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디학 개론
김대중 지음 / 조세금융신문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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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이 1567년 골프를 쳤다는 기록으로 인해서 그녀는 '최초의 여성 골퍼' 또는 '골프의 어머니'라는 호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21-)


불과 30년 전 캐디는 고객의 골프백을 들어주고, 골프클럽을 꺼내 주고 , 볼을 찾아주고, 그린에서 볼을 닦아주며, 모래 주머니를 메고 다니면서 배토를 하고, 경기를 원활하게 진행하는 일을 했다. (-50-)


기록으로 보면 한국 최초의 캐디는 연덕춘으로 그의 나이 14살이던 1930년에 경성골프구락부 군자리 코스의 캐디 보조로 시작하여 클럽을 매고 다니면서 어깨 너머로 골프를 배워 한국 최초의 프로골퍼 1위가 되었다. (-60-)


플레이어는 어떠한 경우에도 한 사람 이상의 캐디를 쓰면 안 된다.
플레이어는 라운드 동안 캐디를 바꿀 수 있지만, 일시적으로 조언을 받으려는 목적만으로 캐디를 바꿔서는 안 된다. (-109-)


실무에서 캐디 교육을 하면서 느끼는 소회는 캐디 1며을 만들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캐디는 기본적으로스킬이 있어야 하고, 그 외에 서비스 마인드, 인성 등을 갖추어야 하기 때문에 2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에 이러한 지식들을 체계적으로 배우는 것 자체가 쉽지 않으며, 자신의 노력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교육 이수 자체도 불가능하다. (-158-)


학창시절 우리는 통상적으로 꿈과 미래 희마을 이야기할 때, 판사, 검사, 의사, 선생님을 첫순위로 꼽는 경우가 많다. 지금 그 직업군을 대체히고 있는 새로운 직업으로 유투브 크리에이터가 뜨고 있다. 새로운 직업군 캐디에 대해서 이해하고, 캐디의 역할, 캐디의 보수를 이해한다면, 새로운 직업으로 캐디를 직업으로 원하는 이들이 풍분히 나타날 수 있는 개연성이 존재한다.그건 우리 사회가 생각하는 캐디의 선입견과 달리 캐디 직군은 고소득 전문직이며, 여타 직업군에 비해 높은 보수를 받을 수 있는 특수고용직군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유명한 골퍼 뒤에는 유명한 캐디가 있다. 헬퍼로서 캐디의 역할 뿐 아니라 경기의 흐름을 이해하고, 골프 선수가 놓치고 있는 부분을 어드바이스할 수 있는 이가 캐디이며, 실제 골프장에는 캐디와 골프 선수가 한조를 이루어 경기를 치루고 있다. 아마추어 골퍼는 한라운드당 캐디피를 캐디에게 지불하고 있으며, 4대 보험 적용이 되기 전까지 캐디는 특수고용 직업군으로서, 자영업자나 다름 없었다.


그래서 캐디는 매력적이다. 단순히 헬퍼로서 캐디의 역할 뿐 아니라, 골프의 수칙을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하며, 프로 골퍼의 경우, 캐디의 역할은 더욱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즉 캐디는 골프선수의 성적을 올릴 수 있고, 반대로 골프 수칙을 어겨서 벌타의 빌미가 되어서, 패널티를 받을 수 있다. 특히 라운딩이 진행되는 골프공을 직접 만지게 될 때는 골프장 안에서의 수칙과 절차를 정확하게 숙지해야 경기 진해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 캐디의 임무는 정확하게 수행이 가능하며, 기본적으로 골프백을 메고, 카트를 운행하는 주체로서, 골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사고들의 책임과 의무까지 가지고 있다. 그린의 상태가 문제가 될 때, 직접 모래나 잔디를 이용해 ,배토를 함으로서, 그링 위의 움푹 파인 곳을 채우고 있다. 물론 캐디가 하는 모든 행동은 골프장 내에서의 기본 수칙을 준수해야한다는 조건에 따르면서 시행해야 한다.프로 골프에게 명예의 전당이 있듯이 캐디에게도 명예의 전당이 존재하며, 프로골프의 역사가 깊은 만큼 캐디의 역사도 상당히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15세기 보디가드 역할이었던 캐디는 이후 포터, 포어 캐디, 프로골퍼, 프로 캐디, 한국형 캐디로서 역할을 다양화하고 있으며, 전문화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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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그 아이 - 영화보다 잔인한 5.18 그날의 이야기! 고래동화마을 9
임지형 지음, 최민호 그림 / 고래가숨쉬는도서관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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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같은 날들에 대한 회고>
전두환과 신군부의 권력 욕심이 불러일으킨 1980년 5월 광주 학살 시민들은 어느 날 갑자기 이유없는 잔인한 학살의 날벼락을 맞았다. 폭력과 죽음의 그 거리에 지금의 그대들이 있었다면 어떠했을까? 영화 '낙화잔향' 은 억울하고 잔인한 5월의 개 같은 날들에 대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42-)


"찬들아, 넌 5.18 때 집에 있다가 동네가 갑자기 시끄러워서 무슨 일이 있나 나갔다가 계엄군에 쫒기는 사람들과 얼떨결에 도망치면서 계엄군한테 맞아 죽는 역할이야. 그리고 네 엄마도 너 찾으러 갔다가 휩쓸려서 네가 죽는 걸 목격하는 거지." (-96-)


"사과하라! 사과하라! 무진이 할머니한테도 사과하라!"
"사과하라! 사과하라!"
"사과하라! 사과하라! 그 모두에게도 사과하라!" (_131-)


1948년에 일어난 제주도 4.3 사건, 그리고 1980년에 일어난 5.18 광주학살은 우리에게 많은 아픔의 역사이다. 아프지만, 그 역사를 마주해야 하는 미래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이 직접 겪지 않았지만, 그 역사에 대한 책임을 가지는 자세이다. 역사적 과오에 대한 사과를 함으로써, 우리의 역사에 대한 부끄러움을 남기지 않는 것이며, 미래를 위해 새로운 희망의 씨앗을 뿌리는 확고한 마음가짐이 될 수 있다. 1980년 5월 18일에 광주에서 일어났던 계엄군 군인에 의한 시민 강제진압과 개입은 여러차례 역사적 기록으로 남아있는 상태이며, 현 정부는 5.18 특별법을 통해 억울한 광주 시민들의 아픔을 위로하고 있다.


책 <영화 속 그 아이>는 5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중요한 이슈 5.18 에 대한 역사를 동화로, 쓰여졌으며, 아이들의 눈높이의 시선으로 임지형 동화작가의 시선이 돋보였다. 실제 동화책은 영화 <낙화잔향>을 모티브로 하고 있으며, 리처드 기어를 좋아하는 팬이자, 동화 속 주인공 임진주는 영화속 엑스트라로 출연하고 있다. 엉겁결에 엄마 임진주를 따라가게 되면서, 찬들도 영화에 엑스트라로 줄연하게 된다. 여기서 두 모자 엑스트라는 영화 속에서 억울하게 죽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유없이 죽음을 맞이하는 그 순간, 우리가 느껴야 하는 것은 억울한 죽음이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로 다가와야 하는지다.즉 우리 사회가 영남과 호남으로 지리적으로 분리되면서, 5.18 사태가 끝난지, 4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서로 화해하지 않는 상황에 놓여지고 있으며, 5.18에 대한 따가운 시선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즉 5,.18에 대해 역사적 과오를 국가가 인정하고, 그 원인 제공자인 군부 독재 세력들이 해야 할 일들이 무엇인지 알 수 있으며, 광주 망월동 구묘역과 신묘역에 모셔져 있는 슬픈 광주시민들의 아픔을 달래주어야 할 때가 아닐까 싶었다.그것이 살아있는 역사이며, 아픈 역사를 인정하고, 서로 함께 마음을 나누는 하나의 매우 중요한 과정이면서 다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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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군벌 전쟁 - 현대 중국을 연 군웅의 천하 쟁탈전 1895~1930
권성욱 지음 / 미지북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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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새벽 1시 30분, 봉기가 시작된 지 3시간 만에 우창 전체가 반란군의 손에 넘어갔다. 반란군의 손실은 전사자 10여 명에 부상자 20명이 전부였다. 반면 청군의 사상자는 500명이 넘었다. 이것이 중국 역사에서 말하는 '우창봉기' 이다. 루이청이 버리고 간 총독부 건물 앞에는 혁명군을 상징하는 '철혈 18성기'가 내걸렸다. (-38-)


쑨원의 본격적으로 반청혁명에 나선 계기는 청일전쟁이었다. 일본군의 공격 앞에 무기력했던 청군의 모습은 중국의 지식인들에게는 충격이자 굴욕이었다. 그는 톈진으로 가 조정의 실권자 리홍장에게 편지를 써서 구가 개혁과 부국강병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건의했다. 심지어 직접 쿠데타를 일으켜 공화국의 지도자가 될 것을 권유하기까지 했다. 리홍장에게는 황당한 소리여쓸 것이다. 그 시절은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사람은 지식인 축에 넣어주지 않았던 시대였다. (-155-)


1913년 10월 10일 위안스카이는 중화민국의 초대 총통에 취임했다. 약법대로라면 국회에서 취임해야 하지만 위안스카이는 법을 바꿔 청나라 황궁인 자금성의 태화전에서 성대한 취임식을 치렀다. 화려함은 황제의 즉위식을 연상케 할 정도였다. 공교롭게도 청조를 무너뜨린 우창봉기 2주년이 되는 날이기도 했다. 그러나 중국의 시곗바늘은 새로운 시대를 향하기는커녕 거꾸로 돌아가고 있었다. (-249-)


그러나 1924년 10월 23일 '베이징정변'을 일으킨 펑위샹이 자금성을 비우고 퇴거하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푸이는 톄진의 저택에 조용히 은거하던 그는 만주사변 이후 일본의 회유에 넘어가 만주국 황제가 되었다. (-367-)


티베트는 청조가 망하자 1913년 2월 13일 제 13대 달라이 라마가 영국의 지원을 받아 라싸의 포탈라궁에서 독립을 선언했다. 라싸에 있던 중국인 관료들과 중국군은 티베트 군대에 의해 모두 무장해제되어 중국으로 쫒겨났다.외몽골을 정벌한 돤치루이는 티베트까지 되찾으려 했다. 1918년 1월, 류쩐호우가 3만 명의 병력으로 티베트 동부를 침공했다. 그러나 험난한 지형과 국경을 돌파하고 창두를 비롯한 쓰촨성 서북부의 광대한 지역을 점령했다. (-446-)


천중민은 아무 실력도 없는 쑨원이 군벌의 힘을 빌려서 군별을 정벌하겠다며 허세를 부리는 모습이 가소로웠다. 쑨원은 이미 몇 번이나 좌절을 겪었으면서도 실수를 반성하거나 바로잡으려는 노력 없이 번번이 요행을 바라고 모험에매달렸다. 불굴의 의지라기보다는 집착에 가까웠다.게다가 쑨원의 동맹자인 돤치루이는 공화정을 짓밟고 총부리를 겨누었던 상대가 아닌가. (-519-)


그런 장쭤린의 마음속에도 걸림돌이 하나 있었다.관동군이었다. 그는 관동군의 힘을 빌리는 대가로 매국이나 다름없는 밀약을 맺었다. 동북과 내몽골 동부에서 일본의 침탈을 용인하여 사실상 반식민지로 전락하는 내용이었다. 외부에 알려진다면 궈쑹링의 반란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정치적 위기에 직면할 판이었다. 즉대를 물리치려다 호랑이를 불러들인 꼴이었다. 장쭤린은 뒤늦게 왕융장의 충고를 듣고서야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669-)


펑위샹은 마음만 먹으면 국민혁명군의 총사령괁이 될 수도 있었다. 실제로 장제스는 자기 자리를 펑위샹에게 빼앗길까 노심초사했다.장제스보다 5살 연상인 그는 명성과 지위 , 경력 증 어느 면에서 보더라도 장제스와 견줄 바가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장제스가 자신보다 훨씬 쟁쟁한 경쟁자들을 제치고 중국의 지도자가 된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그러나 펑위샹은 쑨원과 마찬가지로 공산주의에 거부감이 있었고 중국에서 소비에트 혁명을 시작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그의 희망은 중국을 통일하고 내전을 끝내 민중이 편안하게 사는 세상을 여는 일이었다. (-755-)


이 사건은 결코 돌발적인 것이 아니었다. 장제스와 공산당의 갈등은 이미 회복 불능이었으며 서로 극도의 증오심을 품고 있었다. 갈수록 도를 더해가는 소련의 간섭에 대한 반감도 있었다. 상하이 정변을 용공과 반공, 혁명과 반혁명 세력의 충돌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기만이자 본질을 호도하는 것이다. 소련이 중국공산당을 앞세워 성급하게 국민당을 장악하려 하자 반소 민족주의자들의 분노가 한꺼번에 폭발했다는 점에서 4.12 정변은 민족과 반민족의 싸움으로 봐야 한다. (-856-)


결혼식은 호화스러우면서 엄숙했다. 그저 두 남녀의 혼인이 아니라 중국에서 가장 권세 있는 집안과 앞으로 중국의 지도자가 될 사람의 결합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장제스가 쑨원의 실질적인 계승자가 되었음을 선언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쑹메이링은 쑨원의 처제였으므로 그녀와의 결혼은 배경이 변변찮은 장제스에게 지도자에 걸맞은 권위를 부여했다. 정작 쑨원의 부인 쑹칭링은 참석하지 않았다. 공산당원은 아니지만 공산주의에 우호적이었던 그녀는 반공 쿠데타를 일으켜 국공합작을 박살 낸 장제스를 평생 철천지원수로 여겼다. (-939-)


장쭤린 암살은 고모토 다이사쿠와 그에게 동조한 관동군의 몇몇 장교가 독단적으로 저지른 사건이며, 총리인 다나카는 물론이고 본국 정부나 쇼와 천황, 심지어 군부와도 무관하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통설이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다나카 류키치의 증언과 고모토가 남긴 회고록에 근거한다. 그러나 다나카 류키치의 증언도 어디까지나 "고모토에게 들은 얘기" 이며, 사건에 직접 관여했거나 사건의 전말을 자세히 알았던 것은 아니다. (-1008-)


1936년 12월 12일, 새벽 5시, 중국과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리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벌어졌다. 공산군 포위망의 일각을 맡은 동북군 수장 장쉐량과 제17로군 사령관이자 시안 수정공처 주임 양후청이 반란을 일으켜 시안 교외의 화칭츠에 머물고 있던 장제스를 체포한 것이다. 장제스는 물론이고 참모들과 시안 시내에 배치된 중앙군 병영도 반란군에 의해 무장해제되었다. 시안사건은 격동의 20세기 중국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하면서 중국 역사를 완전히 바꾸어놓은 사건으로 꼽힌다. 시안사건이 없었다면 마오쩌둥이 장제스를 껶는 일도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1021-)


장쉐량은 장제스와 일본 사이에 양다리를 걸친 채 꾸준히 저울질했다. 어느 쪽에 붙어야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으면서 지반과 권력을 유지할 수 있을지 고뇌했다. 일본의 협박, 민족주의로 격앙된 반잃 여론, 장제스의 회유 사이에 끼인 처지에 어느 하나를 선택하기한 쉽지 않았다.장쉐량은 무능한 인물은 아니었지만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았을 뿐, 스스로 역경을 헤쳐나갈 의지는 없었다. (-1041-)


젊고 야심만만한 장쉐량은 관내로 세력을 확대하여 예전에 아버지 장쭤린이 잃어버린 지위를 회복할 기회를 노렸다. 그에게 중원의 싸움은 일생일대의 기회였다. 그는 반장연합에 참여하지 않은 채 중앙에 복종을 선언하면서도 장제스가 병력 출동을 요청하자 동북의 안정을 명목으로 거절하고 약간의 군수물자를 제고하여 생색만 냈다. 그는 기회를 봐서 관내로 진군해 베이징과 톄진을 장악할 생각이었다.장제스와 펑위샹,리쭝런의 충돌이 본격화하던 19129년 5월 17일, 장쉐량은 동북의 주요 지휘관을 비밀리에 모아서 회의를 열었다. (-1178-)


중국군은 변변한 지도조차 없었고 산소가 희박한 4,000미터의 고산지대를 행군하느라 온갖 고난을 겪었다. 그럼에도 티베트군의 저하을 거의 받지 않은 채 1일 진격 속ㄷ도가 40킬로미터에 달했다. 오직 두 다리만으로 광대한 중국 전체를 2년 만에 정복한 이들답게 티베트의 험난한 지형과 기후도 장애가 되지 않았다. 또한 철저한 사전 정찰로 티베트군의 병력 배치 상황과 훈련, 사기 수준, 무기 실태까지 모두 파악했다. (-1240-)


중국이 독가스를 보유하려면 일본처럼 자국 내에 독가스를 생산할 수 있는 화학공장이 있어야 했다. 여기에 앞장선 사람이 펑톈군벌의 수장 장쭤린이었다. 군벌 중에서 가장 부유하고 현대적인 무기와 전술에고 탁월한 식견이 있었던 그는 독일인 화학자 여러 며을 초빙하고, 1925년 3월 22일 펑톈에 중국 최초의 화학병공창을 설립했다. 이곳에서 염소가스와 머스터드가스 ,포스겐 등 유럽 전선에서 악명을 떨쳤던 독가스를 생산했다. 독가스는 허난성에서 벌어진 우페이푸와의 전투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펑톈군은 독가스 폭탄을 항공기에 탑재한 뒤 우페이푸 진영에 떨어뜨렸다. (-1359-)


중국 역사에 정통한 권성욱 작가는 중국의 근현대사에서 ,1895년 부터 1930년까지 중국의 깊은 역사를 분석하고 있다. 중국사에서 100년전 35년동안 중국 본토에서 일어난 내전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중국을 이해할 수 없고, 대만, 한국, 일본의 역사를 알아내지 못한다. 우리가 역사를 교과서로 배울 때와 다른 관점에서 중국의 교양 및 역사로서 가치가 있으며, 1400페이지정도의 두께를 지니고 있지만, 중국의 근현대사 길잡이 안내서로 손색이 없다. 19세기 중국은 중화민국이라 부를 정도로 자신의 민족에 대한 자부심이 있다. 그런데 청일전쟁과 아편전쟁으로 자신의 민족적 자부심이 철저하게 망가지게 된다. 그 과정에서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철저히 분석하고자 하였고, 청나라가 가지고 있는 한계를 스스로 깨닫게 된다. 북양군벌을 통해 중국 스스로 강해지길 바랬지만, 일본은 중국보다 한걸음 더 나갔으며, 힘을 키워 나가게 되었다. 즉 이 책에서 눈여겨 볼 인물들로 청나라 말기의 실질적인 권력자 위안스카이(1859~1916.6.6), 중국 혁명의 아버지 쑨원(1866년~1925.3.12), 중국 본토에서 쑨원과 경쟁구도를 지니고로 있었던 미지의 인물 장쒀린 (1875년~1928.6.4), 그리고 중화민국 제1대 총통 장제스(1887년~1975.4.5), 그리고 중국 공산당의 국가주석 및 혁명군사위원회  주석 마오쩌둥(1893~ 1976.9.), 그리고 장쭤린의 아들 장쉐량(1898~2001) ,마지막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1906.2.7 ~ 1967.10.17) 황제가 있다.이 들 일곱 중에서 , 장쒀린과 장쉐량의 인물에 대한 정보와 역사적 사실들이 부족했던 이유는 두 부자가 중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비해 중국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인물이지만, 중국 공산당이나, 중화민국, 일본의 입장에서 상당히 불편한 인물, 역사적으로 지우고 싶은 인무로 해석된다. 그건 대한민국이 일제에 의해 통치되던 시기에 중국의 동북 만주 지역을 통치했던 이가 장쒀린이었기 때문이다.그는 중국의 국민당과 공산당의 힘의 균형추 역할을 했지만, 일본과의 매국노로 치부될 수 있는 밀약으로 자신의 운명을 비참한 채 막을 내리게 된다. 일본 관동군의 독단적인 철도 테러로 인해, 우한정부의 장제스, 난징정부의 마오쩌둥, 그리고 북양정부의 장쒀린 간의 힘겨루기가 꺽이게 되는 원인이었다. 즉 일본이 중국을 삼킬 수 있는 교두보를 만들어 주었던 인물이 장쭤린의 죽음과 아버지의 유지를 받아들인 장쉐량의 장제스 체포에 있다. 어부지리로 일본의 관동군이 일본의 만주 땅을 차지하였고, 중국 본토를 차지하는 과정에서 중일전쟁이 일어난 이유였다.더 나아가 일본이 진주만 공습을 개제할 수 있었고, 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 땅을 확보할 수 있었던 하나의 중요한 사건이다. 중국의 힘의 균형추 역할, 쑨원과 장제스가 꿈꾸었던 중국이 완성되었다면, 공산당은 중국에 뿌리 내리지 못했을 수도 있다. 물론 북한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난세에 간웅과 영웅이 탄생한다고 하였던가, 간웅이었던 위안스카이와, 영웅이었던 마오쩌둥의 인물 됨됨이 그들이 걸어온 길을 본석한다면, 제2차 세계대전 뿐 아니라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가 부딪친 6.25 사변까지 연결지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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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경제 미래 담론 - 코로나 팬데믹 이후 한국 경제를 바라보는 안목
이철환 지음 / 새빛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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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정부의 호화청사 또한 국민적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 청사들은 건축비용도 천문학적 수치이지만, 청사를 유지 관리하는 데에도 에너지 비용 등 엄청난 비용이 들어가고 있다. 더욱이 여기에 들어가는 비용은 모두 주민들이 부담하게 되지만, 정작 이 호화청사가 줌니들의 삶에는 전혀 도움을 주고 있지 않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59-)


문화가 지니는 가치는 매우 다양한다. 그중에서도 현대 경제사회에서는 문화적 감수성이 그동안 경제발전 과정에서 무너진 인간성을 회복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우리는 흔히 마음이 착잡하고 우울할 때, 또는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과정에서 쌓이게 된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싶을 때, 좋아하는 음악을 듣거나 영화 혹은 그림을 보러 가기도 한다. (-102-)


세상의 모든 사람은 어쩌면 서로가 서로를 부러워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는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가진 상대를 부러워하지만 결국 자신이 가진 것이 가장 가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삶이 불행한 것은 부러움이나 욕심 때문이다. (-183-)


우리는 바쁘다는 핑계로 다른 사람이 양보하기를 강요하며 살아간다.기다리면 손해를 본다는 생각에 젖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작은 배려도 기대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행복은 작은 배려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배려는 사소한 관심에서 출발한다. 역지사지의 자세로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다 보면 배려의 싹이 움트는 것이다. (_247-)


이 스마트 팩토리로 인해 기존의 대량생산과 대량공급이라는 생산자 중심의 자동화 공장에서 소비자 수요에 맞춘 지능화 공장으로 변신하게 된다.이는 IoT ,빅데이터 및 인공지능 등이 접목된 스마트공장의 도입으로 차별화된 제품을 대량생산 가격에 맞추어 제공하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을 의미하며, 단순한 자동화와는 차이가 있다. (-283-)


이처럼 드론은 사진 영상 촬영부터 수색, 배송, 레저, 구조 활동 등 쓰임 폭이 넓어 구글, 인텔 등 글로벌 기업들이 잔쯕 눈독을 들이고 있다. (-331-)


1980년~1990년대 우리 사회에서 경제정책은 경제 성장에 목매달았다.그리고 후진국에서 탈피해 선진국으로 나아가는 교두보를 만들어 나갔다. 그때 당시 국가 경제는 소비자들은 물건을 소유하고 있음에도 또 다시 구매하기를 종용하고 있었다. 지금처럼 트렌드로 정착하고 있는 공유경제가 아닌 소유경제를 당연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외형적인 성장에 따라가면서, 체질 개선이 나타나지 않았고,비리와 부조리오 인해 여러 기업들이 무너지는 사태에 이르르고 말았다. 평생직장을 강조하던 시기에서 업을 중시하는 시대로 바뀌게 된 것은 경제성장에서 필연적인 모순이었고, 경제성장은 고성장에서 저상장으로 전환된다.


결국 우리의 경제 성장은 시대의 모순과 위선으로 인해 큰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그리고 일본처럼 저출산 고령화로 인해 경제 성장이 멈추고 있는 수순을 밟고 있었다.특히 저출선 고령화 문제에 인간성이 상실됨으로서, 나의 기본적인 삶조차 온전히 보존되지 않는 현재 우리 사회의 맹점들이 우리를 고통 속 빠져드는 악순환에 빠지게 되었고, 진정 인간의 삶에 무엇인 필요한지 스스로 자각하고 있다.그 대안으로 우리는 네가지 키워드를 제시하고 있다.


즉 이 책에서는 네가지 키워드를 짚어가야 한다. 그 키워드는 한국 ,경제, 미래, 담론이다. 각각의 키워드는 책 제목이면서, 이 책의 전체를 함축하는 키워드였다. 한국 사회를 분석한다면, 한국의 경제구조와 체질을 하나하나 이해할 수 있다. 한국 경제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미래의 먹거리를 발견할 수 있고, 미래를 선도하는 기술이 무엇인지 찾을 수 있다. 우리의 미래의 기술이 모여서 ,우리가 안고 있는 사회적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희망을 가지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즉 한국, 경제,미래를 분석한다면, 우리 사회 안에 존재하는 고정관념, 즉 담론을 반드시 끄집어 내야 한다. 그 담론은 사회적 담론, 기술적 담론, 인간적인 담론으로 크게 구분되며, 각각의 담론을 찾아낼 때 ,인간의 경제를 바라보는 시선을 찾아나갈 수 있고,그들의 닏즈와 원츠를 알게 된다.그리고 서서히 우리 경제가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찾아나갈 수 있다. 그 안에서 우리 스스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고, 새로운 경제 변화의 동력을 확보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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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vs 카카오 - 대한민국 양대 빅테크 기업의 성장 동력과 미래 전략
홍성용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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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의미냐면 웹툰과 웹소설을 기반으로 영화나 드라마를 만들 때 카카오 소속 배우들을 곧바로 출연시킬 수 있다는 얘기다. 웹툰과 웹소설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연기력이 보장된 유명 배우들의 연기가 없으면 웰메이드 영상을 만들 수 없다. (-48-)


30대 치과의사 윤석진 씨는 설을 맞아 가족과 친척, 지인 등 10명에게 '카카오톡 선물하기' 로 마음을 전했다. 김 씨는 "코로나 19로 설명절에 지방을 내려갈 수 없어서 선물하기로 작은 마음을 표했다. 상대방의 주소를 몰라도 간편하게 마음을 표현할 수 있어서 생일이나 기념일, 명절 등 축하할 일이 있을 때 종종 이용한다"고 밝혔다. (-120-)


네이버와 카카오는 수천억 원의 천문학적인 예산을 투입하여 10만 대 수준의 서버 관리가 가능한 하이퍼스케일 데이터센터 IDC 구축에 속도를 내고 있다. 신규 투자 사업비만 네이버 6,500억원, 카카오4,000억원 등 합계 1조 5,000억원이 훌쩍 넘는다.이들 기업이 제2 데이터센터 건립 등 확장에 힘을 쏟는 것은 아마존웹서비스AWS,마이크로소프트 애저 MS Azure,구글, 오라클 등 해외 기업이 국내 클라우드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는 위기감에서 비롯한다. (-248-)


1990년대 말 대한민국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선두 주자는 다음 DAUM 커머스였다. 이후 후발주자로 나타난 네이버는 검색기반 플랫폼으로서, 뉴스 서비스,엔터테인먼트, 블로그와 인플루언서를 활용한 사업 다각화를 꾀하면서, 다음을 제치고 선두가 되었다. 이런 변화는 20년 사이에 일어난 포털 사이트의 격변속에 나타나게 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야후 코리아는 검색 비즈니스 모델을 접고, 한국을 철수하게 된다.그리고 다음의 사업은 한국에서 축소되고 말았다. 하지만 21세기 넘어오면서 모빌리티 산업이 뜨게 되었으며, 네이버의 아성을 위협하는 카카오가 등장하게 된다.그 와중에 카카오와 다음은 합병하였고, 다음카카오라는 거대한 공룡이 등장하게 되었다. 모바일에 최적화된 카카오KAKAO가 가진 한계들을 다음이 가지고 있는 비즈니스 노하우와 고객들을 확보함으로서, 카카오는 새로운 변화를 꾀하게 된다.네이버 비즈니스모델과 카카오 특유의 비즈니스 모델이 겹쳐지고 있는 혅내모습이 보이고 있다.


알지만 세세하게 모른다.그건 네이버와 카카오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네이버의 주 수입원은 웹소설, 웹툰에 있었고, 해외 글로벌 시장으 확보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그 와중에 코로나 19 팬데믹이 대한민국에 터지게 되었고, 오프라인 공연시장을 온라인 공연시장으로 플랫폼을 다변화하고 있으며, 유투브가 가지지 못하는 네이버가 가지고 있는 강점을 적극 활용하게 된다. 네이버페이 가 가지고 있는 장점은 쇼핑과 간편 결제가 용이하다는 점을 손꼽고 있으며, 그동안 보안에 취약하다는 오명을 네이버 스스로 어느정도 극복한 상태이다. 반면 카카오 비즈니스 모델은 네이버와 흡사하지만, 디테일면에서 큰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지도, 금융, 점색, 이 세가지는 네이버와 카카오 는 동시에 가지고 있다.그리고 카카오는 카카오톡을 활용하여,지인에게 선물을 할 수 있거나 돈을 직접 줄 수 있는 독특한 플랫폼을 구축하고 있다. 상대방의 주소나 계좌번호를 알지 않아도,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그들에게 마음을 표할 수 있도록 함으로서, 서로의 마음 씀씀이나 정을 전달하게 기술이 가지고 있는 악용할 수 있는 여지들을 미연에 제거하고 있다. 즉 네이버와 다음 카카오는 여성친화적인 플랫폼으로 비전을 제시하고 있으며, 완벽한 보안 더 나아가 유저들이 불편할 수 있는 여지들을 고쳐 나가고 있었다. 특히 카카오뱅크는 금융의 본질에 근접해 나가고 있으며, 과거 우리가 아끼고 절약해서 목돈을 만들었던 추억들을 기술과 비즈니스 플랫폼으로 극복해 나가고 있으며, 카카오 저금통이 탄생될 수 있었던 이유는 여기에 있다. 두 기업에겐 또다른 위협이 있다. 바로 구글과 아마존, 애플이며, 아마존이 조만간 한국에 진출하겠다는 사업 확장 노선은 한국인들이 그동안 힘들었던 아마존 직구를 쉽게 극복할 수 있는 질이 열리고 있으며, 네이버, 카카오에게 또다른 리스크라는 걸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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