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칼 - 시대의 질문에 답하는 두 가지 방식
임해성 지음 / 안타레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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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와 일본은 각각 여행한 경험이 있어 그곳의 정치가들이 함께 나란히 비교하는 책을 만난 것은 행운이다. 마키아벨리의 피렌체나 노부나가의 나고야 인근은 방문한 적은 없지만 그곳의 문화에 대한 기본적 지식은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교 다닐 때부터 두 사람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군주론'과 '앵무새 울리기'로 책과 일화가 유명해서일 것이다. 두 인물의 당시 고민이 어디에 있었고, 왜 그렇게 했는지는 이 책에서 충분히 설명하면서 설득력을 얻는다.

이 책 『말과 칼』을 읽으면서 두 곳의 지리적 상황과 정치 환경, 문화, 두 사람의 삶과 정치 철학까지도 엿볼 수 있어 엄청 즐거운 독서가 됐다.

두 사람은 각기 다른 시대, 다른 곳에서 활동했지만 열정과 패기, 절망과 좌절 등은 상당히 공통점을 갖고 있어 독자 머릿속의 상상력을 최대한 끌어올려 주는 것도 숙독하는 데 큰 도움을 줄 정도로 압축적이 주제에 충실한 책이어서 다 읽고 난 다음 보람도 크다.

마키아벨리와 노부나가의 이야기를 맛있는 햄버거의 패티와 그외 식재료의 조합처럼 사이사이 끼워넣은 점도 흥미롭게 읽을 수 있도록 저자의 글솜씨를 볼 수 있어 무척 즐겁고 행복한 책읽기의 맛도 느낄 수 있었다.

이 책은 서두에 엄청난 속도로 달리는 말처럼 빠른 전개에 잠시 혼란스럽기도 했으나 몰입감에는 오히려 큰 역할울 해주었다. 중후반을 넘어가서야 속도감을 즐길 수 있도록 책이 내용이 압축적이고 글솜씨는 독자를 주눅들게 할 정도로 압도적이다. 이 책을 만난 건 여러 가지 이유를 대도 '행운'이다.







『말과 칼』은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말’과 오다 노부나가의 ‘칼’이라는 두 가지 상징을 통해 인류 역사가 중세의 굴레를 벗어나 근세로 나아갈 수 있었던 원동력이 무엇이었는지 살피는 책이다. 아울러 마키아벨리와 노부나가를 비교 서술한 최초의 저작이다. 이들은 각자 역사의 전환기 격동의 시대 한복판을 살았고, 각자 유럽과 일본의 근세를 여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관찰해 의문을 품었으며, 그 해답을 얻고자 세상에 없던 생각으로 스스로의 삶을 열어나갔다. 또한 두 사람 모두 현대에 들어 재평가와 재조명을 받고 있는 인물들이다.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라는 하나의 질문에 ‘말’과 ‘칼’이라는 다른 방식,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낡은 생각과 관습을 파괴하겠다”는 같은 목적으로 그 해답을 구하고자 했던 마키아벨리와 노부나가의 이야기는, 21세기 제4차 산업혁명의 거센 물결을 헤쳐 나가는 현대인들이 귀감으로 삼기에 충분하다. 더욱이 동서양을 비교해가며 하나의 공통된 주제로 접근해나가는 일은 언제나 흥미롭다. 우리가 정서적 유대감을 갖고 있는 쪽(동양)의 이해를 근저에 두고 태생적으로 경험할 수 없는 다른 쪽(서양)을 끌고 들어와 ‘교집합’을 만든 뒤 그것을 통해 또 다른 ‘융합’을 시도하는 작업은 즐겁고 유용하다는 판단이다.







마키아벨리와 노부나가가 그 시대에 어떤 질문을 던졌고, 그 답을 찾기 위해 무엇을 과제로 삼았으며, 그 과제를 달성하고자 어떻게 행동했는지 들여다봄으로써, 물리적 시공간을 넘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주목해야 할 삶의 가치를 되새길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 임해성은 세계 역사의 한 지점에 주목한다. 다름 아닌 중세에서 근세로 전환하던 시기다. 인류가 원시 공산제, 고대 노예제, 중세 봉건제, 근세와 근대 자본주의 단계를 밟아 사회주의를 거쳐 공산주의 사회로 나아가리라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믿음은 한국사와 중국사를 비롯한 대부분의 역사에서 관철되지 않았다. 그런데 유독 유럽과 일본만 비슷한 역사적 궤적을 밟았다. 이 탐구 과정에서 저자는 유럽의 역사가 중세에서 근세로 이동하는 중간 지점과 일본이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가는 중간 지점을 살았던 두 인물을 재발견했다.

바로 ‘니콜로 마키아벨리(Niccolo Machiavelli)’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다.




이 책의 제목인 ‘말(words)’과 ‘칼(sword)’은 서양의 ‘니콜로 마키아벨리’와 동양의 ‘오다 노부나가’를 은유하는 단어이자,

‘시대의 질문에 답하는 두 가지 방식’을 상징하는 키워드다. 흥미롭게도 ‘6월 21일’이라는 같은 날에 죽은 이들 두 사람은 15세기와 16세기의 연결선상에서 살아간 인물들이며, 같은 질문에 관해 각기 다른 대답, 즉 ‘말’과 ‘칼’이라는 방식으로 시대적 과제에 묻고 답하고자 노력했다.

이들은 인류 역사가 중세에서 근세로 전환하던 격동의 시대 한복판을 살았고, 각자 유럽과 일본의 근세를 여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저자는 마키아벨리와 노부나가를 통해 역사에서 또 다시 동서양이 ‘공통적 대안’을 모색하는 시기가 있었음을 발견했다. 급격한 중앙집권화와 그에 따른 사회적·경제적 변화, 전쟁과 폭력의 시대를 거치면서 야기된 악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나기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 두 사람이 찾아낸 공통적 대안은 과거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됐다는 사실에 집중했다. 그 대안은 자기 내면으로 향하는 구심력이 아니라 자신의 외부 세계에 대한 적극적 참여와 개입 그리고 주도적 역할로 모순을 스스로 극복하고자 하는 원심력이었다. 이 두 사람은 자신들을 둘러싼 세계를 관찰했고, 의문을 품었으며, 그 해답을 얻고자 세상에 없던 생각으로 스스로의 삶을 열어나갔다.






역사는 역설적인 모습도 보여주는데, 훗날 ‘암흑의 중세’로 평가받으며 왕권을 넘어선 교권의 전횡으로 침체됐던 유럽과, ‘전국 시대’라는 미명 아래 왕권을 넘어선 무사들의 싸움으로 어지러웠던 일본과 달리, 세계의 중심과 그 변경으로서 또 다른 역사의 흐름을 이끈 중국과 조선은 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에 이르는 동안 침체의 길을 걷는다. 그러나 오히려 유럽과 일본은 이 시기에 웅비를 시작해 새로운 시대, 즉 중세에서 근세로의 전환을 이루게 된다. 중국과 조선과는 완전히 다른 궤적을 그렸던 것이다.

저자는 이 책 『말과 칼』에서 이 반전의 드라마를 생생하고 명쾌하게 정리하고 있다. 그 시작은 중국 명나라 영락제(永樂帝) 때 펼쳐진 정화(鄭和)의 대규모 해외 원정이다. 이를 심도 깊게 다룬다. 유럽이 ‘르네상스’를 기점으로 중세를 끝내고 근세로 전환하는 데 큰 변수로 작용해서다.

저자는 정화의 원정과 그 직후의 쇄국이 ‘잠에서 깨어나는’ 유럽과 ‘겨울잠에 들어가는’ 중국의 모습에 그대로 투영됐다고 설명한다.

정화가 어떻게 『아라비안 나이트』 ‘신밧드의 모험’의 신밧드가 됐는지에 관한 흥미진진한 설(說)도 소개한다. 그런 다음 동로마 제국 멸망 후 분열된 유럽 대륙을 ‘중세의 균열’이라는 관점에서 서술한다. 그렇게 이야기는 서양과 동양의 두 인물로 연결된다.





유럽 역사가 근세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중앙집권국가들의 패권 경쟁에 이탈리아가 뒤처지지 않도록 하고자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혼신의 힘을 기울여 써내려간 ‘말’을 파헤친다. 또한 마찬가지로 전국 시대의 혼란을 끝장내고 일본의 근세를 엶과 동시에 새로운 중앙집권국가를 세우기 위해 오다 노부나가가 목숨 걸고 휘두른 ‘칼’을 추적한다.

역사적 사실로만 바라보면 살아생전 마키아벨리의 ‘말’과 노부나가의 ‘칼’은 모두 실패했다. 『군주론』으로 대표되는 마키아벨리의 ‘말’은 그가 그토록 귀기울여주기를 바랐던 메디치 가문으로부터 외면당했으며, 전국 통일을 눈앞에 둘 때까지 힘차게 휘둘러졌던 노부나가의 ‘칼’은 결국 배신자의 칼끝으로 돌아와 그를 몰락시켰다. 그 뿐만 아니라 이들의 이름은 모두 후대에 불한당의 대명사가 됐다.

저자는 르네 지라르(Rene Girard)의 ‘희생양 메커니즘’을 인용해 이들 두 사람이 ‘모방적 욕망’에 의한 희생양이라고 분석한다.

지라르에 따르면 인간의 갈등은 서로간의 ‘다름’이 아닌 ‘같음’ 때문에 일어난다. 다른 것을 보고 다르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것을 보고 다르다고 한다는 것이다. ‘같은’ 욕망을 위해 ‘모방적’ 경쟁을 벌일 때 ‘갈등’이 발생한다. 서로를 닮게 만드는 동시에 갈등을 유발한다.

욕망에 대한 모방은 경쟁심을 낳고 그 경쟁심은 또 다시 모방을 낳는다. 이런 식으로 갈등과 폭력이 점차 격화되면 공동체에 위기가 찾아온다. 그러면 공동체는 그 위기를 초래한 책임과 비난을 하나의 대상에게 떠넘김으로써 공동체의 통합을 꾀한다. 이때 폭력이 집중되는 하나의 대상, 그것이 바로 ‘희생양’이다.





저자는 마키아벨리와 노부나가가 자신들이 살았던 시대와 후대 사람들의 ‘모방적 욕망’에 의한 ‘희생양’이었다고 설명한다. 두 사람을 그런 이미지로 만든 주도 세력은 ‘교황’과 ‘천황’이었으며, 이른바 당대의 ‘대제사장’에 의해 희생양이 된 것이다. 아직 중세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 시대의 가치 판단 기준을 넘어서버린 이들은 집단으로부터 악마화됐다.

여기서 저자는 질문을 던진다. 오늘날은 어떤가. 이성과 합리성이 지배하는 현대에는 더 이상 희생양이 없을까? 피를 보지 않을 뿐 누군가가 차별받고 배제되고 억압당하는 경우는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다. 때로는 집단적 히스테리에 사로잡힌 다수가 소수를 향해 분노와 폭력을 분출한다.

나와 정치적 견해가 다르면 적대하는 사회적 분위기도 팽배하다. 여전히 희생양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마키아벨리와 노부나가가 좋은 수단만으로는 결코 좋은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는 냉혹한 현실을 명확히 인식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런데 당시 이들이 처했던 현실과 오늘날을 비교해봐도 별반 나아진 게 없어 보인다. 지금도 우리는 ‘경제’라는 전쟁과 ‘기업’이라는 사회에서 ‘전략’과 ‘전술’이라는 군사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며 살아남기 위해 애쓴다. ‘양상’이 달라졌을 뿐 ‘본질’은 같다. 우리가 인식해야 할 현실도 동일한 것이다.

현재에도 공동체의 위기 상황이라고 할 수 있는 내부의 긴장이나 분쟁이 폭발 직전에 있다고 해도 틀린 관점은 아닐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우리의 현실이 마키아벨리와 노부나가를 재조명하게 만들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저자는 전제적 왕권이든, 종교적 권위든, 집단적 압박이든 간에 외부로부터의 압력에는 ‘말’과 ‘칼’을 따로 또 함께 사용하며 맞서면 된다고 역설한다.

외부 세계와의 싸움에는 ‘말’도 수단이요 ‘칼’도 수단이기에 ‘말’로 싸울 수도 있고 ‘칼’로 싸울 수도 있다. 이 책에서 묘사하는 마키아벨리의 ‘말’과 노부나가의 ‘칼’은 글자 그대로의 말과 칼이 아니다. 세상을, 시대를, 상대를, 스스로를 바꾸고 변화시키는 두 가지 ‘삶의 무기’다.

동양과 서양의 사고방식과 세계관을 이야기할 때 흔히 동양은 ‘순환적’이고 서양은 ‘직선적’이라는 식으로 설명해왔다.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의 차이가 크기 때문에 마치 ‘물’과 ‘기름’처럼 서로 융합되기 어렵다는 관점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세계화의 물결 속에 동서양의 문화가 빠르게 뒤섞이고 정치적·경제적으로 한 배를 타게 되면서 그 ‘정신적 이질감’은 희석됐다.

더욱이 동서양을 비교해가며 하나의 공통된 주제로 접근해나가는 일은 언제나 흥미롭다. 우리가 정서적 유대감을 갖고 있는 쪽(동양)의 이해를 근저에 두고 태생적으로 경험할 수 없는 다른 쪽(서양)을 끌고 들어와 ‘교집합’을 만든 뒤 그것을 통해 또 다른 ‘융합’을 시도하는 작업은 즐겁고 유용하다.






이 책은 그와 같은 작업의 일환으로 쓰였다.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라는 시대의 질문에 ‘말’과 ‘칼’이라는 다른 방식,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낡은 생각과 관습을 파괴하겠다”는 같은 목적으로 그 해답을 구하고자 했던 마키아벨리와 노부나가의 이야기는, 21세기 제4차 산업혁명의 거센 물결을 헤쳐 나가는 현대인들이 귀감으로 삼기에 충분하다. 역사는 ‘데자뷰’를 제공한다.

세계사 평행 이론처럼 역사의 시간과 공간의 다른 지점에서 같은 문제들을 반복적으로 제기하는 듯 보인다.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마키아벨리와 노부나가가 죽음의 저편에 서서 살아있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속삭이고 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고.

마키아벨리와 노부나가가 그 시대에 어떤 질문을 던졌고, 그 답을 찾기 위해 무엇을 과제로 삼았으며, 그 과제를 달성하고자 어떻게 행동했는지 들여다봄으로써, 물리적 시공간을 넘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주목해야 할 삶의 가치를 되새겨야 할 충분한 이유다.






저자 : 임해성(林海星)


글로벌비지니스컨설팅(GLOBAL BUSINESS CONSULTING, GBC) 대표이사. 인덕대학교 교수 역임. 한국능률협회와 한국능률협회컨설팅을 거쳐 GBC에 이르기까지 25년 넘게 경영 컨설턴트로 활동하면서 해외 우수 기업의 선진화된 경영 도구와 혁신 사례를 국내에 전파하고 있다.

《토요티즘》 《남자라면 오다 노부나가처럼》《도요타 VS. 도요타》 《워크 스마트》 등의 책을 펴내 경영혁신, 인문학적 소양, 리더십에 관한 통찰력을 나누고, 《빵과 서커스》 《위험한 일본 경제의 미래》 《내가 하는 일 가슴 설레는 일》 《세계 1%의 철학 수업》 《회사의 목적은 이익이 아니다》 《인공지능이 바꾸는 미래 비즈니스》 《세상에 읽지 못할 책은 없다》 《전략의 본질》 《퍼실리테이션 테크닉 65》 등을 우리말로 옮겨 경영전략, 조직문화, 제4차 산업혁명 등에 필요한 지식과 노하우를 전달해왔다. 이 책 《말과 칼》은 저자의 인문 분야 저술 활동의 연장선상에서 과거 역사 속 인물과 사건을 타산지석과 반면교사 삼아 오늘의 지혜로 재조명한 결과물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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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파도 속으로 미스티 아일랜드 Misty Island
황세연 지음 / 들녘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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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2차대전 말 침몰한 일본 배에 어마어마한 금괴가 함께 수몰됐다는 소문을 찾아 나선다는 사건이 있었다. 정확하게 시점을 기억하진 못하지만 기시감이 드는 내용이다. 가만 생각해보니 예전에 관련 내용으로 한 번 신문지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이 있었다.

또 최근엔 러일전쟁 때 침몰된 일본 군함이 동해에서 인양한다는 소식과 정식 인양 요청을 당국에 신고했다는 한 회사가 주식 사기 사건으로 우리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은 적도 있다. 이 책은 당시 실제 사건을 밑바탕으로 작가의 상상력을 입혀 한 편의 드라마로 엮어낸 긴장감 높은 해양 미스터리 추리소설이다.

“이차대전 말기 군산 앞바다에서 침몰한 일본군 731부대 병원선에서 어부들이 건져 올린 것은 금괴뿐만이 아니었으니….”라는 한 줄 로그라인에서 예상할 수 있듯 『삼각파도 속으로』의 인물들은 금괴 ‘+α(알파)’를 만난다. 그리고 그 알파가 사람 속의 사람을 드러내도록 작동한다.

또 최근 프로이트 식으로 말하면, 목숨을 건 한계상황에서 이드(id)를 만나는 셈인데, 이 소설의 백미는 그 이드가 각 등장인물마다 다른 모습으로 표출된다는 데 있다. 누군가에게는 평생을 건 꿈, 누군가에게는 사랑하는 가족의 안녕, 누군가에게는 목숨을 넘어서는 물욕,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식욕…… 등이다.



이처럼 서로 다른 욕망을 좇아 마린보이호에 오른 인양팀은 산소통 하나에 목숨을 맡기고 오묘하고 기묘한 비밀을 찾아 깊이 더 깊이 내려간다. 이들이 찾는 것은 75년 전에 침몰한 일본군 731부대 병원선에 실린 금괴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패전을 예상한 일본은 아시아 일본군 점령지 전역에서 금은보화를 약탈해 일본으로 실어 나르는

비밀 작전인 ‘황금백합작전’을 펼쳤다. 1945년 5월, 중국에서 약탈한 28톤의 금괴를 싣고 일본으로 가던 중 미군기의 폭격을 받고 군산 앞바다에서 침몰한 일본군 731부대 병원선 ‘초잔마루[長山丸]’. 엄청난 양의 금괴를 싣고 어느 날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려 보물사냥꾼들이 끊임없이 찾아 헤매던 초잔마루가 시골 어부에게 발견된 것이다. 저마다의 이유와 목적을 안고 일확천금을 꿈꾸던 인양팀은 마침내 731부대의 병원선을 발견한다. 그러나 그 배에서 건져 올린 것은 비단 금괴뿐만이 아니었다. 금괴를 발견했다는 기쁨도 잠시 마린보이호는 곧 엄청난 공포에 휩싸인다. 사람들이 의문사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뭔가가 그들의 시체를 뜯어먹는 기상천외한 일들이 연이어 벌어졌기 때문이다.



1945년 5월, 중국에서 약탈한 28톤의 금괴를 싣고 일본으로 가던 중 미군기의 폭격을 받고 군산 앞바다에서 침몰한 일본군 731부대 병원선 ‘초잔마루[長山丸]’. 엄청난 양의 금괴를 싣고 어느 날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려 보물사냥꾼들이 끊임없이 찾아 헤매던 초잔마루가 시골 어부에게 발견된 것이다. 저마다의 이유와 목적을 안고 일확천금을 꿈꾸던 인양팀은 마침내 731부대의 병원선을 발견한다.

난데없이 침입한 해적, 기름이 떨어져 운행을 멈춘 배, 28톤의 금괴, 해저에서 발견한 약탈 문화재, 선상에 버려진 알 수 없는 생명체의 알, 끔찍한 것들의 부화, 사라지는 시체, 그리고 자살하는 사람들……. ‘이러다가 죽을 것 같다’는 공포와 ‘기어이 살아서 부자로 살리라’, 혹은 ‘목숨만 건지겠다’는 현재의 욕망이 격렬하게 부딪히는 가운데 하나둘 드러나는 끔찍한 과거의 욕망들. 마린보이호의 인물들은 과연 땅을 밟을 수 있을 것인가? 가슴 떨리고 숨 막히는 이야기 『삼각파도 속으로』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깊은 바다에서 키조개를 채취하는 최순석은 재래식 잠수부다. 어느 날 친한 어부인 최동곤이 전설의 보물선 ‘초잔마루’를 발견하고 그 소식을 문자로 순석에게 알린다. 하지만 그날 밤 누군가가 최동곤을 살해한다. 순석은 여러 단서를 조합하여 장소를 알아내고 초잔마루를 찾기 위해 미쳤다는 소리까지 들어가며 평생 바다를 뒤지던 이도형과 협업을 약속한다. 이렇게 해서 금괴를 인양할 팀이 꾸려지는데 그중에는 뜻밖에도 이윤정이 포함되어 있다. 얼마 전 순석이 바다에서 그녀의 아버지 시체를 인양해주었던 일로 알게 된 여자다.

초잔마루를 수색하던 금괴 인양팀은 유골함처럼 생긴 항아리를 여러 개 찾아내 인양하고 백금괴로 추정되는 것을 찾아내 기뻐하지만 그날 밤 중국 해적들에게 급습 당한다. 인양팀이 내부의 누군가가 금괴를 독차지하려고 해적들을 불러들인 것 같다며 서로를 의심하기 시작하는 가운데 해적들은 인질들을 위협하며 금괴 인양작업을 시킨다. 한편 해적들은 침몰선에서 인양해 보관 중이던 항아리들을 차례로 깨보는데 거기서 나온 것은 뜻밖에도 일본어가 빼곡하게 적힌 두루마리와 괴생명체 표본, 그리고 물고기 알처럼 생긴 작은 알들이다. 우여곡절 끝에 인양팀은 금괴를 발굴하지만 남중국해 공해상에서 기름이 떨어져 표류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일들이 연속으로 일어난다.



작가가 [작가의 말]을 통해 이 소설을 쓰게 된 계기와 이유를 설명한다.

“실제로 미군기의 폭격을 받고 침몰한 배에 금괴 28톤이 실려 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든 오류든 꽤 흥미로웠다. 하지만 2차 대전 때의 금괴나 보물을 찾는 이야기는 흔한 편이어서 소설의 소재로는 식상해 보였다. 그런데 다량의 금괴를 싣고 가다가 침몰한 ‘초잔마루’라는 배가 인간 생체실험으로 악명 높은 731부대의 위장 병원선일 가능성이 크다는 글을 보는 순간 ‘바로 이거야!’라는 외침이 터져 나왔다. 흥미진진한 소설이 나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낯설고 괴기한 분위기의 미스터리 소설 말이다.”

미스터리, 서스펜스, 로맨스 장르를 아우르는 [미스티 아일랜드] 시리즈의 아주 특별한 소설 『삼각파도 속으로』가 출간됐다. 인간 종에 대한 깊은 애정과 융숭 깊은 유머로 극찬을 받는 작가 황세연의 신간이다. 황세연은 26세에 단편 추리소설 「염화나트륨」이 스포츠서울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가 짧지 않은 외도 끝에 다시 펜을 잡은 ‘돌아온 이야기꾼’이다.

교보문고 스토리 공모전 대상, 한국추리문학상 신예상, 한국추리문학상 황금펜상, 한국추리문학상 대상 수상이라는 놀라운 꼬리표들이 그의 역량을 방증한다. 『삼각파도 속으로』는 타이틀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망망대해를 무대로 펼쳐지는 해양소설이다.

그러나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 같은 오락용 어드벤처가 아니라 다양한 캐릭터들이 ‘같아 보이는’ 목적을 가지고 모여 깊은 수심만큼 어둡고 음침한 비밀에 다가서는 ‘미스터리스릴러’이자 ‘욕망과 본능이 충돌할 때 사람들은 어떤 길을 선택하는가?’를 거침없는 필치로 담아낸 수작(秀作)이다. 선상에서 벌어진 일들을 일기처럼 기록함으로써 독자들이 마치 표류 중인 마린보이호에 오른 당사자인 듯 긴박감을 조성한 점 또한 이 소설의 장점이다.



(항아리가 깨질 때 종이와 글자가 훼손되어 알아볼 수 없는 부분)

…고장 났던 배의 엔진이 수리되었다. 밤이 되자 배가 남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배는 다시 얼마 가지 못하고 엔진이 멈췄다.

누군가가 또 고의로 엔진을 망가뜨린 것이었다. 범인은 잡히지 않았으나 용의자는 지난번보다 크게 줄어 있었다. 창고에 갇혀 있는 누군가가 밖으로 나와 엔진을 고장 냈을 리는 없었다. 범인은 몸이 자유로운 사람 중에 있었다.

선장은 이곳이 배를 정박하기에 위험한 지점이라고 판단했는지 배가 조류를 타고 흘러가도록 놔뒀다. 배는 밤새 조류를 타고 북쪽으로 흘러가 어느 무인도 인근에 도달했다. 우리는 그 섬 인근에 닻을 내렸다.

엔진을 고장 낸 범인을 잡기 위한 심문이 시작되었다. 선원들이 한 명씩 장교들 앞으로 불려가 조사를 받았고 단체로 얼차려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집단 간의 의심과 갈등만 증폭될 뿐 범인은 드러나지 않았다.

5월 16일 밤,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누군가가 참수를 당한 다나까의 배를 가르고 장기 일부를 가져갔다. 배 안에 인육을 먹는 괴물이 존재하는 것 같다….

(항아리가 깨질 때 종이와 글자가 훼손되어 알아볼 수 없는 부분)

…사람들이 모두 미쳐가고 있다. 아니 세상이 미쳤다. 마루타의 저주가 아니고는 이런 일이 결코 일어날 수 없다. 우리가 죽인 자들이 괴물이 되어 우리를 지옥으로 잡아가고 있다….

- 「초록」 pp. 206~207



“아침 식사하셔야죠!”

박미경이 오랜만에 밝게 웃으며 인사했다.

“순석 씨. 저 고기 자루 건져서 이 고무통에 좀 놔줘.”

순석은 다이빙덱에 묶여 있는 밧줄을 잡아당겨서 무거운 자루를 물 위로 끌어 올렸다.

“잠깐, 잠깐! 다큐멘터리 찍어야죠. 얼굴 이쪽으로 돌려요!”

김성실이 달려와서 순석을 향해 캠코더를 들이댔다. 오랜만의 촬영이었다.

순석과 박판돌이 돌고래 고기가 든 자루를 갑판으로 끌어올려 고무통 속에 내려놓았다.

박미경이 자루 입구를 묶고 있는 밧줄을 풀었다.

“고기 냄새가 신선하네요…. 어? 아악!”

“아아악!”

자루를 벌리던 박미경과 자루 입구로 캠코더를 들이밀던 김성실이 거의 동시에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왜? 왜 그래유?”

순석은 고래 고기를 먹기 위해 자루 속에 뱀장어라도 들어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며 급히 자루 안을 들여다봤다.

“어헉!”

순석 역시 기겁을 하며 주춤 뒤로 물러났다. 자루 속에 상괭이가 아닌 사람의 토막시체가 들어 있었다.

비명을 듣고 다가온 사람들이 번갈아 자루 속을 들여다봤다.

“헉! 도, 도대체 이게 뭐여? 누, 누구여?”

남자의 토막시체는 얼굴이 자루 안쪽을 향하고 있었다.

“이런 씨팔!”

안길식이 자루로 다가가 자루 밑을 잡고 위로 확 들어 올렸다. 자루 속의 토막시체가 고무통 속으로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칼자국이었다. 시체는 팔과 다리가 잘려져 있었고 알몸이었는데 몸통 일부의 살이 잘려나가고 없었다.

- 「파랑」 중에서



“언젠가 실제로 그런 사건도 있었잖여. 비행기가 안데스산맥의 설산에 추락하고 생존자들이 칠십여 일을 버티는 동안 생존을 위해 죽은 사람들의 사체를 먹었던 사건…. 그들이 생존해 돌아왔을 때 누구도 그들을 비난하지 않았잖여. 우리도 지금 그들과 똑같은 상황에 놓여 있는 거잖여.”

이하민은 정말 시체를 뜯어먹기라도 할 기세로 손으로 벽을 더듬으며 김성실의 시체 쪽으로 다가갔다.

“그건 동물이 아니라 사람요, 사람! 김성실!”

순석이 어둠 속에 대고 소리쳤다.

“시체를 먹고라도 살고 싶은 사람은 시체를 먹는 거고, 시체를 먹느니 그냥 죽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냥 죽으면 되는 거여. 이건 생존과 직결된 일이니, 그 누구도 타인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권리는 없는 겨. 아니, 살 수도 있는 사람을 시체를 못 먹게 해서 굶어 죽게 했다면 그거야말로 살인행위지…. 아닌감? 나는 우리가 살려면 저 시체를 먹어야 할 것 같은디, 윤정이 생각은 어때?”

“그, 글쎄요.”

이윤정이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순석은 이하민의 말보다 이윤정의 대답이 더 큰 충격이었다. ‘안 돼요.’가 아니라 ‘글쎄요.’라니?

순석은 빈혈 같은 심한 현기증을 느끼며 뒤로 비틀비틀 물러나 벽에 기대고 앉았다. 무슨 병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온몸에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체력에 한계가 온 것 같았다.

‘그런데 이하민과 이윤정은 왜 나보다 더 멀쩡한 것일까?’

- 「검정」 중에서



저자 : 황세연


충남 청양의 칠갑산 밑에서 태어나 자랐다. 지금은 서울 촌놈이다. 교도소에서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한 경영학과 재학시절, 세 문제가 인쇄된 세 시간짜리 회계학 시험지를 받아들었는데 풀 수 있는 문제가 없었다. 그대로 시험장을 나오는 것이 창피해 한 시간 동안 시험지에 꿈과 미래에 대해 적어보다가 시험지를 구겨 들고 나와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26세에 단편 추리소설 「염화나트륨」이 스포츠서울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전업작가가 되었다. 소설 몇 권을 출간한 뒤 삼성전자 휴대전화 시리즈 광고의 스토리를 쓰는 등 영화계와 방송계를 기웃거리다가 등 떠밀려 들어간 출판사에서 꽤 오래 편집기획자로 일했다. 다니던 회사가 대기업 계열사에 합병되며 잘린 것을 기회 삼아 다시 열심히 소설을 쓰고 있다. 교보문고 스토리 공모전 대상, 한국추리문학상 신예상, 한국추리문학상 황금펜상, 한국추리문학상 대상 등을 수상했다. 작품으로, 장편 추리소설 『내가 죽인 남자가 돌아왔다』, 국정원 추리퀴즈 모음집 『IQ 추리퀴즈 프로젝트』, 『EQ 추리퀴즈 프로젝트』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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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나를 좋아하게 만드는 법 - 관용, 인간관계의 고통을 없애줄 확실한 키워드
백강이 지음 / 책이있는마을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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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타인과 크고 작은 부딪힘의 연속이다. 이런 부딪힘을 어떻게 서로 너그럽게 해결하느냐에 따라 관계가 끊어질 수도 더 나은 관계로 나아갈 수도 있다.

독자는 관용이란 말을 이해하기 전부터 양보를 잘 하는 편이었다. 갈등이 생길 경우 그와 관계를 유지하고 싶으면 양보하고 말았으니까. 그래서 '사람이 순해 빠져 이 세상을 어떻게 살지 모르겠다'는 말을 들은 적이 많다. 성격이 너그럽다기보다 모질지 못하다는 주위의 평이다.

이 때문인지 어떤 집단에 새로 가서도 미워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던 듯하다. 집으로 돌아오면 가족과 전쟁 같은 질책을 듣기 일쑤다. 순해빠져서 늘 손해보고 산다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렇다. 그러나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한 걸 어찌하겠는가.

누군가가 이런 독자에게 '착한 사람 콤플렉스'란 말을 한 적이 있다. 착한 사람으로 인식하게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덕분에 관련 책도 많이 구입해 읽었다. 자신의 정체성을 확실히 인지하고 자신이 손해라는 판단이라면 과감하게 거절하는 법부터 배우라는 내용이 많았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잘 되지 않았다. 타인이 부탁하면 딱 잘라 거절하기가 어렵다. 그것이 돈 문제든, 심지어는 상 받는 일에도 한 사람이 양보하면 간단하게 해결될 문제라면 서슴없이 내가 먼저 양보했다. 그가 끝까지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거기다가 자기가 이번에 꼭 혜택을 받아야겠다고 사정을 얘기하면 내 상황을 생각지 않고 주저없이 양보한다.

관용, 배려, 용서 등을 성격상 잘하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그것이 일상화되면 나중에는 '못난 놈'이란 비판이 뒤따른다. 그렇지만 그게 더 만족스러운 느낌이 든다면 어찌하랴.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이 책에서 말하는 관용도 결국은 비슷하다.






"관용의 진정한 정의는 용서를 뛰어넘는 것이다. 관용은 나 자산을 용서하듯 다른 존재를 용서하는 것이다. 관용은 나 자신을 이해하듯 다른 존재를 이해하는 것이다. 또한 아무 조건 없이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누구나 나를 좋아하게 만드는 법』의 저자는 말하고 있다. (p. 12)

저자는 이 책에서 '관용'의 자세가 우리에게 얼마나 이로운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깊게 살펴보면 타인에 대한 미움을 거둠으로써 내 마음을 지키라는 메시지인데 그것이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머리와 마음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저자는 그런 어려움을 극복하는 이유와 방법을 치열하게 설명하고 있다. 저자 역시 관용을 베푸는 마음을 알아서인지 독자의 생각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다.

그래서 책 읽기도 재밌고 잘 읽힌다. 저자가 관용을 말하는 자세와 독자로서 이미 경험하고 수용하는 자세이기 때문이다.

"순간의 모멸감과 참담함을 어떻게 조절하느냐에 따라서 삶의 희로애락이 결정된다." (p. 39)




책에서 저자 백강이의 주장은 강력하다. 일탈을 경험한 사람만이 일상이 얼마나 감사한지 깨닫는다. 누군가를 미워해보고 그 때문에 고통을 겪은 사람이라면 ‘용서’가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 깨닫게 된다. 관용을 베푸는 것은 나와 타인을 위한 최고의 선물이다. 삶의 질은 타인과의 관계에 의해서 상당 부분 결정되는 법이다.

그렇다면 타인이란 누구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타인은 또 다른 나, 또 다른 우리이다.

우리가 완벽한 존재가 아니듯 그들 또한 때로는 실수하고 죄를 범하고 어리석은 행동을 한다. 그 때문에 우리를 화나게 하고 실망시킨다.

그럴 때마다 용서하지 못하고 증오한다면 결코 행복할 수 없다. 행복은 고사하고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그 이유는 명백하다. 다른 이를 위한 증오의 칼날은 바로 나에게 향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 『누구나 나를 좋아하게 만드는 법』은 이 같은 갖가지 인간관계의 고통을 없애줄 확실한 비법을 제시해준다. 그것은 바로 ‘관용’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별 생각 없이 되뇌던 막연한 단어 ‘관용’이 아니라, 실생활에서 유용하게 적용할 수 있는 ‘살아 있는 관용’의 힘을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저자에 띠르면 아무리 미워도 관용을 베풀 줄 아는 사람만이 참 행복을 찾을 수 있다. 곰곰 생각해보면 너무도 당연한 말이다. 그렇다. 관용은 인격적으로 어느 경지에 오른 이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바로 평범한 사람들의 현명한 삶의 기술이다. 그러니 그 누구라도 자신의 삶에 적용할 수 있는 것이다.

물질적인 풍요로움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사라질지 모르는 일이다. 가진 것이 많고 적음이 인생에서 중요한 부분은 아니라는 뜻이다. 삶을 행복하게 꾸려가려면 인간을 어떻게 사랑하느냐가 관건이다. 그 열쇠가 바로 이 책에 오롯이 담겨 있다.



책에 따르면 사람을 사랑하고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만큼 중요하고도 필요한 일은 없다. 누구든 용서하고 사랑으로 이해하자. 그가 아무리 잘못했어도 그에게 마지막 기회를 다시 한번 주어야 한다. ‘관용’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우리가 미완의 존재이듯 타인도 역시 미완의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이 관용이다. 사람은 누구나 용서받을 짓 한번쯤 저지르며 살지 않는가? 끊임없이 관용하는 방법을 터득한다면 우리의 삶이 더욱 행복하고 평화로워진다. 그리고 누구나 좋아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나는 왜 사람들과의 관계가 불편할까? 나는 왜 사람들을 내 편으로 만들지 못할까? 다른 사람들이 날 좋아하게 만들 방법은 없는 걸까? 혹시라도 이런 고민을 해본 적이 있다면? 여기 인간관계의 고통을 없애줄 확실한 방법이 있다. 바로 끊임없이 관용하는 것. 관용의 압도적 힘이 삶을 충만하게 한다. 이 책은 바로 이 같은 관용의 가치에 주목한 책이다.

관용의 삶을 사는 사람은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무엇이든 잘 해낼 수 있다는 긍정적인 기대를 갖는다.

그러한 기대가 삶 자체에 그대로 적용되어 어떤 일이든 의욕적으로 해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관용하는 사람은 풀어야 할 문제가 생기면 당황하지 않고 최대한 침착하고 현명하게 그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다. 그것이 관용의 잠재된 힘이다.



어차피 죽을 때는 빈손으로 가는 것이 인생이다. 더 많이 움켜쥐고 악착같이 모아도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한다. 관용을 가지고 베풀어라. 그러면 꿈을 실현하는 기적을 선물 받을 것이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될 것이다.

아무리 미워도 관용을 베풀 줄 아는 사람만이 참 행복을 찾을 수 있다. 끊임없이 용서하는 것, 이것이 인생을 살아가는 현명한 기술임을 기억하라. 물질적인 풍요로움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사라질지 모른다. 이제 이 책을 통해 ‘누구나 나를 좋아하게 만드는 최고의 비법’인 관용을 익힌다면 누구라도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다. 무슨 이 시대에 공자나 예수, 부처님 같은 소리냐 할지 모른다. 그러나 바꿔 생각해보면 '사람'으로서의 삶이 그래야 한다. 삶의 원칙이다. 나와 타인이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가장 밑바탕이 되는 원칙이고 힘이다. 여기서 독자의 생각과 저자의 마음이 일치한다. 다만 저자가 제시한 대로 좀 더 기술적으로 삶을 살아가는 법은 배워야 할 것이다.




관용이라는건 우리에게 긍정적인 시각이라는 선물을 준다고 작가는 표현한다. 관용의 마음으로 지금까지 못마땅하게 여겼던 사람들을 새롭게 바라보면 그가 한 행동이 전혀 거슬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나의 의도와 맞지 않는 행동이라 할지라도 관용적 시선이 필요하다는 뜻 아닐까.

타인의 비상식적인 행위도 관용을 지닌 사람은 긍정적으로 이해함으로써 그를 관대하게 대하게 되고 그리하면 그 사람은 관대함으로 인해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칠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는 내용도 있다.

사실 죄질이라든가 사람에 따라서는 개과천선이 가능한 사람이 있고, 불가능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건 내 몫이 아니다. 죄를 지었다면 재판에서 판사의 관용을 받아야 하고, 도덕적 윤리적 죄를 지었으면 사람들에게 벌을 받을 것이다. 거기에 관여하거나 판단할 몫은 내 것이 아니다.




저자 : 백강이


치열하게 사색하는 생각여행자. 10년차 작가이자 사색가. 네티즌이 사랑하는 작가 중 한 명으로 선정. 따스한 문체의 글로 슬픔과 아픔을 어루만지는 따스한 문체를 소유한 백강이는 사물과 현상에 대한 특별한 통찰력을 지녔다. 삶에 대한 깊은 이해의 시선을 지닌 저자는 2010년 가을에 『긍정의 생각이 데려온 일곱 손님』으로 작가로 데뷔했다. 그 이후 상처를 치유하는 힐링도서를 꾸준히 출간하면서 많은 독자들로부터 사랑받고 있다. 특히 베스트셀러 『울고 싶어도 내 인생이니까』는 국방부에서 '진중문고'로 선정되는 등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순수한 삶에 관한 책 『너도 많이 힘들구나』는 교보문고와 영풍문고에서 ‘오늘의 책’으로 선정되었고, 죽고 싶을 만큼 힘든 이들을 위한 책 『죽고 싶을 때 읽는 책』은 ‘세종나눔도서’에 선정되었다.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하고 늘 긍정적인 자세로 살아가는 작가는 글을 쓰는 순간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 독자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작가는 오늘도 힘겨운 누군가를 위해 글을 쓴다. 지은 책으로 『사랑하는 나야, 그동안 수고했어』 『긍정의 생각이 데려온 일곱 손님』 『서른 살에 꿈꾸면 좋은 것들』 『울고 싶어도 내 인생이니까』 『그대를 포함한 나에 대한 사색』 『미치도록 아프거든 사랑으로 치유하라』 『너도 많이 힘들구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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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클라마칸 - 바람과 빛과 모래의 고향
김규만 지음 / 푸른영토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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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이라면 불현듯 떠오르는 게 생텍쥐페리다. 그가 『어린 왕자』와 『야간비행』에서 묘사한 사막 때문이리라.

사실 사막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책 속에서 그 모습을 보거나 TV 등을 통한 영상을 본 것이 전부다. 저자마다 책의 주제에 따라 다른 표현을 쏟아내는 사막은 그래서 막연한 환상과 동경의 대상이다. 타클라마칸 사막 기행인 이 책이 눈에 확 띈 이유일 것이다. 모래, 오아시스, 낙타, 그리고 어린왕자. 그리고 사막의 밤은 어떨까라는 궁금증. 거기에는 어떤 별이 떠 있을까 등등...

『바람과 빛과 모래의 고향 타클라마칸』은 그곳을 찾은 저자가 무엇을 보고 어떤 생각을 갖게 되었을까도 궁금하다.

'혹시 어린왕자라도 만났을까' 하는 동화적 상상력은 아니더라도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도 무척 호기심을 자아낸다.

그러나 저자가 들려준 얘기는 환상이 아니고 그들의 '삶의 투쟁'이다. 그래서 1부 첫 소제목을 '메카를 향한 기도, 베이징을 향한 저주'라고 썼을까.

사막이라는 환경에의 적응보다는 외부 세력의 침입과 정복에 맞서야 했던 처절한 사막에서의 삶을 직접 보면서 저자는 깨달았다고 밝힌다. 자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고 인간이 섭리에 순응하며 살아야 하는 곳이라고. 인간이라는 존재는 결코 우월하지 않고 자연과 함께 살아야 하는 존재라고.






저자가 전한 사막의 이미지는 몹시 인상적이다.

"사막은 태고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사막은 모든 생명체를 말라 죽게 할 것 같지만 죽어있는 것이 아니고 성주괴공을 계속하면서 끊임없이 신진대사를 계속하고 있다. 그 자연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도 할아버지가 살던 곳을 손자가 이어서 살다 할아버지가 되면 다시 그 손자가 삶을 이어갔다. 그리고 그렇게 옛날부터 삶을 엮고 짜고 꿰매고 매듭 지으며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은 아무 곳에서나 쉽사리 찾을 수 없지만 오랜 세월 마모되고 부서진 흙과 모래가 켜켜이 쌓인 완만한 지평선 아래에 나이테가 되어 남아 있다. 사막에서 과거와의 대화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것과 대화일 수밖에 없다." <- pp. 35~36 >

모든 것을 간직하고 있다는 사막. 때문에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일까. 사막의 모습을 전해 듣고 난 후 비로소 하나 둘 그 속에 담겨진 이야기들이 궁금해진다.

책에 따르면 이 사막은 '실크로드'와 관련이 있다. 수천 년 전부터 물물교류와 문화전파의 소통로이다. 그 길 가운데 오랜 세월 거친 자연과 문명과 사람들의 삶이 때로는 쏟아지는 별빛 아래서, 때로는 모래바람 속에서, 때로는 한없이 푸른 하늘과 거칠고 황량한 대지 위에서 이어지고 있다.





메마르고 거친 환경만 있다면 얼마나 더 가슴을 쓸어내고 삭막해질까? 그러나 그런 곳에는 반드시 운명처럼 판타지와 신기루(mirage)가 존재한다. 사막은 단순하지만 오히려 느껴지는 것이 더 많은 것은 판타지와 신기루가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탐험을 동경해서 1989년 동계 에베레스트를 등반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거대한 사하라 사막이나 아라비아 사막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저자는 가깝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을 찾았다. 모래바람을 헤치고 서역남로와 타클라마칸의 사막공로(沙漠公路) 정도는 자전거를 타고 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글은 자전거를 타고 ‘사람의 무늬’(人文)를 찾아가는 미완성의 여행이었다. 물론 미완성인 나의 사색도 함께했다. 사막의 신기루처럼 몽환스러운 그 공간을 뚫고 모래바람이 부는 곳을 향해서 페달을 밟고 나아가고 싶었다. (Prologue -사막은 환상과 동경의 대상인가? 중에서)


타클라마칸 사막을 자전거를 타고 종단한 김규만 저자는 다양한 사람(人)들의 삶의 흔적(文)인 인문(人文)의 현장을 찾아갔다. 모래바람을 가르며 “나는 달린다. 고로 존재한다”는 실천을 해보고자 하였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말에서 따온 “나는 달린다. 고로 존재한다”를 모토로 삼아 실천하고자 했다고 술회한다.

대유사(大流沙)에 의해 수시로 묻히고 드러나는 서역남로의 옛 실크로드의 흔적에서 보이지 않는 것과의 대화를 오가는 작가의 상상력이 두드러진다.





봄이 오고 바람이 불면서 고요한 사막을 뒤집어 놓기 시작한다. 온 세상에 모래먼지가 날리고 고산의 만년설에도 모래가 앉는다. 그리고 여름이 가까워지면 높은 산 위에 빙설(氷雪)이 조금씩 녹기 시작하여 산 아래로 물길을 만들어 흘러내린다.

이 물이 대지를 적셔서 나무와 식물, 곡식과 채소를 자라게 한다. 타클라마칸 사막에 오면 타산지석(他山之石)이 아니라 타산지수(他山之水)의 공덕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대상(隊商)들이 갈증과 모래바람 속에서 작열하는 태양과 싸우며 하루의 고단한 노정을 끝낼 무렵이면 멀리서 신기루처럼 나타나는 대상들의 숙소(宿所)가 있었다. 그 숙소를 Caravan sarai 또는 Caravansary라고 한다. 이곳은 식당, 숙소, 마구간(馬廐間) 시설은 물론 각자 필요에 의해 수요와 공급을 만족시켜줄 소규모 상업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낙타는 보통 발을 묶어두고 물과 건초를 먹이지만 식량과 물 운반이 어려운 오지 카라반사라이에서는 사람 먹을 물조차 부족한 곳이 많았다. 아침이면 일용할 물과 양식을 챙겨서 길을 떠나는 것으로부터 카라반들의 하루 노정이 시작된다.

(1부 '사막- 보이지 않는 것과의 대화!' 중에서)





사람들은 신발 바닥에 작은 모래 알갱이, 피부 어딘가에 미세한 자극, 스치는 바람, 치아 사이에 낀 아주 작은 이물질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고 때로는 불편해한다. 뭔가 막힌 길이 있다면 본능적으로 뚫고 가려고 몸부림을 친다. 그런 심정으로 실사구시적인 사막의 오아시스를 연결하면서 길을 개척한 것이리라.

(1부 '사주리로(絲周之路, Silk Road)의 개척자들' 중에서)


나일 강의 흉포한 홍수(洪水)가 텔타(Delta)삼각주를 범람하게 하여 ‘비옥’하게 만들 듯이 이 타클라마칸 하늘의 검은 바람도 쿤룬 산맥 빙설을 녹여 오아시스를 ‘비옥’하게 만든다. 해마다 5월이 되면 하늘을 시커멓게 뒤덮은 모래바람이 남쪽 쿤룬 산맥의 빙하위로도 분다.

그러면 순백(純白)의 순결(純潔)한 설과 빙은 더럽혀진 자신 몸의 때를 씻어 내려고 세례(洗禮)하기 시작한다.

(1부 '타클라마칸의 카라 보란(Kara Boran)' 중에서)




술술 읽다보니 안타까운 일들도 있다. 지금의 오아시스 북도, 오아시스 남도를 보면 끊임 없이 사막에 침식당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 서역남로는 남쪽으로, 텐산남로는 북쪽으로 많이 밀려나 있다고 한다. 지금 이들은 사막의 외연이 확장되는 것을 막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는데 이것은 개인 또는 지방자치단체가 하기에 너무 어려운 일이다. 오아시스와 오아시스 사이의 황무지 또한 사막이다.

사막은 도시화로 인구가 늘고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물과 화석연료의 과다사용으로 인한 기상이변이 가장 큰 주범이라고 생각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오늘날 이들 문명도 먼 훗날 모래 속에 묻혀서 화석화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또다시 느끼게 된 인간에 의한 자연 파괴. 다시 '여우'가 '어린왕자'에게 전했다는 그 말이 떠오른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마음으로만 보아야 보인다."

이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사막에서 불어오는 모래바람 사이로 그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하는 것 같다.




사막은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으로 생각되지만 그 곳에서도 삶의 활기가 돈다. 사막 중간중간에는 오아시스 도시가 있고, 낙타는 도시들을 서로 연결해 주고 있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실크로드의 역할이 줄어든 오늘날에도 둔황, 호탄, 신장 자치구, 카슈가르 등 옛 영화를 간직한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요즘은 비행기를 타면 우리나라에서 유럽까지 한나절이면 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과거 중국에서 유럽까지 이어지는 교역길은 한번 가면 몇 년 뒤에나 다시 돌아올 수 있는,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도 많은 위험한 길이었다. 척박한 사막과 높은 산을 지나면서 길 위에 있는 도시들은 서로 문화를 교류하고 상업 활동도 활발히 하면서 융성하기도 했다.



바이크는 달빛만 뿌연 고요한 공간을 파문을 일으키며 지나가고 있다. 삼각대 위에 카메라를 고정하고 Slow 셔터로 찍으면 한 개의 줄을 그리며 달리는 자전거 선단이 찍혀질 것 같다. 부딪히는 바람은 습기가 없어서인지 쓸쓸하고 호젓하게 와 닿는다.

(2부 '사막의 인공혈관, 사막공로' 중에서)


좌충우돌 부딪히면서 튀어나오는 자유로운 영감(Inspiration)을 위해서는 달콤한 안일은 과감히 벗어버리고 포기해야 한다. 때로는 거칠고 맛없는 음식, 과도한 노력(勞力)과 노동(勞動)이 함께 하는 라이딩, 몸을 오그라들게 하는 추위 속에서라도 달게 자야 한다. 힘든 라이딩을 한 다음 젖산으로 빵빵한 근육, 춥고 불편한 잠자리, 타는 갈증도 훗날 세월이 가면 강렬한 느낌과 뿌듯함으로 되살아날 것이다. 이렇게 온전하지 않은 현실을 관대하고 여유롭게 포장을 했다.

(2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으면 느껴야 한다!' 중에서)



누워서 꿈을 꾸고 앉아서 기도하다 보면 신은 분명히 바람을 멈추고 카라보란을 잠재우는 평화의 계시(啓示)를 내려 준다. 이것은 알라신이 622년 헤지라(Hegira, 聖遷)부터 사막과 태양의 땅을 지배하면서 수 세기 동안 확인되고 증명된 진리이다. 밤은 언제나 밝아오고, 낮은 언제나 어두워진다. 폭풍이 불면 언젠가 잦아들고, 평화로운 하늘도 언젠가는 폭풍이 몰아친다. 그러한 자연을 주재하는 신은 정녕 위대하지 않는가?

(2부 '완벽한 고독과 고요가 지배하는 사막의 아침' 중에서)


사막은 평화와 광기가 공존한다. 빛과 그림자, 명과 암, 추위와 더위, 생성과 소멸 등 콘트라스트가 분명한 곳이다. 지금처럼 깨끗한 때가 있는 반면 한치 앞을 가릴 수 없는 카라보란(검은 폭풍)으로 온 세상이 시커멓게 될 때도 있다. 사막은 평면 같으면서도 사실 아주 입체적인 육감이 풍성하게 느껴지는 곳이다.

(2부 '세월이 켜켜이 쌓인 사막의 나이테' 중에서)



저자 : 김규만


한의학 박사이자 시인이며, 굿모닝한의원 원장이다. 대학원에서 티베트의학(Tibetan Medicine)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고, 〈한국문인〉에서 시인으로 등단했다. 대한한방해외의료봉사단(KOMSTA) 초대 단장을 지냈고, 1993년 네팔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국내외에서 다양한 의료봉사 활동을 펼쳐왔다. 마라톤, 산악트레일런, 철인3종경기, 울트라마라톤 등에 수차례 참가했고, 1988년 프랑스 샤모니의 에귀디미디와 마타호른의 훼른리 리지 등반, 1991년 동계 에베레스트 등반, 2007년 700Yacht Club Opening day Races 우승, 독도 왕복 요트 세일링, 인도 라다크 MTB원정, 티베트고원 MTB종단, 카라코람하이웨이 MTB원정, 타클라마칸 사막 MTB 종단, 스페인의 ‘까미노 데 산띠아고’MTB원정, 유럽 최북단 North Cape Bike원정 등 왕성한 스포츠 이력을 지니고 있다. 한국히말라얀클럽부회장, 올리브요트클럽회장, 올리브바이크회장,대한한방해외의료봉사단 서울지부장 등을 역임했다.〈스포츠조선〉, 〈민족의학신문〉, 〈산〉, 〈사람과 산〉, 〈더바이크〉, 〈세계일보〉 등 여러 매체에 글을 연재했다.

저서로는 『티베트고원을 지나 히말라야를 넘어』, 『올댓 MTB』, 『그리운 카라코람 하이웨이』, 『산띠아고에 태양은 떠오르고』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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