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에 두 번 가는 사람은 진짜 부자라는 농담을 여행을 준비하며 알게 되었다. 사실 그동안 서울 물가가 미친듯이 올랐기 때문에 이제는 유럽 물가가 체감하기에 덜 부담스럽지 않을까 했는데 일단 숙소를 구하는 것부터가 문제였다. 잠만 잘 비지니스 호텔이라 해도 하룻밤에 30만원은 줘야 하기에 호스텔을 예약했는데, 4인 6인이 같이 잠을 자는 방도 하룻밤에 8-10만원은 줘야했다. 나이 들어 여행 다닐 땐 우아하게 호텔에만 머물 줄 알았는데. 그런데 그 사이에 뭐가 바뀐걸까? 15년 전 배낭여행 다닐 땐 호스텔에 젊은 아이들만 있었던거 같은데 이번에는 보니 호스텔에 가족끼리 머물기도 하고 은발의 노년 여행자들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그래서 결국, 나는 첫번째 밤을 보낸 호스텔에서는 같은 방을 나눠쓰는 여성 여행자들 중 가장 어린 여행자가 되어 있었다. 침대에 누워 피곤함에 눈이 감기는 순간에 왠지 혼자가 아니라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왜 그랬을까? 지금까지는 혼자 어디를 다녀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우리는 서로에게 콘센트 위치를 알려주고 타인을 배려해 일부러 불을 끄고 세수를 하느라 헤매는 사람을 위해서는 기꺼이 먼저 나서서 불을 켜주었다. 한 여자는 유럽을 도는 크루즈 유람선의 승무원으로 일하고 있다 했다. 동유럽에서 온 듯한 그녀는 내가 마시는 맥주를 보고는 호스텔 직원에게 "나도 저거 당장 줘요!" 소리치고 같은 방을 쓰는 여자들 앞에서 훌렁훌렁 옷을 갈아입으며 "쉿 같은 크루즈. 내리는 데도 다 쉿같이 볼 것 없는 데만 간다"고 소리쳤다. 나는 그녀가 좋았다. 그리고 긴머리에 까맣게 태닝한 피부의 말이 없이 웃기만 하는 이탈리아인 여행자도 좋았고, 나에게 독일 문학을 추천해준 사람은 당연히 더 좋았다. 아들이 스물여섯이라는 그녀는 베니스 비엔날레를 구경하고 바젤을 돌아본 다음 집으로 돌아갈 예정이라 했다. 나에게도 베니스 비엔날레를 꼭 보라고 했다.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다 보니 시내의 번화가에는 하얀피부에 눈부신 금발의 스위스인들이 주로 보이고 트램을 타고 외곽으로 나가면 이민자들의 비율이 높아진다. 트램에 앉아 있으면 이런 저런 말소리들이 들린다. 주로 독일어와 영어, 그리고 이탈리아어와 가끔은 프랑스어. 나는 자국의 언어가 없다는 감각이란 어떤 것일까 궁금해졌다.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정체성을 가지고 애국심이란 것을 쌓아갈 때에 수단이 되는 언어를 빌려온다는 그 감각은 어떤 것일까. 이미 수백년을 그렇게 당연히 살아왔으니 아무렇지도 않은 일일까? 몬드리안의 그림을 보면서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나의 색을 칠한 다음에, 다음에 칠할 색이 무엇인지 알아차리는 그 감각은 어떤 것일까? 


뮤지엄을 돌다 보니 국경을 넘어 독일로 가게 되었다. 지도에 선으로 그어져 있을 뿐 자전거를 타고 그냥 지나가기만 해도 되는 국경인건데 나는 독일이 되었단 이유로 못생겨져버린 경관과 늘어난 길거리의 쓰레기 그리고 거칠고 무뚝뚝해진 사람들의 태도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인간이란 어쩌면 악에 물드는 것보다 선에 물드는 것이 더 쉬운 존재 아닐지? 겨우 며칠 순한 나라에 있었다고 그 독한 한국 사람이 순한 사람이 된 척 깜짝 놀라는 모습이라니. ㅎㅎㅎ


스위스의 물가는 결론적으로, 숙소는 좀 비싸다 싶었지만 그 외에는 감당할만한 수준이었다. 겨우 2만원도 안되는 돈을 내고 이 좋은 그림들을 이렇게 여유롭고 쾌적하게 봐도 될까? 싶었고 바젤은 아예 관광객에게는 패스를 발급해줘서 교통비는 받지도 않았다. 아침 6시에 문을 열고 정오에 문을 닫는 맛있는 동네 빵집을 발견했는데 '고급 드라이 햄을 사용했다'며 점원이 자랑스럽게 말한 샌드위치는 정말로 태어나 먹어본 샌드위치 중 가장 맛있었고 가격은 파리크라상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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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2-06-18 2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숙박은 아무래도 한국이 저렴한 것 같아요. 저와 같아 일했던 남자 간호사가 6월 14ㄹ에 한국에 간다며 연희동에 숙박시설을 이용하게 되었다며 보여줬는데 하루에 4민원인데 화장실까지 있다고 해서 놀랐어요. ㅎㅎㅎ 저도 담에 한국 가면 그런 곳 빌리면 되겠구나 싶더라구요. 여행기 올려주셔서 좋아요. 암튼 유럽 여행은 언제나 좋았는데 앞으로도 계속 좋은 곳이길 바래봅니다. 잘 다녀오세요!

LAYLA 2022-06-19 15:33   좋아요 0 | URL
한국에서 30만원이면 아주 극성수기 아니면 5성급 호텔도 가능한데 말이죠 ㅎㅎㅎ 한국도 외국인 관광객이 늘어나고 있다는게 체감되던데 연희동이라니 숙소 너무 센스있게 골랐네요^^

바람돌이 2022-06-19 0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스위스 아직 한번도 못가봤는데 두번 간 라일라님 부자 맞아요. ^^ 부러움
나라마다 분위기라는게 있는지 정말 국경선 하나 넘었다고 사람들의 분위기나 이런거 완전 달라지는건 진짜 신기하죠. 심지어 유럽은 늘 이합집산하면서 섞여살았던 적도 많으면서 말이죠.
오랫만에 이런 여행기 너무 좋네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

LAYLA 2022-06-19 15:34   좋아요 0 | URL
앗 저도 처음이에요 바람돌이님
예전에 비행기 환승만 했었고 시내에 나와본건 처음이네요
와서보니 새삼스럽게 신기해서...한국가면 먼나라 이웃나라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어요 ㅋㅋㅋ

잉크냄새 2022-06-20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행 중에 잠자리는 거의 가리지 않는지라 주로 야간 이동에 초점을 맞추거나 게스트하우스, 도미토리에서 숙박을 해결하였죠. 다만 딱 한번, 터키 카파도키아에서 마주친 동굴 호텔이 너무 맘에 들어 ‘진짜 딱 하루만 호사부린다‘는 마음으로 묵었는데, 그 비용이 30만원이었죠.

LAYLA 2022-06-20 19:38   좋아요 0 | URL
저도 밤에 자면서 이동하는 느낌 좋아서 야간버스 많이 탔어요. 멀미가 심해서 낮에 이동하는게 더 고통스러운 사정도 있었구요 ㅎㅎㅎ 이번에는 그렇게 여행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계속 오래 걸어다니는 것만 해도 몸이 꽤 피곤하네요. 숙소는 이젠...사치를 할 거라면 아주 좋은 곳으로 가는게 맞다고 생각하는데요 요즘 유럽이 코로나 이후 반짝 특수를 누리고 있어서 그런지 호텔 가격이 좀 미쳤어요. 유명 관광지 도시 5성급 호텔은 일반룸이 하룻밤에 2-300만원이라는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네요.
 

아부다비에서 경유하는 20시간에 가까운 비행이었다. 인천에서 아부다비까지가 10시간 정도였는데 생각보다 너무 힘들어서 당황스러웠다. 생각해보니 마지막으로 여행한 건 2년 전 정도라도 10시간을 비행한 건 또 그 보다 훨씬 전의 이야기이다. 만석의 비행기에 중국인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새로운 풍경. 아부다비에서 2시간의 지연을 겪고 어찌어찌하여 목적지에 도착했다. 거의 15년만의 유럽이었다. 


유럽은 그대로였다. 그러니, 유럽이 예전보다 초라해보인다면 그건 유럽의 탓이 아니라 한국과 서울이 지난 15년 동안 미친듯 발전하고 좋아졌기 때문이다. 인천공항은 코로나로 손님이 없는 동안 오히려 잘 되었다는 듯이 인테리어를 더 세련되게 고쳐서 흠잡을 것이라곤 전혀 없는 수준이었는데 취리히 공항의 모습은 예전 그대로였고-15년 전엔 예뻐보였고 이제 보면 좀 유행이 지나간듯한-화장실은 더럽게 더러웠다. 공항에서 도시로 나가는 기차는 에어컨이 작동하지 않았다. 와이파이도 (당연히) 제공되지 않았다. 기차를 타고 지나치는 풍경은 그림같이 아름다웠는데 서울이 그동안 너무나도 멋져진 탓에 이젠 이곳의 풍경에 감명받기보단 심드렁하기만 했다. 여기선 대도시라지만 한국의 지방 소도시 외곽쯤에 가까운 인구밀도가 짐작되는 낮은 층수의 맨션들을 보며 이 곳의 삶을 이리 저리 상상해보았다. 어느 각도로 보아도 노잼일 것이 분명해서 오징어 게임이 왜 그리 격한 사랑을 받았나 잘 이해가 되었다. 그런 거라도 보지 않으면 이 완벽한 햇살과 녹음과 정적 속에 지겨워 죽을거 같지 않을까. 


강가의 호스텔에 체크인을 하고 시내로 나갔다.  횡단보도 앞에 서서 차가 뜸해지길 기다렸더니 자전거를 달리던 금발의 아가씨가 일부러 자전거를 멈추어 차를 막고서는 건너라고 눈짓해주었다. 지도를 들고 서 있었더니 동네 아저씨가 다가와 말했다. "내가 잘 모르지만 아는 건 가르쳐 줄게" 도심의 작은 분수들은 여름 동안은 사람이 들어가서 작은 수영장처럼 사용할 수 있게 개방한다고 안내가 붙어 있었는데, 동네 주민들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뛰어 들어 놀고 있었다. 한국으로 치면 중고등학생쯤 되는 아이들도 물놀이를 즐기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여자 아이들은 비키니 탑을 벗고 가슴을 드러낸 채 또래의 남자아이들과 물을 튀기다 신이 나서 춤을 췄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아트바젤은 입구까지 갔다가 그들만의 분위기에 약간 마음이 뒤틀려 '피카소와 엘 그레코가 있는데 왜 신진작가의 그림을 굳이 봐야 하지?'싶어서 파인아트뮤지엄으로 발길을 돌렸다. 미술관의 몇 개층과 몇 개 건물을 쏘아다니며 한참 그림을 보다 창 밖을 우연히 보았는데 미술관 맞은 편의 오래된 저택 하얀 담벼락에 누군가가 라커로 이런 문구를 써놓은게 보였다.


WE DON'T NEED MORE SUCCESSFUL PEOPLE

WE NEED MORE STORYTELLERS, URBAN GARDNERS, AND LOVERS ALL KIND. 


나는 그 순간 생각했다. 이런 사람들에게 과연 오징어 게임을 보여줘도 되는 걸까. 


저녁으로는 맥주 한 잔만을 마셨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창가 밖으로 세찬 강물소리가 들렸지만 전혀 소음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7시간쯤 깊이 내리 잤는데 최근 몇 주간 가장 길고 깊게 잔 잠이었다. 잠을 제대로 자기 위해서 지구를 반바퀴나 돌아야 할 일인가?


아침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눈 옆자리의 여성은 독일에서 독일문학을 가르치는데 한국 드라마를 많이 보다 보니 한국어가 듣기에 좋고 이제는 한국 외의 국가에서 만든 영상물은 연기가 어색해서 보기 싫다고 했다. 헐리우드식 연기는 과장이 많고 인위적이라 느낀다는데, 한국 콘텐츠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많이 보았지만 이런식으로 콘텐츠의 기준이 한국이 되었다는 말은 처음 들어서 너무 신기했다. 어쨌든 나는 나의 궁금증을 물었다. 독일 문학 중 무엇을 추천해주고 싶으세요?


율리 체의 작품들. 그리고 도리스 되리는 롸이팅에 대한 에세이를 출판했다고 하는데 아직 한국어로 번역이 되지는 않았음을 확인했다. 


오기 전에는 한국에서의 일들이 너무 머리가 아파서 이 곳에 와서도 마음이 괴롭지 않을까 걱정했었다. 그렇지만 이 곳에 오니 마음이 풀어지고 잠이 온다. 친절한 사람들에게 나도 어색하게 웃어주고 그러다 보면 내가 해야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고 싶은 이야기가 흘러 나온다. 한국에서는 왜 옆자리의 누군가와 문학에 대해 이야기하고 페미니즘에 대해 이야기하고 어느 전시가 좋은지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없는 것일까? 물론 진짜 궁금한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의 삶은 한국에서의 삶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며 한국에서는 그런 일상의 로맨스는 기대할 수 없지만 마켓컬리가 있다. 알라딘은 주문하면 바로 다음 날 내가 보고 싶은 책을 배달해준다. 혼자 있는 것이 견딜 수 없으면 강남역으로 가 아무런 의미도 목적도 없이 미친 듯이 시끄러운 어느 카페, 정 아니면 맥도날드라도 들어가서 소음 속에 누구도 아닌 존재로 그 어떤 주목도 받지 않으며 있는 듯 없는 듯  앉아 있을 수 있다. 그렇다. 나는 15년 전과 달라진 유럽이 알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15년 동안 달라진 내가 알고 싶었고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느낄지가 궁금했다. 돌아가는 비행기는 아직 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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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6-17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드디어 여행 스타트를 끊는 분이 나오시는군요. 부러울 따름입니다.
저는 일본 20년전쯤 일본 처음 갔을 때 진짜 일본의 모든 것이 신기하더라구요. 그런데 이후에 가다보니 많은 것들이 평범해지더군요. 그건 일본의 거리나 모습들은 바뀐 것이 별로 없는데 한국이 너무 빨리 바껴서라는걸 깨닫기도 했죠. ㅎㅎ
모처럼 가신곳에서 달라진 나도, 달라진 유럽도 다 만나고 오시기를 기원합니다.

LAYLA 2022-06-18 17:36   좋아요 0 | URL
일본도 너무 가고 싶어서 입국제한 풀리기만 기다리고 있어요ㅎㅎㅎ 주변에 엔화가 싸다고 미리 사서 쟁여놓는 분들도 계시더라구요. 여기서 한 달쯤 있다 한국가면 또 뭔가가 바뀌어 있겠죠? ㅎㅎㅎ

잉크냄새 2022-06-18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십 년 세월 후의 풍경이, 코로나 후의 풍경이 어떻게 변했을까 무지 궁금하네요. 욕심이겠지만 전 제가 갔던 그 곳의 풍경이 늘 그러하기를 바라나 봅니다.

LAYLA 2022-06-18 17:38   좋아요 0 | URL
욕심이 아니라 아마 잉크냄새님이 아시던 그 풍경 그대로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여기는 마스크를 쓰는 것이 이상한 일이고 기묘할 정도로 코로나의 영향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요. ㅎㅎㅎ
 

다시 한 번의 생일이 지나갔다. 올 해는 가만히 있으면 내 생일을 축하해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일부러 친한 친구들에게 내 생일에 만나자고 먼저 요청을 했다. 내 생일도 내가 알아서 챙기고 내가 알아서 즐겁게 지내야 한다. 벌써 든 나이를 생각하면 징그럽지만 이 정도 지혜는 득한 세월이었다. 


사회생활을 할 적엔 너르고 얕은 관계들로부터 습자지 같은 축하를 받기도 했었다. 그런 축하라 해서 굳이 의미가 없다고 냉소한 적은 없다. 생일이란건 정말 신기한 것으로 모든 것에는 댓가가 있고 그러니 우리 서로 주고받지 말고 적정한 선을 지킵시다,란 암묵의 룰로서 기능하는 관계 사이에라도 축하인사를 받으면 순수히 기쁜 것이다. 결혼이나 출산에 대한 축하는 안 받아봐서 모르겠지만 이 정도로 기쁠거 같지는 않다. 어쨌든 최근 그런 관계는 거의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올해는 좁고 깊은 인간관계의 사람들에게 축하를 받았고 그들의 축하메시지에 우리들의 관계의 짙음이랄까 깊음이랄까. 오랜 기간 공들여 아끼고 키워와서 이제는 크고 무성한 나무가 된 것 같은 우리들의 관계가 그대로 담겨 있어서 무척 감격스러웠다. 기나긴 정성스런 편지는 당연히 좋았고 또 의외로 좋았던 것이 카피라이터 친구의 축하카드. '카드 100자로는 모자란 내 마움' 마움이란 단어를 쓴 것도 좋고 한 붓에 쓴 듯 한 문장이 마치 하이쿠 같아서 그냥 너무너무 좋았다.  


생일날에는 일전에 한 번 들러본 음식점을 내가 미리 예약했고, 마실 와인도 직접 골라서 가져갔다. 바쁜 시간을 내어 친구들이 나오는 것이니 모든 것이 근사했으면 했다. 음식은 정말 맛이 있었고 와인도 반응이 좋았고 오랜만에 보는 친구들과의 대화도 즐거웠다. 그리고 친구들은 선물로 샤넬 코스메틱의 박스를 내밀었다. "니가 니 샤넬은 한 번도 사본적 없다고 해서." 지난 달에 퇴사하는 직원의 선물을 사러 백화점 샤넬 매장에 친구와 함께 갔던 적이 있었다. 스치는 말로, 내 돈으로 샤넬 사서 남 주기만 했지 내 껀 한 번도 사본적이 없다 했던거 같은데 친구가 그것이 맴이 애렸던지(?) 샤넬 제품을 여럿 사서 선물로 준 것이었다. 나는 정말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나는 정말로 가끔은 내 삶을 동정해줄 사람이 필요하다. 뭐든지 잘하고 뭐든지 어쨌든 해내며 사는 삶이 너무 힘드니까. 그렇다고 아무나의 싸구려 동정이 필요한건 아니고, 나에게 샤넬을 주면서, 한 번도 내 돈으로 나는 챙겨본적이 없다는 그 맥락을 살펴 나를 동정해주는 이런 사람들이 필요한 것이다. 


워낙 예민해서 향을 맡는 것만으로도 또 에너지가 소진되는 느낌인 나는 향이 있는 제품은 잘 사용하지 않는다. 친구들에게 선물받은 바디로션의 향이 어떤 향인지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이런 평이 나왔다. '이 향을 바르면 하얀 아기고양이를 안고 있는 가련한 여인이 된 것 같아요. 정말 샤넬스러운 향.' 가련한 여인이 된 것 같은 향, 샤넬스러운 향...그것이 어떤 것인지 궁금해서 다음 날 바로 샤워를 하고 발라봤는데 놀랍게도 나는 그 향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일상에서 부릴 수 있는 사치의 목록은 하나라도 더 있으면 좋은 법이다. 


생일 이후로 일주일 정도, 원래의 내가 아닌 것 같은 시간을 보냈다. 마감할 일이 있기도 했고 생일선물로 날아온 택배가 쌓여서 집 안과 밖에 번잡스러웠고 왜인지 모르겠지만 식욕이 돌아 계속 음식을 먹고 술도 적지 않게 마셨다. 늙고 못생긴 남자와 섹스하는 꿈도 꿔서 다음날 아침 눈을 뜨며 충격에 사로잡혔는데 이 이야기를 들은 젊고 잘생긴 남자가 말했다. "자기 전엔 잘생긴 남자를 생각해." 기쁘기도 했지만 왠지 붕 뜬 것 같은 그런 느낌의 생일주간이었다. 가련한 여인이 된 것 같은 향... 가련한 여인이란 19세기 말 러시아에나 존재했던 것이라 생각하기에 21세기 대한민국의 가련한 여인이란 어떤 것일까. 속이 열불 터져서 무조건 아이스 아메리카노만 마시고 차를 타면 4세대 아이돌의 존나 쎈 노래만 최고 볼륨으로 듣는 내가 가련한 여인일리가 없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생일을 흘려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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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2-05-13 0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우리 레일라님 생일이었어요? 늦었지만 저도 생일 너무 많이 엄청 축하해요!!! ♥️😘🎶💝🎁🎊🪅🎈🎉💌🎂💐👏👏👏 저도 레일라님 아끼고 사랑하는 일인인데 좀 알려주시지… 하긴 제가 좀 그런 면이 있어요. 누구 좋아하면 그 사람이 분명 잘 알거라고 생각하고 뭐 암튼 설명하기 힘든데…. 언제가 생일인지 마음 내키시면 알려줘요. 저 그런 축하하는 거 엄청 좋아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좀 이상한 아줌마 사람이거든요. 😅😅😅 특히 좋아하는 사람들. 카드라도 보내고 싶어요. 아! 그럼 주소도 알려줘야 하니까 어렵겠죠? 😅😅😅 관찮아요. 그냥 지 마음만 받아주길!!😍😘♥️ 늘 행복하시길!!!🙏

2022-05-14 00: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22-05-13 0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일라 님, 이미 지났지만 생일 축하해요.
저도 몇해전에는 생일 당일에 축하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제가 케익 사들고 들어가서 저 혼자 식탁에 케익 차려두고는 해피 벌쓰데이 투 미~ 했어요. 저는 제 생일을 저라도 축하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향은, 내게 안맞는 향이라면 영 쓰기가 싫은데 마음에 드는 향을 선물 받아 정말 다행이에요. 즐거운 생일 보내고 이렇게 기억해두는 것도 너무 좋은 것 같아요, 라일라 님. 내내 좋은 향과 행복하게 보내요!!

2022-05-14 0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thkang1001 2022-05-13 0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일라님! 늦었지만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오늘이 벌써 금요일입니다. 오늘도 행복한 하루 되시고, 다가오는 주말과 휴일도 행복한 날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2022-05-14 0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thkang1001 2022-05-14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LAYLA님! 말씀 감사합니다! 행복한 주말과 휴일 보내세요!

책읽는나무 2022-05-15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넘 늦은 것 같아 망설이다가...그래도 생일은 1 년에 한 번 뿐이고, 그래서 축하받는 날도 이날 뿐이니...늦었지만 생일 축하드려요♡
전 언제부턴가 나이 먹어가는 게 좀 서글퍼서 생일을 좀 귀찮아하고 있었는데 라일라님 글을 읽고 보니 좀 특별한 마음으로 챙겨야겠구나! 생각하게 되네요~^^
내년부터는...ㅋㅋㅋ
5 월 좋은 달에 태어나셨군요?^^

2022-05-15 2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5-19 1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5-19 13: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8-28 05: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스다 미리의 에세이집 중에 '아픈 구두는 이제 신지 않는다'라던가 하는 제목의 책이 있는데 내용은 하나도 마음에 차지 않았지만 제목만큼은 탁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제목의 변형을 이제는 내 나름대로 삶에서 실천한다. '재미없는 책은 이제 완독하지 않는다' 오기라고 해야 할지, 마지막까지 읽어야 한 권을 전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으리란 무모한 기대로 웬만하면 시작한 이상 완독을 다 하곤 했는데 작가가 유명하고 아무리 잘 팔리는 책이라도 나랑 맞지 않다면...작가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기에는 내 시간이 너무 아깝단 생각이 들었다. 나이가 들며 내 시간이 점점 비싸지는 요인도 있겠지? 


올해는 봄에 처음으로 허무함이란 감정을 느꼈다. 늘, 가을과 겨울에 우울하고 봄과 여름에 신나서 사는 삶을 반복하였는데 무척이나 힘든 겨울을 지내고 물이 올라 터질것 같은 봄의 풍경을 바라보다 문득, 아 내가 아무리 잘 해보려고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아둥바둥 거려도 그런 나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는 사계절의 순환은 내 뜻과 관계없이 무심하게 일어날 뿐이고 그러니 그 모든게 허무하단 생각이 들었다. 나 살라고 봄이 오는게 아니다. 사람들이 봄에 자살을 많이 한다는게 이런 뜻인가? 이렇게 또 언젠가 내가 어떤 마음인지와는 관계없이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겠지. 어제는 봄과 여름의 경계에서 완벽한 녹음과 햇살과 바람 사이로 걸으며 생각했다. 다음 생에는 누구의 자식으로도 태어나지 않게 해주세요. 그렇다면 뭐가 될 수 있을까. 물이나 풀, 운이 좋다면 구름이나 바람? 


나는 내가 늘 그대로인거 같지만, 그리고 가끔 화장도 안하고 옷도 제멋대로 입고 마스크 쓰고 사람들 만나다 보면 나를 제 나이보다 어리게 보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어쩔 수 없이 세월이 선사하는 위엄(이라고 쓰고 존나쎔이라고 읽는다)을 득하게 되었다는 걸 종종 깨닫게 된다. 한 달 전 쯤에 어느 음식점에 가서 결코 싸지 않은 가격의 화이트 와인을 주문했는데 서버가 와서는 "죄송한데 저희 제빙기가 고장나서 얼음이 없어서...." 제빙기도 없으면서 고객 앞에서 와인 오픈부터 한 저의는 무엇인가? 뭐 그 순간엔 나는 그건걸 생각하지도 않았다. 서버의 말이 끝나자 마자 똑바로 말했다. "얼음 주세요." 서버는 사장에게 설명하더니 밖으로 나가 편의점에서 얼음을 사왔다. 오늘은 용역업체에서 우리 업체를 담당하는 담당자가 바뀌어서 새 담당자에게 처음으로 전화를 했다. 아...전화에서부터 느껴지는 이 불길함. 나는 당장 해당 업체 홈페이지에 접속해 그 새 담당자의 이력을 확인하고 씨발이라고 소리내어서 욕했다. 무엇이 자기에게 이득이 될지 매 순간 재고 달고 머리 굴리며 살아온 사람의 인생이 이력의 형태로 그 곳에 고스란히 있었다. 내가 업무를 요청하자 답장이 왔다. '확인하고 이 주 안에 연락드리겠습니다.' 역시 씨발이었다. 나는 답장을 보냈다. '사무실 들어가시면 간단한 것부터 확인해서 보내주세요.' 이틀 기다리고 답장 없으며 바로 헤드에게 담당자 교체하라고 하려 했더니 5분도 되지 않아서 내가 요청한 자료가 튀어나왔다. 머리 굴리면서 열심히 사는 사람이니 행간의 빡침도 잘 읽어냈나 보다. 


그런건 가끔은 당연하게 느껴진다. 나도 나이가 들었으니 그 나이에 어울리는 적당한 모습인 것이 당연하지. 또 가끔은, 피곤하게 느껴진다. 이렇게 서로가 전투하며 살아야만 하는 인간세상이란 것이. 또 가끔은, 내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 무엇이 모이고 모여 이런 나를 만든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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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남동생이 중고차를 하나 샀다. 본가에서 일 하는데 필요하다 하여 서울에서 혼자 중고차 매물을 찾고 값을 치르고 탁송까지 보냈다는데 어련히 알아서 하려니 싶어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리고 후에 본가에 내려가 보니 차가 너무 반짝이고 그럴듯하여 감탄하였다. 서울에서 타고 다니는 내 차보다도 더 멋져보였다. 


"저거 얼마 준거야?"

"400만원"


내가 중고차 시세에 대해 잘 모른다 하지만 마티즈 같은 경차도 중고가가 500은 넘는걸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외제 중형 세단 가격이 400만원이 가능한것일까? 동생은 말했다.


"일제 브랜드가 철수하니까 이제 AS도 안되고..."


서울에서 타고 다니는 내 차도 일본 브랜드인데 일제불매운동이 일어난 뒤로 오피스를 확 줄이더니 서초에 있던 정식 AS센터도 문을 닫았다. 내 차 브랜드보다 더 적은 규모의 브랜드이니 이제 한국에서 정식 판매는 안하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요즘 웬만한 명품백 하나 사려고 해도 400만원이 넉넉한 돈이 아닌 시절에 그 차가 400만원이란건 아무리 생각해도 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저런 사정으로(라고 쓰고 부모가 또 사고를 쳤다고 읽는다) 본가에 반쯤 거주하며 사건수습을 하게 된 나는 그 차를 타게 되었다. 남동생은 또 남동생의 차를...


짙은 흑탄색의 그 차는 생긴것도 귀엽고 색도 고급지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십만키로를 달렸는데 어쩌면 흠집하나 없는 것일까? 그런 감탄의 뒤에 운명처럼 초보운전 직원이 후방주차를 하다 뒷범퍼를 긁었다. 뭐 저 정도면 나중에 카센터에 볼일 있을때 닦아내면 되겠다 생각했는데 그러고 또 몇 주 뒤에는 주차해둔 사이에 누군가가 뒷 문짝 부분을 움푹 들어가고 칠도 거칠게 벗겨지게 찍어놓고 도망갔다. 그걸 발견하고 하루이틀은 마음이 처참했는데 금전적 손해의 측면에서 보다는 야무지게 예쁜 그 차가 다쳤다는 것에 대한 상심이 더 컸던 것 같다. 이 차의 수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일제 차이다 보니 승차감을 위해 차체가 낮게 디자인 되어 있었는데 거친 시골길을 달리다 보니 가끔은 부우우우욱 차체 바닥이 긁히기도 하였다. 그리고 또 한 번은 내가 후방 주차하는데 왜인지 센서 경고등이 울리지 않아 시멘트 벽에 뒷범퍼가 쿵 닿기도,,,


그렇게 우리집에 올 땐 청소년 같이 밝고 예쁘던 차는 거친 시골에서 백분의 쓸모를 하면서 제 나름대로 모험의 흔적을 제 몸에 새겨 이젠 제법 십만키로 이상 달린 티가 난다. 


서울에서는 조금만 움직여도 하루에 몇 천보는 걷는데 지방에선 무조건 차를 타고 움직이니 하루에 걷는 걸음이 몇 백걸음도 안될 때가 많다. 차로 달리는 거리는 적게는 십키로 많게는 백오십키로. 처음엔 몸에 익지 않던 새 차였지만 이젠 너무도 익숙해져 달리는 것도 좌회전을 하는 것도 뒤로 주차를 하는 것도 쉽고 편안하다. 그리고 그런 편안함으로 거칠것 없이 지방의 도로를 질주하며 그런 생각을 한다. 운전을 좋아한다면 지방에서 살아봐야 한다고. 지방에서 달리는 기분은 서울에서 한남대교를 건너는 기분과는 다른 차원의 해방감을 선사해준다. 뭐랄까, 밤의 한강은 아름답고 그 위를 달리는 것도 충분히 빠르지만 지방의 너르게 펼쳐진 땅 위에서 달리는 기분은 마치 말을 타고 달리는 것 같은 야성에 가까운 감각을 일깨운다. 


아니 어쩌면 말이 아니라 신발인지도 모르지. 차가 없으면 몇 백미터 가기도 여의치 않은 지방에서의 삶. 일을 마무리하고 서울로 복귀해야 할텐데 지난 반년에 가까운 시간 이 곳에서 물질로 치자면 400만원짜리 저 차가 나에게 준 기쁨과 안도와 평화, 위로가 가장 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일에 큰 도움이 되어서 적시에 너무 잘 구했다 늘 감탄하긴 했지만 헤어짐을 앞두고 생각하니 실용성을 떠나 마음에도 너무 큰 힘이 되어 주었던 것. 울고 싶을 때 부우웅 속도를 높이고 죽고 싶을 땐 케이블 연결하여 케이팝을 최고 볼륨으로 들으며. 


만원의 행복도 아니고 백만원의 행복도 아닌 나만의 고유한 400만원의 행복을 선사해준 붕붕이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넌 정말 최고야. 부주의한 주인이지만 앞으로 니가 어떤 주인을 만나든 십만키로 더 달릴 수 있길 진심으로 바라고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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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2-03-01 18: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래요. 여기 살면서 외롭고 그럴 때가 있는데 그러면 제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리거나 산길을 달리면서 음악을 크게 틀고(저는 주로 팝송) 가면서 주변의 자연 풍광을 보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외롭다는 것 다 잊고 그저 이 세상에 살아 있다는 것이 감사하고 막 그래요. 400만원이든 사천만원이든 안에서 운전할 때는 다 같은 것 같아요. 제 지난 차는 어쩌면 400만원도 안 되는 녀석이었을 것 같아요. 지금도 막내를 위해 고이 보관하고 있지만요. ㅋㅋ 암튼 보고싶었어요 레일라님!!!♥️♥️♥️♥️♥️

미미달 2022-04-21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산이 고향이라고 하셨죠? 저랑 같은 ㅋㅋㅋㅋㅋ
오랜만에 울산 내려가서 공항에서 쏘카 빌려서 달리니까 확실히 서울과는 다르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