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에는 블레이드 러너를 봐야 한다. 왜냐하면 2019년이 블레이너 러너의 배경이기 때문이다. 백 투 더 퓨처의 미래는 2015년으로 지났고 미래소년 코난의 미래 역시 2008년으로 지났다. 데커드가 지구에 몰래 들어온 레플리컨트를 잡는 블레이드 러너는 82년에 나온 2019년이 배경인 영화다

 

블레이드 러너는 당시 망한 작품이었다.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오는 사람들도, 평론가들도 모두 영화를 비난하고 거지 같은 영화라 논했다. 특히 같은 해 개봉했던 이티에 밀려 블레이드 러너는 금세 극장가에서 사라지고 만다.

 

그랬던 블레이드 러너가 어떻게 현재 이렇게 모두가 칭송받는 작품이 되었을까. 80년대 미국은 그야말로 흥이 오를 대로 오른 분위기가 가득했다.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에도 잘 나오지만 70년대 미국의 중산층이 서서히 기반을 잡아가고 있었고 그 흥이 80년대까지 이어진다. 80년대의 미국인들에게 30년 후의 미래가 이렇게 암울한 디스토피아적인 세계관이라는 것은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 후로 블레이드 러너는 그대로 사라지고 만다. 하지만 비디오가 생겨나고 비디오테이프로 보던 일반인들이 알음알음, 이 영화는 정말 대단하다, 수작이다, 굉장한 영화다, 단지 영화일 뿐인데 엄청난 것들이 담겨있다,며 점점 퍼지기 시작하여 결국에는 일반인들이 넘볼 수 없었던 평론가들이 오류였다는, 평론가들의 말만 철석같이 믿었던 시류를 와그작 깨버리는 계기가 된다. 그것은 정말 통쾌한 일이었다. 지식과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잘못되었다고 지적을 한다는 것, 그것에서 오는 쾌감은 대단한 것이었다.

 

리들리 스콧은 블레이드 러너의 장면 장면에 은유를 전부 심어 놨다. 이 영화는 모든 컷이 하나의 ‘상징’이다. 그래서 블레이드 러너를 이야기하려면 몇 시간으로도, 아니 하루 종일 이야기를 해도 모자랄 것 같다. 이 영화를 보면 이후 얼마나 많은 디스토피아를 표방하는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가 이 영화를 따라 했는지 알 수 있다. 아키라, 공각기동대, 토탈리콜, 저지 드레드 등 수많은 영화가 블레이드 러너를 다시 보면 훅훅 지나간다. 위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내용은 2019년에는 핵 전쟁으로 암울한 지구가 된다.

 

인조인간, 요즘 말로 에이아이, 안드로이드 즉 레플리컨트는 인간과 똑같이 만들어졌다. 사고, 감정, 기억, 그리고 쾌락 등 이 모두가 인간과 같게 만들어졌지만 레플리컨트의 수명은 4년이다. 수명이 너무 짧다는 것을 안 레플리컨트들이 지구 밖 오프 월드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6명이 지구로 잠입하는데 그중 2명의 레플리컨트는 죽고 4명이 지구로 들어오게 되고 그 4명을 블레이드 러너인 ‘데커드’ 해리슨 포드가 이 복제인간을 잡으러 다닌다는 내용이다.

 

보통 영화를 보고 평론가들이 어려운 말로 구구절절하게 설명을 하면 대부분 웃기고 있네,라고 치부할 순 있는데 이 영화만큼은 철학적 사유를 갖다 붙여도 괜찮을 영화다. 요컨대 데커드가 레플리컨트를 알아내기 위해 질문을 하는데 아주 철학적인 물음을 한다. 연극을 하는데 만찬 장면에서 생굴을 먹고 후에 삶은 개고기를 먹는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같은 질문을 한다. 이런 질문에 대답은 과연 무엇일까.

 

영화는 이런 질문을 영상과 장면으로 계속 보여준다. ‘죽음’보다는 ‘제거’, ‘고친다’보다는 ‘수리’로 표명되는 레플리컨트에게 총구를 들이대는 건 결국 인간인 데커드다. 아주 젊은 시절의 대닐 한나는 복제인간인 프리스로 나온다. 데커드와 사투 끝에 데커드의 총에 맞은 프리스는 몸을 물 밖으로 낚여진 숭어처럼 바들바들 떨며 고통스러워한다. 다시 보는 블레이드 러너에서는 인조인간이 어째서 총을 맞고 이렇게 고통스러워할까. 그리고 고통스러워하는 프리스에게 다시 총을 쏘는 데커드.

 

영화는 이런 상징이 가득하다. 끝도 보이지 않는 마천루 속에 살고 있는 인간과 그 속에 속하지 못한 하층의 인간은 서로에게 공격을 하며 생존을 위해 서로 죽인다. 하지만 로이를 비롯한 레플리컨트는 자신의 친구가 죽자 그에 흥분하며 인간에게 대든다. 이 영화에서 소름 끼치게 아름다운 것은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레플리컨트라는 것이다.

 

데커드는 인간이지만 냉정하고 차갑다. 정말 데커드는 인간일까(좀 더 긴 감독판을 보면 알 수 있다). 로이는 비가 오는 가운데 데커드를 구해주고 “나는 네가 상상도 못할 것들을 봤어, 오리온 전투에도 참가했었고, 탄호이저 기지에서 빛으로 물든 바다도 보았지. 이제 그 모든 순간들이 시간 속에서 사라지겠지, 빗속의 내 눈물처럼,, 이제 죽을 시간이야”라는 말을 남기고 죽음으로 간다.

 

로이의 이 대사 몇 줄을 가지고 긴 소설 한 권을 써내도 좋을 만큼 대사는 깊고 아름답고 처절하며 눈물이 날 만큼 아름답다. 영화는 인간에게 질문을 던진다. 인간은 인간에게 생존을 위해서만 칼을 겨누지 않는다,라며. 복제된 인조인간이 어떤 면에서 인간을 넘어서는 인간다움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주입된 기억으로 인한 사진들, 꿈에 나타나는 유니콘, 불편함, 혼란을 잔뜩 짊어지고 집으로 온 데커드는 사랑하게 된 레이첼이 죽은 줄 알고 가슴이 뛴다. 하지만 잠들어 있는 레이첼.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을 믿어요. 그리고 두 사람은 행복하지만 불행한 여행을 떠난다. 이제 두 사람에게 남은 것은 살아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데커드와 레이첼의 투샷은 참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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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 넘기지 마세요. 무서운 장면을 캡처했음.

 

한국에는 공포영화라고 부를 만한 영화가 없을까,라고 하는 공포영화 마니아에게는 흡족할 한국의 공포영화다. 물론 마나아라면 이 영화는 봤을 것이다. 14년에 나온 영화로 아직 한국에서는 이만큼 무섭고 고어적이고 경악스럽고 상상을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자극을 주는 공포물은 나오지 않는 듯하다.

 

이 영화에서 주연은 이름이 알려진 고은아지만 또 다른 주연인 연송하가 열연을 했다. 연송하가 이 영화의 이야기를 죽 이끌어 가는 것 같다. 그러니까 연송하가 영화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영화가 어떤 식인지, 영화는 어떻게 결말이 나는지 전부 보여준다.

 

영화는 청소년 관람불가다. (내용은 알아서 찾아보기 바랍니다) 욕설이 난무하고 비제이로 접속자 수와 ‘좋아요’를 받기 위해 금기를 넘는다. 그 수위가 상상의 경계를 넘어가는데 거기에 작은 화면으로 보는, 관음의 병에 걸린 시청자들의 본능을 자극하고 본색을 드러나게 한다.

 

이런 현상은 요즘 방송 취지를 망각하고 청취율 질주를 하는 골목식당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음식 루저로 보이게 만들어 비슷한 서민이 루저로 보이는 화면 속 식당. 주인을 씹는다. 한 개인을 욕하는데 대중이 모니터로 결집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폰을 들고 골목식당에서 루저에서 벗어난 곳을 찾아가 다시 개인 방송을 한다. 개인방송이라도 광고가 끼어 들고 자본이 들어오고,,, 여기서 사람들은 흑과 백으로 갈린다. 중간은 없다. 모두가 우르르 씹고 욕을 하는 것에서 오는 카타르시스는 대단하다.

 

그러니까 가난하게 자란 아이가 성공을 하여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게 아니라 가난한 자들을 업신여기고 갑을 관계를 확실히 맺는 것과 흡사하다.

 

영화의 미장센은 눈에 드러나는 타격은 없다. 소리와 어두운 화면 구성 속에서 카메라의 움직임에 따라 보는 이들이 상상을 하게 만든다. 그 상상은 몇 분 후 그대로 현실이 된다. 배가 갈리고 그 속에서 장기가 밖으로 나오고 고은아는 아파하다가 몸이 반으로 잘린다. 물론 타격이 그대로 드러나지 않는다. 보는 이들의 상상으로 그 장면이 연출되게 만들었다.

 

연송하는 살인마에게 잡혀 살기 위해 살인마에게 몸을 팔기로 한다. 하지만 욕망은 결국 죽음으로 가고 만다. 이 영화를 보면 거대한 도심지에 있는 수많은 모텔은 고립이며 고독, 폐쇄, 개인의 욕망이 집합된 하나의 또 다른 세계다. 마치 하루키의 어둠의 저편에 나오는 ‘알파빌’ 같은 곳이다.

 

치안이 잘 되어 있는 서울의 거대 도심 속 모텔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어떤 사건이 벌어지는지 일단 터지고 나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개개인의 욕망을 푸는 곳, 지하에는 인간이 만들어 놓은, 그래서 인간도 알지 못하는 지하실과 하수구들, 꽈리처럼 꼬인 전선들이 인간을 공격한다.

 

폭력이 마치 정당화되어 벌어지는지는 도심 속 고독의 공간에서 그 모든 것을 라이브로 생방송을 하는 모습은 14년이나 지금이나 5년후나 크게 변하지 않을 것 깉다. 욕망과 본능을 제도가 막을 수는 없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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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음악은 정말 대단하다. 시네마 천국의 시네마 파라다이스가 흐르면 우리는 대번에 토토가 되어 테이크로 흘러가는 키스의 장면을 바라보며 추억 속으로 들어가 알프레도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린다.

 

내가 가지고 있는 시네마 천국의 영화 음반은 적어도 나에게 있어 자산이다. 음악을 들으면 알프레도를 찾아가서 영사기를 돌렸던 토토의 어린 시절, 엘레나 와의 뜨거운 사랑, 그리고 타버리는 극장을 보며 오열하는 장면, 알프레도와의 헤어짐이 장면 장면 스쳐 지나간다.

 

알프레도는 엘레나의 메시지를 어째서 토토에게 전해주지 않았을까. 영화를 봤을 때는 그런 알프레도에게 조금은 화도 났지만 시간이 지나 토토가 세계적인 감독이 되었을 때, 그 지난날의 지난한 시간을(엘레나와 맺어지지 않았기에) 보냈기에 토토는 그 슬픔을 영화로 승화시켜 세계적인 감독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상처는 슬픔을 만들고 슬픔은 때때로 예술의 동력원이 되기도 한다.

 

이 앨범의 A면 6번 러브 테마를 듣고 있으면 그 아름다운 선율과 필름이 돌아가면서 나오는 사랑하는 이들의 키스 장면은 사랑을 했기에 헤어짐의 키스도, 사랑을 시작해서 불타는 키스도 토토의 촉촉한 눈가를 통해 하나의 테이크로 스쳐간다.

 

시네마 천국을 좋아한 사람이라면 대번이 음악이 흐르면 그 장면, 하게 될 것이다. 이 영화는 감독판이 있는데 그건 두 시간이 훨씬 넘는 173분짜리다. 감독판을 봐야 엘레나와 토토의 재회 부분이 있다. 압축판은 그 엘레나의 시퀀스가 통째로 날아갔다.

 

시네마 천국은 언제 어떻게 꺼내느냐에 따라 지금 내가 처한 현실과 영화의 경계 지점에 어떤 식으로 다가갈 수 있는지 다른 사유를 제공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는 여전히 영화 같은 삶을 간절히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눈물이 말랐다고 생각이 들 때 시네마 천국을 살며시 꺼내서 보면 촉촉하게 눈가를 적셔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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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도 옴니버스 4편으로 된 공포영화다. 클로버필드처럼 캠으로 촬영하는 형식의 영화다. 앞서 올린 살인마 잭의 집은 인스타놈들이 삭제를 했다. 영화일 뿐인데 삭제를 해버렸다. 이 영화는 하나의 이야기가 죽 이어지는데 그 중간중간에 3편의 다른 이야기가 끼어드는 묘한 영화다.

 

이 영화는 잔인하고 고어적인 장면(도 있다)보다 내용이 보통 생각하는 것 이외의 내용으로 만들었다. 1, 2편이 페이크 다큐 형식인데 비해 이번 3편은 스토리가 아주 기이하고 몹시 이상하고 아주 기묘하다.

 

특히 4편 중 3번째 이야기는 정말 흥미롭다. 양자역학 같은 기계를 통해 저쪽 세계에서 살고 있는 나 자신을 만난다. 저쪽 세계에서도 자신과 같은 나를 보며 인사를 하고 이쪽의 나와 저쪽의 나는 잠시 자리를 바꾸게 된다. 그래서 서로 기계를 통과하면서 신기해한다.

 

집도 같고, 부인도 같다. 그런데 이쪽 세계에서의 나의 부인과는 다른 사랑을 하고 있다. 남자들을 불러 남편이 보는 곳에서도 섹스를 즐기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저쪽 세계로 간 나는 이쪽 세계로 오려고 하는데 저쪽 세계의 사랑방식이 인간이 생각하는 그런, 아니 저쪽 세계에서는 당연시되는 인간의 모습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분명 호불호가 갈라지는 영화지만 공포를 좋아하는, 공포스러운 이야기, 상상너머의 무서운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꽤 빠져들만하다. 아니 도대체 이런 이야기는 어떻게 생각해 냈지? 하게 된다. 나머지 이야기들도 환상특급 같은 공포 이야기다. 전 세계의 공포물 감독들이 지속적으로 참여하는 것으로 보아 시리즈로 계속 나올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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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미장센은 이런 것이다. 자신의 아들에게 총구를 겨눈다. 그리고 장면이 전환되면 자신의 아들들과 아내를 죽이고 다른 시체들과 함께 냉동실에 넣어두고 영원한 모습을 유지되고 있다고 믿는다. 살인마 잭은 자신의 애인의 가슴에 볼펜으로 선을 긋는다. 그리고 장면이 전환되면 도려낸 가슴으로 지갑을 만들어 가지고 다닌다
.

이 영화는 고어스러운 타격이 화면에 전면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미장센 만으로 보는 이들로 하여금 처절하고 암울한 장면을 깊게 상상하게 만든다. 자신의 아이에게 총을 쏘아 머리에 구멍을 내는 상상, 자신의 아내의 등에 총구멍을 내는 상상, 울부짖는 애인의 가슴에 칼을 들이대 가슴을 도려내는 상상을 하게 끔 감독은 영화를 나열했다
.

영화는 60명을 죽인 잭의 내레이션으로 계속 흐르고 그 사이사이 살인의 장면을 삽입했다. 살인마 잭은 자신의 살인이 예술이라 믿고 있기에 시체들을 전리품으로 만들어 시체로 집을 짓는다. 이 영화에는 우마 서먼, 유지태도, 엘비스의 외손녀인 라일리 코프도 하나의 전리품으로 나온다
.

청춘스타였던 맷 딜런의 신들린 사이코의 연기는 좋고 고어물의 특징인 타격이 전면에 드러나지 않지만 살인행위를 예술로 표현하는 것은 영화라도 마치 죄를 짓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영화를 좋은 쪽으로 나열하지만 욕망, 집착, 나르시시즘, 냉혈, 박애라는 단어로 말할 수 있겠지만 살인마를 예술가로 표현하는 것은 타락일지도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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