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오코가 붉은 피 같은 존재라면 미도리는 이름처럼 대책 없는 녹음의 싱그러운 존재다. 키즈키의 죽음 후 파도가 몰아치듯 스무 살이 되어 버린 와타나베와 나오코는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목적지도, 결말도 없이 걷는다. 영혼 없이 어떤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이렇다 할 마음을 내보이지도 못했는데 나오코는 요양소에 들어가 버리고 이것이 방황인지 먼지의 흐름인지도 모른 채 허무를 삼킨 채 하루하루를 보내는 와타나베 앞에 청량감 같은 미도리가 나타난다.


감독인 트란 안 홍의 마지막 영화를 제외하고는 다 본 것 같다. 트란 안 홍의 영화를 감돌고 있는 색채를 좋아한다. 그의 영화 기저에 깔린 깊고도 밝은 우울감이 좋다. ‘씨클로’에서도 ‘나는 비와 함께 간다’에서도 절망을 넘어서는 우울함에 정신은 녹아버리고 몸은 산산이 부서지는 경험을 했다. 그 사이에 흐르는 필름 카메라에서나 볼 법한 색감이 우울함에 번지는 물감처럼 흐릿하다.


와타나베와 나오코의 닿을 수 없는 붉은 우울을 정화시키는 것은 맑고 투명한 미도리다. 하지만 우울이란 밝음 속에 숨어 있는 우울이 더 단단하고 크고 위험하다. 물이 너무 맑으면 물고기가 살지 못한다. 미도리는 와타나베만 곁에 있어주면 된다. 약속을 해 놓고도 만나러 나오지 않아도 남는 게 시간이라 괜찮아, 자산 같은 시간에 책이나 읽은 돼(이런 대사는 실은 없지만 하루키의 소설 속 주인공들의 스타일을 떠올렸을 때),라고 해버리는 와타나베를 미도리는 좋아한다. 미도리는 그게 사랑이다. 


하루키의 문체를 영화의 문채로 옮기는 작업은 어렵기 때문에 많은 영화감독이 포기를 했다. 아마 39년은 더 인기가 있을 ‘노르웨이 숲‘을 영화로 만들기로 했을 때 트란 안 홍 역시 고민이었을 것이다. 영화 ‘토니 타키타니‘에서 하루키의 문체를 영상으로 뿜어내야 하기에 한 공간에서 세트를 전부 바꿔가며 촬영을 했고 음악은 류이치 사카모토, 미야자와 리에가 쓰러질 듯 말 듯 멋지게 에이코와 하사코를 다 표현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좋은 하루키의 영화는 이창동의 ‘버닝’이다. 그건 정말 하루키의 소설을 읽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하루키도 인터뷰에서 이창동 감독을 언급했다. 


노르웨이의 숲에 나오코와 레이코가 요양하는 시설에 들어가 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물론 시설에 들어가서 요양을 하는 사람들의 수에 비해 엄청난 시설과 스태프가 훨씬 많기에 돈이 많이 들겠지. 그렇지만 그곳에 들어간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의 왜곡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왜곡된 마음을 바로잡으려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왜곡을 받아들이려 생활한다. 내게 정말 필요한 시설인 것이다. 그리고 페페를 기르는 카페의 아가씨와 환자 같은 이상한 닥터와 이야기도 나누고 싶고, 나오코가 와타나베의 은밀한 곳을 만져 주었던 강렬한 나무의 냄새가 있던 숲에도 들어가 보고 싶다. 거기서 비틀스의 '노르웨이 숲'을 제대로 듣고 싶다. 왜곡된 마음이지만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다.  


‘노르웨이 숲’ 속 미도리는 현실감은 제로다. 소설 속에서나 나올 법한 인물이다. 그래서 더더욱 사랑스럽다. 붉은 피로 온통 세상이 덮이려 할 때 미도리 하나 만의 존재로도 와타나베는 살아갈만하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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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이른 감이 있지만 곧 스타벅스에서는 캐럴이 흘러나오고 거리의 백화점과 커플링 판매하는 곳에서는 크리스마스 시즌을 알리는 분위기로 덮칠 것이다. 슬슬 마음속으로 크리스마스를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어린 시절에도 크리스마스에 대한 추억은 특별하게 없다. 그런데 뚜렷하게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다. 어쩌다 보니 초등학교 3, 4학년부터인지 꽤 음악을 집중적으로 들었다. 그 당시 클럽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그림을 그리고 그것을 배경으로 들고 동화 같은 이야기를 하는 클럽이었다. 기억으로는 그렇다. 실제로 그런 클럽이 초등학교에 있었는지 의문이지만 내 기억으로는 그렇다. 그때의 사진들도 있고.


그 담당 선생님이 음악을 듣고 있었는데 비틀스, 아바, 카펜터즈 같은 팝을 늘 들었다. 클럽활동이 끝났는데도 선생님은 앉아서 늘 음악을 들었고 당연하게도 옆에서 그림을 그리며 같이 들었다. 선생님이 가는 레코드 가게를 따라가기도 했다. 또 길거리를 걷다가 스피커에서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면 가지 않고 끝까지 들었다.

 

6학년 때 아버지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미니카세트와 헤드셋을 선물로 사주었다. 당시 가난이 쓰나미처럼 밀려왔던 단칸방에서 방 두 개짜리 집으로 겨우 이사를 갔었는데 아버지는 나를 위해 없는 돈을 긁어 모아 카세트 플레이어를 선물로 사 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주위나 모친에게 핀잔을 들을 법한데 모친도 눈감아 준 걸로 보면 아버지는 나에게 그걸 꼭 사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 카세트 플레이어로 한 앨범을 지치지 않고 들었던 게 아바의 치키티타 앨범인 것 같다. 그리고 겨울이라 빙 크로스비의 캐럴 앨범을 닳고 닳도록 들었다. 겨우내 헤드셋을 끼고 거기서 흘러나오는 빙 크로스비의 캐럴을 듣는 건 무척이나 행복했다. 음악을 듣는 내내 따뜻했고 부드러웠고 안온했던 기억이 있다. 물론 옳은 기억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나의 기억은 그러기를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중학교에 올라가 음악감상실에 들락거리며 본격적으로 풍부한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겨울에는 크리스마스 시즌 송이 이렇게나 좋았다니 하며 들었다. 음악이라는 게 묘해서 어떤 음악은 내 의지와 무관하게 몸을 이렇게나 흔들어 버린다. 


하루키 씨가 무라카미 라디오에서 크리스마스 시즌 송 방송을 했다.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았던 하루키 씨가 70세가 되면서부터는 어쩐지 모든 것을 옆에 내려놓은 후 동네의 할아버지 같은 풍모로 독자들에게 친근하게 다가왔다. 그 시작이 메일로 질문을 받고 답을 해주는 것이었는데, 그것이 발전을 해버려 '무라카미 라디오'의 에세이가 현실 세계에서 그대로 라디오 방송으로 모습을 갖추었다. 그리고 특별 편으로 한 두 번 방송을 하려고 했던 무라카미 라디오는 계속 이어져 이제는 꽤나 라디오의 풍모를 지녔고 하루키 씨 조차 디제이가 되어서 독자들을 만나고 있다. 하루키 씨는 자신이 좋아하는 크리스마스 시즌 송을 가지고 라디오를 진행했다. 하루키 씨가 직접 영차영차 자신이 소장하는 소중한 앨범을 들고 스튜디오에서 애정 하는 크리스마스 노래를 틀었다. 그리고 간략하게 노래마다 소감을 덧붙였다. 링크는 중국 유튜브인지, 일반적인 유튜브랑 좀 다르지만 이 곳에 들어가면 하루키의 무라카미 라디오를 많이 들을 수 있다.  https://hoy.kr/54NLl


하루키는 “슈퍼든지 몰이든지 백화점이든지 어디나 새해까지 캐럴을 듣게 되는 것은 확실히 피곤한 일입니다. 그 마음 저도 잘 압니다. 하지만 오늘 무라카미 라디오는 어디서든 들을 수 있는 그런 캐럴은 최대한 걸지 않을 예정이니 안심하세요. 55분 동안 제대로 음악을 즐겨 주세요.” 라며 짧은 음악에 대한 견해와 함께 크리스마스 송을 들려준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앨범을 들고 방송국으로 와서 말이다.


이하 음악을 소개하는 하루키의 육성을 옮겨 보았다.


https://youtu.be/SubtQyaw1iM"첫 곡으로 리사 오노의 윈터 원더랜드. 그러고 보니 보사노바 풍으로 캐럴을 부른 것은 별로 보이지 않네요. 남미와 크리스마스의 조합이 없어서 일까요? 그런데 얼마 전에 적도의 나라 에콰도르에 다녀왔는데 크리스마스 분위기 준비를 한창 하고 있었는데 말이죠. 보사노바와 크리스마스 캐럴을 음악적으로 꽤 가깝다고 생각합니다만, 어떠신가요?"


https://youtu.be/g8zPwWvwv5U"두 번째 곡으로 찰스 브라운의 플리즈 컴 홈 포 크리스마스. 꽤 좋은 곡입니다. 흑인 소울 가수인 찰스 브라운이 1960년에 녹음한 크리스마스 송이랍니다. 이글스와 본 조비도 다시 불렀답니다."


https://youtu.be/w9QLn7gM-hY"세 번째 곡으로 빙 크로스비의 화이트 크리스마스. 이 레코드 정말 잘 듣고 있어요. 그래서 빙 크로스비의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들을 때마다 그 스테레오 장비의 냄새를 기억하곤 한답니다."


https://youtu.be/YnvzsZCJjZ0"네 번째 곡으로 콜비 카레이의 크리스마스 인 더 샌드. 는 어디서 인가, 열대 해변에서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는 노래입니다. 물론 산타클로스 복장도 수영복이네요."


https://youtu.be/pm1t0BQkVXM"다섯 번째 곡으로 바비 더 포트의 화이트 크리스마스. 이 그룹은 이전에 로버트 케네디가 트로그스의 야생마를 노래하면 어떻게 되는가를 노래로 부르기도 했는데 이 노래도 상당히 웃을 수 있는 곡입니다. 그 곡의 후속곡이라고 볼 수 있죠. 덧붙여서 로버트 케네디는 이 레코드가 나온 몇 년 후 대선에 출마했지만, 그 선거 운동 중에 암살되었습니다. 희망의 별 하나가 영원히 사라져 버렸달까요. 그 당시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답니다."


https://youtu.be/1VewU8T8TXs"여섯 번째 곡으로 셰릴 크로우의 화이트 크리스마스. 전 셰릴 크로우를 예전부터 좋아했습니다. 장녀 타입이랄까요. 확고한 성격의 첫째 언니로서 동생들을 돌보며 항상 신경을 쓰며 살고 있는다고 말이죠. 그렇게 열심히 살지 않아도 괜찮아,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그래도 뭔가 열심히 살고 싶어 지게 되고 말죠."



https://youtu.be/aSynDh_K0EE"일곱 번째 곡으로 브라이언 윌슨의 리틀 세인 닉. 작곡자는 브라이언이고요. 뭔가 효이 효이! 하게 가볍게 만들어 버린 것 같은 분위기의 노래지만 잘 들으면 구조가 확고하고 편곡도 센스가 좋은, 그리고 반세기 이상 들어도 전혀 질지 않는 곡입니다. 물론 펫 사운드 이후의 브라이언도 훌륭하지만 초기의 이 가볍게 툭툭 치는 감각도 버리기 어렵습니다."


https://youtu.be/wasvXXVGYuI"여덟 번째 곡으로 더 포 시즌즈의 아이 쏘우 마미 키싱 산타 클로스. 엄마가 산타에게 키스를 했다. 그런데 엄마가 산타와 불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고, 아빠가 산타 분장을 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니 너무 그 부분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세요."


https://youtu.be/E8gmARGvPlI"아홉 번째 곡으로 웸의 라스트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 송하면 이미 정평이 나 있는 곡입니다. 1980년대에 청춘을 보낸 분들은 아마 이곡에 감미롭고 달콤한 추억이 있는 게 아닐까 추측합니다. 어떠신가요."


https://youtu.be/CXNYdd02UgA"열 번째 곡으로 조니 마티스의 왓 어 원더풀 월드. 언젠가 정말 아름다운 세상이 왔으면 좋겠어요. 여러 가지 문제가 있지만 가능한 한 적극적으로 그렇게 생각해 봅니다."


이렇게 하루키의 크리스마스 시즌 송을 들어보았다. 

곧 크리스마스가 볼기짝을 후려갈기듯 가까이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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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단편집 '회전목마의 데드히트'에는 '레더호젠'이라는 단편이 나온다. 레더호젠을 네이버에서 찾아봐도 정확한 해설은 없다. 독일의 전통의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정도다. 멜빵바지처럼 생겼는데 좀 다르다. 그냥 청바지에 멜빵이 붙어 있는 것 같은 독일 전통의상이 레더호젠이라고 한다.

단편 속에서 아내는 독일로 갔다가 독일에서 내부의 무엇인가가 빠져나가버리고 만다. 하루키의 많은 소설에서 주인공이나 주변 인물이 내부의 무엇이 빠져나가 버리고 마는 일이 평범하게 일어나지만 단편소설 '레더호젠'은 사실에 입각하기 때문에 더 흥미롭다.

이 단편집은 하루키가 만난 사람들에게서 주워들은 이야기를 엮어서 낸 소설 같지 않는 소설이라고 앞부분에서 말하기 있지만 이 역시 진짜인지 새빨간 거짓말인지 알 수는 없다. 하루키는 인터뷰를 할 때 어떤 작가를 좋아하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세상에 없는 작가의 이름을 지어내서 말하기도 하는, 참 재미있는 사람이다. 

레더호젠은 꼭 동화 속을 들여다보는 기분이 든다. 하루키의 글에는 동화 속의 인물 같은 비현실적 캐릭터가 많이 등장한다. 양사나이도 그렇고, 난쟁이도, 고양이 고마 녀석도, 키키도, 강치도, 티비피플도, 공기번데기도, 일각수도 그렇고 모두가 동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 같다.

동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라는 생각을 어릴 때 많이 했고 그 생각은 지금도 여전하다. 하지만 어릴 때처럼 입을 야무지게 다물고 반드시 이뤄낼 것처럼 생각하지는 않는다. 

동화나 만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은 대체로 몹시, 아주, 기분 좋게 흥미롭다. 그들이 나와서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입 꼬리가 살바도르 달리의 수염처럼 된다. 서글프지만 하지만 현재, 내 주위에서 동화 속의 주인공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미래소년 코난은 알아도 코난의 이야기는 잘 모른다. 코난의 세계관은 2008년의 디스토피아를 다루고 있지만 그것에 관해서 아는 사람은 내 주위에는 없다. 엄마 찾아 삼만리는 알아도 마르코가 엄마를 찾아 그 어린 몸으로 얼마나 바다를 건너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다행스러운 건 인터넷으로나마 마니아들이 있고, 그들과 공유를 하고 소통을 가진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의 만화 속에는 인어공주가 있었다. 인어공주는 다른 주인공에 비해서 나에게는 아주 흥미로운 주인공이었는데 그건 (호러블 한쪽으로) 이상해서였다. 인어공주에게 시큰둥한 어린이는 나뿐이었을 것이다. 

언어 공주가 예쁘다고 하지만 내 눈에는 '이상하다'였다. 팅커벨이 더 좋았고 각종 엘프가 훨씬 나았다. 물속에서 물고기 꼬리를 달고 헤엄치는 모습은 최악이었다. 마치 작은 차에 휠이 큰 바퀴에 붕붕 소리가 큰 마후라를 달고 달리는 차만큼 비극적이었다.

인어공주는 물고기꼬리보다는 그냥 여자 다리가 훨씬 예쁘고 그 다리로 물속에서 헤엄치는 모습이 어린 나의 눈에는 더 예뻐 보였다. 물고기 꼬리보다 그냥 여자의 다리가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훌쩍 커버려 성인이 되고 조카를 데리고 대형 수족관에 갔을 때에도 어설픈 꼬리를 달고 헤엄치는 인어공주의 모습도 비극이었다.

물고기 꼬리에서 여자 다리로 바뀐다면 수족관은 더 아름다워졌을 것이다. 어린이들도 고등어 몸통 같은 물고기 꼬리보다는 역시 누나의 다리가 예뻐, 언니의 다리가 훨씬 예뻐! 하는 마음이 들지 않을까. 그렇지 않을까.


하지만 시인 김중식의 시에서처럼 세상의 모든 창작과 아름다움은 비극에서 시작된다. 비극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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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치가 빛을 두 배로 발했을 때 그 옆에는 오맹달이 있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를 빨리 펼쳐보고 싶어서 안달 나게 만드는 이유도 하루키의 옆에는, 그러니까 하루키의 에세이에는 늘 안자이 미즈마루 씨의 깜찍한 삽화가 있어서 이기도 했다.


아주 오래전에는 안자인지 인자인지 이거 뭐 이름이 마이클 부블래 같군. 했는데 언젠가부터 하루키만큼 친근해져 버렸다. 안자이 미즈마루 덕분에 하루키의 에세이 출간 소식이 들리면 안달 났던 적도 있었다. 오래전이지만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웃음) 


안자이의 삽화는 점, 선, 면으로 아주 간단하게 이루어져 있지만 하루키를 그려 놓으면 누가 봐도 이건 하루키네, 하게 된다. 부드러우면서 칼날 같다. 덕분에 여름날 안자이의 삽화가 그려진 하루키의 에세이를 읽고 있으면 모기 세 마리가 다리에 붙어 맛있게 피를 쪽쪽 빨아도 모른 채 키득키득하게 된다.


안자이 미즈마루의 본명은 와타나베 노보루다. 그래서 그런지 하루키의 소설 속에는 와타나베 노보루가 느닷없이, 뜬금없이, 기약 없이, 막무가내로 등장한다.


하루키의 글도 좋아하지만 안자이 미즈마루의 삽화를 보기 위해서 읽는 사람도 많이 생겨났다. 안자이 미즈마루의 일러스트는 지극히 단순하지만 그야말로 베스트다. 따라 그리기 정말 좋다. 따라 그리다 보면 재미도 있다.


하루키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유독 안자이 미즈마루의 이야기를 에세이에서 많이 했다. 주로 여자를 좋아한다, 술을 밤새 마시네, 나를 꼬셔서 자꾸 술집으로 데리고 간다며 흉을 보지만 밉지 않은 흉이다. 하루키의 잡문집에는 안자이 미즈마루가 한 평론가와 함께 하루키에 대한 험담 같은 이야기를 한 것도 있는데 읽다 보면 하루키를 슬슬 몰아세우는 게 역시 재미있다.


이런 대 작가들이 농담을 하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우리는 앉아서 엿볼 수 있다는 것이 정말 신기하고 기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안자이 미즈마루 씨가 2014년 3월에 죽고 말았다.


예전부터 내 주위의 사람들, 나의 부모나 친구들의 부모가 늙거나 병들어 죽는 것을 당연히 받아들였지만 내가 좋아하는 작가나 예술가가 예상보다 일찍 죽어버리면 알 수 없는 괴리가 찾아왔다. 이틀은 꽤 음험하게 보낸다. 그들은 나보다 좀 더 오래 살았으면 하는데 왜 자꾸 빨리 죽는가. 나보다 하루 더 살아야 내가 죽을 때까지 그들의 책을 읽고 그림을 볼 텐데.


그러고 보면 하루키는 사반세기 이상 꾸준히 운동을 하고, 그것보다 타고 난 유전자 덕분인지 꾸준하게 집필할 수 있다는 뉘앙스로 인터뷰를 했다. 그래서 조금은 안심이 된다. 일본에는 단편집이 새롭게 나왔으니 이제 한국어 번역본으로도 나오겠지. 언제 나오는가가 문제이지만.


안자이 미즈마루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아 이제 하루키와 미즈마루의 조합을 볼 수 없다는 것만으로도 상심이 찾아왔다. 미즈마루 씨의 삽화를 보고 있으면 한일자의 입이 옆으로 쓱 올라가게 된다. 그건 미즈마루 씨의 힘이다.


슥삭슥삭 그려대는 그의 삽화를 이제는 볼 수 없지만 가끔 그 사람의 삽화가 그려진 하루키의 에세이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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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주인공 이름을 짓는 건 정말 힘든 일인 것 같다. 긴 소설을 쓴다면 주인공의 이름을 남자는 ‘나옥고’이고, 여자 주인공 이름은 ‘하룩희’로 하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하룩희는 하루키에서 딴 것이고 나옥고는 상실의 시대의 나오코에서 땄다.


옥고는 119 구조대원으로 손바닥을 대면 상대방의 일 년 뒤가 보인다. 미술학원 선생님 룩희는 옥고의 누나로 친누나가 아니다. 어린 시절 옥고가 하나뿐인 아버지를 잃고 매일 힘들어할 때 룩희가 옥고를 위로해준다. 옥고는 룩희의 그림 모델이 언제나 되어 준다. 두 사람은 잘 자라서 룩희는 27살, 옥고는 25살이 되었다. 구조대원으로 지내던 중 옥고는 늘 자신을 위로해주는 룩희와 손바닥을 마주 대하고 거기서 일 년 뒤의 룩희가 죽는 모습을 본다.


너무 대 놓고 일드인 ‘4분간의 마리골드’였다. 거기에 나오는 ‘나나오’는 이전의 나나오와는 다른 분위기다. 이전에는 늘 마네킹 같은 모습의 배역이나 인형 같은 연기를 했는데 마리골드에서는 얼굴도 성숙해져 버린 것 같고, 수수한 데다, 연기도 자연스러워졌다. 늘 화가 나 있고 성을 내고 꼬나보고 독이 올라 있는 것 같았는데 마리골드에서는 아주 청순하게 나온다. 그게 어쩐지 너무 자연스러웠다. 나나오가 원래 그런 여자였잖아,라고 하는 것처럼 몹시 잘 어울렸다.


하루키 하니까 마지막에 나온 장편 ‘기사단장 죽이기’에서도 주인공이 화가로 나온다. 초상화만 그리는데 모델을 세워두고 그리는 것이 아니라 대화를 하면서 그 사람에 대해서 조금씩 알아간 뒤 그 모습을 머릿속에 집어넣었다가 초상화로 그린다. 그리고 스냅사진 3장 정도를 받아 두는 정도다. 사실 초상화를 그렇게 입력된 정보만으로 그린다는 건 몹시 힘든 일일지도 모른다. 4분간의 마리골드에서도 나나오는 버스에서 한 번 봤던 학생을 기억해서 그림을 그린다.


천재적으로 인터뷰를 한 트루먼 카포티를 하루키는 왕왕 언급했다. 하루키는 카포티의 인터뷰 스타일을 칭찬했다. 카포티는 소설가로도 유명하지만(티파니에서 아침을) 실은 기자, 인터뷰어로써 더 유명하다.


카포티는 인터뷰를 할 때 녹음이라든가 받아 적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 그저 가만히 상대방의 눈을 보며 위로하듯 이야기를 들을 뿐이다. 그 양이 실로 방대하더라도 카포티는 절대 당황하지 않는다. 인터뷰가 끝나면 기적처럼 머릿속에 있는 것을 실타래를 풀듯 하나씩 꺼내서 기사를 작성한다. 카포티의 기사는 사람들에게 읽히기 위해 태어난 것 같다.


카포티의 장편 ‘인 콜드 블러드’와 단편 소설집 ‘차가운 벽’과 또 다른 한 권(제목이 생각 않남)을 읽었는데 ‘인 콜드 블러드’는 다큐와 신문기사 사회면을 좋아한다면 읽어보라고 하고 싶다. 실제 이야기를 죽 나열하듯 적어 놓아서 사건 현장을 낱낱이 들여다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단편은 10대 때 쓴 소설이라는데 읽기가 버거웠다.


언더그라운드를 펴낼 때 하루키는 100명에 달하는 사람을 인터뷰를 했다. 아마도 그런 경험이 있어서인지 기사단장에서는 주인공은 카포티처럼 인터뷰를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소설에서는 모든 게 가능하니까.



별개의 이야기로 김훈의 '남한산성'이 카포티의 '인 콜드 블러드'를 뛰어넘었다고 생각한다. 남한산성은 마치 김훈이 그 시대, 그 전쟁 통, 그 자리에 서서 그 광경을 눈으로 목격하고 그것을 거짓 없이 그저 죽 열거해 놓은 것처럼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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