싫어요 몰라요 그냥요 이야기 보물창고 17
이금이 지음, 최정인 그림 / 보물창고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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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보더니 둘째가 씨익 웃는다. 왜? 평소에 본인이 자주 하던 말이니까. 둘째는 뭘 물어보면 '몰라'라는 말을 자주 한다. 그게 진짜 몰라서가 아니라 귀찮아서, 혹은 생각하기 싫어서라는 걸 알지만 그렇기 때문에 자꾸 질문을 한다. 그러니 악순환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아마 제목을 보는 순간 아이는 아이대로 엄마는 엄마대로 너무 공감하지 않을까 싶다. 요즘엔 주로 청소년 책을 쓰는 작가가 드디어 저학년 책을 썼으니 그 관심까지 합해서 읽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책이었다. 

단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상태에서 읽으면 두 번째 이야기가 시작될 때 항상 당황한다. 다음 이야기를 은근히 기대하며 넘겼는데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니 그럴 수밖에. 그러나 단편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금방 거기에 익숙해져서 새로운 맛을 느낀다. 대개 저학년 동화는 단편이든 장편이든 결말이 확실한 데 반해 여기 나오는 이야기들은 그야말로 열린 결말이다. 그렇다고 뭔가 해결해야 할 과제가 있는 열린 결말이 아니니 고민할 필요는 없겠다. 또한 네 개의 이야기가 모두 밝고 명랑한 아이들의 생활에 웃음이 절로 나는 이야기들이기도 하다. 

혼나기 싫어서 그 때만 기절하고 싶어하는 아이의 마음을 그린 첫 번째 이야기나 일층에 살기 때문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괜히 왔다갔다 하는 하늘이 이야기 등 아이들 마음이 고스란히 나타나있다. 그러다가 가끔 환상 세계로 가기도 하니(<열려라, 맘대로 층!>) 아이들은 잠시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겠다. 또 엄마에게 선물하기 위해 아끼다 못해 사랑하는 꾸꾸의 배를 가르는 누리(<누리는 꾸꾸 엄마>) 이야기는 엄마 입장에서는 뭉클하고 아이 입장에서는 마치 자신이 엄마에게 선물한 것처럼 뿌듯하지 않을런지. 정말이지 소소한 일상에서 일어나는 별 것 아닌 이야기지만 재미있으면서도 경쾌하게 풀어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뭔가 치열함이 빠져있다는 느낌이 들었다는 점이다. 사실 제목을 보며 유은실 작가의 <그냥>이라는 단편이 떠올랐다. 어, 비슷한 주제네. 그렇다면 과연 이 시대의 이야기꾼이라고 하는 이금이 작가는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갈까 내심 기대하며 읽었다. 헌데 유은실 작가의 이야기와는 확실히 다른 맛이 느껴졌다. 둘을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할 순 없겠지만 유은실 작가의 책에서는 삶을 되돌아보며 뭔가 치열하게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 만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여기서는 그냥 편하게 만난 느낌이랄까. 여하튼 뭐라 말로 표현하진 못하겠지만 확연히 달랐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도 든다. 아, 이게 바로 작가의 색깔이라는 거구나. 이게 바로 이금이 작가만의 색깔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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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 시험 보리피리 이야기 6
박선미 지음, 장경혜 그림 / 보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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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보았을 때 요즘 아이들이 워낙 욕을 많이 하니까 욕을 줄이도록 하기 위해 쓰여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읽고 난 다음엔 꼭 그런 것만을 이야기하고자 한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오히려 그 보다는 다른 사람들 눈치를 보느라 하고 싶은 말도 못하고 하고 싶은 대로 하지도 못하며 힘들어하는 아이를 위해 쓴 글은 아닐까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작가가 어린 시절을 드러냄으로써 무의식에 있던 어떤 것을 치료하는 계기가 된 건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만큼 자신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며 '착한' 아이의 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진한 경상도 사투리로 되어 있어 그 사투리를 잘 모르는 나 같은 사람은 읽는데 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얼마전에 권정생 작가의 <안동 껑껑이>라는 시를 볼 때보다야 훨씬 수월하게 읽었지만(그 시는 마침 안동이 고향이었던 회원이 해석해주다시피했다.) 그래도 여전히 머릿속으로 약간의 해석을 하며 읽어야했다. 그렇다고 불만이 있다는 얘기는 절대 아니다. 이런 식으로 사투리를 쓰는구나 싶어 재미있었다. 

선생님이 아이들이 어떤 욕을 쓰는지 알아보기 위해 욕 시험을 본다는 발상이 재미있고 그것을 매개로 아이들을 이해하는 선생님 마음 씀씀이가 따스하다. 야야는 상당히 내성적인 아이다. 평소에 욕을 하고 싶어도 아버지 체면 때문에 못하고 놀고 싶어도 이웃 아주머니가 칭찬하는 말을 듣고 포기하니 속으로 얼마나 힘들었을까. 아마 야야는 처음엔 머뭇거렸지만 나중엔 욕을 쓰면서 그동안 쌓였던 것을 다 풀어냈을 것이다. 대신 교무실에서 선생님들이 돌려보며 놀리는 바람에 마음고생은 했지만. 

이야기의 배경이 아주 오래전이라 지금의 현실과는 많이 동떨어졌다. 아궁이에 불을 때서 솥에 밥을 하고 냇가에 가서 빨래하는 모습을 지금 아이들은 이해할 수 있으려나. 하지만 시대적 배경이 지금과는 전혀 다르다 해도 거기에 마음이 많이 가지 않았다. 오히려 선생님이 아이를 이해해주고 아이가 그동안 짓눌렸던 마음을 드러내는 장면에 온 마음이 다 갔다. 특히 둘째가 그런 성격이라 야야에게 애정을 갖고 읽었는지도 모르겠다. 사건이 절정에 다다랐다가 그것이 풀어지는 장면이 정말 자연스럽게 펼쳐진다. 이야기를 분석할 줄 잘 모르지만 억지스럽지 않으면서도 이상적으로 해결이 되어 걸리는 부분이 없었다. 그래서 비록 배경이 옛날(아이들은 자신들이 태어나기 전이면 무조건 옛날이라고 생각한다.)이라 요즘 아이들이 공감하지 못하는 단점이 있어도 다 읽고 나면 참 괜찮은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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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리안의 물고기 미래아이문고 12
제임스 멩크 지음, 배블링 북스 옮김, 루이자 바우어 그림 / 미래아이(미래M&B,미래엠앤비)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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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느낌을 한 마디로 얘기하자면 자연적이며 부드러운 것이 파스텔 같다고나 할까. 동물들이 서로 도우며 릴리안의 선물인 물고기를 찾아가는 장면이나 자연에서 뛰어노는 남매들을 상상하니 한없이 평화롭다. <샬롯의 거미줄>이 생각나고 <곰돌이 푸우>도 생각난다. 아마도 평화로운 자연에서 마음껏 살아가는 아이들이 연상되어 그런가 보다. 맨 앞에 있는 지도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니 나도 이런 곳에서 살고 싶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물론 아이들도 그럴 것이다. 

릴리안의 가족은 특별한 전통을 가지고 있다. 바로 여섯 번째 생일에 애완동물을 선물하는 것. 애완동물을 키우고 싶어 틈만 나면 졸라대는 아이들이라면 이 부분을 가장 부러워하지 않을까 싶다. 다행히 우리는 그토록 고대하던 강아지를 키우고 있으니 그럴 일은 없다. 하긴 그런데도 외할머니네 있는 고양이에 눈독을 들이긴 한다. 강아지도 좋지만 고양이가 더 좋다나. 만약 이 책을 읽고 엄마에게 릴리안네 이야기를 들이대며 얘네는 각자 애완동물이 하나씩 있는데(그것도 아이가 여덟이니 애완동물도 여덟 종류다.) 한 마리도 안 돼냐고 하소연 하는 아이들이 있다면 부모는 뭐라고 할까. 분명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얘네는 밖에서 키우는 거잖아. 우린 아파트라 안 돼. 나중에 주택에서 살면 키우자." 이게 가장 많이 써 먹는 수법 중 하나다. 정말이지 릴리안네는 드넓은 초원에서 사는 것 같다. 요즘에도 이러고 살 수 있나(게다가 아이를 여덟이나 낳다니!) 의아해하기도 했는데 시작을 옛이야기처럼 한다. 먼 옛날, 아득히 먼 곳에라고. 

처음부터 끝까지 감성적인 이야기가 발랄하게 펼쳐진다. 여덟 남매는 거의 싸우지도 않고 서로 의지하며 잘 지내고 동물들도 그렇다. 요즘 아이들이 읽으면 얼마나 공감하거나 몰입할지 모르겠지만 감수성은 키울 수 있겠다. 대신 이런 책을 선택할 아이가 얼마나 있을까 그것이 의문이긴 하지만. 요즘 아이들은 워낙 자극적이고 전개가 빠른 것을 좋아하니까. 작가가 어린 시절에 읽었던 것을 떠올리며 이 책을 구상했다고 하던데 현재의 어린이를 염두에 두지 않았나 보다. 그러나 모두 현재의 어린이를 이야기하는 책만 있다면 그것도 문제가 아닐까. 이런 책도 있다는 게 다양성 면에서는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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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자기 유령 스텔라 3 - 결혼식 대소동 보자기 유령 스텔라 3
운니 린델 지음, 손화수 옮김, 프레드릭 스카블란 그림 / 을파소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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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리즈 첫번째 책을 읽었을 때 판타지인데도 그 안에 철학이 들어 있어 놀라워했던기억이 난다. 출간 2주 만에 해리포터를 제칠 정도로 북유럽에서는 인기가 많았다는 띠지 설명과 내가 책을 읽고 난 후 느낌을 견주어 보았을 때 약간의 괴리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아이들이 읽는 책을 어른인 내가 읽어서 그럴까하는 생각도 들고, 문화적인 차이 때문인가 싶기도 하고, 내 감성이 너무 메말랐나 싶기도 하고, 여하튼 복잡한 심정이었다. 아니면 두 번째 이야기를 건너뛴 채 세 번째를 읽어서 연결이 잘 안되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 아이들은 판타지를 그닥 좋아하지 않아서 그저 그렇다고 하거나 억지로 읽는데, 판타지를 정말 좋아하는 아이들은 이 책을 어떻게 읽었을지 궁금하다. 

그러나 내가 어떻게 읽었든 우리 책에서 만나기 힘든 판타지라는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주변에서 흔히 만나는, 아니 한시도 떼어놓을 수 없는(옷이 있으니까) 보자기를 가지고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는 것 자체가 그렇다. 우리는 대개 판타지라 해도 주인공이나 동물이 판타지 세계로 가는 걸 생각하니까. 게다가 그런 보자기가 펼치는 에피소드만 나오는 게 아니라 삶의 방식이나 가치를 이야기한다. 어쩌면 아이들은 거기에 큰 의의를 두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 안에 가치가 들어있다는 것은 그만큼 아이들이 은연중에 그런 걸 깨닫게 하기 때문에 책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는 셈이다.  

하지만 여전히 문화적 차이를 좁힐 수는 없었다. 헥토르는 왜 한때는 부인이었던 피네우스의 엄마를 잡아가두려는 것인지, 또 피네우스의 엄마인 밀레나는 어떻게 음모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서커스 단장과 헥토르와 무시무시한 음모가 있다는데 설명으로 봐서는 무시무시하다고 할 정도인지 잘 모르겠다. 내가 항상 우리 동화는 지나칠 정도로 친절한 설명을 많이 한다고 불평을 했는데 여기서 그 과정을 생략하니 또 불평을 한다. 문득 작가들도 힘들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하면 저렇지 않다고 불평하고 저렇게 하면 이렇지 않다고 불평하는 독자들 때문에. 사실 여기서 헥토르 뮈삭과 박쥐 부인의 대화를 보면 둘이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말을 하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다. 그들만이 아니다. 스텔라가 궁전 안에 사는, 예전에 음악가와 무용가였던 유령들과 이야기할 때도 그렇고 피네우스와 그웨니와 대화할 때도 그렇다. 위트가 있다고나 할까. 그래서 이 책을 읽을 때는 비록 동화라도 집중해야 한다. 안 그러면 글자만 읽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나저나 읽으면서 만약 영화라면 어떤 장면일까를 상상하곤 했다. 자동차 파리(영화 <카>)라는 건 상상하지도 못했는데 영화를 보며 그 상상력에 놀랐듯이 보자기들이 날아다니며 벌이는 일을 상상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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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의 분필, 춤추는 모자 문원아이 저학년문고 16
주느비에브 브리삭 외 지음, 이효숙 외 옮김 / 도서출판 문원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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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동화집은 대개 그 중 한 편을 제목으로 쓰는데 이 책은 특이하게도 두 편을 다 제목에 넣었다. 두 편밖에 없기 때문에 그런가. 그러고 보니 두 편의 작가가 다르다. 모두 공원에서 일어나는 환상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개인적으로 비올레트가 나오는 분필 이야기가 더 재미있다. 

아이들은 언제 어디서나 환상 세계로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모든 아이들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비올레트도 처음에는 할머니가 떨어트리고 간 분필을 그냥 평범한 분필일 뿐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정말 평범한 분필이라고 생각했다면 아예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즉 비올레트는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했던 것일 게다.  

헌데 비올레트는 분필을 들고 왜 혀로 핥아볼 생각을 했을까. 분필은 학교에서 '쓰는' 것이라는 걸 모르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분명 비올레트는 보통의 아이들하고는 다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행동을 할 리가 없다. 분필이 마법의 성질을 갖고 있다는 걸 안 비올레트는 친구를 '만든' 다음  커다란 문을 하나 그린다. 그리고 그 문을 통해 친구와 떠난다. 이제 더 이상 분필은 없는데 비올레트는 어떻게 돌아오지? 신나게 친구와 문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는데 왜 이리 허전하던지. 마치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남쪽의 초원 순난앵>의 마지막 장면을 연상케 한다. 거기서 두 아이는 현실의 힘든 상황을 피해 현실보다 훨씬 좋은 그곳을 향해 떠난 거였지만 여기서 비올레트는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왜? 원래 판타지는 나간 곳이 있고 그곳으로 다시 돌아와야 하지만 여기서는 나가기만 했다. 일련의 공식을 따르지 않은 셈이다. 서서히 다양한 판타지를 만날 기회가 늘어나는가 보다. 하지만 저학년이 읽는 동화에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면 어린 독자들이 뭔가 허전함을 느끼지 않을까 괜한 걱정을 해본다. 

두 번째 이야기는 공원에서 주운 모자에 얽힌 이야기다. 때로는 사람의 의지가 현실을 만들어내기도 한다는 그런 이야기. 그러나 작가는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다. 무료하게 지내는 할아버지에게 모자는 그냥 단순한 모자가 아니라 '삶'이요, 활력소였다는 생각도 든다. 걷기도 힘들어 보이던 할아버지가 마지막에 모자를 쓰더니 날다시피 가버린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러나 중간중간 연결고리가 어긋나는 느낌이 들었다. 토마가 공원에서 할아버지와 이야기하다가 어른들에게 끌려갔는데 어떻게 다시 할아버지랑 이야기를 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할아버지가 토마가 있는 곳으로 왔던 것 같은데 그런 정황을 몇 번 읽은 후에야 알았다. 프랑스 작가의 이야기는 우리 정서와 많이 달라서 몰입하기 힘든 면이 있는 듯하다.(나만 그런가?) 하지만 현실과 분리시키지 않은 판타지를 만날 수 있는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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