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에덴 1 - 추앙으로 시작된 사랑의 붕괴
잭 런던 지음, 오수연 옮김 / 녹색광선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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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가씨가 왜 그럴까요?"
"그녀는 몇 년간이나 공장에서 장시간 일해 왔어요. 어릴 때는 몸이 유연해서, 고된 일을 하다 보면 반죽 덩어리가 틀에 넣어지듯 그 일에 맞게 몸이 굳어져 버리죠. 나는 길에서 흔히 마주치는 노동자들의 직업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어요. 날 봐요. 내가 왜 어디 가나 건들대며 걷겠어요? 바다에서 보낸 세월 때문이죠. 그 세월 동안 어리고 유연한 몸으로 카우보이를 했으면, 지금처럼 건들대진 않겠지만 안짱다리가 됐겠죠. 그녀도 마찬가지에요. 그녀의 눈이, 내가 느끼는 대로 표현하자면, 냉혹해 보인다는 걸 당신도 알아챘나요? 그녀는 보호받은 적이 없어요. 자신을 스스로 돌봐야만 했는데, 젊은 여자가 자기를 보호하면서 온순한 눈을...예를 들자면 당신의 눈과 같은 눈을 가질 수는 없어요." -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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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에덴 2 - 추앙으로 시작된 사랑의 붕괴
잭 런던 지음, 오수연 옮김 / 녹색광선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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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얼마나 많이 자고 또 자고 싶어 하는지 그는 깨달았다. 예전에는 잠자기를 싫어하지 않았나. 그때는 잠이 삶의 소중한 순간들을 훔쳐갔다. 4시간의 잠은 4시간의 삶을 도둑맞는다는 뜻이었다. 잠을 얼마나 꺼려 했던가! 그런데 이제 그가 꺼려 하는 것은 삶이었다. 삶이 즐겁지 않았다. 그에게 느껴지는 삶의 맛은 톡 쏘지 않고 쓰기만 했다. 그것이 그가 처한 위험이었다. 삶을 갈망하지 않으면서 산다는 것은 막다른 길을 가는 것이었다. - P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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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 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3
장애령 지음, 문현선 옮김 / 민음사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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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여자도 외국인한테는 괜찮게 보이나? 물론 리처드슨이 훨씬 더 부적합하니 두 사람이 서로 맞춰 온 거겠지. 뤄전은 순간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서머싯 몸의 글에서 이민족 간의 결혼은 기꺼이 금기를 어겨 고통에 빠지는 행위였으며 최소한 한쪽이 광적으로 사랑에 빠져 있었다. - P79

배를 타고 바다를 마주하자 공간도 시간처럼 기억을 흐릿하게 만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쩐지 외국 소설에서 의사들이 툭하면 ‘여행‘이라는 처방을 내리더라니, 바닷길은 외국인에게 인삼 같은 값비싼 만병통치약 같은 모양이었다. - P88

전바오의 삶에는 두 명의 여자가 있었다. 그는 두 여자를 흰 장미와 붉은 장미라고 불렀다. 한 명은 순결한 아내이고 다른 한 명은 열정적인 정부였다. 사람들은 보통 그런 식으로 순결과 열정을 구분해 이야기했다.

어쩌면 남자에게는 전부 그런 두 여자, 최소 두 여자가 있는지도 몰랐다. 붉은 장미와 결혼하면 시간이 흘러가면서 붉은 색은 벽에 묻은 모기 피처럼 변하는데 하얀색은 여전히 ‘침대 앞의 밝은 달빛‘처럼 유지되었다. 반면 흰 장미와 결혼하면 하얀색은 갈수록 옷에 붙은 밥풀처럼 변하고 붉은색은 가슴의 붉은 반점으로 남았다. - P95

보통 사람의 일생은 아무리 좋아도 ‘도화선‘, 그러니까 머리를 부딪쳐 피가 튀면서 복사꽃 같은 무늬가 만들어지는 부채가 되기 일쑤였다. 그런데 전바오의 부채는 아직 비어 있는 데다 붓과 먹, 환한 창문과 깨끗한 책상이 그가 붓을 놀리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 P97

로즈는 도시에서 꽤 떨어진 곳에 살았다. 한밤주으이 도로 위에서 미풍과 안개가 분첩을 바르듯 가볍게 얼굴을 때렸다. 차 안에서 나누는 대화는 한없이 가벼웠고 전형적인 영국식으로 두서없이 이어졌다 끊어지기를 반복했다. - P102

자오루이는 바닥까지 끌리는 긴 옷을 입었는데 초록색이 얼마나 선명하고 촉촉한지 무엇이든 닿기만 하면 초록색으로 물들일 듯했다. 한 걸음 살짝 움직이자 조금 전까지 그녀가 점유했던 공기에 초록색 자국이 남는 것만 같았다. - P114

"남자가 잘생기면 안 좋아요. 그러면 여자보다 더 멋대로 굴거든요." - P118

남자는 여자의 몸을 동경할 때 영혼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자신이 그녀의 영혼을 사랑한다고 믿는 법이었다. 여자의 몸을 점령하고 나서야 영혼을 잊을 수 있었다. 어쩌면 그게 유일한 탈출법일지도 몰랐다. - P121

나는 통속 소설에 관해 뭐라고 표현하기 힘든 애정을 품고 있다. 더 설명할 필요가 없는 인물들이나 그들의 슬픔과 기쁨, 이별과 만남 때문이다. 충분히 깊이 들어가지 않고 피상적이라고 말한다면 돋을새김 역시 예술이 아니냐고 묻고 싶다. 그런데 쓰기는 또 얼마나 어려운지, 이 소설은 내가 쓸 수 있는 수준에서 가장 통속 소설에 가깝게 쓴 작품이다. -증오의 굴레에 대해 - P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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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문 수록,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문지 에크리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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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까지 아무리 짧아도 일 년, 길게는 칠 년까지 걸리는 장편소설은 내 개인적 삶의 상당한 기간들과 맞바꿈된다. 바로 그 점이 나는 좋았다. 그렇게 맞바꿔도 좋다고 결심할 만큼 중요하고 절실한 질문들 속으로 들어가 머물 수 있다는 것이. - P12

생명은 살고자 한다. 생명은 따뜻하다.
죽는다는 건 차가워지는 것. 얼굴에 쌓인 눈이 녹지 않는 것. -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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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의 삶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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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세주의 탄생은 그렇다고 쳐도 평범한 인간의 생일은 왜 축하하는 것일까? 그것은 고통으로 가득한 삶을 함께 살아가는 이들이 서로에게 보내는 환대의 의례일 것이다. 모두가 가고 싶어하는 좋은 곳에 온 사람들끼리 환대하는 것은 쉽다. 원치 않았지만 오게 된 곳, 막막하고 두려운 곳에 도착한 이들에게 보내는 환대야말로 값진 것이다. 생일 축하는 고난의 삶을 살아온 인류가 고안해낸, 생의 실존적 부조리를 잠시 잊고, 네 주변에 너와 같은 문제를 겪는 이들이 있음을 잊지 말 것을 부드럽게 환기하는 의식이 아닌가 싶다. 괴로움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동료들이 주는 이런 의례마저 없다면 삶이 내 의지와 무관하게 강제로 시작된 사건이라는 우울한 진실을 외면하기 어렵다. - P31

제사는 산 자들이 정색하며 공연하는 한 편의 연극이며 주제는 기억이다. 창과 문을 열어 귀신을 환영한다는 뜻을 표하고 지방에 조상의 이름을 써서 태운다. 귀신이 어련히 알아서 자기 집을 찾으올 텐데, 뭐하러 지방에 이름까지 써서 태울까 싶었는데 다 이유가 있었다. 저 영계에는 아무도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 귀신들이 너무 많아서 지방에 이름을 정확히 써서 태우지 않으면 모든 귀신, 이른바 ‘온갖 잡귀‘가 다 몰려온다는 것이다. 잡초가 이름을 모르는 식물을 의미하듯 잡귀는 이름이 잊힌 귀신이다. 잡귀가 아닌 귀신은 그 이름을 불러줄 누군가가 있다. 이름을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불러 초대하면서 제사가 시작된다. - P63

떠난 사람은 루저가 아니라 그냥 떠난 사람일 뿐이다. 남아 있는 사람도 위너가 아니라 그냥 남아 있는 사람일 뿐이다. - P122

대체로 젊을 때는 확실한 게 거의 없어서 힘들고, 늙어서는 확실한 것밖에 없어서 괴롭다. 확실한 게 거의 없는데도 젊은이는 제한된 선택지 안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조차 잘 모르는 채로 인생의 중요한 결정들을 내려야만 한다. 무한대에 가까운 가능성이 오히려 판단을 어렵게 하는데, 이렇게 내려진 결정들이 모여 확실성만 남아 있는, 더는 아무것도 바꿀 게 없는 미래가 된다. 청춘의 불안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 P137

사공 없는 나룻배가 기슭에 닿듯 살다보면 도달하게 되는 어딘가. 그게 미래였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저절로 온다. - 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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