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망 세트 1 : 1~12권 - 전12권 (반양장) 대망
야마오카 소하치 지음, 박재희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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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 望

                                                       야마오카 소하치(山岡莊八)/박재희 역

 

  인생의 황혼기에 - 어릴적부터 그렇게 하고 싶어하던 - 독서를 또 하나의 취미 로 선택하고 책을 읽는다.

 

  워낙 대하소설을 즐겨하는 편이기도 하고, 오래 전에 지인으로부터 재미있고, 조개를 많이 먹으면 여자가 된다는 얘기가 나온다는데 흥미를 느낀 점을 기억해 내어 출간 45년이 지난 시점에서 드디어 전 32권의 분량에 도전하게 되었다.

 

  읽으면서 알게 된 사실은 원래 원본이 그랬는지, 역자의 의도였는지, 아니면 출판사의 기획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전 32권 중 120권이 야마오카 소하치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이며, 그 속편이 2123권의 야규우 무네노리(柳生宗), 2425권의 다데 마사무네(伊達政宗)이고, 2632권은 요시카와 에이지(吉川英治)의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蔵)로 편성되어 있었다.

 

작가 야마오카 소하치(山岡莊八)1907년 일본의 니가타 현(新潟縣)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를 다니다 우편강습소에서 공부한 다음 우편국원, 대중잡지 편집장을 지내며 국민문학  거장 하세가와 신(長谷川伸)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1934<선데이 매일>약속이 입상되면서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1950년부터 1967년까지 무려 17년에 걸쳐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평화를 추구하는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인물로 포착해 대하소설 대망(도쿠가와 이에야스)을 집필했다.

  이 작품으로 요시카와 에이지(吉川英治) 문학상을 받았고 이는 소설 메이지()천황(1963~1968), 태평양전쟁(1962~1971)과 더불어 일본의 특성을 찾는 3부작이 되었다.

  미국과 전쟁 중 가고시마 현(鹿兒島縣)의 가노야(鹿屋)에서 특공대에 참여한 체험이 그의 모든 작품의 원점을 형성하고 있다.

  야마오카 소하치는 늘그막에 일본 수상들과 기업총수들의 사표(師表)로서 국가기업 경영전략에 대한 자문에 응했다. 1978년에 세상을 떠났으며,야마오카 소하치 전집46(1981~1984, 고단샤)이 발행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야마오카 소하치[Yamaoka Sohachi] (해외저자사전, 2014. 5., 교보문고)

  수차례 NHK대하드라마로 혹은 영화화되어 국민적 필독서 붐을 일으켰다는 은 여러 저명인사들에 의해 정치를 하려면 읽어야 한다’ ‘경영자가 읽어서 얻을 게 많으리라’ ‘인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길을 가는 것과 같다고 말한 德川家康의 파란만장한 인생경영과 국가경영을 그린 작품이다등의 평가를 받고 있.

  저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전국시대를 평정하고 에도막부 정권을 열어 300간 일본의 평화를 가져온 영웅으로 그리고 있다.

 

  ● 이 작품은 16C 17C 초 일본의 봉건제도 하의 전국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당시의 성주들은 자신의 세력 유지를 위하여 자녀나 부인들의 결혼이나 이혼을 정략의 도구로 삼거나, 이들을 인질로 주고 받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2 ~ 1616)는 아버지 마쓰다이라 히로타다와 미카와국 가리야 성의 성주 미즈노 다다마사의 딸 오다이 사이에서 정략결혼으로 태어났다(이후에 다시 이혼함).

 어릴 때의 이름은 다케치요였다.

  오까사끼성을 기반으로 한 마쓰다이라 가문은 이에야스의 조부 기요야스 시기에 부흥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기요야스가 부하의 배신으로 사망한 이후 당시 10살에 불과한 히로타다가 그 뒤를 이었으니 마쓰다이라 가문은 큰 위기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계속되는 오다 노부히데의 공격으로 위기에 빠진 히로타다는 이마가와 가문에 군사 원조를 요청하고 그 대신 6살이 된 장남 다케치요(이에야스)를 인질로 보냈다.

 그러나 도중에 납치되어 당초 목적지와 달리 적대세력인 오다 가문으로 보내졌다.

 여기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인연을 갖게되고 그것이 훗날 천하통일의 기초가 되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1549. 24살에 불과했던 아버지 히로타다가 부하의 배신으로 살해되었다. 이마가와 가문의 공격으로 안쇼성이 함락되고 그 결과 포로로 잡힌 오다 노부히로와 이에야스의 인질 협상이 성립되어 이에야스는 오까사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이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이마가와 가문의 본거지인 순뿌로 가야 했고, 오까사끼성은 이마가와 가문이 관리했다.

  성장한 이에야스는 이마가와 가문을 위해 오까사끼군()을 거느리고 각종 전투에 참가했다. 1560년 요시모토가 군대를 이끌고 교토를 향해 서진할 때 선봉에 서서 여러 성을 함락시켰으며, 특히 적에게 포위되어 고립된 오다카 성에 군량을 반입하는 작전을 성공시켜 무장으로서 명성을 올렸다.

  그러나 오다 노부나가의 기습으로 요시모토가 오케하자마에서 전사하자 자신의 오까사끼성으로 귀환하여 자립의 길을 모색하게 되었다.

  이후 이에야스는 이마가와 가문과 결별하고 새롭게 떠오르는 오다 노부나가와 동맹을 체결했다.

 미카와의 승려 봉기를 진압하고 미카와국을 통일하였으며, 이때 성()을 마쓰다이라에서 할아버지 대의 본래의 성인 도쿠가와로 바꾼다.

  다케다 신겐과 연합하기도 하였으나 노부나가와 동맹을 맺고 노부나가는 서쪽, 이에야스는 동쪽 영토를 늘려가는 동진정책을 펴면서 여러전투를 해 나갔다.

 이후 교토로 진군하려는 신겐을 맞아 미가타하라에서 전투를 벌여 대패하였으나 3배나 많은 적군을 맞은 적극적인 분투는 큰 불명예는 아니었다.

  이에야스군을 격파하고 승승장구하던 신겐은 그 이듬해 병사하고 말았다.

 후계자가 된 다케다 가쓰요리가 곳곳에서 싸움을 벌여 이기기도 하였으나 이에야스와 오다의 연합군에게 나가시노에서 대패하여 세력이 급속히 약화되고 이 후 멸망하고 만다.

  이즈음 노부나가는 이에야스의 적자 노부야스가 다케다 가문과 내통하였다고 자결을 지시하고 이에야스는 숙고 끝에 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들과 아내를 죽여 동맹관계를 유지한다.

  1582년 노부나가가 아케치 미쓰히데의 배신으로 죽자 그의 말잡이 였던 농부출신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아케치 미쓰히데를 토벌한 후에 1583년 오다 가문의 유력자 시바타 가쓰이에마저 죽여 패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히데요시가 점차 독선적인 행위를 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노부나가의 둘째 아들 오다 노부카쓰는 이에야스를 끌어들여 히데요시와 대립했다.

  1584년 이에야스는 오와리 국으로 출진하여 노부카쓰와 합류했다. 히데요시도 군대를 이끌고 출진하여 오와리 이누야마 성을 근거지로 삼아 고마키에 포진한 이에야스와 대치했다. 양자의 싸움은 히데요시의 별동대가 급습에서 패배하면서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고 강화로 끝을 맺었다.

히데요시는 수차에 걸쳐 상경하여 자신에게 복종하기를 설득했지만 이에야스는 쉽게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의 이복동생 아사히히메를 이에야스의 정실로 보내 이에야스와 결혼시켰다. 그럼에도 이에야스가 복속을 표시하러 상경하지 않자, 히데요시는 자신의 어머니를 아사히히메 방문을 구실로 내세워 사실상 인질로 보냈다. 이에야스를 얻는 것이 곧 천하를 얻는 것이란 히데요시의 생각이었는지?

 이에 몸값을 한껏 높인 이에야스는 드디어 상경하여 오사카 성에서 히데요시를 만나 예를 표하였으나 결코 그의 신하는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한다.

  그 후 이에야스는 이마가와 가문의 본거지였던 순뿌로 거성을 옮기고 도로정비, 상공업진흥 등 개발정책을 시행하여 150만 석에 달하는 영지 통치에 힘썼다.

 1587년에 다시 상경하여 내대신으로 승진, 도요토미정권의 2인자 대우를 받았다. 1590년 호조가문이 멸망 후 히데요시는 이에야스의 기존영지 5개국을 회수하고 간토 8개국을 새롭게 주어 이주케 한다.

 가신들은 분노했지만 오히려 덤덤하게 황무지 같은 간토로 이주한 이에야스는 늪지대인 에도에 본거지를 두고 길을 닦고 상인들을 모으는 등 새로운 영지의 안정과 통치에 진력했다. 결과 이에야스의 영국은 약 250만 석으로 늘어 났으며 히데요시 정권 아래 최대 규모의 영주로 군림하게 된다.

 명나라 정벌을 꿈꾼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켰을 때 이에야스는 조선에 출병하지 않고 일본에 남아 군사력을 비축했다.

 히데요시가 임진왜란 중 사망하고 전쟁이 끝나자 히데요시의 충복이었던 이시다 미쓰나리가 군대를 일으켜 이에야스를 치면서 전쟁이 일어났다. 당시 히데요시 가신단은 무단파와 문치파로 갈라져 대립했는데 이것이 이에야스에게 좋은 기회가 되었다.

  160010월 기후 현에 위치한 세키가하라에서 대치하였는데 이 전투가 바로 그 유명한 세키가하라 전투이다.

 사실 이 전투는 단 하루 만에 끝난 싱거운 싸움이었지만, 일본 전역의 성주들이 동군과 서군으로 양분되어 맞선 상징적 전투로서 의미가 있다.

 이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 측이 승리하면서 이에야스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일본 최고의 실력자가 되었고 이 승전으로 에도 막부가 열리는

기초가 다져졌다.

  이 전투 전부터 이후 오사카 전투까지 이에야스는 지나칠만큼 인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후 이에야스는 세이이대장군(征夷大將軍)에 임명되고 그 직을 아들 히데타다에게 물려준다.

  한편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많은 가문이 멸망하여 낭인이 된 불만이 많은 무사들과 기독교인들이 오사카 성에 집결하면서 점차 불온한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결국 161410월 오사카 성을 포위하여 공격하고 이듬해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와 생모 요도기미가 자결하면서 도요토미 가문은 멸망했다.

  이후 이에야스는 외국 무역과 상업의 진흥에 특히 관심을 기울이기도 하였으며 16164177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소설 속의 세력의 중심은 오다 노부나가 - 도요토미 히데요시 -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이어지면서 수많은 전쟁으로 인한 파괴, 방화, 약탈과 부녀자, 아이들까지 무의미하게 순사(殉死) 당하는 모습을 보며 평화로운 세상을 염원하고 있으나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평화를 위하여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다.

  이에야스는 천하는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라 천하의 천하다라며 겸손을 가르치기도 하고 인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길을 가는 것과 같다면서 서두르지 말기를 충고하기도 하였다.

  작가 야마오카 소하치(山岡莊八)는 연전(年前)에 읽은 그의 저서 태평양전쟁(1962~1971)에서 우리나라(대한민국)는 일본과 달리 역사적으로 많은 침략을 받아왔기 때문에 일본의 침략은 당연한 것이라고 얘기한 구절을 읽고 몹시 분노했던 적이 있어 잘못된 국가관과 세계관을 가진 인물로 기억하고 있었다.

  물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지만, 이 소설에서 보면 그의 필력(筆力)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야기가 전개되는 내내 계속하여 문제를 제기하고 경우의 수를 뛰어넘는 해결방안의 제시하면서 긴장을 늦추지 않는, 그래서 읽는 내내 지루함을 느끼지 않았다. 한마디로 참 재미있는 글이었다.

 그러나 기대했던 조개를 많이 먹으면 여자가 된다는 얘기는 그 어디에도 나오지 않았다.

 

  ● 야규우 무네노리(柳生宗矩)는 칼을 들면 천하에 당할 자가 없는 무도승법(無刀勝法)의 달인인 세끼슈사이(石舟齊)의 아들로 태어나 검도에 정진(精進)한 검객이지만 이에야스의 심복으로 천하를 제패하는데 큰 공헌을 한다.

  논공행상(論功行賞)에서도 과도한 녹봉과 영주의 반열에 오르기를 사양하고 장군가사범(將軍家師範)으로서의 긍지와 영예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검소한 생활을 하였다.

  야규우 집안은 장군가(將軍家)뿐만 아니라 여러 영주의 가문에도 사범을 보낸 유명한 검도 가문이었다.

 

  ● 다데 마사무네(伊達政宗)1567년 요네자와성의 성주 다데 데루무네의 첫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하였고 마마를 앓아 왼쪽 눈을 잃어 애꾸눈이 되었다. 때문에 후에 사람들은 그를 독안룡(獨眼龍)이라 불렀다.

 

 강자의 틈에서 홀로 일어나 24세에는 오쓰의 패자가 된 마사무네는 권모술수가 뛰어났으며 20여년 늦게 태어나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함께 천하를 놓고 각축(角逐)할 수 없음을 한탄하였다.

  그러나 도요토미, 도쿠가와 양정권 밑에서도 광대한 영지를 지켰다.

  히데요시의 뒤를 이어 권력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도 복속해 그의 천하인에의 야망은 물거품이 되었으나 그후로도 그의 사위가 되는 이에야스의 아들 마쓰다이라 다다데루(松平忠輝)에게 모반을 품게하는 등 여러 계략을 실행해 이에야스에게 있어 무시못할 존재로 남아있었다.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蔵)

                                                                요시카와 에이지(吉川英治)

  작가 요시카와 에이지(1892.8.11 ~ 1962.9.7)는 가나가와현[神奈川縣] 출생. 가정이 어려워 소학교를 중퇴, 직공 ·행상 등 여러 직업에 종사하면서 독학으로 문학수업을 하였다. 1921년 고단샤[講談社] 발행의 여러 잡지에 울퉁불퉁한 꽃병등이 입선되었고, 이듬해 도쿄마이니치신문[東京每日新聞]의 기자가 되어 이 신문에 신란키[親鸞記](1923)를 연재하면서부터 문단에 나섰다. 또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大阪每日新聞]에 실린 나루토 비첩[鳴門秘帖](19261927)으로 대중문단의 유행작가가 되었다.

  스토리의 매력과 구도정신(求道精神)으로 역사소설에 뛰어난 재질을 발휘, 많은 독자를 확보하였다. 1960년 문화훈장을 받았고, 사후 그의 유지(遺志)에 따라 요시카와 에이지상() 및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상이 제정되었다. 그 밖의 주요작품으로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藏]19351939) 삼국지(三國志)(19391943) 시혼다이헤이키[私本太平記](19581959)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요시카와 에이지 [吉川英治(길천영치)] (두산백과)

  ●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藏 1582~1645)는 실존 인물이었다.

  일본의 수많은 검객들 중에서도 단연 첫손에 꼽히는 인기를 누리는 국민적 영웅으로 일본에서는 검성(劍聖)으로 불리며 추앙받는다.

  어려서부터 병법에 심취하여 각국 곳곳의 병법자를 만나 일평생 60여 차례의 결투를 벌이고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다고 알려지고 있다.

  검객의 아들로 태어나 일찌감치 검을 잡은 그는 두 개의 칼을 사용하는 니텐이치류 검법을 창시하였다. 규슈지방으로 건너가 구마모토 번에서 자리를 잡고 이곳에서 번의 무사를 지도하며 말년에는 오륜서, 독행도등의 책을 펴냈다.

 

  이야기는 세끼가하라 전투로부터 시작된다.

 오사카측 서군으로 전투에 가담하였으나 패하고, 고향친구 마다하찌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는다. 전장터에서 만난 아께미에게 부상을 치료받고 마다하찌와 헤어져 고향 돌아갔으나 마다하찌의 어머니 오스기 노파의 오해를 받고 패잔병으로 쫓기게 되다가 다꾸앙 스님에게 자수하여 나무에 묶여 매달리게 되지만 약혼자 마다하찌로부터 파혼 편지를 받은 오쑤우의 도움으로 탈출하게 되고, 오쑤우는 무사시를 사랑하게 된다.

  이런 일들로 인해 후일 오해가 풀릴 때까지 오스기 노파는 무사시와 오쑤우를 따라 다니며 원수를 갚겠다고 목숨을 노리고 괴롭히게 된다.

  다꾸앙 스님의 노력으로 사면을 받은 무사시는 검을 도()로 하여 선()의 경지에 이르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검술을 연마하기 위하여 무사수행자의 긴 여정()을 시작한다.

  요시오까 도장의 시합에서 그들을 이김으로서 원한을 사게 되고, 일승사 늙은 소나무 거리의 싸움에서는 수십명을 상대로 하여 그 명성을 떨치게 되지만, 여정(旅程) 내내 그들과 오스기 노파의 추적을 받으며 도전을 받는다.

  야규우 가문을 방문하여 세끼슈사이와의 시합을 원했으나 목적을 이루지 못한다.

  마침내 사사끼 고지로와의 시합이 확정되고 이 시합에서 목검으로 고지로의 머리를 깨어버리고는 표연히 사라진다.

  도중에서 만나 제자로 삼기도 했던 죠따로와 오쑤우의 동생 이오리, 그만을 사랑하여 일구월심(日久月深) 뒤쫓던 오쑤우, 마다하찌·아께미 부부도 뒤로하고.........

 

  훗날 시간이 되면 사사자와 사호가 지은 소설 미야모토 무사시도 읽어 봐야 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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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인정하기 위해서 자신을 깎아내릴 필요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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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즐거운 일이 생기지 않으면 인생이 재미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행복을 느끼는 일은 한번이어도 충분히 의미 있고 재미있는 인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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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자기에 공감해 주는 사람에게 반드시 반응한다. 사람은 본래 그런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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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길태 2018-12-22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세속적인 말이지만 매우 공감이 간다
 

누군가의 말보다 자신이 좋고 기쁜 게 더 중요하죠. 사람들에게 보이는 모습보다 내 욕구를 먼저 충족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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