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 도로봉
사이토 린 지음, 보탄 야스요시 그림, 고향옥 옮김 / 양철북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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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취향을 저격하는 아주 매력적인 동화를 만났다. 그 사람만의 문체와 느낌을 가진(사실은 처음 보는 작가다). 이 책을 내가 어릴 때 읽었다면 이 느낌이 아련한 추억으로 남을 것 같은. 그러면서 영화로 만들어도 아주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사영화도 좋겠지만 동화니까 애니메이션이 더 좋을듯.... 난 장면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영화 장면을 생각하며 읽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떠올랐다. 영화로 표현하기 좋게 캐릭터들도 개성이 분명하다. 아주 평범한 외모지만 뭔가 비범한 도둑 도로봉, 베테랑 형사지만 뭔가 인간적인 치보리 씨, 어리고 어리숙하지만 뭔가 번뜩이는 기록관 아사미 씨, 적군일 것 같았는데 의외로 아군인 오하스 형사 등.

도로봉은 도둑이다. 제목에부터 나오니 모를 수가 없다. 어떤 도둑일까? 대도? 그는 어떤 현장에서 우연히 다른 사건을 조사하러 나왔던 '형사'인 화자와 마주치게 되고 제발로(?) 두손을 내밀어 수갑을 차고 경찰서에 잡혀왔다. 그리고 조사를 받는다. 조사받는 이야기가 이 책의 내용이라 보면 된다. 도로봉의 자기고백은 한참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공원에서 발견된 아기 때의 이야기부터.

잡혀있던 열흘간 도로봉은 취조시간마다 자신의 범행이력 -어찌보면 인생 이야기-을 담담히 털어놓았고, 형사들은 믿기 힘든 그 이야기에 점차 빠져들었다. 도로봉은 평생 수많은 절도를 해왔지만 한번도 잡히지 않았다. 정말로 신출귀몰한 괴도인가? 그런 이름을 붙여주기엔 애매한 면이 있다. 그는 알려지지 않았고 어떤 형사도 그를 잡으려 해 본 적이 없었다. 아예 한 번도 신고된 적이 없었으니까. 대체 어떻게?

그가 가진 남다른 능력은 '물건의 소리를 듣는 것' 이었다. 자기가 있는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물건들은 도로봉에게 소리를 내어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도로봉은 그 소리를 따라 물건을 가지고 나온다. 물건들은 주인에게 완벽히 잊히거나, 어찌할바 모를 물건들이어서 그의 절도는 아예 인식되지도 않거나 차라리 다행이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니 그는 자칭 도둑이되 한번도 도둑이라 불린 적은 없었던 것이다. 그의 절도 에피소드는 애잔하기도 하고 속이 시원하기도 하고 통쾌하기도 하다. 그렇게 도로봉 씨는 절도로 세상 구석의 제자리를 찾아주며 살고 있었다. 그의 죄를 물을 수 있을까.

이 책대로라면 우리집에선 아우성치는 소리가 왕왕 울릴 것이다. 눌리다 못해 화석이 된 옛날 서류들은 "날 고물상에 갖다주면 푼돈이라도 받을거야. 그것도 싫다면 재활용에라도 내놔." 라고 할 것이고 깊은 곳에 뭐가 들었는지도 모르는 창고 물건들 또한 비슷한 소리를 낼 것이다. 보지도 않는 앨범이나 앨범에도 못들어간 사진들은 "날 태워버리고 추억은 가슴에만 간직해." 라고 할 것이다. 도로봉 씨가 1톤 트럭을 몰고 오면 좋겠다. 아우성치는 물건들이 모두 떠나고 나면 나는 딱 손뻗으면 닿을 데 있는 물건들만 가지고 가볍고 단순한 삶을 살 텐데.

그러나 이 책은 단지 '물건'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이 책은 호흡이 좀 긴 편이다. 도로봉 씨는 '어떤 범행' 이후에 큰 변화를 감지한다.
"물건과 살아있는 것은 원래부터 다른 세계에 있는 거야. 어느 한쪽에 발을 들여놓으면 다른 한쪽에는 있을 수 없는 게 이치. 물건의 목소리를 들으려면 살아 있는 것의 목소리에는 귀를 막아야 돼. 그 반대도 그렇고. 어느 한쪽의 목소리를 들으면 어느 한쪽의 목소리는 잃게 되거든."

도로봉 씨가 다른 세계로 발을 옮겼다면 그건 어떤 존재를 절도한 사건 때문이었다. 물건이 아닌. 생명과 감정이 있는. 그건 조그만 강아지 '요조라'였다. 그러나 강아지는 주인 손에 돌아갔고 강아지가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석방 전날에 유치장을 빠져나가 버렸다. 그 어느때보다도 강렬하게 도둑의 욕망을 가진 그에게 더이상 예전의 능력은 없다. 그것을 알고 있는 형사들의 '도로봉 구하기' 작전이 펼쳐진다.

어떻게 보면 허무맹랑하고 코웃음 나오는 발상일 수도 있다. 물건이 말을 해? 쓸모를 잃어서 슬퍼해? 유치해보일 수 있는 이런 발상을 세련되게 감싸고 환상적인 숨결을 불어넣는 힘은 작가의 매력적인 문체인지, 흥미로운 플롯인지 또다른 어떤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오랜만에 제대로 취향저격하는 책을 만났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단, 동화로서 아이들에게 잘 다가갈지는 좀 실험을 거쳐 봐야 알 것 같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 책은 호흡이 길고 구성도 단순치 않다. 아이들 대중을 사로잡긴 어려워 보이고 일부 취향의 아이들이 좋아할.... 것 같지만, 뚜껑은 열어봐야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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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잖아요? 함께하는이야기 2
김혜온 지음, 홍기한 그림 / 마음이음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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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교사이고, 장애아동이 세상에 스며드는 이야기들 바람을 가르다를 쓰신 김혜온 작가의 신작이다. 작가의 특수교사로서 직업의식은 투철하고, 직업을 넘어선 애정도 느껴진다. 전작도 그랬지만 이 작품도 장애아동과 그 부모들과 호흡하는 작가의 삶이 아니고서는 쓰기 어려운 세밀한 시선이 돋보인다.

 

이 작품을 쓰게 된 계기는 작가가 밝히지 않았지만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리고 그건 누군가는 썼어야 할 이야기고, 또 김혜온 작가만큼 잘 쓸 수 있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서울의 어느 동네에 특수학교를 설립하려는 계획이 발표되었고, 그 지역 많은 주민들이 결사반대를 했다. 그들도 할 말이 있으니 했겠지만 꼭 그래야만 했을까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정말 눈을 돌리고 싶었던 장면은 장애학생 어머니들이 무릎을 꿇고 사정하는 모습이었다. 이 책에 바로 그 장면이 나온다. 어머니들의 육성까지.

여러분이 욕을 하시면 욕을 듣겠습니다. 모욕을 주셔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학교는 절대 포기할 수 없습니다. 주민 여러분께 무릎 꿇고 학교를 짓게 해 달라고 빌겠습니다.”

 

이 책은 그 사건(실화)을 모티프로 작가가 창작한 이야기다. 인물 구성과 사건 전개가 자연스러워 작품의 의도성(?)이 그리 튀어보이진 않는다. “특수학교 설립 반대현수막이 특수학교 설립 한대로 바뀌어 꽃무늬와 함께 바람에 펄럭이는 마지막 내용과 삽화도 인상적이다.

 

인물들이 전형적이지 않아서 좋았다.

1. 조은이 : 화자. 새로 지은 미래아파트에 이사와서 기분이 좋다. 공터에 마트와 키즈 파크가 생기길 바라지만 윤서와 솔이를 보고는 마음을 돌린다. 그래도 어쨌든 좋은 일을 하면서 살라는 부모님의 작명(나조은)에는 늘 부담감을 느낀다.

2. 조은이 엄마 : 새 아파트에 이사와서 좋긴 하지만 마트가 너무 멀어 힘든 차에, 가까운 공터가 마트 신축부지라는 소식을 듣고 좋아한다.(집값이 오른다는 말도 있어서) 하지만 특수학교가 들어선다는 소식에, 당위와 현실적 이익 사이에서 마음이 편치 않다.

3. 해나와 해나 엄마 : 특수학교 설립 반대에 앞장서는 쪽.

4. 솔이 : 조은이네 반의 장애 학생. 친구들을 좋아하는 성향이어서 특수학교 생기면 전학가라는 친구들의 말에 기겁을 하며 싫어한다. 조금씩 도와주면 대체로 잘 지내지만 가끔 사고를 치기도 한다.

5. 윤서 : 가장 어른스러운 캐릭터. 어쩌면 가장 찾아보기 어려운 캐릭터인지도. 동생 민서가 중증 장애로 멀리 있는 특수학교에 다닌다. 특수학교 반대 상황에 가장 가슴이 아픈 입장. 사진 속의 무릎 꿇은 한 명이 바로 윤서의 엄마.

그 외 주변 친구들, 담임선생님, 교장선생님, 동네 주민들이 등장하며 우리가 익히 아는 그 사건이 개연성 있게 흘러간다.

 

학교잖아요?” 이 말은 특수학교를 반대하는 어른들에게 되묻는 아이들의 질문이고, 마지막에 조은이 엄마를 비롯한 일부 주민들이 들었던 피켓의 문구이기도 하다. 일반 아이들에게 당연한 학교. 아파트가 들어서면 당연히 배당되는 학교의 부지. 그런데 왜 특수학교는 안 되는가? 학교인데.

 

이런 말을 하는 내가 부끄럽기도 한 것은 나도 학급을 맡을 때 장애아동이 있는 학급을 맡으면 걱정이 앞서고, 특수학급이 있는 학교로 가게 되면 힘든 앞날을 미리 걱정하게 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일반 아이들도 완벽히 통솔하기 어려운 내가 장애아동까지 있을 때 과연 수업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선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는 것이고 나는 평안한 상태에 대한 욕구가 특히 강한 사람이라 부끄러운 줄 알면서도 그런 마음이 든다.ㅠㅠ

 

조은이와 친구들은 학급의 솔이, 그리고 좀더 중증인 윤서 동생 민서와 함께 지내다 보니 우리 모두 같은 학교에 다닐 수는 없는 걸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조회에서 교장선생님도 그런 말씀을 하신다. 특수학교보다는 우리 학교 같은 일반 학교에서 함께 지내는 것이 더욱 좋지만 중요한 것은 함께 살아가는 마음이라고.” (본문 119) 내가 보기에 이 부분이 작가의 의도가 가장 많이 들어간 것 같다. 작가의 말에도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 우리나라는 아직도 갈 길이 멀어요. 장애를 지닌 어린이들이 다닐 수 있는 학교가 많아지길, 일반학교의 특수학급이 점점 더 늘어나길, 언젠가는 특수학급도 없애고 일반학급에서 다 다른 무늬를 가진 아이들이 서로의 다름을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함께 공부할 수 있기를 바라요.” (124)

 

작년에 일본 대학의 특수교육과 교수로 계시는 분이 국내에 오셔서 초등교사들과 만남을 갖는 자리에 나가본 적이 있다. 그때 교수님의 일성이 앞으로 일반교육과 특수교육의 경계는 의미가 없을 것이다.” 라는 말씀이었다. 그러니 일반교육을 하고 있는 나도 특수교육에 대해서 알아야 하고 그 반대도 성립되어야 한다는 주장이신 거다. 이 책의 메시지와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 이분들이 바라보시는 것은 완전통합이다. 완전한 어울림. 조은이와 그 친구들처럼 말이다. 그러나 작가의 말처럼 아직 갈 길이 먼것은, 특수학교를 짓겠다는데도 이토록 반대를 하는데 완전통합의 길은 얼마나 어려울까 하는 점이다.

 

가장 아픈 것은 장애를 형벌처럼 바라보는 시선이다. 물론 장애는 참 불편하다. 앞에 말한 그 교수님도 양팔이 없는 장애인이었다. 그래서 간식 시간에 옆에 앉은 선생님께서 계속 음식을 집어 입에 넣어드렸다. 나도 모르게 얼마나 불편할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먹고 싶을 때 알아서 집어먹을 수도 없고 주세요, 그만요. 이런 말을 해야 먹든지 멈추든지 할 수 있다니.... 나의 체감은 그정도 만으로도 끔찍한 것이었다. 가끔 TV에서 나오는 중증장애와 그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 마음이 안좋아 채널을 돌릴 때도 있다. 그럴 때 나의 마음은 느끼는 것 같다. 형벌 같다고....ㅠㅠ 기본적으로 나는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처지에 대해서 비참하다고 여기는 것 같다. 그런 마음의 장벽부터 거두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재작년에 친정아버지와 시어머님이 몇 달 간격으로 하늘나라에 가셨다. 병원에 길게 계시진 않았다. 그 짧은 기간에도 나는 남의 수발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처지가 가엾고 힘들었다. 위로하려고 친구가 보낸 문자에 나는 웃자고 이런 답장을 보냈다. “, 내 발로 걸어가 똥싸는 게 행복인거야.” 그러자 친구가 그래, 맞아. 힘내라.”고 답을 했다. 남의 도움이 필요한 처지. 누구나 될 수 있고 그게 길 수도, 일평생일 수도 있다. 이것에 대한 자연스러움과 당연함, 비참하지 않게 남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회. 그것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회. 이것이 학교잖아요?라고 묻는 우리가 바라는 사회가 아닐까.

 

물론 그것은 나 혼자 마인드만 가진다고 되지는 않는다. 일단 내가 큰마음을 먹고 장애학생을 맡았다고 해도주변 학생들이 따라주지 않고, 학부모들이 이기심만 내세우며, 보조 인력의 도움과 전문가와의 협업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에 내팽겨 쳐진다면 하다가 포기하고 말 것이며 그 경험이 아이에게 또 하나의 상처로 남을 수 있을 것이다. 함께 나아가야 할 부분이 많다.

 

이 책도 함께 나아가는 한 발걸음이다. 쉽게 금방 읽히지만 아직 갈 길이 먼우리나라의 특수교육 현실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할 수 있는 책이라 생각한다. 많은 분들이 읽으시고 하나씩 조금씩 나아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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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 심청을 만나다 - 마음속 상처를 치유하는 고전 속 심리여행
신동흔.고전과출판연구모임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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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흔 교수님의 <스토리텔링 원론>을 읽고 뭔가 더 읽고 싶은 생각에 저자의 책 중 안읽은 책을 2권 구입했다. 그중의 한 권이다. 읽기 편하고 재미있다. 신동흔 교수 혼자 쓴 책이 아니고 그의 제자들?(젊은 고전연구자들)이 한 꼭지씩 맡아 쓴 책이다. 작품에서 깊은 의미를 추출해내는 이런 공부는 참 재미나겠다. 특별히 이 책은 고전과 심리를 연결시켰다. 즉 고전 속 인물들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그들의 병적심리를 분석하는 것이다. 그 분석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고 해석에 관해서 이견은 있을 수 있다고 본다. 뭐 딱 떨어지는 것이 세상에 얼마나 있겠는가. 어찌보면 코에걸면 코걸이 귀에걸면 귀걸이일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이런 공부가 더 좋다. 어, 정말 그렇네? 와~ 심히 공감돼. 이런 느낌이 참 재밌다.^^

첫 꼭지는 신동흔 교수의 글이고 [장화홍련전]을 다뤘다. 여기서 병적 심리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바로 장화와 홍련이다. 그녀들의 문제는 '착한 아이'였다는 점이다. 슬픔과 괴로움과 억울함의 순간에도 '착해야'했던 아이들은 표출 못한 분노와 미움이 병이 되었다. 죽어 귀신이 된 자매는 살아서와는 달리 무섭다. 하지만 극중 죽음은 실제로는 꼭 '죽음'이 아닐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 무서움은? 섬뜩하다.
교실에도 착한 아이들이 있다.(그리 많진 않음^^;;;) 편안한 착함과 불안한 착함으로 나눌 수 있다. 편안한 착함을 가진 아이의 특징은 무심함이다. 그냥 천성이 그래서 그러는 것일 뿐 자기가 그런다는 걸 의식하지도 않고 보답을 기대하지도 않는다. 무엇보다 이 아이들은 간 쓸개까지 꺼내주진 않고 지킬 건 지킨다. 문제는 불안한 착함이다. 이게 경계가 명확한 건 아니라서 진단도 쉽지 않지만 진단해도 딱히 도와주기 어렵다. 내 마음도, 남의 마음도 마음을 다룬다는 건 어쨌든 어렵다. 고전이 있다는 건 그래서 참 다행이구나 싶고, 이런 오래된 심리의 문제를 담고 전승되어 왔으니 과연 고전이구나 싶기도 하다.

가장 놀랍게 읽었던 꼭지는 [이춘풍전]이다. '세상에서 가장 고약한 버릇'이라는 제목의 이 꼭지는 '이춘풍전이 경고하는 허용적 양육의 문제점'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부모의 양육 스타일을 나누고 장단점을 분석하는 이론들이 많은데 요즘은 허용보다는 강압적 양육의 문제점이 더 부각되는 것 같다. 하지만 같은 무게로 허용적 양육도 문제일 수 있음을 이 글은 역설한다. 특히 과잉자존감에 대한 지적이 내게는 약간 충격이었다. 모든 어긋난 행동의 기저에는 충족되지 않은 자존감의 문제가 있다고 배웠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그걸로 설명이 안되는 아이들도 있다. 그 아이들의 문제가 바로 이것이 아닐까 싶다. 본문을 몇 줄 옮겨본다.

"..... 이와 같이 과장된 자존감은 타인과의 관계, 특히 부모의 평가에 의해 현실적인 수준으로 낮아지게 된다. 그런데 부모의 허용적인 태도는 어린아이들이 지나치게 높게 평가한 자기 가치를 진실인 것처럼 믿게 하며 자연스러운 자존감의 현실화를 방해한다. 그 결과 아이들은 무의식 속에서 자신을 대단히 우월한 존재, 더 이상 자기 계발이 필요하지 않은 완전한 존재로 여기게 된다.
춘풍도 부모로부터 과도한 애정을 받아 지나치게 높은 자존감을 지니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로 인해 형성된 자기 가치에 대한 확신이 자기중심적이고 오만한 성격을 만들어낸 듯하다. 먹고 놀기만 해도 가치있는 존재였던 어린 시절의 자존감이 그대로 굳어졌으니 어른이 되어서도 먹고 노는 일 외엔 관심을 둘 필요가 없다. 절제할 줄 모르는 어린아이의 습성으로 평생을 살아온 탓에 어느새 그 습성이 몸에 배었으니, 그리 방탕한 이유를 알 만하다."

현실적으로 아이들을 격려하여 자존감을 높여 주어야 할 필요를 많이 느끼지만 드물게는 '주제파악'을 시켜주고 싶은 욕구가 치밀 때도 있다. 나는 이런 나에게 죄의식이 많았다. 이제 그러진 않아도 될 것 같다. '주제파악의 현명한 방안'이 필요할 뿐이다. 한 인간은 온 우주보다 소중한 존재인 동시에 바닷가 모래알만큼 보잘것 없는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이 균형을 잘 갖추는 것이 중요하겠다.

반사회적 성격 장애를 다룬 [변강쇠가]도 놀라웠는데, 난 사실 변강쇠와 옹녀의 이름만 들었지 결말을 잘 몰랐기 때문이다. 변강쇠는 힘만 좋을 뿐 아주 몹쓸 숭악한 놈이었고 마지막 가는 길 또한 그러했다. 여기서 욕망에 집착한 삶의 파괴력을 다시 보게 된 것 같다. 세상에 욕망의 종류는 많으니 변강쇠의 욕정은 그것을 대표하는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병적인 욕망. 무섭다.... 사회가 그것을 부채질하지 말았으면 한다. 그냥 나처럼 약간 무기력한듯 사는게 차라리 나을듯....^^;;;;;

옛이야기의 원형에는 무의식에 작용하는 심리적 효과가 있어서 이야기를 재화할 때는 그 원형을 손상시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주장을 여러 책에서 보았다. 이 책에는 그런 주장이 직접적으로 나오진 않지만 원형 그대로만 분석해도 이리 많은 내면의 이야기들이 나오는 걸 보니 일단은 원형에 충실한 작품을 먼저 읽는 게 순서라는 생각이 든다. 패러디 작품들은 그 뒤에.... 예를 들면 심청이 인신공양을 한 것은 효도가 아니라며 [심청전]을 다시 쓴 패러디 작품들이 있는데, 사람들이 답답하게 여긴 문제들이 분명 작품 안에 존재하지만 잘 들여다보면 작품 안에서 나름의 방향성을 갖고 해소가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심청이 아버지를 놓고 떠나 인당수에 빠진 것은 '강박적 책임'에서 벗어나 각각 홀로 거듭난 것이다. 그러니 단순히 답답한 효의식만을 보여주는 작품은 아니라는 것이다. [흥보가]를 보면서도 현대의 사람들은 무능하고 답답한 흥보에게 비호감을 표현하고 놀부의 매력을 애써 부각시키려 하지만 어쩌면 놀부를 좋아하고픈 우리의 심리는 자본주의 중에서도 천박한 자본주의를 따르는 심리일 수도 있다.

얘기가 너무 길어지니 꼭지들을 다 언급할 수는 없겠다. 완벽주의를 다룬 [홍계월전], 자수성가한 이가 가진 강박성 성격 장애를 다룬 [옹고집전] 등 모든 분석들이 흥미로웠고 해학으로만 여겼던 [배비장전]에 숨어있는 다수의 폭력성(따돌림의 쾌감)에 대한 분석은 뜨끔하기도 했다. 이런 해석 자체를 정답 삼아 이 렌즈로만 작품이나 인간을 보는 것도 어쩌면 위험할 것이다. 그래도 무심코 들어넘기거나 별거 아니라 생각했던 고전들 속에 이런 심리적 해석이 풍성하게 가능하다는 사실이 재미있고 기분 좋다. 퍼내도퍼내도 끝없는 이야기의 샘물은 신이 인간에게 주신 화수분 같은 선물임에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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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며칠 모처럼 온가족이 모였기에 삼시세끼 먹이기에 집중하다 오늘은 잠깐 혼자 바람쐬러(?) 나와서 <인생 후르츠>를 보았다.

전직 건축설계사였던 할아버지와 그의 아내인 할머니의 평화로운 노년 이야기다. 설계사 시절 할아버지의 철칙은 자연과 함께 하는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었고 두분은 그런 집에서 온갖 유실수와 채소들을 키우며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날 할아버지는 90세를 일기로 자는 듯이 눈을 감으셨고 할머니는 아직도 남은 삶을 살아가고 계신다. 할아버지와 공유하던 이런 원칙을 늘 되새기며.
"스스로 꾸준히"
"차근차근 천천히"

이분들의 노년이 너무 아름답기에 이들의 원칙에서 나와의 공통점을 찾아보려 하였다. 일단 '꾸준히'와 '천천히'가 나와 일치한다. 나는 관심사가 적어서 그냥 한가지를 줄창 한다. 그걸 좋~게 말하면 '꾸준히'라 하겠다. 또 나는 느리다. 어디서 닉네임을 정해야 할 때 난 '달팽이'나 '나무늘보'로 정할 때가 많다. 나는 일도 걸음도 느리다.

하지만 느린 것은 몸 뿐이다. 마음까지 느리진 않다. 이 격차는 조급함을 만들어낸다. 느린 내 몸을 마음이 채근하는 셈이다. "너 뭐하고 사니? 그래서 뭐가 될래?"

그러니 이 아름다운 노인들을 닮으려면 난 마음이 천천히 가는 연습을 해야 할 것 같다. 진심으로 "급할 것 없어" 라고 말해주며 그것에 만족하는 연습.

가장 거리가 먼 것은 '스스로'다. 자신이 먹을 것을 자신이 가꾸며 자연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몸을 쓰며 사는 삶이다. 가만 보면 두분은 일찍 일어나 하루종일 이것저것 살피며 몸을 쓴다. 이거 난 정말 취약하다. 지금도 집에 사소한 문제라도 생기면 무릎도 불편하신 아버님이 다 해주신다. 늦잠 자는 건 나의 낙이다. 이분들의 삶을 닮기에 너무나 거리와 한계가 있네.....ㅠㅠ

마지막 자막. "오래 살수록 인생은 더 아름다워진다." 공감이 되진 않는다. 하지만 정말 그렇다면 좋겠다. 아름답고 좋은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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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겨울에 본 세 편의 영화에 주관적 순위를 매긴다면 : (1.그린북 2.인생 후르츠 3.레토)다. 그린북은 재미있으면서도 심각하고 웃기면서도 찡하고 통쾌하면서도 따뜻했다. 인물들은 멋지다가도 짠하고 한심하다가도 믿음직하고.... 인간이란게 보통 그렇지 않은가. 난 이런 영화가 좋다. (이 영화를 보며 내 취향을 보니 비유와 상징으로 표현한 영화는 골치아파서 싫고 끔찍하거나 무서운 것도 싫고 그냥 직접적으로 말하는, 살짝 웃기고 의미도 있으며 따뜻한 감동이 있는 영화를 좋아하는듯)

1962년. 내가 태어나기도 전이니 지금보다 차별의 문제는 더욱 심각했을 것이다. 미국에 흑인차별이 남아있던 때. 흑인이 출입할 수 있는 식당, 숙소, 화장실 등등이 따로 있어서 흑인과 백인을 구별짓던 때.
클럽에서 해결사 노릇(?)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던 토니는 셜리라는 천재 피아니스트의 공연 투어에 운전기사로 고용된다. 이것은 당시로선 꽤 눈에 띄는 조합이었다. 흑인 고용주와 백인 고용인.

운전석의 백인과 뒷좌석의 흑인 장면이 가장 많이 나오는 장면 아닐까 싶은데 둘이 나누는 대화에 영화 보며 잘 안웃는 나도 어느새 웃고 있곤 했다. 우아하고 교양이 철철 넘치는 흑인 고용주에 비해 단순 무식 백인 운전사는 비속어 남발에 매너라곤 찾아볼 수 없어서 저렇게 극과 극인 사람들이 어찌 두 달간 함께 여행을 하겠나 보는 사람이 다 걱정될 정도였는데.....

함께 하는 시간과 공유한 경험들은 두 사람의 거리를 좁혀주었다. 백인 건달은 흑인 고용주가 당하는 차별을 온몸으로 함께 느끼게 된다. 늘 우아함과 꼿꼿함을 잃지 않던 셜리가 무너지는 장면에 가슴이 먹먹하다. "당신보다 내가 더 흑인스럽다." 는 토니의 발언에 셜리는 평정심을 잃고 차에서 내린다. "돈많은 백인들이 돈을 주고 나에게 공연을 시킨다. 공연을 마치고 나면 나는 똑같은 검둥이일 뿐이다. 흑인들은 흑인들대로 내가 자신들과 다르다고 한다. 충분히 백인도 아니고 충분히 흑인도 아니고 충분히 남자도 아니면 대체 나는 무엇이냐" 며 절규한다.(영화는 책이 아니라서 정확한 대사를 기억할 수가 없음ㅠ) 셜리의 단정한 모습에서 풍기던 외로움과 슬픔을 토니는 모두 이해하게 된다.

마지막 공연만 하면 모든 계약이 순조롭게 끝나는데, 여기서 그들은 또 가당치않은 차별과 마주한다. 당당히 공연을 째고 걸어나와 건너편의 허름한 바에서 연주한 즉흥공연. 가장 빛나는 공연이었고 처음으로 셜리의 진정한 웃음을 본 공연이기도 했다.

이 영화의 웃음코드는 토니가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에 있었다. 졸지에 토니를 '문학청년'으로 만들어준 편지. 그 사연은?^^
마지막 운전대를 잡은 사람이 토니가 아닌 셜리였다는 점도 좋았다. 아마도 별 다섯 개 중 마지막 한 개는 여기에서 주게 된 것 같다.

인간의 본성은 확실히 선하진 않다. 하지만 이런 영화를 보면서 느낀다. 역사는 조금씩 나아가고는 있구나.^^

기억에 남는 대사(이것도 기억이 확실치 않음)
1. 품위가 늘 승리하는 거요. (토니의 폭력적 해결이 일을 더 꼬이게 만들었을 때)
2.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용기가 필요해요. (마지막 공연을 앞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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