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 영화
우리 때에는 학칙이 엄청 엄해서 학교에서 단체로 영화 관람을 하는 외에는 극장 출입을 엄격하게 제한했고, 미성년자 관람가, 불가를 막론하고 무단으로 극장 출입을 하다 걸리면 최소 처벌이 정학 처분이었다. 그리고 매일 밤 학교 선생님들이 교대로 극장으로 단속을 나갔었다.
그래서 선생님 몰래 살금살금 가서 보는 영화를 도둑 영화라 칭했는데, 경찰이 있다고 도둑이 없어지지 않는 것과 같이 학생들은 심심찮게 도둑 영화를 관람하고 무용담과 감상평을 자랑하기도 했다.
중학교 2학년 때 였던 것 같다. 앞에 앉은 작은 녀석이 며칠째 영화 보러 가자고 살살 꼬신다. 나는 밤에 과외 공부를 해야 했기 때문에 시간이 없다며 딱 잘라 거
절했다. 하지만 녀석은 끈질겼다.
그 녀석은 집안 형편이 그렇게 넉넉하지 못해서 아르바이트로 신문 배달을 하고 있었는데, 자기가 시내 두 곳 있는 극장 모두에 신문 배달을 하기 때문에 기도 아저씨들을 잘 알아서 자기가 데리고 오는 친구 한, 두 명은 공짜로 입장 시켜주기로 약속이 되어 있단다.
그 녀석과는 새 학년이 되어서 만났고, 나에게 호감을 표시하며 접근해 오면서 나랑 친해지고 싶어서 이런 제의를 하게 된 것 같았는데 비록 거절은 하였지만, 영화 감상, 그것도 공짜 영화. 그것은 나에게 호기심과 스릴을 모두 갖춘, 피해가
기 힘든 너무도 강렬한 유혹이었다.
당시에는 청소년들이 여가를 보낼 마땅한 거리가 없다보니 영화 감상이 최고의 흥밋거리였는데 그걸 또 못하게 강력하게 막으니 숨어서라도 할 밖에. 그래서 나는 일탈을 감행하기로 작정을 하였고, 다음에 과외가 빠지는 날 함께 영화를 보러 가기로 결정했다.
나는 녀석에게 “영화 보러 갔다가 선생님에게 걸리면 어떡하나?”하고 물으니, 녀석이 그런다. “선생님들은 영화 시작 전에 이층에서 아래층을 내려다보고 학생들을 찾아내기 때문에 영화 시작하고 바로 이층으로 올라가면 불이 꺼져 깜깜하니까 선생님도 모른다.” 이런다. 그 말도 일리가 있는 것 같았다.
드디어 학수고대하던 그날이 되었다. 그런데 사실, 영화 제목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도 영화 제목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인기 있는 영화가 아니었는데, 그때는 영화 감상보다 도둑 영화를 본다는 행위 자체에서 더 스릴을 느꼈던 것 같았다.
저녁을 든든하게 챙겨먹고 시간에 맞추어 극장 앞에서 녀석을 만났다. 녀석은 나를 잠시 기다리게 해 놓고 표도 끊지 않고 기도에게 인사를 하더니 극장으로 쓱- 들어갔다가 나온다. 그러더니 조금 더 기다려야 한단다.
과연, 녀석의 말대로 그는 극장을 공짜로 들락날락하는 능력자로 내 눈에 비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잠시 후 다시 극장으로 들어간 녀석이 한참을 기다려도 나오지 않는다. 영화 시작할 시간은 다 되어 가는데. 나는 슬슬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영화 시작 시간이 지나도 녀석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기다리다 지친 나는 모처럼 나온 시간이 아까워 매표구에서 극장표를 사서 입장한 다음 얼른 이층으로 뛰어올라갔다. 영화가 시작되어 불이 꺼져 깜깜할 것이니 얼른 객석으로 들어가면 만사 OK다. 그렇게 허겁지겁 계단으로 올라가다 이층에서 내려오던 사람과 딱 마주쳤는데 허걱! 우리학교 농업 선생님이다.
큰일 났다. 딱 걸렸다. 그 선생님은 고향이 섬인데 혼자 뭍에 나와서 생활하신다고 했고 농업 선생님이다 보니 항상 화단 가꾸기에 정성을 쏟는 둣했는데 혼자라서 외로우셨는지 극장 단속은 도맡아놓고 하시는 것 같았다.(그래서 우리 사이에는 그 선생님이 성병에 걸려서 가족과 같이 못사는 것 같다는 유언비어가 퍼져있었다.)
그런데 우리 한 해 위의 선배들은 실업 시간에 농업을 배웠고 우리는 상업을 배웠기 때문에 그 선생님은 우리를 가르치지 않아서 나를 몰랐다. 하지만 내가 학생인 것만은 분명하니까 도망가지 못하도록 나를 붙잡고 심문하기 시작했다.
요즘 같아서는 다른 학교 학생이라고 거짓 진술을 했으면 되었을 것을 그때는 너무 큰일이 발각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머리 속이 하얗게 비어 있었고, 원래가 내가 또 거짓말도 할 줄 모르고, 그때는 너무 고지식해서 곧이곧대로 학교와 학번을 술술 진술하고 말았다.
그래놓고 선생님은 내가 가족과 함께 영화 보러 왔느냐고 물었다. 나는 할 말도 없고 너무 쫄려서 우물쭈물 대답도 못하고 한쪽 구석에서 땅만 쳐다보며 고개를
쳐박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더니 선생님은 아무 조치도 없이 가버렸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한 상황에 빠져 있다가 한참 후에 객석에 들어가 영화를 보았다. 그 상황에 영화가 눈에 들어올 것이라고 영화를 보다니 나도 참 ㅉㅉㅉ. 당연히 영화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고 걱정만 눈덩이처럼 부풀어 마음을
짓눌렀다.
그런데 영화가 끝날 때까지 녀석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나는 집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돌려야만 했다.
그리고 다음 날, 나는 담임 선생님께 교무실로 불려가서 다시 심문을 받고 실컷 꾸중을 들었다. 다행히 그 영화가 미성년자 관람가 등급의 영화여서 반성문을 쓰는 것으로 정학은 면하였고, 나의 중학생 시절의 스릴을 만끽하기 위한 과감한 일탈은 친구들에게 자랑도 한 번 하지 못한 채 해프닝으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그런데 괘심한 것은 그 녀석은 내가 그런 수모를 당하는데도 변명 한 마디 없었고 눈조차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나쁜 넘, 거짓말쟁이, 나를 물 먹이다니. 나는 이후 그 녀석과는 일절 상종하지 않았고 ‘세상에 공짜는 없고, 공짜는 절대 좋아하면 안 된다’는 큰 교훈을 얻었다.
그 후 나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고향을 떠났는데, 방학 때 고향에 와서 보면 그 녀석은 보디빌딩을 한답시고 자기만큼 짜리몽땅한 선배들과 어울려 가슴 빵빵하게 부풀리고, 어깨 각 잡고 이상하게 팔을 옆으로 벌린 어정쩡한 폼으로 할 일없이 시내를 어슬렁거리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바보 같은 넘, 그 키에 옆으로만 퍼지기만 하면 그게 얼마나 꼴불견이냐고??? 공부나 열심히 할 것이지 ㅉㅉ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