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여자도 외국인한테는 괜찮게 보이나? 물론 리처드슨이 훨씬 더 부적합하니 두 사람이 서로 맞춰 온 거겠지. 뤄전은 순간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서머싯 몸의 글에서 이민족 간의 결혼은 기꺼이 금기를 어겨 고통에 빠지는 행위였으며 최소한 한쪽이 광적으로 사랑에 빠져 있었다. - P79
배를 타고 바다를 마주하자 공간도 시간처럼 기억을 흐릿하게 만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쩐지 외국 소설에서 의사들이 툭하면 ‘여행‘이라는 처방을 내리더라니, 바닷길은 외국인에게 인삼 같은 값비싼 만병통치약 같은 모양이었다. - P88
전바오의 삶에는 두 명의 여자가 있었다. 그는 두 여자를 흰 장미와 붉은 장미라고 불렀다. 한 명은 순결한 아내이고 다른 한 명은 열정적인 정부였다. 사람들은 보통 그런 식으로 순결과 열정을 구분해 이야기했다.
어쩌면 남자에게는 전부 그런 두 여자, 최소 두 여자가 있는지도 몰랐다. 붉은 장미와 결혼하면 시간이 흘러가면서 붉은 색은 벽에 묻은 모기 피처럼 변하는데 하얀색은 여전히 ‘침대 앞의 밝은 달빛‘처럼 유지되었다. 반면 흰 장미와 결혼하면 하얀색은 갈수록 옷에 붙은 밥풀처럼 변하고 붉은색은 가슴의 붉은 반점으로 남았다. - P95
보통 사람의 일생은 아무리 좋아도 ‘도화선‘, 그러니까 머리를 부딪쳐 피가 튀면서 복사꽃 같은 무늬가 만들어지는 부채가 되기 일쑤였다. 그런데 전바오의 부채는 아직 비어 있는 데다 붓과 먹, 환한 창문과 깨끗한 책상이 그가 붓을 놀리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 P97
로즈는 도시에서 꽤 떨어진 곳에 살았다. 한밤주으이 도로 위에서 미풍과 안개가 분첩을 바르듯 가볍게 얼굴을 때렸다. 차 안에서 나누는 대화는 한없이 가벼웠고 전형적인 영국식으로 두서없이 이어졌다 끊어지기를 반복했다. - P102
자오루이는 바닥까지 끌리는 긴 옷을 입었는데 초록색이 얼마나 선명하고 촉촉한지 무엇이든 닿기만 하면 초록색으로 물들일 듯했다. 한 걸음 살짝 움직이자 조금 전까지 그녀가 점유했던 공기에 초록색 자국이 남는 것만 같았다. - P114
"남자가 잘생기면 안 좋아요. 그러면 여자보다 더 멋대로 굴거든요." - P118
남자는 여자의 몸을 동경할 때 영혼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자신이 그녀의 영혼을 사랑한다고 믿는 법이었다. 여자의 몸을 점령하고 나서야 영혼을 잊을 수 있었다. 어쩌면 그게 유일한 탈출법일지도 몰랐다. - P121
나는 통속 소설에 관해 뭐라고 표현하기 힘든 애정을 품고 있다. 더 설명할 필요가 없는 인물들이나 그들의 슬픔과 기쁨, 이별과 만남 때문이다. 충분히 깊이 들어가지 않고 피상적이라고 말한다면 돋을새김 역시 예술이 아니냐고 묻고 싶다. 그런데 쓰기는 또 얼마나 어려운지, 이 소설은 내가 쓸 수 있는 수준에서 가장 통속 소설에 가깝게 쓴 작품이다. -증오의 굴레에 대해 - P19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