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형식 선생님이 1930년생이니 우리나이로 86세시다. 1951년부터 교직생활을 하셨다니 만약 초등학교 때 나의 선생님이셨으면 그때 이미 지금의 내 경력보다도 많은 중년이셨다는 것. 그런 분이 아직까지도 활발하게 수업에 대한 연구를 하시고 후배들을 가르치시고 책을 써서 전파하고 계시니 존경스럽다. 난 올해들어 부쩍 '내가 앞으로 10년 더 할 수 있을까?', '아이들 감당하기 힘들고 학교와 동학년에 민폐될 거 같으면 그만둬야 될 텐데' 요런 생각들을 하곤 하는데, 우리 아버지보다도 연세 많으신 선배님이 아직도 이렇게 열심히 살고 계시다니. 그분 눈엔 아직도 내가 '애송이'에 불과할테니, 그래, 나 지금부터 더 노력해도 되지 않을까? 

 

 

 

 

 

 

 

 

 

 

 

 

 

 

처음 읽은 이분의 책은 <수업기술의 법칙>이다. 그 때 이런 리뷰를 썼었다.

 

첫 장을 읽으면서 저자가 말하는 ‘수업기술의 법칙’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었다. 교사들은 모두들 나름대로의 수업기술을 가지고 있으나 그것이 공유되어 있지 않고, 효과가 검증되지도 않았다. 이 나름의 수업기술들 중 임상적, 객관적으로 효과가 검증되어 어디에서나 보편적인 효과를 낼 수 있는 수업기술을 ‘수업기술의 법칙’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러면서 의료계의 표준처방과 비교하여 교사들의 수업기술의 법칙이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대부분 공감한다. 우리 교사들이 모두들 나름의 수업기술을 가지고 있으나, 그것이 모든 수업을 커버하기에는 부족하고 사실상 검증되지 않은 수업기술을 오랜 시간 고수하는 교사들도 있다. 따라서 저자와 같이 교사들의 온갖 수업기술을 수집하여 그 중에 효과가 확실한 것들을 검증하여 수업기술의 매뉴얼을 만들고자 하는 노력은 정말로 의미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저자의 표현과 같이 ‘누가 적용하더라도 보통의 어린이 전원이 능동적으로 참가하여, 결과적으로 소정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수업기술’이 과연 존재할까 하는 의문이 조금 있다. 그래서 저자도 ‘보통의’라는 단서를 단 것인가? 현 교실에서는 ‘보통’이 아닌 학생들이 너무나 많이 존재한다. ‘보통의 어린이’들만 데리고 수업한다면 현재 내가 가진 수업기술만으로도 무리 없이 수업을 해나갈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보통’이 아닌 아이들까지 아울러 수업을 해야 하는 작금의 현실인데 거기에 대한 대안이 있을까? 라는 의문을 가지고 이 책을 읽어나갔다. 솔직히 별 기대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내가 가지고 있는 수업기술이라는 것이 정말 보잘 것 없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그것도 나름의 소득이라면 소득이겠다. 특히 처음에 소개된 ‘자기 나름의 생각 확립’에 대한 내용을 읽으며 가장 핵심적인 것도 생각지 못하고 있던 나의 수업기술이 부끄러웠다. 교사가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싶은 내용을 지도하기에 앞서, 아이들이 나름대로의 생각을 확립해 놓는 일은 정말 중요하다. 그것이 배움의 원동력이고 출발점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동안 나의 수업은 어떠했나? 아이들이 준비되었건 안 되었건 내가 준비한 것을 쏟아놓는 수업은 아니었나? 받을 만한 아이들은 그것을 받지만 준비 안 된 아이들은 받지 못한다. 받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화를 내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었을 뿐이다. 받을 준비가 되도록 하는 것도 교사의 역할이었으니 말이다. 

 

다음으로는 우리가 수업기술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도입기술과 발문기술에 대하여 알려주고 있다. 참고할 만한 내용이 많았으며 도입과 발문이 왜 중요하고 수업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확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도입이야 시간상으로 따지면 5분이면 충분하지만 그 5분의 역할이 40분을 좌우하며, 따라서 5분을 위한 희생(고민과 시간투자)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였다.

 

토론 수업에 대한 내용으로 한 장을 할애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내용도 매우 알차다고 느꼈다. 특히 기계적인 찬반토론 외에 수업 중에 나온 의문점을 가지고 토론하는 방식이 인상깊었다. 마지막 내용은 전원참가 수업에 대한 것이다. 이 내용은 협동학습에서 본 내용들이 있어 그 중 익숙했지만, 처음 접하는 방식도 있어 또한 새로웠다.     

 

공부에는 왕도가 없다는 말을 흔히 하는데 수업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늘 한다. 그래서 사실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수업기술의 법칙’이라는 정의에 약간의 심리적 반발감이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누가 해도 성공할 수 있는 수업기술이라니, 어떻게 그런게 있을 수 있나?) 교과전담을 했던 경험을 비추어보면 이 반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던 수업이 저 반에서는 도통 들어먹히지 않는 경우도 분명히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업에는 교사요인이 100%는 아니요, 학생요인(?)도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고 있었다. 요컨대,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지가 귀를 틀어막고 있다면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이런 나의 생각이 무척이나 위험하다는 생각을 해 본다. 일부 사실일지라도, 그걸 전제로 수업에 임하면 안 될 것이다. 전원 참여에 전원 성취, 실현이 매우 어려운 꿈일지라도 교사라면 이것을 향하여 가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수업기술에 대한 여러 가지 아이디어와 함께 수업의 본질에 대한 고민을 던져준 이 책에 감사한다. 교사는 그만두는 날까지 고민을 끼고 살아야 한다는 현실을 절감한다.

 

 

이번 여름방학에는 최근에 나온 <모두가 참여하는 수업에는 법칙이 있다>를 읽었다.

 

 

 

 

 

 

 

 

 

 

 

사실은 앞에 소개한 <수업기술의 법칙>을 몇 년 전에 읽어 내용이 가물가물하다. 이 책을 읽으니 앞 책에서 중요한 부분은 다시 다루고 있고 거기에 새로운 내용들을 더 추가하신 것 같다. 두 책 모두 가장 핵심적인 것은 수업 도입 때 전원이 문제의식을 가지게 해야 한다는 것, 학습에 임하기 전에 일단 '자기 나름의 생각'을 만들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자기 나름의 생각' 이라는 것은 사고의 응결핵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요즘 자주 쓰는 용어인 참여수업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다. 앞의 책을 읽고 이 부분은 몇 번 시도를 해보았으나 지속적이지 못하고 체계적이지 못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 부분을 확실히 내 것으로 만들어야 되겠다는 다짐을 몇 번이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쓰고 있던 배움공책 정리 방법을 개선해봐야 될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면서 줄곧 드는 생각은 "내가 어릴 때 받았던 교육이 구식이고 잘못된 것이 아니구나, 오히려 요즘 수업에서 트렌드를 따르느라 놓치는 것이 많구나" 라는 것이었다. 저자가 80대 노령이라서 그런 것일까? 그런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동안 내가 기본을 못보고 넘긴 탓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나 어릴 때는 수업이 끝나면 친구들과 우리집이든 친구집이든 모여서 방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일단 숙제장부터 꺼냈다. 국어숙제는 거의 매일 있었다. 날말뜻 10개, 비슷한 말 10개, 반대말 10개(갯수는 정확하지 않다^^), 줄거리 간추리기 정도가 기본이었다. 이런말 몹시 쑥스럽지만, 지금 아이들 중에 나 초등학교 때 정도의 어휘력과 요약능력을 가진 아이들은 흔치 않다. 이게 교육의 문제가 아닐까? 그동안 나는 왜 내가 잘했던 거라 생각했던 거지? 나는 왜 나를 가르쳐 주셨던 선생님들처럼 아이들을 가르치지 못했으면서 아이들이 못한다고만 생각했던 것일까?

 

물론 지금과 그때의 상황은 다르니 그런 숙제를 내줄 수는 없다. 하지만 그 단원의 성취수준만 건드려 주면 됐다고 생각하고 교과서의 분량에 짓눌려 본문을 소홀히 다룬 경향이 있었던 것을 인정한다. 음독, 어휘 지도 이 두 가지를 선생님은 매우 강조하셨는데 나는 그 부분 매우 소홀했던 것을 인정하고 앞으로 바로잡으려고 한다.

 

요즘의 수업이론들은 모두 '전원 참여수업' '사고력을 키우는 수업'을 지향하고 있다. 여러 이론들의 홍수 속에서도 갈피를 못잡고 있던 나는 이 노령의 선생님께서 또박또박 친절하게 가르쳐주시는 내용에서 비로소 몇 가지 단서를 붙잡는다. 전원 참여 수업도, 사고력 수업도 모두 기본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허공에 뜬 것은 언제든 가라앉을 것이다. 난 올해 아이들의 생활지도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빼앗겨 솔직히 수업의 발전을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 못했다. 언젠가 배움의 공동체 연수를 듣다가 "수업 안에서 다른 문제도 해결된다(수업이 변해야 학교가 변한다)."는 취지의 말씀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2학기에는 수업에 좀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고 싶다. 제발 그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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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아이 줄리안 이야기 독깨비 (책콩 어린이) 36
R. J. 팔라시오 지음, 천미나 옮김 / 책과콩나무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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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의 전작인 <아름다운 아이>를 읽지 못했다. 이 책은 그 후속편이다. 그래도 이 작품 한 편에 충분한  완성도를 가지고 있어서 전작을 읽지 않은 것이 걸림돌이 될 것은 없었다. 물론 읽고 나니 전작이 궁금해져서 찾아보게 되기는 한다.


선천성 안면기형인 오기라는 아이가 있다. 전작에서는 이 아이가 주인공인 것 같다. 이 책에서는 오기를 괴롭히는 같은 반 학생 줄리안이 주인공이다. 줄리안은 주인공이자 화자이다. 그 아이도 나름대로의 입장이 있다. 일이 언제나 단순하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다.


줄리안의 입장을 정리해본다.

1. 나는 어렸을 때 공포로 인한 트라우마가 있다.('야경증'이라는 진단을 받음)

2. 오기의 얼굴은 너무 끔찍해서 어릴 적의 공포를 상기시킨다.

3. 나는 4학년 때까지 매우 잘나갔었다. 잘나가는 패거리에 속해있었고 인기도 많았다.

4. 오기가 온 후부터 모든 것이 예전 같지 않다.

5. 그래서 나도 괴롭다. 괴롭다고.


이렇게 줄리안도 힘든 점이 있었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래, 그래. 나도 안다, 알아. 나는 그동안 어거스트 풀먼에게 못되게 굴었다! 그게 무슨 대수라고. 세상이 망하기라도 하냐고! 이 넓은 세상에 천사들만 사는 줄 아나.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이제 그만 좀 물고 늘어지지? 그만 좀 넘어가고, 제 할 일이나 잘하며 살자고. 알겠어?"

"처음부터 작정하고 못되게 군 건 아니었다. 다시 말하지만 난 못돼먹은 아이가 아니다! 물론 가끔 농담도 하지만, 나쁜 마음으로 한 말이 아니다. 그냥 장난삼아 놀리는 말들이다. 사람들이 좀 가볍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좋다, 대로는 내가 던진 말이 다소 심할 수 있다고 쳐도, 그건 그냥 그 사람이 없는 데서 흉을 좀 본 것 뿐이다.  이제 그만 좀 예민하게 구시지!"

이런 말들을 읽으니 저 깊은 곳에서부터 은근한 분노가 올라왔다.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이다. "작정하고 그런 건 아니다", "농담이었다", 나쁜 마음으로 한 말이 아니다", "장난 삼아" 이런 말들은 주로 아이들 입에서 들던 말.

"다소 심할 수 있다고 쳐도", "너무 예민하신 것 같아요."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그만 좀 넘어가죠" 등은 주로 어른들의 입에서 나온 말.


줄리안은 오기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아이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 친한 패거리 중의 한 명인 잭까지 오기와 친구가 되자 줄리안은 적개심을 품는다. 더구나 그 친구 앞에서 오기를 괴물이라고 말했다가 주먹으로 한 대 얻어맞은 후로는 더더욱. 이 때 줄리안은 피까지 났었는데 주먹질을 한 잭은 큰 처벌을 받지 않았다. 그런데 줄리안이 잭과 오기의 사물함에 넣어놓은 쪽지들은 큰 문제가 된다. 그 일로 줄리안은 2주의 정학 처분을 받는다.


이 일에 승복하지 못하는 줄리안의 엄마는 길길이 날뛴다. 얼핏 불공평해 보이기는 한다. 쪽지가 주먹질보다 더 큰 처벌을 받다니? 그런데 쪽지의 내용에 흠칫한다.

"야, 흉측한 다스베이더. 넌 너무 못생겨서 매일 가면을 써야 돼."

"보나마나 너희 엄마는 네가 아예 태어나지 않았으면 했겠지. 모두를 위해 친절을 베풀어 봐, 죽어 줘."


그래도 줄리안의 엄마는 이것이 쌍방의 일이며 잘한 짓은 아니지만 그럴 만 했다는 사실을 주장하고 싶어한다. 너무나 익숙한(그러면서도 고통스러운) 장면이다. 거기에 대한 교장선생님의 말씀.
"그렇지만 문제는 말이다. 선이라는 게 있단다. 줄리안. 넘어서는 안되는 선이 있어. 네가 쓴 쪽지들은 그 선을 넘어 버렸단다. 네 쪽지들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수준이야."

그 "선"이라는 것은 사회의 도덕적 기준에 맞추어 교사가 판단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 책의 교장선생님처럼. 하지만 난 그게 좀 두렵다. 줄리안의 엄마처럼 공평함이라는 허울좋은 말로 나를 공격할 구실이 되기 때문에. 움츠러든 내 모습을 바라보니 씁쓸하다.


어쩔 수 없이 줄리안은 정학 기간을 보내게 되고, 화가 난 줄리안의 부모는 다음 학기에 새로운 학교로 옮기기로 결정한다. 그 여름방학을 줄리안은 할머니 집에서 보내게 된다. 극적인 일은 여기에서 일어난다. 할머니의 과거 속에 <아름다운 아이, 줄리안>이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줄리안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눈물을 쏟는다. 그 때 할머니가 줄리안을 위로하시는 말. 난 이 말을 가슴에 새겨 두어야겠다고 결심했다. 나도 아이들을 이렇게 위로했어야 했다........

"줄리안, 너는 아직 어리단다. 네가 저지른 일들이 옳지 않았다는 걸 너도 잘 알지. 그렇다고 그게 네가 옳은 일을 할 수 없는 아이라는 뜻은 아니다. 단지 네가 옳지 않은 일을 선택했다는 뜻일 뿐이지. 네가 실수를 했다고 한 건 바로 그런 뜻이란다. 하지만 줄리안, 인생을 살면서 좋은 점은 말이다. 실수는 고칠 수도 있다는 거야. 우리는 실수로부터 배우지. 너도 네 실수를 통해 배우게 될 거다. 실수 한 번으로 너를 단정지을 수는 없는 법이란다. 줄리안, 내 말 알겠니? 다음에는 더 잘 행동해야 해."


그 쪽지의 내용을 보면 줄리안은 정말 못돼 처먹은, 공감능력 제로의 싸가지 없는 놈일 뿐이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게 못돼 처먹은 '실수'를 저지르기도 한다는 점, 나도 되돌아보면 이불 차고 벌떡 일어날 부끄러운 짓을 하기도 했다는 점을 기억한다. 실수을 인정하고 책임지면 그것은 실수에서 끝난다. 그러나 그것을 합리화하고 반복하면 그것은 범죄가 된다. 이 점은 부모들이 좀 기억할 필요가 있다.


처음엔 제목에 태클을 걸고 싶었다. 이런 밥맛없는 놈이 무슨 '아름다운 아이'야? 그러다 할머니의 과거 속의 줄리안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아름다운 아이는 여기에 있었구나. 책을 덮으며 깨달았다. 이 책의 줄리안도 '아름다운 아이'라는 것을. 내가 바라보는 모든 아이가 아름다운 아이일 수 있다. 그 가능성을 절대 부인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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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느질 소녀 사계절 아동문고 86
송미경 지음, 김세진 그림 / 사계절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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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 책을 읽고 '구원'이라는 낱말을 떠올렸다. 진정한 구원은 무엇인가? 어떤 이들이 구원을 받는가? 구원에서 멀리 비껴 가 있는 사람들, 즉 구원을 스스로 걷어차는 이들은 누구인가? 나는 구원을 바라는가? 어떤 자세로 바라는가?


작가가 쓴 의도는 그것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난 이 동화를 통해 그 어떤 책에서보다도 강렬하게 그것을 생각했다. 이렇게 만드는 작가의 역량에 또한번 감탄한다. '늘 안갯길을 걸어가는 느낌이지만 기도하며 한걸음씩 내딛는다'는 작가의 말을 읽고, 나도 그가 더듬거리며 찾는 것들이 진실된 것이기를 함께 바란다.


이 책에서 포악한 이들에게 상처받은 존재들을 구원해 주는 이는 <바느질 소녀>다. 옛이야기에서 흔히 마법을 가진 존재로 나오는 나이 많은 노파도 아니고 힘도 세지 않고 아름다움이나 신비로움과도 거리가 먼 거지소녀. 사람들의 발걸음이 뜸해진 허름한 공원 구석에 앉아 남이 버린 음식들로 연명하는 거지소녀. 잘 보면 가끔 그 아이는 바느질을 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구원의 행위다. 그 바느질로 소녀는 수지네 강아지 구름이를 치료해준다.


믿을 수 없지만 믿을 수밖에 없는 사실, 엄마는 쉬쉬하며 수지에게 입단속을 시키지만 수지와 준하는 공원을 찾아가 자신들의 먹을 것을 나눠주며 거지소녀와 친구가 된다. 거지소녀는 구름이 말고도 꼬리 잘린 길고양이들을 원래대로 되돌려놓았고 정태 형제네 돌격이에게 물어뜯긴 해피도 치료해주었다. 동물들 뿐만이 아니었다. 발달장애로 늘 엄마가 쫒아다니며 말썽을 수습해주어야 하는 재호도, 며느리의 구박 때문에 보행보조기를 끌고 하루종일 밖에 나와 있어야 하는 은비 할머니도 치료해 주었다.

그리고 그들을 괴롭히는 존재들-수목떡집 아저씨, 정태 한태 형제와 그 부모들, 은비엄마 등은 그 구원을 부정하고 분노한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 거지소녀를 그대로 두지 않으려고 한다.


어느 책에선가 주워 읽은 내용이 생각난다. 어린 아이들의 무의식에 작용하는 옛이야기들에서는 선악의 구분이 모호하지 않다고. 선과 악이 명확히 대비되며 힘겨운 과정을 통해 선한 존재가 마침내 승리한다고. 그 과정을 통해 아이들은 심리적 구원을 경험한다고.

물론 그 이야기가 심하게 작위적이거나 대놓고 교훈을 늘어놓거나 빈약한 줄거리를 가지고 있다면 아이들에게 기쁨을 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 연약한 존재가 승리하는 기쁨을.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구원을. 비록 이들이 강한자들을 칼로 챙챙 물리치고 그 목에 칼끝을 겨누지는 못했을지라도, 마지막에 거지소녀가 공원을 떠나 숲속으로 홀연히 들어가 버렸을지라도, 아이들은 느낄 것이다. 선하고 겸손하고 남의 것을 빼앗을 수 없는 존재가 끝내는 승리했다는 사실을.


이렇듯 옛이야기적인 주제를 가진(내가 주제를 잘못 짚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작품은 요즘의 작가들이 즐겨 쓰는 작품은 아닌 것 같다. 서늘한 현대의 문제를 짚어내는 문제작들을 여러 편 읽어보았다. 그 막막한 현실에 가슴만 아파지는.... 이 책도 현실의 문제들을 많이 보여주고 있지만 놀라운 상상력으로 판타지를 결합시켜 더욱 작품에 몰입할 수 있게 만든다. 


누군가 "현실을 둘러보라, 구원이 어디 있냐? 너는 구원을 보았냐?" 라고 묻는다면 딱히 해줄 말이 없을 것 같다. 수목이 아빠도, 정태나 한태도, 은비 엄마도 우리 주변에 있으며 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는 않으니까. 구름이의, 재호의, 은비할머니의 고통은 오늘날도 계속되고 있으니까. 그렇지만 난 작가의 시선에 동의한다. 그러므로 힘들어도 그 편에 서겠다고, 선을 비웃거나 부정하는 자로 살지는 않겠다고 다짐한다. 나의 작은 그릇과 게으름으로 얼만큼 살아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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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터 학교 만들기 - 인디스쿨 함께 쓰는 책 프로젝트 1
공창수 외 지음 / 지식프레임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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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편해문 선생님의 <아이들은 놀이가 밥이다> 라는 책을 읽고 깊이 공감했다. 요즘 아이들의 병적인 현상은 그 원인이 모두 놀이의 결여에 닿아있다. 놀이를 빼앗긴 아이들은 나름대로의 돌파구를 찾게 되는데, 혼자만의 세계에 빠지거나 육체적 정신적인 폭력을 즐기게 되어 건강하지 못한 관계를 만든다. 교실에서 교사가 해결해주기 가장 어려운 일이 바로 이런 것들이다.


그 책을 읽었을 때 나는 교과전담이어서 다음 해에 2학년을 맡자마자 당장 실천을 했다. 학교가 근린공원과 맞닿아 있는 천혜의 조건을 이용하여, 학교 시정표와는 다르게 맘대로 블럭수업을 하고 중간놀이 시간을 만들어 노는 시간을 마련해 주었다. 들로 산으로 쏘다니며 노는 아이들처럼, 우리는 근린공원에 나가 일단 우유부터 마시고, 중앙마당에서 출발하여 근린공원을 한바퀴 뛰고, 그 다음은 고무줄놀이, 경찰과 도둑놀이 등 그때그때 아이들이 '꽂힌' 놀이를 중심으로 놀다가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아쉬운 마음을 안고 교실로 들어와 나머지 수업을 했다. 통합교과 '봄' 수업을 할 때는 쑥을 캐서 쑥버무리를 해 먹고(공원에서 뜯은 쑥은 아이들 몰래 버리고 소요산 청정지역에서 시어머님이 뜯어오신 쑥으로 대체^^;;) '이웃' 수업을 할 때는 마을의 놀이터를 하루에 한 군데씩 순례하며 놀았다. '가을' 수업을 할 때는 이곳저곳 다니며 가장 이쁜 낙엽을 주워 책갈피에 끼우고 낙엽을 이용한 작품을 만들었다. 겨울엔 바람개비를 만들어 추운 줄도 모르고 뛰어다녔고, 눈이 오면 당연히 눈놀이를 하러 밖으로 나갔다.


지금도 이 때 아이들이 보고싶다. 교실에 찜통을 걸고 쑥버무리를 쪄서 한 쪽씩 떼어 주었을 때, "아잉~ 맛이가 이상해~" 이러다가 "음 그래도 맛있다." 짭짭 오물오물 먹던 아이의 이쁜 입이 생각난다. 별별 희한한 아이들이 많던 반이었는데, 그래도 이렇게 놀며 부대끼며 고생인 줄도 모르고 한 해를 보냈다.


나중에야 알았다. 그 일 년은 불법으로 점철된 한해였다는 것을...^^;;; 그리고 20년 경력의 40대 교사가 어찌 그리 무식하고 용감할 수가 있었던가 라는 것을....ㅠ 근린공원이든 어디든 학교 밖을 나가려면 결재를 득해야 한다는 것을, 미리 생각했더라면 일년을 그렇게 놀며 보내진 못했을 것이다.


다음 해에는 3학년을 맡았는데, 나가 놀려면 결재를 득해야 한다는 것도 깨달은 데다가, 갑자기 늘어난 9개의 각각 이름 붙여진 교과를 공부하려니 좀처럼 놀 틈을 만들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나에겐 비장의 무기가 또 있었으니, 다년간 수제작해 온 온갖 교구들과 틈틈이 사 모은 보드게임들이다. 창체 시간을 활용해 이것들을 가르쳐 놓았더니 아이들은 쉬는시간만 되면 모두 바닥에 깔려 놀이 삼매경에 빠졌다. 수업 종이 치면 정리시키고 수업을 시작하는 게 좀 어려웠을 뿐, 쉬는 시간을 활용한 놀이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내가 화장실에 다녀오거나 옆반에 볼 일이 있어 다녀와도 아이들은 무사히(?) 놀이에 빠져 있었다. 난 흐뭇했다. 마치 놀이에 일가견이 생긴 교사인 듯한 착각에 빠졌다.


그리고 올해, 고학년을 맡았다. 첫날 내 소개에서 난 용감하게도 놀이에 관심이 많은 선생님이라고 날 소개했다. 아이들이 서로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했다.(뭔가 불길한....?^^;;) 그랬다. 내 생각과는 달랐다. 지금까지 해왔던 것이 하나도 통하지 않았다. 이 아이들에게 놀이란 두 가지였다. 첫째는 '그냥 자유시간' 둘째는 '축구 아니면 피구' !


'그냥 자유시간'을 줄 수도 있다. 전의 아이들처럼 바닥에 깔려 잘 놀아준다면 말이다. 말하자면 내 의도대로 놀아주길 바란 것이다. 하지만 얘네들은 달랐다. "절대로 너의 뜻대로 놀아주진 않겠어" 라는 듯이, 애써 마련한 그 수많은 교구와 보드게임들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보통 쉬는시간 관리를 한 달 정도 하면 자리가 잡혀서 교실에서 꼬물꼬물 복작복작 보기 좋게 놀기 마련인데 이 아이들은 한 학기가 다 지나도록 하루같이 관리를 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화장실에 못 가게 할 수는 없으니 쉬는시간마다 신경쓰며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는데, 이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은 마실나가는 것(복도나 남의 교실에서 다른 반과 뒤섞여 떠들며 노는 것)이었다. 이 와중에 많은 생활지도 문제가 발생했고 정말 골치가 아팠다. 이것 하나가 정착되지 않으니 아이들을 이뻐하기가 정말 힘들었다.


첫 체육시간부터 이 아이들은 축구 아니면 피구를 하자고 했다. 그걸 너희들이 정하는 게 아니라고 했더니 몇몇이 삐죽거리며 입이 댓발 나왔다. 줄 세우기부터 놀이로 진행했는데 반응이 별로,,,, 남은 시간을 술래잡기류의 몸풀기 놀이로 진행했는데 이건 최악이었다. 마치 "우리들을 뭘로 보고 이따위 시시한 놀이를...?"이라는 태도. 매주 잘 계획된 주간학습 안내를 나눠주고 거기에 준해 수업을 진행해 나갔더니 그제야 이해를 했다. 금요일에 주간학습 안내를 나눠주면 체육수업부터 살펴보고 "우와 다음주에는 발야구네~!"  "에잉, 다음 주는 소고춤이구나...." 이렇게 되는데 한 달이 걸렸다. 그 한달간, 그들이 납득하지 못하는 '축구가 아닌 체육수업'을 진행하는 동안의 삐걱거림은 내게 치명적이었던 것 같다. 한 학기 내내 학급운영이 껄끄럽고 힘들었다. 모든 수업에 앞서 체육수업을 철저히 준비했다. 한 달 이후로는 아이들도 체육수업에 순순히 즐겁게 잘 따라왔다. 그래도 그 한 달의 삐걱거림의 여파는 오래 갔다. 놀이에 대한 자신감은 그냥 흔적도 없이 녹아 없어졌다.


놀이에 한한 한, 나의 한계를 나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저학년들 앞에서는 그 한계가 발현되지는 않았다. 편해문 선생님의 주장처럼 아이들은 그저 텅빈 시간을 놓아주면 창조적으로 잘 놀았다. 나는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이 이쁘고 즐거웠다. 하지만 고학년은 좀 달랐다. 이 아이들은 이미 많이 굳어있다. 놀이의 창조성은, 한참동안 놀이로 말랑하게 풀어주어야 그제야 발휘되는 것 같다. 그때까지는 교사의 리더십과 운영의 묘가 많이 필요한 것이다. 나는 그 점에서 많이 미숙했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한계. 내가 아이들을 '놀려' 줄 수는 있으나 함께 '놀'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극복할 수 없는 한계라 안타깝다. 어릴 때부터 나는 책읽고 끄적거리고 온갖 상상놀이를 하며 '조용히' 놀았다. 몸을 쓰는 놀이를 즐기지 않았다. 어릴 때도 즐기지 않았던 놀이를 40이 넘어 무슨 수로 즐기겠는가? 가끔 무슨 재미로 사느냐는 오지랖 쩌는 질문을 받을 때도 있는데, 나한테는 그냥 이게 놀이다. 각자 자기에게 놀이인 것을 하고 놀면 되는 것을. 어쩌다가 놀이까지 선생님이 가르쳐 주고 온갖 세심함으로 함께 놀아주어야 되는 세상이 되었을까? 우리 어렸을 때 선생님은 그런거 안해주셔도 우린 잘 놀았고 앞날 미리 걱정하지 않고 날마다 즐겁고 행복했었는데.... 이런 한탄은 사실 의미가 없고, 이 시대는 이게 필요하니 어찌됐건 난 최선을 다한다.


이 책은 이런 한계와 난관에 봉착한 나에게 많은 참고가 되겠다. 이 저자들의 '학교야 놀자' 책도 가지고 있고 가끔 활용하곤 했는데, 이 책은 한층 더 업그레이드 된 느낌이다. 아이디어도 넘치고, 활용도도 높다. 특히 체육수업을 운영하는데 필요한 팁들이 많이 들어 있고, 체육과 역사를 결합한 역사 RPG게임은 초등교사들의 고민 속에서 탄생한 것들이라 뿌듯하고도 반갑다.


책을 읽다보니 놀이의 고수인 이 책의 저자분들도 몇 단계의 과정을 거쳐 지금의 놀이수업을 자기 것으로 만드셨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과정에는 문제점의 불거짐-난관-해결의 과정이 들어가 있었을 것이다. 내가 지금 난관 속에서 헤매고 있듯이 말이다. 왜 뭐하나 쉬운게 없을까? 놀이까지도 이렇게 노력해야 하나? 라는 한숨이 살짝, 나온다. 놀이란 건 저절로 돼야 되는거 아니야? 우린 어렸을 때 누가 가르쳐 줬었나? 라는 볼멘 소리가 나오려는 찰나, 맞다. 우리 어릴 땐 결핍이 아니었고 이 아이들 시대는 결핍이다. 그러니 애써서라도 주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래서 이 글을 끝내고 난 다시 정독에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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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품은 바다 이야기 생각을 더하는 그림책
키아라 카르미나티 글, 루치아 스쿠데리 그림 / 책속물고기 / 2015년 8월
평점 :
품절


어둠이 내리는 시간에 바닷가에 나가 보거나, 배를 타고 끝이 없을 것 같은 바다를 바라보면 아름다움에 경탄하는 것도 잠시, 난 두려움에 젖어든다. 비가 많이 와 불어난 중랑천만 봐도 가슴이 탁 막혀올 만큼 물을 무서워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바다는 미지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도저히 닿을 수 없는 그곳.


미지의 세계에 대한 감정이 일차적으로 두려움이라면, 그 이후는 동경이다. 난 바다를 친숙하게 느낄 수는 없는 사람이라 좀 유감이지만, 그곳이 보금자리인 생명들에게는 얼마다 자유롭고 소중한 공간일지를 생각해본다. 제돌이가 잡혀와 수조 안에 갇혀서 인간이 요구하는 묘기를 부리며 살아야 했을 때 얼마나 불행했을지, 지금 자유로워진 제돌이는 그 바다의 품에서 얼마나 행복할지.


이 책을 정보그림책으로 분류하는 게 맞을지 좀 헷갈린다. 바다 속 생명들에 대해 다양하게 설명해주고 있어 정보그림책으로 손색이 없다. 바다수세미와 같은 해면동물들, 흩어지지 않는 멸치떼의 대열, 동물과 식물의 특징을 모두 가졌지만 동물로 구분되는 산호, 소라게들과 쌍으로 움직이는 말미잘, 모통에 비해 입이 작아 빠른 속도로 헤엄쳐야만 하는 참치 등....


그러나 매 장마다 저명한 작가들이 쓴 바다에 관한 구절들이 함께 구성되어 있어 이 책은 단순한 정보그림책이라 하기엔 매우 문학적이고 감각적이다. 첫장엔 쥘 베른의 <해저 2만리>에 나오는 한 구절이 들어있다. 네모선장의 말이다.

 "나는 바다를 사랑합니다.

바다는 지구의 10분의 7을 뒤덮고 있어요.

넓디넓은 사막 같지만 가까이 있으면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절대 혼자라고 느끼지 않아요.

바다는 어디든 갈 수 있고,

끝없는 생명을 품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나는 이 네모 선장의 아픔을 다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사랑했었던 것 같다. 아로낙스 박사가 구조된 후, 행방과 생사를 알 수 없는 네모선장과 아틸러스호를 뒤로 한 채 책을 덮어야 했을 때의 가슴아픔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그가 손바닥처럼 훤히 알고 있었던 바닷속 세계에 대한 경이로움도.


더 나아가 이 책은 거북이 페이지에서 우리가 버린 비닐을 먹고 거북이가 죽기도 한다는 사실을 설명하며 "나를 지켜야 해! 그것이 너희를 지키는 길이니까!" 라는 메시지를 강하게 남기기도 한다.


그림도 색채도 아름답다. 아이들이 이 책을 읽으며 바다에 대한 환상에 젖어보면 좋겠다. 그와 동시에 그 환상과 내가 버리는 쓰레기 한 장이 바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도 가까이 느낄 수 있다면 좋겠다. 시원한 판형으로 바다에 대한 많은 느낌을 담은 이 책. 아이들이 많이 찾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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