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도 가을의 쓸쓸함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꽁치의 맛에서 노년의 쓸쓸함과 남겨진 고독이 짙게 배어있다면 만추에서는 그에 비해 조금은 쓸쓸함이 덜 하다. 그리고 유쾌하게 그려진다. 꽁치의 맛이 초로에 남겨진 남자의 쓸쓸함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거라면 만추는 중년에 남겨진 여자의 외로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친구의 장례식을 치른 후 중년의 친구들이 친구의 아내인 아키코의 딸, 아야코가 시집갈 나이가 찼다는 걸 알고 혼삿길을 알아본다. 하지만 아야코는 엄마를 홀로 두고는 결혼하는 것이 싫다. 그러는 와중에 친구들 중에 아내가 죽고 홀로인 대학교수 히라야마가 미망인 아키코에게 마음이 있다는 걸 내비치면서 엄마와 딸의 혼례를 한꺼번에 해결하려고 남자들이 일을 벌인다. 남자들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아키코의 재혼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 사람들에게 꺼내게 되면서 오해가 일어난다.


이 영화 만추에는 남성 중심의 일본 사회의 모습이 다른 오즈의 영화보다 많이 나온다. 정작 아키코에게는 말도 없이 친구들끼리 히라야마를 아키코의 남편감으로 정해 놓고 그 말이 소문처럼 떠돌게 된다. 그 이야기를 들은 딸 아야코는 엄마와 싸움을 하며 갈등을 겪는다. 아야코는 엄마의 재혼 소식을 듣고 왜 말을 하지 않았냐고 엄마에게 대들지만 정작 엄마는 전혀 들은 이야기가 없다. 그래서 모녀는 그 일로 사이가 불편해진다.


그런데 시원시원한 강물의 흐름 같은 아야코의 친구가 등장해서 아버지들의 남성 중심의 사고방식에 대해서 또박또박 걸고넘어진다. 왜 당사자에게는 말도 없이 너네들끼리 얼씨구 해서 지금 그 집의 엄마와 딸의 관계도 틀어지고, 라면서 혼구녕을 낸다.


야스지로의 영화 속 여성들을 보면 80년대의 일본의 국민 첫사랑 같은 마츠다 세이코가 떠오른다. 그녀의 외모와 말투, 목소리, 몸짓과 눈빛은 일본이 바라는, 일본의 우월주의가 바라는 여성상이다. 여성은 일본의 왕은 될 수 없으나 왕의 옆에서 늘 보좌하고 지켜주는, 그리고 보호받는 여성상이 일본이 바라는 그런 여성상이다. 그랬는데 마츠다 세이코는 무대 위에서 내려오면 거침없이 연애를 하고, 남성을 바꾸고, 담배를 피우고 섹스를 했다. 게다가 그걸 숨기지도 않았다.


유튜브 지식공장장의 지식공장에도 잘 나와 있지만,

일본 사회는 마츠다 세이코에게 차가운 시선을 보냈다. 네가 무대 위에서 하는 행동이나 몸짓 노래는 여성스러운데 실제와 다르지 않느냐.라고 하니, 그때 마츠다 세이코는 자신의 여성성, 그러니까 일본이 바라는 부릿코(내숭을 떠는 여자)는 그저 콘셉트이며 아이돌은 여성스러워야 하니까 무대 위에서 그렇게 하는 것뿐이라고 일본의 미디어에 말했다. 그러면서 나의 사생활은 이것과는 별개다고 받아쳤다. 이런 발언을 한 마츠다 세이코는 일본 사회의 여성들에게는 뭔가 한줄기 빛처럼 느껴졌다. 마츠다 세이코는 일본이라는 거대한 여성의 틀에 정면으로 대들고 반박하는 멋진 여성이었던 것이다.


근래에 가장 인기 있는 드라마 ‘도망치는 것은 부끄럽지만~~’의 각키가 주연한 미쿠리는 일류 대학 출신에 석사학위도 있고 일도 잘하지만 회사의 정규직으로 취업이 되지 않는다. 미쿠리는 28살에 고학력이라는 것이 쓸데없는 것으로 치부되는 현재의 일본 현실이다.


그런데 야스지로의 영화 속 여성들의 모습은 그때부터 이런 벽에 깨질지라도 덤벼드는 달걀이었다. 그리고 하루키처럼 비록 시스템에 깨지는 달걀일지라도 달걀 편에 서겠다는 예술인들이 나타났다. 그 미미한 출발에 불을 붙인 사람이 위에서 말한 마츠다 세이코 같은 여성들이었다.


그래서 만추는 어떻게 되었냐 하면, 쓸쓸한 가을이지만 그렇게 쓸쓸하지만은 않다고 하는 오즈 야스지로 식의 결말로 끝이 난다. 아야코는 결혼을 하고 또 엄마 아키코는 딸을 축하하면서 끝이 난다. 늘 그렇듯이 오즈의 영화 속 여성들은 모두가 다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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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영화 휴일

이만희 감독의 영화로 휴일, 일요일 하루 동안 일어나는 이야기지만 그 속에는 당시의 내몰리는 청춘들의 보이지 않는 휴일의 끝없는 결락과 우울 그리고 불안을 소설처럼 그리고 있다.

그래서 68년에 만들어진 영화인데 프랑스의 누벨바그 보다 더 모호하고 비극적이며 우울하여 영화는 상영 금지처분을 받았다. 그리고 영화는 내내 빛을 보지 못하다가 2000년대에 극장에서 상영을 하게 되었다.

서울의 복잡하고 문명의 건물들이 빼곡한 곳에서 돈이 없어 갈곳 없는 주인공과 여주인공의 모습이 대비됨을 잘 보여준다. 그들은 거대한 서울의 한복판이지만 어디에도 갈 데가 없다. 그들이 갈 곳이라는 건 남산도서관 뒤의 바람이 심하게 부는 공원이나 육교 같은 곳뿐이다.

영화는 임신을 한 여주인공의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빈털터리 주인공이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돈을 빌리는 내용을 보여준다. 그런 장면들이 화면의 전환, 콘트라스트가 강한 흑백과 신시사이저의 기괴한 배경음악이 주인공이 처한 우울의 극치를 올려준다.

주인공들의 인물보다는 영화음악, 카메라의 클로즈업, 배경이 주는 압박감, 그리고 감정의 절제와 폭발이 주는 생과 사의 경계를 느끼게 하는 수작이다. 의사는 허욱과 지연에게 수술을 하지 않으면 지연이 위험하다고 한다. 하지만 수술도 성공하지 못하리라 말한다. 지연은 수술을 하고 허욱은 밖을 떠돌며 술을 마시다 아이엘싸롱 바에서 고독한 한 여자를 만난다. 고독은 고독을 알아보고 외로움이 가득한 휴일을 어떻게든 버티려는 두 사람은 새벽까지 술집을 찾아다니며 마시고 또 마시며 취하고 두 사람은 공사장으로 향한다.

미래는 보이지 않고 눈을 감으면 보이는 세계가 미래인 허욱. 일요일은 오전에는 빨리 지나갔으면 하지만 밤이 올수록 초조해지는 이상한 날이다, 일요일마다 지연을 만나는 허욱은 일요일이 너무 기다려지지만 일요일이 오는 게 싫다. 빈털터리라 지연을 다방에도 데리고 갈 수 없는 신세다.

공사장에서 바에서 만난 여자와 몸을 섞은 뒤 새벽에 성당의 종소리를 듣고서야 수술대에 오른 지연이 생각이 난다. 갈 데가 있어 갔다가 오겠다고 하고, 여자는 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안다(이런 부분은 꼭 홍상수의 영화에서 종종 보는 장면이다). 일요일에 만났기 때문에 약속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여자는 말한다.

허욱이 한달음에 달려 병원으로 지연의 수술 결과를 보러 오지만 결국 눈을 뜨지 못한 지연. 지연은 그렇게 낙태를 하다 비참하게 죽고 만다. 허욱은 휴일이면 지연과의 추억만을 잔뜩 끌어안고 암울하고 또 우울하게 보내게 된다. 영화는 지연과 행복했던 지난날을 보내는 허욱의 추억을 편집하며 보여준다. 추억이 가득한 서울의 이곳저곳을 허욱은 미친 듯이 다닌다. 그리고 전철을 타지만 목적지가 없어진 허욱. 추억 속 지연의 아름다운 미소가 잔뜩 나오며 영화는 끝이 난다.


허욱이 돈을 빌리는 동안 모래바람을 맞으며 허욱만을 기다리는 지연의 모습이 교차 되면서 보여주는데 묘하게 우울하고 아주 불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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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똑똑한 영화 찌질이들이 한곳에 왕창 나오는 영화다. 홍상수는 자신의 그 신묘한 찌질함과 여성관과 불륜을 매번 영화에 드러내는 세계 유일한 감독이지 않을까. 무서운 사랑을 찌질함으로 덮어버릴 줄 아는 감독, 진정한 일탈의 자유 속에는 무시무시한 시선이 있음을 우화적 영상으로 나타내는 유일무이한 감독일 것이다. 그 영화적 똑똑함이 부럽고 좋다. 

어느 한식당, 영화 속에서 중원 형이 주인공인 감독에게 쪼잔한 놈이라고 대놓고 말한다. 쪼잔한 놈. 홍상수에게 하는 말이다. 자신은 그런 각본을 그냥 써버렸다. 그리고 개 찌질한 이야기들이 술집에서 오고 간다. 완전 찌질한 인간과 좀 찌질한 인간과 좀 덜 찌질한 인간이 한식집에서 술을 몇 병이나 마시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홍상수 영화는 재미가 없는데 재미있다. 재미없는 재미가 있다. 북촌방향에는 소설이라는 술집이 나온다. 그곳에서 많은 이야기를 주인공들이 하지만 뭐 그렇고 그런, 찌질한 고학력자들의, 찌질한 일상 이야기들 뿐이다. 그 찌질함 속에 인간의 일상과 일탈이 다 들어가 있다.

매 영화가 비슷한 것 같은데 다 다르다. 강변 호텔은 시 같아서 시적이고, 그때는 맞고~는 판타지적이고, 도망친 여자는 꼭 전시회를 보는 것 같더라. 북촌방향에는 김보경이 일인이역으로 나온다. 이 역시 판타지 적이다. 북촌방향의 김보경은 아주 예쁘다. 김보경이 술집 소설의 주인 예전으로 나올 때는 그저 예쁘게만 나오지만 감독을 사랑하는 경진으로 나올 때는 찌질함에 스며들어 연기를 한다. 김보경의 기담이나 진숙이 누나나 드라마에서도 좋았지만 북촌방향의 담배 두 개비 빌리려는 찌질한 경진이를 너무나 잘 표현했다. 김보경이 작년에 암으로 죽었을 때 이 북촌방향이 생각이 났다.

홍상수 영화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은 실제로 영화적 커리어가 있어서 망해도 상관없어!라고 생각을 가지지만 내면의 그 찌질함을 영화로 표현하고픈 배우들이 나오거나, 진실로 홍상수의 그 대본 없는 대본에 있는 그 시나리오적 배우로 한 번 영화에 나를 걸어보고픈 배우가 나오거나. 아무튼 홍상수의 영화를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영화 뒷이야기를 하자면 중원 역의 김의성은 극 중에서 베우이며 영화 한 편 출연 후에도 인기가 없어 베트남으로 가 사업을 했지만 쫄닥 망하고 다시 온 걸로 나온다. 그건 김의성 배우의 실제 경험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또 북촌방향이 칸에 초대를 받아서 배우들이 다 갔는데 김보경은 참석을 하지 못했다. 이미 그때부터 수술을 하고 몸이 아팠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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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용서받지 못한 밤’을 보면 유키히로는 스무 살 딸을 혼자서 키웠다. 그에게는 하나의 비밀이 있다. 딸 유미가 네 살 때 아내를 죽였다는 것이다. 당시에 누구도 모르게 그 사실을 숨기고 잘 처리했다고 믿었는데 15년 뒤에 누군가가 비밀을 안다며 돈을 요구한다. 덱스터의 기나긴 여정이 끝나고 10년 후에 덱스터는 자신의 이름을 바꾸고 마이애미에서 멀리 떨어진 뉴욕의 북부 작은 마을 아이언 레이크에서 살아가는데 덱스터 모건, 자신만큼 아니 자신보다 더 큰 어둠의 충동을 지닌 아들 해리슨이 나타난다. 그러면서 덱스터는 뉴 블러드 시즌이 시작된다.


덱스터가 10년 동안 시리즈 8까지 방영이 되었다. 대단했다. 엄청났다. 실로 조마조마하며 아슬아슬했고 통쾌했으며 사이코패스 살인마 덱스터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었다. 시리즈 8 이후 10년 지난 21년에 시리즈 9, 덱스터의 뉴 블러드가 다시 방영했다. 이 시즌으로 이제 다시는 덱스터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건 영화를 보면 된다.


2006년에 했던 덱스터 시즌 1이 케이블 티브이를 통해서 다시 방영을 시작했다. 그 이름만으로도 얼마나 흥분되고 멋지고 짜릿하며 친근한가. 덱스터는 법적으로는 사이코 범죄자이나 사회규범적으로는 히어로인 셈이다. 현실에서 이런 히어로를 우리는 얼마나 바라고 있는가. 그건 부인할 수 없다. 모든 사람들이 사형을 바란다는 악질 범죄자도 1심, 2심, 항소, 대법까지 가서 집행유예나 5년! 같은 선고를 받는 말도 안 되는 일을 우리는 그동안 많이 접했다. 심지어는 사회가 매장시키고픈 죄를 지은 가해자가 형을 살고 나오면 정부에서 보조금으로 지원을 해주며 사람들에게서 보호하기 위해 공적인 인력을 배치하기도 한다.

 

법으로 해결이 안 되는, 법망을 교묘하게 피해 가며 성폭행을 일삼으며 심지어 죽여서 토막을 내는 사이코패스 범죄자들, 경찰이 잡지 못하는 악질범을 덱스터 모건이 심판을 한다. 덱스터 내부의 극심한 어둠과 살인 충동으로 사회악을 찾아서 처단을 한다. 물론 법적으로는 덱스터는 한낱 범죄자일 뿐이지만 법망을 피해 지속적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사이코 범죄자는 덱스터에 의해 처단이 되고 나면 다시는 그런 짓을 할 수 없기에 우리는 덱스터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우리 마음속에 그런 모습을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는 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느님이 아니고 부처님도 아니기 때문에 사회 속에서 법망을 피해 다니며 죄를 짓는 인간들 - 소년범, 성범죄자들, 그루밍 범죄자, 악질 스토커들은 사라졌음 하는 것이다.


덱스터는 경찰이다. 덱스터는 혈흔 분석가로 아주 뛰어난 천재다. 살인 현장에 있는 혈액을 분석하여 범죄자를 잡는다. 이는 겉으로 드러난 덱스터의 모습이다. 하지만 이렇게 잡힌 범죄자는 보석금이나 변호사를 잘 두거나 재판정에서 배심원들의 마음을 움직이면 형을 살지 않을 수 있다. 또 덱스터는 모두에게 친근하며 문제가 있는 애인에게도 자상하며 애인의 아이들에게도 멋진 아저씨다. 하나뿐인 경찰 여동생 데브라에게는 믿음직한 오빠로서 도움을 줄 수 있는 한 도움을 주는 자상한 오빠다. 데브라의 아버지 헤리는 덱스터가 2살 무렵 입양을 했다. 데브라와 덱스터는 친남매는 아니지만 그 이상으로 데브라는 덱스터에게 모든 문제를 털어놓는다.


그럼에도 덱스터는 사이코 범죄자를 찾아서 그 누구도 모르게 토막 내어 처리를 하고 범죄자의 피 한 방울을 전리품처럼 가지고 있는다. 덱스터는 모든 면에서 완벽하려고 하고 그렇게 하고 있다. 덱스터가 그게 가능한 것이, 그런 완벽에 가까운 생활을 가능케 하는 건 감정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관계에 나타나는 감정은 덱스터의 연극일 뿐이다. 덱스터는 피가 난자한 살인 현장에서는 재빠르게 뇌가 회전을 하지만 애인이 지금 이 순간 덱스터와의 조금 불안한 관계에 대해서는 어찌할 바를 모른다. 그래서 시즌이 넘어갈수록 덱스터는 인간의 감정을 하나씩 알아가고 덱스터가 어째서 감정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이코패스가 되었는지 알 수 있다.


덱스터에게는 살인하고픈 강렬한 충동, 이 억누를 수 없고 고통과도 같은 엄청난 충동을, 법망을 피해 교묘히 살인을 하는 사이코패스를 잡아서 토막 내는 데 사용을 한다. 다른 사이코패스의 무차별적 살인과 다른 점은 덱스터는 양 아버지, 경찰이었던 헤리에게서 어린 시절부터 훈련을 받았기 때문이다. 살인충동을 억누를 수 없어 어차피 살인을 해야 한다면 살인자들, 경찰이 잡지 못하는 – 그래서 법망을 피해 가는 아주 나쁜 악질 범죄자들을 죽이도록 훈련을 받았다. 사이코패스는 사이코패스가 잡아야 한다는 덱스터. 그것이 우리가, 전 세계가 10년 동안 덱스터의 시리즈에 매료되었던 이유였다. 시즌 1에서 혈흔 분석가 사이크 패스를 알아본 살인자는 매춘여성들을 죽이면서 토막을 내고 피를 다 뽑아서 덱스터에게 자신을 찾아오라는 신호를 보낸다. 그렇게 시작된다.


덱스터가 티브이에서 방영한 시점이 묘하게도 계곡 사건의 주인공 이은해가 구속이 되는 시기다. 이은해는 현재 그 어떤 한국사람에게도 면죄부를 받을 수 없는 인간이다. 태어나기를 죄를 짓기 위해 태어난 인간처럼 보인다. 이은해와 요만큼이라도 관계가 있는 사람은 대부분 불이익을 다하거나 이은해에게 받아야 할 무엇인가를 받지 못했다는 기사가 올라오고 있다. 오죽하면 현재의 연인 조현수를 살린 것이 이번에 이은해의 구속이라는 말까지 있다. 노예인 조현수 역시 시간이 지나 주인인 이은해의 관심이 떨어졌을 때 어떻게 당했을지는 누구도 모르는 일이다. 이렇게 대국민 뒷골을 아프게 하며 도망 다니다 잡혔는데 – 자수했다고 하면서도 질문에 묵묵부답인 이런 범죄자가 사회적 잣대로는 무기징역 내지는 사형감이다. 하지만 전혀 그렇게 되지 않을 거라는 걸 우리는 다 알고 있다. 법정에서는 확실한 물증이니, 초범이니, 정신적인 감정 결과 문제가, 같은 선고로 우리의 생각과는 다르게 흐지부지하여 실형이 어떻게 떨어질지는 의문스럽기만 하다.


저런 살인자들, 사람을 죽이고 토막을 내거나 죽인 사람을 가지고 노는 그런 사람을 우리는 살면서 몇이나 볼까? 이런 거 한 번 생각해본 사람이 있을까. 왜냐하면 내가 팔을 뻗는 울타리 안에는 평화, 정의, 행복만이 가득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호러블 한 것이 없다. 그리고 살면서 검사를 단 한 번도 만나지 않는 사람이 수두룩할 정도로 살인자를 만나는 일도 드물다. 하지만 2년 동안 근무한 구치소에서 나는 범죄자들을 아주 많이 만났다. 그들 모두 밖에서는 아이들과 놀아주는 착한 아빠, 다정한 남편, 능력 있는 사장이었다.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을 우리는 늘 잊어버리고 산다. 우리의 문제라면 금방 까먹는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고유정의 일은 다 잊어버렸다. 치밀한 계획하에 남편을 죽이고 토막을 내서 유기한 혐의로 무기징역을 받고 복역 중인 고유정. 하지만 지금과 같은 사이코패스 정신으로 가면을 쓰고 조신하게 20년 복역 뒤에는 가석방을 신청할 수도 있다고 한다.


현실에도 덱스터 모건 같은 사람이 있으면 좋겠지만 그럴 수는 없다. 그래서 지속적으로 이 살인자들에 대한 사건과 문제 해결에 대한 논의가 지속되어야 하지만 사람들은 지나간 일에는 크게 관심이 없다. 새로운 사건은 매일 터지며 새로운 소식을 우리는 원하고 바라기 때문이다. 아마 그렇게 이번 사건의 이은해도 곧 잊히게 될 것이다.


덱스터를 보면 경찰을 죽인 범인이 석방이 되어서 허망한 표정의 아버지 헤리에게 어렸던 덱스터가 그랬다.

“그건 불공평하잖아요.”

“인생은 원래 불공평하단다. 덱스터.”

시즌 9까지 사람들이 빠져 들어서 볼 수 있었던 것은 보는 이들을 혼란스럽게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도중에 덱스터는 인간의 감정을 하나씩 알아가면서 점점 인간화가 되어서 실수도 하게 되고, 들키기도 하는 등 아주 아슬아슬하고 조마조마한 순간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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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2-04-22 13: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최고의 미드중 하나죠.
10년이면 덱스터도 많이 늙었겠네요. 욕이 찰지던 동생도, 썰렁한 유머의 대머리도, 의리파 뚱뚱이 경사도, 덱스터를 거의 잡을뻔한 빼빼 형사도 모든 늙어서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하네요.

교관 2022-04-23 11:37   좋아요 0 | URL
시즌9에서는 데브라가 헤리의 역할을 해요. 하얀 설원 속에서 펼쳐지는 피의 향연 ㅎㅎ. 시즌9를 마지막으로 이제 덱스터는 영영 볼 수 없어요 엉엉
 


4화부터는 감독이 두 명으로 1,2,3화를 연출했던 감독에서 바뀌었다. 그래서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조금 느낌이 다른데? 하는 생각이 든다. 선자의 가난하고 누구도 환영하지 않는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조촐하고 우울한 결혼식에서 선자의 어머니는 담담하다.

선자의 손을 꼭 잡아 줄 뿐이다. 그러나 선자가 떠나가는 선착장에서 오열을 한다. 어머니이기 전에 여자였던 것이다. 4화부터는 이렇게 연출이 되어 간다. 하지만 시리즈 말미에 가면 다시 초반의 감독이 메가폰을 잡는다.

4화에서는 내가 믿고 있는, 믿어야만 하는, 그래서 나의 온 미래가 걸려 있는 거대한 압박에서 벗어났을 때의 해방감에서 오는 큰 기쁨과 찌꺼기처럼 깔려있던 미미한 그리움이 일렁이다 폭발하게 되는 건 나도 모르게 내가 그동안 맡았던 내 삶의 냄새, 내 삶의 촉감, 내 삶의 소리와 바람을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나의 감장이 터져 나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특히 나의 노래가 이토록 마음의 연약한 부분을 건드리고 건드려 억압에 대해 강하게 분노를 드러냈다. 하얀 드레스에 번지는 붉은 피가 안타깝고 슬프게 보이는 건 비록 영화 속의 모습뿐만 아니라 현실의 우크라이나의 모습도 보이기 때문이다. 파친코는 여러모로 보는 재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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