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아닌 국경이 이동할 때는 이주민이 아닌 난민이 발생하게 된다. 미국의 작가 대니얼 멘델슨은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폴란드에서 학교를 다니고 독일에서 결혼하고 소련에서 자녀를 낳고 우크라이나에서 죽는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 모든 과정에서 그는 한번도 자기 마을을 떠난 적이 없었다. 이는 1918년 이전에 현재 우크라이나의 리비우나 그근처에서 태어나 1990년대까지 살았고 고향을 떠난 적이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 P340

국제연맹은 난민 대상자를 확대하여 튀르키예에서 피신한 아르메니아와 아시리아인들도 지원했지만 1930년대와 1940년대에 발생한 대규모 난민 사태에서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없었다" 1950년에 유엔에 의해 난민고등판무관의 역할이 승격되었지만 이들의 업무역시 유럽으로만 한정되어 있었으며 난민으로 보호받을 자격에 대해서도 제한된 규정에 묶여 있었다. 오늘날에도 난민의 정의는 여전히 ‘박해를 받을 수 있다고 인정할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는 두려움‘에 근거한다. 이 정의에 따르면 가난, 기아, 기후 변화 또는 자연재해 때문에 고국을 떠나는 이주민은 난민으로 간주되지 않으므로 보호를 받기 힘들다. - P341

허가를 받거나 잗지 않거나 유럽인들의 이주가 계속되기는 했지만 북아메리카 내부의 인구 이동에 비하면 매우 미미한 수준이었다. 이 대규모 이주는 새로운 이민 제한 조처로 인한 노동력 부족에따른 연쇄 반응이었다. 매디슨 그랜트와 앨버트 존슨 같은 백인 (그리고 북유럽인) 우월주의자들이 고안한 반이민법은 뜻하지 않게 새로운 비유럽인의 이주 물결을 불러일으켰다. 1920년대에 약 45만 명의 멕시코인들이 노동 시장의 요구에 따라 국경을 넘었고 주로 텍사스, 뉴멕시코, 캘리포니아의 과일 농장과 통조림 공장에서 일했다. 그러나가장 중요한 이주는 수백만 명의 미국 흑인들이 과거에 노예제도가있었던 남부 지역을 벗어나 북부의 대도시로 이주하고 그중 소수는 더 멀리까지 여행하게 된 것으로, 이는 흑인 대이동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흑인 대이동이 미국을 재편하는 데 미친 영향의 규모와 그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에 대해 유명한 역사가인이사벨 윌커슨Isabel Wilkerson의 말을 빌자면 ‘그것이 닿은 모든 도시의사회적·정치적 질서를 개조한 거대하고 주도자 없는 운동‘이었다. 흑인 대이동이 한창이던 1925년 미국 흑인 철학자 알랭 로크 Alain Locke는 흑인 대이동이 ‘시골에서 도시로 그리고 중세 미국에서 현대 미국으로의 계획적 도피‘라고 했다. 또한 그것은 차별과 린치, 빈곤, 아직해결되지 않은 노예제도와 남북전쟁의 유산으로부터의 도피였다. - P365

할렘은 유럽 이민자들의 근거지였지만 그들은 점차 더 시내쪽으로 아니면 아예 뉴욕 시 밖으로 이동했고, 1920년대 즈음 할렘의 중심부에는 흑인들이 살게 되었으며, 흑인 문화를 대표하는 장소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바하마 혈통으로 플로리다에서 이주한역사가 제임스 웰던 존슨 James Weldon Johnson은 할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니그로 관광객, 행락객, 호기심 많은 사람, 모험가, 야망가, 재능 있는사람을 위한 위대한 메카다. 그 매력은 카리브 해의 섬부터 아프리카까지 뚫고 들어갔다.

할렘 르네상스의 주요 인물들은 대부분 남부에서 이주해온 이들이었다. 그러나 존슨이 할렘 문화에 대해 국제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한 말도 옳았다. 시인 랭스턴 휴즈Langston Hughes와 소설가 넬라 라Nelta Larsen은 미 중서부 출신이었고, 흑인 민족주의자 마커스 가비Marcus Garvey와 작가 클로드 멕케이 Claude McKay는 자메이카 출신이었다.
그리고 할렘 르네상스의 부산물 중 하나는 더 먼 과거, 즉 오래된 고향과 과거의 이주에 대한 관심이 커진 것이었다. - P368

제2차 세계대전은 이주 기억상실증이 시작되는 일종의분수령이 되었다. 이는 전쟁 전과 후의 이주가 완전히 다르게 받아들여졌으며, 전쟁 전과 전쟁 후라는 양 시대 사이의 이주 관련 연속성들이 무시되거나 부인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간단한 실험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주민을 상상해보자. 마음속에 떠오르는 모습은 어떤 모습인가? 그들은 백인인가? 그들은유럽인인가? 아마 아닐 것이다. 현대의 이주민은 보통 개발도상국에서 일을 찾거나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온 가난하고 피부색이짙은 사람들로 연상되는 경향이 생겼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사이 비슷한 실험을 했더라면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 특히 서구인들은 미국 또는 오스트랄라시아로 이주해간 백인 유럽인들을 떠올렸을 가능성이 높다. 중요한 점은 대체로 백인들이 전쟁 이후에는더 이상 자신들을 이주민이라고 생각하거나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그들은 이민 나가는 사람 emigrant 또는 국외 거주자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또한 영어에서 이민 들어오는사람mmigrant이라는 단어는 유색인종 이주민들을 분류하는 용어로 사용하는 경향이 생겼다.
이것은 현대의 이주 논쟁이 얼마나 인종차별적이며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지를 깨우쳐준다. 분명한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과 프랑스가 1950년대 이전에는 백인 일색이었고 단일 문화였다는 주장을 아무렇지도 않게 펼치는 것이다. 프랑스와 영국의 백인 조상이 고대 아테네인들이 주장했던 것처럼) 역사가 시작될 때부터 그곳에서 살았다고 주장함으로써 정착주의와 인종적 순수성, 민족국가라는 세 가지를 동시에 미화시키는 것이다. 좀 더 세부적으로는 두 차례의세계대전 동안 아시아, 아프리카, 카리브 해 사람들이 전장에서 혹은후방에서 전쟁을 치뤄냈던 역사 또한 생략해버린 이야기라 할 수 있다. 1950년대 이전의 유럽 역사가 개작되면서 유색인종을 위한 역사는 거의 없어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들은 그냥 삭제되었고 수십 년이 지난 이제서야 점차 복원되고 있다. - P394

대영제국의 쇠퇴는 동시에 특권적인 이주의 쇠퇴를 의미했다. 또한 제국을 운영하는 데 필요한 영국인(대부분 남성이었다)의 수요도 감소했다. 즉, 모험심 강하고 자신감 넘치는 영국 청년들은 고향에서 수천 마일 떨어진 식민지로 이동하면 경력의 시작 단계부터 막강한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는데, 그 선택권이 급격히 줄어들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대신 모험심 있고 자신감 넘치는 다른 청년 집단이 반대방향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자메이카 시인 루이스 베넷 Louise Bennett이 ‘역 식민화‘라고 표현한 움직임이었다. 이에 대해 스리랑카의 정치 이론가 A. 시바난단Sivanandan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들이 거기(스리랑카)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여기(영국)에 있는 것이다." 시차를 둔 이러한 인구 흐름은 대칭으로 일어났고, 영국은 한때 대영제국이었던 지역의 이민자를 배제하는 것을 정당화하기가 훨씬 더 어려워졌다. - P402

멕시코 젊은이들을 포함한 전 세계 수많은 이주민들에게 이주라는 개념은 또한 독립을 의미했다. 이주를 통해 보수적인 문화와 가족의 통제를 벗어나고, 부모처럼 되지 않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수 있는 것이다. 그중 어느 하나라도 이루기 위해서는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그리고 우리가 젊은이들에게 기대하는 엄청나게 위험한 행동, 예를 들어 조국을 위해 싸운다든지 하는 것을 기억해보라. 그들이 국가의 이익 대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지 않을 이유가 무엇인가?
위험을 통해 그들이 누릴 수 있는 혜택 중 일부는 실용적인 것들로 좋은 직업, 더 나은 의료 서비스, 자기만의 방, 자녀를 위한 좋은교육 그리고 물론 박해로부터의 자유 등이다. 그러나 고대부터 인간이 이주하는 이유 중에는 실용적이지 않는 것들과 실용적인 것들이 복잡하게 뒤얽혀 있으며 항상 그래왔다. 국경과 민족국가가 있는 오늘날의 정주주의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는 그 역사를 너무나 자주 잊고 있다. 우리는 인간이 지루하거나 호기심 혹은 모험심 때문에, 아니면 도전을 즐기거나 꿈을 이루고 싶어서 이주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잊었다. 수천 년 동안 인류는 지구의 거의 모든 곳으로 이주했고,
그것을 막으려는 온갖 시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렇게 하고 있다. 이주의 역사야말로 우리의 가장 가까운 사촌인 유인원과 인류를 분명히 구분할 수 있게 하는 것 중 하나다. 우리는 그것을 잊지 말아야할 것이다. 그리고 이주민과 이주민 후손으로서 우리의 역사가 모두의 공통점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 P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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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네의 분류법은 인간과 그 외 모든 사물들을 계(동물), 강(포유류), 목(영장류), 속(호) 및 종사피엔스)으로 분류하는 것이었고, 현명한 사람이라는 의미의 라틴어 ‘호모 사피엔스‘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자기 만족에 빠진 우리 인간종은 훨씬 더 타당해 보이는 명칭, 예를 들어 이주하는 사람(호모 마이그런스 Homo Migrans) 대신 호모 사피엔스를 즐겨 쓰고 있다. 그리고 린네는 (현명하지 못하게) 호모 사피엔스 속을 아메리카(원주민), 유럽인, 아시아인, 아프리카인 등 네 가지 주요하위 그룹으로 세분했다. 그는 또 각 하위 그룹을 출신 대륙에 따라설명하고, 그 구성원들을 머리카락 색, 피부 색, 콧구멍 모양 등 신체적 특징과 도덕적 기질에 따라 분류했다. 모국에서 영웅 대접을 받는 ‘분류의 대가‘ 린네는 동물과 식물을 물리적 특성에 따라 분류한 가장 잘 알려진 저서에서 아시아인은 천성적으로 오만하고 탐욕스럽고, 아프리카인은 교활하고 나태하며, 유럽인은 온화하고 창의적이라고 기술했다. - P278

중국의 반응은 이주민들에 대한 중국인들의 전반적인 태도를보여주는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였다. 그리고 서구에서 생각하듯이 획일적이고 단일한 문화를 가진 사회가 아니며 그랬던 적도 없다. 동남아시아와 다른 지역으로 이주한 중국인 이민자들은 대부분 중국 남부 출신이었다. 자칭 최초의 차이나타운인 비논도에 살다가 마닐라 대학살의 희생자가 된중국인 이민자들은 베이징보다 마닐라에 더 가까운 중국 남부의 해안 지역인 푸젠성에서 왔으며, 나중에는 광둥성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이주하게 된다. 당시 중국 북부에서는 남부인들이 진정한 중국인이 아니며, 남부의 해양 상인들은 모두 밀수업자에 해적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었다. 20세기 초 <아큐정전>의 작가 루쉰은 남부인들에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북부인들은 성실하고 정직하다. 남부인들은 노련하고 기민하다. 이것이 그들 각각의 미덕이다. 그러나 성실과 정직은 어리석음을 낳고, 노련함과 기민함은 이중성을 낳는다.
남부인들은 자주 이주했을 뿐만 아니라 외국인에 대한 불신이덜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복합적인데 거리적으로 동남아시아와 가깝고 중국 권력의 중심과는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이 가장 큰이유였을 것이다. 또한 불교가 이주를 문화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만드는 데 어떤 역할을 했을 수 있다. 불교는 원래 외국에서 온 것으로 여행과 순례에 중점을 두는 종교다. 북부의 대도시에서는 유교가큰 영향력을 발휘했으며, 노골적으로 정주 문화를 지지했다. 이주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공자를 인용했다. "부모님이 살아 있는 동안 아들은 먼 여행을 떠나서는 안 된다." 북부인들도 이주를 하기는 했지만 대개 중국 국경 내에서 이루어졌고, 대부분의 경우 남부로 이주해 기존에 그곳에 살고 있던 주민들의 이주를 조장했다. - P286

경제적 측면에서 보면, 중국과 인도 출신으로 ‘쿨리‘라고 불렸던 계약 노동자들은 노예제 폐지로 인해 생긴 공백을 채워줬다. 식민지행정부와 열대 지방의 지주들은 주로 새로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할 노동자를 원했지만 그 외에 철도, 도로 및 운하 건설 업계에서도일꾼을 필요로 했다. 더 이상 아프리카인들을 납치해 일을 시킬 수 없었고, 유럽인들은 대부분 더운 나라에서 육체 노동하기를 거부했다. 그리하여 새롭게 재편된 고용 시스템이 도입되었고,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들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이주해왔다. 일부는 원해서, 또 어떤 사람들은 돈을 벌 수 있다는 꼬임에 넘어가서, 어떤 이들은 노예처럼 그냥 납치된 경우도 있었다. - P292

경제가 호황일 때는 중국인들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중국인을 반대하는 쇼비니즘의 물결이 거세지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들의 노동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대부분 이민자들로 구성된 백인 노동자 노동조합은 중국 노동자들이 더 싼 노동력으로 자기들의 임금을 깎아내리고 있다고 불평했으며, 중국인 노동자들을 핑계로 파업을 단행했다. 아일랜드 이민자로 노동조합 대표였던 데니스 키어니 Denis Kearney는 모든 연설을 "중국인은 떠나야 합니다!"라는 말로 끝맺었다. 첫미국 횡단 철도가 완성되자 수천 명의 중국인들은 실직했고, 그 철도를 이용해 다수의 백인 이민자들이 대서양 연안에서 서부로 이주했다. 그리고 1870년대에 대공황이 닥쳤다.
더 이상 중국인들이 필요하지 않게 되자 중국 이민자들의 미국입국이 금지되었다. 그들은 개방된 국경을 자랑스러워하는 나라에서배제된 첫 번째 ‘인종‘이었다. 중국인 배제법에 대한 의회의 논쟁을 살펴보면 당시의 분위기를 알 수 있다. 미국 서부의 백인 정치가들은 ‘존 차이나맨‘, ‘몽골인‘ 그리고 ‘황인종‘ 같은 용어를 사용하여 과장된 인종차별주의를 주도했다. 18세기 ‘인종 과학자들에 의해 정의된 중국인이 ‘황인종‘이라는 개념은 영어와 다른 여러 언어에서 일상적인 증오 발언으로 스며들어 있었다.  - P298

19세기 말이 되자 다른 나라들도 미국을 따라 중국 이민자들에대한 제한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주로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공화국 같은 영국이 통치하는 영토들이었는데 그들은 동시에 대규모 백인 이민을 장려했다. 유럽인과 유럽 출신 사람들 사이에 중국인 혐오증이 깊게 뿌리를 내리면서 이제 중국인을 배제시키기 위한 이유로 내세웠던 경제적 핑계도 필요가 없어졌다. 논쟁은 점점 더 인종적·문명적 측면으로 진행됐는데, 어떤 면에서는오늘날의 이슬람 혐오증과 유사하다. 그리고 그 논쟁들은 백인 유럽인들이 스스로에게 이제 곧 자신들이 ‘황인종‘(중국인은 늘 포함되고, 때로는 일본인까지 포함한다)에게 압도당할 것이라고 불안해하는 더 광범위한 담론의 일부가 되었다.
‘황색 위협‘은 1890년대에 처음 언급되었고 금세 유행했다.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자신이 유럽 국가 원수들에게 보낸 석판화의 제목으로 그 문구를 만들어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유럽의 식민 열강들에게 ‘황인종의 침입‘에 저항하기 위해 연합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중국을 분할해 자신들의 제국으로 통합시켜야 한다고 부추기기도 했다. 중국과 중국인들은 유럽인들의 상상과 현실 속에서 거대한 적이 되어 있었다. - P300

전쟁이 끝난 후 많은 사람들이 여권 없는 옛 시절로 돌아가는것에 대해 낙관적으로 이야기했다. 그 이유는 아주 다양했다. 쉬테판츠바이크가 열렬히 주장했던 자유주의와 과거에 대한 향수뿐만 아니라 인도주의와 경제적 이유도 있었다. 예를 들어, 일부 경제학자들은근로자들의 국경 자유 통행이 전후 경제를 재건하는 데 중요할 뿐만아니라 자본주의의 이념적 초석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인도주의 단체들은 사람들이 내전과 박해를 피해 다른 곳에서 새로운 삶을다시 살아갈 수 있도록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새로 결성된 국제 연맹의 후원으로 1920년 파리에서 열린 제1회 국제 여권 회의는 여권 없는 이동을 지향하는 ‘완전한 제한 철폐‘ 시대를 예고했다. 그러나 각국 정부는 이주민들이 혁명과 스페인독감을 확산시키지 않을까 우려했다. 민족주의의 성장 역시 여권 폐지를 막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신생국들을 포함하여 많은 나라들은 자국을 동일한 언어·역사·문화 그리고 동일한 여권을 가진 사람들의 공동체로 규정하고 싶어 했다. - P313

팔레스타인이 아닌 곳에 조국을 건설하고자 한 시도는 그 외에도 많이 있었다. 그중 가장 유명했던 계획은 1903년 영국이 지원한우간다 계획으로 현재의 이스라엘보다 약간 작은 면적의 동아프리카 지역을 유대인 자치 정착지로 만들려고 했다. 영국인들은 그 땅이(사실은 우간다가 아니라 케냐였다) 비어 있다고 했는데, 실제로는 거주자 대부분이 유목민이었을 뿐이었다. 우간다 계획은 시온주의 운동을 분열시켰고 일부는 앙골라, 리비아, 파라과이, 아르헨티나 등 팔레스타인을 대체할 지역을 계속 찾아나섰다. 그러나 그들은 실패했다. 그이유 중 하나는 더 매력적이고 더 안전한 다른 대안 지역들이 있었기때문이다. 그중에는 폴리와 자매들이 정착한 영국이 있었고 여러 남미 국가와 남아프리카, 호주 그리고 당연히 미국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팔레스타인으로의 이주가 급증할 때에도 미국은 유럽을 떠나는 유대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목적지였다. - P327

폴리가 1919년에 팔레스타인에 타고 온 배는 ‘SS 루슬란‘으로이스라엘 건국 신화에서 ‘시온주의 메이플라워‘ 같은 중요한 역할을했고, 예루살렘 이스라엘 박물관 100주년 기념 전시회의 주제가 되었다. 루슬란의 유대인 승객 644명은 영국이 유대인 국가에 대한 지지를 발표한 후 팔레스타인에 입국한 최초의 대규모 이주민 집단이었다. 루슬란의 도착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핵심적인 순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팔레스타인으로의 새로운 유대인 이주 물결의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나중에 ‘3차 알리야‘로 알려지게 되는데, 알리야Aliyah라는 용어는 순서를 나타내는 앞의 숫자와 함께 현대 이스라엘의 이주 역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다. 그것은 한 이주 공동체가 언어를 통해 자신들을 다른 이주민 공동체와 구분하는 독특한 정체성을 만들어낸 좋은 예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알리야는 히브리어로 원래는 언덕을 올라간다는 의미에서 ‘올라가다‘ 또는 ‘오르다‘를 의미했다. 또한 종교 의식을 묘사하는 데도사용되었는데, 유대교회당에서 어떤 사람이 토라가 보관되어 있는곳으로 ‘올라간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19세기가 되어 알리야는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주도 의미하게 되었다. 1920년대에 이 단어는 좀더 구체적으로 이념적 함축성을 갖게 되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는 유대인은 이주를 통해 애국 행위를 하거나 신성한 의무를 수행하는 것처럼 느끼게 되었다. 알리야는 과거에 이주를 의미하는 히브리어였던 하기라hagira와는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고, 하기라는 그후에 유대인이 이기적인 이유로 이주한다는 의미를 갖거나 아니면 유대인이아닌 이주민들의 이주를 표현할 때 사용되었다. 알리야는 생활 방식의 선택이 아닌 도덕적 의무로 변모했고 이는 단순한 이주 행위가 아니라 귀환 행위가 되었다. - P328

"예리다 verida‘는 폴리처럼 결국 팔레스타인을 떠나게 되는 유대인의 행동을 표현하는 히브리어 단어다. 예리다는 ‘내려가다‘라는 뜻으로 알리야의 정반대의 의미이며, 약속의 땅에서 이주해나간다는뜻이다. 이스라엘에서 이 단어는 배교와 반역이 기저에 깔려 있는 실망감을 내포하는 아주 부정적 의미가 되었다. 1974년에 팔레스타인태생으로는 처음으로 이스라엘 총리가 된 이츠하크 라빈 Yitzhak Rabin(그의 어머니는 폴리와 함께 루슬란 호를 타고 왔다)은 약속의 땅에서 떠나가는 이주민들을 ‘의지 박약 낙오자‘라고 불렀다. 그러나 예리다는21세기에도 계속되고 있으며, 그 비율은 알리야보다 낮지만 그래도일부 시온주의자들에게는 충분히 당혹스러운 문제였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이를 이스라엘 국민들과 그들의 기술이 수출될 만큼 세계화에 걸맞게 성장했다는 반가운 신호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 P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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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과거는 여전히 나를 사로잡고 있었다. 사이렌 소리나, 육중한 발걸음 소리나, 소리 지르는 남자들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불안하고 어지러웠다. 나는 이것이 ‘트라우마 Trauma‘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트라우마는 어떤 일이 잘못됐다거나 어떤 끔찍한 일이 곧 발생할 것이라고 직감으로 거의 항상 느끼는 것이다. 또한 신체의 자동적 공포반응이 내게 도망치고 피하고 모든 곳에 존재하는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숨기라고 말하는 것이다. 내 트라우마는 여전히 일상적인 만남으로 인해 촉발될 수 있다. 갑작스러운 풍경, 특정한 냄새는 나를 과거로 송환시킬 수 있다. 제이슨 풀러 대위를 만났을 때는 내가 홀로코스트의 강제수용소에서 해방된 지 30년 이상 흐른 뒤였다. 현재는 70년 이상의 시간이 흘렀다. 과거에 일어난 일은 절대로 잊히거나 바뀔 수 없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내가 과거에 어떻게 대응할지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나는 비참할 수도, 희망찰 수도 있다. 나는 우울할 수도, 행복할 수도 있다. 우리는 항상 이 선택권을 가지고있다. 통제를 위한 기회 말이다. ‘나는 여기에 있어. 바로 지금.‘ 나는공황 상태에 빠진 감정이 가라앉기 시작할 때까지 나 자신에게 반복해서 이렇게 말하는 법을 배웠다. - P21

나는 그저 완전히 미국적인 멋쟁이가 되고 싶었다. 강한 헝가리 억양을 사용하지 않고 영어를 구사하고 싶었다. 과거로부터 숨고 싶었다. 어딘가에 소속되고 싶다는 열망 속에서, 과거에 잡아먹힐지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나는 내 고통을 계속 감추기 위해 매우 열심히노력했다. 나는 나의 침묵과 나의 인정욕구(둘 다 두려움에 기반하고있다)가 나 자신으로부터 도망치는 수단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과거 그리고 나 자신과 똑바로 대면하지 않기로 선택함으로써, 실제 감옥생활이 끝난 지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감옥에 갇혀 있기로 선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나는 비밀을 가졌고 비밀은나를 가졌다.
상담실 소파에 꿈쩍도 하지 않은 채 앉아 있던 미 육군 대위는 내가 마침내 알게 된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다. 우리가 우리의 진실과 이야기를 억지로 숨길 때, 비밀들은 그것 자체로 트라우마가 되고 그것자체로 감옥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수용하기 거부하는 것들은 고통을 줄여주기는커녕 감옥의 벽돌 담장과 쇠창살처럼 우리를 감옥에 가두고 절대 탈출할 수 없게 만든다. 우리가 자신에게 자신의 상실, 상처, 실망을 애도하도록 허용하지 않을 때, 우리는 이것들을 계속 다시 체험해야 하는 운명에 처하고 만다.
자유는 이미 벌어진 일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것에 놓여 있다. 자유는 우리가 용기를 모아 감옥을 해체하는 것을 의미한다. 벽돌 하나씩 하나씩 말이다. - P22

스스로 자유를 향한 탐색을 하고 오랜 기간 전문 임상심리학자로경험을 쌓은 결과 나는 고통이 보편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하지만 희생자 의식은 선택적이다. 희생되는 것Victimization과 희생자 의식Victimhood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다. 우리는 모두 삶의 과정에서 어떤식으로든 희생될 수 있다. 어떤 시점에 우리는 어떤 종류의 고통이나 재앙, 학대를 겪을 것이다. 우리가 통제권을 거의 혹은 전혀 가지지 못하는 상황이나 사람이나 제도에 의해 말이다. 이것이 인생이다. 그리고 이것은 ‘희생되는 것‘의 예이다. 이것은 외부로부터 발생한다. 이웃의 괴롭힘, 분노하는 상사, 폭력을 행사하는 배우자, 바람을 피우는 연인 차별적인 법률, 뜻밖의 사고 등이 이런 경우이다.
이에 반해, 희생자 의식은 내면으로부터 발생한다. 자기 자신을 제외한 그 누구도 우리를 희생자로 만들 수 없다. 우리는 우리에게 벌어진일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희생된 사실에 집착하기로 선택할 때 희생자가 된다. 우리는 희생자의 사고방식을 키운다. 완고하고, 남을 탓하고, 비관적이고, 과거에 갇혀 있고, 용서하지 않으려 하고, 가혹하고, 건강한 한계나 경계가 없는 사고방식과 존재 방식이다. 우리는 희생자의 사고방식에 갇히기로 선택할 때 자기 자신을 감옥에 가두고 스스로 간수가 된다. -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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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초기 백인으로 이루어진 영국인 이민자들에게는 중요한 기술도 응집력도 공동의 목적도 없었다. 여성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가정도 일구지 못해 뉴잉글랜드의 상황과는 대조적이었다. 제임스타운은 식량도 부족했고 여러 문제가 있었지만 지휘 체계 또한 엉망이었다. 당시 기록을 살펴보면 정착민들이 서로 다투느라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냈는지를 알 수 있다. 일부 젊은 이주민들은 제임스타운에서 달아나 인근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을 찾아갔다. 이는 버지니아 이주초기의 중요한 특징이 되었는데, 뉴잉글랜드 정착민 사이에서는 없었던 일이었다. 이탈자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많은 이들이 원주민 부족의 환영을 받았으며, 특히 무기를가지고 가는 이들을 반겼다고 한다. 대부분의 아메리카 원주민들은새 유럽인 식구들이 부족에 통합되기만 하면 인종에 대해서는 거의 상관하지 않았던 듯하다.
반면에 아메리카 원주민이 점점 커지고 있는 영국인 정착지에자의로 합류하는 일은 드물었다. 벤자민 프랭클린의 글을 통해 그때의 상황을 가늠해볼 수 있다.

인디언 아이가 우리들 사이에서 자라며 우리의 언어를 배우고 우리의관습에 길들여진다 해도, 그가 친척들을 만나러 가서 그들과 함께 인디언식 산책을 한 번이라도 하고 나면 돌아오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나) 백인은 남녀 불문하고 어린 나이에 인디언들에게 포로로 잡혀 한동안 그들과 함께 살고 나면, 친구들이 몸값을 지불하고 다시 영국인들사이에 머물도록 만들기 위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애정을 베풀어도그들은 어느새 우리의 삶의 방식과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걱정과 수고에 혐오감을 느끼고, 기회가 생기기만 하면 바로 숲속으로 탈출하며, 다시는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는다.

제임스타운에는 ‘숲속으로‘ 탈출하여 다시는 돌아오지 않은 영국 이주민들의 사례가 많이 있다. 그러나 그 반대의 예는 하나뿐이다. 바로 포타혼타스다. - P242

1924년에 버지니아에서는 타 인종 간 결혼을 금지하는 법이 다시 도입되었다. 그 법에 따르면 백인이 아닌 조상이 있는 사람은 백인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는 버지니아 명문가들을 장악하고 있던 수천 명의 포카혼타스 후손들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인디언혈통이 1/16 이하인 사람들은 법적으로 백인으로 간주되는 이른바 포카혼타스 조항이 이 법에 추가되었다. - P246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이 시간의 개념을 어떻게 생각하는가하는 문제도 이 논쟁에 끼어든다. 우리가 과거와 현재의 경계를 조사하려고 하는 순간, 현재는 어느 틈에 지나가버리고 우리가 온전히 체협하기도 전에 과거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특히 노예제도나 제국주의 같은 역사적 불의에 대해 거론할 때 과거에 선을 긋는다거나, 모든 것을 백지로 돌리고 새로 시작한다는 말들을 많이 한다. 마치현재가 과거와 깨끗이 분리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그것이 현실적이라거나 또는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역사는 우리의 살아 있는 일부이며, 학교나 박물관에서 배울 수있는 것을 훨씬 넘어선다. 역사는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근원이기때문에 묻어버려서는 안 된다. 이주, 노예제도, 인종차별, 불의 또는 민족주의에 관한 모든 토론에도 우리의 역사는 등장한다. 나는 과거의 역사에 의문을 표하고 이의를 제기하고, 알려지지 않은 역사를 찾고 그것들에 대해 말하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노력의 시작으로 그 역사들이 일부 누락되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 P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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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나는 비밀을 가졌고, 비밀은 나를 가졌다

나는 장전된 권총이 그의 셔츠 아래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1980년 여름, 육군 대위 제이슨 풀러가 나의 엘파소 상담실에 걸어 들어오는 순간, 나는 갑자기 내장이 조여들고 목 뒤가 따끔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전쟁은 내게 위험을 감지하는 법을 가르쳐줬다. 심지어 왜 내가 두려워하는지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기 전에도 말이다. -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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