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그날이 되었다. 스위스를 찾은 한국인이라면 반드시 해야 한다는 알프스 정상 투어. 스위스에 가 본 적도 없고 갈 계획도 없는 한국인 조차도 스위스의 융프라우 정상에서는 신라면을 엄청나게 비싸게 팔며, 그런데 그 비싼 신라면이 인생에 한 번은 먹어봐야 할 꿀맛이라는 과장 섞인 이야기를 어디에선가 한 번 쯤은 들어본 적이 있다. 너무 오래전에 듣고 여러 번에 걸쳐 들어 도대체 언제 처음으로 알게 된 정보인지도 가물가물한 그 후기는 여행지에 대한 후기라기보다는 전래동화나 구전설화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융프라우 정상으로 가는 곤돌라와 기차 티켓은 동생이 한국에서 예약했는데 바우처를 보니 아예 예약하는 티켓에서부터 정상에서 먹을 신라면 값이 포함되어 있었다. 출발하기 전날 미리 표를 수령하러 터미널을 찾았더니 미니컵의 신라면 이미지가 인쇄된 예약 바우처를 보고 스위스인 직원이 표를 내어주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날이 흐렸다. 빗방울도 좀 떨어졌다. 다시 이곳을 찾기가 쉽지는 않을테니 실망할 법도 했지만 엄마는 흐린 날도 나름의 운치가 있다며 개의치 않았다. 나 역시 장마를 일년 내내 기다리는 사람인지라 물안개가 낀 알프스 마을의 풍경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것도 나름의 사치 아니겠는가? 남들이 화창한 날씨에 만년설이 낀 뽀족한 정상의 풍경을 선명히 보기 위해 찾을 때 우리는 흐리고 구름에 잠긴 융프라우를 즐긴다는 것. 애초에 산의 정상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가치관도 한몫했을 것이다. 나는 산이 있으니 오른다는 식의 마인드를 일절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고 이런 관광도 부모님이 원하니 하는 거지 혼자하는 여행이었다면 밑에서 바라보는 걸로 백분 만족하고 일부러 산의 정상에 올라갈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인간은 인간의 삶을 잘 살고 산은 산의 삶을 잘 살도록 서로 터치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생각한다.

 

융프라우 정상을 올라가는 루트는 출발하는 동네에 따라 몇 가지 경로가 있는 듯 했는데 우리는 그린덴발트란 동네에서 사방이 투명한 고속 곤돌라를 타고 산 중턱까지 올라간 다음 산 정상까지는 급한 경사를 오르는 기차를 타고 올라가는 경로를 택했다. 비수기인데다가 이 곳을 많이 찾았을 동양인 여행자들은 급감한 상태이고(중국이 코로나로 인해 봉쇄 정책을 펴기 때문에 중국인이 거의 없음) 날씨가지 우중충하니 곤돌라를 타는 플랫폼은 거의 텅 비어 있었다. 무한히 회전하며 들어오고 떠나는 곤돌라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평생 이런 관광객을 봐 왔을 터미널 직원들이 우리를 바라보는 영혼 없는 얼굴이 인상적이었다. 아무리 풍경이 좋고 복지가 좋아도 인생의 지루함, 무료함, 지긋지긋함 그런 것들은 어느 정도는 세계공통이겠지. 사실 나는 이미 스위스에선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다는 자체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안 그래도 지긋지긋한 인생 이 작은 곳에서 도망갈 곳도 없이 맛없는 음식을 먹으며 살 수는 없었다. 역시 나는 오징어게임을 만드는 나라 출신이며 이미 삼십년 넘게 그 곳에 길들여진 인간이었던 것이다. 어릴 적에 여행 다닐 땐 몸도 마음도 정신도 부드러워서 세상의 어느 곳에든 뜻만 있다면 자리 잡고 그 곳의 모양에 맞게 본을 뜨듯 내 모습을 맞춰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곤돌라에 올라타고 나서 보니 비오는 날 융프라우의 특전이 여기에 있었다. 날씨가 화창한 날이라면 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탔을 곤돌라를 회색빛 날인 오늘만큼은 전세 낸 것처럼 우리 일행 단 3명이서 탈 수 있었다. 아주 큰 대형 곤돌라였는데 엄마의 감상은 이랬다. “이 나라 사람들은 우째 이래 튼튼하게 만들어 놨노. 이 케이블 봐라. 한국에 있는거보다 훨씬 굵다. 내가 잘 모르지만 이것만 봐도 우리나라에 있는 거랑은 비교가 안된다. @@@에 새로 생긴 케이블카 처음에 만들고 고장나서 6개월 운행 안하다가 나중에 시작했잖아. 거기 가면 이것보다 더 비실한데 사람 50명씩 탄다.” 나는 웃음이 나왔다. 우리가 탄 대형 곤돌라 사이즈라면 정말로 한국인 5060명쯤은 서로 밀치고 탈 수 있을거 같았고 마치 단풍같이 화려할 고어텍스 잠바들의 풍경도 눈 앞에 있는 듯 그려졌다. 곤돌라값이 비싸지만 높은 산으로 빠르게 쑥쑥 올라가는 곤돌라 안에서 그것이 안전의 값이라면 충분히 지불할만 하단 생각을 했다. 곤돌라 아래로는 끝없는 초록이 펼쳐졌고 소들이 느릿느릿 움직이며 풀을 뜯어먹고 있었다. 곤돌라에서 내리자 공기가 싸늘했고 나는 미리 챙겨온 두터운 스웨터를 입고 산악기차에 올라탔다. 급한 경사를 올라가기 때문에 역방향으로 앉으면 몸이 쏟아질 것 같았다.

 

그 대단한 융프라우 정상은 미리 예상했듯이 보이는 것이 전혀 없었다. 전면 창으로 끝없이 하얀 빛만 눈이 부시게 쏟아졌다. 밖으로 나가 보니 그 하얀 안개인지 구름인지의 세상 속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수많은 관광객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정상이 보이지 않으니 그 곳이 융프라우라는 것을 증거할 수 있는 건 눈밭에 꽂혀 있는 스위스 국기가 전부였다. 우리도 눈을 밟고 나가 남들과 똑같이 깃발의 끝을 잡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셋이서 함께 셀카도 찍고, 사진을 찍어달라 부탁하는 다른 관광객의 요청에 따라 스마트폰을 가로와 세로로 현란하게 돌려가며 사진도 찍어주었다. 그리고 실내로 돌아와 신라면에 뜨거운 물을 받았다. 스위스 브랜드인 린트 초콜릿 샵도 있어서 나는 핫초콜렛을 먹을 수 있길 기대했지만 린트 초콜렛은 그램단위로 일반 초콜렛을 팔 뿐 핫초콜렛은 팔지 않았다. 도대체 왜 때문에 이 좋은 장사를 안하고 저에게 실망을 안겨주시나요? 여튼 신라면 맛은 좋았고 린트 초콜렛은 한국에서 더 싸게 살 수 있기 때문에 굳이 스위스에서 살 필요는 없었다. 직장 동료들에게 돌릴 선물이 필요하다면 그냥 한국 도착하기 며칠 전에 인터넷으로 주문해놓으면 집 앞에 고이 잘 도착해있을거에요.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인상적이었던 건 산 정상에 명품시계를 판매하고 있었다. 몇몇 브랜드들 중 내가 아는 건 오메가 정도였는데, 인테리어가 너무 소박해서 오메가가 아니라 오메가 짝퉁 같았고 그건 세일즈 직원이 너무나 네이티브 중국인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사방팔방 어느 각도로 보아도 교포가 아니라 본토 중국인인 그 직원이 얼마 되지 않는 중국인 관광객에게 현란한 중국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런데 제가 잘 모르지만 시계도 스위스가 세계에서 제일 비싼 곳이라고 하니 시계도 굳이 여기서 사는 것보다는 현대백화점에서 사는 게 더 나은거 같습니다...!

 

그렇게 누구나 다 하는 일을 따라 하는 것 같았던 일정에 한 줄기 빛같이 재미가 찾아들었다. 그건 바로. 이 터널을 처음 지을 때의 사진이라던지, 그때 당시 죽은 사람들의 이름이라던지를 전시하는 코너가 실내에 있었는데 그 경로를 따라가다 보니 얼음으로 사방이 만들어진 공간이 나왔다. 겨울왕국에 나올법한 딱 그런 곳이었다. 아니, 왜 다들 융프라우에 신라면 있다는 소리는 하고 이런 멋진 얼음 궁전이 있다는 건 안 알려주신 거죠? 전혀 기대하지 않던 곳에 눈이 휘둥그래졌고 조금씩 미끄러지는 발걸음에 어릴 적 동심이 깨어나는 듯 했다. 신이 났다. 나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휴대폰을 꺼냈다. 인천 공항에서 출국할 때 로밍서비스를 처리해준 이동통신사 직원은이 이 정도면 카톡 보내고 지도 찾는 정도는 하실 수 있으세요.”라고 해서 그 뒤로 정말로 카카오톡과 구글맵만 사용하고 SNS 같은 건 하지 않고 데이터를 아껴가며 사용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과감하게 유튜브 뮤직앱을 열어 겨울왕국 ost를 재생했다. 최대한의 볼륨으로.

 

우우우우~ 신비로운 얼음왕국의 메아리 같은 멜로디가 울려퍼지자 세계 각국의 관광객들이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며 음악의 출처를 찾기 시작했다. 어리둥절하다가 이내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인투디언노운을 거쳐 레리꼬에 다다르자 얼음궁전 속 관광객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 내적흥분의 도가니 속에 하나가 되었다. 마음 속으론 모두 아이가 된 우리들은 허리를 숙이고 얼음 위에서 미끄러졌고 얼음상 옆에서 사진을 찍을 땐 부끄러운 포즈도 서슴치 않았다. 내가 꽃받침 포즈로 양손으로 뺨을 감싸고 깝치며 귀여운 척 사진을 찍었더니 그걸 보던 분홍피부 은발의 할아버지도 그대로 따라해서 귀욥기 그지 없었다 진짜...이 모든 것이 파워오브뮤직입니다...! 돌아다니다 보니 부모를 따라온 미국인 청소년이 나를 향해 다가왔다. “이즈 댓 유?” 나는 휴대폰이 들어 있는 소리나는 내 가방을 들어보였다. 한창 반항할 나이의 남자아이였지만 년도를 따져보면 겨울왕국과 함께 성장한 겨울왕국 키즈일테다. 그는 엄지를 척 세워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인생에서 융프라우를 본 것은 그다지 큰 의미가 없는 일이고 굳이 의미를 두자면 가족과 함께봤다는 것에 방점을 찍어야 할테다. 하지만 레리꼬를 전세계 관광객들이 가장 듣고 싶어할 순간에 적시에 들려줬다는 점에서 나는 아주 큰 기쁨과 뿌듯함을 느꼈고 이건 인생의 추억이 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니까, 이건 그냥 재미로 한 일을 넘어 거의 선행과 덕업 아닐까요? 죽어서 천국과 지옥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면 나는 신에게 분명 이 일을 이야기할 것이다. 제가요, 2022년에 스위스 융프라우 갔을 때 데이터를 아끼지 않고 얼음왕국ost를 펑펑 재생해서요, 그래서 정말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었고 좋은 추억을 남겨주었답니다. 생면부지 타인들에게 이렇게 귀여운 친절을 베푼 저를 천국으로 보내주지 않으시겠어요?

 

이 글을 보시는 분들께도 말씀드립니다. 융프라우 정상에서 인싸가 되려면 겨울왕국 ost를 재생하면 됩니다. 본인에게도 타인들에게도 너무나 기쁜 추억이 될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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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6-25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겨울왕국 ost를 틀고 즐거워하는 라일라님이 너무 상상돼서 막 즐겁네요. 제 상상속에서는 라일라님이 안나와 엘사처럼 막 춤추고 있어요. ㅎㅎ 저도 간다면 꼭 기억하겟습니다. 신라면만 먹지 말고 겨울왕국 ost!!!!

LAYLA 2022-06-27 17:37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제 나이가 좀 부끄럽지만 마음속으론 한 순간 엘사이고 안나였음을 부인할수가 없네요...!!! ㅎㅎㅎㅎ

transient-guest 2022-06-25 2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예전 지인으로부터 회사중역과 함께 스위스 출장가서 알프스 정상에 올라 중역의 고집으로 엄청 비싼 값의 소주를 마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습니다 신라면이 아예 투어상품에 들어있다니 신기하네요 어쨌든 여행은 부럽습니다 젊을 땐 한국 드나들면서 다른 나라는 못 갔고 나이를 먹으니 여러 가지로 시간을 못 내니 천상 은퇴 후에나 가능할 것 같습니다

LAYLA 2022-06-27 17:40   좋아요 1 | URL
이웃님들 달아주신 댓글로 예전 이야기도 들으니 너무 재미있어요. 옛날엔 또 산 정상에서 쏘주도 있었군요?? 진상부릴 취객들 생각하면 엄두도 나지 않는데 그런 시절이 분명 있었긴 하겠지요. 스위스에서 한식집 한 번 갔었는데 부대찌개가 인당 5만원 정도이고 2인부터 주문 가능했던 걸로 기억해요. 소주값은 확인해보지 않은게 아쉽네요 ㅎㅎㅎ

잉크냄새 2022-06-26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라면은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서도 엄청 비싸게 팔더군요. 9박10일 동안 신라면에 밥 말아 먹고 트랙킹한 기억이 나네요.

LAYLA 2022-06-27 17:41   좋아요 0 | URL
농심이 애국기업임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ㅎㅎㅎ 영양학적으론 특출난게 없을테지만 한국인은 확실히 한번씩은 매운 라면을 먹어줘야 힘이 나는거 같아요^.^
 

취리히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알프스 구경을 위해 차를 몰았다. 도시를 조금만 벗어나자 금방 높은 산이 나타났다. 산을 오르는 구불구불한 도로를 따라 산악 자전거를 탄 사람들이 열심히 페달을 밟고 있었고 할리 데이비슨 같은 큰 오토바이를 모는 사람들도 많이 보였다. 그리고 우리의 럭셔리한 폭스바겐 투아렉 앞이나 뒤로 더 럭셔리한 오픈카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한국 사람들이 샤넬백과 서울 아파트를 정상적인 삶에서 성취해야 할 이상적인 물적 목표로 바라본다면 스위스 사람들에겐 그런 대상이 오픈카인 듯 했다여름에만 탈 수 있는 그 차를 보관할 주차장을 확보할 여유까지 감안한다면 분명 쉽지 않은 목표이고, 그래서 그런지 오픈카를 타고 달리는 사람들은 모두 중년 이상이었다.

 

촘촘하게 솟은 나무들과 뾰족한 봉우리의 암석 사이사이로 만년설이 보였다. 여름이니까 그 만년설이 녹아서 만든 수백갈래 혹은 수천갈래의 폭포가 여기서도 저기서도 흘러내리고 있었다. 사실 정상에서 본 만년설은 초라할 정도로 규모가 작았는데, 그게 여름이기 때문인지 기후위기로 만년설 자체의 규모가 줄어들었기 때문인지는 알기 어려웠다. 혹은 내가 남미에서 너무나 멋진 빙하와 만년설을 이미 보았기 때문인지도


산길을 돌고 돌고 또 돌다보면 사람들이 사는 집이 보였다. 땔감을 비슷한 사이즈로 정확히 잘라서 마당 한 켠에 야무지게 쌓아둔 집들이었다. 저 사람들은 도대체 뭘 먹고 살까, 엄마는 궁금해했다. “소도 키워 봐야 세 마리, 다섯 마리 저래 키워서 뭐 돈이 되노?” 정말 타당한 의문이었다. 동시에 나는 그것이 한국적인 의문이며 우리 가정다운 의문이라고 생각했다. 뭘 먹고 사노? 타인의 식성이 궁금한 게 아니라 생존의 기반을 궁금해하는 것. 실용적이지 않은 건 쓸데없고 철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나는 시뻘건 얼굴로 허리를 한껏 숙이고 기를 쓰며 페달을 밟아 오르막을 오르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갔다. 저들은 왜 저런 고통을 택했을까? 저들에겐 저 고통이 오히려 즐거움이고 성취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인생은 어떤 기쁨을 선택하느냐보다 어떤 고통을 선택하느냐의 문제이고 그 선택이 그 사람을 더 잘 보여준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내가 선택한 고통들을 무엇이 있었나. 계속 스쳐가는 그림같은 풍경 속에서 이제는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로부터도 한참 동떨어져 그냥 태초에 그곳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 같은 고통의 덩어리들을 떠올리자니 약간 서글퍼졌다. 하나의 위로가 있긴 했는데, 선택하지 않을 수 없어 선택한 대부분의 고통들 속에 내가 순전한 자의로 선택한 나만의 고통이 있기는 하다는 점이다. 내 고통이 검은 밤하늘이라면 내가 선택한 고통 한두가지가 그 속에서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고 그 사실이 위로가 되었다.

 

몇시간을 달린 다음 체크인한 호텔은 마치 알프스 소녀 하이디가 살 것 같은, 달력에 나올 것 같은 초록색 구릉과 삼각지붕의 목재 건물과 풀을 뜯는 당나귀가 오밀조밀 모여있는 동네의 산 중턱에 위치해 있었다. 생각보다 한산한 그 호텔에 우선 짐을 풀고 별채의 사우나로 가 인도인 직원과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여기 늘 사람이 많다고 들었는데 왜 이렇게 사람이 없어?” “지금은 하이시즌이 아니거든.” 6월 중순, 후반이면 유럽에선 그래도 바캉스 시즌 시작이 아닌가 싶어 어리둥절해진 내가 되물었다. “그럼 성수기가 언제인데? 7? 8?” 이제는 그 직원이 혼란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여기는 겨울이 성수기야. 눈이 내려야 해.” ...정말로 여름형 인간다운 착각이었다. 추운 날에는 나가는 것조차 힘들다 보니 겨울에 굳이 눈을 찾아 휴가를 떠난다는 개념 자체가 나에겐 없었던 것이다. 인도인 직원은 여름철에는 이 곳이 아니라 옆 도시의 보트타기나 자전거타기 같은 액티비티가 더 인기라는 것도 친절히 알려주었다.  

 

그 직원이 지키고 있던 사우나는 남녀 구분없이 공용으로 사용하는 곳이었는데 반드시 모든 옷을 다 벗고 들어가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진짜? 수영복도?” 직원이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이키드나는 고민에 빠졌다. 굳이 배가 나온 아저씨들의 나체를 봐야 할까? 하지만 사우나는 하고 싶다. 그렇다면 남동생을 데리고 같이 갈까? 그 어떤 옵션도 딱히 마음에 들지 않아 갈등하는데 인도인 직원이 그 복잡한 얼굴이 딱했는지 알려주었다. “근데, 지금은 아무도 없어.” 아니 같은 아시아권 출신이면 유교걸 마인드 뻔히 아실건데 미리 알려주셨음 좋았잖아요...!

 

아마도 겨울철에 허벅지가 터지도록 스키를 타고 내려온 손님들을 위한 것일 사우나는 생각보다 꽤 규모도 크고 설비도 본격적이었다. 3개의 사우나가 있었다. 허브향이 풍기는 건식룸, 미친 듯이 뜨거운 건식룸, 그리고 촉촉한 수증기의 습식룸. 3가지 다 개성이 있어서 모두 들어가본 다음엔 야외로 연결된 온수풀로 나갔다. 약간 헛웃음이 나왔는데, 네이키드로 나가야 하는 그 온수풀은 주차장이나 호텔 앞의 농가나 호텔 2층 테리스 어디서나 다 보이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다행이(?) 사람은 보이지 않았고 앞 농가의 당나귀가 오솔길 바로 건너편에서 풀을 뜯어 먹고 있었다. 풀로 나가보니 물은 기분 좋은 정도로 따뜻했고 높은 알프스 산맥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시원하고 상쾌한 공기가 방금 사우나를 하고 뜨거운 뺨을 스치는 기분이 정말로 좋았다. 단 한가지, 누가 어디선가 나타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으로 마음이 불편한 것만 빼면...! 왜 이런 식으로 지은건가 살펴보았더니 외부시선을 차단하려고 벽을 세우자면 바로 저 멋진 알프스 산의 풍경이 가려지는 모양이었다. 보통의 건축물에서는 그런 경우에 사우나를 위층으로 올리든 다른 수를 찾아보겠지만 목재로 건물을 지어야 하고 여러 여건상 공사가 어려운 이 곳에선 그렇게 하지 못했던 듯 하다. 비수기의 여신이 가호를 내린 덕분일까 나는 알몸으로 따뜻한 물에서 기분좋게 떠다녔고 그동안 아무도 사우나에 들어오거나 밖에서 나를 구경하지 않았다. 그래, 나는 그 정도 작은 행운을 누릴 자격은 있어. 해가 넘어가고 세상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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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22-06-24 0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곳에서도 오픈카 내지는 스포츠카는 종종 midage crisis의 상징인 듯 많이들 머리가 좀 벗어진 은발의 남자들이 타는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혼성 full naked이라니 남자인 저 또한 꺼려집니다 ㅎㅎ

LAYLA 2022-06-24 04:32   좋아요 1 | URL
midage crisis 면 긍정적인 뜻보다는 부정적인 뜻에 가까운 건가요? 여기는 그래도 은발의 여성들도 꽤 타고 다니는 편이더라구요. 오늘 체크인한 호텔도 남녀가 사우나를 같이 사용하던데 이제는 나름 요령이 생겨 옷은 벗고 들어가고 대신 큰 타월로 적당히 가리고 사우나를 했어요. 그리고 오늘도 여자 손님 외에 남자는 보이지 않았는데 transient guest님 말씀을 듣고 보니 오히려 남자들이 혼탕에 대해 더 압박감이 커서 아예 안오는건가 싶기도 하네요 ㅋㅋㅋㅋ

transient-guest 2022-06-24 10:29   좋아요 1 | URL
중립적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보통 조금은 비아냥거리는 뉘앙스가 있는 표현입니다 저 나이에 좋은 차가 무슨 소용이야 하는 정도의 젊은이의 가벼운 질투와 함께 ㅎㅎ
네 어쩌면 남자에게 더 부담이 되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ㅎㅎ

LAYLA 2022-06-25 19:21   좋아요 1 | URL
저도 어릴 적에 그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애 낳기 전에 서른 정도 되면 오픈카 사야지~ 애 낳고 사면 무슨 소용~ 그래서 저는 결국 애도 안낳고 스포츠카도 못사고 서른을 훌쩍 넘겼군요? 껄껄 한국은 여름겨울 다 날씨가 극한이라 스포츠카 탈 수 있는 일수도 적고 공기도 미심쩍어서 오픈카에 어울리는 곳은 아닌거 같기는 해요. 지금까지 별 생각 없었는데 언젠가 오픈카가 어울리는 곳에서 한 번 타보고 싶네요. 무라카미 하루키가 이탈리아에서 오픈카를 타고 남겼던 문장들이 몇 있었던거 같기도 하구요.

잉크냄새 2022-06-24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고통이 검은 밤하늘이라면 내가 선택한 고통 한두가지가 그 속에서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고 그 사실이 위로가 되었다.> 알프스에서 건진 명문입니다. ㅎㅎ

LAYLA 2022-06-25 19:23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 아이고 손발 오그라드네요. 힘들 땐 지지말자고 속으로 외치곤 하는데요. 별 같은 나만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더 확보해서 지지 않을 힘을 키워야지, 하고 다짐했답니다.
 

한국에서 엄마와 동생이 도착했다. 나는 가족들과 만나기 위해 내 모든 짐, 28인치 캐리어를 끌고 공항으로 향했다. 취리히의 장점을 하나 꼽으라면 공항이 시내와 아주 가깝다는 점이다. 얼마나 가까우냐면 취리히 센트럴 스테이션에서 기차를 타면 12분이면 공항에 닿는다. 너무 가까워서 공항이든 센트럴 스테이션이든 도착하면 반가운 게 아니라 얼떨떨할 지경이다. 비행기에서 내린 엄마와 동생의 여독을 생각해 우선 취리히의 호텔에서 하루를 묵을 예정이었지만 공항이 그리 가깝고 닿기에 편하다 보니 호텔이 아니라 공항에서 만나기로 했다.

 

가족들을 만난 다음엔 바로 렌터카 카운터로 가서 차를 빌렸다. 살짝 벌어진 앞니에 온 팔뚝에는 문신을 새긴 금발의 여직원이 디파짓을 걸 카드 두 개를 달라고 했다. “너희들이 빌리는 건 럭셔리 카라서 카드 하나 당 3000프랑씩 2개 카드, 6000프랑을 디파짓으로 걸어야 해.” 예약은 모두 남동생이 한 것이라서 나는 무슨 차를 며칠이나 빌리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럭셔리한 차인지 궁금하네.” 내 말에 여직원이 웃었다. 어쨌든 디파짓을 걸어야 하는데 한국의 인터넷 은행에서 발행한 내 카드 플레이트에는 카드번호가 적혀 있지 않았다. 아마도 보안 등의 이유 때문이리라 추측하는데, 모바일 앱으로 들어가야 카드번호와 유효기간의 정보가 뜨는 식이다. 나는 내 카드 실물과 카드번호가 뜬 스마트폰 액정을 같이 내밀었지만 스위스 사람들은 그 새로운 기술을 믿을 수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결국 이런저런 카드를 모두 들이밀고 승인을 걸어보며 한참의 시간을 보낸 뒤에 하나의 카드에만 디파짓을 걸기로 했다. “여행하러 와서 하루종일 신용카드만 찾고 있을 순 없잖아.” 직원은 자신의 재량으로 예외를 두기로 했다고 했는데, 그 순간 떠오른 단어는 유도리였다. 스위스에서 유도리를 경험하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은 하나 더 있었는데, 그 럭셔리 카에 가입된 보험의 자기 부담금이 8000프랑이라는 사실이었다. 요즘 환율로 치면 약 1100만원인데 나는 자기부담금이 그렇게 큰 보험이 굳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차는 럭셔리 카라서 자기 부담금이 낮은 보험은 가입할 수 없어. 그리고 스위스에는 자기부담금이 없는 풀 커버리지 보험 상품이 아예 존재하지 않아.” 아 스위스란 나라는 도대체 어떤 나라인가. 결국 렌터카 회사에서 가진 보험 상품 중 가장 비싼 걸 추가로 가입하여 자기부담금을 2500프랑으로 낮추고 차를 수령했다. 이리저리 따지니 지불한 총 금액의 절반에 가까운 금액이 보험료였다. 럭셔리 카의 정체는 폭스바겐의 투아렉이었고 벤츠와 BMW가 길가에 깔린 나라에서 도대체 이 차를 왜 럭셔리 카라고 부르는 건지, 일반적인 보험은 가입도 할 수 없게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애초에 세상에는 이해할 필요도 없는 일이 많이 존재하는 법이니까. 4일만 조심해서 사고 내지 말고 스위스 차량보험상품의 구조나 부당함(?)에 대해서는 잊어버리자. 혹시 유럽에서 차를 렌트하신다면 필히 스위스 밖에서 빌리시는 걸 추천합니다.

 

호텔에서 짐을 풀고 잠시 숨을 돌린 뒤에는 친구들이 그리 외치던 사랑의 불시착 촬영장소로 나가 보았다. 날씨가 좋고 풍경이 아름다워 가족들과 사진을 찍으니 마치 합성한 사진처럼 보였다. 하지만 아무리 풍경이 좋아도 현빈이 없는데 무슨 소용이야? 란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너무도 작은 올드타운을 걸어서 돌아본 뒤에는 저녁을 먹으러 스위스 음식을 전문으로 하는 고급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내가 인스타그램으로 팔로우하는 유명한 갤러리스트가 취리히를 방문하면서 태그한 레스토랑이라 점찍어 두었던 곳이다. 스위스 음식이나 독일 음식에 과연 고급이란게 존재할 수 있을까 의구심을 가지고 있는지라 그녀의 인스타그램 태그가 아니었다면 아마 절대로 찾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는데, 그게 변한 세상과 변한 여행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이 아닌가 싶다. 그러니까, 요즘은 호텔에서 자신의 주소만 알려줄 뿐 어떻게 호텔을 찾아갈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는다. 공항에서 택시를 타면 몇 분이 걸린다던지 대중교통을 이용하려면 무엇을 타고 어디서 내려서 어느 거리에서 좌회전을 하거나 우회전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일절 말하지 않는다. 그냥 주소만 걸어두면 손님들이 알아서 스마트폰으로 찾아오니까. 마찬가지로, 요즘의 여행자들은 가이드북을 보지 않는다. 자신이 좋아하고 선망하는 누군가의 여행을 인터넷으로 구경하고 그들의 경로에서 마음에 드는 것과 부러운 것을 스크랩하듯 조합하여 자신의 여행을 만든다. 지난 시대의 여행이 가이드북 속을 돌아다니는 여행이었다면 요즘의 여행은 셀레브리티들의 인스타그램 피드를 이어붙여 조금씩은 다르지만 결국 큰 그림은 비슷한 대중적인 여행을 경험해보는 것에 가깝다. 어쨌든 그래서, 나는 내가 동경하던 뉴욕의 어느 갤러리스트를 흉내내어 그 음식점을 찾았다.

 

스위스에서 고급 음식점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에어컨이 있다는 뜻입니다. 스위스는 웬만한 곳에는 에어컨이 없다. 나는 처음에는 그것이 스위스의 기후에 맞춘 나름의 친환경적이고 실용적인 접근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고작 며칠을 지내면서 알게 된 당연한 사실은 좋은 곳에는 에어컨이 있다는 것이다. 고급 음식점엔 에어컨이 있습니다. 미술관에도 에어컨이 있지요. (미술관에 고급과 저급이 있는건 아니지만 국가적 자부심이 걸린 곳이니 고급으로 칩시다) 그리고 기차를 타도 1등석은 에어컨을 틀어주고 2등석은 에어컨을 틀어주지 않는다...! 이런 걸 보면 한국인들이 유럽을 무척 부러워한다지만 한국 사회 곳곳엔 유럽보다 더한 사회주의적 면모가 있다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한국에서 KTX 특석만 에어컨을 틀어주고 일반석은 찜통으로 놔둔다는 건 정말 상상도 되지 않는 일이다. 여하튼, 우리는 늦은 오후의 열기에 지쳐 그 고급 음식점에 도착했고 우선 바로 가서 음료를 주문했다. 새하얀 정장을 입은 웨이터가 콜라와 칵테일을 서빙했다. 말로만 듣던 만원이 넘는 콜라를 부어주는 손길이 무척 화려했다.

 

요즘의 스위스는 해가 10시가 되어야 지기 때문에 레스토랑은 7시쯤부터 본격적으로 손님이 들어온다. 우리는 일부러 조용히 식사를 하고 싶어 조금 일찍 찾아갔기 때문에 손님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고 우리 옆자리에는 미국인 관광객 서너명이 둘러 앉아 화이트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그들은 무척 유쾌했고 시종일관 밝은 웃음을 터트렸다. 손바닥보다도 작은 사이즈의 병에 담긴 콜라를 보고 세상에 이렇게 작은 콜라도 있냐며 어이없음반 짜증반을 코멘트 했던 엄마는 그들을 보고 이렇게 이야기 했다. “저 사람들은 뭐가 저렇게 즐거울까? 인생은 저렇게 살아야 하는데. 나는 학생 때 이후로 저렇게 웃은 적이 없는 거 같다.” 아마 미국인들에게도 인생의 고난과 슬픔과 억울함 그런 것들이 있겠지. 누구의 집에나 더러운 빨래가 있다는 말을 내가 미국 드라마 위기의 주부들에서 배웠으니. 나는 엄마에게 말했다. “어차피 저 사람들은 우리 말 못알아 들으니까 우리도 행복한 척 하자.” 그러고 양 팔을 벌려 의자에 크게 기댄 다음 깔깔깔 웃었다.

 

그 음식점에 대해 말하자면, 가장 만족스러웠던 건 얼음을 달라고 했을 때 은식기에 담아 서빙해주었던 것. 음식은 스위스와 어울리는 아주 자연스럽고 건강한 맛이었다. 나는 스위스 전통음식으로 가장 유명한 송아지 고기에 버섯크림 소스를 붓고 사이드로는 감자를 썰어 바삭하게 구워낸 음식을 먹었는데, 그냥 상상이 되는 맛이었고 사실 이마트에서 3000원이나 4000원에 파는 레토르트 식품들에 비해 1.3배 이상으로 더 맛있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가 사는 건 음식 그 자체가 아니라 시원하고 쾌적한 공기, 테이블 위의 생화와 서버의 티 없이 깔끔한 하얀 유니폼과 내 무릎위에 펼쳐진 빳빳한 하얀 린넨 냅킨이 손가락 끝을 스치는 감촉 등 모든 총체적인 것의 합이니 그 곳을 찾은 것이 후회스럽진 않았다. 다만, 그 서민적이고 대중적인 스위스 대표 음식을 조금이라도 더 고급스럽게 보이기 위해서 전체 포션을 한 번에 서빙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 은식기에 담아와 절반만 먼저 서빙하고 내가 요청하면 나머지 포션을 더 갖다주는 것이 우스웠다. 서버는 그것에 전통적인 스위스 방식이라고 했지만 굳이...? 한그릇 음식을 두 번에 나눠서요...? 먼저 서빙된 절반만 먹어도 배가 불러서 두 번째 포션은 요청하지도 않았다. 손님들은 대부분 미국인들이었고 7시가 지나자 미국식 영어가 가게 안을 가득 채웠다. 내가 인스타그램으로 구경하였던 그 갤러리스트도 그런 영어로 이 가게에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눴을 것이다. 그녀는 뉴요커니까. 식사를 어느 정도 마치자 엄마와 동생이 시차로 인한 급격한 피곤함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나도 괜히 피곤함에 전염이 된 듯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영수증에 찍힌 금액은 크다면 크고 적다면 적은 금액이었는데 인상적이었던 건 탭워터에도 4프랑을 차지한 것이었다. 원래 고급 레스토랑은 탭 워터도 차징을 하나요? 진짜 몰라서 물어봐요.

 

음식점을 나온 우리는 슈퍼마켓으로 가서 스위스산 화이트 와인을 한 병 사서 숙소로 돌아갔다. 스위스산 와인도 있답니다. 한국에선 마실 수가 없으니 스위스에 있는 동안은 마셔보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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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2-06-22 0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양팔 벌려 의자에 기대 깔깔깔~
그 모습 상상되어 저도 웃음이 납니다.ㅋㅋㅋ
기분 좋게 웃어본 적, 정말 얼마나 될까?싶기도 하네요.
어머님과 동생분이랑 계속 기분 좋게 많이 웃으면서 좋은 여행 되셨음 좋겠어요^^
확실히 물가가 다르긴 하군요?
하지만 공항이 가까운 건 눈이 똥그래집니다.
근데 정말 에어컨의 유무가????
유럽여행을 한 번도 못해봐서 모든 이야기들이 신선합니다.
건강 잘 챙기시고, 기분 좋은 가족 여행 되시길요♡

LAYLA 2022-06-24 04:16   좋아요 1 | URL
제가 입국할 때 취리히로 들어와서 바젤로 바로 이동했는데요, 어차피 공항에서 중앙역까지 12분이고 중앙역에서 바로 바젤행 기차를 타면 되니 인천공항 내려서 서울에 있는 저희 집까지 가는 것보다 취리히에 내려 바젤로 가는게 훨씬 편하더라구요 ㅎㅎㅎ 작은 나라 나름의 장점을 발견했습니다 ㅎㅎㅎ

붉은돼지 2022-06-22 1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페이퍼 보니 옛날 생각이 무럭무럭 나네요. 루체른 캠핑장에 짐 풀고 필라투스 올라가 보고(아! 정말 어느 구석에서 코로 불뿜는 용이라도 한마리 튀어나올 것만 같은 신령스런한 분위기) , 무슨 3대 패스 중 하나라는 구절양장 꼬불꼬불 꼬인 그림젤 패스 한 바퀴 돌아보고, 풀커버 리스차량이어서 별 생각없이 막 달렸던 기억이 납니다. 벌써 10년전이군요 ㅜㅜ 만약 또 기회가 온다면, 아마도 오겠지만 리기산 한번 가보고 싶습니다. 저도 밖에 나가면 거의 박물관 미술관만 가는 편인데 알프스는 참 압도적이더군요 제가 산은 안다녀봐서 그런지 모르지만요. 사진도 좀 올려주시면 좋겠어요. 편안하고 즐거운 여행되시길

LAYLA 2022-06-24 04:22   좋아요 0 | URL
와 옛날에는 스위스에도 풀커버 보험이 있었군요 ㅋㅋ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ㅎㅎㅎ 캠핑도 하셨다니 어머니와 동행이란 이유로 설렁거리며 다니는 저와는 무척 다른 여행이었을거 같아요. 저는 개인적으로는 스위스보다 남미의 산이 더 좋은데...남미에서도 여자 혼자 다니다 보니 무서워서 캠핑을 못해본게 너무 아쉽더라구요. 언젠가 믿을만한 동행과 함께 캠핑을 해보리라 마음먹고 있습니다...!

바람돌이 2022-06-22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가족분들과 만나셨군요. 여행이 더 풍성해지겠습니다. 혼자 여행과 다른 멋이 분명히 있잖아요. ㅎㅎ 보험 자기부담금이 1100만원이라는데서 뒤집어집니다. 저것이 과연 보험이기는 한건가? ㅎㅎ
요즘은 우리나라 서비스문화가 워낙에 편안한지라 세계 어디를 가도 우리만큼 쾌적하다는 느낌은 못받겠더라구요. 하지만 또 그건 그것 나름대로 여행이의 멋이라 생각합니다. ^^

LAYLA 2022-06-24 04:26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맞아요 저걸 보험이라고 들이미는 것 자체가 황당했어요. 명목상 ‘보험가입‘상품이라고 내걸기 위한 미끼 같더라구요. 내일 차를 반납하는데 아직까지는 무사고로 잘 달려왔습니다. 추가 보험금을 어마어마하게 냈지만 사고만 안난다면 오케이니까요, 어서 잘 반납하고 이탈리아 건너가서 맛있는거 먹고 싶어요...!
 

바젤에서 취리히로 아침 기차를 탔다. 기차표는 스위스 철도청 앱으로 끊었는데, 그러면 QR코드로 표가 생성되고 검표원이 돌아다니며 일일이 그 QR코드를 스캔한다. 신기술은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올드한 검표 방식은 그대로 지킨다는 것이 무척 유럽답다 생각했다. 내 옆자리에는 나이가 지긋한 노인들이 합석해서 앉아 이런저런 스몰토크를 하고 있었다. 4개의 언어가 공용어이다 보니 한쪽은 독일어로 말하며 당케로 문장을 마치고 맞은 자리에 앉은 상대편은 그걸 다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 할 말은 프랑스어로, 메르시로 문장을 끝맺고 있었다.


스위스에 올 적에 오고 싶어서 온 것이 아니라 비행기표 구하기가 어려워 이리저리 일정을 짜맞추다 보니 오게 된 것이라 그다지 기대가 없었다. 그냥 딱 봐도 노잼일거 같았고 인구가 얼마나 되나 찾아보니 김이 팍 샜다. 취리히의 인구는 약 24만명 바젤 인구는 약 17만명. 바젤에서 트램을 기다리다 보면 우연히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주민들을 자주 볼 수 있었는데 인구가 적으면 오며 가며 마주치고 저럴수도 있겠군, 싶었다. 어쨌든 시간은 잘 보냈고 취리히는 바젤과 비교할 때 이 나라 제일의 도시이고 수도라서 그 나름의 '바쁨'과 '대도시적인 느낌'을 가지고 있단게 무척 귀여웠다. 바젤에서는 신호등 관계없이 어디서 길을 건너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지만 취리히에선 차가 빨리 달려서 신호등을 지켜야 한다. 사람들이 풍기는 분위기도 확실히 더 드라이하다. 


취리히에서는 유명한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가 설계한 kunsthaus(미술관)를 보러갔다. 땅도 작고 인구도 적고 그래서 건물은 모두 나지막하고 이중주차 같은 것도 존재하지 않는 이 나라는 미술관에 한해서만큼은 어마어마한 배포를 가지고 있다. 바젤에서도 그랬는데, 지은지 100년쯤 된 미술관 구관 옆에 신관을 새로 지으면 그 두 건물 사이에 지하를 파서 연결통로를 만든다. 그냥 작은 통로가 아니라 엄청나게 큰 규모로 시원시원하게 만든다. 스위스에도 이런저런 공사현장이 보여서 지나가다 보면 세상에 공사판이 이렇게 조용할 수 있나? 싶은데(그만큼 일하는 사람 수도 적고 공사도 잔잔하니 차분하게 한다 ㅎㅎㅎ) 그런 스위스의 속도로 그 큰 건축물을 단지 그림을 걸기 위해 만들다니!


데이비드 치퍼필드는 우리나라에서는 아모레퍼시픽 본사 건물을 설계한 것으로 유명한데 쿤스트하우스도 알고 봐서 그런지 아무레퍼시픽과 비슷한 결이 느껴졌고 아름다웠다. 그런데 문제는, 대리석에 가까운 하얗고 부드러운 색감의 콘크리트와 금빛 브론즈, 원목을 섞어서 만든 그의 건물 정문이 아주 큰 브론즈 철문이었고, 여름 오후 나절의 햇빛을 한껏 받은 그 정문은 도저히 사람이 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손을 내밀어 문 손잡이를 잡은 나는 마치 물이 끓는 주전자를 만진것처럼 소리를 지르며 펄쩍 뒤로 물러났고, 나를 비롯한 다른 관람객들은 누군가가 안에서 문을 열고 나오기를 기다리다 잽싸게 안으로 들어갔다. 세계적으로 유명하면 뭐해 여름 오후에는 문을 열수도 없게 지어놨는데...! 어쨌든 명성만큼 많은 돈을 쓸 자유를 얻었을 그의 미술관에는 고급스러움이 공기 중에도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좋은 환기 시스템을 썼는지 공기부터가 달랐고 바닥의 원목은 광폭에 낮은 채도의 촉촉한 톤이 사람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줬다. 신관을 여유롭게 보고 지하의 통로로 구관으로 건너가 또 한참을 돌아다녔다. 사실 나는 건축 전문가는 아니지만 구관이 신관보다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구관도 기본적으로 공들여 지은 건물이었고 무엇보다 요즘은 보기 힘든 색색의 고급 대리석들로 지은 건물이라 중후하고 화려했다. 미술관에는 그림을 보러 간다지만 그림을 보며 오감이 활성화되어 그런지 이것저것 별것까지 다 따지게 되는데, 개인적으로 아주 오래된 미술관들은 계단을 올라갈 때 발이 딛는 단단한 감각이 좋다고 생각한다. 먼 옛날에 좋은 돌과 대리석을 아끼지 않고 만든 바닥만이 줄 수 있는 감각. 좋은 안목을 가진 선조가 한 번 잘 지어놓으면 수백년간 그 후손들, 그리고 지구 반바퀴를 날아온 관광객마저 발바닥으로 작은 호사를 누리게 된다. 


인스타그램에 미술관에 간 사진만 주구장창 올렸더니 친구가 연락이 왔다. "내가 팔로우 하는 다른 사람드 스위스에 있는데 그 사람은 풍경 사진만 올려. 넌 왜 밖에 안나가는거야?" 순간 뼈를 맞은거 같았다. 이국에 와서 낮에는 미술관 밤에는 오페라하우스나 콘서트 홀만 돌아다니고 있으니 사실 그 대단하다는 스위스의 풍경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사랑의 불시착 촬영지 그런데 좀 가." 친구의 말을 듣고 일부러 강가로 나가보니 여름을 누리려는 스위스인들이 수많은 요트를 띄워놓고 다이빙을 하고 헤엄을 치고 있었다. 따가운 햇살을 받아 금빛으로 출렁이는 물과 행복한 사람들의 표정은 보기에 좋았지만 든 생각은 '아 이 곳에선 인싸가 되려면 수영을 잘 해야 하는구나.' 나는 잠시 그 풍경을 바라보다 일어나 오페라 하우스로 향했다. 래스트 미닛으로 산 프로그램은 피가로의 결혼. 오페라하우스는 무척 아름다웠고 주말의 오페라를 즐기러 나온 사람 중 동양인은 오직 나 혼자인 것 같았다. 공연은 좋았고 놀라웠던 건 현대식으로 약간 톤을 바꾸어 진행하더니 급기야는 오페라에 베드신까지 등장했다는 것이다. 남자 배우가 바지를 벗고 팬티까지 내리더니 여배우의 허벅지를 벌리고 자리 잡았다. 영상물로 본다면 그렇게 수위가 높게 느껴지지 않았을 거 같은데 바로 눈 앞에서 그런 장면이 펼쳐지니 오페라에도 연령제한을 둬야 하는거 아닌가 하는 유교걸적인 생각이 불쑥 솟아났다...! 남자 배우는 성기를 가리는 공사를 하고 엉덩이는 벗은 그대로 다 노출되어 있었다. 잠시 당황했지만 생각해보니 이것조차 무척 스위스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인간의 몸은 몸일 뿐이지 그것으로 왜 수치심을 느끼냐는, 교과서적인거 같기도 하고 타당한거 같기도 한 그런 사고방식 말이다. 거의 4시간에 가까운 공연을 보고 밖으로 나오니 밤 11시에 가까운 시각이었다. 해는 넘어갔지만 공기는 여전히 후끈했다. 그렇게, 또 낮에는 미술관에서 밤에는 오페라 하우스에서 시간을 보낸 실내형 인간의 하루가 끝났고 나는 극도의 피곤함을 느꼈다. 실내만 돌아다니면서도 하루에 만보에서 만오천보, 거리로 따지면 10키로쯤 되는 거리를 내리 4일이나 걸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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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2-06-20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웬만한 여행 에세이를 읽는 것보다 라일라님의 눈을 통해 감각되는 스위스의 모습이 너무 좋네요^^
미술관 건축물을 이렇게 섬세하게 바라보고 감탄하시는 라일라님의 글을 통해 저도 그 대리석 밟아 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드네요.
라일라님 덕에 훌륭한 여행기 읽을 수 있어 좋네요. 피곤하실테지만, 또 다음 편이 기대가 됩니다.^^

LAYLA 2022-06-22 00:28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책읽는 나무님
옛날 여행들이 모두 기억이 희미해지고...또 개인적으로 정리를 잘하는 성격도 아니라 사진이고 글이고 정리가 된 것이 없어 아쉬워하던 터라 이번에는 좀 귀찮아도 매일 기록을 하자 싶어서 아침 식사 할 때마다 노트북 옆에 두고 틈틈히 쓰고 있어요. 여행하기 힘든 시기라 그런지 재미있게 읽어주시는 이웃님들이 계시네요 ㅎㅎㅎ

transient-guest 2022-06-20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것이 여행이구나 싶은 글입니다. 유럽은 아직 멀리만 있고 여행이란 걸 마지막으로 해본 건 3년 전이라서 더욱 부럽게 느껴집니다.
우리 시대에는 크고 높고 기술적으로 발전된 건 만들 수 있어도 과거처럼 예술적으로 혹은 품에 많이 드는 멋진 건물은 짓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즐거운 여행 되시길

LAYLA 2022-06-22 00:30   좋아요 1 | URL
정말로 격하게 동의합니다. 이 시대가 구현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생각해보게 되구요. 콘크리트란 것 자체가 수명이 백년 이상은 가기 어렵다는데 지금 만드는 것들이 후대에는 어떻게 평가될까 아주 살짝 궁금합니다 (제가 죽은 뒤의 일이니 진지하게 궁금하지는 않구요 ㅎㅎㅎ)

바람돌이 2022-06-21 0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술관 걷는건 바깥에서 걷는것보다 배는 힘들어요. 보통 미술관 바닥이 매끈하잖아요. 마찰력이 약하기 때문에 우리 몸이 저절로 힘을 더 주는거죠. 저도 스위스 미술관들 너무 보고싶어서 가고싶은데 참 언제쯤 갈까요? 라일라님 미술관 사진도 보고싶은데 제가 인스타를 안하네요. ㅠㅠ

LAYLA 2022-06-22 00:33   좋아요 0 | URL
앗 그런가요!!!! 전혀 모르고 있던 사실이에요. 미술관을 걷는 게 더 힘들다니!!! 실내에서 그늘만 걷는 거라 그다지 바깥을 돌아다니는 것보다 더 쉬운 줄 알았어요. 그럼 신발 바닥을 신경써서 고르면 좀 덜 피곤할까요? 매끈한 바닥의 플랫슈즈 신고 걸었는데 그게 더 힘들었던 이유인거 같네요!!!
 

피카소와 엘 그레코가 있는데 왜 굳이 신진작가의 작품을 봐야하냐며 무시했던 아트바젤. 피카소와 엘 그레코를 다 보고 국경 넘어 독일의 뮤지엄까지 보고 나서도 하루가 남았다. 가이드북에서 보라고 하는 대성당이라던지 스태인드글라스 같은 건 하나도 보지 않았으니 그런 걸 보며 하루를 보내도 되겠지만 결국 아트바젤을 보러 갔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코로나로 한중일은 출국이 쉽지 않다보니 아시아 사람은 보기 힘들었다. 관광객으로서 오면 관광객의 루트를 따라 돌다보니 잘 모르지만 광활하리만치 큰 박람회장을 꽉 채운 사람이 99프로 백인이고 금발과 갈색머리인 걸 보니 이 곳은 이들의 땅이구나, 가 새삼스레 다가왔다. 


한국의 아트페어는 가 보면 돈 많은 사모님들이 이세이미아케나 구호 같은 옷을 입고 그림을 사러 다니는데 이 곳에는 마치 잡지에 등장할 것 같은 색채와 형태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 많았다. 어느 갤러리의 테이블에 백발의 노인이 등을 의자 뒤에 기대어 느긋하게 앉아 있고 젊은 남자 갤러리스트들이 그에게 공손히 말을 붙이고 있었는데 그 노인의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밑이 비쳐보일 것 같은 투명하고 얇은 피부, 솜처럼 날리는 완전히 하얀 머리카락, 마르고 기다란 몸. 린넨처럼 네츄럴한 소재의 수트셋업을 입고 있었는데 안에 입은 셔츠는 광택이 흐르는 실크 소재의 에머랄드 색이었다. 색으로나 형태로나 캔버스 같이 깨끗한 그의 몸 위에서 그 셔츠가 빛나고 있었고 무척 잘 어울렸다. 러시아의 어느 부호가 아닐까 상상의 나래를 펴며 그의 악센트를 들릴까 싶어 잠시 걸음을 멈추었지만 박람회장이 너무 시끄러워 들리지 않았다. 


그리 큰 기대가 없긴 했지만 그런 와중에도 어떤 작품들은 끝없는 사람을 더 화나게 만들었다. 깊이도 없고 방향도 없이 그냥 예술인 척 하는 작품들. 별 뜻도 없는 한자를 정자로 적어놓고 작품이라길래 작가의 이름을 확인해보니 서구출신 백인 여성. 수백명의 중국 노동자가 닭을 잡는 공장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출품했길래 또 작가의 이름을 보니 서구출신 백인 남성. 심지어 한국의 금은방 같은데서 옛날에 찍어내던 일력달력을 뜯어 붙이고 약간의 스케치를 더한 다음 작품이라고 내놓은 백인 남성 작가도 있었는데 그저 한 대 팍 때려주고 싶었을 뿐이다. 박람회장이 너무 넓어서 다 돌고나니 1만보를 걸은 셈이었는데, 그런 작품에 내 체력과 지력을 1그램에라도 할애해야 한다는 것이 화가 났다. 그리고,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피카소의 그림을 다시 보았을 때 너무도 자연스럽고 빠르게 그 불쾌함은 사라져 버렸다. 구름이 빠른 바람을 타고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날아가버리듯. 미술관에 걸린 것이 아니라 판매를 위해 걸린 피카소는 처음 보았는데 수가 적지 않았고 괜찮은 작품들도 있었다. 작품의 가격을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는데 이제껏 한 번도 내가 알 필요가 없었던 단위수의 가격이라 알아듣지도 못했고 알아들으려 노력하지도 않았다. 중요한 건, 이렇게 검증된 완벽한 아름다움이 이미 존재하는데 가능성과 참신함이라는 명목으로 만 보나 걸으며 작품같지 않은 작품을 봐야 할 일인가? 


예전에는 고흐를 제일 좋아했는데 이번에 와서는 피카소가 무척 좋고, 그 좋은 이유를 찾자면 색채나 형태도 있지만 피카소가 그린 사람은 그림 속에서도 살아 있다는 걸 새롭게 발견하게 되었다. 사진을 찍어도 모델에 따라 자연스러움에 차이가 나듯, 잘 그리는 사람의 그림 속에서도 붓질에 따라 사람의 눈동자와 얼굴 근육, 심지어 뒷모습까지도 말을 한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되었다. 그렇게 녹초가 되도록 걷고 또 걸었고 결국 남은 것은 고전들 뿐. 신진 작가 중 마음에 들었던 중국인 작가가 한 명 있었는데 서구회화의 전통을 중국의 느낌으로 이어가는 듯 했고 그냥 그림을 잘그렸다. 21세기의 호크니가 될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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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YLA 2022-06-19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알라딘은 이미지를 날려먹는거니

라로 2022-06-27 20:37   좋아요 0 | URL
진짜요!! 알라딘 증말 밉다!!!!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