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누야시키 이 영화의 원작을 본 것이 작년이었다. 원작을 보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데쓰노트를 봤을 때 드는 생각이 들었다. 창작자라고 해도 인간이 할 수 있는 생각 밖의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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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을 너무 빠져서 봤는데 보면서 영화가 나오겠구나 했지만 이렇게 빨리 영화화되리라고는 생각을 못 했는데 영화가 나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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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을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절대 악과 절대 선이 마주하게 되는 이야기다. 사토 타케루가 나오는데 주인공이 아니다. 아니 주인공인데 주인공은 아니다. 사토 타케루는 절대 악으로 나오고 주인공인 이누야시키 할아범이 절대 선으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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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사람은 이런저런 이유로 이종에 의해서 섬광을 받은 후 기계의 몸이 되어 한 사람은 절대 악으로 인간들을 이유 없이 죽이고 한 사람은 이유를 불문하고 죽지 말아야 하는데 죽음에 가까운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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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시간 안에 이야기를 해버려야 하기 때문에 원작에 비해서 빠진 부분이 많다. 이누야시키가 기계의 몸으로 골목길에서 깡패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을 구하는데 기계 몸에 적응이 되지 않아서 엉뚱하게 깡패들을 물리치는 장면이라든가(이런 장면은 클리셰가 깨졌기 때문에 영화 속에서 빠진 것이 아쉽다), 야쿠자에게 잡혀간 여자를 구하는 장면 같은 것들은 영화 속에서 몽땅 빠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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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토 타케루는 표정이 소거된 절대 악을 잘 표현했다. 기계의 몸으로 신체 개조가 된 이누야시키는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모습으로 상대방을 대하는 사유 역시 잘 표현했다. 무엇보다 기계의 몸에서 미사일이 나오고, 이유 없이 사람들을 죽이는 장면 같은 것들은 원작과 흡사하게 흘러가지만 원작만큼 잔인하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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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츠의 작가로 간츠를 좋아했다면 이누야시키 역시 재미있게 원작을 봤을 것 같다. 절대악과 절대선으로 나누었지만 절대 악은 절대 악이 되지 않을 수 있었지만 더없이 절대 악으로 왜 가는 것인지 여실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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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악과 절대 선의 이 두 캐릭터는 아마도 인간 안에 존재해있는 두 마음일지도 모른다. 제목이 이누야시키인 이유도 원작이나 영화를 보다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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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기를 최초로 사진에 담은 사진작가 다이안 아버스. 그녀의 사진을 한 마디로 말하면 ‘불편한’ 사진이다. 칼을 삼키는 알비노 여인, 240센티미터의 거인, 서로 다른 표정의 일란성 쌍둥이. 두 팔이 없는 여인. 온몸이 털로 뒤덮인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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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미국 뉴욕 근대미술관에서 열린 ‘뉴다큐멘트’ 전에 전시된 그녀의 사진을 보는 관객들의 얼굴은 불쾌한 모습과 불콰하게 변하는 얼굴을 엿볼 수 있었다. 왜 저런 불편한 사진을 찍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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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불과 5년 후 베니스 비엔날레에 이 ‘불편한’ 사진들은 미국 사진작가의 작품으로는 최초로 초청받았고 같은 해 뉴욕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작가의 사후 회고전에는 25만 명의 관객이 몰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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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안 아버스.

그녀는 무척 부유한 모파상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그녀의 배경을 뒤로하고 그녀의 일상은 무척 충격적이었다. 부모가 반대하는 결혼을 18세에 해버리고 이혼, 수면제 과다복용, 이후 사회의 어두운 부분만 쫓아다니며 담은 사진들 그리고 우울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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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안은 자신의 부유한 집안 내력이 사회와의 소통을 가로막고 있다고 느꼈다. 마치 다자이 오사무처럼. 그녀는 18살에 가난한 사진가 남편은 앨런 아버스를 만나면서 갈증이 해소되고 소통의 도구로 카메라를 손에 쥐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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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57년 남편과 이별한 다이안은 거리로 카메라를 들고 나왔으며 자신의 스승에게서 ‘자신만의 사진을 식별하라’라는 조언을 받고 가슴에 큰 충격파를 안은 후 그녀는 금지된 것, 사람들이 불편해하는 것을 찍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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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체주의자, 장애인, 정신지체인 등. 그녀는 처음으로 타인과 자신 사이에 협력과 공감을 이끌어낸다는 매력을 느꼈다. 고독이라든가 회유라든가 하는 감정의 뒤틀린 부분이 순서를 정하고 질서를 찾아가는 기분을 발견해 냈을 때 그녀의 모습을 투사해보면 조금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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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안은 점점 비정상적이고 극단적인 피사체를 담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그녀를 ‘wizard of odds’라고 불렀다. 결국 다이안은 자신의 사진이 이상하기(odds) 때문에 주목받는다는 현실과 타협하지 못하고 48살에 손목에 칼을 그어 자신만의 옥죄에서 풀려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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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편견과는 달리 그녀의 사진 속 주인공들은 모두 밝은 모습이거나 사회의 편견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당당하게 피사체가 되어 준다. 그건 분명히 다이안이 있는 그대로의 그들 모습을 담고자 한 그녀만의 세계가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니콜 키드먼의 다이안 연기는 아주 좋다. 다이안 아버스가 금기에게 어떻게 다가가게 되었는지 ‘’까지’ 영화는 잘 그려내고 있다. 금기를 담으려면 금기가 되어야 한다. 나체주의자를 찍으려면 나체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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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D 애니메이션 에비니저 스크루지의 이야기 크리스마스 캐롤은 저메키스의 2004년 폴라 익스프레스 이후 베어울프를 거쳐 만들어진 영화다. 영화를 보면 정말 실사처럼 만들었다. 십 년 전임에도 불구하고 요즘 생떼를 쓰며 만들어진 상업영화보다 훨씬 잘 만들었고 또 좋다. 영화를 보다 보면 만화를 왜 실사처럼 만들까,라는 의문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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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 모양이나 머리카락이나 손짓이나 옷자락의 휘날림 같은 것들이 인위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기술력의 발전을 확인하기 위함이 아니라면 만화를 이렇게까지 실사와 거의 흡사하게 만들어야 하나,라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에비니저의 조카인 프레드가 나올 땐 그 눈빛이나 얼굴의 비틀림이나 특유의 목소리가 가지고 있는 부드러움이 누가 봐도 콜린 퍼스의 젊은 시절이잖아! 하게 된다

이 영화가 나오기 전 스크루지의 이야기는 어릴 때 책으로 읽고 많은 버전의 영화를 스쳐봤지만 그저 흘러가는 시간 대하듯 했는데 이 영화가 나온 후부터는 역시 적극적으로 보게 되었다. 어떤 해에는 여름에 볼 때도 있다. 여름에 겨울 영화를 보는 건 차가운 열대어처럼 묘한 기분을 준다. 규칙이나 법칙으로 정해진 것도 아닌데 마땅히 그러한 것에서 좀 어긋나는 기분이 묘함을 증가시킨다. 요컨대 그램린을 여름에 선풍기를 틀어 놓고 본다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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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루지는 늘 혼자다. 옆에 사랑하는 벨, 가족이 있었지만 모두 떠나갔다. 인간은 혼자서 무엇을 해야 할 때가 사실은 많은 것 같다. 책도 혼자 읽어야 하고 잠도 혼자 들어야 하고 글도 혼자 써야 한다. 밥도 혼자 먹는다. 같이 밥을 먹는다는 건 행위에 속하는 것이고 누군가 대신 밥을 먹어 줄 수는 없다. 어쩌면 결국 밥도 혼자 먹는 것에 속할 수 있다. 그러니 크리스마스이브에 옆에 누군가 같이 있다면 꼭 안아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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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나는 아버지 병간호 때문에 크리스마스이브를 2년 동안 병실에서 보낸 적이 있다. 대학병원 바로 옆이 호텔이라 병실에 난 창으로 보면 호텔의 반짝이는 트리의 불빛과 사람들의 즐거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첫해에는 작은 창으로 그 모습을 보면서 내 년에는 나도 저렇게, 하고 생각했는데 다음 해에도 병실에서 같은 모습을 보면서는 언젠가는 나도,라고 생각을 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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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실이라고 쓸쓸한 것만은 아니다. 병실에 오래 있다 보면 병실 사람들과도 이런저런 교류를 하게 되고 간이침대에서 자고 일어난 가족들은 서로에게 민낯을 보여준다. 사람이 살면서 형제, 부모 또는 군대 전우들 그리고 부부 사이를 제외하고는 타인에게 민낯을 제공하는 일은 극히 드물지만 병실에서는 여어(나를 보며), 편하게 좀 잤나, 같은 말을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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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보니 병실 사람들의 사진을 담아 그것으로 크리스마스카드를 만들어 돌리기도 했고, 아이가 있는 간호사들은 아이의 사진을 편집해서 주기도 했다. 그러니까 병실에서 병이 낫지 않아서 사라지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것대로 나쁘지 않은 생활이었다. 그때에도 레지던트 3년 차 중에 사진에 빠져있던 늘 피곤해 보이던 의사가 있었는데 그 사람과 병실의 환자들과 가족들의 사진으로 병원의 전시실에 전시를 해보자는 기획을 짜고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중환실에 들어가면서 그럴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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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크리스마스이브의 밤에 창으로 보는 세계는 아름답고 평화로웠다. 전쟁터 같은 병실에도 밤이 드리우면 모두가 고요해지고 잠에 빠진다. 에너자이저 아이들도 밤이면 봉지처럼 푹 꼬꾸라져 잠이 들듯이. 밤이 사라진다면 끔찍하지만 밤만 지속된다면 그것대로 해볼 만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마도 뭔가 하나를 보며 멍하게 시간을 죽이는 건 그 이후 더 심해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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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카가 아버지 대신 들어서고 크리스마스이브 때면 온 집 안에 전구를 달고 불을 밝히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조카에게 선물을 주면 무릎에 와서 앉을 때 이 별거 아닌 일이 너무나 별거처럼 느껴져서 헛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아무것도 아닌 생활이, 평온하게 흘러가는 생활이 아아 행복하다고 느껴야 하는 건 정말 절망 끝에 다다라야 하는 것일까. 스크루지는 어떻든 혼령들과 과거, 현재, 미래를 본 후 달라졌다. 마지막에 조카 프레드의 집에 찾아갔을 때 모두가 스크루지를 반기는 장면은 어쩐지 감격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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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 익스프레스는 산타를 믿지 않는 의심쟁이 주인공이 폴라 익스프레스를 타고 모험을 겪은 후 산타를 믿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의심이 많을 때에는 벨 소리가 들리지 않았는데 산타를 믿음으로써 그 소리가 들린다. 나이가 들어 갈수록 주인공의 동생도, 친구들도 더 이상 벨 소리를 듣지 못하지만 주인공은 죽 듣게 된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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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겠지만 이 영화에서는 정말 중요한 것은 처음에 꺼려졌던 폴라 익스프레스에 탔다는 것이다. 그 모험을 겪지 않고서는 믿음이 생겨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집 안에서 집 밖으로 나오는 것이 중요하다. 나왔다는 것이, 설령 집 밖에서 아무것도 할 것이 없을지라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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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몇 살 때부터 산타를 믿지 않게 되었을까. 가물거리는 생각의 끈을 잡고 확 당겨보면 아주 어린 시절이었던 것 같다. 머리맡에 아버지가 산타 신발 같은 것을 놓고 가는 것을 봤다. 어른이 되면 대부분 산타를 믿지 않게 된다. 그것은 해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기우는 것처럼 불변의 진리 같은 것 같다. 하지만 대부분이 그렇다. 대부분이라는 말은 완전하지는 않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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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주위의 어른이라는 사람들은 산타를 믿지 않는다. 거의 대부분이 산타를 믿고 있지 않다. 하지만 대부분이다. 소위 몇몇 어른들은 아직도 아이처럼 산타를 믿고 있다. 그 사람들이 누굴까. 한 번 생각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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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를 믿는 어른은 분명, 이 세계에 끼어서 살고 있다. 설령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그런 어른은 반드시 있다. 정작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게 때문이다. 그렇다면 산타를 아직 믿고 있는 어른들이 누굴까. 생각해보면 아주 간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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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바로 폴라 익스프레스를 만든 로버트 저메키스 같은 감독이 그런 사람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아이들이 보는, 또는 어른들 또한 아이로 돌아가게 만드는 마법 같은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아직 산타를 믿는 어른들은 많다. 아이들이 보는 만화를 만드는 어른들,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을 만드는 어른들, 아이들이 읽는 동화를 쓰는 어른들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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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른들은 아이보다 더 아이 같은 마음을 몸에 지니고 있기에 아이들이 눈물 콧물 쏙 빼가며 볼 수 있는 영화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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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에서 주인공의 엄마 목소리는 로버트 저메키스의 아내인 레슬리 저메키스가 했다. 또 리더십이 강한 흑인 여자아이가 나오는데 노나 게이가 목소리를 했다. 노나 게이는 다들 잘 알겠지만 마빈 게이의 딸이다. 노나 게이는 영화배우인데 온전하게 드러난 영화는 없다. 매트릭스 시리즈에 출연을 한 것이 배우 생활의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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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잘 알겠지만 마빈 게이의 죽음은 아직도 무성한 소문이 시달리고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싸움을 말리는 도중 아버지의 총에 맞아 죽음을 맞이했는데 이 총은 크리스마스 선물로 아버지에게 준 것이다. 마빈 게이 하면 알리와 연결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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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빈 게이와 알리는 인종차별에 대적했다. 한 사람은 권투로 또 한 사람은 노래로 흑인차별을 이야기했다. 마빈 게이는 노래가 너무 좋은데 마약 중독에 시달렸고 자살을 시도하기도 하는 등 에릭 클랩튼처럼 굴곡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도 마빈 게이의 노래가 얼마나 좋으면 찰리 푸스와 메간 트리에너가 ‘마빈 게이’를 불렀다. 노래 제목이 그냥 마빈게이다. 마빈 게이처럼 사랑을 하자는 내용이다. 첫 가사에서 중의적인 표현을 썼다. 마치 쳇 베이커는 약하디 약한 사람이다, 같은 말처럼 멋지게 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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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지막 장면에 에어로 스미스의 스티브 타일러가 나와서 캐럴을 록으로 부른다. 역시 모두가 알겠지만 리브 타일러의 아버지가 스티브 타일러다. 리브 타일러는 청소년이 되기 직전까지 아버지가 누군인지 모르고 자라다가 티브이에 슈퍼밴드 에어로 스미스가 노래를 부르는데 스티브 타일러의 얼굴이, 특히 입이 자신과 너무 닮은 것이다. 그래서 우여곡절 끝에 내가 당신의 딸이야,라며 스티브 타일러를 찾아가 말했고, 스티브 타일러는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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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에 이런저런 일들이 있지만 생략한다. 리브 타일러는 에어로 스미스의 영광의 앨범 겟어그립의 뮤직비디오에 처음부터 죽 나오면서 서서히 배우의 길을 걷게 된다. 당시에 제일 잘나가던 알라시아 실버스톤과 같이 뮤직비디오에 등장을 했는데 알라시아 실버스톤은 어쩐지 내리막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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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에 나오는 노라 게이, 스티브 타일러 역시 어른이지만 산타를 믿는 바보 같은 어른일지도 모른다. 전 세계 투어를 돌며 첫눈에 반해서 같이 보낸 여자의 딸이 내가 당신 딸이라며 달려들 때 이것저것 이해관계나 부당한 일을 당한다는 것도 멀리하면서 딸로 받아들이는 것도 그렇고, 노나 게이 역시 주인공 흑연 여자아이로 완전 빙의가 되어서 연기를 하는 것도 그렇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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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되면 모두가 산타를 믿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나는 비록 어린놈의 자식 주제에 산타를 멀리했지만 분명 아이 같은 마음을 가득 지니고 있는 어른들이 있다. 어른이 되어서도 산타를 믿는 사람들. 그들이 아이들의 마음을 움직이며 더불어 어른들의 마음도 촉촉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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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불량식품인데 너무 맛있어서 도저히 끊을 수 없는 맛이 나는 영화다. 쿠엔틴 타란티노가 만든 영화는 그렇다. 영화 장르에 멜로, 엑션, 드라마 사이에 ‘쿠엔틴 타란티노’ 라는 한 장르가 들어가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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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수지의 개들부터 시작해서 쿠엔틴 타란티노는 아? 뭐지, 하는 설득이 안 되는 장면이 어느새 아! 하며 납득되어 버리게 된다. 하나하나의 장면이 전혀 현실성이 떨어지고 리얼리티에서 멀어지는데 참 현실적이고 리얼리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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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여자들만 노리는 자동차 미치광이(커터 러셀)가 센 언니들에게 걸려 된통 당하는 영화다. 영화가 처음 나왔을 때 타격감이 너무나 광장하여 보는 어른들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자동차와 자동차가 정면충돌을 했을 때 다리가 그대로 잘려 도로 위에 뒹군다던가 얼굴이 갈려 잘려 나가고 자동차에서 튕겨져 나가는 장면이 한 번, 슬로우로 또 한 번 더 보여줌으로 타격의 깊이가 컸고 충격의 시간이 오래갔다. 이전의 어떤 고어물보다 충! 격!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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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초반 이후 루즈하게 진행되지 않는다. 통쾌하게 질주하며 그 주체가 영화 속에서 나약하게만 그려지던 여자들이다. 주인공들은 영화판에서 거칠게 굴러온 주인공들이라 미치광이에게 거침없이 대적한다. 그 모습이 몹시, 아주, 영화 속 뻥 뚫린 도로처럼 쾌속 질주한다. 이런 쿠엔틴의 이야기 방식은 영화에서 처음이라 말 그대로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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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엔틴 타란티노의 여러 영화 중에서 나에게 각인되어 있는 영화는 ‘황혼에서 새벽까지’다. 이 영화는 쿠엔틴이 감독이 아니라 배우로 나온다. 하지만 로버트 로드리게즈나 쿠엔틴 타란티노나 궁디나 히프 사이다. 이 영화는 시간이 흐르면서 장르도 같이 변주한다. 씹던 껌을 책상 밑에 붙여놨다가 다시 떼서 씹었는데 더 맛있는 맛이 나는 영화다. 황혼에서 새벽까지에서도 타격감은 굉장하다. 기가 막히고 등을 의자에서 떼야 할 정도로 들썩거릴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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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의 뱀파이어 영화에서는 영화 시작부터 후반까지 사람들은, 주인공을 포함해서 뱀파이어에게 늘 당하다가 끝에 가서 이런저런 무엇으로 죽이는데, 이 영화에서는 시원시원하게 인간이 뱀파이어를 그대로 죽여 버린다. 한 마디로 뻥 뚫어 버린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쿠엔틴 타란티노 식 뱀파이어가 나오기 이전의 영화들을 떠올려보면 답답하기만 했다. 왜? 왜! 하는 부분이 많았지만 그 금기를 이 영화가 깡그리 깨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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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든 처음 하면 반응이 제대로 돌아올 수 없다. 기존의 뱀파이어 팬들에게는 무참히 짓 밟히지만 쿠엔틴 타란티노는 그런 것을 즐겼다. 황혼에서 새벽까지 이후 티브이 판 시리즈 버피가 나왔다. 사라 미셀 겔러가 등장해서 뱀파이어 들을 통쾌하게 무찌르는 이야기가 나오고, 후에 버피의 연인인 뱀파이어 엔젤이 주인공으로 시리즈가 또 나왔다. 영화에서도 슬레이어 등 뱀파이어 사냥꾼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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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장면 장면의 디테일에서 유머 코드가 반드시 있다. B급 영화를 지향하는 듯한 필름의 색감이나 거침도 무엇보다 마음에 든다. 황혼에서 새벽까지는 지금 봐도, 아니 지금 시대에 봐야 제대로 맛을 느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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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엔틴 타란티노는 이와이 슌지와 박찬욱을 좋아한다. (박찬욱을 좋아하는지는 확실하지 않네요, 그렇게 들은 거 같은데, 누가 좀 알려 주세요) 사실 박찬욱은 속이 무엇인지 모를 웃음을 늘 짓는 사람이고, 철학적인 말과 배우 못지않은 옷 차림을 하고 있지만 영화를 세상에 내놓고 사람들의 반응에 아주 민감한 사람이라고 한다. 흥행에 마음에 상처를 받는다고 한다. 박찬욱은 그런 불안을 겪고 있다. 그런 불안 때문에 영화에 좀 더 몰두하고 고민을 하는지도 모른다. 나에게도 불안이 있는데 그것이 매일 약간의 글을 쓸 수 있게 하는 것 같다. 무엇인가를 할 때 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수만 가지지만 해야 하는 이유는 몇 가지 안 되는데 그 몇 가지 안 되는 고작의 이유가 그 어떤 무엇을 지속적으로 가능케 하는 것 같다.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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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에서 새벽까지에서는 쿠엔틴 타란티노가 조지 클루니의 동생으로 나오는데 뱀파이어로 변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어쨌든 데쓰 프루프는 통쾌한 액션이며 타격이 굉장한 고어적인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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