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동 인간 이시후 창비아동문고 342
윤영주 지음, 김상욱 그림 / 창비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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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레벨 업>을 읽고 이 작가님의 후속작을 기다리신 분이 많을 것 같다. 첫 작품이 화제작이서 그런지 이 책도 메인화면에 노출이 많이 되어서 아 나왔구나 했다. 첫 책의 후속편인가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건 아니고 새로운 작품이다. 소재는 제목에서 바로 알 수 있다. 냉동인간.

냉동인간을 소재로 잡은 작품들이 이미 꽤 나왔다. 아직은 실현되지 않은 기술이니 이것은 공상과학이 맞다. 하지만 이 작품은 이미 우리가 그 속에서 살고있는 것처럼 현실 같았다. 지구 환경이 매우 악화되어 돔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배경인데도 불구하고. 그 돔은 1지구부터 64지구까지 있다. 이 번호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었다. 시후가 냉동에서 깨어난 1지구(센트럴)는 부족할 게 없는 최고의 환경을 가졌다. 그러나 그것은 ‘1’지구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다면 64지구의 모습은 어떠할지 상상하기도 어렵다. 그 차이는 왜 생기는 것이겠는가? 지금도 마찬가지다. 미래에 그것이 극복되리라 기대하기 어려우니, 이 설정은 매우 현실적이라 하겠다.

깨어난 시후는 자그마치 40년이 흘렀다는 사실에 놀란다. 동생 정후가 50살이라니... 그리고 엄마 아빠는? 할머니는? 궁금하지만 냉동인간 기업 프로즌에서 나온 직원은 가족에 대한 설명은 회피하고 다양한 검사 등을 하느라 1주를 보낸다. 시후를 모델로 광고영상을 찍는 일도 빼놓지 않는다. 드디어 동생 정후가 데리러 왔다. 50살 아저씨가 된 동생 정후는 시후를 반기지 않을뿐더러 눈도 제대로 마주치치 않는다. 이때부터 불길하다. 시후가 깨어난 일은 기뻐할 일이 아닌가? 그렇다면 자신의 선택으로 40년을 보낸 것도 아닌 시후는 얼마나 당황스럽고 억울할까?

그런 일은 일어났다. 정후의 집은 돔들을 지나가며 도무지 나타나지 않았다. 44지구에 이르러서야 정후는 집을 향해 차를 몰았다. 44지구라니.... 예상 밖이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시후는 긴장한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정후와 정후를 따라온 딸(시후에겐 조카) 보라 뿐이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것은 예상했지만 엄마, 아빠는? 시후는 충격적인 결말을 듣는다. 그리고 깨닫는다. 그 모든 비극이 자신 때문이라는 걸. 자신을 유지하는 데에 엄청난 희생이 따랐다는 걸. 냉동인간 회사들을 모두 통합하여 독점기업이 된 프로즌은 계속해서 비용을 요구했고 여러 이유를 대며 그 비용이 계속 상승했으리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일은 양쪽 모두에게 불행하다. 평생을 거기에 매달려 힘들게 살아간 가족들, 그리고 냉동인간 본인.... 자신을 위해서 희생하라고 요구한 적 없다. 내가 원한 일이 아니다. 가족이 날 너무 사랑해서 설득했던 일이란 말이다. 그런데 깨어나서 보니.... 아 상상만 해도 너무 싫다. 이 상황을 보자마자 나는 바로 이 기술에 대한 반대론자가 되었다. 이것이 작가님의 의도인가?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다. 여기까지는 전반부고 정후와 그의 딸 보라가 사는 집에 시후가 들어와 살면서 보라가 다니는 학교에 함께 다니며 벌어지는 일이 후반부를 차지한다. 여러 가지 힘든 일들이 있었고 갈등도 있었으나 그걸 극복해나가는 과정이 꽤 흥미롭고 감동적이다. 미래를 다루었지만 현실동화처럼 느껴지는 서사였다.

4학년 사회교과서에 1965년의 만화가 한 컷 실려있었다. ‘2000년대의 이모저모’라는 제목으로 미래에 대한 상상을 나타낸 만화였는데, 그중 대부분이 지금 실현되어 있었다. 달나라에 여행을 간다... 이런 것만 빼고는. 아이들과 함께 구석구석 살펴보며 은근히 놀랐다. 그렇다면 지금 “냉동인간 기술로 불치병을 고친다.” 이 상상은 미래에 실현될까? 나는 그 만화가만큼 미래에 대한 감각이 있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학은 그만 발전해도 좋을 것 같다. 앞으로의 과학은 그저 망가진 지구를 고치는 데 사용되면 좋겠다. 이것이 그저 단순한 내 생각이다.

AI 기술로 수업을 바꾸고, 심지어 창작의 영역인 작곡이나 글쓰기도 해준다는데 나는 그게 왜 좋은지 모르겠다. 시간을 아껴서? 그 시간을 아껴서 뭐할라고 그러는 걸까? 이렇게 싫어해서 나는 시대에 뒤떨어진 인간이 되어간다. 예를 들면 이 글도 거기에 넣었다 빼면 기름바른 장어처럼 쭉 빠져서 나올 텐데 그걸 안해....

시후의 자작곡 제목이 ‘멜팅’이다. 영어인 그 제목이 썩 맘에 들진 않았지만 냉동기업 프로즌과 반대 의미를 사용한 점에 동의하고 공감한다. 인간성을 상실해가며 하는 성장, 발전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 사회는 성장에 열광하기보다 머리가 돌진하며 떨어져나가는 꼬리를 살펴야 한다. 우수수수..... 떨어져나가는 소리가 안들리십니까? 뒤늦게 발견한다면 때는 늦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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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인형극본 선집 - 한영 대역본
선욱현 엮음, 유니마 코리아 옮김 / 평민사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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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잘 모르지만 인류의 시작과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알고있다. 그럼 앞으로의 운명은 어떠할까? 계속 살아남을 수 있을까?

가성비를 따비는 시대에 (나도 엄청 따짐) 연극처럼 가성비 떨어지는 것도 드물다. 언젠가 직장동료 한분이 대학 동아리 OB팀으로 연출을 해서 공연을 올리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몇달동안 거기에 매달렸지만 공연은 하루면 끝.... 그 애씀을 알기에 참 허무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영화면 필름이라도 남지 말이야....

하지만 그게 연극의 매력이라나? 연극이라는 행위는 뭔가 인간의 본질과 맞닿은 어떤 속성이 있는게 아닌가 싶다. 공연으로 돈버는 사람들도 있기야 하겠지만 연극판에선 작가도 연출도 배우도 다 가난하다. 그래도 이것을 사랑하는 것을 보면.....

이 극본집이 나온 것을 보고 동네 도서관에 신청했더니 얼마후 구입, 비치했으니 대출해가라는 연락을 받았다. 신청자가 우선적으로 대출할 수 있는 기간이 있는데 깜빡하고 그걸 놓쳐버렸다. 혹시나 하고 갔는데 역시나 손하나 안타고 신간코너에 그대로 놓여있었다. 연극도 볼까말까한데 극본집을 볼 독자가 얼마나 될까?

나는 연극에 문외한인데다가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지도할 역량도 그닥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래도 최대한 연극의 요소를 많이 넣으려 노력.... 이라기보다는 그렇게 하는 걸 좋아한다. 이 극본집을 읽으며 교실에서 구현 가능한게 있나 라는 관점으로 읽었는데, 이게 인형극이기도 해서 대본만으로는 알 수 없고 내수준엔 어려워 보였다. 일부 약간 참고할 수는 있을 것 같다.

극본이라는 특유의 형식이 있긴 하지만 결국은 이야기다. 수록작품 중 <이야기 쏙, 이야기야!> 라는 작품에서 말하듯이 이야기는 어쩌면 살아 움직이는 것이어서 인류와 지금까지 함께 해온 것이다. 모든 극본들이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가졌다. 재미있고 웃기고 어떤 작품은 슬프고 애타고, 괴롭기도 한... 우리가 살아왔고 살아가는 이야기들이었다. 무대에서 구현되었을 때 살아 움직인다는 특징을 가진 글들이라 하겠다.

마지막 오판진 선생님의 상세한 서평이 달려있어 이해를 도와준 점이 좋았다. 이런 책도 독자들을 좀 찾아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참! 영문번역도 실려있다. 나름 작업을 많이 한 책인데 도서관마다 한권씩은 있으면 좋겠다. 대중성은 약해도 가치가 있는 책. 이 책이 그런 책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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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호
탁동철 지음, 나오미양 그림 / 양철북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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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내가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세계가 있다. 같은 교사라고 해도 이 책의 담임선생님과 나는 전혀 다른 경험 속에서 살아온 사람이다. 작가의 말에서 작가님이 30센티 안쪽 오그린 세계에 갇힌 아이들이라는 표현을 쓰셨는데 나도 사실 그 부류에 속한다. 이렇게 더운 날엔 에어컨 없는 곳에 한발자국도 나가기 싫어하는, 자연은 그저 '거기 잘 있기만' 하면 좋겠는 부류. 이 책도 에어컨 빵빵한 까페에 와서 읽었다. 작가의 말 마지막 문장 "책을 읽는 여러분도 장호와 친구들처럼 30센티 너머 세계를 만날 수 있기를. 자기 말과 감각을 되찾고, 자연 속에서 생생하게 자라나는 자연의 아이가 되기를." 이 바람이 나에게 적용되기는 영 틀렸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라도 느껴보는 것이 아예 모르는 것 보다는 낫다. 작가님의 바람처럼 아이들이 이 세계에 대한 감각을 영영 잃어버리지 않았으면 한다. 그건 너무나 중요한 것을 잃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이 '거기 잘 있기만' 할 리도 없고.

산골 마을 중에서도 더 깊이 들어가 홀로 있는 집에 장호 할아버지 댁이 있다. 택배도 닿지 않아 이웃집에 내려와서 찾아야 하는 곳이다. 웬만한 아이들 같으면 하루도 못버티고 도시의 문명에 목말라 칭얼대겠지. 하지만 장호는 절대 다른 곳에 가지 않으려 마음먹었다. 아주 어릴때도 여기 맡겨져 할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체득한 자연의 감각이 여전히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또다른 이유는 장호가 너무나 상처받았기 때문이다. 만신창이가 된 짐승처럼.

부모의 불화와 폭력, 헤어짐의 추한 과정은 장호의 마음에 불에 데인 상처처럼 선명하게 새겨졌다. 그뿐이 아니다. 학교에서도 악랄하게 괴롭히는 아이가 있었고, 참았던 분노가 터져나온 날, 감쪽같이 구도가 바뀌어 있었다. 흔한 일이다. 평상시 가해자는 이럴 때 피해자 코스프레를 오지게 한다. 장호는 한순간에 가해자가 되어있었다. 실제로 안해야 하는 행동을 한꺼번에 많이도 했다.ㅠ 사지에 몰린 장호를 할아버지가 다시 데려갔다. 주변인들은 마음의 병, 대인기피증, 분노조절 장애, 치료 등등을 언급했지만 할아버지는 귀를 닫았다. 몇달간 등교거부도 용인하고 지켜보던 할아버지는 학년이 올라가는 3월, "할아버지랑 계속 살려면 학교에 가야 한다"고 선포하셨고 장호는 코뚜레 꿰인듯이 괴로워하며 학교에 간다. 다니던 도시 학교와는 딴판인 산골 학교로.

그곳의 담임 선생님은 아마도 작가님인 듯. 그리고 작가님 또한 산골 태생으로 자연과 어울려 자라신 것 같다. 겪어보지 않고는 쓸 수 없는 표현들이 곳곳에 있다. 아이들은 억세고 선생님 말을 순순히 듣지 않는다. 이런 아이들의 말과 행동에 상처받지 않고 능숙하게 받아쳐가며 지도하시는 작가님은 보통 고수가 아니시네. 언뜻언뜻 보이는 수업장면도 그렇고 텃밭이든, 사육이든, 바깥 활동 모든 것이 나로선 엄두를 내기 힘든 것들이었다. 아이들은 때로 만용을 부려 엄청난 일을 도모하다 실패하곤 했는데, 내가 알았다면 결사적으로 말릴 위험한 일들이었지만 이 동네 교사나 어른들은 적당히 눈감아 주다가 어떤 때는 나타나서 도와주시기도 했다. 이런 모습이 얼마나 남아있는 걸까. 아예 접해본 적도 없는 나는 가늠하기도 어렵다. 사라지지 말았으면 하고 바랄 뿐.

이곳에서 사계절을 지내며 꾹 닫았던 입을 열고, 마음이 열리고, 장점을 발휘하며 인정도 받고, 꽤 멋진 처신도 하면서 자신을 찾아가는 장호의 모습이 흥미롭게 그려진다. 그 과정에서 아주 은근한 담임의 배려도 잘 보면 보이고, 다들 허술하지만 함께 성장하는 조연 어린이들의 캐릭터도 각각 재미있다. 마지막 썰매 장면에선 가슴이 활짝 펴진 장호의 모습이 느껴지는데 여기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억지스럽거나 부자연스럽지 않게 잘 표현되었다.

교사 입장에서 이 책을 읽는다면 아이가 마음을 여는 이 지난한 과정의 실마리를 어떻게 풀며 어떻게 인내해야 할지 고민을 하게 될 것 같다. 그건 아마도 이 책보다도 훨씬 어려울 테니까. 아이들이 읽는다면 장호가 일깨우는 자연의 감각에 조금이라도 귀를 기울이게 된다면 좋겠다.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한 게 있다. 아이들의 성장과정에서 두 가지가 필수구나. 하나는 자연이고 또하나는 함께하는 친구. 갈수록 둘 중 하나도 가질 수 없도록 아이들을 몰아대는 시대이니 어찌 위기라 하지 않을까.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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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훈이의 캔버스
함영기 지음 / 푸른칠판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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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영기 선생님의 『교육사유』 책이 참 좋았던 기억이 있다. 적어놓지 않았더니 내용은 거의 잊어버렸지만.... 내용과 함께 문장도 참 좋다고 느끼다가, 아참 이분 수학선생님이라고 했는데? 이과이신 분이 감수성은 문과시네 라고 내 맘대로 생각했던 기억이....^^;;

그 감수성의 결정판이 이 소설인 것 같다. 작가의말에서 소설인지 에세이인지 르포인지 잘 모르겠다고 하셨지만 일단 나는 소설이라고 간주하고 쓰겠다. 여섯 편의 단편이 모인 책이다. 각 주인공은 다른 작품에서 주변인물로 다시 등장하기도 하므로 독립된 단편이라기 보다는 연작이라 하는 편이 맞겠다. 책 속의 인물은 교사였던 작가 자신이기도 하고 작가가 만난 제자들이기도 하다. 마음을 다해 제자들과 만나왔던 작가였기에 경험과 사유가 소설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한편으로는 파란만장한 교직인생은 누구나 소설로 남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소설로 치면 몇 권이다.” 이런 말 흔히 하지 않나. 물론 그걸 아무나 쓸 수 없다는 게 문제지만. 일단 나는 그럴 문학성도 없고 남한테 펼쳐줄 이야기도 없다. 내 기준으론(?) 다행스러운 지난날이었다고 할까. 별일은 없었다는 거니까......

첫 번째 작품 [그날 새벽] 이 작품이 단독으로 나왔다면 웬 철지난 운동권 감성이냐 했을 것 같다. 파장한 장터에서 부는 쓸쓸한 바람 같다고 할까. 하지만 그 젊은 주인공은 이후 작품에서 청소년 주인공들의 교사로 나온다. 딱 부러지게 말하고 있진 않지만 짐작할 수 있게.

[춤을 추다]에 나오는 지영이와 상헌이가 친해지는 모습이 난 보기 좋았다. 흔히 나오는 청소년 썸타는 얘기가 아니었다. 얘네들은 어린 나이에 벌써 인생의 무게를 짊어진 아이들이었다. 그들의 연대감이라고 할까. 상헌이가 태권도장에서 ‘사범 형’으로 일하면서 관장님이 쥐어주신 돈으로 지영, 지영 동생들을 불러 ‘초원식당’에서 삼겹살을 함께 먹을 때, 그건 시혜가 아니었다. 밥친구였다. “혼밥이 제일 맛있다”고 떠들고 다니는 나는 얘네들보다도 인생을 모르는 거다. 눈물젖은 혼밥을 먹어본 사람은 이렇게 밥친구의 존재에 고마움을 느끼게 되는 거다. 늦은 저녁 함께 귀가하는 길, 느닷없는 지영의 춤, 얼떨떨하게 보다가 태권도 품새로 응수하는 상헌. 아이들의 광란(?)은 그들 나름의 축제였다. 가장 절실한 축제. 짠하고도 아름다웠다. 그들은 지금도 잘 살고 있지 않을까.

[시발 롤 모델] 이 아이 이야기는 몇 년 전에 함 선생님이 페북에서 하셨던 것 같다. 말하자면 거의 실화? 자기 기분 상하게 했다며 사과하라고 교사를 다그치던 그 패악한 놈이 결국엔 당신이 롤 모델이라고 고백했다니. 시발 소리 섞어가면서. 이런 애들 잘 보면 은근 귀엽고 짠한 데가 있지. 하지만 난 만나기 싫다. 너무 솔직해서 탈이지?;;;;;

[소라의 겨울] 이야기가 제목처럼 가장 시리고 아프다. 소라는 앞편에서 지영이의 친한 친구로 나오는데, 그때의 소라는 늘 밝고 명랑했을 뿐 아니라 어색한 자리를 자연스럽고 훈훈하게 채워주는 윤활유 같은 아이였다. 그런 소라에게도 아픈 가정의 문제가 있었고 결국 최악으로 치달아 소라 또한 참혹한 일들을 당하고 극단적 위기에 몰렸다. 청소년 쉼터에서 지영이에게 보낼 기약도 없는 편지를 쓰는 소라.... 그나마 쉼터라는 곳도 있고, 그들을 돕는 직업인들도 있지만 (없는 편보다는 훨씬 낫지만) 그래도 가정이라는 최소단위의 울타리가 박살나버린 아이들을 대신해줄 존재는 찾기 어렵다. 소라가 다리에 힘을 넣고 일어서기를 기대할 수밖에... 그 편지가 지영이에게 전달되고 중학교 시절 그랬듯이 서로의 사정 빤히 알고 무심한 듯 연대하던 그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일까. 힘들고 아픈 것은 감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게 가능하기를....ㅠ

표제작인 [지훈이의 캔버스] 속의 지훈이는 지영이의 동생이다. 청각장애가 있어서 학업에 흥미를 잃고 많이 뒤쳐져 있다. 담임은 지훈이를 배려해 가운데 앞자리에 앉혔지만 가장 잘 보이는 그 자리에 앉아 지훈이는 낙서만 할 뿐이다. (그 일로 젊은 여선생님을 화나게 하기도) 하지만 지훈이의 낙서는 그림으로 진화해갔다. 그 진화는 날로 수준을 더해갔다. 교실의 곳곳이 ‘지훈이의 캔버스’가 되었다. 지훈이의 타고난 재능 때문이지만 그것만으로 가능했을 리가. 구박하지 않고 무심히 판을 깔아준 선생님의 배려 때문이었다. 이런 희망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면 좋겠다. 책임감이 무겁다 해도. 최근 일련의 사건들은 교사들을 사지로 몰아넣으면서 동시에 책임감 따위 벗으라고 강요하는 듯했다. 이 편의 마무리가 신파같아 보여도 절대로 코웃음을 치지 않겠다. 내가 못했다고 남도 하지 못하란 법은 없으니까. 나는 이제 퇴직을 고려하고 있는 늙은 교사지만 후배들의 교직생활에 이런 보람도 있기를 빌겠다.

마지막 [정수야 정수야] 속의 정수는 선생님이 아주 젊을 때 만났던 제자다. 삼십 년이 흘러 페이스북에서 연결되었다고 한다. 제자의 나이도 벌써 오십이 되었다. 그 또한 청각장애를 가진 학생이었고 부모 잃고 친척에게도 버려져 서울역 앞에서 미아가 되어 결국 농아원에서 살며 학교를 다니던 아이였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보청기 매장을 운영하고 있는 성실한 생활인이다. 이 작품은 교사가 그 제자에게 쓰는 편지처럼 서술되어 있다.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오늘은 네가 내 선생이다. 아마 앞으로도.”
이렇게 존경스러운 제자도 있는 것이다. 참 감사하게도.

먼저 퇴직하신, 말하자면 교직의 선배님이신 작가님의 (아마도 거의) 자전적인 이야기들을 읽으며 재미있기도 했고 가슴 아프기도 했고 나를 성찰하기도 했다. 소설이니까 이야기로 가볍게 읽어도 되지만 때로 무겁게 다가오기도 하고 교직이 처한 상황에 공감하게 되는 부분도 많있다. 겪은 이야기라 해도 이런 서사력을 가지신 선생님(수학 선생님!)이 부럽기도 하다. 표현력도 상당하시다. 사실 처음에는 쭉 구입해오던 출판사의 책이라 자동적으로 구입한 이유가 컸는데, 읽고 나니 마음껏 추천할 마음이 솟아나서 왠지 보람있다. 아담한 판형에 표지도 예쁘고 페이지당 편집도 적절해 가독성도 높다. 읽어보면 다양한 상념들이 다가올 책으로 추천한다. 소설로 보는 교육사유라 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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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더지의 조금 용감한 하루 작은 곰자리 84
마야 다츠카와 지음, 장미란 옮김 / 책읽는곰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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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받은 두더지와 초대한 토끼. 완전 반대 성격이다. 흔히 쓰는 말로 하면 토끼는 외향인이고 두더지는 내향인이랄까. 남을 일부러 초대해 자기 집에 여럿이 모여 신나게 노는 걸 즐긴다면 누가봐도 외향인 맞겠지. 그리고 그 초대에 부담을 느껴서 (한편으로는 좋으면서도) 기껏 선물까지 준비해 길을 나섰으면서도 가도 될까, 돌아갈까를 고민하는 두더지는 극내향인이라 하겠지.

미국에 거주한다고 하는데 일본 이름인 걸 보면 일본계 미국인 아닐까 짐작되는 이 작가는 여러 작품을 냈지만 국내에 번역된 것은 이 책이 처음인 것 같다. 강렬하지 않고 부드러운 색감에 귀여운 그림이 처음 보는 것 같지 않고 익숙하다. 작은 일에도 큰 용기를 내야 하는 두더지의 마음과 행동을 친근하고 공감 가게 잘 표현해 놓았다.

토끼의 초대장을 보고 “이번엔 진짜 가야겠지?” 라고 생각하는 걸 보면 두더지는 그동안 번번이 초대에 응하지 못한 것 같다. 가기로 결심한 두더지는 토끼가 좋아하는 슈크림을 열심히 만들어 포장한다. “다른 친구들도 좋아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드디어 길을 떠났다. 가는 길에 오락가락하는 마음이 이 책의 절반을 넘는다. 땅 밑에서 온갖 고민을 하며 가고 있는 두더지와 땅 위에서 각각 선물을 준비해 신나게 가고 있는 다른 동물들의 모습이 대비되는 장도 있다.

드디어 토끼 집앞에 도착했고 집안은 벌써 떠들썩하다. 두더지는 들어가지 못하고 멈칫거린다. 그때, 똑같이 멈칫거리는 동물이 옆에 와 있었다. 스컹크였다. 눈치빠른 토끼가 어느새 나와 둘을 반갑게 맞지만, 둘은 선물만 주고 돌아선다. ‘둘이 친해지면 좋겠네’ 라고 생각하는 토끼는 외향인기만 한게 아니라 오지랖 백만평이구나. 오작교 캐릭터이기도 하다. 이런 사람도 세상에는 필요하다. 세상은 오지랖 넓은 사람들이 만들어가는구나 라고 느낀 적이 있었다. 피곤한 경우도 있지만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

토끼가 의도적으로 오작교를 놓은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어쨌든 같은 캐릭터의 둘은 마음이 통했다. 다음 장면에서 둘은 스컹크네 집에서 차를 마시며 이야기꽃을 피운다. 아마도 이럴 때 둘은 수다쟁이가 되지 않았을까. 그리고 토끼한테 말한 ‘다음에’에는 서로가 믿는 구석이 되어 좀더 적극적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나로 말하자면 토끼와는 거리가 멀고 두더지에 가깝다. 요즘 mbti로 사람을 소개하는 데 거부감이 많긴 하지만 어쨌든 나도 간이검사를 해보았는데 I가 100퍼가 나온거야! 진짜 극극극내향인인 거지. 뭐 그래도 만날 사람들은 만나가면서 살긴 한다. 하지만 내가 앞장서서 사람들을 모으거나 어딘가에 머리 디밀고 들어간 적은 한번도 없구나 깨닫게 된다. 그러지 않았다면 훨씬 좋았겠지만.... 이런 성격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람이라고 친구가 없진 않다. 나랑 똑같은 스컹크도 있는가 하면 반대인 토끼가 내 주변에 있기도 하다. 이렇게 어울려서 살아가는 것이다. 다 각자의 역할이 있고 모두가 있어야 균형이 맞는다.

두더지의 ‘조금’ 용감한 하루라고 제목을 지었다. 오늘 두더지는 용기를 냈지만 엄청나게는 아니고 아주 ‘조금’의 시도를 했을 뿐이다. 난 그게 맘에 들었다. 사람이 180° 바뀌어야 하나? ‘조금’ 용기를 내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교실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한걸음에 박수를 크게 쳐줄 용의가 난 얼마든지 있다. 다만 부류로 무리짓고 혐오하지만 말았으면 한다. 거절했던 친구에게 초대장을 또다시 보내고, 돌아서는 친구를 흔쾌히 배웅한 토끼처럼 말이다. 쓰면서 생각해보니 우리가 고려해야 할 다양성에는 이런 면도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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