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릿 베어 양철북 청소년문학 14
벤 마이켈슨 지음, 정미영 옮김 / 양철북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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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폭 업무를 오래 담당하시고 학생, 학부모 상담 쪽으로도 동료들에게 도움을 많이 주시는 선생님께서 이 책을 강추하는 글을 쓰신 걸 봤다. 내게도 필요한 내용일 것 같아 사서 읽었다. 그 선생님이 어떤 포인트에서 추천하시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경험이 편협한데도 그걸 가지고 아이들을 함부로 재단한 적이 많았다. 부끄럽게 생각한다. 사실 교직경력이 30년이 다 되어가니 경험이 적다고는 볼 수 없지만 다양한 경험을 많이 해보진 않았다. 특히 극단에 몰린 삶을 들여다보는 경험은 거의 해보지 못했다. 극악한 인간을 경험해본 적도 거의 없다. 있다면 방송이나 건너 들은 이야기 정도.... 그런데도 사람은 긍정적인 사례보다 부정적 사례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생존 본능이 아닐까라고도 생각한다. 그래선지 나는 용서보다도 징벌 쪽에 조금 더 마음이 가 있는 것 같다. 상상 속에서만... 실제로 누구에게 징벌을 내려본 적은 없다.

 

사람을 바꾸기는 어렵다고 한다. 그리고 본디 악한 인간도 있다고 한다. 어떤 연쇄살인범은 쾌락으로 살인을 자행했고, 교도소에 갇혀 더 이상 살인을 할 수 없게 되자 그 금단증상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그의 문제는 뇌의 문제일까? 어쨌든 대단히 드문 특수한 경우일 것이다. 하지만 이정도까지는 아니라도 양심을 발견하기 어려운 사람들은 꽤 있는 것 같다. 그런 사람들을 사회는 어떻게 대해야 할까?

 

이 책이 한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가능성 뿐 아니라 인간의 마음이 완악해지고 부드러워지는, 분노에 불타고 해소되는 원리를 잘 알려준다고도 생각한다. 그 과정에 심히 공감하기도 하고 그 변화가 좀 갑작스럽게 느껴지거나 대사가 약간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건 이야기니까.... 실제로는 이보다 더 빠른 변화를 보일 수도 있고 결국 끝까지 안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정도면 납득되는 결말이라고 생각한다.

 

콜 매슈스라는 청소년이 있다. 온갖 비행 끝에 동급생을 죽기 직전까지 폭행해서 법정에 섰다. 그에게 징역형 대신 회복을 꾀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주어졌는데, ‘원형 평결 심사를 통해 1년간 무인도에서 생활하며 고난을 통해 성찰의 시간을 갖게 하자는 판결이 내려진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를 돕는 어른들에게도 싸가지없게 구는 콜을 보면 그냥 감옥에 처넣지 뭐하러 애쓰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하지만 그의 분노의 근원을 보면 슬퍼진다. 고고한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행한 폭력, 그리고 그걸 외면한 어머니. 주변에서도 종종 찾아볼 수 있는 사례이기에 더욱 두려워진다. 가정폭력은 자녀의 정서를 무너뜨리고 철저히 짓밟는다. 그가 고통에 흐느끼다 눈을 들어 먹잇감을 발견한 순간, 그 대상은 이유도 알 수 없는 희생양이 되어 새로운 폭력에 짓밟힌다. 이 책의 피터처럼. 그의 부서진 몸은 완전히 회복될 수 없었고 두통과 우울증에 시달렸으며 몇차례 자살시도까지 하게 된다. 이토록 상황이 망가졌는데도 회복은 있을 수 있을까? 용서가 가능할까?

 

콜을 보니 인간은 변하긴 변한다. 하지만 그 변화의 시점은 다르다. 물체의 무게가 무거울수록 더 큰 힘이 가해져야 움직일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의 변화도 그런 것 같다. 문제는 그 시작점까지 가는 에너지가 너무 클 경우, 대다수는 포기하게 된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나다. 그런 힘든 사례를 겪은 적은 없지만 나의 평소 성향상 그럴 것 같다.ㅠㅠ

 

그 큰 에너지를 이 책에서는 만들어냈다. 한 청소년의 갱생을 위해서 시간과 노력과 마음을 투자한 두 어른(에드윈과 가비)의 수고가 대표적이다. 그 뒤에 숨겨진 이들의 수고, 그리고 원형 평결 심사의 절차를 실행하는 시스템도 그 에너지에 보탬이 되었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콜 본인이 죽음의 문턱까지 간 극한의 상황에서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고 느끼는 체험을 했다는 것. 진심으로 뉘우쳤다는 것. 콜과 피터가 직면하고 마주봤다는 것. (둘이 섬에서 만남. 그걸 허락하고 피터를 데려온 부모님도 대단하다 생각했음)

 

우리 사회도 이런 걸 생각해보면 어떨까 한다. 움직임이 시작될 때까지의 에너지를 어떻게 끌어올릴 것인가? 콜의 사례에서 봤듯이 한 사람의 친절 정도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에드윈과 가비, 그리고 그 배후의 여러사람들처럼 협업이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에 지혜를 모으는 사회였으면 좋겠다.

 

읽으면서 몇군데 표시해놓은 문장이 있는데 그 중 한 부분만 덧붙여본다.

 

그래 뭘 배웠니?”

용서하는 거요. 화를 내는 건 누군가에게 저를 맘대로 쥐고 흔들라고 송두리째 내맡기는 거예요. 용서하는 건 제가 다시 제 감정을 추스르는 거라고 생각해요.”

...... “아직이요. 아직도 뭔가 부족해요. 후회나 용서로는 채워지지 않는 게 있어요. 피터를 돕는 길을 어떻게든 찾아봐야겠어요. 그걸 찾아내야만 저 자신도 완전히 치유될 수 있는 거죠. 그렇죠?”

피터의 치유를 도우려면 네 뇌리에 살점처럼 들러붙어 피를 말리는 고통을 감수해야 한단다. 그애한테 끼친 해를 보상하지 않으면 그게 네 목숨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못살게 굴 거야.”

그런데 제가 피터를 도울 수 없다면 어쩌죠?”

그렇다면 피터 대신 다른 누군가를 도와야겠지.”

 

이렇듯 인생에 공짜는 없다. 책임 안 져도 되는 인생은 없는 것이다. 관성의 법칙처럼 나다운 결론을 내리며 리뷰를 마친다. 이 책의 속편도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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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모나는 아빠를 사랑해 열린어린이 창작동화 11
비벌리 클리어리 지음, 트레이시 도클레이 그림, 김난령 옮김 / 열린어린이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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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도서관이 방학 중 휴관이라고 해서 급히 몇권을 빌려나온 중에 이 책이 있었다. 책에 대한 정보는 전혀 없었고 작가 이름만 보고 집어들었다. 비벌리 클리어리. 헨쇼 선생님께의 작가네. 게다가 뉴베리아너상 딱지까지 붙어있으니 믿고 읽으면 되겠지 생각했다.

 

수상작 치고는 작고 아기자기한 느낌이다. 무게감 있는 책에만 상을 주라는 법은 없으니. 제목에서 느낌이 오다시피 가족의 따뜻한 이야기다. 나온지 10년이 넘었긴 한데, 원작은 그보다 더 전인 것 같지만..... 그래도 아득한 먼 날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이제 다시 돌아갈 일 없는 날..... 하긴 최근 1,2년 사이에도 세상은 너무나 달라졌으니.

 

엄마, 아빠, 언니, 동생으로 구성된 라모나네 집은 평범한 서민가정이다. 아빠는 직장에 나가고 엄마는 시간제 일을 하고 딸들은 학교에 다니고. 가끔씩 슈퍼버거에서 외식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그 평범한 행복은 아빠의 실직으로 위기에 빠졌다.

 

언니 비저스는 사춘기라 까칠하지만 밖에서는 제 할 일을 잘하는 야무진 학생이다. 반면 라모나는 엉뚱하고 어디로 튈지 모른다. 말괄량이 삐삐 정도로 극단의 캐릭터는 아니지만 하여간 어른들 눈에는 꽤 골칫거리로 보일 수 있는 캐릭터. 이 가족이 아빠의 실직이라는 가정의 위기를 극복하면서 자신들의 욕구를 표출하고 조정해가는 과정이 평범한 듯 대단하다. 대단하다는 건 나라면 그러기 어려웠을 것 같기에.

 

가장 중요한 역할은 엄마. 아빠를 대신해 전일제 직업에 뛰어든 엄마는 늘 피곤하다. 하지만 일을 마치고 들어와서 집안에 벌어져 있는 작은 사고들에 웃어주는 여유를 갖고 있다. 왜 그런 걸 요구하냐고, 엄마 개인의 삶은 어디 있냐고 항의한다면 할 말은 없다.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까. 자기 편한대로 하고 대신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으면 된다. 하지만 이 엄마는 애를 많이 썼다. 특히 라모나가 성탄절 연극에서 철없게도 의상이 필요한 양 역할을 맡아왔을 때, 엄마가 도와줄 시간이 없다는 점을 알려주긴 했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함께 준비해 주었다. 이 대목에서 나는 엄마로서 부끄러웠다. 일만으로도 피곤한데 그까짓게 뭐라고 일거리를 더 만드냐면서 화를 낼 만도 한데.... 자식을 키우면서 어느 정도의 노고는 감수할 각오를 하는게 맞다고 본다. 내가 꼰대라서인지도 모르지만. 아니 내가 왜? 내 삶은 어디있어? 라고 화를 내는 엄마들을 보면서 조금 안타까운 적도 있었다. 당신 삶이 뭔데. 자식과 함께 하는 삶은 당신 삶이 아니야? 원래 가장 소중한 곳에 시간과 노력을 쓰는 법이잖아. 그정도 노력도 하기 싫다는 거야? 반면 너무 자식에게 매달려 모든 것을 거는 것도 건강치 못하다. 그 적정선을 찾기는 참 어려운 것 같다. 나는 이미 지나온 길, 후회도 되는 그 길이지만 다시 걷는다면 라모나 엄마의 긍정적 열심을 본받고 싶다.

 

실업급여를 받고 구직을 하며 집에 있는 아빠. 부정적이 되고 폐인되기 딱 좋은 상황. 살짝살짝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중심을 잡으려 애쓴다. 결국은 공백을 잘 이겨내고 재취업에 성공했다. 그 시간동안 집에서 딸들과 부대끼는 모습은 재미있었다. 특히 금연을 놓고 실랑이하는 모습이. 애연가인 아빠에게 그럼 아빠는 담배 살 돈은 어디서 났대요?” 라는 언니의 말은 아주 큰 도발일 수도 있었는데. 보통은 사소한 상처가 파국까지 치닫기도 하는데 말이다. 아빠의 금연을 위한 딸들의 대작전은 귀여웠다. 이 책을 아이들과 읽을 수 있다면 흡연예방교육은 이것으로 퉁쳐도 될 것 같다.ㅎㅎ

 

그리고 주인공 라모나. 정신없는 사고뭉치. 하지만 그건 끊임없는 시도, 도전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으니 미워할 수 없는 인물이다. 라모나 때문에 골치아프고 라모나 때문에 일거리가 생기고. 그렇지만 라모나 때문에 에너지가 충전되는 것도 사실이다. 교실에도 이런 아이가 있다. 맘 속으로 저런 웬수.’ 라고 말하지만 절대 미워하지는 않는 아이.

 

이런저런 소소한 에피소드들로 이루어진 이 책은 마지막에 성탄절 공연으로 끝맺는다. 엄마가 만들어준 양옷을 입고 무대에 오른 라모나를 보여주며. 이 공연 장면이 내게는 아득히 먼 옛날이야기 같았다. 코로나 전에도 성탄절 분위기는 점점 따스함을 잃어갔지만 코로나 이후는 더 말할 것도 없겠지. 우리가 추억하던 일들을 우리는 다시 볼 수 있을까? 말 그대로 추억으로 박제되어버린 것일까?ㅠㅠ

 

일시적이긴 하지만 궁핍에 빠졌던 한 가정이 자신과 서로의 감정을 잘 조율하며 터널을 통과하고, 그 터널시기도 그렇게 어둡지만은 않았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한 팀이 되어 역경을 헤치는 가족의 모습은 아무리 소소해도 감동이 있다. 부모님이 읽고 자녀에게 권해줄 수 있는 책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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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번째 노란 벤치 - 2021년 제27회 황금도깨비상 수상작 일공일삼 34
은영 지음, 메 그림 / 비룡소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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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마지막 문장이 평범하면서도 모든 것을 다 담고 있다고 느낀다.

그 온기 속에서 아이들이 자랐으면 좋겠습니다.”

지금의 세상은 아이들에게 온기를 주는 세상일까.

교실을 가지고 얘기해본다면, 나 어릴적 아침부터 나무와 조개탄을 배급받아 난로를 피우던 교실은 손가락이 곱을 정도로 추웠다. 지금은 온풍기 버튼 하나면 금방 훈훈해진다.

그때는 선생님이 무서웠다. 선생님 명령이 법이었다. 지금 선생님들은 대체로 부드럽고 명령보다는 권유형 문장을 사용한다. 하지만 왠지, (과거가 아름다운 원리 때문인지는 몰라도) 온기는 그때가 더 있었던 것 같다. 지금의 세상은 서늘하다. 냉기가 지배하는 세상이랄까. 아마 갈수록 더 그럴 것 같다.

 

그 이유를 연결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이 하는 이야기도 그것이다. 각각이던 존재들이 이어지면서, 크리스마스 트리의 작은 전구들처럼 하나하나 불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깜빡 깜빡. 그 깜빡임이 아름다운 책이다. 전류는 강하지 않고 빛의 세기도 별것 아니다. 하지만 불꺼진 트리와 반짝이는 트리는 완전히 다른 존재다. 그 전선이 연결되는 공간을 작가는 아주 감각적이고 예쁘게 설정해 놓았고, 그걸 제목으로 삼았다. <일곱 번째 노란 벤치>

 

이 책 1부의 제목은 평범한 수식이다. 4-2-1=1. 이 수식은 지금 지후의 상황을 알려준다. 지후네 4식구 중 엄마 아빠는 바쁜 사정으로 거의 없는거나 마찬가지. 그래서 남은 두 식구, 즉 할머니와 지후는 이 노란 벤치에 곧잘 오곤 했다. 지금은 지후 혼자 앉아있다. 할머니마저 돌아가셨기 때문.

 

하지만 지후는 이 노란 벤치에서 여러 존재들과 연결된다. 가장 먼저 봉수. 한쪽 눈 주변만 까매서 해적을 연상시키는 외모의, 마치 웃는 것 같은 표정으로 사람을 반기는 개다.

다음은 해나. 겁없고 당당한 태도로 지후를 여러번 위기에서 구해준다. 이렇게 멋진데 학교에서는 친구가 없다고....

그리고 할아버지. 길잃은 봉수의 임시 보호자. 사연을 들어보니 봉수는 지금은 세상에 없는 할아버지 동생의 이름.

유모차 할머니. 유모차에 아기는 없다. 혼자 걷기 힘드셔서 유모차에 의지해 공원을 산책하신다.

검은 모자 아저씨. 말없이 공원을 돌기만 해서 좀 무섭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따뜻한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알고보니 아저씨라기보단 형이었고, 좀처럼 말을 하지 않게 된 사연은 참 슬프다. 가정에서 홀로 상처받으며 커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대변한다.

지후네 아랫집 18층 아주머니. 지후가 사촌동생에게 마귀할멈이라 말할 정도로 못된 인상이다. 하지만 가장 큰 반전을 가진 인물.

 

그리고 악역도 한 명 있다. 그게 현실적이다. 세상엔 확률적으로 악인도 꽤 있으니까. 동물을 학대하는 아저씨. 그가 개들을 함부로 다루는 장면에서 숨이 막히는 느낌이었다. 그 마수가 봉수에게도 뻗치는데, 그때가 이 이야기의 클라이막스라 하겠다.

 

에필로그에서 보여주는 <일곱 번째 노란 벤치>는 흐뭇하고 따스하며 안정감 있다. 4-2-1=1의 수식은 이제 바꾸어야 할 같다. 이 책에 많이 등장하지는 않으셨지만 이 따스함의 근원은 마지막 1, 즉 할머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할머니의 보살핌, 그리고 지후를 재우며 조용히 말씀하셨던 할머니의 확신에 찬 말씀이 지후를 지탱하고 서게 했다.

작고 여려 보이지만 속이 깊고 강한 아이야. 그러니 걱정할 필요가 없어.”

그동안 바빴던 엄마는 돌아가신 할머니께 고마워하겠지만 이런 것까지는 모를 것이다. 이런 사랑을 주실 할머니들도 점점 줄어들어가는 것 아닐까 모르겠다. 그 연결도 다 끊어져가는 사회니까 말이다.

 

귀찮음이냐 외로움이냐.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하곤 했다. 그리고 워낙 귀찮은 걸 싫어하는 성격 탓에 차라리 외로움을 선택하지 뭐.’ 라는 생각이 강했다. 요즘 사람들의 그런 생각이 아이들을 ‘1’로 만드는 것이 아닌가 이 책을 읽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모든 연결을 끊어버리는, 눈에 보이진 않지만 잔인한 짓. 코로나로 이 단절은 더욱 심해지고만 있으니 어쩌면 좋을까.

 

이 책은 글작과와 그림작가가 힘을 합쳐 독자들에게 온기를 보내주려고 애를 쓰는 느낌이다. 만화를 그리신다는 그림작가는 세상의 따스한 색을 모아 일곱 번째 노란 벤치와 그 주변의 정경을 그렸다. 가끔씩 들어있는 만화 페이지도 정겹고 재밌다.

 

이 책에는 뭔가 대단한 이야기가 들어있진 않지만 소소한 인물들과 소소한 에피소드들이 모여 많은 이야깃거리들을 담아냈다. 아이들과 함께 읽다보면 각기 어떤 부분에선가는 크게 공감할 것이다. 주인공 지후의 학년인 4학년, 그리고 에필로그에 나오는 1년후 5학년 아이들 수준에 가장 적절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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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고 아리고 여려서
스미노 요루 지음, 양윤옥 옮김 / ㈜소미미디어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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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에 보면 그 책의 구입자 분포가 성별, 연령별로 나오는데, 내가 보는 책들(주로 어린이책, 교육서적)의 분포는 대부분 40대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다. 이 책의 분포는 20대 남자가 가장 많았다. ? 20대 남자가 많은 책도 있구나.ㅎㅎㅎ 신기해서 검색해보니 이 작가의 책 대부분이 그렇다. , 젊은 취향이구나.

 

집에 책이 있는데도 왠지 안읽고 싶어서 한참을 묵혔던 책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를 읽은 후 이 작가의 책을 두 권 더 읽었다. 또다시 같은 꿈을 꾸었어와 이 책이다. 둘다 괜찮았다. 작가의 섬세한 필체 때문인지, 이름의 느낌 때문인지 여성작가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다시 보니 남자라고 한다. 오잉, 그렇군.

 

20대 남자가 주 독자층인 이유로 짐작되는 것 중 하나. 주인공의 연령대가 그렇다. 췌장..에선 그보다 더 어렸지만, 이 책의 주인공은 대학생, 마지막엔 사회 초년생이다. 이런 책이 나에게 무슨 시사점을 주려나? 하지만 내 아들이 대학생이니 아들 또래 젊은이들을 이해하는 느낌으로 읽어볼까? 그런데 막상 읽어보니 젊은이들아~ 세상이 이렇단다 하고 가르쳐줄 만한 것이 나에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의 메시지를 나는 언제쯤 이해하게 되었을까? 잘 모르겠다. 아마 최근이 아닐까? 아니, 과연 이해는 한 걸까?

 

조금의 거리를 두고 민폐나 끼치지 말자 주의로 대학생활을 시작하는 주인공 다바타 가에데는 나와 약간 비슷한 성향이다. 공교롭게 그의 첫 대학 친구가 되는 사람은 정반대 성향의 여학생 아키요시. 이 여학생은 초딩수준의 당위를 가지고 대학수업에서 시간마다 손들고 질문하여 다른 학생들이 눈살을 찌푸리는 소위 관종이다. 좋게 말하면 순수한 이상을 가지고 있다. 아키요시는 학생식당에서 스스럼없이 가에데에게 말을 걸었고 딱히 친구가 없던 그들은 주로 같이 다니게 되었다. 그러다 아키요시의 제안으로 모아이라는 동아리를 만든다. 두사람이 설립자이고 어쩌다보니 한 사람을 더 영입하게 되었고 그 다음은....

 

중간 과정이 생략된 채 지금 시점은 대학 4학년. 취업준비에 여념이 없다. 가에데도 대량 도전 끝에 겨우 한 회사에 취업이 확정됐다. 이제 남은 대학생활을 좀 여유있게 마무리하려 하는데....

눈앞에 닥친 현실의 문제에서 잠시라도 벗어나자 가에데의 눈에 그 풋내기 시절, 아키요시와 만들었던 동아리 모아이가 의식되기 시작했다. 꿈같은 이상을 표방하며 만들었던 동아리는 하나 둘 멤버가 영입되기 시작하며 예상과는 다르게 번창하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불편함을 느낀 가에데는 이미 탈퇴한 지 한참 되었다. 설립자이지만 일찌감치 손을 턴 셈이다. 이제 모아이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가장 크고 유명한 조직이 되어버렸고, 그 옛날의 이상은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남아있는 것은 취업을 위한 정보와 사교 모임. 현실적 필요를 채워주는 거대 조직이다. 여러 가지 불미스러운 소문도 들린다. 가에데는 새삼스러운 사명감(?)에 불탄다. 그 조직을 단죄(?)하겠다는....

 

이 작가는 추리작가는 아니지만 요령껏 복선을 살짝씩만 보여주며 독자들을 궁금하게 한다. 지금의 시점에서 아키요시는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니라고 가에데는 말했다. 아 죽었나보구나 왜 죽었을까....? 하는 궁금증은 결말에 다다르자 아 이렇게 상처받았구나 그래서 자살했나...? 까지 이르는데.... 내가 예상한 건 너무 흔한 결말이었고 절대로 그렇게 끝나지는 않았다. 극적이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훨씬 더 좋은 결말이었다.

 

가에데가 본 모아이의 변질, 그래 변질이 맞을 것이다. 그런데 그걸 단죄하겠다고 덤비는 가에데의 가소로움은 또 어떠한가? 그는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 ‘모아이는 도처에 있다. 일본의 대학생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고 한국의, 나의 세대 중년들에게도 있다. 그 모아이를 어쩌면 좋은가? 자신의 밑바닥을 나중에서야 깨달은 가에데는 결국 참으로 가당치 않은 짓을 한 셈이지만, 그렇다고 에이 내 주제에 뭘, 세상이 다 그런거지." 라는 태도는 옳을까? 아들뻘들이 즐겨 읽는다는 이 소설을 읽고 나는 우리 중년들의 모습을 생각한다.

 

분노가 격해지다보면 오로지 상대방을 상처입히겠다는 목적으로만 말을 내뱉을 때가 있다. ”그래 좋아. 너의 목적은 이루었어. 상대방은 상처받았어. 그런데 너는? 너는 얻은 것이 무엇이지?“ 읽던 중 이런 생각도 하게 되었고.... 순수한 이상과 현실의 괜찮은 타협은 어떤 걸까 이런 생각도 좀 하게 되고.... 복잡한 스토리는 아니지만 꽤 이런저런 생각은 하게 되었다. 좀 늦은 감이 있어도 자신의 꼬라지를 발견하는 가에데는 그래도 꽤 준수한 사람이다.

 

이 작가의 최신작이 알라딘 대문에서 자주 보인다. 노란색 표지의 단편이고 꽤 경쾌한 사회 초년생의 이야기인 것 같다. 이 책은 안 읽을래. 배아플 것 같아..... 이제 나는 늙은이들이 나오는 책을 읽으러 가보겠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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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바로 화난 거야! 울퉁불퉁 어린이 감성 동화 4
톤 텔레헨 지음, 마르크 부타방 그림, 성미경 옮김 / 분홍고래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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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동화라서 저학년용으로 분류되어 있는 걸 볼 수 있다. 물론 저학년도 읽을 수 있고 재미있다고 여길 수도 있고 나름대로 해석도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어렵다는 것이야... 난 어른인데도 말이지....ㅎㅎ 전편인 『너도 화가 났어?』도 어떤 장은 읭? 뭐지? 하면서 좀 어리둥절하기도 했는데 이 책도 비슷하다. 그건 작가의 경향인 것 같다. 작가는 정신과 의사이기도 하다는데, 그래서인지 인간의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을 작품 안에 상징적으로,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녹여내는 것 같다. 그러니까 당연히 딱 떨어지진 않는 것이다. 인간의 감정이란게 원래 그런 거니까!

요즘 감정에 대한 책들이 많고 이름붙이고 규정하는 내용도 많이 볼 수 있는데 이 책은 다른 느낌이다. 이런 감정 어떻게 생각해? 경험해 봤어? 공감이 가? 그럼 니가 한번 이름 붙여 봐. 이런 느낌이다.^^

제목을 보고, 모든 상황이 다 ‘화’로 귀결되는가보다 생각했다. 화의 다양한 양상을 다룬다고. 그리고 “그래, 그 모든 게 ‘화’야.” 이렇게 설명해주는 책일 거라 예상했는데 그렇진 않은 것 같다. 때론 설명하기 어렵고 규정하기는 더 어려운 감정들도 있다. 물론 그것들을 모아 화라고 퉁칠 수도 있지만 의미는 없다.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니까.

이 책엔 10편의 짧은 이야기가 담겼고, 각 동물들을 제목으로 하고 있다.

두꺼비에게 괴롭힘을 당한 동물들은 화를 내지만 두꺼비는 그게 화가 아니라고 단정한다. 동물들도 우왕좌왕한다. 그들의 분위기가 침울하고 심각하다. 자신의 감정이 규정되지 않는다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이라는 것인가....

다람쥐는 전작에서도 이 책에서도 착하게 나온다. 다람쥐는 떠난 개미를 그리워하고 있다. 그리고 애써 개미를 변호한다. 하지만 울고 화내는 벽.... 이건 다람쥐의 또 다른 마음이라고 해석해도 좋을까? 안될 건 없겠지. 내 마음이니까.

뱀은 이래도 화내고 저래도 화낸다. 주변 동물들은 이제 화내는 뱀에게 익숙하여 그러려니 하면서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래 니말이 맞어~ 해준다. 그러면 뱀은 더더욱 화를 낸다. 살면서 이런 사람을(아이를...) 가끔 보았다. 어떻게 해주면 좋을까?

코끼리는 다람쥐에게 춤을 청했다. 하지만 걱정이 있다. 발을 밟거나 돌리다가 다치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람쥐는 화내지 않겠다는 약속을 끝까지 지킨다. 코끼리는 점점 위험한 동작을 조절할 수 있게 된다. “늘 이렇게 춤을 출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다람쥐의 인내가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던 일. 이게 가능한 경우는 얼마나 될까. 내가 다람쥐가 되어주긴 쉽지 않으니.

사마귀는 파티에 입고 갈 단벌 외투가 찢어져서 화가 난다. 수습하려다 문제만 커져서 더 화가 난다. 자신을 흉보는 동물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냥 다 포기하고 모자만 쓴 채 파티에 간다. 그런데 동물들은 그의 위풍당당한 모습에 자신들이 더 초라하다고 느껴 외투를 벗기까지한다. 이건 무슨 감정이지.....?^^;;;;;

개미 편도 있다. 다람쥐가 찾아오기 전까지 개미 주변에서는 ‘화 덩어리’가 점점 커지며 개미를 무력하게 하고 두통에 시달리게 했다. 다람쥐가 들어와 “나랑 놀래?”라고 하자 화 덩어리는 쪼그라들더니 집 밖으로 빠져나가버렸다. 이 장면은 상당히 감각적이다. 이해도 쉽다. 물론 실제가 이렇게 쉽진 않지만, 그 원리에는 공감한다. 혼자서 고통에 침잠해가는 이들은 이렇게 꺼내주어야 한다. 누구라도 겪을 수 있는 일이니 서로서로.

메뚜기는 외투 가게를 한다. 지금은 여름이라 찾아오는 손님이 없다. 어째야 할까? 겨울까지 기다리든가, 여름에 맞는 종목을 시작하든가 해야겠지? 하지만 메뚜기는 “오늘 엄청 추워요”라는 표지판을 거는 것처럼 현실을 부정하기만 한다. 스스로만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남에게까지 강요하는 셈이다. 여름의 막바지에 메뚜기는 힘겨움을 참지 못하고 가게문을 닫는다. 그리고 외투 더미 밑에 깔려 모든 걸 포기한다. 이 장의 상황은 적절한 비유인 것 같다. 매우 다양하게 발생되는 흔한 상황이다. 말이 쉽지 극복하기 어려운 상황이기도 하고.

백조 편의 주인공은 백조가 아니었다. 백조의 생일파티를 망친 개구리는 백조의 원망을 받았다. 그러면 개구리가 주인공인가? 아니 고슴도치였다. 고슴도치는 백조의 원망을 받는 개구리, 또 백조의 용서를 받는 개구리를 보면서 나는 뭔가... 나는 아무것도 아닌가 하는 생각에 씁쓸했던 것 같다. 이 대목도 뭔가 이해가 갈 것 같다. 어떤 형태로든 주목받는 사람 앞에서 평범한 사람이 느끼는 초라함? 하지만 고슴도치는 곧 “세상에 그냥 고슴도치는 나밖에 없을거야.” 라며 자존감을 회복한다. 갑자기 그러니 좀 뜬금없긴 하지만 아주 짧은 이야기니까.

마지막 풍뎅이 편에선 풍뎅이와 쇠똥구리 사이에 편지가 오고가는데.... 편지 내용은 나오지 않지만 회를 거듭할수록 분노 게이지가 높아지는 걸 보니 편지로 싸우고 있는 듯하다. 누가 더 상처주나 내기라도 하는 듯이.... 그러다 결국 풍뎅이가 먼저 그만두었다. 답장을 읽지도 않고 밟고 지나가며 무시했다. 마지막 장면. 큰 화면 속 작은 쇠똥구리의 하염없이 기다리는 모습이 슬프다. 무플보다 악플이라고, 싸우는 편지라도 무시보다는 나은 것이겠지. 이렇게 쓸쓸한 장면을 끝으로 이 책은 막을 내린다.

한편씩 언급하다보니 리뷰가 길어졌다. 그냥 첫인상을 쓴 것 뿐이라 1차적 해석이라고 할까? 생각나는 걸 바로 쓴 것 뿐이다. 해석의 여지는 무한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런 책은 혼자 읽고 덮어두기보다는 독서모임으로 읽으면 아주 좋겠다. 한편씩 이야기 나누다보면 내가 못본 것을 다른 사람이 볼 수 있고 그러면 해석이 넓어질 것 같다. 감정에 대해서 진솔한 얘기들을 나누는 기회가 될 수도 있고.

전작에 이어 이 책까지 읽으니 작가의 스타일을 조금은 알 것 같고, 그게 꽤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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