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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알람없이 산다 - 명함 한 장으로 설명되는 삶보다 구구절절한 삶을 살기로 했다
수수진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22년 1월
평점 :

나는 강남에서 삶의 대부분을 보냈다. 가족 중 꽤 부자였던 둘째 이모를 따라 초등학교 2학년 때 개포동 주공아파트로 이사 왔다. 이모는 담이 높고 대문이 있는 마당도 꽤 잘 가꿔진 주택에 살았는데, 늘 사나운 개가 있어서 집에 놀러갈 때마다 오금이 저렸던 걸로 기억한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 그 당시에도 강남은 꽤나 있는 지역이었던 것 같다. 물론 어렸을 때라 잘은 몰랐다. (-20-)
나는 숭실대학교 평생교육학과 07학번으로 바야흐로 2007년 신입생 OT 부터 선배들의 눈에 들어 학과 대표를 하게 되었다. 지금은 07학번이라고 하면, 부싯돌로 불을 붙이던 석기 시대를 생각하는데, 입학할 때만 해도 '88년도에 태어난 아이들이 있구나!'라는 소리를 들었다. (-29-)
나는 멘토가 없다. 조언을 구할 일이 없어서가 아니라, 조언다운 조언을 해줄 만한 어른이 별로 없다. 삶에 큰 도움이 되는 사람들은 클래스를 통해 만나는 수강생인데, 배우러 온 분들을 통해 내가 훨씬 많이 배운다. 태도부터 다른 사람들이다. 당연히 그런 사람들에겐 배울 점이 많다.(-51-)
한 명의 인간이 어떻게 이렇게나 많은 물건을 가지고 살아가는지, 정리하고 이사하는 과정 내내 놀라 자빠질 뻔했다. 정리의 신, 곤도마리에가 말한 것처럼 설레지 않는 것을 모두 버렸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마어마한 양의 물건이 여전히 남아있다. (-58-)
나의 하루 에너지는 뭉그적대는 시간에서 나오고 나는 그것을 '뭉그적 에너지'라 부르기로 했다.(-64-)
손가락에 자글자글 접착제 주름이 잡혔다. 화장실로 달려가 물에 손을 한참 담갔다. 마디마디 붙은 손가락은 다행히도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고, 비록 접착제가 늘어붙어 조글조긇한 상태이지만 키보드를 누를 수 있을 정도의 상태가 되었다.(-94-)
나는 늘 결혼하기 싫다는 말을 달고 산다. 주된 이유는 '두려움'이다.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 '남자 잘못 만나 인생 꼬인 여작라 한둘?'이라는 문장이 머릿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나는 그런 여자가 되고 싶지 않아서 결혼에 대해 부정적인 편이다. (-110-)
우리 가족은 나를 다소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는데,내가 한번 화가 나면 무서울 정도로 논리정연하게 사람을 공격해 너덜너덜하게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내 분노는 냉정하다 못해 이가 딱딱 부딪칠 정도로 춥다. 보통 화가 나면 불을 뿜는 모양새인데,나는 좀 반대다.얼음장처럼 차가운 성격의 분노는 사람을 더 아프게 한다. 불에 덴 상처는 약을 바르면 금세 낫는다지만, 동상에 걸리면 피부가 괴사하기도 한다.그래서 웬맘하면 화가 나는 상황에 나를 두지 않는다. 하지만 인생은 화가 나는 일투성이인걸 어쩌나 특히 가족에게는 더 쉽게 분노를 표출한다. 이번 주는 북극의 한기보다 차가운 나의 분노가 부모님을 꽁껑 얼려버린 한주였다. (-117-)
코로나로 인해 예식 문화가 많이 바뀌었다. 소수의 사람들만 입장이 가능하고, 뷔페를 먹을 수 없어 식사권으로 대신하는 겨우가 많아졌다. 어쩌면 코로나 덕분에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결혼 예식이 점점 당연해지는 것 같다. (-126-)
나는 성격이 모난 편이다. 싫은 건 죽어도 못 하고, 사람들의 호감을 사기 위해 입에 발린 소리도 못 한다. 이런 성격 때문에 주변에 사람이 있을 리 만무한데도, 무던한 성격의 승현은 내가 그러든지 말든지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냥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바꾸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어쩌면 나의 모난 부분이 승현에게 크게 신경 쓰이지 않는 걸지도 모르고, 어쨌든 따로 물어본 적은 없다. (-134-)
일어났으면 세수를 하고 정신을 차려야 한다. 맑은 정신 상태로 하루를 의욕있게 살아야 한다. 우리 엄마는 늘 '세수'를 강조하는데, 사람이 일어났으면 세수는 반드시 해야 한다는 지론이다. 흐르는 물에 얼굴을 헹구고 ,비누로 무지르고 닦으면 몽롱했던 정싱이 되살아난다. 독립해 살아도 세수에 대한 철학을 마음에 새기고 아무리 귀찮아도 일어나면 바로 얼굴을 닦는다. 머리는 가끔 감지 않아도 얼굴만은 씻기 위해 노력한다. (-161-)
누군가의 삶이 부러울 때가 있다.내가 가지지 않는 것을 소유한 사람, 나의 일상의 틀에서 벗어난 이상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 특히 부러운 인생이다. 그런 사람의 인생을 보면, 내 삶과 비교해 보고,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따라해 보곤 한다. 삶의 철학이 나의 것과 타인의 것이 중첩되는 그 순간 나의 인생은 변곡점을 겪고 있다.이 책에서 내가 부러웠던 건 ,저자의 독립된 삶과 자신으 위해 살아가는 인생에 있었다.
1988년생,숭실대 07학번, 강암 출신, 저자의 이력이 나오고 있다. 올림픽 세대라 부르는 저자의 삶은 지극히 논리적이고, 차갑고, 독립적이다. 결혼에 대한 자기 주관이 뚜렷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분별하여 사람을 가리게 된다. 자신의 성격과 기질을 너무 잘 알고 장점과 단점을 캐치하게 된다. 지피지기에서 지기가 된다고 말하는 그 지점에 서 있는 작가의 인생 철학, 인생 비전이 느껴졌다. 즉 누구에게 무시당하지 않고, 프리랜서, 강사, 일러스트레이터, 에세이스트, 프로젝트 158 대표로서 다양한 삶을 살아갈 수 있었던 건, 자신의 삶을 통제하고,관리할 수 있는 삶을 완성하며, 살아가고 있어서다. 1988년생 언저리에 있는 세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확실하게 구별할 줄 안다. 거절할 용기 뿐만 아니라 미움받을 용기도 가지고 있으며, 일과 삶에 있어서 선긋기를 확실하게 하는 세대이다. 그러한 모습이 책 속에 저자의 인생관 속에 내재되어 있었으며, 멘토 없는 인생 속에 ,자신이 할 일을 스스로 찾아나가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코로나 19가 마냥 나쁜 것은 아니었다. 저자처럼 비혼주의자에겐 코로나 19 팬데믹이 장점이 되고 잇다. 구구절절한 삶,구질구질한 삶을 살아가기로 결심한 것은 그래서다.비혼주의자가 겪어야 하는 결혼 축하 피로연에서 느꼈던 불편함과 부당함에 대해, 코로나 19가 도리어 방가운 순간이다. 피로연에 가지 않아도 되고, 결혼식 하객으로 참석하지 않아도 되는 핑계꺼리가 되는 건 기본이며, 뷔폐를 먹으면서,내가 의도하지 않는 어른들의 결혼에 대한 이야기는 스스로를 바닥으로 내몰 수 있기 때문이다. 저출산 사회 속에서 우리가 왜 이런 구조의 틀에서 살고 있는 이유는 우리 사회가 결혼하기에는 너무나 불합리한 상황과 조건이 있으며, 결혼 후에도 더 나아질 거라는 기대조차 접어버린 측면도 있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