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스러움과 귀여움을 동시에 지니기 힘든 이 세상에 그 어려운 두 가지 길을 가고 있는 우영우 변호사 보는 재미에 홀딱 빠졌다. 어떤 정신과 전문의 유튜버는 우영우의 자폐에 대해서 알아보기도 하고 유튜브 알고리즘이 썸네일 절반을 우영우로 도배하고 있을 정도다.

 

한 회당 에피가 끝나는 이야기도 좋고, 우영우 주위의 사람들도 좋다. 단지 우영우 변호사의 사무실 창문 뒤의 밖의 풍경이 사진이라 전혀 움직임이 없어서 보면서 어? 하는 정도를 빼면 우영우 보는 재미가 너무 좋다.


우영우 변호사를 보면 드라마 속에 알게 모르게 둥근 동그라미가 아주 많이 나온다. 우영우의 이름 속에서 동그라미가 많고 우영우가 가장 좋아하는 김밥도 둥근 동그라미다. 절친의 이름마저 동그라미, 우영우에게 가장 난관도 뱅뱅 돌아가는 동그란 회전문이다.


유영석의 푸른 하늘이 부른 ‘네모의 꿈’을 보면 세상은 온통 네모네모다. 모서리가 있어서 자칫 찔리면 아프다. 네모난 침대에 일어나, 네모난 창문으로 보이는 풍경, 네모난 문을 열고, 네모난 테이블에 앉고, 네모난 조간신문, 네모난 책가방, 네모난 책과 네모난 버스, 네모난 건물, 네모난 학교, 네모난 교실, 네모난 컴퓨터, 네모난 달력에 그려진 똑같은 하루. 거기에 요즘은 네모난 태블릿에 네모난 휴대전화까지.


그러나 이 딱딱한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둥글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 갈수록 점점 마음이 모서리가 아픈 네모난 마음으로 변해간다. 그때 마음이 온통 둥글둥글한 고래 같은 우영우 변호사가 나타나 그들의 마음에 날 선 모서리를 깎아준다. 우영우라는 특별한 사람을 만나 사람의 ㅁ이 사랑의 ㅇ으로 바뀐다. 이미 첫 화에서 집주인 부부의 다리미 사건의 변호를 맡으며 그 특별함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딱딱한 모서리가 있는 네모 같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특별한 둥근 동그라미 같은 마음을 심어주는 우영우 변호사는 의뢰인을 진정 마음으로 대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으어? 흐어? 응? ㅋㅋㅋ 아이구 깜찍한 생명체야.


한바다, 바다도 왜 그런지 둥근 이미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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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커의 재미있는 포인트가 있다.



1.

소영의 아이유가 싸가지 부부에게 욕을 퍼부을 때다. 지들의 상판대기는 생각지도 않고 얼굴을 가지고 어땠네 어쨌네 할 때 소영이가 앞으로 나와서 야 이 이런 씨발 라먹을 수박 새끼들아 라고 술술 욕을 할 때 마치 소화제를 먹은 기분이다. 욕이 이렇게 듣기 좋을 수 있다니. 그동안 영화 속에서 욕은 임창정이나 조폭들의 전유물처럼 느껴졌는데 이거 완전 일상적인 욕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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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은 소설과 영화 속에서 양념이 된다. 과하거나 어설프게 하면 독이 된다. 덱스터 시리즈가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은 이유 중 하나도 데브라의 찰진 욕이 한몫했다. 소설 속에서도 욕이 나오면 집중이 더 잘 된다. 김영하의 '너의 목소리가 들려'에서도, 영화 '박화영'에서도 듣도 보도 못한 욕들이 파도를 이룬다. 하지만 과하지 않다.


우리는 의지와 관계없이 태어나 삶을 이어간다. 원하는 삶을 사는 사람도 있고 원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도 그 삶을 얻기 위해 원하지 않는 부분을 이겨냈기에 그 삶을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 사이에서 욕을 통해서 카타르시스를 얻기도 한다. 욕이라는 건 나보다 못한 사람이나, 나보다 약한 사람에게 하는 것보다 영화 속 소영이가 부부에게 하는 식의 욕은 시원하다. 예전 막영(막돼먹은 영애 씨)에서 김나영이 사무실에서 갑질을 못 견뎌 부장과 까칠한 여선배에게 욕을 퍼부으며 사표 던질 때 모두가 시원했다. 욕은 그렇게 우리의 삶을 파고들었다. 욕 한 마디 못 하면서 사람을 괴롭히는 괴물 같은 인간들보다 욕할 줄 아는 소영이가 보기 좋았다.



2.

그다음 포인트는 소영과 상현과 동수가 우성이를 데리고 가는 중에 꼬마 해진이까지 껴서 가족 아닌 가족이 되어서 자동세차 기계를 통과할 때 실제 가족보다 더 가족 같았을 때다. 이 장면에서 괜스레 가슴이 뜨거워졌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가족이라는 건 가족이 아닌 완전히 다른 사람을 만나 관계를 맺고 가족을 이룬다. 그래서 가족이 아주 친밀하고 행복할 것 같지만 가족이라 더 싫고 보기 싫은 경우도 많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가족에게 다 버림받은 사람들이다. 상현도 딸과 아내에게 버림을 받았고 동수도 버려진 아이로 혼자서 지냈다. 소영 역시 자신의 아이가 자신과 같은 삶을 살까 봐 두려워 좋은 집안에 보내려 한다. 그리고 해진이는 아직 가족의 품이 그리운 나이. 엄마 아빠가 필요하지만 부모에게 버려진 자신의 삶을 받아들였다.


이들이 모여 가족 아닌 가족이 되었다. 이 가족이 세차기계를 통과할 때는 정말 행복하게 보인다. 가족 중에 어린이가 없었다면 작은 일에도 이렇게 재미있지 않을 수 있다. 지금 집에 해진이 같은 아이가 있으면 매일이 전쟁통이며 매일이 재미있고 매일이 꽃과 같을 수 있다.



3.

수진의 배두나와 이형사의 이주영이 잠복근무 때문에 꼬질꼬질 씻지 못한 얼굴로 임무를 수행하는 모습을 볼 때다. 얼굴이 꼬질꼬질하다. 배두나의 표정은 늘 일그러져있고 무표정하다. 범죄자들을 바라보는 태도가 얼굴에 나타난다. 배두나에게도 곧 가족을 이루려는 남자 친구가 있다. 하지만 남자 친구와 그렇게 살가운 사이가 아니다.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가족상이 우리 대부분의 가족들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가장 가까이 있지만 알 수 없는 존재들이다. 어떤 이는 가족에게 전화가 오면 반가워하지만 또 어떤 사람은 가족에게 전화가 온다는 건 어떤 일이 터졌다는 연락이다. 그래서 가족은 식구보다 더 못한 관계일지도 모른다.


수진(배두나)은 매일 상현과 동수의 현장을 잡기 위해 꼬질꼬질한 채로 빌어먹을 얼굴을 하고 있다. 정말 배우들은 영화 속에서 다 까발려야 하니까 이런 몰골로 수영과 동수와 상현을 내내 시선에서 놓치지 않으려 한다. 그렇게 꼬질꼬질 늙어 보이던 얼굴의 배두나가 마지막 우성이가 3살이 되었을 때, 마치 다시 아가씨로 돌아간 듯한 얼굴이 된다. 깨끗하고, 맑고, 밝아졌다. 소원했던 남자 친구와 가족을 이루고 꼬질꼬질했던 얼굴에 빛이 들어왔다. 그 모습도 아주 좋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 13화에서 폰으로 듣고 있을 지안에게 동훈이 이런 말을 한다. “죽고 싶은 와중에, 죽지 마라, 당신 괜찮은 사람이다, 파이팅 해라. 그렇게 응원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 숨이 쉬어져. 고맙다. 옆에 있어줘서.” “이런 말을 누구한테 해. 어떻게 볼 지 뻔히 아는데.” 동훈의 말을 도청해서 들은 지안은 눈물을 흘린다.


고맙다. 옆에 있어줘서.


가장 아플 때 위안이 되고 위로받고 싶은 사람도 가족이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포근하게 있고 싶은 게 또 우리들, 나약해마지 않는 인간이다. 수진(배두나)은 남자 친구와 결혼을 하고, 소영 대신 그렇게 부모를 찾던 우성이를 수진이가 키우면서 가족에 대해서 눈을 뜨고 알아가는 모습이 짧은 장면으로 크게 화면을 뚫고 비친다.  



4.

그다음 포인트는  여관에서 수영이가 우성이를 안고 등을 두드릴 때 동수가 우성이를 이렇게 안으라며 조언하고 수영이가 안다고 하며 둘이 티격태격 같은 티키타카 할 때, 그때 수영(아이유)의 그 표정. 그 표정은 대단히 일상적이라 영화 속에서 쉽게 볼 수 없을 것 같은데 아이유가 그런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편의점에 가면서 다녀오겠슴다~같은 그 말투.


너무나 지극히 일상적인 표정과 말투라 영화가 아니라 그 부분은 마치 다큐를 보는 것 같았다. 영화는 영화적 언어가 있다. 그래서 늘 경상도 사투리가 도마 위에 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적 작법으로는 영화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게 맞다. 영화 속에서 너무 일상적이면 오히려 이질감이 드러나기도 한다. 진짜 사투리를 쓰는 배우가 진짜 사투리를 쓰는 것보다 어쩌면 최민식의 그 부산 사투리가 영화 속에서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소영의 일상적인 말투와 표정은 가족에게서 멀어졌던 그녀의 표독함과 세상을 악으로 보는 그녀 마음속에 일상에 스며들고 싶어 하는 안타까움이 보였다.



5.

마지막으로 해진이의 어른스러운 어린이 짓이 깜찍하고 귀엽지만 마음속에 어른으로 이미 커 버린 모습이 딱하여서 안타까운 모습일 때다. 해진이는 영화 내내 웃음을 잃지 않는다. 아이가 내내 웃을 수만은 없다. 아이들은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기 때문에 울고, 떼쓰고, 소리 지르고, 막 달려야 한다. 그러나 해진이도 부모에게 버려졌다. 자신의 처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상현과 동수를 아빠와 삼촌으로 흡수하려고 한다. 아이이지만 어른이 된 것이다. 누구도 해진이에게 어른이 되라고 하지 않았지만 해진이는 그만 자신도 모르게 어른이 되었다.


어린 꼬꼬마 해진이가 누워서 “소영아, 소영이도 태어나줘서 고마워”라고 하던 해진이의 모습에서 해진이의 눈빛이 그때 잠깐 천사가 된 것 같았다. 해진이가 부르는 이름에 내 이름을 넣는다면 나는 정말 태어나서 고마운 존재일까, 같은 생각이 들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는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생각하며 보면 참 재미있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의 케이타와 류세이, 그리고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스즈처럼 우성이도 앞으로 어떤 생활을 하며 지낼까, 열린 결말이 마음으로 생각하게 한다.

이 포스터가 마음에 든다. 마음이 아프고 병든 사람들이 만나서 가족을 이루어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다. 우성이 아니었다면 이들은 만나지 않았을 인연들인데 어쩌다가 이렇게 가족이 되었다. 이 세상의 모든 해진이와 우성이가 영차영차 열심히 살아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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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녀석에게 강수연이 죽어서 안타깝다고 했다. 그러자 그 녀석이 무슨 소리야? 강수연 안 죽었어.라고 하는 것이다. 아니야 일전에 죽었다고 뉴스가 났잖아. 그러니까 그 녀석이 어이없다는 듯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를 보여 주었다. 봐, 이렇게 살아 있잖아. 영화를 기억하는 내내 강수연은 죽지 않고 살아있어.


그래,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에서 미미는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공부가 뒷전인 철수와 천재 보물섬과 함께 살아 있었다. 철수는 술을 마시며 하는 생각이 어떻게 하면 미미를 꼬실까,였다. 파릇파릇 청춘으로 미미는 살아 있다. 마시는 술도 맛있다. 골치 아프게 사회문제로 고민하면서 술을 마시지 않아도 된다.


철수 녀석에게는 법학과에 다니는 천재 보물섬이 있다. 보물섬은 그 어렵다는 법학과에도 수석을 먹고 들어왔다. 독서실에서 먹고 자고 할 정도로 열심히 공부를 하는 보물섬은 철수와 친하게 지내면서 매일 술자리에서 철수의 고민, 미미를 어떻게 꼬시는가 하는 범우주적 문제에 봉착한다.


미미는 발랄하다. 철수 못지않게 공부와는 거리가 멀다. 레미제라블이 장발장이 쓴 줄 안다. 상식에서 벗어나고 상식을 파괴하고 상식과는 친하지 않다. 그러거나 말거나 미미의 강수연은 예쁘기만 하다. 이들은 친해지면서 맨날 놀 궁리만 찾고 술만 마시다가 보물섬이 쓰러진다. 미미와 철수는 보물섬의 병을 알게 되면서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보물섬은 공부도 일등이며 권투를 배워서 깡패들과도 맞서서 이겨버리는 녀석이었다. 그리고 뇌성마비를 가진 아이들에게 공부도 가르치는데 이제 곧 죽게 된다. 그리고 보물섬이 죽고 난 후에 미미와 철수는 친구인 보물섬의 죽음을 진정으로 슬퍼한다. 미미에게 굳이 요즘의 휴대전화 같은 건 필요하지 않다. 그저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아있으면 된다.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고 말하던 당찬 미미의 강수연이었다.


그의 영화를 보고 기억한다면 강수연은 내내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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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서희는 대한민국 배우다. 공포 오컬트 영화 ‘제8일의 밤’이 재미있을 법 했지만, 인디애나 존스와 미이라와 전설의 고향과 사다코의 혼재가 영화를 이상한 방향으로 끌고 가더니 요단강을 건너 버리고 말았다. 온통 연기 잘 하는 배우들이 나오는데 왜 재미가 없나? 연출 때문이다. 그나마 고서희 같은 배우가 조연으로 섬뜩함을 전달하고 있어서 무서움을 느낄 수 있어서 병맛 영화지만 그나마 볼만했다.

고서희는 내가 좋아하는 영화에 다 나왔다. 박하사탕에서 내가 순임이로 할게요,라며 설경구 한 마디 한 마디에 감정이입되는 표정이 일품이었는데 데뷔작이라고 한다. 그 뒤에 오아시스에도 나오는데 단역이다.

우리가 가장 잘 알 수 있는 역으로는 ‘살인의 추억’에서 여경으로 라디오의 사연을 추적하여 연쇄살인범을 찾는 데 도움을 준다. 우울한 편지로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는 그놈을 찾아내는데 경찰서에서 커피를 홀짝이던 송강호가 뭐? 뭔 편지? 하던 대사가 생각난다. 그때 고서희가 이 노래가 방송된 날이 전부 사건 터진 날이라는 말에 주먹구구식의 수사 방식에 과학적 수사가 파고 들어 나머지 형사들이 놀라는 장면도 기억난다.

지나고 나서 지금 생각해 보면 이춘재의 모습이 영화 속 박해일의 사진과 닮았다는 점에서 봉 감독은 정말.

고서희는 그리고 여러 영화에 나왔는데 내가 최근에 본 ‘오마주’에서 감독으로 나오는 이정은과 함께 영화를 만드는 제작자로도 나온다. 영화 속에서 물론 현실의 벽에 부딪혀 끝내 좌절하고 말지만. 마지막 영화의 마지막 상영을 달랑 감독과 함께 보다가 그만 울음을 터트린다.

그나저나 한국 공포물도 예전의 스승의 은혜처럼 신체 훼손이 적극적으로 나와줘야 하는 거 아님. 스승의 은혜 내용도 정말 찰졌는데. 영상참조는 유튜브 무비녀 님의 영상을 참조했다. 고서희 배우가 나오는 부분이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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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2-07-06 14: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차우>에도 나온 분이군요. 그래도 <살인의 추억>으로 가장 기억되는 배우네요.

교관 2022-07-07 11:38   좋아요 0 | URL
네, 여러 영화에 주연으로도, 또 주연으로 나왔어요 ㅎㅎ

stella.K 2022-07-06 19: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머, 이런 배우가 있었나요?
말씀 하시는 옛날 영화 저도 거의 다 봤는데 이런 배우가 있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게 최근 사진은 아니겠죠?

교관 2022-07-07 11:38   좋아요 1 | URL
다시보게 되시면 아마 눈에 쏙 들어올 거 같아요 ㅎㅎ
 


옥희야, 나는 지금 너무 힘들다.

내 옆에는 아무도 없어. 누군가 내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한데 네가 생각나서 편지를 띄운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다.

아니 영화가 뭔지 점점 모르겠어.

네가 나한테 그랬잖아? 나는 환갑이 지나도 영화를 찍을 거라고. 그런데 환갑은커녕 50도 못돼서 나에게는 한 뼘의 공간도 없어진 현장이 되었어.

홍일점 여 감독. 빛 좋은 개살구. 내가 그곳에서 얻은 것은 무엇일까.

가까웠다 사라져간 친구들의 추억 그리고 커피, 담배 같은 중독성 기호.

밤에는 말똥말똥 잠을 잊고 새벽이 되어서는 잠이 드는 습관.

쥐뿔도 없는 주제에 기분에 죽고 기분에 살자는 배짱.

참, 또 있지. 세상일이 꿈이나 열정이나 인내심만 가지고는 이뤄지지 않는다는 깨달음.


이 편지는 최초의 여성 판사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 최초의 여성 감독 홍재원(실재 감독의 이름은 홍은원)이 같이 영화를 만들었던 여성 필름 편집담당자인 옥희에게 쓴 편지다.


60년대에 최초로 여성이 영화 판에 뛰어들어 감독을 하겠다고 했을 때 수많은 냉대와 편견 속에서도 오직 영화에 미쳐있던 자신의 내부에서 발발하는 두려움과 외로움 그리고 불안에 대해서 겁이 났다. 감독은 62년에 ‘여판사’라는 영화를 남기고 떠났다.


시간이 흘러 영화 속 또 다른 여성 감독인 이정은은 독립영화를 만들지만 관객은 열 명도 안 되고, 가정일에도 소홀하게 되고 시나리오 적는 것 또한 힘겹기만 하다. 매일 집 앞 공용주차장에는 승용차가 내내 주차되어 있고 이정은은 사무실까지 비워줘야 하는 상황. 코로나가 겹치면서 독립영화의 관심은 더욱 멀어지고.


그러던 중 오래전 최초의 여성 판사의 이야기를 담은 ‘여판사’라는 영화를 상영을 하게 되는데 그 영화가 중간부터 녹음이 되어 있지 않고 편집이 이상하니까 좀 맡아서 영화를 완성시켜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이정은은 ‘여판사’라는 필름을 완성시키기 위해 그 당시의 영화 관계자들을 만나러 다니지만 대부분 죽거나 병들어 있고.


그러던 중 공용주차장에서 매일 주차되어 있던 차 안에서 한 여자의 시체가 발견된다. 여자의 시체는 그 안에서 죽은 지 오래되었지만 모두가 알지 못했다. 이정은은 그 여자의 죽음이 마치 그림자 같았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존재. 여판사를 만든 홍재원 여성 감독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니 그녀의 삶이, 마치 자신의 삶과 너무나 겹치는 부분이 있다는 걸 알게 되고 이 겹치는 삶이 마치 죽은 지 오래되어서 발견된 그림자 같은 여자와 흡사하다는 것도 느낀다.


이 영화 속에는 ‘현실’과 ‘실재’와 ‘실제’ 그리고 ‘메타포’가 동시에 존재하는 몹시 신기한 영화이면서 잔잔한데 잔잔하지 않은 영화였다. 차 안에서 극단적 선택을 한 여성의 일은 현실을 말하고, 영화 ‘여판사’는 실제로 존재하는 영화이며, 실제 여감독 홍은원의 영화 속 홍재원의 그림자는 메타포어다.


영화 ‘여판사’는 당시에 판사인 인텔리 아내를 둔 남편의 자존심이 무너져 내리고 자격지심 때문에 독살을 한 실제의 사건을 영화로 만들었다. 그래서 이쯤 되면 62년 영화 ‘여판사’도 궁금하다. 그래서 찾아보면 유튜브에 그 영화가 풀 러닝타임으로 있다.


이 영화의 좋은 점은 한 인간은 여러 인간들과 관계를 맺고 있고 그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건 만만찮은 것이라는 걸, 한 인간이 예술을 접하고 그 세계에서 고독하고 외로움을 견뎌가며 지내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지 이정은의 덤덤한 연기로 보여준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보면 영화사의 기록 같은 것들도 덩달아 달려 나오기 때문에 아아하며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영화는 홍재원의 편지로 시작하여 비스와바 심보르스카의 ‘내가 잠든 사이에’의 시로 끝맺음을 한다.


뭔가를 찾아 헤매는 꿈을 꾸었다,

어딘가에 숨겨 놓았거나 잃어버린 뭔가를,

침대 밑에서, 계단 아래서,

오래된 주소에서.


무의미한 것들, 터무니없는 것들로 가득 찬 장롱 속을,

상자 속을, 서랍 속을 샅샅이 뒤졌다.


여행 가방 속에서 끄집어냈다,

내가 선택했던 시간들과 여행들을.


주머니를 털어 비워냈다,

시들어 말라버린 편지들과 내게 발송된 것이 아닌 나뭇잎들을.


숨을 헐떡이며 뛰어다녔다,

내 것과 내 것이 아닌 것들,

불안과 안도 사이를.


눈(雪)의 터널 속에서

망각 속에서 가라 앉아버렸다.


가시덤불 속에서,

추측 속에서 갇혀버렸다.


공기 속에서,

어린 시절의 잔디밭에서 허우적거렸다.


어떻게든 끝장을 내보려고 몸부림쳤다,

구시대의 땅거미가 내려앉기 전에,

막이 내리기 전에, 정적(靜寂)이 찾아오기 전에.


결국 알아내길 포기했다.

그토록 오랫동안 나는 과연 무얼 찾고 있었는지.


깨어났다,

시계를 본다.

꿈을 꾼 시간은 불과 두 시간 삼십 분 남짓.


이것은 시간에게 강요된 일종의 속임수다,

졸음에 짓눌린 머리들이

시간 앞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낸 그 순간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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