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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유류의 사랑 ㅣ 문예중앙시선 36
박장호 지음 / 문예중앙 / 2014년 11월
평점 :
태양은 뜨자마자 물든 노을이었다.
당신의 귀에 닿지 않는 내 마음이
입술은 내 마음이 물든 노을이에요.
아침노을은 비를 부른다죠
나는 무거운 하늘 아래 우뚝 섰어요
내 목각의 다리가 흙에 묻혀 있네요
내려다보니 나는 나무인 거예요
누가 내게 이토록 기다란 다리를 주었을까요
의문을 품을수록 길어지는 하체
침묵만이 발기하는 내게 지친 당신이
나의 의족에 불을 붙여요
다리를 휘감은 구름의 나이테가
가시관처럼 머리 위를 맴돌아요
나를 사르는 당신의 마음에 비가 내리는군요
소리 없이 원한 것이 죄예요
노을 속으로 고통의 새들이 날아오겠죠
차가운 아침을 떠나 저녘노을 속으로 날아드는
비 맞은 새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내 몸속에 아름다운 자연이 깃들어요.
새들은 나의 직립이 얼마나 조용한 비명인지
알고 있어요. 오직 고통의 새들뿐이에요
새들이 내 입속에 둥지를 틀어요
말뚝을 타고 오르는 저 불빛 어둠 뿐인 내 얼굴을 밝히겠지요은
하늘엔 의성운의 붉은 혈관이 터져요
새들은 독이 든 열매로 익고
나는 당신의 눈동자 속에서 불의 옷을 입어요
입술은 내 마음의 불타는 화염이에요
비에 잦든 피에 젖든
곧 꺼져버릴 화염이에요. (-19-)
스위치백
지하철에 스친
20세기의 여자를 기억한다.
이름은 모르고 얼굴만 남은 여자
그녀에게 이름을 지어주어야 할까
그녀의 얼굴을 지워주어야 할까
줄 수도 없으면서
'주다' 라는 보조동사를 붙여놓고 보니
짓거나 지우거나 의미 없긴 매한가지
그녀의 얼굴을 지워버리면
지어낸 이름을 지워버릴 수 있을까
본동사를 통일해도
버리기 힘들긴 매한가지
나는 여드름 터지는 봄의 얼굴로
그녀는 단정한 정장 차림으로
지하철의 좌우 좌석에 앉아
어디로 가고 있었을까
목적이 다른 우리의 노선으로 지하철은 달렸다
노선이 같은 우리의 목적으로 지하철은 달렸다.
노선이 같았기에 목적의 차이가 중요하지 않지만
목적이 달랐기에 노선의 같음도 중요하지 않지만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지 못하는
신세기의 내가 20세기의 여자를 기억한다
라디오에서 들은 음악같은 여자
제목을 모르는 음악같은 여자
주파수에 맞추느라 중간부터 들은 음악
광고에 묻혀 끝까지 듣지 못한 음악
음악을 찾는 밤은 아름다웠지.
하나를 찾기 위해 둘과 셋도 알게 되고
화성과 박자를 지켰기에
밤의 음악들은 정의로웠지.
음악이 여자라면
나는 그녀의 반듯한 이마를 기억한다.
그녀의 높은 콧날과
가을의 열매 같은 입술을 기억한다.
이름을 몰라 자문 구할수 없는
그녀의 목을 잘라버려도 될까
자문할 수 없어 얼굴이 괴로운
그녀의 목을 잘라주어도 될까
동사를 거들지 못하는 보조동사
붙여도 되고 띄어도 되는 보조동사
목적을 잃은 노선 밖에서
채널을 잃은 주파수가 된 나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건 아닐는지.
시간은 검은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주파수가 바뀐다. DJ 가 바뀐다
협찬이 붙은 여자는 면도를 한 뒤
라이방의 호수에 비단 백조를 띄우고,
대머리 신사는 낡은 거울에
좌우로 갈라진 가르마를 비춘다.
험한 세상의 다리마저 무너지던 날
학생들은 연습장에 써가며
주요 과목의 핵심 내용을
강 건너는 방법인 양 암기하기도 하였다. (-54-)
도착하지 않는 사람
우리 집 부엌엔 밥통이 하나 있고
밥통 속엔 시간을 잘 지키는 여자가 있어요.
그녀는 목소리로 사는 음성 미녀
그녀는 배가 고파도 밥을 먹지 않고
쌀이 덜어져도 울지 않아요.
그녀는 짜증을 부리지도 않고
항상 차분한 목소리로 안내해요.
백미 취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상상해요
그것은 생계를 위한 기도예요.
목소리만 존재하는 건 신이에요.
그녀는 목소리가 예쁜 밥의 여신이에요.
신이시여, 저는
오늘의 밥만 먹는 오늘의 사람이 되겠나이다.
먹지 못한 어제의 밥은 음식물 쓰레기 봉투에 담았어요.
못 채울지 모르는 내일의 밥그릇은 벽에 던져 깨뜨렸어요.
나는 항상 배부른 상상을 해요.
이 상상은 사는 날까지 채워야 하는 밥그릇 같아요
증기 배출을 시작합니다.
나는 그녀가 하는 일 중에서 이 말이 가장 좋아요.
밥통이 증기를 내뿜는 소리는 기차의 기적 소리 같거든요
그것은 그녀가 적극적으로 내게 오고 있다는 신호예요.
그녀의 가차는 연착하는 법이 없지요.
나는 그것을 기도의 힘이라 믿어요.
내 기도를 듪어주는 밥의 여신
부엌에 우상 하나 없지만 나는 절대적인 종교를 가졌어요.
취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밥을 저어 주세요
그녀를 마중하는 절정의 시간
하지만 아무리 밥을 저어도
그녀는 기차에서 내리지 않아요.
그녀는 배가 고파도 밥을 먹지 않고
쌀이 떨어져도 울지 않아요.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지 않는 그녀는
목소리로 사는 음성 미녀
연착하지 않지만 도착하지 않는 그녀가
우리 집의 가장 같아요.
남편은 뭘하는지 방에서 나오지도 않는걸요. (-82-)
소문의 힘
여름이 가기 전
내가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헤엄치던 고래가
수면 위로 솟구쳐 수증기가 되었다.
날아가던 독수리가
비행을 멈추고 구름이 되었다.
나는 가위를 가졌다.
그것은 거울로 된 가위였다.
나는 가위를 코앞에 들어 올려
소문난 죽음을 절단했다.
그것은 명백한 허위였다.
가윗날을 모으니 거울에 코가 비쳤다.
가윗날을 펼치니 코가 사라지고 눈이 비쳤다.
가윗날 밖으로 사라진 콧속에서
고래와 독수리릐 뼈가 쏟아졌다.
코가 없는 눈동자에서 쏟아진 폭우가
거울에 비치지 않는 입술을 뒤덮었다.
가위를 던지자 거울이 깨졌다.
거울이 깨지자 여름이 갔고
소문을 절단하자
내가 정말 죽어 버렸다. (-129-)
시인 박장호의 시 한 편 <포유류의 사랑>의 의식구조를 따라가면, 나의 모습이 보이게 된다. 살아가는 것, 죽어가는 것,그 안에서 사랑이 깊이 남겨지게 된다. 인간의 미각, 후각, 청각, 촉각에 의존하면서, 이 오감과 가까이하는 매게체가 혀이며, 입술이었다. 손과 발은 촉각을 느낄 순 있어도 미각은 느낄 수 없다. 후각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몸에서 유일한 얼굴의 눈과 코,입술 사이의 인중만이 그 오감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신경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그 붉은 입술에 사랑이 모여 있는 것처럼, 우리는 남녀 ,사랑하는 존재의 감각에 대해, 서로를 탐닉하고, 서로에게 , 거리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시집에서 스위치백에 대해서, 시인은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홍전 ~나한정 구간, 대한민국 유일의 스위치백 철로 구간은 우리에게 전근대적인 철도 기술을 상기하게 된다. 시인은 그 안에서 안 여인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으며, 이름이 없는 그 여인을 기억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돌아보면 그런 것이다. 사랑도, 삶도, 우리에게 소중한 것이 될 수 있으며, 서로의 가치를 검증해 나가는 순간이기도 하다. 만 사십에 불과하였던 1975 년 생 시인 박장호는 현대적인 감각으로 전근대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유연하게 타넘고 있었다. 질투와 수치,그리고 자괴감을 동시에 느끼는 순간이다.인간이기에 소문이 생기고, 소문이 있기에 인간은 삶을 검증하고자 한다. 살아가고, 존재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 매우 소중한 가치가 될 수 있다. 소문의 근원지를 절단하고,자르다 보면, 내 삶도 끝나게 된다는 걸 보여주는 소문의 본질을 죽음과 연결짓고자 하였었다.
시집 <도착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쓸 수 있는 우리의 일상 속 한 시간과 장소를 절묘하게 엮어나가고 있다. 그 시대의 특징이 잘 나타나고 있었으며, 인공지능 밥솥 속의 여자 목소리를 시에 녹여내고 있었다. 즉 밥솥의 청량한 목소리만으로 미녀라고 단정짓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멍청함,그리고 그 밭솥의 기능적인 측면을 잘 드러나게 하였으며, 기계가 아닌 인간으로 탈바꿈할 수 있다면, 새로운 전환점을 완성할 수 있다. 돌이켜 보면, 우리는 어떤 욕구와 욕망을 가지고 살아간다. 내 삶의 발자취 하나하나에 남겨진 씨앗, 그 싸앗에서 포유류로서 원죄를 느끼며 살아갈 때가 있다.죄책감과 죄의식을 살아가는 인간을 용서하는 유일한 수단은 유일한 사랑이며, 사랑을 통해 인간은 인간의 오류를 하나하나 보정할 수 있다. 상당히 긴 문장과 난헤한 시어와 시상들 주에 그나마 쉬운 시를 펼쳐 들면서, 치열하게 관찰한 시인의 깊은 고뇌와 함께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