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일러복을 입은 연필에 대한 이야기도 에세이에 나오지만 참으로 제목이 하루키답다. 세일러복은 세라복으로 불리기도 하며 이와이 슌지 영화 ‘하나와 엘리스’에서도 오랜만에 만난 아빠와 밥을 먹는 장면에서 아빠가 아리스에게 교복은 세라복을 입는 거냐, 같은 대사를 한다. 그때 아리스가 야라시,라고 흥 하는 듯한 대사와 표정을 한다.


영화 ‘하나와 엘리스’는 성장영화인데 나는 그만 빠져버려서 한 서른 번은 봤을 것이다. 그때 사람들은 나를 보며 저 미친놈이 또 저 영화를 보고 앉아 있네.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본격적인 하나와 엘리스 마니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때 이 영화에 빠져있던 마니아들이 하나와 엘리스 영화 촬영지를 돌며 블로그질을 했었다.


이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려나? 이 영화는 원래 짤막한 티브이 광고 용으로 제작되었다. 이와이 슌지가 인터넷으로 독자들(이와이 슌지가 소설가이기도 하니까 – 립반 윙클의 신부 소설책도 재미있다, 물론 나는 영화 버전이 훨씬 좋았지만)에게 키켓(초콜릿) 광고의 시나리오 공모를 한 것이 시초였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하나 버전의 이야기가 먼저 공모가 되어서 광고로 만들어졌고, 이와이 슌지 감독이 여기서 끝내기에는 너무 아까운 이야기라 아리스(엘리스)가와 데츠코의 버전을 만든 것이 하나와 엘리스가 되었지 싶다.


영화 속에서도 이 키켓을 먹는 장면의 오디션이 나온다. 이 키켓이라는 초콜릿도 그 세계를 들여다보면 덕질의 세계다. 일본에는 일본에만 판매하는 수많은 종류의 키켓이 존재한다. 크렌베리 키켓, 산딸기 키켓 등. 아무튼 사람들은 덕질하기를 좋아하고 같은 마니아끼리 서로 피터 찌리릿 같은 것이 있다.


이와이 슌지는 아톰의 아부지 데츠카 오사무를 너무 좋아해서 ‘하나와 엘리스’ 곳곳에 데츠카 오사무의 향기를 숨겨 놓았다. 아톰이 영화 속에 등장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와이 슌지를 좋아한 봉준호가 영화 ‘옥자’에서 ‘하나와 엘리스’의 그 장면을 오마주 했다. 옥자의 목소리를 배우 이정은이 했다는 건 다 알고 있는데 영화 옥자에서 내가 가장 압권으로 보는 장면은 서울의 지하도 장면이다. 옥자가 도망을 가는 장면인데, 그 짧은 장면 속에 지하도에서 생활하는, 또 오고 가는 우리 모습이 아주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어서 놀랐다. 거기서 이정은이 1초 정도 휠체어를 탄 모습이 보인다.

세일러복을 입은 연필에 대한 이야기도 에세이에 나오지만 참으로 제목이 하루키답다. 세일러복은 세라복으로 불리기도 하며 이와이 슌지 영화 ‘하나와 엘리스’에서도 오랜만에 만난 아빠와 밥을 먹는 장면에서 아빠가 아리스에게 교복은 세라복을 입는 거냐, 같은 대사를 한다. 그때 아리스가 야라시,라고 흥 하는 듯한 대사와 표정을 한다.


영화 ‘하나와 엘리스’는 성장영화인데 나는 그만 빠져버려서 한 서른 번은 봤을 것이다. 그때 사람들은 나를 보며 저 미친놈이 또 저 영화를 보고 앉아 있네.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본격적인 하나와 엘리스 마니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때 이 영화에 빠져있던 마니아들이 하나와 엘리스 영화 촬영지를 돌며 블로그질을 했었다.


이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려나? 이 영화는 원래 짤막한 티브이 광고 용으로 제작되었다. 이와이 슌지가 인터넷으로 독자들(이와이 슌지가 소설가이기도 하니까 – 립반 윙클의 신부 소설책도 재미있다, 물론 나는 영화 버전이 훨씬 좋았지만)에게 키켓(초콜릿) 광고의 시나리오 공모를 한 것이 시초였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하나 버전의 이야기가 먼저 공모가 되어서 광고로 만들어졌고, 이와이 슌지 감독이 여기서 끝내기에는 너무 아까운 이야기라 아리스(엘리스)가와 데츠코의 버전을 만든 것이 하나와 엘리스가 되었지 싶다.


영화 속에서도 이 키켓을 먹는 장면의 오디션이 나온다. 이 키켓이라는 초콜릿도 그 세계를 들여다보면 덕질의 세계다. 일본에는 일본에만 판매하는 수많은 종류의 키켓이 존재한다. 크렌베리 키켓, 산딸기 키켓 등. 아무튼 사람들은 덕질하기를 좋아하고 같은 마니아끼리 서로 피터 찌리릿 같은 것이 있다.


이와이 슌지는 아톰의 아부지 데츠카 오사무를 너무 좋아해서 ‘하나와 엘리스’ 곳곳에 데츠카 오사무의 향기를 숨겨 놓았다. 아톰이 영화 속에 등장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와이 슌지를 좋아한 봉준호가 영화 ‘옥자’에서 ‘하나와 엘리스’의 그 장면을 오마주 했다. 옥자의 목소리를 배우 이정은이 했다는 건 다 알고 있는데 영화 옥자에서 내가 가장 압권으로 보는 장면은 서울의 지하도 장면이다. 옥자가 도망을 가는 장면인데, 그 짧은 장면 속에 지하도에서 생활하는, 또 오고 가는 우리 모습이 아주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어서 놀랐다. 거기서 이정은이 1초 정도 휠체어를 탄 모습이 보인다.

영화 ‘하나와 엘리스’가 나오고 10년인가 흘러서 애니메이션으로 하나 버전인 ‘하나와 엘리스: 살인사건’이 나왔다. 그 이야기도 재미있다. 어쩌면 아리스 버전보다 더 재미있다. 왜냐하면 하나와 엘리스에서는 왜 이렇게 꽃으로 가득한 집에 하나가 사는지, 하나는 왜 저러는지 같은 궁금증이 있는데 그런 이야기가 풀어헤쳐진다.


이와이 슌지 영화는 대체로 몇 번씩 보게 되는데 ‘릴리 슈슈의 모든 것’에서 마지막 콘서트 장면에서 수많은 인파가 콘서트 광장 앞에 서 있는데 전부, 모두, 몽땅 대사를 주었다고 한다. 엑스트라인데 전부 다른 대사를 주고 누가 카메라에 잡힐지 모르니까 열심히 해달라고 했다고 한다. 그렇게 촘촘하고 꼼꼼하게 연출을 한다.


여하튼 하루키는 에세이에서 세일러복을 입은 연필이라는 말을 들은 후에 머리에서 그 모습이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보다 혈기가 왕성 할 때니까 사람들 모르게 안자이 미즈마루 씨에게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이미지를 그려 달라고 하지 않았을까.


이 에세이에 ‘간사이 지방 사투리에 대하여’라는 챕터가 있다.


[나는 언어는 공기와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지역이나 그곳만의 공기가 있고 그 공기에 맞는 언어가 있어, 웬만해서는 그것을 거역할 수 없다. 먼저 악센트가 바뀌고, 그다음으로 어휘가 바뀐다. 이 순서가 반대가 되면 언어를 쉽사리 마스터할 수 없다. 어휘란 이성적인 것이고 악센트는 감성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 챕터에 나오는 말이다. 사투리는 일본도 그렇지만 우리나라도 그 지역에 맞는 공기가 있다. 서울에 갔다가 고향으로 오면 그런 공기를 확 느낀다. 그 안에는 어휘보다는 악센트가 더 도드라지기 때문에 일종의 사투리만의 공기를 느낄 수 있다. 이성적인 어휘는 감성적인 악센트 뒤에 따라오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곳도 사투리를 사용하는 바닷가 지역이라 당연하지만 사람들이 사투리를 쓴다. 예전에 도로에서 자동차에게 치일 뻔했던 아저씨가 운전자를 향해 “눈까리 주 뽑아 뿌까, 운전을 그 따구로 하노!" 살벌했다.


그 정도로 사투리가 충만한 도시인데 근래에는 사투리를 예전만큼 들을 수 없다. 사투리의 공기가 달라졌다. 사투리이긴 하지만 사투리 속의 악센트와 어휘 속으로 표준어에 가까운 언어가 많이 틈입했다.


날 때부터 스마트기기를 달고 태어난 세대들이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sns로 사람들과 소통을 하기 때문에 그 속에서 사투리보다는 표준어를 훨씬 많이 접한다. 그래서 어린이에서 갓 졸업한, 그렇다고 아직 청소년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중학교 1학년 정도의 여자애들이 하는 대화를 들어보면 억양이 뭔가 표준어에 닿으려 하지만 표준어에는 턱없이 부족하고, 그렇다고 사투리스럽지도 않은 기묘한 말투를 쓴다.  


이 지역 사투리만의 악센트와 어휘이긴 하나, 악센트가 약해졌고 어휘에서도 그 형태가 둥글둥글하게 되었다. 분명 학생들이 사투리를 쓴다. 하지만 단단한 사투리의 공기가 옅어졌다. 그것이 옳은 일인지 그렇지 못한 일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사투리는 영상을 통해 재미 또는 무서움의 표현 방식으로 많이 비치기 때문에 사투리가 가지는 단단함은 사투리를 쓰는 사람끼리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제 20여 년 전 영화 친구에서처럼, 지방이라고 해서 학교에서 [샘요, 제가 그랬습니더. 지가 반장인데예. 알았심더] 같은 사투리는 사용을 하지 않는다. 그런 것을 보면 사투리의 공기는 시간과 함께 달라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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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라는 아주 이상하고 기묘하고 기이한, 그래서 밥 먹고 한 없이 상상력만은 똥처럼 만들어내야 하는 소설가라는 직업을 가진 하루키의 냉소는 첫 시작부터다.


이 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플라톤이 이런 말을 했다.


[나의 사생활을 필요이상 말하지 마라. 사람의 이기적 본성은 타인의 고통에 둔감하게 만든다. 따라서 나의 사생활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위로해 주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오히려 내 이야기가 주변에 퍼져서 심심풀이 주제로 소비되거나 언젠가 비수가 되어 나에게 돌아올 것이다. 또한 자신에 대해 과도하게 털어놓으면 사람들과 더 가까워지기보다 오히려 멀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인간관계는 시간이 갈수록 계속해서 변화한다. 지금은 아주 가깝지만 몇 년 뒤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게 사람 사이다. 어떤 관계도 영원할 수 없다. 만약 나의 깊은 사생활을 잘 아는 사람과 관계가 안 좋아지면 쓸데없이 신경 써야 하는 일이 많이 생길 것이다. 특히 나의 안 좋은 습관들이나 불행한 가정사는 더욱 타인의 판단과 비판에 노출되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삶의 특정 부분을 비밀로 유지해야 내가 더 품위 있고, 남들에게 존중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 드러내지 말아야 할 내 사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실컷 하고, 집에 돌아와 말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라도 후회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다 ]


책에서 하루키는 말하고 있다. 작가들끼리 친하게 지낸다는 말은 순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친할수록, 그래서 말을 많이 할수록 손해 보는 직업이 있다면 소설가이지 싶다. 작가들끼리 붙여 놓으면 잘 되는 경우보다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고 한다. 비록 소설가에게만 하는 말은 아니다. 옛날부터 친구끼리는 동업하지 마라, 같은 말이 있듯이.


재미있는 건 책에서도 말하지만 1922년 파리의 디너파티에서 세상 자존심 강하기로 유명한 마르셀 프루스트와 제임스 조이스가 한자리에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두 작가는 어떤 이야기를 나눌까 기다렸지만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하지요.


사실 소설가가 아니라도 플라톤의 말처럼 나의 사생활을 필요 이상으로 많이 할 필요는 없다. 나의 사생활 따위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엄마, 아이들, 애인, 아내, 남편)도 하루 종일 그 사람을 생각하고 걱정하지 않는다.


세상에는 혼자서만 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부부가 함께 한 이불에 들어도 잠은 혼자서 자야 한다. 아픈 것도 대신할 수 없다. 무엇보다 소설은 정신을 바짝 세워 등을 구부리고 혼자서 묵묵히 써 내려가야 한다. 그 지겹고도 힘든 작업을 꾸준하게 할 수 있는 동력원은 오직 상상력과 엉덩이의 힘이다.


상상력은 머리가 좋아야 나오는 게 아니라 공상하기를 좋아하고 상상의 세계를 꿈꾸며 망상에 가까운 생각을 하는 인간들에게서 나온다. 고로 하루키도 말하지만 머리가 좋으면 결국 다른 일을 하게 되는 것 같다. 머리가 그리 좋지 않은 인간들이 어쩌면 소설가라는 직업에 맞지 않을까 싶다.


요즘 같은 시대에 소설을 쓴다는 건 정말 바보 같은 짓이다. 어지간히 머리가 나쁜 인간이 아닌 다음에야 글이나 쓰고 앉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문학을 한다는 건 멋진 일이다. 중독이 되며 빠지면 나오기도 쉽지 않다. 세상의 수많은 중독이 나쁘지만 문학은 다르다. 소설가의 특징이라면 문학의 힘을 믿는다는 것이다.


소설가 장강명도 ‘소설가라는 이상한 직업’에서 [나는 문학의 힘을 믿으므로 그런 때 무력한 문학인들을 미워하기 시작한다. 문학의 잘못이 아니라고, 우리가 멍청하기 때문이라고]라고 했다. 소설가는 참 기묘한 직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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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다시 한번 읽으려고 펼쳤더니 그 안에 돈이 들어있어서 놀랐고, 삼만 원이나 꼬불쳐 넣어놔서 놀랐고, 책 깨끗하게 보기로 유명한 나인데 여기저기에 줄이 그어져서 놀랐다. 뭐 그건 그렇고, 소설가라는 직업은 이 세상의 수많은 직업 중에서 가장 희한하고 기묘한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출퇴근 시간도 없고, 정해진 업무량도 없고, 과정이 힘들고, 결과가 눈에 보이듯 확실하지도 않고, 파자마만 입고 일을 할 수 있고, 늘 즐겁게 일을 할 수 있다가 예민함이 극에 오를 때가 있는 직업이다. 너무 행복하면 일을 못 할 수도 있고 늘 불행할 수도 없다. 언제나 일정한 패턴과 기복 심하지 않은 적정 감정을 유지해야 한다.


많은 젊은이들이 하루키에게 소설가가 되려면 어떤 훈련이 필요합니까,라고 한다. 하루키는 늘, 언제나 그렇듯이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라는 확고하고 섬뜩한 이야기만 할 뿐이다. 글을 쓰는 직업을 가지는데 책을 많이 읽을 필요는 없다. 읽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소설가 대부분이 많은 책을 읽는다.


독서라는 행위가 그대로 하나의 큰 학교였다고 하루키는 말한다. 다 알다시피 그는 엄청난 독서광이었다. 챈들러, 레이먼드 카버, 포크너, 커트 보네거트, 잭 케루악 등 하루키의 팬들은 하루키가 말하는 여러 소설가들의 소설도 찾아서 읽어 봤을 것이다.


특히 젊은 시절에는 한 권이라도 더 많은 책을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뛰어난 소설도, 그다지 뛰어나지 않은 소설도, 혹은 별 볼 일 없는 소설도 (전혀) 괜찮아요, 아무튼 닥치는 대로 읽을 것, 조금이라도 많은 이야기에 내 몸을 통과시킬 것. 수많은 뛰어난 문장을 만날 것. 때로는 뛰어나지 않은 문장을 만날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한 작업입니다. 소설가에게 없어서는 안 될 기초 체력입니다. 아직 눈이 건강하고 시간이 남아도는 동안에 이 작업을 똑똑히 해둡니다. 실제로 문장을 써보는 것도 분명 중요하지만, 순위로 보자면 그건 좀 나중에라도 충분히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듭니다.


소설을 쓰면 좋은 점이, 소설을 누군가를 위해서 쓰지 않는다. 나를 위해서 소설을 쓴다. 그러다 보면 나를 치유하는 가장 좋은 즐거운 작업이라는 걸 알게 된다. 하루키는 그걸 이미 알아 버려서 신나게 소설을 쓸 때에는 집중해서 소설을 쓴다. 그렇게 보인다.


책을 읽기 전과 읽고 난 후의 내가 똑같다면 책은 읽을 필요가 없다. 하지만 읽기 전의 나와 읽은 후의 내가 좀 달라졌다면 책은 그야말로 오로지 나의 편인 친구다. 거기에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읽는다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이다. 그렇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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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발단은 투정 부릴 수조차 없을 만큼 맑게 갠, 7월의 일요일 오후였다. 7월의 첫 일요일이었다.로 이 소설은 시작한다. 하루키는 7월의 모습을 투명한 유리에 물방울이 떨어지듯 하루키만의 언어로 멋지게 표현을 했다. 그리고 느닷없이 떠오른 가난한 아주머니가 온 마음을 휘어잡았다.


마치 거대하고 끊임없을 것만 같은 행복을 이어주는 건 불행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가난한 아주머니의 가난이란 무엇일까. 성석제와 톨스토이 작품 속 가난은 실존적인 가난이었다. 그러나 하루키의 가난은 메타포 이거나 이데아에 가깝다. 그리고 그 가난은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던지면 돌아오는 부메랑과 같은 것이다. 분명 행복하지만 등에는 불행의 짐짝이 붙어 있는 것처럼.


가난한 아주머니는 텅 빈 동공일지도 모르고, 하나의 무형태를 띤 형상일지도 모른다. 잔성처럼 말이다. 가난한 아주머니는 왔다가 사라져 갔다. 어휘는 투명한 탄도처럼, 일요일 오후의 한낮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


가난한 아주머니는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존재다. 가난한 아주머니란 그런 존재니까. 아주머니는 다 알지만 그 앞에 가난이 붙으면 사람들은 알아주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그 가난한 아주머니에 대한 글을 쓰고 싶었다. 그래야만 한다. 이 세상에는 나만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이 있다. 바로 가난한 아주머니에 대한 이야기다.


사람들은 가까이 있으면 보지 않게 되고 멀리 있는 것만 쫓는 경향이 있다. 가난한 아주머니가 진짜로 있는 그녀는 가난한 아주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적당한 표현이 없기 때문이다.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말처럼 나는 가난한 아주머니를 전혀 모르지만 받아들이려고 한다. 받아들인 다는 건 동시에 구제하는 일이기도 하다.


사실 가난한 아주머니는 나의 주위, 그녀의 주위, 모든 사람의 주위에 항상 있는 존재다. 하지만 늘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잘 볼 수 없지만 제대로 볼 수는 있는 존재. 그것이 가난한 아주머니 일지도 모른다. 특징 없는 누군가를 가리켜 누구지?라고 물으면, 응 가난한 아주머니일 뿐이야.라고 하면 된다. 이름이 기억이 안 나는데 누구였더라? 에도 가난한 아주머니를 집어넣으면 간단하다.


이름이 없는 사람들이 가난한 아주머니뿐이더냐. 이름을 잃어버리고 사는 사람들이 살아남아 용케도 이름의 거리에 당도하여 그들이 공동체를 만들면 그 속에서 가난한 아주머니를 마주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던 가난한 아주머니와 내가 같은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이름을 잃어버리고 살아왔기 때문에.


가난한 아주머니는 무게도 대단하지 않고, 불쾌한 감각도 아니며 귓전에 대고 냄새나는 입김을 불지도 않지만 표백된 그림자처럼 내 잔등에 착 달라붙어 있다.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그 존재에 익숙해진다. 친구들도 썩 신경 쓰지 않는다. 가난한 아주머니란 그런 것이다. 일종의 에테르. 보는 사람에 따라 형상이 뒤틀어지는. 일각수처럼 고정된 형상이 아니다. 평범한 낱말일 뿐이다. 평범한 언어가 가난한 아주머니다. 개념적인 기호일지도.


그리고 겨울이 다가올 즈음 가난한 아주머니는 나의 등에서 사라졌다. 이후 나는 자신을 원래의 나 자신을 꼭 닮은, 또 하나의 자신으로 여겨졌다. 산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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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에 나온 BTS의 버터플라이의 가사는 서사를 보는 듯했다. 모순의 배위(背違)를 뒤집어서 또 다른 내가 된 나는 나의 육체는 그대로 두고 나비의 몸을 빌려 내가 사랑하는 그 소녀에게 다가가는 이야기가 보였다. 너무 좋다는 말이지.

버터플라이의 서사를 깊이 있게 표현하려고 작사에 참여한 아티스트들이 많았다. 여기에는 랩몬 남준이 외에도 방시혁, 호비, 브라더수 외에도 몇 명이 더 참여를 했다.

이 가사가 이렇게 서사에 가깝게 들리는 이유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부분은 남준이가 하는 랩 파트 부분 때문이다.

심장은 메마른 소리를 내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네

나의 해변의 카프카여

저기 숲으로 가진 말아줘

내 마음은 아직 너 위에 부서져

조각조각 까맣게 녹아 흘러

내 사랑은 영원한 걸

독서광 남준이는 해변의 카프카를 너무 좋아하고 이 소설을 염두에 두고 버터플라이의 가사를 썼다고 한다.

하루키 팬들이라면 여기 7줄의 랩 가사만 보더라도 서사를 대번에 알 수 있다. 나비는 늘 초현실적인 존재로 표현이 되어 왔다. 웰컴 투 동막골에서도 나비를 따라 들어갔더니 외부 세계와는 단절된 삶을 사는 동막골로 가게 되었다.

나비는 지구상의 생명체 중에 중력을 거스르는 날갯짓을 한다. 일정한 패턴으로 날지 않는다. 마치 바람이 불면 없어져 버릴 것 같은데 그 속에서도 나비는 가고 싶은 곳에는 가고 만다. 나비라는 존재는 이계와 이 세계를 넘나드는 유일무이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해변의 카프카를 보면 15살 다무라는 50살이 넘은 사에키 상에게 나이 따이는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마치 한 마리의 나비가 되어 어떤 경계를 넘어 15살 사에키를 만난다. 무엇보다 방탄이들이 안무로 이 모든 걸 표현했다는 것이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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