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의 신작 '일인칭 단수'를 받고 오늘까지 야금야금 읽었다. '위드 더 비틀스'는 두 번 읽었고 '크림'이나, '시나가와 원숭이'의 고백은 여러 번 읽었다. 이유는 출판되기 전에 답답해서 먼저 번역을 해서 책으로 만들어 봤기에 얼마나 차이가 있나, 해서였다. 겉표지는 이렇게 생겼고 안의 하드커버는 이런 식이다. 하루키의 다이어리도 포인트 사용으로 한 권 받았다. 


좌: 신작 '크림', 우: 우리가 번역한 '크림'


이건 좀 우쭐해지는 말인데, 받자마자 '크림'을 가장 먼저 읽었는데 이거 왜 우리가 번역한 것보다 못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번역가가(그럴리는 없지만) 원작을 읽고 술렁술렁해도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어 버렸다. 아무래도 우리는 처음 번역을 해보는 것이라 여러 번 번역하고 또 번역해서 그런지도 모르는 일이다. '시나가와 원숭이의 고백'을 읽어 보아도 주인공은 원숭이에게 반말을 한다. 내용상 주인공은 인간의 언어를 하는 원숭이에게 조심스러워서 원숭이만큼 격 존칭은 쓰지 않더라도 주인공 역시 원숭이를 조심스럽게 대할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주인공도 원숭이에게 존칭을 쓰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나.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원작보다 영어로 된 소설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을 한 것이니까.



책을 처음부터 읽지 않고 '크림', '시나가와 원숭이의 고백', '일인칭 단수' 순으로 읽었는데 여기까지 읽고 재미있는 것은 주인공이 하루키라고 생각했다. 일인칭 단수 소설의 시작에 주인공은 집에 혼자 있었고 아내는 중국음식을 먹으러 갔다고 나온다. 


위에서 처럼 아내는 혼자서 중국음식을 먹으러 간다. 왜냐하면 주인공은 중국음식을 전혀 먹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보충설명에 중국음식에 들어가는 향신료 때문에 알레르기가 있는 모양이다, 하고 마치 남에게 말하듯 했다. 그리고 아내는 중국음식이 먹고 싶어 지면 중국음식을 못 먹는 주인공 때문에 친한 여자 친구들을 불러내서 먹으러 간다고 했다. 


이쯤 되면 이 주인공은 하루키 자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확실하게 하루키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정도로 어떻게 소설 속 주인공이 하루키 자신이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 이유가 확실한 글이 있는 에세이가 바로 '하루키 일상의 여백'이다. 


이 에세이 집에 이렇게 중국음식을 전혀 먹지 못해서 아내에게 핀잔을 들었던 이야기, 그리고 아내가 몰래 중국음식이 아닌 척하며 하루키에게 먹이려 했지만 실패하고 만 이야기, 그리하여 아내는 중국음식이 먹고플 때는 친구들과 간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에세이의 일상이 이번 일인칭 단수에 고스란히 스며들어가 있다. 책을 다 읽기 전에 세 편의 단편을 읽고 주인공이 하루키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크림이나 시나가와 원숭이의 고백은 초현실적인 이야기로 어딜 봐서도 하루키가 주인공 일리가 없지만 그 글을 번역하면서 주인공이 하루키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https://brunch.co.kr/@drillmasteer/1181


아직 신작이 나오기 전에 '시나가와 원숭이의 고백'의 글을 쓰면서도 '주인공을 하루키라고 하자'라고 표기를 했다. 


그러면서 책을 다 읽어보니 전부 주인공이 하루키 본인이다. 사소설에 가깝다. 가깝다고 말하는 것은 각 소설의 뒷부분으로 갈수록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넘어가려는 경향이 짙기 때문이다. 하루키는 자신의 이야기를 토대로 소설을 썼다. '위드 드 비틀스'를 읽어보면 영화 '45년 후'의 제프 할아범이 자꾸 떠오른다. 매력적인 케이트를 옆에 두고서도 첫사랑을 잊지 못하고 주절주절 이야기하는 모습이 참으로 뚜시뚜시 하고 싶었는데, 하루키도 소설이라는 장치를 빌려 만난 여자들의 이야기를 아낌없이 한다. 


하루키는 아내에 대해서 대체로 함구하고 있지만 일상의 여백을 읽으면 아내 이야기가 많다. 아내가 갑자기 일정을 바꾸자고 하는 바람에 난처했는데 아내가 읽는 책에 빠져서 책에 나오는 곳으로 갑자기 가자고 해서 혼났다는 이야기부터, 아내에게 핀잔을 들은 이야기, 또 자신은 바빠서 취재를 못 가니 사진기사 겸 조사원을 파견하는데 그 사람이 아내였다고 하기도 한다. 아무튼 에세이에서는 위트와 유머가 가득하다. 


일인칭 단수의 '사육제'를 읽어보면 아내는 하루키가 만나는 다른 여자들에 대해서 시큰둥하거나 별 관심 없어 보이지만 영화 '45년 후'에서 매력적인 샬롯 램플링(뜬금없지만 이름 발음이 너무 좋은 것 같다)이 연기하는 케이트가 떠오른다. 능력은 좋아서 하는 일에 대해서 부와 명예를 얻었고 자식도 없어서 둘이서 행복하게 노년을 맞이했는데 철없는 남편 제프는 죽은 첫사랑에 대해서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이야기한다. 하루키는 소설을 빌려 아내를 만나기 이전에 만난 여자와 몸을 탐닉하고 서로 입을 맞추고 사랑스러운 언어를 나눈 이야기를 한다. 아내가 과연 어떻게 받아들일까, 싶다가도 하루키와 함께 사는 사람이니 그 정도쯤이야, 하며 대범하게 넘기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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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속에 나오는 주인공 하지메는 하루키의 모든 소설을 통틀어 가장 찌질하고 상대방을 생각하지 않는 무례하고 철없고 자기 주관적인 주인공이다. 하루키가 가지고 있는 모든 문학적인 아름다움으로 포장을 해도 하지메는 하루키 세계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 가장 찌질한 인간이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나오는 찌질한 주인공들과 다를 바 없다. 일상이지만 전혀 일상 같지 않고 도처에 잘 볼 수 없는 일탈을 긁어모아 만든 캐릭터, 어떤 사람에게도 꺼내지 못하는 말들, 절대 말해서는 안 되는 터부 같은 마음을 구어를 통해서 배설해버리는 찌질한 인간. 

무척 자신을 포장하지만 실은 허울뿐이고 그저 자신을 사랑하는 아내에게 변명이나 늘어놓는 그런 사람이 하지메다. 어릴 때 만났던 첫사랑을 잊지 못해 몇십 년을 속에 꿍쳐놓고 있다가 결국 만나서 아내를 만나 딸을 두고 살아온 과정은 잊은 채, 아니 과정은 중요하지 않으니, 나의 과정 속에 있는 내가 사랑하는 나의 아내, 나의 두 딸 모두 버릴 수 있으니 나는 너에게 가야겠다, 라는 식의 인간이 하지메다.

그리고 눈치채고 있는 아내에게 이런저런 허울 좋은 꾸며진 말들로, 물론 자신은 진실되게 이야기를 한다고 하지만 아내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는 말은 어떤 누구도 듣고 싶지 않을 것이다. 

이 소설은 오래 전의 한국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제목이나 내용은 전혀 생각이 나지 않지만 한 장면이 생각난다. 아내의 동생과 사랑을 하게 된 주인공이 어딘가 별장에서 오다가 핸들을 틀어 두 사람은 결국 죽고 만다. 그렇게 두 사람의 사랑이 이루어진다. 소설 속에서 시마모토는 하지메와 단 둘이 떠나는 여행에서 핸들을 돌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 잡힌다. 그리고 그렇게 했더라도 하지메는 받아들이겠노라는 뉘앙스로 말을 한다. 

이 소설은 다른 장편 소설에 비해서 하루키가 비교적 짧은 시간에 적은 것이라 한다. 하루키는 어째서 이런 소설을 적었을까.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와 ‘노르웨이 숲’ 이후에 자신은 이런 류의 소설과 맞지 않기 때문에 다시는 이런 류, 그러니까 리얼리티의 소설은 적지 않겠노라고 했다. 그리하여 나온 소설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나 ‘일큐팔사‘나 ‘스푸트니크의 연인’이나 ‘색체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그리고 ‘해변의 카프카’ 이후 마지막 장편 소설까지 대체로 초현실 소설이었다. 

하루키가 뭔 정신으로 이런 찌질하고 구질구질하고 보잘것없는 하지메의 이야기를 적었을까. 그것도 긴 장편을 집필하는 도중에 적은 이 이야기는 하루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아마도 하루키도 인간이라 자식 없이 긴 시간 동안 아내와 단둘이 생활하는 것에 약간은 염증을 느껴서 그랬을까. 그런 자신이 싫어서 소설을 빌려 자신을 꾸짖는 이야기를 하고 배설하듯 뱉어버린 것일까. 

개인적으로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은 하루키에게 요물 같은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식으로든 잘 포장된 홍상수의 영화다. 하지만 이런 찌질한 주인공에게 욕을 퍼부으면서도 빠져드는 건 나 역시 하지메와 다를 바 없는 찌질하고 못난 인간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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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가와 원숭이의 고백은 하루키 신작 단편집 '1인칭 단수'에 실린 단편으로 오래전 '도쿄 기담집'이라는 단편집에 실린 '시나가와 원숭이'라는 단편의 후속 편 격이다. 아직 한국에 나오지 않은 '시나가와 원숭이의 고백'을 번역하면서 느끼게 된 것이 있다. 1편 격인 도쿄 기담집에 실린 '시나가와 원숭이'를 읽어보면 원숭이는 인간의 이름을 훔치는 것으로 시나가와에서 추방을 당한다. 시나가와 원숭이가 여성의 이름을 훔치는 것으로 주인공 여성 '안도 미즈키'는 가끔 자신의 이름을 잊어버린다. 그것이 사소하지만 조금씩 생활의 불균형을 만든다. 결국 탐정에 의해 잡힌 시나가와 원숭이는 시나가와에서 추방을 당하는 것으로 '시나가와 원숭이'는 끝이 난다. 


그리고 15년 동안 원숭이는 여러 곳을 떠돌다 나이가 많이 들어서 군마현 온천마을의 작고 낡은 여관에서 일을 하며 지내다가 글 쓰는 직업을 가진 하루키(주인공을 하루키라고 하자)를 만나고 그의 등을 밀어주고 맥주를 나눠 마시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그것이 '시나가와 원숭이의 고백'의 도입이다.

시나가와 원숭이는 기품 좋은 교수 부부에게 어릴 때부터 길러져서 인간의 언어를 배우고 브루크너의 교향곡을 들으며 자랐다. 그러다가 여러 가지 이유, 인간의 이름을 훔치는 것으로 추방을 당하여 원숭이 파크로 유명한 타카사키야마 남쪽 지역에 눌러앉게 되었다.

하지만 원숭이들은 시나가와 원숭이를 배척했다. 말하는 거 완전 이상해, 공통점이 없어, 그러면서 다른 원숭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한다. 시나가와 원숭이는 원숭인데 다른 원숭이들에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수가 없었다. 결국 거기서 도망쳐 나와 길거리를 배회하는 원숭이가 되었다.

"아무도 저를 보호해주지 않아서 살기 위해 먹을 것을 슬쩍 훔쳐야 했습니다. 그런데 가장 힘들었던 것은 대화를 할 상대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원숭이와도 사람과도 대화할 수 없었습니다. 고립은 마치 제 가슴에 터트릴 것 같이 아프게 했습니다. 타카사키야마는 굉장한 관광객들로 붐볐지만 제가 마주치는 어느 누구와도 대화를 할 수는 없었습니다. 만약 그랬다간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인간 사회에도 속하지 못하고 원숭이의 세계에도 속하지 않음으로, 여기에서도 거기에서도 상처 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라는 대사가 있다. 대중 속에서의 고립은 극단적인 생각을 가지게 만든다. '시나가와 원숭이의 고백'을 번역하면서 이 부분은 요즘에 너무 깊게 와 닿았다. 우리는 도심지의 복잡한 인간관계 속에서 여기에도 저기에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고립된 존재가 되기도 한다. 그럴 때 엉엉 울고 싶지만 소리 내 울 수도 없다. 

우리는 친밀한 언어를 가지고 있지만 조직에서 그렇게 대화를 할 수 없다. 상하관계에 맞는 대화가 있고 거기에 속하지 못하면 의사소통이 쉽지 않다. 그때 우리는 상처를 받는다. 만약 상처를 받았다면 제대로 받아야 하지만 그것마저 여의치 않다. 받은 상처는 그대로 곯을 대로 곪아 흉터가 되어 없어지지 않는다. 


사람들이 많은데 대화를 할 수 없으면 고립된다. 그리고 고립은 가슴을 터트릴 것처럼 아프게 한다. 그러다가 마침내 고립의 끝에 가면 모든 것이 편안한 Zilch상태로 가고 만다. 우리 주위에 고립되어 있는 시나가와 원숭이가 많다. 상처를 받았다면 나 상처 받았다고 제대로 표현해야 한다는 것을 이 글을 번역하면서 새삼 느끼게 되었다. 그 상처가 형태의 것이든, 무형태의 것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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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에세이 '고양이를 버리다'가 한국에 정식 출판이 되었다. 자기 고백 같은 아주 짧은 수필 형식의 글이 일본의 문예지 문예춘추 6월호에 실려서 한국에는 다른 에세이와 묶음으로 나올 줄 알았는데 그대로 문고본의 형태를 띠고 양장본의 하드보드 책 표지를 창작하고 출판이 되었다. 나는 코로나가 도래하기 전에 문예지 문예춘추를 가지고 싶은 마음에 일본으로 붕 가서 서점에서 문예춘추 하나 주시오, 해서 저 책 한 권 달랑 사들고 바로 한국으로 붕 왔다. 


이전에도 하루키의 '고양이를 버리다'를 심야 북카페에서 번역해서 낭독한 버전을 그대로 받아 적어서 올린 적이 한 번 있었다. 편견이지만 정식 출판이 된 버전보다 심야 북카페에서 번역한 버전이 더 좋은 것 같다. 첫 시작부터 시나가와 원숭이가 나타나서 무라카미 하루키 너에게 이름과 성, 둘 중에 하나의 선택권을 주겠다. '무라카미'와 '하루키' 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면 넌 무엇을 택하겠나.라고 시작해서 하루키는 아버지의 성을 선택하면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 고양이를 버리게 된 이야기를 시작한다. 정식 출판된 버전보다 훨씬 초현실 적이고 하루키에게 밀착한 번역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루키의 한국판 에세이 ‘고양이를 버리다'를 보면 어린 하루키가 고양이와 뒹구는 삽화가 있다. 아주 평화롭고 하루키는 어린 시절에 부모에게 사랑을 듬뿍 받았고 어린 하루키는 넘치는 사랑을 고양이에게 조금씩 야금야금 나누어준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하는 삽화들이다. 어린 하루키는 받은 사랑을 무럭무럭 먹으며 자랐고 그것을 빵조각처럼 떼어서 고양이들에게 주었다. 


에세이에 삽입된 어린 고양이를 안고 있는 어린 하루키의 그림은 원작의 저 사진에서 비롯되었다. 어린 하루키가 고양이를 품에 안고 사랑을 주고 같이 잠들고 했던 나날들이 삽화로 재탄생되었다. 그 오래전, 아버지가 살아있었을 때, 아버지와 자전거를 타고 다니고 추억을 공유했던 그 당시로 되돌려 놓는다. 그곳에는 언제나 고양이가 어린 하루키 옆을 지키고 있었다.  


고양이는 어떻든 태어나졌으니 어떻게든 살아야 하고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하는 문제는 몹시도 중요하다. 그건 인간에게도 마찬가지다. 특히 나처럼 사회성이 결여된 인간에게는.


고양이는 그림자가 햇살을 따라 움직이듯 천천히 생을 보낸다. 마치 느긋한 물수제비 같다. 그런 모습을 보며 고양이보다 오래 살 어린 하루키는 고양이와 같은 마음은 지니지 못한 채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고양이는 기분 나쁘게도 늘 편안하게 비스듬히 누워 있다가 다리를 허공에 들면 드러나는 은밀한 부위도 참으로 고양이스럽다. 그들에게 복잡하고 난잡한 인간사는 신경 쓰이지 않는다. 매일 낮잠을 잘 곳을 물색하고 추위를 피할 수 있는 자리가 고양이에게는 먹고사는 일이다.


집집마다의 비밀을 고양이는 다 알면서도 숨긴 채 볕이 드는 곳에 누워 늘어지게 낮잠을 자며 소변으로 비밀을 배출한다. 가끔씩 꼬리를 움직이는 것으로 낮잠을 즐긴다는 것을 아는 정도다. 그들은 햇살을 얇은 이불처럼 덮고 잠들다 눈을 뜨면 변색되는 풍경을 천천히 구경한다.


어린 하루키는 누워있는 고양이를 보면 다리와 배 사이, 야들야들한 부분에 손가락을 넣어 슬슬 비비고 싶었다. 졸음에 겨워 눈을 반쯤 뜬 고양이를 보면 고양이의 세계에 한 발 들여놓은 것 같다. 나에게도 꼬리가 있다면 견고한 인간의 감정을 벗은 채 슬슬 움직여 등까지 올려 누군가를 즐겁게 해 줄 텐데.


그런 어린 고양이가 나무 위에서 그만 죽은 것을 슬프게 생각한 어린 하루키는 그 장면을 가슴에 고양이처럼 품은 채 어른이 되었다.



우리는 광활한 대지를 향해 내리는 방대한 빗방울의, 이름 없는 한 방울에 지나지 않는다. 고유하기는 하지만, 교환 가능한 한 방울이다. 그러나 그 한 방울의 빗물에는 한 방울의 빗물 나름의 생각이 있다. 빗물 한 방울의 역사가 있고, 그걸 계. 승. 해. 간. 다. 는 한 방울로서의 책무가 있다. 우리는 그걸 잊어서는 안 되리라 – 무라카미 하루키 [고양이를 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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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특징이라면 하루키의 활자에 영향을 받고 하루키의 루틴적인 생활방식을 동경해서인지 대체로 낭만을 지니고 있다. 그건 나이가 많고 적음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된다. 하루키의 소설과 에세이는 음악이 잔뜩 나오니 낭만과 음악은 떼려야 뗄 수 없고 자연스럽게 하루키를 좋아하는 독자 내지는 사람들은 낭만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하루키에게 빠져있는 사람들을 하루키스트라 칭한다면 하루키스트들은 낭만적인 색채를 띤다.


하루키 덕분에 소설과 에세이에 잔뜩 등장하는 음악을 덩달아 찾아서 들어보게 되는데 겨울이면 유독 많이 듣게 되는 노래가 블로섬 디어리의 노래들이다. 블로섬 디어리의 목소리는 마치 요정이 말을 하는 것 같은데 하루키는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를 작은 클럽에서 마주쳤다거나 실제로 만났다거나 하는 에피소드가 많다. (의심의 눈초리로) 어째서 그럴까.


블로섬 디어리의 많은 곡들을 듣다 보면 여기가 현실인지 초현실인지 구분하기 힘들어지기도 해서 낭만적이 되고 만다. 낭만이라는 게 현실과 거리감이 있어서 사람들에게 시큰둥한 대접을 받기도 하지만 사실 누구나 어떤 특정한 방면에서 낭만적인 색채를 조금씩이라도 띠며 생활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하루키를 (너무나) 좋아하는 것에 한 일자의 눈초리로 쳐다보기도 하지만 살면서 하나에 빠져든다는 것만큼 멋진 일도 없다. 게다가 중독이라 부를 수 있는 그 하나가 누군가를 죽이는 것도 아니며, 알코올이나 마약류도 아니며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니 더더욱 멋진 일이다.


한 작가의 모든 작품을 몇 번씩 읽고 탐독하는 사람들을 덕후라 부르고 그들의 행동을 덕질이라 한다면 세상의 중요 사이클은 대체로 덕후들의 덕질이 이뤄낸 쾌거라 할 수 있다. 어리석은 인간은 세상을 꼭 두 부류로 나누는데 나는 어리석어서 어리석게도 두 부류로 나눈다면 덕질을 하는 인간과 덕질을 모르는 인간으로 나눈다. 덕질을 모르고 무난하게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으나 덕질의 매력에 빠져버리면 세상이 달라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


하루키 세계의 덕질에 빠져 있다가 하루키를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거짓말을 좀 보태서 입에 모터를 단 것처럼 말을 하게 된다. 아직은 오프라인으로 하루키에 대해서 듣고 말하기보다 온라인에서 더 많은 말을 쏟아낸다. 온라인 안에 들어가면 하루키에 대한 깊이 있는 덕후들이 많아서 그들에게 모르는 이야기를 듣고 싶다. 하루키 덕후 중에는 일반인만 있는 것도 아니다. 임경선 작가도 덕후고 김연수 소설가 역시 덕후다. 오래전 광고에서, 저 이제 내려요, 라는 대사를 했을 때 앉아서 길게 머리를 늘어뜨린 광고 속 예쁜 여주인공이 읽고 있던 책도 노르웨이 숲이었다.


또 하루키의 글을 덴마크어로 번역하는 덴마크 번역가 메테 홀름도 그중 한 사람이다. 메테 홀름은 하루키에 관한 단편 영화 Dreaming Murakami를 만들었다. 덴마크어로 하루키의 언어를 번역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일반인으로 하루키 덕후인, 그래서 하루키에 관한 책까지 펴 낸 파인딩 하루키 사이트에 들어가면 자세하게 볼 수 있다.


https://youtu.be/Ks2pWgAJmJ8


예고편을 보면 고베에 있는 재즈 바 ‘하프타임’에 앉아 있는 장면도 나오는데 이곳은 78년부터 영업하고 있고 하루키의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가 영화가 되었을 때 촬영을 한 곳이라고 한다. 소설 속에서 쥐가 바에 앉아서 땅콩을 재떨이가 넘치도록 까먹으며 맥주를 마시던 곳의 배경이 된 것이다. 그래서 세계의 하루키스트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그나저나 블로섬 디어리는 어쩜 이런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https://youtu.be/oruxeiA06_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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