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의 수많은 단편 소설집 중에 아마 제일 얇은 단편집일 것이다. 개똥벌레는 2004년인가? 도서출판창해를 통해서 출판되었다. 같은 출판사에서 초판 격인 이전의 개똥벌레가 있다. 이전에 나온 책은 겉표지에 5세 아이가 초록색 크레파스로 마구 낙서를 해 놓은 듯한 표지인데 나는 그 소중한 책을 잃어버린 모양이다. 아무리 찾아도 없다. 하루키의 한국 출판 소설은 다 가지고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씩 사라지는 경우가 있다. 다리가 달린 것도 아닌데 어째서 도망을 가는지 모르겠다. 내 주위에는 하루키를 좋아하는 사람도 없고, 아예 하루키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도 있는데 그래서 누군가에게 빌려주지도 않는데 찾아보면 없다. 초판의 개똥벌레 표지에는 재미있게도 ‘헛간을 태우다, 그 밖의 단편’라고 쓰여 있다.


이 단편집은 얇은 만큼 두 편이 전부다. ‘개똥벌레’와 ‘헛간을 태우다’가 실려 있다. 헛간을 태우다는 이창동 감독이 영화 ‘버닝’으로 만들어 버렸다. 영화 속에 종수가 윌리엄 포크너를 좋아하고 꿈을 꾸면 비닐하우스가 불에 타는 꿈을 꾸는데, 헛간을 태우다,라는 단편 소설은 하루키가 윌리엄 포크너의 ‘헛간 타오르다’를 읽고 오마주를 하여 자기 식으로 쓴 것이고, 이 모든 걸 이창동 감독이 버닝으로 담아냈다.


이창동은 원래 소설가여서 그런지 버닝을 보면 대사가 마치 메타포어 같다. 공백과 공백이 존재하고 그 공백 사이를 은유가 들어앉아서 대사를 이어 주는 기분이 든다. 그리고 조명을 기가 막히게 사용했다고 말하고 싶다. 종수가 나오는 부분은 자연광을 사용하여 아주 어둡다. 그건 해미가 나오는 부분도 그렇다. 그렇지만 벤이 나오는 장면은 인공광원을 사용하여 아주 밝게 나온다. 그것이 세상의 중심이 되는 것과 변두리의 것을 대변하는 모습이다. 조명으로 잘 표현했다.


윌리엄 포크너의 ‘헛간 타오르다’는 아주 고집불통의 완고한 아버지가 나온다. 주인공 ‘나’는 분노조절이 되지 않아 지주의 헛간에 불을 지르는 아들로 완고한 아버지를 닮았지만 또 평화로운 삶을 바란다. 보통 아버지의 완고함은 가부장적이 아니더라도, 그 반대적인 친밀한 아버지의 모습일지라도 살다 보면 완고한 모습을 가지게 된다. 이 완고함이 가정을 이루고 그 벽에 꺄지지 않게 지탱하는 모태가 되기도 한다. 이창동 감독의 버닝 속 종수와 아버지의 모습도 그렇다. 학창 시절에 꼴 보기 싫었던 아버지의 모습도 막상 나 자신이 아버지가 되고 나면 스펀지에 물이 스며들듯 그런 모습을 하고 있다.


윌리엄 포크너도, 하루키(는 너무나 많은 소설 속에서)도, 이창동 감독의 버닝에서도 유전자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대물림. 발버둥을 치며 벗어나려고 해도 이미 정해져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버닝 영화 속 벤의 모습은 이 사회의 중심이 되는 하나의 구심축 같은 존재다. 어느 시대에나, 어느 나라, 어느 시점에도 존재하는 축. 물질로 이루어져 사람들을 돌아가게 만들고 사람들이 그 축을 따라 움직이며 서로 광기에 사로 잡혀 공격하기도 하고, 사랑하기도 하는 거대한 사회의 중심이 되는 축. 즉 굳건한 진실 같은 것이다. 절대 무너지지 않고 단단한 물질로 이루어져 시대가 아무리 흘러도 구성원만 바뀔 뿐 근간을 이루는 물질 즉 유전자는 바뀌거나 변하지 않는다.


그 축은 동시에 우물 같은 무서운 것이기도 하다. 세계의 곳곳에 있는 우물에 한 번 빠지면 어둠에 갇혀 위를 보며 언제 빠져나갈지 모르는 공포에 시간을 보낸다. 그 속에서 흔들리는 가능성 따위는 의미가 없어져 버린다.

거기에 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거기에 귤이 없다는 걸 잊어버리면 되는 거예요. 그뿐이에요.


귤이 그곳에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귤이 그곳에 없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면 된다. 그것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다는 사실보다 그것이 늘 있어야 할 그곳에 없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면 된다. 마치 음식을 먹고 있는데 음식을 먹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그건 재능도 무엇도 아니다. 그것은 사실 그곳에도 존재하고 이곳에도 존재한다. 동시 존재한다. 동시 공체일지도 모른다. 스팅이 그에 관한 철학적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나는 이곳에 존재하지만 렌선을 타고 그곳에도 존재한다.


구름 없던 하늘에 구름이 모락모락 그림을 그려 한참을 서서 바라보는데 꼭 저 대책 없는 구름의 모습이 나의 마음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구름 같은 마음을 글로 표현하는 것은 참 어렵다. 화려하면서도 소박한, 양립된 마음이 동일선상에 놓여 있어서 자칫 발을 헛디디면 한쪽으로 기울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일종의 습관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어쩌면 일상의 반은 습관을 유지하려고 자신과 싸우고 또 일상의 반은 습관에서 벗어나려고 자신과 싸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다.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해미와 종수는 언어습관이 억울하고 비굴한 일이 많은지 곧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말을 한다. 바늘로 툭 건드리면 마치 눈물이 탁 터져버릴 것 같다. 그 울음이 분에 차서 나오는 울음인지 환희에 차올라 나오는 눈물인지는 모른다. 그에 비해 벤은 유쾌하고 망설임이 없다. 이창동의 세계에서 보면 이전 영화에서도 서민의 얼굴은 늘, 어쩐지, 지극히 그러했다.


팬터마임, 고양이, 우물, 춤을 추는 무희가 해미를 나타내는 기호들이다. 이런 수식어를 이창동 감독은 하루키에게서 잘 떠왔다. 망가지지 않게 그릇에 잘 담아와서 그것을 화면에 골고루 펼쳐서 해미를 만들어냈다. 해미는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에 나오는 그녀로서, 여러 사람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것이 영화 속에서 말하는 동시 존재이기도 하다. 나 자신을 지칭할 때 저는 이런 사람, 또는 이건 싫어요, 이건 좋아요, 이 맛은 꽤, 이건 별로,라고 할 때 그것이 정말 나 자신인지 확신을 가질 수 없다. 상대방에 따라 내가 싫어도 상대방이 좋아하면 따라가는 경우가 있고, 나를 가장한 내 속의 또 다른 추한 마음의 내가 있다는 것도 안다. 내 속에도 여러 명이 동시 존재하고 있다.


해미는 마치 상실의 시대의 미도리의 모습처럼 보인다. 메타포가 뭐지? 하면서도 종수에게 자신도 모르게 꽤 많은 메타포를 안겨준다. 종수는 그 메타포의 끈을 잡고 해미를 찾으려고 한다. 그런 모습은 양을 쫓는 모험에서도, 댄스 댄스 댄스에서도 심지어는 15살 소년 다무라 카프카에서도 잘 나타난다.

매일 아침저녁 벤 녀석이 태울 것 같은 비닐하우스를 찾아다녔다. 매일 몇 킬로미터나 되는 근처에 있는 낡고 쓸모없는 비닐하우스를 찾아다녔다. 떨어지고 찢어진 비닐을 겨우 달고 비닐하우스라는 걸 알아차릴 수조차 없는 비닐하우스는 몇 개나 되었다. 벤 그 녀석이 아주 가까이에 있다고 했다. 그 녀석이 태울만한 비닐하우스는 내가 다 알아볼 수 있다. 벤 녀석이 비닐하우스 하나를 태웠다면 나는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한 달 가까이 매일 비닐하우스가 있는 곳을 다녀도 타버린 비닐하우스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비닐하우스를 찾아다니면서 나는 벤 녀석이 나로 하여금 비닐하우스를 태워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그 녀석이 건네준 마리화나를 피우면서 나의 머릿속에 비닐하우스를 태운다는 이미지를 심어 준 다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이미지는 풍선이 부풀어 오르듯 점점 커져가고 있는 착각이 든다. 착각이 아닐지도 모른다.


꿈을 꾸면 어린 내가 태워버려 활활 타오르는 비닐하우스를 보며 일종의 절정기를 느낀다. 벤 녀석이 태워버리는 것을 기다리기 전에 내가 비닐하우스를 태워버리는 것이다. 내가 쓸모없고 소용없는 것들을 태우는 것이다. 없애는 것이다. 그러는 편이 마음이 편할지 모른다. 태워 없애는 것. 수많은 인간들 중에 개츠비 같은 벤 녀석 만이 하는 이 짓거리를 나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야, 그래야 혜미가 돌아올 것 같으니까. 커다랗고 하루 종일 내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럼에도 잘 굴러가는 쓸모없는 비닐하우스를 내가 태워 없애는 것이다.

"씨발, 나는 해미를 사랑한다구요."

종수가 애타게 말을 하지만 벤은 큭큭큭큭 웃으며 대마를 피운다.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으니 안 그런 척 하지만 나 이외의 사람들은 멸시당해도 지극히 당연하다는 웃음. 킥킥 킥킥 거리며 웃는 소리는 귀로 들어오는 게 아니라 피부를 통해서, 내 얼굴에 뚫려 있는 구멍을 통해서 기어 들어온다. 마치 벌레처럼.

종수는 복수를 하는 것이 아니다. 종수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종수가 말했다. 나는 아버지를 미워한다고, 아버지는 분노조절장애가 있다고 말이다. 그래서 한 번 터지면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다고 말이다. 종수는 그런 아버지의 유전자를 이어받은 걸 알고 있다.


가진 게 없어도 재미를 위해서 여행을 가고 팬터마임을 배우는 해미는 재미를 위해서 무엇이든 하는 벤과 어울리지만 종수는 낄 수 없다. 공항에서 곱창집으로 가면서 벤은 엄마와 통화를 하면서 우수한 DNA를 이어받았으니 걱정하지 말라며 종수가 가지지 못한 엄마와 웃음을 난타한다.


종수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종수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분노조절로 구치소에 간 것처럼 자신도 그런 아버지의 유전자를 물려받았다는 것을. 해미 이전의 해미들이 벤의 서랍 속에서 사라져 갔다는 것을. 유전자는 내면의 호러인 것을.


사람들은 버닝이 미스터리하고 애매해서 어렵다지만 실은 버닝은 시처럼 구체적이어서 어려울지도 모른다. 모든 장면과 대사가 구체적이고 구체적이어서 구체적으로 다 나타난다. 단지 너무 가까이 있어서 구체성을 사람들이 찾지 못해서 어려울지도 모른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해미는 상실의 시대의 미도리를 닮았다. 이 단편집의 단편소설 '개똥벌레'가 장편소설이 된 것이 '상실의 시대'다.

정작 하고 싶은 말은 대체로 몸속에 머무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고 싶은 말은 입 밖으로 나오기 전에 느닷없이 다른 형태가 되어 비명처럼 밖으로 툭 튀어나온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나는 과연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개똥벌레의 주인공은 친구의 죽음을 본 후 죽음은 생의 대극이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뿌연 공기 같은 미미한 죽음의 잔존이 주인공을 끝 간 데 없는 결락으로 몰고 간다.


하루키의 단편 개똥벌레를 양쪽에서 잡고 힘 좋은 누군가가 주욱 늘린 것이 노르웨이 숲, 상실의 시대다. 개똥벌레에서 주인공은 친구가 자살을 하고 난 후 친구의 여자친구와 만나게 되면서 ‘그녀가 찾고 있는 것은 내 팔이 아니라, 누군가의 팔이었다. 그녀가 찾고 있는 것은 내 체온이 아니라 누군가의 체온이었다’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문장이 단편인 개똥벌레에서 장편인 노르웨이 숲으로 심도 있게 늘어나게 된다.  단편인 개똥벌레에서는 장편인 노르웨이 숲의 나오코가 요양소에 들어가게 되고 편지를 주고받는 것까지 나온다.


나오코, 그녀에 관한 기억이 와타나베 안에서 희미해져 가면 갈수록 와타나베는 더욱 깊이 그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죽음, 죽음은 삶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 이런 세계관은 그간 하루키 소설의 어떤 뿌리가 되었다. 토니 타키타니에서도, 하나레이 만에서도. 가장 최근에는 영화가 되어 오토를 잃고 나서야 제대로 상처받는 법을 알게 된 가후쿠처럼.


단편인 개똥벌레가 늘어나서 노르웨이 숲이 되었고 후에 그린 파파야 향기와 씨클로의 트란 안 홍 감독에 의해 영화가 되었다.

감독인 트란 안 홍의 색채는 필름 카메라에서나 볼 법한 색감이 우울함에 번지는 물감처럼 흐릿하다. 와타나베와 나오코의 닿을 수 없는 붉은 우울을 정화시키는 것은 맑고 투명한 미도리다. 하지만 우울이란 밝음 속에 숨어 있는 우울이 더 단단하고 크고 위험하다. 물이 너무 맑으면 물고기가 살지 못한다. 미도리는 와타나베만 곁에 있어주면 된다. 약속을 해 놓고도 만나러 나오지 않아도 남는 게 시간이라 괜찮아, 자산 같은 시간에 책이나 읽은 돼(이런 대사는 실은 없지만 하루키의 소설 속 주인공들의 스타일을 떠올렸을 때),라고 해버리는 와타나베를 미도리는 좋아한다. 미도리는 그게 사랑이다.


하루키의 문체를 영화의 문채로 옮기는 작업은 어렵기 때문에 많은 영화감독이 포기를 했다. 아마 앞으로 39년은 더 인기가 있을 ‘노르웨이 숲‘을 영화로 만들기로 했을 때 트란 안 홍 역시 고민이었을 것이다. 영화 ‘토니 타키타니‘에서 하루키의 문체를 영상으로 뿜어내야 하기에 한 공간에서 세트를 전부 바꿔가며 촬영을 했고 음악은 류이치 사카모토, 미야자와 리에가 쓰러질 듯 말 듯 멋지게 에이코와 하사코를 다 표현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좋은 하루키의 영화는 위에서 말한 이창동의 ‘버닝’이다. 그건 정말 하루키의 소설을 읽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하루키도 인터뷰에서 이창동 감독을 언급했다.


노르웨이의 숲에 나오코와 레이코가 요양하는 시설에 들어가 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물론 시설에 들어가서 요양을 하는 사람들의 수에 비해 엄청난 시설과 스태프가 훨씬 많기에 돈이 많이 들겠지. 그렇지만 그곳에 들어간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의 왜곡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왜곡된 마음을 바로잡으려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왜곡을 받아들이려 생활한다. 내게 정말 필요한 시설인 것이다. 그리고 페페를 기르는 카페의 아가씨와 환자 같은 이상한 닥터와 이야기도 나누고 싶고, 나오코가 와타나베의 은밀한 곳을 만져 주었던 강렬한 나무의 냄새가 있던 숲에도 들어가 보고 싶다. 거기서 비틀스의 '노르웨이 숲'을 제대로 듣고 싶다. 왜곡된 마음이지만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다.  


‘노르웨이 숲’ 속 미도리는 현실감은 제로다. 소설 속에서나 나올 법한 인물이다. 그래서 더더욱 사랑스럽다. 붉은 피로 온통 세상이 덮이려 할 때 미도리 하나 만의 존재로도 와타나베는 살아갈만하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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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더 스크랩’은 하루키의 에세이 중에서도 무게로 따지면 가벼운 글이다. 에세이 ‘작지만 확실한 행복’보다는 무게가 있고 ‘먼 북소리’보다는 가벼운 책이다. 내용면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가방에 넣어 다니다가 버스를 기다릴 때 꺼내서 아무 페이지나 펴서 읽기에 좋은 책이다. 이 책은 두 번째 사진에서 설명을 잘해놨다. 이런이런 책인 것이다.


하루키는 어디 어디에 연재하는 걸 싫어한다고 하면서도 여러 잡지(일본의 앙앙[우리나라로 치면 ‘쎄시’ 같은, 여성중앙보다는 조금 젊은 층을 겨냥한 여성 잡지 – 하루키는 기묘하지만 에세이는 남성들보다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은 것 같다] 같은 잡지. 앙앙의 올해 1월 호에는 우영우로 일본에서도 인기가 많은 박은빈이 인터뷰를 장식하기도 했다)에 연재를 한 칼럼을 묶어 에세이로 펴낸 책들이 많다.


그래서 잡지의 한편에 짤막하게 올라가는 칼럼이라 깊게 생각하며 읽어야 할 글은 아니다. 그래서 읽다 보면 오오 하거나, 큭큭 하며 웃음이 나오는 이야기가 많다.


이 책 ‘더 스크랩’에는 잡다한 80년대의 것들이 가득하다. 더 자세하게 말하면 80년대 미국의 문화 내지는 여러 잡다한 미국 것들로 가득 차있다. 80년대의 미국은 산업, 경제가 전 세계에서 꼭대기에 있었다. 무엇보다 문화, 미국의 영화가 세계를 집어삼키고 강타하고 있었다. 문화적으로 풍요로웠던 미국의 사정을 하루키를 통해 엿볼 수 있다.


그래서 이 에세이를 보면 실버스타 스탤론의 록키라든가 아놀드 슈왈츠 제네거, 이티에 관한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록키는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영화다. 그래서 록키 시리즈는 마지막 크리드 3까지 전부 보았지만 록키 발보아의 첫 이야기 록키 1이 제일 좋았다. 록키 1은 감격에, 감탄에, 감동까지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록키는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70년대 필라델피아로 왔다. 돈을 걸어 내기를 하는 3류 복서장에서 몸을 혹사시킨다. 당시 미국은 기회의 나라였다. 필라델피아는 미국 독립의 성지이며 그 해가 독립 200년이 되는 해였다. 미국은 기념을 하기 위한 이벤트가 필요했는데 크리드와 록키의, 슈퍼 복서와 삼류 복서의, 신과 인간의 대결을 부추긴다.


록키는 배운 것 없고 배우기 싫어서 몸으로 되는대로 먹고살자, 같은 정신과 투박한 말투인데 영화가 진행될수록 그 말투가 친숙해진다. 록키는 에드리안을 순수하게 사랑하는 마음이 드러나는 장면이 있는데 점점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배우기 싫어하는 록키가 그녀에게 다가가기 위해 쓸쓸한 집에서 거북이와 금붕어에게 농담 연습을 하는 장면이 찡하다.


어둡기만 한 필라델피아 골목은 록키의 앞날과도 같다. 눈을 감으면 보이는 세계, 그것이 록키 발보아의 미래였다. 하지만 록키는 자신도 힘들고 앞이 보이지 않지만 친구의 여동생을 악의 소굴에서 데리고 집으로 바래다주고, 주위를 돌아보며 사람들을 챙긴다. 그러면서도 새벽마다 시합을 위해 조깅을 할 때 시장 상인들이 록키에게 사과를 던져 준다.


눈물이 펑펑 흐르는 장면은 마지막 크리드와의 시합이다. 너무나 멋진 장면이다. 판정승을 한 크리드. 사람들은 록키에게 재시합을 묻는다. 록키의 얼굴은 마치 찰흙을 벽에 던져 흘러내리는 얼굴로 애드리안을 큰 소리로 찾는다. 군중 속에서 모자를 잃어버리고 록키에게 안기는 애드리안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장면이 가슴을 몇 번이나 두드린다. 록키는 승리하지 못했다. 하지만 진정한 승리가 무엇인지 사람들에게 알려 주었다. 꼭 이기지 않아도 이길 수 있다는 걸 보여주었다. 너무너무너무 좋은 영화다.


당시에 록키를 실제 권투선수로 착각했던 사람들도 많았다. 영화 속 사과를 던져주는 것도 실제로 권투 선수로 알고 록키에게 던져 주었는데 그대로 영화에 삽입이 되었다. 요즘도 어떤 사람들은 록키를 실제 권투 선수 역사에 있는 실존 선수로 알고 있다.


록키를 몇 번을 봤다. 지치고 쓰러질 때 록키의 주제가는 많이 이들에게 어김없이 힘을 주었다. 저 필라델피아 광장의 계단으로 뛰어 올라가 양손을 높이 든 록키가 되어, 보이지 않던 앞도 보이게 될 것만 같다. 록키보다 더 멋진 사람은 코치였다. 록키의 모든 캐릭터가 눈물의 포인트다.

https://youtu.be/K-YSlyhSues


그래서 이 책을 보면 80년대의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다른 에세이들과 또 다른 책이 이 책 ‘더 스크랩’이다. 그중에 존 어빙의 챕터를 보면 마흔의 존 어빙이 별거한 이야기를 하루키가 하고 있다.

존 어빙의 소설을 읽어본 사람이면 알겠지만 정말 길다, 아주 길고 몹시 길다. 또 너무 길어서 지겹다. 하지만 존 어빙은 소설이란 자고로 길어야지,라며 죽 길게 소설을 집필하고 있다. 멋있는 사람.


존 어빙의 소설이 영화가 되었을 때 직접 각본을 써서 각본상을 받기도 했는데 그건 어느 소설가도 이루지 못한 업적이었다. 트루먼 카포티도 레이먼드 카버도 이루지 못했었다. 카포티에 대해서도, 레이먼드 카버에 대해서도 할 말이 너무너무 많지만 넘어가자. 카포티는 영화 천재,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이 트루먼 카포티로 나온 영화 '카포티'가 있다. 영화를 좋아하고, 트루먼 카포티를 좋아한다면 롸잇 나우.


존 어빙을 보면 프란츠 슈베르트가 겹친다.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는 타인에게 들려줘도 너무 긴 나머지 지겨워할 뿐이었고, 가정 내에서 편안하게 연주하기에는 음악적으로 너무 어려워서 악보로 팔릴 것으로 생각되지 않았고, 사람들의 정신을 도발-환기시킬만한 적극성도 결여되어 있었다. 사회성 같은 건 전무한 거나 다름없었다. 돈도 명예도, 그 무엇도 아닌 것을 위해서 슈베르트는 피아노 소나타를 만들었다. 하지만 슈베르트가 죽고 난 후 가곡 ‘마왕’을 들어보면 눈물이 날 정도로 좋다. 특히 피아노 부분은 말이 흙을 파헤치고 달려 나가는 것 같다. 가곡의 시초가 된 마왕을 만들어낸 슈베르트를 사람들은 사후에 인정했다.


그리고 한 챕터에는 짧지만 카펜터스의 카렌 카펜터에 대해서도 언급을 했다. 카렌의 이혼 소식에 대해서 짤막하게 하루키가 언급했다. 카렌의 몰락은 자신과 가장 가까이 사람들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착한 이미지를 덮어 씌워서 어떠한 일탈도 하지 못하게 하고 결국 오빠의 천재적인 음악성에 가려져 그저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노래만 부르다 죽음을 맞이했다.


카렌은 오빠에게 인정받기 위해 드럼을 배워 드러머가 되어 공연에서 미치듯이 드럼을 연주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빠의 마음에 들지 않았고 카렌은 점점 음식을 거부하고 말라다가 결국 죽음을 맞이했다. 카렌의 목소리는 세기에 나올까 말까 한 목소리였는데 안타깝다.  https://youtu.be/6dJUnh6N8-U 카렌의 드럼 연주


하루키가 한국 독자들의 마음을 파고든 이유를 생각해 보면 - 요컨대 조정래 작가의 경우는 너무 완벽에 가까운 근대적 구축성과 완결적 천상성을 지니고 있어서 독자들이 아무런 불만 없이 그의 작품이 훌륭하다고 인정하면서도 그 완벽함에 답답해한다. 그에 비해 하루키는 비순열 친근함으로 사람들이 바라는 ‘부드러운 혼돈’을 추구한다. 하루키는 ‘느슨하고 심플한 의미에서 난해한’ 텍스트를 추구하는 경향이 새끼 고양이처럼 일반 독자들의 품을 파고 들어온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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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 신작 장편 소설 인터뷰 - 거리와 그 불확실한 벽


하루키 신작 장편 소설 인터뷰 – 4월


신작 장편 소설 ‘거리와 그 불확실한 벽’에 대해서 버즈피드 일본판에서 인터뷰를 한 것이고 원문을 보고 싶다면,라고 해도 원문은 아무도 안 볼 테니 그냥 인터뷰를 옮겨 본다. 하루키 찐 팬인 파인딩 하루키의 사이트에 들어가도 인터뷰 전문을 다 볼 수 있다. 잘 알겠지만 이 신작은 오래전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속 하나의 이야기로 발전된 것으로 미완성 소설이었는데 이번에 재 집필하여 출간하게 된 것이다. 이하 질문 표기 없이 하루키의 답변으로만.


코로나가 일본을 덮친 2020년 3월 초 이 소설을 쓰기 시작하여, 3년 정도 걸려 완성했습니다. 외출하는 일도 거의 없고, 장기 여행을 하는 일도 없는 그런 상당히 이상한, 긴장을 강요받는 환경 속에서 매일  이 소설을 끈질기게 쓰고 있었습니다. 마치 꿈 읽기가 도서관에서 오래된 꿈을 읽는 것처럼 말이죠.


미완성인 이 소설을 재 집필한 것은, 1973년의 핀볼까지 쓰게 되었고, 그 이후에 ‘거리와 그 불확실한 벽’을 썼으니 실질적인 세 번째 작품입니다. 당시에는 제가 정말 쓰고 싶었던 세계를 그리려고 시도했지만 아직 작가로서의 기술력이랄지 부족했습니다. 쓰고 싶은 것은 있었지만 전혀 쓸 수가 없었어요. 이런저런 사정까지 겹치면서 어중간한 형태로는 발표할 수 없었고, 그 당시에도 문예지에 발표하고 굉장히 후회했었습니다. 언젠가 제대로 된 형태로 완전히 끝맺음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목에 생선 가시가 걸린 것처럼 말이죠.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다 쓰고 나서도 ‘앞으로 2년만 더 기다려보자’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좀 더 깊이가 있는 것을 쓸 수 있겠지 생각했습니다. 드디어 다시 한번, 매듭을 짓지 못한 그 이야기와 마주 서자라는 결심이 섰던 거죠. 문장을 쓰는 기술도 그동안 많이 발전했을 거고요.


[하루키는 그 시점이 해변의 카프카를 쓰고 난 후라는 이야기를 인터뷰로 길게 한다]


80년대 문예지에 발표했던 제목과 이번 시작의 제목을 그대로 가져간 이유는 이 제목을 좋아했어요. 처음 쓸 당시의 작품 자체는 만족하지 못했지만, 이 제목만은 마음에 들어왔어요.


2015년 또 다른 인터뷰에서 다시 쓰고 싶은 작품은 없냐는 독자의 질문에 하루키는, 한 번 그런 적이 있는데 하지만 저는 앞으로는 더 이상 어떤 작품을 다시 쓰는 일은 없다고 한 부분에 대해서 질문을 받자 “제가 그런 말을 했던가요? 무책임한 말을 해버렸군요. 하하”


80년대 최초 버전인 '거리와 그 불확실한 벽‘의 스토리가 이어지는 것에 대한 질문을 받은 하루키는, 1부에 해당하는 이야기를 완전히 다시 새롭게 쓰면서 저 스스로도 제대로 다시 쓸 수 있게 되었다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과연 이것만으로 다시 쓰는 의미가 있을까'라는 의문을 가졌죠. 이런 의문이 남았기 때문에 일단 그렇게 1부만 다시 쓰고 그대로 두었습니다. 원래 다시 쓴다고 해도 발표를 하든 안 하든 상관없이 저 스스로 납득하기 위해서 쓴 것이니까요. 그렇게 반년 정도가 지나가면서 왠지 계속 이야기를 쓰고 싶어 지면서, 그 이야기에 다시 푹 빠져 버렸어요. 중년이 된 주인공이 이끄는 노인이 등장하고, 10대 소년이 나오죠. 결과적으로는 3세대가 입체적으로 얽히게 되는 전개가 됩니다.


2부는 내일, 아니 다음에.

https://www.buzzfeed.com/jp/harunayamazaki/haruki-murakami-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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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와 고로의 대담


무라카미 하루키가 이나가키 고로의 방송에 나와서 음악과 소설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이나가키 고로는 스맙의 멤버다. 영화배우로 가수로 종횡무진한데 스맙의 최고는 뭐니 뭐니 해도 기무타쿠. 이나가키 고로는 북 버라이어티 방송을 하고 있는데 게스트로 문인을 초대해서 방송을 한다. 거기에 하루키가 나와서 대담을 거쳤다.


이 방송에서 하루키와 고로는 ‘드라이브 마이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영화 속 음악을 한 곡 튼다.


또, 내가 너무나 사랑해 마지않는 소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하고 스키터 데이비스의 1962년의 곡 ‘디 앤드 오브 더 월드’를 튼다. 이 노래는 들어보면 누구나 다 아는 노래다. 이 노래 한 곡으로 스키터는 세계적인 가수가 되었다. 이 노래도 비틀스의 노래처럼 전 세계 어느 라디오에서 쉬지 않고 흘러나오고 있을 곡이다.


‘노르웨이 숲’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며 빌 에반스의 ‘왈츠 포 데비’를 튼다. 빌 에반스는 재즈 밴드와 함께 자신이 피아노로 ‘왈츠 포 데비’를 연주하는데 지금, 늦가을의 햇살이 힘을 잃어 벤치와 나뭇가지에 늘어질 때 들으면 정말 좋은 곡이다.


글렌 굴드 버전으로 베토벤 3번 협주곡 Op. 37도 나온다. https://youtu.be/G7EEACEefH0

이 방송을 듣고 있으면 서글서글 하루키와 고로는 나이를 초월하고 꽤 아이 같은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세계는 다중적이고 그 다른 세계를 이어주는 건 소설이라는 걸 두 사람은 여실히 알고 있는 것 같다. 방송은 2021년 10월에 방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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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라디오 에피소드


하루키가 라디오 방송을 직접 하면서 두 달에 한 번씩 하던 라디오 방송을 한 달에 한 번씩, 애정을 가지고 하면서 소소한 자신의 이야기, 주변의 이야기를 했다. 출처는 파인딩 하루키 사이트입니다.

하루키가 소설에 관해서 이야기를 한 부분도 있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3년의 핀볼, 노르웨이의 숲,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에 대해서 언급을 했는데 소설에 관해서는 이전에도 많이 이야기를 했기에 여기서는 다루지는 않겠다. 원본 사이트를 보면 재미있는 에피가 많다. ‘고양이를 씻기는 방식‘ 라든가, ‘스시, 소바 가게 이야기’등은 재미있다.


소바 가게 이야기 - 하루키


이번에도 역시 때때로 소바 가게 카운터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가볍게 손잡이를 잡고 메밀국수에 보리소주를(하루키도 이제 보리소주를 마시기도 하나 보다) 곁들이고 있었죠. 꽤 좋지 않나요? 제 옆으로 남은 3개 정도의 카운터 자리에 남녀 손님이 앉아 있었습니다. 남자는 40대, 여자는 20대 후반 정도로, 어떤 사이인지는 모르겠지만 계속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답니다. 그래서 듣고 싶지는 않았지만(큭큭 만약 남녀의 은밀한 이야기였다면 듣고 싶어서 보리소주를 더 주문했을까) 그들의 목소리가 제멋대로 들어와 버리니까 어쩔 수 없이 듣게 되었죠. 그런데 책에 대한 이야기가 갑자기 제 이야기로 옮겨갔고 이후 제 작품에 대한 싫은 소리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거 곤란해졌는걸’이라고 생각이 들었지만, 거기서 일어나 버리게 되면 뭔가 눈에 띌 거고 주문한 요리도 아직 나오지 않았고 어쩔 수 없이 한쪽 팔꿈치에 얼굴을 숨기며 가만히 있었답니다. (그런다고 하루키를 몰라볼 수 있을까) 그 남자 손님은 제 소설의 어떤 부분들이 얼마나 지루한가에 대해서 동석한 여성에게 얘기해 주고 있었죠. 그런데 전 괜찮았습니다. 작품이 비판받는 거야 당연한 일이니까요. 칭찬받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거죠. 그렇게 한창 얘기를 계속하다가 문득 그 남자 손님이 제 소설 모두를 독파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게다가 이야기의 세세한 부분까지 기억하고 있는 것이었어요. 두 사람의 대화에 불쑥 껴들면서 ‘그렇게 싫으면 확실하게 아예 읽지 않으면 좋지 않을까요?’라고 얘기하고 싶지만, 뭐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었죠. 도대체 뭘까요?


라면서 하루키는 소바를 먹었다란 느낌이 없을 정도로 말이죠.라고 했다. 하루키의 이런 주변의 작은 일들에 관한 에세이를 읽으면 늘 드는 생각이지만 저 두 사람은 어떻든 간에 이렇게 알려졌다는 것이다. 누군가, 이봐 지난번 무라카미 라디오에 사연 나온 남자 너 아니야? 너 매일 몰래 구석에서 하루키 소설을 읽고 있더니 비난만 가득하려고 읽었던 모양이군. 같은 소리를 들을 수도 있고. 어머 그 에피소드에 나온 여자가 저 라구요. 하지만 애인에게 들키면 큰일인데 어떡하지. 같은 일들이 휙휙 지나간다.


에피소드를 읽으면서 하루키가 소개하는 음악을 같이 듣는 것이 무엇보다 좋다. 별다른 이유는 없다. 하루키가 소개하니까 들으면 좋은 것이다.



하루키가 소개하는 음악

https://youtu.be/AIyiQISJy_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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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에 관심이 있고, 하루키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하루키의 북 커버 디자인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하루키의 북 커버 디자인은 출판하는 나라마다 다 다르다.


우리가 가장 많이 보는 북 커버는 우리나라, 일본, 미국인데 미국은 디자인의 미다스의 손 ‘칩 키드’가 하루키의 북 커버 디자인을 여럿 했다. 칩 키드는 영화 포스터부터 보는 순간 와 정말, 하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디자인이 지배하는 세상이 곧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세상이 디자인이 되어 가고 있다. 디자인되지 않는 세상은 사라질 것이다.라고 생각 된다.


나에게도 칩 키드 북커버 디자인의 카프카 온 더 쇼우가 있다. https://brunch.co.kr/@drillmasteer/2728


하루키 하면 이스라엘과 밀접하게 관계가 있다. 그 유명한 예루살렘 연설에서 ‘벽과 달걀’의 연설문은 전 세계를,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당연하지만 하루키의 모든 소설이 이스라엘에 출판이 되었는데 이스라엘의 유명한 디자이너 노마 바의 손을 거쳐 일관되면서 눈에 띄게 디자인을 했다. 노마 바의 눈에는 하루키는 일본 작가이고 일본이라는 느낌이 드러나는 디자인을 북 커버로 했지만 굉장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는 없다.


노마 바의 디자인은 심플 이즈 베스트다. 단순하다. 간단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명료하다. 노마 바의 디자인을 보면 한눈에 무엇을 말하는지 대번에 알 수 있다. 빙빙 돌리지 않는다.


예루살렘 연설이 2009년에 있었고 2012년부터 하루키의 북 커버를 노마 바가 도맡아서 하게 되었다. 해변의 카프카 북 커버를 보면 노마 바의 디자인 특징을 잘 알 수 있다.


노마 바의 그래픽 아트를 검색해서 보면 우와 하는 그래픽 디자인이 많다.

노마 바의 디자인이다. 한눈에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있다. 이 간결하고 단순한 색으로 말하고자 하는 모든 걸 표현했다.




미국순방 이후 아메리칸 파이만 생각나는 답답한 마음에 한 번 만들어봤다. 잡혀가는 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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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에서 개인적인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찾기 위해서는 크든 작든 철저한 자기 규제 같은 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꾹 참고 격렬하게 운동을 한 뒤에 마시는 시원한 맥주 같은 것이다. “그래, 바로 이 맛이야!” 하고 혼자 눈을 감고 자기도 모르는 새 중얼거리는 것 같은 즐거움, 그건 누가 뭐래도 ‘작지만 확실한 행복’의 참된 맛이다. 그리고 그러한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 없는 인생은 메마른 사막에 지나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 하루키


하루키처럼 어른이 된 사람들은 누구나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 있을 것이다. 나는 라디오를 매일 듣는데 라디오 속에는 티브이와 다르게 사람들의 너무나 소소하고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 하루 종일 흘러나온다. 고로 사람들은 생각만큼 메마른 사막처럼 지내지 않고 생각이상으로 자신만의 소확행을 확실하게 쫓아가고 있다.


때때로 문득 ‘혼자서 살아가는 것은 어차피 지기 위한 과정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이 ‘정말 피곤하네’라고 인정하면서도, 나름대로 힘껏 살아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개인이 개인으로서 살아가는 것, 그 존재 기반을 세계에 제시하는 것, 그것이 소설을 쓰는 의미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자세를 관찰하기 위해 인간은 가능한 한 신체를 건강하게 유지해 두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 하루키


느긋하지만 부지런하고, 타이트하고 고집스러울 만큼 자유한 영혼을 가지고 건강한 생각과 몸을 죽 끌고 가는 하루키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건강한 생각과 몸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은유이자 이데아인 것이다. 하루키는 통신판매로 싸구려 캐릭터 손목시계를 구입하고 좋아한다. 여러 개를 번갈아 차고 다니며 시간을 보는 즐거움을 누린다. 안달해 봤자, 기껏해야 이것이 인생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만든다는데, 나는 언제쯤 그런 생각을 가질 수 있을까.


나도 오래전에 통신판매, 쿠팡이겠지. 인터넷으로 주문한, 무려 이만 원이나 하는 감성의 돌핀 손목시계. 무려 와이파이로 시간을 정확하게 알아서 맞춰준다. 무려 배터리가 필요 없이 태양열로 생명을 유지한다. 사진 속 하루키의 시계 속에는 하루를 삼등분해서 먹기, 자기, 놀기로 나온다. 전자시계는 그렇게 나눌 수 없어 안타깝지만 삼분할을 한다면 당신은 어떤 식으로 나눌 수 있을까.

나의 손목시계는 스마트하지 않다.


사실 지금은 손목시계가 필요 없는 세상이다. 하지만 시간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서 그런지, 그렇기 때문인지 시계가 예전에 비해 세상에 더 늘어난 기분이다. 이제 더 이상 길거리에서 시간을 물어보는 사람은 없다. 손목시계가 필요 없는 시대인데 예전에 비해 손목에 시계를 차고 다니는 사람은 많아졌다. 손목시계의 종류와 질은 끝도 없이 올라가고 많아졌다. 무엇보다 스마트한 손목시계가 나타났다.


휴대전화에 시간이 나오기 때문에 시간 정도는 얼마든지 시계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되었다. 그럼에도 손목에 손목시계 하나씩은 대체로 차고 있다. 스마트워치가 나온 이후는 정말 손목시계는 누구나 차고 있다. 이 세상에 소멸한 것 중에 시간을 물어보는 사람 역시 소멸했다. 이제 그런 모습을 보려면 70년대 영화 고교얄개에서나 봐야 할 것 같다.


나의 어릴 적 사진을 보면 아버지의 손목시계를 차고 헐렁헐렁한 채로 사진을 찍은 모습이 많다. 아버지의 손목시계가 지금의 내가 차고 있는 그런 전자시계였다. 쇠로 된 시계줄이 있는, 손석희 시계 같은, 그런 전자시계. 팔목이 가는 나에게 아버지의 손목시계는 너무나 커서 헐렁했는데 그 착용감이 좋았다. 이렇게 비틀비틀 손목을 흔들면 시계의 무게가 느껴졌다. 꼭 아버지 옆에 붙어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또 어릴 때에는 외할머니의 시계도 좋아했다. 외할머니의 손목시계는 초시계였는데 초시계를 볼 줄도 모르면서 외할머니의 가죽 줄의 초침시계를 차고 있으면 뭔가 있어 보였다. 어이없는 분별력으로 잘도 차고 다녔다.

유튜브에는 시계 마니아들이 많아서 손목시계에 관한 영상들도 아주 많다. 손목시계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부품들이, 가장 작은 공간에, 가장 많이 빼곡하게 들어차서 시간을 재깍재깍 움직이는 것에서 알 수 없는 희열을 느낀다. 종류도 워낙 많아서 항공 크로노프 초침 시계 종류를 좋아하는 사람들, 다이버 시계 종류를 좋아하는 사람들, 가죽줄이 어울리는 시계 종류를 좋아하는 사람들, 전자시계를 좋아하는 사람들, 브랜드를 좋아하는 사람들 - 요컨대 남자들이 환장하는 롤렉스부터 오데마피게 로열오크, IWC, 파텍? 뭐더라? 태그호이어 등. 내가 좋아하는 지샥도 만 원짜리부터 아주 비싼 시계까지 너무나 다양하다.


내가 지샥 손목시계를 좋아하는 이유는 디자인도 마음에 들지만 나는 거의 시계를 빼지 않는다. 조깅을 할 때에도, 샤워를 할 때에도, 잠을 잘 때에도 차고 잔다. 풀었다가 찼다가 하는 게 너무 귀찮다. 그래서 충전해야 하는 스마트폰은 별로였다.


별로 비싸지 않기 때문에(6, 8만 원 정도) 부담 없이 착용하다가 고장 나거나 싫증이 나면 다른 시계로 갈아타면 되는데 아직 고장도, 싫증도 나지 않고 있다. 몇 년을 거의 매일 빼지 않고 착용하고 있는데 아직 새것 같다.


우리나라는 시계로 유명한 회사가 없다. 예전에 한독시계가 있었고, 거기서 돌핀 전자시계가 유명했다. 한독시계도 한없이 치열한 경쟁에서 밀려났는지 잘 볼 수 없다. 위의 사진처럼 돌핀 전자시계는 저렇게 생겼고 가격이 무척 저렴하고 태양빛으로 생명이 계속 이어지며, 와이파이로 시간을 아주 정확하게 알아서 맞춘다. 저렴한 데다 시계의 기능을 충실히 해줘서 내가 원하는 손목시계인데 잘 차고 다니지 않는다. 너무 굵다. 그게 단점인데 나에게는 너무나 큰 단점인 것이다.


사람들은 단순히 시간이 잘 간다고 해서 손목시계를 선택하지는 않는다. 며칠 전에 강변에서 조깅을 하다가 멈춰서 몸을 풀고 있는데 한 어머님이 와서 시간을 물어보았다. 나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서 시간을 보고 알려주었다. 손목에 멀쩡하게 시계를 착용하고 있으면서.

이 지샥은 선물로 받았는데 회색에 녹색이 섞여 있어서 실내에서 볼 때와 태양광이 있는 곳에서 볼 때의 색감이 다르다. 이런 색감은 나만의 생각일지 몰라도 대체로 호불호가 없는 것 같다. 이렇게 여러 손목시계를 다 합쳐도 조카에게 줘버린 애플워치 7의 가격에 못 미친다. 조카도 매일 충전해야 하는 스마트한 기기를 차고 다니지 않고 있어서 스마트한 기기가 인간 세계에 깊숙하게 들어오려면 배터리 문제를 구시렁구시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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