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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의 역사
자크 엘리제 르클뤼 지음, 정진국 옮김 / 파람북 / 2020년 7월
평점 :
"슬펐다, 살아가는 일에 지쳐 버렸다. 진심으로 사랑했던 소중한 사람들을 잃었다. 계획이 무산되고, 희망도 물거품이 되었다. 친구라던 이들은 초라한 내 모습을 확인하고 등을 돌렸다. 자기 이익만 챙기려고 들떠 싸우는 인간들이 추해 보였다. 가혹한 운명이다. 그래도 어차피 죽을 것이 아니라면, 정신 차리고 다시 기운을 내든 해야지, 마냥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p. 6>
이렇게 시작하는 『산의 역사』는 현대인문지리학의 선구자 엘리제 르클뤼가 저술한 책이다. 1830년 프랑스 지롱드에서 태어난 엘리제 르클뤼는 1871년 ‘파리 코뮌’에 참여했다가 정권의 핍박을 받고 추방당해 스위스 산골에서 망명 생활을 한다. 당시 파리의 극도로 혼란한 상황이었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의 패배로 나폴레옹 3세의 제정 기간을 끝났지만, 보수파들은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려 했고, 시민들은 보수파에 대항해 ‘파리 코뮌’운동을 벌이지만 실패와 함께 많은 이들의 처형과 추방으로 끝난다.
엘리제 르클뤼는 아나키즘(무정부주의) 신봉자로 파리에서 내려가는 동안 스위스 산맥앞에서 산을 바라보고 느낀 감정은 만감이 교차할 것이다. 지질학과 지리학 지식을 가지고 있는 르클뤼는 스위스 산맥의 웅장함 앞에서 겸손해지고 인간들에게 받은 배신감과 존재 가치를 잃어버린 자신의 모습을 산과 함께 위로한다.
이제 그의 곁에는 인간보다 오랜 세월동안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산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하루 이틀 지나면서 먼지와 연기와 소음에 파묻힌 대도시로부터 벗어나 기쁜 마음에 휩싸인다. 산에서 뿜어내는 맑은 공기를 들이쉬며 진정한 자유를 느끼며 자연과 더불어 살아갈 일상을 맞이한다. 이제 나의 친구는 자연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해하는 목동이다.
저자 자크 엘리제 르클뤼(1830~1905)는 1871년 나폴레옹 3세의 폭압적 군주제에 반대해 일어났던 파리 코뮌 민중혁명운동에 참여했다. 그 이유로 온갖 탄압을 받던 엘리제 르클뤼는 알프스 산이 올려다보이는 스위스 산골짜기에서 망명 생활을 하며 이 책을 집필했다. 그는 지리에 비중을 두면서도 산이 인간과 함께 겪어온 역사를 새롭게 조명하며 자연의 중심에 우뚝 선 산을 이해하고자 했다. 자신의 소년기를 보냈던 피레네 산자락부터 프랑스 중부의 고원, 독일, 스페인 북부와 스위스의 산악을 두루 답사한 경험을 바탕으로 삼았고, “산을 오르내릴 때마다 기억에 새겨진 그림들을” 시적인 글로 풀어냈다.
『산의 역사』는 산의 기원과 물리적 성격은 물론 돌의 결정과 화석, 숲의 생성, 기후 변화, 산짐승의 움직임을 살피고, 산을 둘러싼 신화와 숭배, 인류와 마주한 현재의 모습까지 깊이 파헤치고 있다. 환경보호론자든 환경개발론자든 모두에게 감명을 줄 수 있는 깊은 사색이 있다.
르클뤼가 바라본 산은 아름다운 그림 속 풍경이나 개발을 위한 자원 또는 국경 같은 경계로서만이 아니었다. 이 책은 인간의 삶과 산이 얽힌 역사에 대한 관찰과 성찰로 넘친다. 산이 없었다면 도대체 우리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저자는 인류의 삶에서 산이 어떤 자리와 어떤 ‘의미’를 차지해왔는지 질문한다.
이 책은 인간보다 더 오래 전에 지구상에 나타났듯이 우리가 사라진 뒤에도 끝까지 살아남을 산의 이야기이기에 더욱 깊은 울림을 전한다.
출판사 측에 따르면 『산의 역사』가 처음 출간되었던 19세기 후반은 현대 인문지리학이 일취월장하던 시기였다. 이 책은 강과 숲 등 자연을 주제로 다룬 책들 가운데 매우 큰 반향을 일으켰는데, 산을 주제로 하면서도 지리를 바탕으로 자연과 인간의 역사를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해 매우 쉽게 서술하기 때문이었다. 1880년 프랑스에서 처음 출간되었던 이래, 오늘날까지도 여러 나라의 다양한 출판사에서 문고판을 비롯해 수많은 이본을 펴내 전 세계 독자들과 만나고 있다. 『산의 역사』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와추셋 산행』과 함께 산에 관한 고전으로 알려져 있으며, '과학과 문학 사이에서 쓰인 아름다운 저작'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19세기 지식인과 문인, 사상가 가운데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와 옥타브 미르보. 제임스 조이스 등이 엘리제 르클뤼의 저서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한 바 있다.
르클뤼는 방대한 『세계인문지리』 19권을 펴낸 현대인문지리학의 선구자로서 지정학, 역사지리학, 사회지리학 등 새로운 개념을 내놓았고, 환경문제를 중시하는 생태학 이론과 운동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채식주의를 실천했고, 개인의 자유와 모든 제도의 억압에 반대하는 아나키즘 운동의 1세대 사상가이자 운동가였다, 뿐만 아니라 ‘자유 동거’와 ‘여성참정권’ 등 페미니즘 사상에서도 선구적 주장을 폈다.
르클뤼는 『산의 역사』에서 과학과 지리학적 시선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역사·문화적 측면의 통찰을 잊지 않는다. 무엇보다 산을 통해 성찰하고 성장한 자신의 모습을 가감 없이 드러내어 또 다른 감동을 선사한다. 인간적인 매력이 돋보이는 저자의 경험과 위트가 듬뿍 담긴 글은 책 읽는 즐거움을 더하고 있다. 책을 읽다 보면 저자가 얼마나 산을 사랑하는 사람인지 자연스레 느낄 수 있는데, 산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깊이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산에 대한 애정을 품고 있는 독자라면 『산의 역사』에서 저자 자크 엘리제 르클뤼가 지리학자가 아닌 그저 산을 자주 오르내리는 한 사람으로서 산을 대하며 총체적으로 알고 싶어 하는 순수하고 절실한 고백에 대해 깊이 공감할 것이다.
그것은 1880년 『산의 역사』가 처음 출간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던 프랑스 파리와 2020년 『산의 역사』 한글판이 이제야 출간된 대한민국 서울이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주장은 출판사의 이 책 출판 취지를 밝힌 것으로 저자의 집필 의도와는 무관한 내용이다) 먼저 지금까지 산은 과연 어떻게 지구를 움직이고, 인류의 삶에 관여했을까? 산에 대해 기꺼이 알고 싶은 독자라면, 가벼운 마음으로 이 책을 펼쳐도 좋다.
이 책은 산의 생성과 타고난 성격과 현재의 모습을 깊이 파헤치고 있다. 교통·통신과 지구촌 여행이 제국주의 팽창정책으로 급성장했을 때, 그리고 거대하게 넓혀진 생활권을 더욱 넓히고 미지의 땅을 차지하고자 서로 치열하게 경쟁했을 때, 저자는 대륙의 산맥과 마을 주변의 산들이 자원의 보고일 뿐 아니라 그 존재 자체로서 주목했다.
『산의 역사』 이전까지 지리와 역사를 다루고 대륙과 해양을 파악했던 여러 필자는 산과 인간에 관심을 기울였지만, 거의 모든 이야기를 신들과 영웅들의 무대로만 그렸다. 산은 신화와 종교가 간직한 기적이 일어났던 신성한 장소였다.
하지만 엘리제 르클뤼는 이런 신비를 벗겼다. 그는 산에서 살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살폈다. 신과 영웅의 무대가 아니라 지구촌 인간 가족이 살아가는 터전으로서 산을 바라보았다.
산은 이렇게 저자의 붓끝에서 신화의 세계에서 역사의 세계로 들어왔다. 인간이 진보하고 더욱 자유롭게 살게 되기를 굳게 믿으면서 엘리제 르클뤼는 광대무변한 자연의 중심으로서 산을 바라봤다. 산이 우리에게 베푸는 풍요로운 혜택과 나란히 그 절대적 공포와 위엄과 매력까지 날카롭게 주시했다.
그가 지낸 산은 아름답고 맑고 고요하다. 넓은 풀밭에서 바라보는 봉우리는 비할 데 없이 첩첩이 쌓아 오린 피라미드처럼 웅장하다. 마치 거인이 손으로 다듬어서 빚은 것과 같다.
산의 기원을 무엇일까? 산에 관한 수많은 비슷한 유형의 창제설화들이 있지만, 실상은 우리 지구의 움직임 때문이다.
지구는 끊임없이 움직여 땅을 변화시킨다. 지구는 스스로를 매일 파괴하고 재건한다. 줄기차게 산을 깎아내리지만, 다른 산을 쌓아 올린다. 골짜기를 파고 다시 채우고를 반복하는 것이다.
자연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언덕과 산은 천천히 만들어진다. 산을 매일 자신의 움직을 하고 시간에 맞춰 모양을 달리한다. 땅속의 커다란 변화는 지표의 모양을 크게 흔들어놓는다. 이런 운동을 통해 산의 모습은 지금의 모양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르클뤼는 프랑스와 스페인의 피레네산맥과 북유럽의 산과 스위스 산맥의 산들을 비교함으로써 산의 다양한 모습을 비교한다. 산의 내부 압력에 의해 발생하는 자연 붕괴와 암석 붕괴를 보며 인간이 행하는 일이 얼마나 덧없는지 깨닫는다.
“인간은 특이하게 비열하다. 산짐승 가운데 다른 짐승을 잡아먹는 짐승들에 감탄하며 찬양한다. 그런 짐승들을 왕으로 떠받들면서 수많은 자연사 책을 그 전설화 신화로 채웠다. 우선 지상의 모든 군주가 상징으로 삼았던 독수리 같은 맹금류만 봐도 그렇다. (중략) 왕은 독수리를 예찬한다. 하지만 목동은 독수리를 미워한다. 독수리는 가축의 적이므로 목동은 독수리와 죽도록 싸운다.” <p. 146>
엘리제 르클뤼는 사상가로서 현대 인류학에도 큰 발자취를 남기기도 했다. 아나키즘 운동의 1세대 사상가로서 양심에 따라 행동하고, 박해받았다. 그 어느 때보다 방대해진 권력과 금력 심지어 모든 개인 생활까지 독점하고 통제하려는 현대의 ‘국가’를 비판하고 ‘권력 없는 질서’라는 사회생활을 꿈꾸었다는 점에서 매우 주목할 아나키스트 사상가였다. 엘리제 르클뤼는 항상 개인이 소외당하지 않고서 조화롭게 어울려 사는 공동체로서의 사회를 꿈꾸었다. 『산의 역사』에서 그가 찾은 작은 산촌들은 때때로 이런 이상사회의 이미지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산과 어울려 아름다움을 자아내고 풍요롭고 모든 것을 품어주는 산처럼 살고 싶은 한 사상가로서의 고뇌와 현실의 부조화가 낳은 걸작이라고 평해도 좋을 만큼 아름다운 책이다.
이 책으로 세계적인 지리학자이자 생태학자로서 엘리제 르클뤼의 면모를 보여줄 뿐 아니라 현대 문화인류학에 폭넓은 영향을 끼쳤다.
저자 : 자크 엘리제 르클뤼(JACQUES ELISEE RECLUS)
1830년 프랑스 지롱드에서 태어나 1905년 벨기에에서 사망한 자크 엘리제 르클뤼는 위대한 사상가이자 교육자로 벨기에 브뤼셀대학교에서 교수를 지냈고, 벨기에 누벨대학(1919년 벨기에자유대학에 흡수)을 창설했다. 엘리제 르클뤼는 방대한 《세계인문지리(LA NOUVELLE G?OGRAPHIE UNIVERSELLE, LA TERRE ET LES HOMMES)》 19권을 펴낸 현대인문지리학의 선구자로서 지정학, 역사지리학, 사회지리학 등 새로운 개념을 내놓았고, 환경문제를 중시하는 생태학 이론과 운동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채식주의를 실천했고, 개인의 자유와 모든 제도의 억압에 반대하는 아나키즘 운동의 1세대 사상가이자 운동가였다. 뿐만 아니라 ‘자유 동거’와 ‘여성참정권’ 등 페미니즘 사상에서도 선구적 주장을 폈다. 《인간과 대지》, 《진화와 혁명과 아나키즘의 이상》 역시 20세기 사상사에 중요한 고전으로 손꼽힌다.
역자 : 정진국
미술평론가. 서울과 파리에서 예술과 미학을 공부했다. 쥘 미슐레의 《바다》와 《마녀》, 질 샤이에의 《황제들의 로마》, 빈센트 반 고흐의 《고흐의 편지》 등을 번역했다. 《유럽 책마을에서》, 《포토 루트 유럽》을 비롯한 기행문과 평론집 등을 내놓았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