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랑으로 지다
정구열 지음 / 시와에세이 / 2021년 8월
평점 :
재능시장이 있어서 딱 하나만 골라잡으라면 난 음악을 잡겠다. 아름다움을 느끼고 표현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라 생각한다. 그 표현의 방식은 다양하다. 음악, 미술, 문학, 무용, 연극 등등.... 이것들을 통칭해서 예술이라고 한다. 그중에서 난 음악이라는 예술로 아름다움을 표현해보고 싶다. 하지만 이생망이라는 말도 있듯이, 마음 뿐이지 사실은 가능하지 않다.ㅎㅎ
그런 마음에서 4년 전에 동네 도서관의 동아리에 입단했었다. 합창 동아리! 오디션도 없이 모두 받아주는 아주 품넓은 합창단. 퇴근하고 다 풀린 다리로 도서관으로 가 지휘자님의 인도로 소리를 내기 시작하면 신기하게 새 힘이 나고 재미있었다. 가끔 무대에 서기도 했는데 수많은 큰 무대를 해오신 지휘자님이 그 작은 무대에 최선을 다해주시는 게 고맙고 존경스럽기도 했다. 코로나 때문에 그 행복은 2년도 채 못갔다. 이젠 아득한 기억이 됐다.
코로나로 타격을 받은 분야가 많은데 그중 공연예술계가 대표적일 것이다. 가끔 궁금했다. 성악과 지휘가 업이던 그 지휘자님은 요즘 어떻게 지내실까. 마스크로 입을 막아버린 세상에서 성악가들의 삶은 어떨까.
그러다 지휘자님의 소설이 세상에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반갑고 궁금한 마음에 사서 읽어보았다. 일단 음악에 몰두하시던 분이 첫 작품으로 이런 장편 서사를 완성하셨다는 점에서 경의를 표한다. 이야기를 끌어가려면 만만치 않은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직접 겪어보진 않았지만) 알고있다. 주인공들과 주변인물들의 관계와 사건들이 씨줄날줄로 얽혀 긴 서사를 힘있게 이끌어갔다.
가장 높이 평가하고 싶은 점은 음악적 전문성을 작품 안에 구현한 점이다. 주인공 남녀는 음대생들이다. (남자는 성악, 여자는 피아노) 이들의 연주에 대한 묘사는 전문가가 아니면 하기 어려울 것 같다. 청각의 시각화라고 할까. 만화긴 하지만 <피아노의 숲>을 읽을 때도 그런 느낌이 들었었다. 책을 읽는데 소리가 잡히는 것 같은 느낌. 이 책의 장점이자 차별성이다. 그리고 배경 중의 한 곳인 이탈리아에 대한 묘사도 작가가 유학했던 곳이라 그런지 매우 상세하고 생생하다.
스토리에 대한 평가는 취향이 많이 좌우하기 때문에 쉽게 말할 수 없다. 나는 사랑이야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고 절대적인 사랑에 대해서 믿지도 않는다. 나든 상대방이든 언제든 변할 수 있는게 사랑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서로에 대한 존중과 신의가 감정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내 관점에서 본다면 오혁과 윤주는 그쯤에서 멈추고 서로 행복을 빌어줬어야 했다. 그랬다면 그런 비극은 없었을 텐데. 하지만 스토리에 당위란 건 없다. 그런 삶도 있는 것이다. 슬프고 비참하다 해도. 소설은 내용별로 여러 장르가 있으니 젊은이들의 사랑을 다룬 이런 내용도 그중의 하나일 것이다.
시대적 배경인 80년대는 이제 나에게 철지난 느낌을 준다. 그시대 청춘이었던 저항적 남성은 이제 말 안통하는 꼰대가 되었고 지고지순한 사랑을 꿈꾸던 여성의 모습은 아름답기보다는 속이 터진다. 그리 많이 지난 세월도 아닌 것 같은데 우리의 이슈는 변했다. 그래서인가, 오혁과 윤주를 바라보는데 폐장한 늦가을의 장터에 부는 쓸쓸한 바람이 느껴진다. 이 느낌은 아마도 동시대를 지나왔기 때문일 것이다. 젊은이들은 이런 시대도 있었다는 것을, 그게 별로 오래지 않은 과거라는 사실을 새롭게 알 수도 있겠지.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다 산산히 깨진 이들의 희생의 가치는 부정할 수 없다. 지금도 권력자들과 희생자들의 부당한 관계는 존재한다. 오히려 이전보다 더욱 교묘해졌다. 내가 서있는 자리는 어딘지, 내가 하는 일은 어떤 의미인지, 장차 어디로 흘러갈건지 볼 수 있는 더욱 밝은 눈이 필요한 세상이 되었다. 젊은이들은 지나간 역사에서 배울 점이 있겠지만 나는 그들에게 지나간 세대로서 자랑스럽기보다는 미안한 마음이 더 크다. 모든 면에서. 요즘 부쩍 더 그런 마음이 드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의 다음 책이 이제는 기억을 부르는 책이 아니라 새로운 경험을 보여주는 책이면 좋겠다. 음악의 시각적 형상화라는 작가의 차별성을 살려 새로운 이야기가 또 펼쳐지길 기대한다. 세상의 이슈는 변하지만 예술은 영원하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건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에. '음악소설'이라는 신선한 장르가 열려도 흥미로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