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7월4주)


 

한국 사회에서 '좌파'라는 말만큼 논란의 여지가 많은 말도 드물 것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만큼 여러가지 힘의 파장을 가지고 있는 말도 드물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 사회에서 '좌파'라는 말은 지금까지 대부분 그 본래의 의미로 사용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 본래의 의미를 넘어서서 '좌파'라는 말은 대부분 누군가에게 어떤 낙인을 부여하기 위해 사용되어 왔다. 때때로 뒤에 '빨갱이'라는 말까지 덧붙여서 말이다. 

그래서 왠지 지금 이 영화 <바더 마인호프>의 개봉은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이들은 그저 악명 높은 테러리스트에 불과한 것일까, 아니면 병든 시대를 구원하려 한 진정한 의미의 혁명가들인 것일까. 아마도 문제의 핵심은 이들 자신보다는 이들을 둘러싼 세계에 있을 것이다. 이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는가의 문제가 이들을 어떻게 규정하는가의 문제와 직접적으로 관련된다. 영화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1967년 6월 2일 서독. 이란의 전제군주 방문 반대집회에서 한 대학생이 경찰의 총격에 죽는 사건을 기점으로 정부의 정책과 베트남전쟁에 반대하는 혁명 단체들의 움직임이 과격해진다. 열혈청년 ‘바더’는 동료들과 함께 백화점 폭탄테러를 일으키고, 좌파 언론인 ‘마인호프’가 이들을 옹호하고 활동에 동참하게 되면서 ‘바더 마인호프’ 테러집단이 결성된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정부에 대항하는 게 힘들다고 판단한 이들은 테러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통해 세상을 바꾸려 한다. 갈수록 대담해져가는 테러활동에 세상은 등을 돌리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들과 싸우는 연방경찰국장 호르스트는 이들을 이해하게 된다. 도대체 무엇이 그들을 역사상 가장 악명 높았던 테러리스트로 만든 걸까? (네이버 펌)  

- 예습이 필요해 -

대체로 이 영화를 보는 시각은 다음의 두 가지 지점으로 나뉘는 것 같다. 하나는 이 영화가 좌파와 우파를 넘어선 너무나도 중립적인 시선으로 이들을 바라보고 있다는 지적과 다른 하나는 이 영화 자체로는 아무 것도 설명해주지 못한다는 것, 즉 마치 이 사건을 하나의 액션 활극으로만 다루고 있다는 지적이다. 따라서 이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다음의 몇몇 책들을 대강이나마 훑어보고 이 영화를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이들을 비판하거나, 혹은 그에 동조하거나는 그 다음이다..   

 

 

 

 

 

 

  

 

아니면, 이 영화 <레전드 오브 리타> 또한 이들을 바라보는 하나의 어떤 시각을 던져줄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1970년대 서독. 이상사회 실현을 꿈꾸는 리타는 애인인 앤디와 함께 테러운동에 참여한다. 은행강도, 폭탄테러를 감행하던 리타 일행은 앤디의 탈옥을 돕던 중 변호사를 살해하면서 쫓기는 처지가 된다. 그들은 동독의 비밀요원 에빈의 도움을 받아 파리로 피신한다. 그 가운데, 리타는 세상을 바꾸기엔 테러조차 무력하다는 것을 그리고 앤디의 사랑이 멀어진 것을 느낀다. 그러던 어느 날 리타가 쏜 총에 경찰이 희생된다. 더 이상 잃을 것도 없고 숨을 곳도 없는 리타에게 동독 측은 다른 이름과 신분으로 살아가는 길을 제안한다. (네이버 펌, 뒤에 줄거리 소개가 더 길었으나 인용자 마음대로 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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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인 - Let It R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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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누구에게나 내려요. 맞잡을 손이 있다면, 때로는 우산은 놓아버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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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인 - Let It R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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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 제목이 <레인>인걸까. 영화 내내, 비는 커녕, 따스한 햇살만 쏟아지는구만. 남(南)프로방스(영화의 배경이 꼭 여기일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음. 남..프로방스. 그냥 어감이 좋으니까. 적어도 북 프로방스보단.)의 따스한 햇살이 말이다. 그러다가 영화가 한참을 지나고 어느 순간 비가 온다. 그리고 그 후에 이어지는 몇몇 장면들. 아, 이제서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리고 영화가 거의 끝나갈 무렵, 두 번째 비가 온다. 그리고 미무나의 품에 안겨 있는 플로랑스의 모습이 스치고 지나간 후에서야, 제목이 '레인'인 것이 맞겠다는 생각이 든다. 비는 그렇게 누구에게나 오는 것이니까. 누구에게나.

영화 내내 비는 딱 두 번 온다. 첫 번째 오는 비는, 사람들의 감정을, 혹은 대립을 극단으로 끌어올리는 비다. 높은 산에 올라가 인터뷰를 촬영하려던 미쉘(장-피에르 바크리)과 카림(자멜 드부즈)과 아가테(아네스 자우이)는 양떼의 적절한 도움으로 인터뷰 촬영을 실패하고, 돌아가려 하지만 차는 길바닥에 뒤집어져 있고, 때마침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누구의 잘못이라고 보기도 어렵지만, 세 사람은 모두 화가 머리 끝까지 났고, 상대방에게 책임을 미루고, 상대방에게 마음 속에 담아놓았던 이야기들을 하고, 상대의 가장 아픈 구석을 찌른다. 두 번째 비는, 치유의 비다. 모든 것이 마무리 되고, 아네스는 이제 떠나려고 할 때 쏟아지는 그 비. 그 비가 치유의 비가 될 수 있는 이유는, 첫 번째 비와 두 번째 비가 쏟아지는 사이에 지나갔던 몇몇 마법과 같은 장면들에 의해서이다. 아가테가 자신의 어린시절 앨범들을 살펴보다가, 대부분의 사진이 자신을 찍은 것임을, 동생 플로랑스를 찍은 사진은 거의 몇 장 없음을 발견하고, 뒤늦게야 동생을, 그리고 동생을 대했던 자신을 돌아보는 장면, 혹은 카림이 유아세례식에 갔다가, 촬영 알바를 하고 있는 미쉘을 만나는 장면, 그리고 미쉘도 카림도 잘 알고 있으나, 미쉘이 부탁을 받아 어쩔 수 없이 왔다고 거짓말을 하고, 카림도 이해해주는 척 하는 장면들 같은 것. 

아네스 자우이의 이 영화는, 왠지 여러 캐릭터의 특징적인 부분들을 유달리 부각하고, 서로간의 대립항을 두드러지게 보이게 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 같다. 어떤 면에서는 애 같고, 또 어떤 부분에서는 매우 고압적인 플로랑스의 남편, 마음 속에는 어떤 열정을 품고 있으나, 한편으로는 언니에 대한 일종의 콤플렉스를 안고 있는 플로랑스, 겉으로는 유능하고 차가워보이나, 사실 주위 사람들의 관계를 약간은 버거워하는 페미니스트 아가테, 능력 있는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 알고 보면 허점이 많은 미쉘, 이민자 출신이라는 콤플렉스를 극복하려고 노력하나, 여전히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에 사로잡혀 있는 카림. 그리고 이들 간의 성(性)적,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성격적인 대립항들, 플로랑스와 남편간, 혹은 플로랑스와 아가테 간에, 카림과 미쉘 간에, 그리고 카림과 (플로랑스+아가테)와의 대립, 아가테와 그녀의 남자친구와의 대립 등등. 그리고 이것만으로도 모자란지 감독은 여기에 복잡한 사랑 관계를 첨부한다. 즉 어떤 의미에서 이 영화는 여러 특징적인 캐릭터들을 여러가지 복잡한 관계망으로 연결시키고, 거기에서 어떤 관계의 새로운 내포와 외연들을 발견하고, 유머 속에서 은근히 정곡을 찌르려는 영화인 것처럼 보인다. 한편으로는 (영화를 보지는 않았지만) 감독의 전작 <타인의 취향>이라는 제목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곧 아까 말한 것처럼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왠지 그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그치지 않을 것처럼 보였던 비가 금방 그치고, 그들이 마주하게 되는 것은 서로의 약한 모습들이다. 이민자 출신으로 뿌리깊은 차별 속에서, 카림의 날선 말들이, 사실은 약한 부분을 감추려는 일종의 방패에 불과했다는 것. 혹은 농부의 약간은 집요한 시선 속에서 얇은 스카프 속으로 애써 밀어넣는 아가테의 약한 하얀 팔꿈치. 프로듀서와 제대로 계약도 안된 상태에서 알바로 연명하는, 그나마도 제대로 못해 아이의 이마를 맞힌 미쉘의 카메라 마이크. 이런 것들을 서로가 조용히 바라보면서 모두들 깨닫는 것이다. 저 사람도, 별로 다를 것이 없구나. 그저 우리는 그 형태만 다를 뿐이지, 비슷비슷한 효과를 가진 콤플렉스로 둘러쌓인 약한 인간들일 뿐이구나 하는 것 말이다. 그래서 오는 비는 말하고 있다. 나는 누구한테나 내려요. 페미니스트라고, 혹은 이민자 출신이 아니라고, 남자라고, 내가 피해가지는 않는답니다. 그저 누구한테나, 골고루, 쏟아질 뿐이랍니다, 라는 것.

그리고 그 순간 영화는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안도를 준다. 모두가 다를 바는 그다지 없다는 것, 때로는 많은 일들이 꼬이고, 또 어떤 일들은 우리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겠지만, 모두들 비슷하게 누군가에 대한 악담을 늘어놓거나, 비슷하게 서로를 미워하고, 비슷하게 서로에게 짜증을 내고, 비슷하게 서로를 몰래 좋아하기도 하면서 살고 있다는 것, 당신만이 그렇게 유별나게 망가지거나,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것. 어떤 의미에서는 이것은 치유의 코미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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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품격 프랑스 코미디'라는 말이 있었던 것 같은데, 글쎄. 물론 어떤 의미에서는 '키에르케고르' 운운하는 농담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서는 맞을 수도 있겠지만, 동의하기는 힘들다. 이 영화의 웃음이 빵빵 터지는 곳은 그보다는 훨씬 '낮은' 지점에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네스가 인터뷰에서 양치기 운운하자 뒤의 양떼들이 '메에~~~'하며 화답을 해주는 장면 같은 것들 말이다. 물론 고품격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논란의 여지는 있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사실 빛나는 지점은 그런 '고품격' 프랑스 유머들보다는, 아름다운 프랑스의 풍광 속에서 스치고 지나가는 몇몇 마법같은 장면들에 있다. 그런 장면들의 일부는 앞에서도 짧게 언급했으므로 여기서 또 중언부언 늘어놓는 것은 바보같은 일이 되겠지만, 다음의 한 장면만은 상당히 인상적이었으므로 언급해두고자 한다. 영화의 마지막, 쏟아지는 비 속에서 만난 남자와 여자. 그들은 손을 맞잡고, 곧 여자는 들고 있던 우산을 머리 위로 날려버린다. 비는, 누구에게나 가릴 것 없이 쏟아지지만, 가끔은 우산이 필요없을 때도 있어요. 어딘가에 맞잡을 누군가의 손이 있다면, 우산 따위는 놓아버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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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도 걸어도 - Still Wal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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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에 던지는 보통의 시선, 그래서 특별한 (가족이라는) 끝나지 않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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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시크릿 라이프 오브 더 월드 - The Secret Life of Wor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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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복잡한 심정이 된다. 스페인 감독이 만든, 영어를 쓰는 배우들이 출연하고 대화하는, 그러나 스페인어로 더빙된 영화를 한국어 자막으로 보는 감정. 게다가 주인공들이 말하고 움직이는 이 곳은 어디이며, 그들은 어느나라 사람들인가. 조셉(팀 로빈스)은 한나(사라 폴리)에게 묻는다. "금발이죠? 발음이 좋군요. 어디 사람인가요, 스웨덴? 러시아?" 그러나 한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아무 것도 얘기해서는 안된다는 듯이, 혹은 아무 얘기도 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그리고 감독도 그 이상의 아무 것도 들려주지 않는다. 여기는 어디이며, 이 사람들은 어디 출신의 사람들이며, 어디서부터 왔으며, 왜 여기에 왔는가. 아니, 그래도 몇몇 얘기는 미리 해두어야 할 것 같다.

청력을 잃은 한나는 공장에서 일한다. 같은 일을 반복하고, 점심에는 치킨과 쌀밥과 사과를 먹는 되풀이되는 삶. 공장에서는 사람들이 그녀를 불편해한다며, 그녀에게 사직 대신 휴가를 권한다. 그녀는 한 섬으로 떠나는데, 그 섬에서 멀지않은 석유시추선에 간호를 요하는 환자가 있음을 알게 되고, 그녀는 돌연 거기에 자원한다. 석유시추선에서의 사고로 온 몸에 화상을 입고, 각막손상으로 일시적으로 앞을 볼 수 없게 된 조셉과의 만남. 한나는 그를 성심성의껏 돌보며 그와 점점 가까워진다.

영화를 보기 전, 팜플렛에서 영화의 내용을 잠깐 읽어본 느낌으로는, 흥미롭지만 식상한 설정이라 생각했다. 귀가 들리지 않게 된 여자와 앞을 보지 못하게 된 남자, 그들은 어떻게 소통하고, 어떻게 교감할 것인가. 그러나 왠지 보다보니 이것이 중심축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들의 장애는 어떻게 보면 일시적인 것. 여자는 보청기를 이용하지 않으면 들을 수 없지만, 보청기를 이용하면 실질적으로 듣는 것에 큰 무리는 없다. 남자는 각막 손상으로 앞을 볼 수 없게 되었지만, 이 또한 영구적인 것은 아니며, 치료를 통하여 회복될 수 있다. 남자는 볼 수 없고, 여자는 들을 수 없지만, 그들이 물리적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는 어떤 문제가 없다. 문제는 물리적, 그 이상에 있다. 앞에서도 잠깐 이야기했지만, 이들이 왜 이곳에 와 있는지 서로는 알 수가 없으며, 동시에 관객들도 잘 알 수가 없다. 한나는 왜 청력을 잃었을까, 그녀는 왜 갑자기 조셉을 간호하겠다고 나섰을까, 그녀는 정말 간호사로 일한 경험이 있을까, 조셉은 왜 여기 바다 한가운데 석유시추선에 오게 되었을까, 조셉에게 녹음을 남긴 여자와 조셉 간에는 어떠한 일이 있었을까.

사실 이들은 그렇게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그러나 이 대화들에는 무언가가 담겨져 있다. 그것은 진심, 혹은 진심이고자 하는 마음, 혹은 그와 동시에 자신을 어느 정도는 감추려고 하는 마음. 이들은 어느 순간 자신을 내비치다가도, 마음의 문을 살짝 닫아버리기도 하고, 또 어느 순간에는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했던 어떤 것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어쩌면 그것이 이들이 교감을 하는 방식이며, 많은 사람들이 교감을 하는, 소통을 하는 방식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 영화의 제목 '시크릿 라이프 오브 워즈 secret life of words'가 아닌지도 모르겠다. 언어로서 전달되는 내용, 그 이상의 어떤 것, 단순히 언어로서만 표현되는 것이 아닌, 언어 그 이상이 담고 있는 진실, 상대방과 무엇인가를 나누고자 하는 마음, 그것들이 가진 힘. 언어가 가진 숨겨진 힘들. 단 한두 마디일지라도 그것이 무언가를 불러일으키는 그 놀라운 파괴성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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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이러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감, 언어로서 이루어지는 작은 연대들의 힘의 가장 반대편에 한나가 겪은 일들이 있을 것이다. 영화에서 짧게 스치고 지나갔지만 발칸이 언급될 때 우리는 한나가 겪은 일들이 어떤 이유로 일어났는지 대략 짐작한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이 영화가 견지하고 있는 어떠한 태도가 이해가 된다. 그 태도라는 것은 요리사 사이먼의 태도 같은 것은 것이다. 세계 여러 곳의 요리를 다양하게 하는 것, 그리고 그 요리를 하면서 그 나라의 음악을 듣는 것과 같은 태도, 혹은 세계 여러 곳에서 온 노동자들끼리 어깨동무를 하고, 같이 노래를 부르는 것과 같은 행동에 어린 어떤 긍정적인 시선 같은 것들 말이다. 아니 굳이 어떤 행동이나 태도를 말하지 않아도, 이 영화의 어떤 무국적성 같은 것들이 그것일 것이다. 당신은 어디 출신의 사람이며, 어디에서 왔으며, 왜 여기에 왔는가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점. 당신은 그 당신 자체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

발칸에서와 같은 거대한 폭력, 혹은 거대한 범죄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그것은 영화 속 정신과 의사의 말대로 그것의 어떤 개인적 체험을 기억하고 기록함으로써 그것에 개개인적인 의무를 덧씌우는 일일 것이다. 어떤 거대한 범죄가 어떤 숫자로만 기억되고, 개개인에게서 떠나 거대한 어떤 것으로만 기록될 때 이는 위험해진다. 개인이 그것을 나와 상관없는 어떤 것으로 여기게 되었을 때 그러한 것은 다시 반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경험들을 나누고, 그 경험들을 기억할 때, 그것은 돌이키지 말아야 할 일들이 되며, 진정으로 우리가 역사에서 배우는 반성이 된다. 그것이 한편으로는 다시 한 번 이 영화에서 말하는 '시크릿 라이프 오브 워즈'가 아닐까. 그래서 그 얘기를 꺼내는 것이 누구보다도 자신을 아프게 하지만, 그것을 단호히 이야기하는 한나의 모습을 볼 때, 그리고 그것을 들으며 눈물을 흘리는 조셉의 모습을 볼 때, 바다 한가운데 있는 석유시추선에서 사람들이 나누는 그리 길지 않은 대화들을 볼 때, 그리고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서 많은 사람들의 또다른 여러 경험들을 이야기하는 기록된 테이프들이 쌓여 있는 것을 볼 때 그것이 어떤 작은 희망들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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