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가족 상상도서관 (다림)
로드리고 무뇨스 아비아 지음, 남진희 옮김, 오윤화 그림 / 다림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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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이 세상에 완벽한 것이 있을까. 완벽하려고 최선을 다할 수는 있지만 결코 완벽해질 수 없다. 만약 제목처럼 완벽한 가족이 있다면 부럽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론 불편할 듯하다. 너무 건조하다고나 할까, 아니면 인간미가 없다고나 할까. 그러나 제목에서 이렇듯 완벽을 강조했다는 것은 완벽하지 않다는 걸 드러내기 위한 역설적 표현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알렉스는 처음부터 자신의 부모님과 두 누나는 완벽하므로 자신의 가족은 완벽하다고 말한다. 자신은 빼고. 부모님은 근사한 직업에 항상 이성적이며 절대 화를 내지 않는다. 모든 아이들이 바라는부모의 모습 아닐런지. 물론 절대 그럴 수 없다는 게 문제지만. 알렉스 부모님은 아이들이 아무리 잘못을 해도 절대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단다. 여기까지는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럼 좀 권위적이거나 냉정한 사람들이겠거니 하며 어떻게든 단점을 찾아보려 한다. 그러나 다음에 이어지는 설명은 그런 생각마저 부질없다는 걸 깨닫는다. 정말이지 너무 완벽해서 질투가 나다 못해 그와 너무 다른 내 모습을 보며 좌절감마저 느낀다. 농담을 즐기며 아이들과 풀밭에서 뒹구는 것도 좋아한다니. 뭐야, 그럼 정말 완벽하잖아. 그런데 알렉스네 집에서는 '엄마, 아빠'라는 말을 들을 수 없단다. 아무리 잘 놀아주고 농담도 잘하며 대화와 타협으로 문제를 해결한다지만 어딘지 인위적인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알렉스는 완벽하지 않다. 두 과목에서 낙제를 했으니까. 그때부터 알렉스는 다른 식구들의 약점을 찾아내기 위해 애쓴다. 그러면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다른 사람들의 고민을 찾아낸다. 뭔가 다른 걸 해보고 싶어서 일을 그만둔 아빠(게다가 모두가 기대하는 학자였음에도), 일이 힘들어 담배를 피우게 된 엄마(모든 음식의 기준을 '건강'에 두고 있음에도), 컨닝을 한 누나들. 그러나 알렉스가 그들을 관찰하며 사실을 알았을 때도 서로 다른 가족에게 전혀 문제를 내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자신의 속마음을 말하지 못하고 혼자 속으로만 끙끙 앓고 있다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남과 다를 게 없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지만 어느 순간부터 가면을 쓰게 된 것이다.  

그러다 일련의 사건을 겪은 후(댓가가 좀 큰 사건이었다.)에 각자 속마음을 털어 놓고 진정한 대화를 하고 나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가끔은 싸우기도 한단다. 가끔 십 년 이상을 함께 살면서 싸움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는 부부를 본다. 참 사이좋고 이상적인 커플이다 싶으면서도 과연 그게 가능할까 싶다. 그야말로 너무 완벽한 것 아닐까. 처음의 알렉스 가족처럼. 여하튼 그 후로 알렉스 가족은 모두 변했다. 단순히 가족끼리의 모습만 변한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관점도 변했다. 특히 라파의 부모님을 보고 '건강한' 사람들이라고 표현한 부분은 큰 의미가 있다. 어쩌면 이 작가가 진짜 말하고 싶었던 게 바로 이게 아닐런지. 전 같으면 정신없고 정리정돈도 안 되고 이상한 음식만 먹는 사람들로 여겼을텐데 이제는 그들 나름대로의 삶을 '존중'하고 인정한다는 얘기니까. 이처럼 자신의 기준대로 남을 판단해서는 안 되는데 아직도 완벽하질 않다. 알고 있는데도 실천을 못하는 이유는 뭘까. 그야말로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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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랏차차 도깨비죽 신나는 책읽기 24
신주선 지음, 윤보원 그림 / 창비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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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영화나 동화를 볼 때 신화와 성서를 모르면 이해하는 정도가 확연히 낮아진다. 상당히 많은 곳에서 신화를 차용하는 걸 보며 부럽기도 했다. 신화를 모르고 있을 때는 상당히 참신한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이미 있는 것을 살짝 바꾼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특히 판타지 작품에서는 신화가 없었다면 그런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신화가 없기 때문에 그러한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얼마전에 모임에서 판타지 작품에 대해 토론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 우리에게도 재미있고 오래전부터 가꿔온 신화가 많은데 왜 우리는 그런 것을 이용하지 못하는 것일까하고 말이다. 문선이 작가의 <마두의 말씨앗>을 읽고 나서 이처럼 우리 신화를 차용해도 충분히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데 그 뒤를 잇는 작품이 없어 아쉽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런데 드디어 우리 신화를 재미있게 풀어낸 또 다른 작품을 만났다. 굳이 어린이문학평론가의 '한국적 판타지의 가능성을 유연하게 보여준 작품'이라는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동화를 어느 정도 읽어온 사람이라면 충분히 느꼈을 것이다. 우리는 판타지가 탄생하기에 여건이 척박했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조그만 비껴나서 생각해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얼마나 다양한 신화가 있는가 말이다. 우리도 이러한 신화를 차용하고 조금만 변용한다면 충분히 멋진 판타지 작품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정서적으로 이질감이 없으니 공감하기 훨씬 쉬울 것이다. 다만 아직 우리 어린이들이 우리 신화보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더 많이, 잘 알고 있다는 것이 문제가 되긴 하지만. 

우리네 농촌에서는 원래 가을걷이가 끝나면 햅쌀로 떡을 해서 집안 구석구석에 놓아둔다. 아직도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주로 도시에서, 그것도 아파트에서 사는 아이들이 그런 풍습을 알 리가 없을 것이다. 여하튼 이 책에서는 부엌에 산다는 조왕신과 산, 강, 들을 대표하는 도깨비들이 나오고 터줏대감이 나온다. 그나마 여러 책에서 조왕신이나 터줏대감, 화장실에 사는 신에 대한 이야기는 나왔기 때문에 이 정도는 그다지 낯설지 않을 것이다.  

할머니 집에 갔다가 밤에 화장실에 가려다 부엌에서 조왕할미가 쑨 죽을 먹고 도깨비 씨름에 휘말리게 된 홍주. 밤새도록 도깨비들을 피해 도망다니느라 독자도 함께 정신이 없다. 도대체 언제까지 도망다녀야하는 건지. 그렇게 도망다니는 와중에도 삼신할미에게 왜 도깨비들이랑 씨름을 하는지 듣고 환경 문제에 대한 것도 깨닫는다. 한편으로는 씨름에서 지게 될 도깨비들이 안쓰럽기도 하지만 그래도 인간에게는 집에 사는 '사람'이 우선이기 때문에 결국 터줏대감이 이긴다. 그렇지만 홍주는 그 와중에도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야한다는 걸 깨닫는다. 홍주가 잠시 도깨비에게 연민을 품을 때 과연 어떤 결론이라야 모두 윈윈할까 궁금했다. 그러나 역시 사람이 주인공이다. 결국 도깨비들이 졌으니까. 그렇지만 홍주는 이제 자연을 바라보는 마음이 달라졌다. 독자 또한 그럴 것이다.  

이러한 한국적 판타지, 앞으로도 더욱 많이 나와서 점차 발전해갔으면 좋겠다. 어디 음식만 신토불이가 있겠나, 이야기도 신토불이가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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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이벤트 높새바람 24
유은실 지음 / 바람의아이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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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흘리면서 웃을 수 있을까(너무 웃겨서 눈물 흘리는 거 빼고). 내 경험상으론 '그렇다'다. 바로 이 책을 읽으면서 그랬다. 이 작가의 책 <만국기 소년>과 <멀쩡한 이유정>을 읽고 단편의 맛을 알았으며 시침 뚝 떼고 아이들의 생활을 재치있게 그리는 작가의 능력에 감탄했던 터라 이번 책도 나오자마자 읽었다. 그리고 또 감탄했다. 동화에서 죽음을 다룬 책들은 많지만 대개 가족의 죽음을 받아들이거나, 죽음을 겪고 난 후 극복하는 과정을 이야기하는데 이 책은 특이하게도 장례식의 모습에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솔직히 나도 문상을 갈 때 아이들은 데리고 가지 않기 때문에 이 책의 소재가 독특하면서도 너무 나아간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읽다 보면 우리가 본모습을 숨긴 채 얼마나 가식적으로 살아가는가를 새삼 느낀다. 

여기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독특하다. 모두라고 하기엔 약간 억지가 있지만 여하튼 평범해 보이진 않는다. 물론 작가가 그런 식으로 표현했기 때문이겠지만. 이벤트를 준비하는 당사자인 영욱이 할아버지는 고집이 세고 상당히 가부장적이며 남들과 어울릴 줄 모르는 전형적인 우리 시대의 노인이다. 그러나 핸드폰을 잘 다루고 포토샵도 할 줄 알 정도로 현대적이다. 대개 이런 어른을 모시고 사는 며느리라면 같은 며느리 입장에서 참 안됐다. 그러나 이야기는 영욱이 입장에서 전개되기 때문에 오히려 며느리, 그러니까 영욱이 엄마가 좀 심한 듯 느껴진다. 어디 영욱이 엄마 뿐인가. 영욱이 아빠는 본인은 아버지에게 제대로 인사도 안 하고 말도 살갑게 하지 않으면서 자신은 영욱이에게 아버지로서 대접받고 싶어한다(솔직히 이 부분에서 엄청 찔렸다. 우리도 결코 잘하는 편이 아니기에). 영욱이 누나는 또 어떻고. 할아버지가 냄새 나고 지저분하다고 말도 잘 안하려 한다. 음, 이렇게 보니 그다지 특별해 보이지 않는다. 그냥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정의 모습이다. 

그러나 장례식장 가는 게 무서워 6학년짜리 딸을 보내고 자신은 차에서 기다리는 김보람 아버지나, 자식이 그런 남편처럼 될까봐 아이들을 아예 어려서부터 장례식장에 데리고 다니는 김보람 엄마는 결코 평범하다고 볼 수 없다. 뽀샵한 영정사진을 보고 조문하다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마는 석원이 아버지, 또 할아버지와 이혼하고 일본 남자와 재혼해서 사는 할머니도 그렇다. 이렇게 적고 보니 그 외에는 평범해 보이는데 왜 모두 이상하게 느껴졌을까. 그건 아마도 인물 때문이 아니라 상황을 설정하고 이끌어가는 작가 때문일 게다.  

아빠를 포함한 할아버지의 자식들을 끝까지 '다'들이라고 표현해서 그들 사이가 그다지 돈독하지 않음을 알려줌과 동시에 독자와의 거리를 일정하게 유지한다. 그럼으로써 독자는 사건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실제로는 상당히 밀접한데도 말이다. 마찬가지로 친구 보람이도 꼭 성까지 붙여서 이야기한다. 석원이는 그냥 이름을 이야기하는데 여자 아이는 성까지 붙인다. 실제로 아이들은 이런 식(동성은 이름만, 이성은 성까지)으로 말하는데 작가는 그걸 정확히 간파했다. 하긴 이런 식의 화법이 이 작가의 특징이기도 하다. 내가 좋아하는 형식이기도 하고. 

영욱이 엄마는 자신의 아들이 할아버지에게 나쁜 영향을 받았을 거라 의심하며 추궁하지만 작은고모부의 도움으로 결국 할아버지의 무죄가 증명되는 장면도 어찌나 재미있던지. 엄마와 작은고모, 작은고모부가 짧게 대화하지만 그 사이에는 설명하지 못할, 아니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유머와 위트가 있다. 또 나중에 부의금을 정산하며 큰고모부와 작은고모부가 하는 얘기는 거의 뒤집어지게 만든다. 그러면서 가면 속에 가린 인간의 본모습을 슬쩍 보여준다. 

장례식장에 가면 상주와 슬픈 얼굴로 인사 나누고 건너가 바로 밥을 먹으며 가족들과 때로는 웃기도 하며 이야기를 나눈다. 어느 것이 진짜 모습일까 생각하게 만든다. 고인을 생각하며 울먹이다가 금방 어떤 이야기로 웃을 수도 있고 그러다가 누군가 조문오면 다시 가서 우는 모습. 어른인 나도 이런 것이 이상해 보였는데 어린 영욱이 눈에는 얼마나 이상하게 보였을까. 또, 가족들은 슬퍼서 밥도 못 먹을 것 같지만 사실은 수시로 먹으며 그래야 버틸 수 있다고 위로한다. 여기서 그러한 마음이 그대로 드러난다. 또 자기 때문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게 아닌가 하는 죄책감에 힘겨워하는 아이 모습도 고스란히 나온다. 지금은 손자에게 한없이 자상한 할아버지가 예전에는 괴팍한 아버지였다는 충격적인 소리를 듣고 영욱이는 아빠를 미워하는 마음을 조금 접는다. 나중에는 할아버지처럼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겠지. 그러면서 영욱이는 그런 시기가 조금 앞당겨지길 바란다. 

읽으면서 생각했다. 이건 작가가 경험한 게 아닐까하고. 역시 그랬다. 두 해에 할머니 두 분을 잃었단다. 그럼 그렇지. 이 책은 두 할머니가 주신 선물이란다. 특히 외할머니가 준비했던 '장엄하고 통쾌한 수의'에서 모티브를 얻었나 보다. 도대체 어떤 상황이었길래. 혹시 영욱이 할아버지처럼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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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세뱃돈 뺏지 마세요! 네버랜드 꾸러기 문고 34
최은순 지음, 김중석 그림 / 시공주니어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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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가정에서 있을 법한 이야기이자 대부분의 어린이들이 공감할 만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나도 어렸을 때 엄마가 내 돈을 자꾸 가져가서 나중에는 크게 항의한 기억이 난다. 그런데 엄마는 나를 자기 돈은 엄청 챙긴 딸로 기억하신다. 그러니까 나는 당연히 내 '권리'를 주장한 것이라 기억하는 반면 엄마는 세뱃돈 조금 썼기로써니 그걸 끝까지 달라고 하는 이기적인 딸로 기억하신다는 얘기다. 글쎄, 아무리 생각해도 엄마가 내 돈을 쓴 게 훨씬 많은데. 

이제는 내가 아이들에게 세뱃돈을 뺏는(그렇다고 진짜 뺏지는 않는다) 엄마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옛날 일이 기억에 남아 있다. 그럼 우리 아이들도 그러려나. 그러나 난 아이들 돈을 내가 쓰는 게 아니라 고스란히 모으고 있다. 헌데 아이들은 몇 번이나 이야기를 했는데도 믿지 않는다. 나중에 직접 통장을 보여줬더니 그제야 아무 말 없이 맡긴다. 그래서 동철이 엄마가 아무리 구두쇠라지만 동철이에게 뺏은 세뱃돈을 차곡차곡 모으고 있을 거라 확신한다. 돈을 조금도 허투루 쓰는 사람이 아닌데 당연하지. 한편으로는 동철이 엄마가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구두쇠라서 별로 마음에 안 드는데(왜 꼭 그런 역은 엄마가 맡는지 모르겠다. 요즘은 구두쇠 아빠도 많던데) 이 부분 만큼은 전적으로 동철이 엄마 편이다. 가재는 게 편이라던가. 

아이들이라면 누구나 경험해 보았을 법한 세뱃돈 이야기. 작가가 글쓰기를 가르치는 아이들의 하소연을 듣고 거기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작가소개를 봐서인지 글에 나오는 이모가 자꾸 작가와 동일시되었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동철이가 세뱃돈을 뺏기지 않기 위해 한복에 딴주머니(말 그대로 진짜 딴주머니다)를 차는 모습은 마치 비자금을 숨기기 위해 애쓰는 모습 같다. 동철이가 그렇게 힘들게 세뱃돈 일부를 슬쩍하는데 성공해서 드디어 축구화를 살 수 있게 되었지만 마음이 편치 않다. 그렇다고 이제와서 엄마에게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는 난처한 상황에서 사건이 터지고 만다. 그 사건은 동철이가 죄책감에서 벗어나는 동시에 모든 것을 원래대로 되돌려 놓는 계기가 된다. 게다가 비록 다른 사건 때문이지만 축구화까지 얻게 되었으니 모두 잘 해결되었다. 

우리 명절 풍습에서('만'이라는 단서를 붙이고 싶지만 확신이 서질 않는다) 경험할 수 있는 이야기라서 아이들도 많이 공감할 것이다. 이런 게 바로 우리 동화에서만 만날 수 있는 소재다. 하지만 엄마가 지나치게 구두쇠로 나온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또, 어떤 아이는 이런 엄마를 창피해 하고 그것 때문에 삐딱하게 굴기도 하는데 동철이는 그러지 않아 착한 아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현실을 좀 미화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아이와 부모가 한 번씩은 겪었던 소재라 재미있으면서도 약간 밋밋한 감도 있다. 그건 아마도 사건의 절정이 약해서 그런 듯하다. 그래도 아이들은 제목만 보고 이 책을 얼른 집어들 것 같다. 그렇다고 진짜 동철이처럼 하지는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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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핀볼이 아니다 사계절 아동문고 77
베치 바이어스 지음, 김영욱 옮김 / 사계절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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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책을 읽으면 문화 차이라는 말을 절로 떠올리게 된다. 주인공인 세 아이가 처한 상황은 어디서나 일어날 법하지만 그들을 대하는 태도나 제도는 우리와 사뭇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우선 위탁 가정을 두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때까지 돌봐주는 시스템이 우리와 다르다. 우리에게도 비슷한 것은 있지만 일반 가정에서 그런 역할을 하도록 되어 있지는 않다. 또한 그들의 상황을 풀어가는 방식이 다르다. 아마도 우리 같으면 그런 상황에 처한 아이들의 힘든 상황을 상당히 어둡게 표현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데 여기서는 우울한 상황에서도 웃을 수밖에 없도록 이야기를 전개한다. 중간중간 들어 있는 유머와 위트는 또 어떻고.  

우선 세 아이가 처한 상황을 보면 엄마가 떠나고 알콜 중독인 아빠와 사는 하비는 아빠 차에 치여서 다리가 부러진다. 실수로 차에 치일 수는 있지만 하비의 경우 아빠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다는 게 문제다. 아빠가 약속을 지키지 않은 이유가 중요한 일 때문이 아니라 단지 포커 게임을 하고 싶어서였다는 점은 하비에게 큰 상처다. 또한 아기였을 때 버려져 어느 쌍둥이 할머니 집에서 자란 토마스 제이. 그냥 누군가가 돌봐주었으니 괜찮은 것 아닌가 싶겠지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할머니들은 제이를 돌봐주긴 했지만 제이가 필요로 하는 것들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냥 의식주만 해결해 준 것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칼리는 셋 중 나이가 가장 많은데 의붓아버지에게 폭행을 당해 위탁 가정에 오게 되었다. 안정되지 못한 가정에서 자란 칼리는 사물을 보거나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상당히 삐딱하고 시니컬하다. 

그래서, 하비는 '아빠가 술을 자제하고 안전한 가정을 꾸릴 수 있을 때까지', 제이는 '친부모를 찾거나 평생 돌봐 줄 양부모가 정해질 때까지', 칼리는 '집안 상황이 안정될 때까지' 위탁 가정에 맡겨진다. 이처럼 사정이 제각기 다른 아이 셋이 마음씨 좋고 사랑을 표현할 줄 아는 메이슨 아주머니와 함께 살면서 서서히 변한다. 무엇이든 삐딱하게 바라보던 칼리도 다른 사람을 돌보는 기쁨을 맛보면서 자신도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자각하게 되고 그러면서 조금씩 변했다. 하비도 말은 안 하지만 아빠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아 보였는데 칼리와 제이의 도움으로 서서히 마음의 문을 연다. 제이도 자신을 돌보던 할머니들이 싫은 건 아니었지만 실제로 자신에게 필요한 사랑을 가르쳐주진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또 할머니가 떠날 것 같아 두렵기도 하고 자기가 해줄 게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 미안해하지만 아저씨의 도움으로 무사히 넘긴다. 

이렇듯 세 아이는 이제 자신의 인생을 살기로 결심한다. 칼리는 이것을 자기들은 핀볼이 아니라고 강변한 것이다. 그런데 핀볼이 무엇인지 우리 아이들이 알까. 무엇인지 확실히 모르는 상태에서 그 뒤에 숨겨진 의미를 파악하기란 힘들어 보인다. 또한 인용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나 인물 등도 우리에게는 너무 낯설어서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없었다. 이런 게 바로 외서의 약점이 아닌가 싶다. 대신 이 책이 1977년에 씌어졌지만(서지사항에 따르면) 시대적 간극은 잘 모르겠다. 그것은 아마도 외국의 문화를 우리가 잘 모르기 때문에 시대적 변화를 그다지 크게 느끼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우리 창작이 35년 전의 작품이라면 그때와 현대의 생활 모습이나 상황이 너무 차이가 나서 아이들이 공감하기 어려울테니까. 그럼 이 부분은 외서의 강점이라고 해야 하나. 여하튼 주변 여건이 힘든 상황이라도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애쓰고 서로 도와주는 모습은 코끝이 찡하다. 그러면서도 칼리와 메이슨의 재치있는 대화는 시종일관 유쾌함을 잃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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