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으로 간 배
곡명은 이미 정해졌다. 현제명 작사, 작곡의 ‘희망의 나라로’로. 지난 주에 선생님은 이미 예고했었다. 이번 음악 시험은 실기시험이라고. 그리고 학교 스피커를 통해 이 노래를 계속 들려주면서 학생들이 시험에 대비하도록 배려를 해 주었다.
♪배를 저어가자 험한 바다 물결 건너 저 편 언덕에∼♬, 등교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틀어주면 걸음걸이도 씩씩해지고 활기도 넘친다.
그런데 문제는 옵션이 있다는 것이었는데, 가사를 못 외워 책을 보고 부르는 사람에게는 10점의 페널티가 부여된단다. 근데 뭐 워낙 유명한 노래고, 자꾸 들으니 일부러 가사를 안 외워도 저절로 외워져 누구나 쉽게 따라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우리 대(代)에는 국민학교 때부터 경쟁이 일상이어서 - 받아쓰기부터 시작해서 - 거의 매일 시험을 쳤다. 그래서 시험에 익숙해지고, 그런 분위기에 많이 면역이 되었을 것인데도, 시험이란 항상 마음을 졸이게 하는 것이었고 그래서 모두들 긴장한 가운데 한 사람, 한 사람 씩 나가서 선생님의 풍금 옆에 서서 노래를 불렀
다. 모든 반 아이들이 옵션은 모두 ‘안 보고’다.
꾀꼬리가 아니면 어떠랴? (돼지에게는 미안하지만) 돼지 멱따는 목소리라도 가사만 틀리지 않으면 된다. 두근두근 무사히 내 차례를 마치고 안도하고 있는데, 문제는 내 몇 번 뒤에 있던 팔봉이었다.
씩씩하게 걸어 나가 선생님 곁에 섰다. 옵션은 “안 보고.” ♩붕짝붕짝♪ 선생님 풍금 소리에 맞춰, 시작! “♪배를 저어가자 깊은 산 속으로......” 뚝! 거의 순서가
다 끝나 갈 때쯤이라 분위기가 다소 산만해지던 교실에 갑자기 정적이 찾아왔다.
우리 모두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귀를 의심하고 있던 순간에, 팔봉이, “아이다, 아이다. 선생님 다시 하겠습니다.”한다. 아이들 빵 터졌다. 선생님도 기가 막혔는지 헛웃음을 치며 “그래, 다시 해라. 책 안 봐도 되겠나?” “아, 예. 관계없습니다.”
다시 한다. 아이들 이번에는 귀를 기울인다. ♩붕짝붕짝♪ 시작! “♪배를 저어가자 깊은 산 속으로......” 아이들 이번에는 구르고 난리다. 온 교실이 폭소의 도가니다. 그런데 우리의 팔봉이는 별 동요하는 기색이 없다. 완전 포커페이스다. 그리고 또 다시 한 번의 기회를 부여받는다.
이제 그만 책을 보고 부르라는 선생님의 권유와 아이들의 성화에도 불구하고 그는 세 번째의 시도에서도 꿋꿋하게 배를 저어 산 속으로 가고 말았다. 으이구 팔봉아∼.(하루에 세 번 씩이나 배를 산으로 보내다니, 대 다 나 다.) ㅋㅋㅋ
하지만 그날의 팔봉이의 시험 점수에 페널티가 부여되었는지? 아니면 초지일관한 용기를 가상히 여겨 선생님께서 선처를 베풀었는지?는 궁금해 한 사람이 없어서 아무도 알지 못하고 말았는데,(그 후 언젠가 명절 때는 우리 친구들 노름을 하는 자리에 슬쩍 끼어들어서는 9땡을 잡고 계속 배팅을 하며 깝죽대다 장땡을 잡은 나에게 탈탈 틀린 적도 있었는데,)
몇 년 전에 그 이야기를 하며 친구들에게 그의 안부를 물었더니, 그 동안 그는 사업에 성공하여 고향의 경제단체의 장을 맡아 활약을 펼치고 있다고 했다. 팔봉이 파이팅! 그런데 만나면 꼭 물어 볼 말이 있다. “팔봉아! 그때 왜 그랬니? 사공
도 많지 않은 배가 왜 산으로 갔냐?”
근데 그때 그 ‘떠나간 그 배는’ 지금은 ‘어디쯤 가고 있을까?’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