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로 보는 인간의 고통 - 법의학자가 들려주는 그림 속 아픔 이야기 명화 속 이야기 8
문국진 지음 / 예담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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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본인은 이 책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고(역시 사람은 책을 읽어야 많은 걸 알게 되고 배우게 된다. 독서의 중요성을 새삼 재삼 삼삼하게 느끼게 되었다), 이미 읽어보신 독자제위들께옵서는 당근지사로 아시겠지만 문국진 박사는 1925년생으로 올해로 꼭 만80세이다. 그 연세에 아직까지 글을 쓰신다니 존경스럽고, 전문직에 종사하면서 취미나 개인적 관심분야에 대한 지속적인 탐구로 전문가 못지 않은 일가를 이루었으며 여러권의 저서를 내고 하다니 실로 본인이 본 받아 따르고자 하는 바 사표 비슷하다. 사표는 그저 사표일 뿐이지 아무나 따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표를 쓰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없다. 사표 이야기를 하다보니 뜬금없이 사표가 쓰고 싶어진다. 사표 던지고 방구석에서 뒹굴거리며 책이나 읽고 잠오면 자고 그러고 살고 싶지만 아시다시피 어디 세상살이가 그리 만만하던가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이런 이야기 되겠다.

신체 추형장애라는 것이 있단다.(요즘같이 복잡 다단한 어지러운 세상에 뭔들 없겠나) 아름다움에 대한 인간들의 동경이나 원망을 모르는 바 아니니 그런 정신장애가 생긴다고 별 이상할 것은 없다. 누구나 조금은 자신의 외모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고(본인은 돌출형 구강구조 - 튀어나온 입 - 로 수년간 남몰래 고민해 왔고, 유년에는 놀림도 당하고 했던 것이니 불혹을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그 고민에서 벗어났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남들에게 좀 더 예쁘게 보일려고 노력한다. 미에 대한 선망은 인지상정을 떠나 인간의 본능이다는 생각이다. 과유불급이라 했던가. 무엇이든지 도를 넘어서는 것이 문제다. 물론 콤플렉스가 자기개발의 동력이 되는 수도 있겠지만, 근래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선풍기 아줌마나 마이클 잭슨의 예에서 보듯이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수도 있다. 불현 듯 어느 선을 넘어섰기 때문에 외모 콤플렉스로부터 발생한 에너지가 자기발전의 동력으로 승화되지 못하고 자기파괴의 마력으로 전환되어 버린 것이리라. 이름하여 주화입마!!!

대학교 땐가 언젠가 친구들과 술자리에서 성형수술에 대해 나름대로 진지하게 100분 토론 비슷한 난상토론을 벌인 적이 있었는데, 술자리 토론이라는 것이 항상 그렇듯이 시끄럽기는 엄청 시끄러워 호떡집에 불난듯이 와자지끌 소란하지만 대개는 결론없이 흐지부지 지리멸렬, 잘하면 싸우기 일쑤고 나중에는 술에 취해 누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도 누가 떵을 싸 발랐는지 도통 기억나지 않고...... 한마디로 한심하게 그리 되는 그런 것인데....어렴풋이 기억나는 그날의 성형수술에 대한 토론에서는 아마도 ‘신체발부 수지부모형’의 보수주의자들이 득세하였던 것 같고, (물론 기형에 대한 성형에는 모두 찬성이었다) 미용내지는 외모 컴플렉스의 극복방안으로서의 성형수술을 지지하는 일부 성형옹호론자들의 반론도 만만하지는 않았던 것인데 나름대로 일리도 있고 나아가 삼사도 있을 법 했던 것이다. 성형을 통해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적극적이고 보람찬 삶을 살 수 있다면 그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우리 근본주의자들의 생각은 올바른 가치관과 바람직한 삶의 방식이라는 것이 외모의 변화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수행정진을 통한 정신의 고양에서 발현하는 것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어찌 생각해 보면 본인의 이러한 생각은 과거 단발령에 반발하여 상투를 붙잡고 눈물을 철철 흘리며 내 목을 쳐라 의연히 외치던 구한말 양반들의 고루한 사상과 닿아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나이가 먹을수록 왠지 그 먼지먹은 외침에 자꾸만 애정이 간다.

가장 인상적인 작품을 꼽으라면, 아마도 램브란트의 ‘눈먼 삼손(p200)’을 꼽겠다. 사랑과 배신(이 두 단어는 서로 이웃하고 사는 경우가 많아 어울리는 면도 있다. 사랑과 야망, 사랑과 영혼 등도 자주 쓰이고는 있지만 사랑이란 단어는 배신과 이웃할 때 극적인 효과를 내는 것 같다.)으로 점철된 성서속 영웅의 비극적 말로를 그린 그림은 그 치명적인 배신의 정신적 고통이 눈알이 뽑히는 육체적 고통으로 표현된 듯 하기도 하다. 눈알이 찔리며 고통에 몸을 뒤틀고 얼굴을 오만상 찡그리고 있는 삼손의 얼굴을 보며 그런 감상적인 생각을 해봤다. 연이나 마음의 상처 어쩌고 하면서 센티하게 주절거리고 있지만 여하튼 눈알이 찔리는 고통은 정말 엄청날 것이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저자의 말처럼 쇼크사를 일으킬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알이 안 찔릴려면 여자를 사귈 때 조심해야 한다. 데릴라 같은 나쁜 여자를 사귀게 되면 인생이 비극적으로 된다.

흔히 빛과 영혼의 화가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램브란트의 그림을 볼 때 마다 느끼지만 그의 그림속에는 빛이 있다. 눈이 부신 그런 환한 빛이 아니라, 따뜻하고 포근하며 은은한 빛. 영화 <퐁네프의 연인>에서 줄리에트 비노쉬(실명의 위기에 처한 인생 막가는 처녀화가로 나온다. 물론 아시겠지만)가 그렇게도 램브란트의 그림을 보고 싶어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닌가 멋대로 짐작해 본다. 자신의 실명이 램브란트의 그림을 통해 회복될 수도 있다는 희망과 소원을 가져본 것이리라. 삼손의 고통스런 얼굴과 대조적으로 데릴라는 한 손에는 커다란 엿장수 가위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삼손의 머리에서 짜른 머리터레기를 휘날리며 비웃는지 조금 바보스런 얼굴로 동굴을 빠져나가고 있다.(자고로 여자 때문에 망한 영웅호걸들이 수다하거니와 큰일을 할려면 김유신처럼 말목아지를 단칼에 베어야만 하겠지만, 독자나 관객은 김유신보다는 사랑의 배신으로 피 흘리며 쓰러지는 영웅들의 비극적 이야기를 더 좋아한다. 그 슬픈이야기에서 독자나 관객은 카타르시스를 느낀다는 그런 말이다..) 삼손의 팔을 잡고 있는 병사나 창을 겨누고 있는 병사들의 겁먹은 듯한 표정도 재미있다. 독자제위들의 집중적인 감상을 권하는 바이 올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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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04-27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로 뽑히신 거군요.
축하드립니다.
재밌게 잘 읽고 갑니다.^^

붉은돼지 2005-04-27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제가 쓴 리뷰를 다시 읽어 보니 "ㄴ"운운한 것이 눈에 거슬리고, 마음에도 찜찜합니다.

꼬롱이 2015-01-04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글을 참 맛깔나게 잘 쓰시네요^^
 
- 생각하는 그림들
이주헌 지음 / 예담 / 2004년 12월
평점 :
절판


1. 일단 그림이 커서 마음에 든다. 얼마전 예경에서 나온 <천년의 그림여행>의 경우 일부 독자들로부터 소개된 그림의 도판이 너무 작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던 것이다. 작은 그림을 좀 자세히 볼려고 책에 코를 박고 눈알이 빠져라 보다 보면 짜증이 나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그림이 작은 것도 문제이지만 그림이 너무 커서 양페이지에 걸쳐 있을 경우에도 문제는 있다. 양페이지에 걸쳐 인쇄된 그림의 가운데 부분을 자세히 볼려고 책을 무리하게 펼치다 보면 책이 무슨 수박도 아니고, 모세의 홍해바다도 아닌것이 양쪽으로 똑 따갈라지면서 설상가상 밥상위에 엎어지는 격으로 책이 두권으로 세포분열하는 그러한 난감한 불상사가 발생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본인 생각에는 큰 그림도 좋지만 될 수 있으면 한 페이지안에서 해결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다.

2. 그림관련 책일 경우 문제가 되는 중요한 것은 그림크기와 아울러 도판의 선명도 내지는 인쇄상태가 될 것이다. 학고재에서 출간된 소위 기념비적 저작이자 전세계적 기획 출판물인 "중국회화사 삼천년"의 경우 판권 소유자인 예일대학 출판부가 한국어판을 기획하면서 한국의 인쇄술이 못미더워 전량 홍콩에서 인쇄하는 조건으로 출판하게 되었다는 보도를 본 바 있지만 거금을 들여 이 책을 구입한 본인이 목도한 이 책의 인쇄상태란 것이 생각하는 그림들에 나오는 그림의 인쇄상태나 별 반 차이가 없더라나.

3. 책에서 시종 사용되고 있는 경어체 문장(작가소개까지 경어체로 되어 있더라)은 마치 선생님이 초등학생들에게 이야기하는 듯한 느낌이어서 다소 부담스러웠고, 또 그림에 대한 설명이 너무 도덕적이고 원론적인 것 같아 지루한 느낌이었다. 188페이지의 얇은 두께에도 불구하고 부그로, 밀레, 보갱, 르누아르, 샤르뎅, 마티스 등은 두 번씩 언급되었으며, 윤석남은 생각하는 그림 오늘에도 소개되었던 화가이다. 얇은 책에 한 화가의 그림을 두 번씩 소개하는 것보다는 다른 화가를 한 명 더 소개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화가인명사전이 뒤에 붙어 있어 - 처음에는 화가 소개가 없는 줄 알고 투덜거리다가 나중에야 뒤에 붙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 책을 읽다가 보면 한 페이지 읽고 뒤에 가서 찾아보고 다시 두페이지 읽고 또 뒤쪽을 뒤적여야 하니 오뉴월 개보다 게으른 본인에게는 고역이랄 것 까지는 없지만 다소 귀찮은 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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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 생각하는 그림들
이주헌 지음 / 예담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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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 아마도 이 책을 받고 수일 후에 월전 장우성 화백이 타계했다는 소식을 접한 것 같다. 몇몇 출판사에서 우리나라 화가들을 소개한 책들이 출판되기도 했지만 대부분이 월전같은 원로대가들이나(시공사 20인의 한국현대미술가 시리즈 같은), 과거의 화가들(유홍준의 화인열전 같은)에 대한 책이 다수였고, 현대 화가에 대한 소개는 드물었다는 생각이다. 거의 모두가 생소한 면면들이지만 우리나라 현대화가들을 많이 소개받고 보니 반갑다. 미술 소개서 내지 안내서가 대부분 서양미술 - 특히 인상주의 - 중심인 작금의 풍토에서, 물론 적지 않은 부분 이주헌의 명성에 기대고 있겠지만 어쨌든 판매실적에 무심할 수 없는 출판사로서는 나름대로 용기있는 기획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말았다 한다. 미술에 관심있는 일반독자들에게는 바람직한 일이라는 생각이다.

2. 등장 화가를 모두 세어보니 39명이다. 39명의 작가들 면면을 꼼꼼히 보다가 문득 심심해서 출신성분을 분석해 본 결과, 홍익대와 서울대 출신(대학원 포함하여)이 31명으로 80%를 차지하고 있고 나머지 8명중 5명은 유학파(이중섭과 김종영도 유학파로 친다면 말이다), 2명은 이화여대 출신, 단 1명이 지방대(전남대)출신인데 누구인고 하니 운동권출신으로 다소 과격하고 파격적인 그림을 - 거실이나 침실에 걸어 놓기에는 다소 부담스러운 - 그리는 홍성담 되겠다. 이른바 문화권력이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절대권력은 절대부패한다는 고언이 있듯이 권력이나 돈이나 뭐나 집중되고 보면 이런저런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 흔히 안배라는 말도 쓰이고는 있지만 지방에 살고 있는 본인으로서는 지방출신 화가가 너무 적은 것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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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세트 - 전10권
장정일 지음 / 김영사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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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연초부터 시작해서 근 2개월에 걸쳐 장정일 삼국지를 완독하고 나니 실로 감개가 무량~할 것 까지야 없지만, 그래도 무언가 해내었다는 그런 한심한 생각이 들기도 해서 조금 뿌듯하고 또 뻐근하다. 그러나 저러나 옛날에는 책을 한 권 띠게 되면 책걸이라는 것을 하기도 했던 것인데, 본인으로 말하자면 한 권이 아니라 열권을 읽었으니 떡을 만들어 동네방네 돌리지는 못하더라도 마누라와 소주라도 한잔 던져야 되겠다는 생각도 들고 감상문이라도 하나 써야할 것만 같은 그런 의무감이 또 든다. 물론 당근스럽게도 고인들의 책걸이란 아마도 기본적으로는 그 책 한 권을 두눈 감고 니라~니라~ 달달달 암송해낼 수도 있다는 것이겠고 모름지기 더 나아가서는 그 책에 담긴 사상과 정신을 실천궁행하겠따는 굳은 다짐을 더욱 굳히는 의식일 것인데..거기에 비하야, 본인이 삼국지 10권을 읽은 과정을 돌이켜 보자면 실로 통탄스럽다. 침대에 드러누워서 책의 대부분을 읽었고(따라서 자연 자는 듯 조는 듯 읽은 부분이 많음), 텔레비전을 보면서 또 책의 많은 부분을 읽었으니 문장이 눈에 잘 들어올질 않고 책장만 넘어가기 일쑤고, 똥을 누면서 또 일부를 읽기도 하고, 책 읽은 페이지를 표시해놓지 않아서 몇장 건너뛰어 읽기도 하고 했던 것이니 고인들의 독서에 견주어 볼 때 참으로 송구스럽고 부끄럽다. 암기위주의 교육이 학생들의 창의성을 말살한다는 주장이 득세하고 있고 또 지당하신 말씀이기도 하다. 연이나 암송하고 있는 시가 한 두편 정도 있다면 그것도 멋있는 일일테고 구십구단은 아니더라도 구구단은 외워야 수학문제를 풀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해본다.

소시적부터 흠모해 마지 않았던 장정일 선생께옵서 삼국지를 새롭게 쓰셨다고 하니 읽어보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수년전에 - 아마도 장정일 사부께옵서 불란서로 망명하시기 전이지 싶으다 - 본인의 친구 한 명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장정일이 너무 성문제에 집착 하다가 이제 바닥을 쳤으니 그에게서 더 이상 나올 게 뭐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넘의 전망에 본인도 어느정도 공감을 했던 것이고, 어쨌든 그 후 장선생께옵서는 불란서로 훌쩍 떠나셨고, 절치부심 장고 끝에 중국으로 눈길을 돌리신 것 같다. <중국에서 온 편지>가 장정일의 포르노소설들과 금번 삼국지의 중간쯤에 위치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실망스러울 것도 없이 그동안에 숱한 삼국지가 나왔으니 장정일이 ›㎢鳴灼漫 살 찌르는 송곳같은 그런 뾰족한 수가 갑자기 생기는 것은 아니다. 서문에서 장정일이 매우 호기롭게도 자신이 무슨 대단히 새로운 삼국지를 쓰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별 다른 것은 별로 없다. 기존의 촉한정통론에 대한 반론과 이론은 예전부터 있어왔던 것들이고, 중화사상에 대한 비판, 동탁이나 여포, 맹획 등 권력투쟁에서 실패한 인사들이나 소위 변방의 오랑캐들에 대한 동정의 눈길도 그다지 새롭지는 않은 것이다. 삼국지 중간 중간에 나오던 한 사건에 대한 평을 곁들인 시문들이 많이 없어져서 오히려 재미와 삼국지 자체가 갖는 어떤 품격이 감해 졌다는 생각이고, 그 시문이 고루한 유교사상과 후안무치의 중화주의를 대변한다고 하더라도 그 행간을 읽어내고 판단을 내리는 것은 결국 독자의 몫이라야 할 것이다. 작가가 나서서 이거는 이렇다 저거는 저렇다 할 필요는 없는 것이 아닐까? 중간중간 등장하는 삽화도 본인의 기호와는 부합되지 않는 것 같다. 다만 그림에 붙은 설명에는 나름대로 새로운 것들이 있기도 했더라. 장사부께옵서는 뭘하자고 어쩌자고 시류에 편승해 삼국지에 손을 대었단 말인가.  포르노 소설이나 쓸것이지..오호 통재 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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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ky 2005-02-24 0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참 잘 쓰셨네요. 한참 웃다 갑니다.^^

붉은돼지 2005-02-25 0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erky님. 글 잘 쓴다는 소리를 들으니 깊이 민망스럽습니다. 멀리 계시는군요. 항상 건승하시길 바랍니다.
 
부에나 비스타 소셜클럽 [dts] - [초특가판]
빔 벤더스 감독, 라이 쿠더 외 출연 / 드림믹스 (다음미디어)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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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으면 좋겠다 살다가 지친 사람들
가끔씩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계절이 달아나지 않고 시간이 흐르지 않아
오랫동안 늙지 않고 배고픔과 실직 잠시라도 잊거나
그늘 아래 휴식한 만큼 아픈 일생이 아물어진다면
좋겠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굵직굵직한 나무등걸 아래 앉아 억만 시름 접어 날리고
결국 끊지 못했던 흡연의 사슬 끝내 떨칠 수 있을 때
그늘 아래 앉은 그것이 그대로 하나의 뿌리가 되어
나는 지층 가장 깊은 곳에 내려앉은 물맛을 보고
수액이 체관 타고 흐르는 그대로 한됫박 녹말이 되어
나뭇가지 흔드는 어깨짓으로 지친 새들의 날개와
부르튼 구름의 발바닥 쉬게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사철나무 그늘 아래 또 내가 앉아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내가 나밖에 될 수 없을 때
이제는 홀로 있음이 만물 자유케 하며
스물 두 살 앞에 쌓인 술병 먼 길 돌아서 가고
공장들과 공장들 숱한 대장간과 국경의 거미줄로부터
그대 걸어나와 서로의 팔목 야윈 슬픔 잡아 준다면
좋을 것이다 그제서야 조금씩 시간의 얼레도 풀어져
초록의 대지는 저녁 타는 그림으로 어둑하고
형제들은 출근에 가위 눌리지 않는 단잠의 베개 벨 것인데
한 켠에서 되게 낮잠 자 버린 사람들이 나즈막히 노래불러
유행 지난 시편의 몇 구절을 기억하겠지

바빌론 강가에 앉아
사철나무 그늘을 생각하며 우리는
눈물 흘렸지요

<사철나무 그늘아래 쉴때는> "장정일"

**************************

  <너에게 나를 보낸다>, <거짓말> 등 주로 야리꾸리한 문제의 변태소설들을 많이 써온 장정일 선생도 이십대 초반 전후에는 이런 시도 조금씩 쓰곤 했었는데, 말인즉슨 이미 희미해진 옛 추억의 자락들을 더듬어 찾는 늙은이의 한숨같은, 허파 깊숙한 곳으로부터 내뿜는 허망한 담배연기 같은, 그런 쓸쓸하고 허전한 시도 꽤 쓰곤 했었더라는 말이다. "사철나무 그늘 아래 또 내가 앉아/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내가 나 밖에 될 수 없을 때" 이 구절이 제일로 마음에 든다. 말인즉슨 정곡을 찔렀는지 아니면 정곡 그 비슷한 어디쯤을 건드렸는지 마음이 짠하고 잘하면 눈물도 날 듯 말 듯 하다.

어제 본 "브에나비스타 쇼설클럽"은 왠지 쓸쓸하고 애잔한 느낌이다. 쿠바 음악에 대해서 본인은 당연 문외한으로 잘 모르지만 그런대로 좋은 느낌이었고, 가사는 아주 재미있어서 인상적이었다. 뚜라 집에 불이 났다나 어쨋다나, 화재의 심각한 상황인데도 어감이 웃겨서 조금 웃었다. 흔히 말하듯이, 촛불은 꺼지기 직전에 한결 더 밝은 빛을 내는 법이다. 빛나고 유쾌했던 지난날들을 재현해 보려는 늙은이들의 노력은 쓸쓸하고 애달프다. 육신은 이미 늙어버렸느니 마음만으로 세월을 되돌릴 수는 없는 일이다. 영화를 보다가 문득 위의 시가 생각났다. 그 옛날 본인도 학교옆 신천 방둑위에 앉아 눈물을 흘리곤 했었다.

뜬금없이 형가의 절명시도 떠오른다. 風蕭蕭兮易水寒, 壯士一去兮不復還 (바람은 쓸쓸한데 역수의 물은 차갑구나/ 장사 한번 떠나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리) 비장한 각오로 떠난 장사도 결국 돌아오지 못했듯이 한번 지나간 우리 젊음도 결단코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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