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하다 - 이어령 선생과의 마지막 대화
김아타 지음 / 맥스미디어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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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지막 모습을 찍으세요,."

선생의 말은 초봄 아지랑이 같았다. 실바람 같았다. 나의 상상 밖에 있었던 일이다. 말하는 선생께서도, 듣는 나도, 아프지 않았다. 침묵했다. 침묵으로 답했다.

오직 믿음만 있었다.

겁劫의 시간이 지났다. 겁은 모르는 시간이다. 겁은 의식하지 않는 시간이다. 겁했다. (-25-)

"충격과

어쩌면 `질투에 가까운 부러움을 지니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뜻밖에 우리 가까운 곳에

지적 모험과 영혼의 탐험자들이 있기에

우리는 절망하다가도

한국을 잊지 못합니다." (-34-)

안타까운 마음이 하늘을 덮었다. 몸이 허락하지 않아 나들이할 수 없는 선생을 힘들게 하는 것은 나의 자연이 아니었다. 대신, 선생의 초상을 역사에 남기기로 했다.

10년 만에 카메라를 다시 세웠다.

당장에 미국에 필름을 주문했다. (-111-)

얼음으로 마오쩌둥 毛澤東을 조각했다.

얼음으로 만든 마오가 녹아가는 일주일간의 과정을 기록했다.

마오는 인류사에 지워지지 않을 절대 권력의 상징이다.

절대 권력도 결국 사라진다.

절대 권력은 절대하며 사라진다. (-194-)

죽음은 침묵하는 일이다.

침묵은 메시지다

죽음이 위대한 것은 영원한 침묵이다.

선생의 죽음은 선생의 마지막 메시지다.

선생의 죽음, 그 위대한 죽음이 그렇다.

<찬란한 슬픔>

한 인간의 완성이다. (-209-)

이어령, 1934년 1월 15일에 왔다가, 2022년 2월 26일에 가다. 그는 영인문학관 관장 강인숙여사와 2012년 세상을 떠난 소중한 고명달 이민아가 있다. 삶에 대해서, 삶이라 말하지 아니하였고, 죽음을 죽음이라 하지 않았던 그의 삶은 오로지 지성인으로 남길 바랐으며, 자연하다 에서 벗어나지 않는 원칙과 자족적인 삶을 살아오게 된다.

간결하면서도, 결코 부러지지 않는 그의 철학과 세상을 보는 명철함은 지구가 인류가 살아야 하는 이유, 사람이 지구에서 후대를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명확한 메시지를 남겨 놓고 떠나게 된다. 그를 상징하는 지성, 혁신,디지로그가 아닌 그는 누군가의 오마주 (hommage) 가 되기로 하였다.그리고 한국 최고의 사진작가, 김아타에게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요구를 하게 된다.

죽음, 그리고 삶 이다.

자신의 삶 조차도 예술이 될 수 있고, 창조가 될 수 있으며, 세상을 향한 울림이라고 보여진다. 날것 그대로의 자신을 초상화로 남기겠다는 강한 의지, 그가 추구하는 진실된 삶이 사진작가 김아타를 속삭이곤 하였다. 살아가고, 견디며, 함께 가야 하는 세상 속에서, 일본에 대한 깊은 이해력, 일본문화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문화적 특색을 간파하였으며, 한국과 정서적으로 비슷하지만, 서로 혐오하는 일본과 한국의 문화적 차이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미수(88) 를 지나, 백수(百壽)를 향해가는 그의 삶은 코로나 19 팬데믹을 넘지 못하고, 다른 세상으로 떠나곤 하였다. 삶 대한 깊은 성찰, 딸에게 느껴지는 깊은 사랑과 죄책감,지성인으로, 학자로서,마지막 남겨야 하는 마지막 역할까지 잊지 않았던 그는 권력이 아닌, 문화를 남겼으며, 사람에 대한 존중과 배려, 후대가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 명징하게 쓰여지고 있었다. 가짜가 아닌 진짜, 거짓이 아닌 진실됨, 말과 언어의 불분명함에서 벗어나 실천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그가 생각한 삶의 원칙, 죽음에 대한 정직함, 김아타는 그의 뜻을 헤아렸고, 김아타의 작품 전시회에 꼬옥 이어령 선생을 모시고 싶었지만, 이루지 못하였다.

삶을 응시하며, 삶에 대한 나 자신의 원칙, 최선을 다하되 최고가 되어야 하는 이유, 최고가 될 때, 자신의 죽음조차도 현재하는 지구인들에게 깊은 울림이 될 수 있다는 것을,이어령하다, 에 내포하였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도 지성인으로 기억되길 원하였고, 죽음에 대한 진실과 정직, 창조와 혁신으로 세상을 바꾸고 싶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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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인터뷰 글쓰기 잘하는 법
은정아 지음 / 산지니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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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온기 가득한 시간만을 담지 않는다. 아니 담을 수가 없다. 우리 삶이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소녀의 카메라는, 아흔이 넘었지만 아니 아흔이 넘었기에 아프고 슬프고 힘든 일로 가득한 할머니 삶을 묵묵히 따라간다. 영화는 최대한 담담하게 할머이의 모습을 그리려 애쓴다. 할머니에게 너무 밀착했다 싶으면, 카메라는 멀어진다. 솔직하게 기록하되, 과장하지 않으려 적정거리를 유지한다.할머니의 '성가신 삶' 을 아프지만 따뜻하고 정직하게 기록한다. (-24-)

형식을 잘 갖춘 좋은 질문지를 미리 준비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질문할는 사람이다. 사려 깊은 질문지를 완성하는 것은 나의 태도다. 우리는 취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해하기 위해 묻는다.

질문이라는 형식 너머 할머니의 삶을 응시하자. 말하지 않은 것들을 듣기 위해 노력해보자. 할머니의 입장에서 생가하고 사려 깊게 바라보자. (-59-)

인터뷰하다 보면 역사적 가치가 있는 사료를 만날 때가 있다. 수여선 기관사 할아버지는 수집과 정리를 매우 잘하는 분이셨다. 매일 착용했던 1등 기관사 배지, 40여 년 전 사라진 수여선 열차의 지도, 티켓 등 역사적 가치가 있는 물건들이 서랍 속에 가득했다. 이런 자료들은 카메라로 찍고, 그림으로 그리고, 글 속에도 묘사하며 다양하게 활용된다. 모든 작업이 끝난 뒤에는 인터뷰이의 뜻에 따라 박물관에 기증할 때도 있다. 어떤 경로든 인터뷰이의 의사를 존중해 안전하고 바르게 제자리를 돌려보내자. 그것이 우리에게 기꺼이 실물 자료를 보여주고 빌려주신 인터뷰이에 대한 예의다. (-121-)

할머니 삶은 짧게 정리해도 요동친다. 소녀에서 아내, 빨갱이 가족, 피난민,구박받는 며느리, 집안을 실린 대들보가 되기까지 할머니의 삶은 수없이 무너졌다가 다시 서며 단단해졌다. '돌보리 직접 차본 사람이랑 알기만 하는 사람은 달라' 는 오르락 내리락하는 할머니의 삶 위에서 피어난 생생한 잠언이다. (-128-)

얼마 뒤 ,학교에서 백일장이 열렸다. 나는 가슴속에 담아두었던 그날의 일이 떠올랐다. 글을 쓰며 감정을 복기했다. 당황하고 무섭고 억울했던 나의 마음이 차례로 원고지 위에 쏟아져 내렸다. 순식간에 원고지 열 자이 채워졌다. 개운했다. 후련했다. 밀린 빨래를 다 해서 햇볕에 말린 것처럼 마음이 뽀송해졌다.

그 글이 글짓기 최우수상을 받았다. (-192-)

이 책을 읽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읽어야 할 이유가 생겨서다.인터뷰, 그동안 한 번도 해보지 않앗던 그 일, 그 숙제가 내 앞에 떨어졌다. 골목길 기획 아카이빙, 그리고 지역 버스의 역사를 기록하는 일이다. 그 인터뷰 대상이 친한 사람이든, 친하지 않은 사람이든 간에, 문화 아카이빙, 역사 아카이빙을 해야 하기 대문에, 굳이 안읽어도 되는 책을 찾아서 읽게 되었다. 그리고 저자의 인터뷰 요령과 합목적성 그리고, 인터뷰 가 가져오는 긍정적인 효과를 얻게 되었다. 누군가를 인터뷰시 우선 녹음기가 필요하다.그리고 경청과 배려가 우선되어야 한다.머저 가까운 사람을 대상으로 인터뷰하는 것이 중요하다. 들을려는 자세, 진문지에 맞게 인터뷰가 진행될 수 있으며, 상대방의 기억을 따라가면서 하나 하나 기록해 나갈 수 있다. 휴대폰 녹음기 뿐만 아니라 소형 녹음기가 필요하며, 한 사람의 인생을 기록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국사 시간에 흔히 써왔던 연표를 정리하는 것이 우선이다. 즉 구술에 의존하여 한사람의 인생 연표를 직접 만들거나, 그 사람의 기억 속에서, 또다른 기억을 이어나가기 위한 사전 준비 작업,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물건이나 때묻은 사진드 하나하나를 담아간다면면, 양해를 구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며, 조심스럽게 물건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은 인터뷰의 기본이며, 질문지에 의해서, 말투와 언어 습관, 그리고 명확한 목적, 한 사람의 인생 속에 켜켜히 묻어나 있는 시대와 상황, 장소에 대한 이해, 묘사와 대화를 통해 농익은 경험의 지혜를 기록할 때면, 서로에 대한 이해는 깊어질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정직한 구술 기록이 흰 종이 곳곳에 켜켜히 채워질 수 있다. 간결한 문장 사용과 담백한 글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퇴고를 통해서 기록의 군더더기를 정리하는 것이 우선 필요하다. 즉 인터뷰를 통해 시간을 종이로 옮길 수 있으며, 기록을 통해 그 사람의 삶을 붙잡게 된다. 시간 속에 채워지는 감정과 호홉, 감상, 더 나아가 주변 사람들에 대한 인생까지 관계의 연결성, 사람과 장소,시간의 연결성까지 끊임없이 기록하며, 삶을 기록하는 과정 속에서, 인터부의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다. 인터부 과정 속에서 삶의 맥락을 이해하고, 맥락과 맥락 사이에 숨겨진 사람의 진솔한 경험을 담아나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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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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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는 장난감 말 한 개와 황실 문장이 새겨진 탁상 시계를 선물로 주었다.메이지는 말했다.

시간을 아껴라. 시간으로 세상을 잴 수 있다. 부디 시간과 더불어 새로워져라. 새롭게 태어나라.

시종장이 시계를 받들어 이은 앞에 내려놓았다.

메이지는 또 말했다.

공부할 대, 시계를 책상 앞에 놓아라. 짐이 내리는 시간이다. (-13-)

한동안 안중근의 조준선은 흔들렸다. 먼 짐승을 겨누면 표적 너머로 무언가 흔들려서 맞힐 수 없는 것들이 어른거렸다. 표적은 조준선 너머의 안개 속으로 녹아들어간 듯 싶었다. 오른 손 검지가 방아쇠를 당길 때 총구가 오른쪽으로 쏠리면 총알은 빗나갔다. 가늠쇠가 움직일 때 안중근은 실패를 예감했다.짐승이 달아난 자리가 휑했고, 총구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골짜기를 울린 총소리가 잦아들고 나면, 표적을 맞히지 못한 초의 무게가 허허로웠다. (-62-)

하얼빈역 구내에서 철도는 여러 갈래로 겹쳐 있었다.발이칼 호수에서 오는 철도가 하얼빈역에 닿았다. 평양에서 오는 철도와 대련에서 오는 철도가 하얼빈역에 닿았다. 북태평양과 바이칼이 하널빈에서 연결되었고 철도는 하얼빈으로 모여서 하얼빈에서 흩어졌다. 하널빈역에서는 옴과 감이 같았고 만남과 흩어짐이 같았다. (-137-)

러시아 헌병들이 안중근의 허리를 묶어서 헌병대로 끌고 갔다. 하얼빈역은 러시아의 관할구역이었으나 러시아 지방법원 판사는 안중근이 한국 신민이므로 이 사건의 재판 관할권은 러시아에 속하지 않는다도 결정했다. 결정은 신속했다. 러시아는 서둘러서 사건에서 손을 뗐다. 러시아 헌병대는 안중근을 하얼빈 주재 일본 총사령관으로 인계했고, 안중근은 지하 구치소에 갇혔다. 구치소에서 취조실로 끌려갈 때 안중근은 복도 저편으로 허리가 묶여서 끌려가는 우덕순을 보았다. (-186-)

관동도독부는 이토 살해 사건의 피의자들을 호송하기 위해 마차를 새로 제작했다. 대련에는 마땅한 공장이 없어서 본국에 주문해서 들여왔다. 피의자들을 여순감옥에서 관동도독부 지방법원까지 호송하려면 백옥산 아래 시가지를 지나야 하는데,거리는 멀지 않았지만 세계 각국의 기자들이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으므로 마차의 외양을 재판의 품격에 맞게 갖추었다. 차 안에 칸을 나누어서 피고인들을 실었고, 뒤에는 간수 두 명이 섰다. 차안에서 밖을 내다볼 수 없도록 휘장을 드리웠다. 지마헌병대가 마차의 앞뒤에 붙었고 마차가 지나가는 시가지에 사복경찰들이 배치되었다. 여순감옥의 구리하라 전옥이 뒤를 따랐다. (-224-)

저는 이토를 쏘아서 쓰러뜨린 후에 총알이 정확히 즐어간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저것이 이토가 아닐 수도 있겠다 싶어서 그 옆에 있는 세 명을 쏘았습니다. 세 명 모두 총에 맞았으나 죽지는 않았습니다. 그후에 다들 회복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감사할 일입니다.

빌렙이 안중근의 말을 끊었다.

-도마야, 너는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이야?

이 모든 것이 저의 모자람이고 저의 복입니다.이 복을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신부님. (-268-)

김훈의 김훈의 『남한산성』 에 이어서, 『하얼빈』을 읽게 된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던 해,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의 총의 서슬에 사살되었다. 일곱의 총알을 가지고 있었던 코레아 우라, 안중근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운명을 예감하게 된다. 아직 그의 시신과 그가 쏘았던 총은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았으며,그의 역사적 증언들을 안중근 재판 당시 살았더 인물들의 역사적 증언과 사진으로만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역사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 도마 안중근,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그가 행했던 국가적 대업은 종교적 관점에서 하나님께 죄를 짓는 일이었다.하지만 그에게는 국가와 민족이 우선이었다. 하얼빈에서,이토를 사살하고, 여순감옥에 잡히면서, 전세계에 주목받게 되었던 그 당시, 관동도독부는 발칵 뒤집히게 된다. 러시아의 입장, 일본의 입장, 미국의 임장이 충돌되는 역사적 순간이다. 말을 타고 다녔던 일본 헌병대, 그들은 안중근과 안중근의 처자식까지 취조를 통해 , 죄를 쌍끌이 어선처럼 끌어당기게 된다. 그리고 함께 이토를 처단하였던 동조자 우덕순, 김성백, 정대호, 김아려, 역사속 실존인물들을 등장시켜, 안중근의 마지막 순간을 소설 『하얼빈 』 에 재현하고 있었다. 한반도에서 태어난 안중근,그의 손에 의해 죽었던 이토 히로부미, 그 주변 사람들이 지나온 일상들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기록되고 있는지 이해한다면, 청년 안중근의 시간, 코레아 우라를 외쳤던 그에 대해서, 아직 미궁으로 빠져 있는 안중근의사의 1919년 10월 26일 그날을 복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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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역대 황제 평전 - 소통하는 지도자는 흥하고 불통하는 지도자는 망한다 역대 황제 평전 시리즈
강정만 지음 / 주류성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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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명의 황제가 통치한 명나라는 제국이 흥망성쇠하는 전형적인 표본이었다. '치국의 도'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실천한 황제가 통치했을 때는 번영했지만 ,무능하고 사치와 향락을 일삼은 황제가 통치했을 때는 어김없이 외우내란이 끊이질 않았다. 제국의 운명은 결정적으로 황제의 인격과 경륜 그리고 통치 역량에 좌지우지되었다. (-9-)

오랜 세월동안 중원의 지배자였던 한족은 원나라 때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다. 원나라는 각 민족을 4등급으로 나누어 차별 정책을 폈다. 지배 계급인 몽골족은 1등급, 색목인은 2등급, 북한의 한인은 3등급, 남방의 한인(남인)은 4등급이었다. 몽골족의 통치 아래에서는 한인과 남민이 천민 계급이었다. 남인과 한인의 처지는 비참했다. (-16-)

명나라는 대도를 직접 함락시키면서 큰 위험이 따르므로 먼저 전략적 요충지들을 차례로 점령하고 난 뒤에 대도를 고립시켜 함락시키고자 했다. 부하 장수들은 모두 그의 탁월한 계책에 탄복했다. (-61-)

당시 시행한 형법으로는 목을 자르는 참수형과 가족을 몰살시키는 것 이외에도,내장을 뽑거나. 피부를 벗기거나, 무릎을 파거나, 돌로 눌러 죽이는 등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잔혹한 짓들을 했다. 그는 관아 앞에 사람 모양의 허수아비를 만들어놓게 했다. 만약 뇌물을 받아먹은 관리가 있으면 그를 죽이고 난 뒤, 껍질을 벗겨 허수아비에 씌워놓고 관리들에게 경고했다. (-77-)

영락제가 엄청난 금액을 들여 정화에게 서쪽 바닷길을 개척하게 한 까닭은 행방불명된 혜종을 찾기 위해서였다는 얘기도 있다. 설사 그 얘기가 사실이더라도 주목적은 영락제 시대에 농업 생산량의 증가와 산업의 발전으로 인한 잉여 물자를 외국에 보내서 황실과 귀족들의 사치품을 조달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110-)

만귀비는 환관들과 짜고 무서운 음모를 꾸몄다. 행여 헌종의 성은을 입어 회임한 비빈들이 있으면 온갖 명복으로 탕약을 먹여 낙태시켰다. 심지어 현비 백씨가 낳은 헌종의 둘째아들 주우극이 3세 때인 성화 7년(1471) 에 태자로 책봉되었으나., 만귀비의 흉계에 걸려들어 1년도 안 되어 사망했다. 헌종은 그녀의 이러한 악행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오히려 날이 갈수록 그녀에게 더욱 빠져들었다. (-203-)

무종은 여색만을 밝힌 게 아니었다. 그의 성적 취향은 아주 유별났다. 마음에 드느 미소년이 있으면 즉시 양아들로 삼았다. 사싱 그는 동성연애자였다. 재위 16년 동안 공식적으로 100여 명을 양아들로 삼았다. 정덕 7년(1512) 한 해 동안에는 무려 미남자 127명의 성씨를 주씨(朱氏) 로 바꾸는 기행을 벌였다. (-257-)

"선생은 미음조차 못 먹는다고 들었소. 짐은 선생의 병세를 심히 우려하고 있소. 선생께서는 집을 위해 국가의 대사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낱낱이 말해주기 바라오."

임종을 앞둔 정거장에게 국가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 물은 것이다. (-346-)

"정차려는 황당무계한 추론으로 고계우가 죄를 저질렀다고 모함하고 있사옵니다. 만일 그의 허망한 주장을 용인한다면 많은 거짓말들이 연이어 날조되어 나올 것이옵니다.이는 정사를 바르게 다스려야 하는 조정에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옵니다." (-353-)

만력 24년(1596) 9월 명나라 책봉 사절단이 일본 대판성에서 풍신수길을 만나 명나라 황제 신종이 그를 일본 국왕으로 책봉한다는 고칙을 전했다. 하지만 풍신수길이 원한 '화의 7개조'에 대하여 단 한 마디의 언급도 없었던 까닭에 양국간의 협상이 완전히 깨졌다. 만력 25년 (1597) 1월 풍신수길은 또 14만여 명의 대군을 조선에 출병시켜 다시 침략 전쟁을 일으켰다. 풍신수길은 임진년(1592) 의 조선 침략이 실패한 이유가 전라도 수군의 강력한 저항과 곡창 지대인 전라도를 점령하지 못한 데 있었다고 판단하고, 전라도를 반드시 공략하여 전라도민을 하나도 남김없이 죽이라고 명령했다. (-369-)

진충은 또 주유교의 유모, 객씨(客氏)에게 접근했다.주유교는 어린 시절에 객씨의 풍만한 젖가슴을 만지며 자랐다. 그녀에게 유모 이상의 미묘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눈치 바른 진충이 두 사람의 관계를 감지했다. 객씨는 위조와 '대식(對食)' 관계를 맺고 있었다. 대식의 유래는 이렇다. 당직을 서는 환관은 궁중에서 밥을 지어먹을 수 없었기 때문에, 본인이 가지고 온 차가운 음식을 먹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궁녀는 궁궐에서 불을 지필 수 있었으므로, 환관들이 평소에 친한 궁녀에게 음식을 데워달라고 부탁하고 함께 음식을 먹었다. 남녀가 오랫동안 함께 밥을 먹으면 부부처럼 친해지기 마련이다. 환관과 궁녀 간의 이러한 '은밀한 부부놀이' 를 대식이라고 칭한다. (-408-)

승정 17년 (1644) 1월 이자성은 대군을 이끌고 동정을 단행했다. 그의 목표는 명나라의 심장부인 북경의 황궁이었다.이자성은 군사를 일으킨지 두 달만에 파죽지세로 북경성을 함락시켰다. 대순군이 창의문을 지나 성난 파도처럼 밀려왔다. 다급해진 승정제는 대신들을 찾았으나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제독대감 왕승은만의 그의 곁에 남아있을 뿐이었다. 이제 남은 것이라곤 스스로 목숨을 끊어 대명 황제가 포로로 붙잡히는 치욕을 면하는 것밖에 없었다. (-452-)

원나라는 1271년부터 1368년까지 중국 땅을 지배했다. 명나라는 1368년부터 1644년까지 중국 땅을 지배했다. 청나라는 1616년부터 1912년까지 중국 땅의 지배자였으며, 중국 대륙의 마지막 왕조로 역사기록이 되고 있다. 우리는 이 중국과 이웃나라로서,고조선이후,지금까지 역사의 굴레 속에 포함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대한민국이 중국땅을 삼키지 않는 이상 그럴 개연성이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중국의 역사를 함께 배워 나갈 당위성을 가지고 있다.

중국의 여러 왕조 중에서, 명나라는 조선이 한반도를 지배할 명분을 제공하였으며, 조선이 500년동안 지배자가 될 수 잇었던 역사적 맥락을 가지고 있다. 환관이 지배하는 나라 중국이 처한 현실, 일본이 외세의 지배에서 자유로웠던 섬나라로서, 10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나라였다면, 중국은 외세 침략에서 자유롭지 않은 거대한 땅을 가지고 있다.그 과정에서,중화사상을 그대로 답습한 조선은 오랑캐, 왜나라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살아오게 된다. 명나라에는 영락제 때 정화대함대가 있었으며, 콜롬버스 이전에 신대륙을 지나온 시간이 있었다. 지리적 잇점과 자원이 많았으며, 천문과 과학의 발달로 가능한 남다른 기술력이 명나라에게 있었다. 하지만 왕의 구널겨 주변은 그와 동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만력제 재임기간 임진왜란으로 풍전등화에 놓여지게 되었으며, 청나라가 중국 다에 세워질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하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조선은 명나라라는 썩은 동앗줄을 쥐고 한나라의 국가를 운영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대명률에 따라서, 죄인을 법으로서 다스렸고, 중국에 환관과 궁녀가 있다면, 조선에는 왕실을 보존하는 내시와 궁여가 함께 존재한다.이처럼 비슷한 제도와 국가 운영 체계, 그과정에서, 한반도 땅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전쟁들을 본다면,우리가 처한 현실 하나하나 이해할 수가 있었다. 16명의 황제가 200여년동안 명나라 권력을 쥐면서, 공포정치와 여색을 탐하였으며, 몽골의 침략에서 자유롭지 못한 명나라는 결국 국가운영 자체가 붕괴되는 위험에 처해지게 된다. 과거 황건적의 난으로 ,위촉오 삼국 시대가 도래하게 된 원인을 제공하였으며,마찬가지로, 명나라가 무너진 계기는 전염병과 기근으로 인해 발생한 명나라의 혼란기를 틈타, 몰락한 양반 출신 이자성의 난으로 인해 서서히 명나라는 중국의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그 과정에서, 명나라는 청나라에 흡수되었으며, 청나라가 중화제국으로 바뀌게 되는 역사적 흐름 속에 일본이 친미전략을 취함으로서, 제국주의로 발돋움하게 되는 명분을 제공하게 된다. 일본이 중국을 제치고 세계 제2의 경제대국이 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하게 되는 그 역사적 흐름속에서, 명나라의 흥망성쇠를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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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를 줄이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 인생, 조금 천천히 살기로 했다
김종태 외 지음 / 더로드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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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른 속도로 바쁘게 살았다. 성실하게 매일의 일상을 살다 보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둘째 아이를 낳으면서 행복이 저절로 오는 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집에서 독서 교실을 운영하고, 두 아이의 육아를 하다 보니 세상은 내가 알던 곳이 아니었다. (-50-)

깨달음은 각자가 가져가는 것이지만 그런 생각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을 우리가 함께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게 뿌듯하다. 책을 읽다 어느 순간 내가 가지는 불편은 내가 자아를 찾아가고 있다는 증거다. 평소의 나와 다르게 살고자함으로 불편이 생기는 거다. 그런 고비마다 힘을 드리고 싶다. (-97-)

미운 사람을 생각하고 혼자 걸으며 실컷 욕하다 보면 돌아오는 길에 나는 잘하고 있었나 생각이 들기도 하고 어떤 미움은 몇 날을 걸어도 없어지지 않지만 ,풍경에 취해 걷다 보면 어느새 긍정의 생각들로 채워 집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157-)

사람을 두루 사귀는 것이 중요하다. 인맥이 넓으면 그만큼 얻는 장점도 많다. 나 역시 사람 수에 집착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 친구의 수가 많은 건 아니다. 하지만 내가 아플 때 기꺼이 달려와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지금 만나는 소중한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223-)

이렇게 나를 객관적으로 보려면 여유가 있어야 한다.여유가 생기려면 내 주변을 심플하게 바꿔야 한다는 것을 최근의 경험드로 알게 되었다.앞만 보고 달리지 않고 심플한 나로 바꾸고 느리게 살면서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게 뭔지 그것들로 내 주변과 어떻게 나누며 살지 행복한 생각들로 가득한 요즘이다. 심플하고 느린 삶으로의 여행은 계속될 것이다. (-279-)

길을 가다가 나의 시선이 멈추는 곳이 있다. 바로 인도 위 우체통과 공중전화였다,. 30년전 슈퍼 앞에 비치되었던 공중전화는 어느새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철거 되었다.그리고 최근 다시 공중전화가 개설된 이유는 휴대폰이 없을 때, 발생하는 여러가지 불편함에 있다.하지만 공중전화를 보면, 여전히 거미줄이 쳐저 있으며, 그것을 이용하는 이들은 손에 꼽기 힘든 시점이다. 휴대폰을 이용할 수 없은 군인들에게 공중전화가 필요했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세상으로 바뀌면서,우리의 삶은 전면 180도 바뀌게 되었다.느린 삶이 사라지고, 서서히 빨라지는 삶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기다리지 못하고, 걸어다니지 않는 습관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며, 아날로그의 그리움과 소중함은 서서히 잊혀지고 말았다.

성실과 근면을 강조하는 사회에서, 스피드와 직진은 충돌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과속하고 있음에도, 더 가속할 수 있다고 부추기는 지극히 왜곡된 세상을 살아가고 있으며, 인간의 삶은 거기에 따라가지 못함으로서, 불행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일들이 점점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천천히 살아갈 필요가 있었다. 자동차로 갈 길을 두발로 걸어감으로서, 보이지 않았던 꽃을 보게 되었고, 도로 위를 지나가는 개미의 움직임을 보게 된다. 눈으로 책을 읽었던 이들은 낭송이나 낭독으로 책을 읽는다면, 의도적으로 속도를 줄일 수 있다. 필사를 통해서, 독서의 질을 높이고, 독서의 양을 줄여 나갈 수 있다. 인생, 조금 천천히 살아간다면, 삶의 소중한 가치들을 내것으로 담아갈 수 있다. 놓쳐서 후회하게 되는 것들, 지나쳐서 되돌아 볼 수 없은 것을 다시 내 것으로 바꿔 나갈 수 있다. 삶의 만족도를 높여 나감으로서, 나는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며, 주어진 삶에 대해서,만족돌르 높여 나갈 수 있다. 삶의 속도를 조금씩 늦춤으로서, 사람을 아끼고, 배려와 이해로 사람을 바라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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