰 요크는 키드 에이를 기점으로 음악이 철학이 되었다. 아주 기묘한 일이지만 키드 에이 이후 나온 ‘데이 드리밍’의 뮤직비디오는 마치 하루키의 소설을 읽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해변의 카프카와 라디오 헤드의 닮은 점이라면 프랑수아 트뤼포의 유연한 호기심에 가득 찬, 구심적이면서도 집요한 정신이 깃들여 있다. 그리고 장 자크 루소의 울타리와 안톤 체호프의 자립적인 개념의 필연성, 헤겔의 자기의식, 앙리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 헤테로(이형접합자), 티에스 엘리엇이 말하는 공허한 인간들, 소포플레스의 훌륭한 희곡 ‘일렉트라’의 이야기와 아리스토파네스와 괴테가 말하는 세계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하루키는 해변의 카프카를 태엽 감는 새보다 더 복잡하다고 언급했다. 카프카 온 더 쇼우는 인간의 관계와 잃어버린 것에 대한 것을 깊게 고찰하는데 라디오 헤드의 키드 에이 역시 그렇다.


엑시트 뮤직으로 시작해서 블랙스타를 거쳐 키드 에이와 네셔널 엔썸을 지나 이디오 테크를 접합하고 나면 모닝 벨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저 멀리 두 개의 달을 볼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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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오장원 2023-08-13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월이 흐르고 흐를수록 더 빛날 앨범이지요.

교관 2023-08-14 11:38   좋아요 0 | URL
정말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고 날이 갈수록 더 좋아집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