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우체통 - 아직도 아빠는 편지를 보내고 있나요? 처음어린이 6
봉현주 글,국설희 그림 / 처음주니어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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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키우면서 가장 두려운 생각이 바로 내가 잘못되면 아이들은 어떻게 될까하는 것이다. 아마 부모라면 누구나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 그런 이야기에는 더 마음 아파하고 괜히 감정이입해서 울고 그런다. 확실히 혼자일 때보다 아이를 키우면서 자신의 삶에 대해 더 진지해지고 책임의식이 강해진 것이 사실이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들을 위해서. 

그런 면에서 솜이 아빠가 암 선고를 받고 솜이에게 매몰차게 홀로서기를 시키는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마냥 예쁘게만 키우며 언제까지 딸 옆에서 지켜줄 줄 알았지만 갑자기 떠나게 되었으니 왜 안 그럴까. 끝까지 솜이에게 숨기고 몰래 떠난 부분은 어찌보면 딸의 마음을 너무 아프게 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솜이의 장래를 위해서 한 선택이라는 점은 이해가 간다. 지어낸 동화를 보고 너무 안타까워 하고 있다. 지금 내가. 

이야기는 줄곧 솜이 아빠의 입장에서 전개된다. 대개 동화라고 하면 화자가 어린이거나 주인공이 어린이인데 이 책은 좀 특이하다. 분명 주인공은 솜이가 맞는데 아빠가 떠나기 전까지는 마치 주인공이 아빠 같다. 그러다 나중에서야 솜이가 제 자리를 찾은 듯하다. 그만큼 설정이 모호하다는 얘기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독자는 누구에게도 자신을 대입하지 못한다. 아니, 오히려 어른이라면 아빠에게 대입하다가 엄마에게 대입할 수 있겠지만 어린 독자라면 글쎄, 혼란스럽지 않을런지. 

그리고 또 하나. 솜이가 플루트 연주로 시 대회에 나갔을 때 사진을 찍었다고 하는데 그런 대회에서 개인이 사진 찍기는 힘들다. 참가자가 긴장해서 실수할 수 있기 때문에 모두 조용히 하고 심지어 어느 대회에서는 대회 참가자 외에는 안 들여보내기도 한다. 물론 내가 경험하거나 알고 있는 것만이 맞다고 할 수 없지만 현실을 잘 모르는 이야기 같아 거슬렸다. 또 한 가지만 이야기하자면 아빠와 산책하던 둑까지 뛰어간 솜이가 학과 두루미를 보았다고 하는데 학과 두루미는 같은 종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대개 경기도 북쪽에 있다는데 이야기의 배경이 어딘지 정확히 나오지는 않지만 좀 뜬금없어 보이는 건 왜일까. 내가 지나치게 딴지를 걸려고 하는 것일까. 

이런 약간의 거슬림에도 불구하고 읽으며 다 읽고 나면 미친척 하고 노란우체통을 찾아보려고 했다. 그런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노란우체통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가 뒷부분에 나오니까. 정말 이런 편지 타임캡슐이 있구나. 문득 나도 거기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멀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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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 미스터리 1 - 자라지 않는 벌레의 비밀
진 크레이그헤드 조지 지음, 고수미 옮김 / 파랑새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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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작가라고 생각하며 작가 소개를 읽다가 <나의 산에서>를 발견하고 반가웠다. 비록 그 책을 다 읽지는 못했지만 자연을 동경하던 내 생각과 너무 닮아서 무조건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게다가 그 당시 아마도 <월든>을 읽지 않았나 싶다. 그 책을 쓴 작가라니, 그럼 믿을 수 있겠군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이 책은 환경을 이야기하는 책답게 재생 종이로 만들었단다. 우선 그 사실만으로도 후한 점수를 줬다. 

미스터리라는 말이 있어서 사건이 벌어지고 그걸 푸는 과정이 스릴 넘치게 이어질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다. 솔직히 내가 모르는 생태학 지식이 너무 많이 나와서 혼란스러웠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번역자도 말하지 않았던가. 우리나라에 없는 동식물 이름이 많이 나와서 어려웠다고. 그러니 아무런 준비없이 읽은 나 같은 독자는 얼마나 어려웠을까. 

그건 그렇다쳐도 책을 읽으며 알게 된 내용은 정말 미스터리하다. 아니, 신비롭다. 자연은 스스로를 방어할 줄 안다는 말을 새삼 실감하기도 했다. 우리가 보기엔 움직이지 못해서 수동적으로 살 것만 같은 나무도 결코 그렇지 않다. 겨울이 다가오면 뿌리에서 물을 빨아들이지 않아 스스로 나뭇잎을 떨어트리고 가지가 어는 것을 막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얼마나 경이로웠던가 말이다. 상록수들은 모두 잎이 뾰족뾰족한데 눈이 많이 온 날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만약 잎이 넓으면 눈이 쌓여서 얼마나 무거울까, 그러니 최대한 면적을 줄인 건 아닐까(물론 이 이야기는 책에 없다).  

식물학자 아빠와 수목학자 엄마를 둔 매기는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곤충과 식물과 동물에 관심을 가졌다. 열두 살 짜리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지식이 엄청나다. 그런데 한 살 아래인 미치는 컴퓨터에 뛰어나다. 반면 매기는 컴퓨터에 대해서는 거의 모른다. 작가가 이 글을 쓴 90년대 초반에는 인터넷이 활성화되지 않았기에 매기가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지만 그들이 여기저기 사이트를 돌아다니며 논문을 읽는다는 설정은 좀 과정되지 않았나 싶다. 

선물로 받은 별노린재 애벌레가 어떤 것은 성충이 되고 어떤 것은 자라지 않고 죽는 이유를 파헤치며 알게 되는 여러 가지 사실들이 독자는 마냥 흥미롭다. 그리고 자연 속에서 그것을 관찰하고 때로는 놀며 지내는 그들이 부럽다. 지금의 우리 아이들과 너무 대조적이라서 그럴 것이다. 비록 생태에 관심없는 많은 아이들에겐 흥미를 줄 수 없겠지만 뒷표지에 있는 커커스 리뷰처럼 간혹 있을 미래의 생태학자들에겐 아주 귀한 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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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공주 처음어린이 7
김경옥 지음, 한수진 그림 / 처음주니어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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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보니 딸이 생각났다. 그러면서 동시에 거울 공주에 하나를 덧붙여야 할 것만 같다. 바로 빗 공주. 딸에게 어디를 가나 꼭 있어야 할 것 중 하나가 바로 빗이다. 오히려 거울보다 빗이 먼저다. 마트에 돌아다니면서도 틈만 나면 빗을 꺼내 빗는다. 내 상식으로선 도저히 이해가 안 가지만 어쩌랴. 어차피 내가 뭐라 한다고 해도 들을 것도 아닌데. 거울이야 웬만한 곳에 다 있고 정 없으면 차유리에 비춰볼 수라도 있으니까(딸에게 그러다 차 안에 사람이 있으면 어떡하냐니까 괜찮단다). 그런 현실을 알기에 이 책의 저자가 요즘 아이들의 현실을 잘 알고 있구나 싶었다. 

주인공 이름이 수선화다. 그러나 이름은 대개 두 글자라서 선화라고 부른단다. 그런데 책을 읽다 보면 주인공 이름이 왜 수선화인지 알 수 있다. 물론 여기서는 선화 아빠가 수선화를 좋아해서 그렇게 지었다지만 그건 이야기 속 아빠의 말이고, 실은 자기 사랑에(만) 빠진 나르시스처럼 거울만 보며 외모에 신경쓰는 선화를 지적하고 싶은 작가의 뜻이 반영된 것일 게다.  

이유야 어찌됐든 선화는 걸핏하면 거울을 들여다본다. 눈은 맘에 드는데 코가 마음에 안 든다나. 그래도 다행이다. 눈이 예쁘면 반 이상은 접고 들어가니까. 그런데 선화 친구 미미는 얼굴도 예쁘고 옷도 잘 입고 거기다가 공부도 잘한다. 하지만 무척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왜 동화에서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모두 동일한 패턴을 갖는지 모르겠다. 꼭 예쁘고 공부 잘한다고 해서 마음까지 나쁘진 않을 텐데. 사족이지만 그걸 깨는 이야기도 만나고 싶다. 

여하튼 선화는 미미가 선망의 대상이다. 그런 아이와 친하게 지냄으로써 자신도 묻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모든 이야기가 그렇듯 진실이 결여된 우정은 언젠가 깨지게 되어 있다. 선화도 겉모습만이 아니라 속마음도 중요하다는 걸 다른 친구 다영이와 엄마 아빠를 통해 깨닫는다. 물론 그래도 여전히 외모에 신경은 쓰겠지만 적어도 외모에'만' 신경쓰진 않겠지. 그 과정에서 엄마의 자아찾기도 한 부분을 차지한다. 선화가 엄마에게 하는 말이 어쩜 우리 딸이 내게 하는 소리랑 똑같은지. 

발랄하고 구김살 없는 아이들의 이야기(비록 미미가 깍쟁이로 나오지만 남에게 상처를 줄 정도로 못되게 굴진 않았다.)가 생기있게 펼쳐지는 책이다. 딱히 감동적이라거나 무지무지 좋은 책이라는 생각은 안 들지만 현실의 아이들을 잘 그려냈다. 그나저나 선화처럼 엄마 아빠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아이는 비록 길을 잘못 들 수는 있어도 금방 제 길로 돌아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춘기 아이들을 보며 어렸을 때 양육방식이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절감하고 있기에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다른 곳에 더 눈길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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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동화집 나 어릴 적에 - 박완서 선생님의 옛날이 그리워지는 행복한 이야기 처음어린이 8
박완서 지음, 김재홍 그림 / 처음주니어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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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해서, 소설가 박완서는 좋아하지만 동화작가 박완서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세대차이라는 걸 무시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요즘 아이들은 10년 전만해도 엄청난 옛날로 생각하는데 5,60년 전 이야기는 어떨까. 아마 모르긴 해도 역사의 범주에 속하지 않을까. 아무리 동시대를 살더라도 생각의 차이는 어쩔 수 없다고 본다. <이 세상에 태어나길 참 잘했다>를 읽으며 그 생각을 더욱 굳혔다. 그래서 이 책을 받아놓고도 선뜻 읽지 못했다. 그래도 우리 문학사에 한 획을 긋는 소설가의 작품인데 내가 까다롭게 보는 건 아닐까, 남들은 다 좋다고 하는데 나 혼자만 괜히 트집잡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다. 무엇보다 문학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나 싶었다. 

그러나, 너무 잘 읽었다. 읽기를 아주 잘했다. 작가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쓴 글이라 그런지 마치 자서전을 읽는 듯했다. 그러면서 작가의 연륜이란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참 이상하지. 분명 동화를 읽을 때는 못 느꼈는데. 그러면서 나름대로 내린 결론은 이렇다. 이런 작가들(박완서 할머니는 소설가이기도 하지만 여러 편의 동화를 쓴 동화작가이기도 하다.)은 괜히 현재를 배경으로, 현재의 아이들을 그리는 이야기를 쓸 것이 아니라(그건 요즘 젊은 동화작가에게 맡겨도 된다.) 예전 아이들은 어떤 생활을 했는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를 알려주는 이런 이야기를 쓰는 게 훨씬 낫겠다는 것이다. 역사란 뭐 별건가. 이처럼 한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모인 게 바로 역사지.  

시골에서 자유롭게 뛰어다니며 놀던 작가가 교육열 높은 엄마의 뜻에 따라 서울로 이사를 가서 생활하는 과정을 정말 잔잔하게 이야기한다. 잔잔하다고 해서 지루한 것은 아니다. 박완서가 누군지 전혀 모르는 어린이라면 지루할 수도 있겠다. 내 경우는 박완서의 어린 시절을 듣는 재미도 쏠쏠했다. 궁핍한 셋방에서의 생활과 사대문 안에 있는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지낸 이야기를 읽다 보면 당시 서울 풍경이 그려지는 듯하다. 물론 거기에는 김재홍의 멋진 그림도 한 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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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틀러 농장의 노예, 엠마 이야기
줄리어스 레스터 지음, 김중철 옮김, 김세희 그림 / 검둥소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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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를 보는 순간 알았다. 앗, 이 작가는 인권 문제, 특히 흑인들의 인권 문제에 대한 책을 주로 썼던 작가잖아. 그렇다. 전작인 <자유의 길>에서도 <인종 이야기를 해볼까?>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가 천착하는 문제는 바로 인권이었다. 인종이 다르다고 본질까지 다르진 않다는 것을 그는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비록 아직도 완전한 성공을 거두진 못했더라도. 

이 책은 어린이 책에서는 드물게(사실 어른을 대상으로 하는 책에서도 드물지 않을까 싶다.) 시나리오로 되어 있다. 다른 면에서는 진보적이라고 자처하는 나도 이런 부분에서는 보수적이 된다. 주로 보았던 소설 형식이 아니라서 선뜻 내용에 빠져들지 못할 것 같았다는 얘기다. 새로운 형식을 일단 배척하는 보수적인 생각이 그대로 적용된 것이다. 그러나 웬걸. 읽으면서 대사는 그냥 일반 소설(동화)의 대화문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게다가 중간중간 등장인물의 입으로 서술되는 부분이 있어 극본이라는 생각이 훨씬 덜 들었던 것 같다. 

책을 읽으면서 이건 그냥 단순히 지어낸 이야기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막연히 들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노예 경매를 자세하게 묘사하는 장면도 그렇고 일일이 사건을 나열하는 부분에서도 그랬다. 뒤에 작가의 말에서 밝히듯이 1859년에 있었던 미국 역사상 최대의 노예 경매를 기록한 논문이나 책에서 상당부분 차용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사실과 허구가 혼합되어 있지만 주요 인물은 사실에 가깝다. 이야기를 읽으며 느꼈던 것들보다 뒤에 작가의 말이 더 흥미진진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엠마는 비교적 마음씨가 좋았던 주인 덕분에 고생을 덜 하며 지냈지만 예고도 없이 주인이 자신을 팔아버리고 만다. 덕분에 자신이 노예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을 수밖에 없었던 엠마가 캐나다로 도망 가서 정착한 후에 자신의 이야기를 손녀에게 들려준 것이 바로 버틀러 농장의 노예 이야기다. 노예 제도는 지금의 기준으로 보자면 말도 안 되는 제도지만 당시엔 너무나 당연하게 여겼던 제도였다. 그렇다면 지금은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들이 나중엔 비인간적이고 야만적이었다고 회고될 만한 일은 없을까. 분명 있을 것이다. 책을 읽고 거기까지 생각이 나아가는 것이 바로 작가가 원하는 것 아닐까.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다시(종종 들었던 생각인데 리뷰를 쓸 때는 까맣게 잊곤 했다.) 든다. 유럽의 소설들, 그러니까 우리가 고전이라고 부르는 책들을 보면 대부분 지배계급의 이야기다. 그 당시에 그들에게 수많은 하인들이 있었지만 하인들의 고뇌를 다루거나 힘든 삶을 다룬 이야기가 있었던가 싶다. 그들의 책 속에는 하인들에 대한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더라도 단순히 자신들의 삶을 지속시켜 주는 하나의 도구로 존재할 뿐이다. 비록 미국에 있었던 노예와 유럽에 있었던 하인을 똑같다고 할 수는 없지만 유럽인들에게서 피지배계급의 고통을 외면한 자신들의 잘못을 이야기하는 책은 아직 못 만났다(그래서 톨스토이가 더 위대해 보인다. 톨스토이는 비록 자신들의 잘못된 행동을 이야기한다기 보다 피지배계급의 힘든 삶을 보여주긴 하더라도 말이다). 물론 존재하지만(당연히 그럴 것이다!) 협소한 내 지식의 한계 때문에 못 만났을 수도 있을 것이다. 여하튼 그동안 서구의 고전을 읽으며 들었던 의문이 문득 생각나서 연관 없는 리뷰에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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