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금 MBC 뉴스데스크에서 제법 '놀라운'(예상은 했지만,이란 표현을 달아야겠지만) 인터뷰 내용을 봤다. 한나라당의 지방선거 패배요인 분석을 기자가 각 한나라당 의원에게 물어보는 형식이었는데, 내가 주목해서 본 건, 젊은 층 표심이 한나라당을 져버렸다는 것이다. 뭐, 여기까진 누구나 다 아는 상식적인 견해다. 그런데, 그 견해와 덧붙여 나온 한 의원의 말이 참 볼썽사납다. 한나라당의 그 의원 왈, 20,30대들이 이제 정치적 무관심에서, 자신의 이익을 표출하기 시작했다는 것.(그 의원이 한 말의 맥락에서 중심 주제는, 분명 한나라당이 이번 지방선거에 패배한 원인을 묻는 것이었다) 결국 이 말을 좀 풀어보면, 이 당의 생명줄은 젊은이들의 정치적 무관심이라는 게 폭로된 거다.  (조중동은 엉뚱한 발언을 '파문'이라는 수사로 쓰지 말고, 바로 이런 발언 자체를 파문이라고 써야 한다.)

차라리, 그 의원이 "한나라당을 지지하던 젊은 층이, 야당으로 옮겼다.."라고 했다면 납득이 갈 발언이었는데, 그 의원은 정치인이라는 위치에서, 젊은이들의 정치적 무관심이, 자신이 소속된 정당의 정권 유지를 위한 수단이었음을 인정하고 말았다.  

이게 한국 정치를 이끌어가는 현실 정치인의 마인드다. 우리는 주어진 페이퍼 스톤으로, 분노를 멈출 이유가 없다.  

덧붙임) MBC 뉴스데스크 다시보기 내용이 올라와, 해당 부분을 발췌해본다. 

선거 패배의 주요 원인은
젊은층 이탈이었다며
이들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한
지도부 세대 교체 주장도 나왔습니다.

◀SYN▶윤상현 / 한나라당 친박근혜계 의원
"2-30대층이 정치적 무관심 탈피해
이익투표 경향 강해졌다.
2-30대에 대한
확실한 대책 만들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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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6-08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눈 밝은 분은 다르군요. 속이 뻥~ 뚫린 것처럼 시원~ 합니다. 감솨!!!

얼그레이효과 2010-06-08 19:17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보다가, 저 부분이 눈에 확들어와서요.~
 
하위문화 : 스타일의 의미 - 문화교양 9
딕 헵디지 지음 / 현실문화 / 1998년 11월
절판


'청년문화'는 두 가지의 문화형태들에 대한 반발을 통해 생성되었다. 하나는 부모문화이며, 다른 하나는 지배문화이다. 부모문화와 지배문화는 한 사회 내의 지배적 가치를 생산한다는 점에서 같은 지배적 문화의 위치에 있지만, 그것의 억압적 형태는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다.가령 노동계급 하위 청년문화가 노동계급 출신의 '부모문화'에 대해 반발하는 점은 그들이 오랜 동안 유지하고 있었던 전통적인 윤리의식과 규범에 대한 것이고, 한편으로 부르주아 지배문화에 반발하는 점은 경제적,정치적 착취와 그로 인한 문화적 불평등에 대한 계급적 편견에 대한 것이다.그런 점에서 노동계급 청년 하위문화는 전후 영국의 정치,경제,사회의 변화의 과정에서 자신들의 부모가 간직한 검열의 윤리의식을 거부하면서도 동시에 부모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부르주아 지배계급의 노동력 착취를 거부하는 움직임 속에서 생겨났다.-11쪽

이러한 거부행위는 '세대의식 generational consciousness'과 '계급의식 class consciousness'을 동시에 드러내는 것이었다. 우리는 물질적 부의 풍요와 그 풍요를 누리는 특정한 소비대상의 출현이라는 변화만을 내세워 하위문화의 단절적 의식을 '세대의식'으로만 규정하는 경향이 있는데, 적어도 영국의 하위문화의 출현은 사회적 계급 정체성의 동요와 세대적 동요에서 비롯되었다. 청년 하위문화는 그런 점에서 부모문화에 대해 그리고 지배문화에 대해 '이중의 접합'을 시도하는데 이 이중적 접합은 하위문화가 단절의 형태가 아니라 갈등의 형태임을 알려준다.-11쪽

언어의 신성함에 관한 통념들은 사회질서에 대한 관념들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용인가능한 언어적 표현들이 한계를 갖게되는 것은 수없이 많은 명백하게 보편적인 금기에 의해 규정받기 때문이다. 이 터부들은 의미의 지속적 '투명성'(자명성)을 보장한다. 따라서 추정컨대, 사회세계가 조직되고 경험되는 특권화된 약호를 위반하는 것은 도발적이고 교란을 일으키는 상당한 힘을 갖고 있다.-124쪽

스펙터클적 하위문화의 출현은 항상 언론에서의 신경질적인 파장을 동반했다. 이 히스테리는 전형적으로 양면적이다.그것은 공포와 매혹,분노와 유쾌 사이를 왔다갔다한다. 충격과 공포를 표현하는 헤드라인은 앞면을 수놓는 반면,안쪽의 사설은 적극적으로 '진지한 논평'(각주 5)으로 꽉 차있으며 접지면이나 부록물들은 최신 유행들 및 의식들에 대한 열띤 해설들을 담고 있다.(중략)스타일은 특히 이중의 반응을 유발한다:그것은 (패션 페이지에서)찬양을 받고 (하위문화를 사회문제로 정의하는 기사들에서)조소당하거나 비방받는다.대부분 경우 제일 먼저 미디어의 주목을 끄는 것은 하위문화의 스타일적 혁신들이다. 뒤이어 일탈적이거나 '반사회적인'행위들-반달리(126)즘vandalism(예술문화의 고의적인 파괴나 반문화적인 야만행위:역주),욕지거리,싸움,'동물적 행동'-이 경찰,사법권, 언론에 의해 '발견'된다.이 행위들은 하위문화가 애초에 의상약호들을 위반했음을 '설명하는 데'이용된다.사실 일탈행동 또는 독특한 유니폼을 똑같이 맞춰 입는 것(또는 보다 전형적인 경우로 이 양자의 결합)은 도덕적 공포감의 촉매역할을 할 수 있다.-126,127쪽

각주 5. 1977년 daily mirror 8월 1일자는 그러한 수상쩍은 사설의 예를 담고 있다. 킹즈 로드에서 있었던 테드-펑크족 사이의 폭력적 문제를 '진지하게'고찰하면서,필자는 그것을 명백히 지난 10년 전 해변 소요와 비교하고 있다: '모드족과 로커족이 몇 년전에 여러 해변 마을들에서 벌인 대결처럼 충돌이 극렬한 싸움으로 발전하도록 놔두어서는 안된다.' 도덕적 공포는 다시 돌아올 수 있다. 심지어 동일한 사건들조차도 동일한 분노감을 조장시키기 위해 동일한 예언자적 색조로 회상될 수 있는 것이다.-126쪽

스펙터클적 청년문화에 살기로 선택한 젊은이들은 텔레비전이나 신문에 표상될 때 상식이 그들을 재단하고자 하는 장소로 되돌아 간다(확실히 '동물'로서,또한 '가족 품에 있는 것으로','실업상태로','최신 유행을 쫓는 것으로' 등등).틈새난 질서가 치료되고 하위문화가 지배적인 신화(그 신화에서 하위문화는 부분적으로만 발산한다)내에서 하나의 일탈적 광경으로('악마족 fork devil'으로,타자로)합병되는 것은 이 연속적인 회복 recuperation의 과정을 통해서이다. 회복의 과정은 두 가지 특징적인 형태를 취한다. 1) 하위문화 기호들(의상, 음악 등등)이 대량생산된 대상들(즉 상품 형태)로 전환되는 것.2)지배집단들-경찰,미디어,사법부(즉 이데올로기 형태)-에 의해 일탈행동이 '진리표'붙여지고 재정의되는 것.-128쪽

실로 새로운 스타일의 창조와 확산은 불가피하게 생산,공공화 그리고 패키징 과정과 결부되어있으며 이 과정은 하위문화의 전복적 힘을 약화시킬 수 밖에 없다.-129쪽

'하위문화'를 의미화하는 본래의 혁신들이 상품들로 번역되어 일반적인 것으로 전화되지 마자,그 혁신들은 '동결'된다. 일단 소규모 사업가들과 그것들을 대규모로 생산해내는 거대 패션 이해 당사자들에 의해 그 혁신들의 사적 맥락들이 제거되면, 그 혁신들은 성문화되고 파악될 수 있는 것이 되며 공공재산이자 수지맞는 상품이 된다. 이런 식으로 합병의 두 형태(의미론적/이데올로기적인 것과 '현실적'/상업적인 것)는 상품형태로 수렴된다고 말할 수 있다. -1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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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장르 동문선 문예신서 363
라파엘 무안 지음, 유민희 옮김 / 동문선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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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中 / 장르 카테고리의 경험적 성격은 항상 정의하기보다 인정하기가 더 자주 혼탁하다. 왜냐하면 장르의 혼합은 엄격한 분류 계획을 완전히 무산시키고, 많은 영화 장르는 다른 매체 속에 이미 존재하는 장르를 연장하고 재창조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이론이 장르의 기본적인 개념에 집착하고 있는 한, 틀림없이 많은 장르는 이론에 있어 불완전한 대상인 것 같다.(중략) 우리는 영화에 있어 반대 명제를 주장할 수조차 있다: 영화 장르가 장르 영화를 한정할 수 없다 할지라도, 대중문화 속에 경제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그 강력한 정착과 같이 대중적이고 상업적인 영화 속에서 장르의 두드러진 성격은 영화를 예술적인 영역 밖으로 내던지고 있다. 그러므로 영화 장르는 거의 불안전하기 때문에 역시 잘 찾지 않는 개념이다.결국 고정되고 변별적인 성격을 확인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 모든 장르이론이 아주 빠르게 이르고 있는 아포리아를 피하고 특별한 사례 연구에 내재되어 있는 한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장르 문제의 중심을 이동시키는 것이 적합하다. (중략)카테고리 논리란 영화 텍스트 전체의 일치에서 기인한 소산이나 이 영화 텍스트가 순응하고 있는 -11쪽

규범을 장르로 만들고 있다. 약 20년 전부터 몇몇 앵글로색슨 연구자들이 특히 보여주었던 것처럼 장르는 역시 담론적 행위이고, 커뮤니케이션 도구이(11)며, 문화적 / 이데올로기적 /사회적 매개물이다. 영화 세계의 다양한 관계자들인 프로듀서, 영화인, 비평가와 평범한 관객 등을 통한 장르의 명칭과 인정, 때로 부인 행위 역시 영화 텍스트의 비교 분석 만큼 '장르성'의 연구에서 중요하다. 그러므로 영화 장르는 영화 장르만이 아닌, 역시 제작과 해석의 카테고리이다.이런 관점에서 영화 장르 이론은 텍스트적 접근과 컨텍스트적 접근을 양립시켜야 한다.-11,12쪽

제3장 장르는 무엇에 소용되는가? 中 / 분류 혹은 분석적인 논리는 장르의 기능적인 차원을 한쪽으로 제쳐두고 있다. 이 논리는 이것이 형식화시킨, 공통적인 특성을 제시하고 있는 영화 전체를 장르로 간주하는 것이지 서술한 변화, 반복 작용을 장르로 간주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보았다시피 장르는 공동체가 인정하면 존재한다 : 릭 알트만이 제시한 의미 / 통사론적 정의의 용어를 다시 취해, 장르는 안정된 통사론으로 의미론을 조직할 때, 다시 말해 대중에 의해 확인될 수 있는 영화적 형식이 정돈될 때 나타나고 그 자체로서 인정된다. 이 영화는 다양한 장르성 층위로 영화적 형식에 연결된다. -87쪽

우리는 시네마에서 장르를 상업적인 작품의 효과적인 모델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왜냐하면 장르는 상업적인 작품에서 전제로 하고 프로그램 짜는 형식을 제작자들에게 제공하기 때문이다 : 새로운 주제에 영화의 성공을 보장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을 적용하면서, 제작자들은 위험을 최소화하고 작품을 합리화한다. 아주 흔한 이런 생각은 분명히 대중문화에 대한 경멸적인 견해에 근거하고 있다. -88쪽

장르 영화의 제작은 특유한 자질들의 반복과 동시에 변화를 가정하고, 변증법적 표준화/차이화 속에서 새겨진다. 이것은 규범적인 논리와 대중문화 속에서 '문화적 재산'의 제작과 소비의 특징을 이루고 있는 개혁 논리 사이에, 결합 중 하나이다. -88쪽

사실 '꿈 공장'은 시네마토그래프 제작법의 상업화로 특징지어진다 : 표준화는 더 신속하고 더 이익이 되는 방식으로 제작하도록 해주는 것과 동시에 뛰어난 규범(아주 한정된 '표준화된' 작품)을 겨냥하고 있다. 반면 개혁은 차이화된 작품들을 생성하고 동시에 표준에 외부적 요소들을 통합시키고 있다. -89쪽

할리우드 스튜디오의 장르 명칭 회피 中 / 할리우드에서, 장르란 제작의 합리화 결과인 동시에 순조로운 영화를 제작하기 위한 효율적인 도구라고 말한 거짓이 아니라 해도, 할리우드 광고의 실천은 반대로 장르의 명칭이 훌륭한 판촉의 논지가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장르는 공적인 영역에 속하므로 그 어떤 제작사에 의해 자사의 영화를 특징지우기 위해 내세워질 수 있기 때문에, 물론 제작의 용이성을 제공하고 있지만, 이것은 스튜디오로 하여금 자신의 현재 경쟁자들과 자사를 구분하는 마케팅 전략을 배치하도록 하지 않는다. 이처럼 장르는, 일단 몇몇 스튜디오에 의해 구성되고 공유하게 되면, 이것을 창조한 스튜디오의 특별한 이익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 스튜디오는 영화에 대한 광거를 하기 위해, 그 영화의 독창성을 이루고 있는 것을 내세우기를 더 좋아한다 : 스튜디오와 계약을 체결한 영화의 간판 배우들, 저작권의 보호를 받은 연작물이나 등장인물 등이다. 따라서 장르의 경제적 효율성을 평가하기 위해 제작 행위로 그치지 않고, 스튜디오가 대중과의 커뮤니케이션에서 장르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보여주기 위해 스튜디오의 담론적 행위를 고-93쪽

찰하는 것이 적합하다. 이것은 스튜디오가 제작한 영화에 대해 자사가 했던 담화 속에서 두 개의 다른 '목소리'를 구분하면서 릭 알트만이 했던 것이다 : 할리우드 시스템의 성징을 띠는 하나의 목소리는, 이때 장르 영화에 단순한 장르의 수식어를 부여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고 있다. 그리고 자사의 이미지와 이익을 옹호하면서, 특별한 스튜디오라는 식의 스튜디오의 또 다른 목소리는, 담론 속에서 자사의 스튜디오가 다른 스튜디오와(93)공유한 모든 것을 피하고 자사와 구별되는 모든 것을 증진시키려고 노력한다. 여기서 후자의 목소리는 고전 시대에 상급 회사들과 오늘날 여전히 대규모 회사들이 광고,포스터,예고편 등에서 자주 듣게 하는 소리이다. -93쪽

장르의 사회적 기능 中 / 우리는 현 시대는 스테리오타입, 이것의 윤곽 그리기와 고발 등의 시대인 동시에, 이것의 산업적이고 대중적인 확산의 시기로 알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가령 예술은 그렇게 간주됨으로써, 구별과 평범의 논리에 의거해 당연히 구분되어야 하는 반면, 대중문화인 신문(97)연재 소설에서 텔레비전 연속극, '할리퀸'연애 소설에서 상업 영화,유명한 시네토그라프 장르에서 광고 영상과 슬로건 등의 문화는 집단의 표상과 스테레오타입을 품고 있다. -97,98쪽

스테레오타입에 대한 이런 양면적인 의식은, 많은 비평가들이 상업 영화에 장르 명칭을 미리 결정하기를 더 좋아하는 이유 그리고 그들이 작가로 간주된 영화인들이 감독한 장르의 작품에 대해 어떻게 작가들이 장르를 극복하고 초월하는지, 또 어떻게 작가가 습관적인 규칙, 클리셰,스테레오타입화된 장르의 모티프 등과 거리를 둔 사용을 하며, 어떻게 작가가 장르를 존중하는지 등을 보여주려고 노력하는 이유를 부분적으로 설명한다. 나는 영화인들이 단순히 클리셰가 유통하도록 하는 것 대신, 초대받은 관객이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도록 인물에 대한 패러디나 독창적인 사용을 하기 위해 클리셰를 집어들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99쪽

이데올로기적인 억압의 도구 中/ 장르는 이데올로기적인 틀의 효율적인 도구로 간주될 수 있다.이(99) 도구는 스테레오타입화되고 반복적인 이야기를 통해 관객에게 사회적으로 규범화된 해결책을 강요한다. 장르 영화의 규칙적인 공연은 지배 계급들의 관심을 만족시키고 있다. 시네마토그래프 산업은 이들의 전형이고 중요 요인이며, 대중을 회유하고 대중에게 자기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입장을 공유하도록 이끌고 있다. 장르는 이처럼 규범적인 사회적 가치를 재확인하면서 사회,정치적인 단순한 현상유지를 보증할 수 있다.-99,100쪽

시네마토그래프 장르를 신화로 간주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장르 영화 공연에 의식적인 기능을 부여하도록 한다 : 이 장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진 규칙과 기능을 부여하도록 한다 : 이 장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진 규칙과 기능으로 체계화된 한 사회의 가치 시스템의 연출을 보여주면서, 관객으로 하여금 스스로 이 사회 구성원임을 인정하도록 도와준다. 이처럼 시네마토그래프 장르는 대중으로 하여금 공통의 가치와 참조 체제 주위에서 공감하게 하고 동시에, 갈등을 잠재우고 사회를 유지하도록 돕는 매개물을 상징적인 차원에서 제시한다. 동일한 장르 영화의 규칙적인 소비는 공동체가 장르에 빠진 것으로 해석되지만, 의식처럼 공통의 가치 전체를 인정하는 공유된 기쁨을 둘러싸고 그룹을 연합할 수 있는 그만큼 주기적인 만남으로 이루어진다. -110쪽

헐리우드 수사학의 진정시키고 규범적인 그물 속에 대중을 가두면서, 이데올로기적 굴레로서의 장르 개념에 반대하여 우리가 표명할 수 있는 주된 비난은 이 장르가 이데올로기적 규범을 수용하면서 수동적인 관객을 가정한다는 것에 기인한다. 장르는 유일하고 보편적인 해석을 강요할 것이다. 장르 때문에 동질적인 모든 것으로 간주된, 영화 관객들은 할 수 없이 이 해석을 하게 된다. 정말로 대중의 아편과 같은 이 장르는 거의 천성적으로 덤불 속에 있고, 비평적이며, 상반되는 모든 해석, 여러 가지 모든 수용 가능성 등을 마비시킨다. -111쪽

장르의 커뮤니케이션 기능 中 / 영화를 내보이고, 수용하거나 생각하기 위해 장르 카테고리에 호소하는 것은 영화에 '기대 범위'를 한정하는 것이다. -115쪽

장르의 커뮤니케이션 기능은 장르 영화, 다시 말해 예측할 수 있는 도식을 따라가는 안정된 의미/통사론적 양식을 위해 자주 조사되고 연구되었다 : 이는 장르 개념을 축소하고 그 실제적 용법을 고려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비평가가 작가 영화에 대해 장르 명칭 자체를 이용하기 때문이다. 이는 원칙적으로 수많은 연구가 프로듀서와 영화 텍스트들을 장르 의도의 유일한 수탁자로 만든다는 사실에서 온 것이다.그리고 관객의 해석은 이 장르의 의도에 부합할 것이다.-120쪽

영화 장르의 기대 영역은 두 개의 장르성 체제, 즉 소개하는 작가적 체제와 배열하는 관객의 체제를 통해 결정된다.그러므로 관객의 체제는 작가적 체제와 만나지 않는 일도 일어난다. 이런 경우 장르적 기대가 또 다른 해석 시스템으로 교대되지 않는다면, 어긋난 이 기대는 영화의 해석을 불가능하게 만든다.(중략)우리는 장르를 영화를 이해하기 쉽게 만들고, 대중에게 영화를 수용하고 이해하도록 만드는(즉 대중이 장르 카테고리를 인식하고 인정함)매개물 중 하나로 정의할 것이다.장르 르 영화의 경우, 장르의 쾌락을 예견하는 장르라는 매개물은 가장 중요한 것일 터이다.그러나 작가,스타,게다가 영화가 상영된 영화관의 유형 등, 이처럼 영화와 그 대중 사이에 매개자 역할을 할 수 있는 또 다른 매개물들이 역시 존재한다. -121쪽

장르는 이렇게 영화로의 가능한 접근 중 하나이고, 영화를 이해하기 쉽게 만드는 가능한 조건들 중 하나인데,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이 영화는 장르의 의도를 드러내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다. 이는 우리가 같은 영화를 장르에 모두 관계시키지 않음을 부분적으로 설명하는데, 즉 우리가 존 웨인이나 존 포드의 영화처럼 <역마차>를 서부 영화로 간주할 수 있는 것과 같다.-121쪽

시네마토그래프 장르의 기능을 조사해 본 결과 두 가지 고찰이 부여된다. 먼저 우리가 고찰한 기능이 어떻든간에 시네마토그래프 장르는 좋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렇지 못한 대상이다. 즉 장르는 상업영화 제작에 유용하다 해도, 영화를 판매하기 위해 반드시 훌륭한 논거는 아니다 ; 공동체의 가치를 경축하는 그 의식적인 기능은 역시 이데올로기적인 억압의 형식이다 ; 만약 시네마토그래프 장르가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가 받아들여질 수 있는 기대를 구축하도록 도와준다면, 이것은 해석을 미리 결정하고 차단한다. -123쪽

두번째로 만약 우리가 관객에 대한 장르의 효과를 이론화시킨다면, 각 장르와 장르의 해석은 이것의 제작 /수용 상황 속에서 고찰되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장르의 경제적,이데올로기적,의식적,커뮤니케이션 기능을 인정한다면, 이 기능은 역사적, 사회적 혹은 특정한 수용 상황 속에서만 구체화된다. -1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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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 지방선거가 끝나고, 많은 사람들이 한나라당의 ‘깨갱’모드라는 ‘즐거운 상상’을 하는 듯하지만, 그렇다고 민주당이 자만해야 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다시, 이번 선거의 주요 코드였던 ‘심판’이란 단어를 복기해보자. 적어도 투표에 참여한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민주당이 ‘예쁜 자식’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는 것을 머리말로 달았다. 자식들 다 고놈이 고놈이지만, 그나마 괜찮은 놈이 민주당이기에 찍었다는 원칙. 역사는 민주당에게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소위 ‘반(反)의 정서’로 국민들이 도와준 경우가 몇 번인가를 세어보자. 아니 횟수가 중요하지 않더라도, 민주당이 ‘깨갱’할 때, 국민들이 투표로 도와줬던 그 순간의 농도를 측정할 때, 민주당이 처한 위기의 농도는 꽤 짙었다. 
  

되감기 버튼을 누른다. 결과론적이다, 누구의 탓이다는 6.2 지방선거를 둘러싼 주요 ‘뒷담화’의 틈을 뒤집고 내가 일시정지 버튼을 누른 장면은, 민주당의 성배를 위해 독배를 들었다는 민주당의 서울시장 경선후보 이계안에 대한 이야기다. 이계안을 언급하는 것이 단순히 서울시장 선거에서 한명숙의 ‘아쉬운 패배’를 분석하기 위함은 아니다. 그것보다 내가 촉구하는 것은 민주당의 어떤 태도이다. 앞에서 말한 ‘반(反)의 정서’로 대체 언제까지 일관할 것인가. 누군가는 플러스 - 마이너스, 영이라는 이 제로섬 게임의 틀을 깨야 한다. 나는 이 게임의 틀을 깨지 않는 한, 한나라당, 민주당에 대한  ‘도찐개찐론’을 여전히 철회할 마음이 없다.  

 

심판론 앞에 초조해진 또 하나의 정당, 민주당

 

 'MB 심판‘이라는 모토 아래, 이계안은 고개를 숙여야 했다. 워낙 ’심판‘이라는 모토가 주는 준엄함 때문인지, 당의 결정을 따른 이계안의 태도에 대해 언론은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주요 프레임은 “이제 우리를 위해 오실 심판자 한명숙님이여!”였다. 많은 사람들은 “두고봐라, 이명박과 오명박”으로 대동단결한 듯 했다. 심판이라는 정서가 주는 도전자 정신의 주입과 공유는 한명숙과 오세훈의 TV토론과 출구조사의 관련성에 대해 의외의 결과를 내놓았다. 한명숙은 생각보다 준비되지 않았고, 오세훈은 회가 거듭할수록 의기양양했다. 오히려 이 의기양양함으로 빚어진 마지막 TV토론에서의 오세훈의 태도는 분명 마이너스 였지만, 개인적으로 그렇게 손실을 줄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출구조사와 실제 선거 결과, 한명숙이 TV토론에서 보인 어눌한 태도는 그리 중요한  감점 요인은 아닌 걸로 판명되었다. 내가 잘 가는 여러 인터넷 커뮤니티에선 이 점을 안심하고 있었다. “거 봐요, 뭐 TV 토론 사람들이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그랬잖아요.”

 하지만, 국민들의 안심과 정당의 안심은 달라야 한다고 본다. 민주당은 분명 ‘심판’이라는 모토를 잘 ‘이용’하긴 했다. 하지만 그들은 정치판을 ‘구성’할 줄만 알았지, ‘창작’할 여력은 역시 없었다는 걸 입증했다. 한명숙의 선전 뒤에 숨은 민주당의 불성실함을 우리가 애써 덮어줄 이유는 없다.

 

 ‘사람특별시’라는 이번 선거의 모토 안에서 기획된 공약들의 논리를 점검해보자. 공약의 논리를 관통하는 것은 철저히 ‘심판’이라는 모토 아래 ‘반(反)의 정서’를 이용하는 것 뿐이었다. “여러분, 오세훈식 행정이 이러저러 했습니다. 너무나 엉망이에요”에 주렁주렁 달린, 반대 이야기들이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그럼으로 우리는 이렇게 하겠습니다의 논리. 상식적으로는 맞다. 근데 민주당은 옳지 않은 것을 바로 잡기 위해 내세운 분석안을 그럴듯하게 잘 포장은 했지만, 이 포장의 약발이 이번 선거뿐인 것 같다는 위기감을 느끼게 했다. ‘반대’를 넘어서, 그것에 기계적으로 대응하는 식의 공약은 넘쳤다. 그럼으로써 사람들이 다른 방식으로 서울을 고민할 수 있는 공약은 빈곤했다. ‘반대 이야기’를 상대적으로 ‘많이’ 함으로써 국민들이 ‘그래도 이 친구들이 비교적 상황 판단을 잘 하고 있구나’ 라고 생각하도록 하는 심리선에 적당하게 걸쳐 있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이번 선거에도  국민들을 ‘헉!’하게 하는 민주당의 의외성은 없었다. 선거 준비를 정말 잘했냐고 묻는다면, 유감스럽게도 그들은 또 한 번 국민들의 동정에 업혔다고 봐도 무방하다. 혹자는 이번 정부의 행보를 통해 정말 “‘운빨’ 장난 아니다!”라고 말하지만, 민주당도 예외는 아니다. 민주당의 ‘운빨’은 이번에도 적중했다.

  

민주당의 의외성이 돋보일 기회가 있었다. 그것은 앞에서 언급한 이계안에 대한 이야기. 특히 이계안과 한명숙의 경선 과정이다. ‘정권 심판’이라는 모토의 농도가 워낙 짙어, 대중들이 봐 준 측면도 있지만, 경선 과정에서 tv토론을 거부한 채, 여론조사 형식으로 후보를 추대한 일은, 민주당의 한계를 보여준 것이었다. 민주당은 후보 추대 과정에서, 사실 “우리에겐 한명숙 ‘씩이나’ 있다구!”를 외칠 정치적 전술을 펼쳐야 했다. 그런데, 정작 민주당은 조급했다. 실제로도 그랬다. 인물이 없었다. 결국 남은 건 “우리에겐 한명숙 ‘밖에’ 없다구!”였다. 물론 이 결핍과 빈곤의 절박함이 한명숙이라는 인물론을 돋보이게 한 건 유효했지만, 만약 ‘심판’이 그리 지배적인 테마가 아니었다면, (좀 더 세게 말해서, 이 ‘운빨의 코드’마저 없었다면) 어떠했을까. 그리 긴 이야기를 꺼내지 않아도 될 듯하다.

 그렇다면 한 가지. 이계안의 정책이 한명숙의 그것보다 더 뛰어난가? 그것을 장담할 순 없다. 다만, 이런 몇 가지는 적어도 생각해볼 수 있었을 거다. 내가 봤을 땐, 민주당에서 경선 과정 안에 토론을 넣었더라도, 한명숙은 이계안을 이기고 후보가 되었을 게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은 건, 토론이라는 과정 자체를 없애고, ‘심판’을 준비하는 시간 절약의 효과가 있었겠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측면은 토론을 통한 서울 시정에 대한 학습 효과였을 것이다. 이계안이 내세우는 서울 시정에 대한 생각, 한명숙이 내세우는 서울 시정에 대한 그것들을 주고 받으면서, 한명숙이 나름 서울을 학습할 수 있는 시간도 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해 본다. 이건 민주당 이미지 전반에도 심판이라는 선거 전략과 더불어, 민주당이 현실 정치 안에서 어떻게 한국 사회를 인식하고 있는가를 고민하고, 어필할 수 있는 기회였을 수도 있다는 걸 생각할 때, 민주당은 장기적인 입장에서 그들이 내세울 수 있는 전술 하나를 놓친 셈이다.

 

 민주당마저 웃을 이유는 없어

 다행히(?), 사람들은 적진 앞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는 데 동의했다. 그래서 민주당이 좀 모자라도 사람들은 대부분 덮어 주었다. 그 안에 이계안도 들어가 있다. 그 또한 이 정서의 논리에 수긍해야만 했다. 예상대로 민주당은 힘을 얻어, ‘중단’과 ‘촉구’의 정치적 수사를 설파하기 시작했다. 혹자는 “그래, 이러라고 뽑아준 것이다”라고 자위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나는 정확히 이 시점이 민주당에게도 역풍이 올 수 있다는 위기의 징조로 생각한다. 사람들은 보이든 보이지 않든 체감한다. 민주당이 야당으로 내세우는 그 ‘반(反)의 정서’가 남은 2년을 채운다면, 변덕 심한 대중들이 또 얼마든 다른 카드를 쓸 수 있다는 것이다.(노무현 탄핵 이후 총선에서 눈물을 흘렸던 그들의 태도는 결국 자만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에 절망했다. 그 절망이 지금 이 정부를 찍었다는 것을 생각하자.) 민주당이 그렇게 강조하는 ‘뉴 민주당 플랜’이라는 건, 도대체 뭔지 모르겠다. 혹시 이게 위기 때만 쓰이는 민주당 스스로의 자위 기구가 아니길 부디 믿고 싶다.

 결빙 효과를 깨야 한다

 특히 이번 선거 과정에서 단일화에 합류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그 진보정당을 ‘이상주의’로 매도했던 프레임을 보고 있노라면 한국 사회 내 현실 정치를 구성하는 정당, 언론, 시민의 노력에 대한 어떤 고민을 이야기하게끔 만든다. 사람들은 여전히 한국 사회라는 영화를 비평하는 진보주의자에게 카타르시스를 느끼면서도, 그들이 영화를 만들기 위해 뛰어들면 철이 지났거나, 너무나 생뚱맞다고 힐난한다. TV토론에서 노회찬이 오세훈의 입을 납작하게 해주길 바라는 대중의 욕망이, 정작 표로 이어지지 않았던 현실이 아직 한국 사회의 진실이다. (많은 네티즌은 답답한 tv토론을 지켜보면서, 오세훈의 복지를 입만 살아 있는 ‘오랄 복지’라고 평가하면서도, 또한 노회찬의 ‘입만을’ 빌리고 싶어 했던 듯하다) <백 분 토론>에 나오는 진보적 달변가와 한국 현실 정치에 뛰어든 그들이 다르다고 혹은 아직 모자라다고 간주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그들에게 덧씌운 편견이 아닐까. 우리는 정작 추구할 수 있는 정치적 쾌락 앞에 그 현실이라는 ‘구성된 두려움’으로 스스로를 먼저 타이르는 건 아닐까. 민주당에 대한 절망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민주당 자체에 또 하나의 기대감을 갖는다는 것으로 우리의 생각이 이어져선 안 될 것이다. 결국 한나라당과 민주당으로 귀결되는, 정치사회학에서 설명하는 ‘결빙 효과’를 깨기 위해선, 우리는 꾸준하게 진보 정당의 목소리에 귀기울일 수 있는 공간의 확보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진보 정당 스스로의 노력 또한 필요함은 물론이다. 
 

<온라인 당비의생각(http://dangbi.tistory.com/61)>에 게재된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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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6-07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감입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6-08 00:35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마기님. 다행히 진보적 지식인들이, 민주당이 자만하지 말 것을 촉구하는 칼럼들을 계속 써주고 계시더군요. 다행이에요.
 
영화에 대하여 알고싶은 두세 가지 것들
구회영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6년 8월
구판절판


필름(film): 우리가 영화라고 부르는 현상은 필름으로부터 시작한다. 필름은 빛이 닿으면 화학적 변화를 일으키는 물질이 입혀진 띠모양의 셀룰로이드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것은 우리가 만져서 느낄 수 있는 실재하는 물체이다.(중략)그러므로 영화가 세계 속에 존재하는 여러 방식 - 빛과 소리에 의한 한순간의 영상으로서, 관객의 기억과 무의식의 단편으로서, 글이나 사진이나 그림을 통하여 재현된 모습으로서 - 중에서 필름은 가장 구체적이며 물질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다.-7쪽

한 편의 이어진 필름은 또한 한 편의 영화와 동의어로도 쓰인다. 어떤 영화가 지금/여기에 있느냐없느냐를 가늠하는 가장 확실한 - 아마도 유일한 - 기준을 우리는 필름의 존재에서 찾는다. 그래서 <장군의 아들>은 지금 우리에게 있고 - 20여개의 프린트가 전국의 극장에서 '돌아가고' 있으며, 네가(negative)가 보관되고 있으므로- 나운규의 <아리랑>은 지금 우리에게 없다.<아리랑>을 보았던 수많은 선대의 관객들의 증언과 기록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민족의 노래'가 된 그 영화의 주제가가 끊임없이 불리워지고 있음에도, 그러므로 영화가 일단은 필름의 형태를 가지고 있어야만 그 존재를 인정받게 된다는 믿음을 우리는 모두 가지고 있는 셈이며, 영화 = 필름이라는 등식이 우리의 일상언어 속에서 받아들여짐은 이러한 믿음에 바탕을 두고 있을 것이다. -7쪽

그러나 필름은 아직 '움직이는 그림' 곧 활동하는 사진 또는 무비(movie)가 아니다. 필름이 복제하는 현실의 모습은 아직은 정지된 세계, 정사진(still photograph)으로 구성된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필름은 영화 특유의 기계 장치를 거쳐 관객의 감각기관에 빛과 소리로서 전달될 때 비로소 우리가 영화라 기억하는 현상이 되는 것이다-7쪽

무비(movie;motion picture;활동사진)(전략) 영화가 등장하자마자 '신기한 구경거리'로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무엇보다도 활동사진으로서였다. 대중은 일단 '움직임'을 보고 싶어하였고, 소리나 색채에 대한 요구, 혹은 이야기나 등장인물에 관한 흥미는 나중의 일이었다. 그러나 '움직이는 그림(motion picture)'이라는 말이 정확한 표현이 아니듯이, 그리고 영화의 가장 원초적인 매력인 '움직임을 보는 즐거움'이 사실은 일종의 눈속임에 의하여 가능하듯이, "영화=무비/활동사진"이라는 등식에는 영화 자체가 사람들에게 속임수로서- 체제,권력,자본의 유지와 이익을 위하여 - 작용할 수 있다는 뜻이 숨어 있다.-8쪽

시네마(cinema)(전략) 영화를 '습관적'으로 보는 관객집단이 형성되고 영화제작이 대규모, 대량생산체제를 갖추어감에 따라 영화는 더 이상 관객을 찾아나서지 않아도 되었다. 영화가 배급될 수 있는 기본적인 조건들 - 영사기를 돌리기 위한 전기시설, 필름을 운발할 수 있는 교통편, 그리고 최소한의 '문화'생활을 할 만큼의 여유를 가진 관객들- 이 충족되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크고 작은 시네마가 들어섰고, 관객들은 영화를 찾아 자연스럽게 극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적어도 TV가 관객들의 극장가기 습관을 허물어뜨리기 전까지는, 극장 설계자들의 유일한 고민은 어떻게 하면 관람에 불편을 주지 않으면서 객석수를 최대한으로 늘릴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갈수록 늘어나는 주말의 관람인파를 모두 받아들이기 위하여 새로 지어지는 대도시의 극장들은 점점 커졌고(9) 그 규모에 걸맞게 또한 호화로움을 더해갔다.-9,10쪽

시네마는 그러나 새로운 모습으로 돌아왔다. (중략) 하나는 다양한 도시공간을 게릴라처럼 뚫고 들어가는 소극장 (중략) 또 하나는 '구경거리'로서의 가치를 더욱 높이는 테크놀로지들 / 이러한 두 경향은 그것들의 현대성과 첨단기술 / 역설적으로 오늘날의 영화와 관객과의 관계를 영화 초창기의 / 관객을 찾아 상영공간을 만들어가는 소극장 / 영화가 신기한 구경거리임을 새삼 발견하게 하는 새로운 테크놀로지 -10쪽

80년대 헐리우드 영화 텍스트의 안과 밖에 드러난 몇 가지 '증후군'을 살핌으로써 그것들이 90년대의 보다 근본적인 변혁의 '조짐'인지 따져봄은 가능할 것이다. 그 첫번째 증후는 "경계 무너뜨리기"라고 부를 수 있다. 자아와 타자, 중심과 주변, 대회사(MAJOR)와 독립영화(indies),주류(mainstream)와 소수파(cult)의 구분이 점점 희미해져가고, 장르와 장르 사이, 관습(convention)과 새로운 감수성 사이를 '넘나듬'이 예삿일이 된 것이 80년대말의 할리우드 사정이다. 그러나 더욱 문화사적 의의가 큰 경계 무너뜨리기는 창작자/수용자라는 전통적 이분법의 영역에서 일어났다. 여기에는 80년대의 가장 큰 영상혁명을 가져온 비디오가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86쪽

엘리트 비평가와 무식한(?) 대중 사이의 간격도 좁혀져왔다. 대중은 비디오와 케이블 TV를 통해 자신도 몰랐던 취향을 발견하고, 불특정 다수의 관객이 아닌 나름대로의 안목과 지식을 가진 특성화된 소집단들로 변모해갔다. 처음 비디오에 적대적 입장을 취했던 헐리우드의 우려와는 달리, 80년대는 대중이 '영화관'을 재발견한 시대로 기억해야 할 것이다. 비디오 보급률과 비례하여 극장영화의 총관객수가 80년대 중반 이후 다시 늘어나기 시작하는 현상이 이 가설을 어느 정도 뒷받침한다 보아도 되리라.-87쪽

60년대 후반에 소년기를 보낸 홍콩영화팬 첫세대는 중국무사들의 고풍스런 의상과 그들이 펼치는 '의협'의 세계를 기억한다. 그 다음 세대 관객들은 이소룡의 날렵한 몸놀림과 쌍절봉의 바람 가르는 소리에서, 혹은 성룡, 홍금보, 원표 트리오의 좌충우돌 액션 속에서 홍콩영화를 만났다. 그리고 비디오의 탄생과 함께 자라난 첫세대인 80년대의 가장 새로운 관객들은 주윤발-장국영-왕조현-유덕화로 이어지는 '신드롬'을 형성하며 우리나라 대중문화의 한가운데에 '홍콩'이라는 고유명사를 깊이 새(227)겨 놓았다.-227,228쪽

그리하여 1990년대초, 서울은 어쩌면 세계에서 홍콩 다음으로 많은 홍콩영화를 동시에 극장에서 상영하고 있는 도시가 되어 있는 듯하다. 직배된 미국 영화, 몸살을 앓는 한국 영화, '고급' 관객을 유혹하는 '예술' 영화 광고들 사이에 칸막이처럼 끼어있는 홍콩영화 광고의 이미 친숙해진 이미지, 그리고 재개봉관 영화광고란의 수많은 홍콩영화 제목들과 비디오가게마다 붙은 무수한 홍콩영화 포스터. 이것이 바로 오늘의 한국 영화관객, 그리고 미래의 한국 영화를 끌고나갈 새로운 세대들의 '영화환경'의 주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음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으리라.-228쪽

컬트 무비 / 영화광을 위한 진혼곡 中 (1) 컬트 영화는 정의될 수 없고, 정의되어서도 아니된다. "도대체 컬트 영화란 무엇일까?"라는 질문은 '컬트(cult)'라는 외래어를 정의함으로써 답해지지 않는다. 그것은 컬트 '현상'을 가능케 하는 '문화/하위문화(subculture)'와 그 문화를 지탱하는 물적 토대를 이야기함으로써 비로소-우회적으로- 대답할 수 있는 물음이다. 컬트는 쉬운 해답을 갖지 않은 문제라 생각하는 편이 컬트를 이해하는 지름길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컬트의 의미는 미지의 세계를 향하여 열려 있고, 그 내용은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컬트는 사전이라는 동어반복의 틀에 갇히기를 거부한다. 쉽게 정의될 수 있는 것은 이미 컬트가 아니며 고정불변의 컬트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229쪽

(2) 컬트 영화는 관객이 만든다. 관객만이 마지막 판결을 내릴 수 있다. (중략) 관객들은 재해석을 통하여, 관람경험의 '제의(ritual)'화에 의하여, 혹은 애증/찬탄/야유가 뒤섞인 관심으로써 컬트 영화를 길러낸다. 컬트는 상업영화의 생산/소비 메커니즘 속에 관객이 능동적으로 자신들만의 자리를 확보하는 유효한 방식이다. 관객만이 컬트를 결정하고, 최후까지 결정권을 지니는 것이다. -229쪽

(3)컬트 영화의 관객은 언제나 소수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발적이고, 열광적이며, 때로는 광신적인 소수이다. 다수의 관객 대중에게 버림받고 외면당한 영화는 컬트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229)진다. 그것이 소수의 지지자/후원자들에게 발견되면서 이 '미운 오리새끼'는 컬트 영화로서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 이들은 자신만이 그 영화를 '발견'했다고 생각하다가, 뜻을 같이 하는 다른 이들이 있음을 알게 되면서 '확신'을 가지고 컬트 영화에 사랑과 존경을 보낸다. 이 극장 저 극장을 쫓아다니며 수십번씩 같은 영화를 보고,주인공들의 분장과 몸짓과 대사를 흉내내고, 주위사람들의 옷소매를 잡아끌며, '전도'에 열을 올리는 소수의 '광'들이 컬트 영화의 진정한 주인들이다.-229,230쪽

(4)컬트 영화의 자격은 영화의 상업적 성공과 관계가 없다. "관객동원('동원'이라는 말에 숨은 이데올로기에 주목할 것)"에 실패한 영화는 일단 '소수'만을 위한 영화라는 컬트의 조건에 들어맞는다. 그러나 흥행에 실패한 영화가 모두 컬트 영화가 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그 영화가 소수의 열광적인 지지를 끌어낼 수 있는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반대로 첫개봉에서 '떼돈'을 벌었다 하여 그 영화가 컬트 영화가 될 자격을 자동적으로 상실하는 것으도 아니다. 영화가 상업적으로 성공한 것과는 전혀 다른 이유로 - 대다수 관객의 취향과는 무관하게 - 영화광들이 그 영화를 '재발견'할 때, 그것은 '대작흥행영화'에서 컬트영화로 다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또한 영화가 수용되는 문화의 차이라는 요소가 덧붙여진다. 한 나라에서의 '흥행' 영화가 국경을 넘어가면 '예술'영화가 되듯, 문화적 차이에 따른 관객의 오해(?)가 때로는 컬트 영화를 낳는 근거가 된다. -230쪽

(5) 컬트 영화는 반드시 관객공동체의 문화를 반영하며, 관객공동체의 대변자가 된다. 컬트 영화를 만들고 키워나가는 관객들은 언제나 특정한 '집단'에 속한 사람들이다(때로는 거꾸로 컬트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이러한 집단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이 집단은 공통된 기호와 취향과 나름대로의 규범을 가지며 공통의 정서로 끈끈하게 맺어진 '공동체'이다. -230쪽

(6) 컬트 영화는 얌전한 영화가 아니다, 컬트 영화는 논쟁 속에서 태어나고 자란다. 컬트 영화는 상식을 벗어나는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 상식은 '영화는 모름지기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충고로부터, '영화는 이러이러한 것을 다루어서는(230)안된다'는 경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을 담는다. 그리고 이러한 상식을 깨는 곳에서 컬트 영화는 출발한다. 기존의 영화형식을 거부하는 영화, 그 사회의 정치적, 윤리적 금기를 건드리는 영화, 소외집단의 편에 서는 영화, 영화의 존재 자체가 '사건'이 되는 영화, 이런 영화들은 언제나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그 논쟁 속에서 컬트 영화는 태어난다. -230,232쪽

(7)컬트 영화는 단순히 구경거리로 취급되지 않는다. 컬트 영화를 관람함은 일종의 제사/의식에 참여함과 같다. (전략) 관객들은 컬트 영화를 한번 '소비'하고 잊어버리는 다른 영화처럼 취급하지 않는다. 컬트 영화를 관람하는 시간과 공간은 마치 일상을 벗어난 신비로운 체험의 자리와도 같다. 그것은 관객들의 삶 속에 '살아 숨쉬는' 경험으로 남는다. 그래서 컬트 영화는 종교를 모르는 사람에게 종교적 의식에 참여하게 하고, 마술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마술의 신비를 느끼게 한다. -232쪽

(8)컬트 영화는 비평가들을 속이고, 영화이론을 믿지 않으며,제작자들을 배반한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그들 모두를 구원한다. 비평가들은 대부분 가장 많은 사람이 동의하리라고 여기는 기준으로 영화를 잰다. 그래서 컬트 영화는 그 기준에 '미달'됨으로써 비평가들의 손아귀를 벗어난다. 영화이론 또한 컬트 영화를 예상하지 못한다. 이론이 가능하다면 그것이 컬트영화를 뒤쫓아오며 '설명'하고 '해석'할 때 뿐이다. 제작자들은 전혀 엉뚱한 관객들의 반응에 당황한다. 흥행의 공식을 컬트 영화는 여지 없이 깨뜨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컬트 영화의 주인인 관객들은 이렇게 고정관념을 깸으로써 영화가 이론과 자본과 '여론'의 노예가 되는 것을 끊임없이 방해한다. 컬트 영화는 자신들이 '불온'하고 '불건전'하다는 딱지를 받기 일쑤지만, 그렇게 됨으로써 영화라는 문화현상이 사라져버리지않고 계속 새로운 모습으로 이어나가는 데 기여한다. 비평가들과 영화이론과 제작자들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232쪽

(9)컬트영화는 멈추어 있지 않는다. 그것은 끊임없이 재발견, 재해석,재평가된다. 컬트 영화는 소수의,소수에 의한, 소수를 위한 영화이다. 그러면서 컬트 영화 자(232)체도 소수파가 된다. 컬트 영화라 불리울 수 있는 영화는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어렵사리(!)컬트의 대열에 낀 영화가 그 자리를 언제까지나 지킬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후략) (10) 컬트 영화는 부정을 통하여 긍정으로 가는 영화이다. 영화문화의 한쪽 모퉁이에 뚫린, 미래로 열린 창이 컬트 영화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 컬트 영화는 정의될 수 없고, 정의되어서도 아니된다. -232쪽

컬트 영화의 발생은 한 사회의 극장문화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한 사회의 극장문화는 또한 그 사회의 역사적 조건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므로 컬트 영화라 불리우는 현상은 각 사회의 극장문화의 차이에 따라, 그리고 시대에 따라 다른 모습을 띠고 나타난다. (중략) 기존의 보수적인 배급망을 타기 어려웠던 이 영화들은 처음 대학 캠퍼스나 소규모의 시네클럽들에서 틀어졌다. 그리고 이 영화들이 어느 정도 고정된 관객층을 확보하게 되자 주로 대도시의 학생 거주지역, 예술활동 중심지, 그리고 캠퍼스타운 언저리에 하나둘씩 레퍼토리 시네마(repertory cinema)라 불리우는 영화소극장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전국적으로 계열화되어 있던 기존의 영화관들과는 달리 이 소극장들은 독립적으로 운영되었고, 돈을 벌겠다는 목표보다는 자신들이 좋아하는 영화들을 더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영화광들의 소박한(?)의도와, 자신들만의 문화공간을 갖고 싶어하는 젊은 세대의 요구가 맞아 떨어져 생겨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234쪽

컬트 영화 출현의 기반인 소극장들이 '멸종'되어갔던 반면, 헐리우드는 컬트 영화시장에 주목하고 기존의 배급망을 통하여 컬트 영화를 돌리기 시작하였다. 1975년에 나온 <록키 호러 픽쳐 쇼우(Rocky Horror Picture Show)의 대성공이 하나의 '모범적 사례'로 꼽힌다. (중략)그러나 <록키 호러..>의 성공은 흔치 않은 예외에 속한다. 컬트 영화가 보여지는 공간은 갈수록 줄어만 갔는데, 비디오의 출현과 함께 컬트 영화광들은 비디오가 축복인 동시에 저주임을 깨닫게 된다. -236쪽

컬트 영화의 요람이자 보금자리였던 레퍼토리 소극장들이 거의 자취를 감출 무렵인 1980년대 초반, 비디오라는 새로운 영상매체가 등장하였다. 상류계층의 '노리개'정도로 인식되었던 비디오 플레이어는 점차 가격이 낮아지면서 급속히 일반에게 보급되었고, 이와 함께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비디오 대여점은 사람들이 영상매체를 대하는 습관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한편으로는 영화-비디오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영화사의 창고에서 잠자던 숱한 필름들이 -걸작이고 졸작이고 가릴 것 없이-비디오에 옮겨졌고, 한편으로는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본다는 행위의 문화적인 의미가 새로워졌다.-237쪽

컬트 영화팬들에게 비디오는 복음처럼 들렸다. 이제 그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영화를 기다릴 필요 없이 언제나, 마음껏 볼 수 있었고, 아직 그 영화의 '진가'를 모르는 주위사람들에게도 손쉽게 일차 관람하길 권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컬트 영화의 흥행으로 근근히 유지해오던 소극장들에게 비디오는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였다.일부는 아예 비디오 대여업-주로 외국영화, 독립영화,컬트 영화를 취급하는 -으로 방향을 돌려 새로운 갈 길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비디오는 컬트 영화를 보는 기쁨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 곧 공동체의 관람경험에 '참여'하는 즐거움을 빼앗아갔다. 소극장들이 없어지고, 영화광들이 뿔뿔이 흩어져 자신의 밀실에서 텔리비전 모니터를 지켜보고 있을 때 컬트 영화의 시대는 이미 끝나가고 있었다. 진짜 컬트 영화와 진짜를 흉내내어 장삿속으로 만들어진 가짜 컬트 영화의 구별도 이제 점점 불가능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추세는 컬트 영화라는 현상이 처음 나타났던 유럽과 미국의 경우이다. 컬트 영화라 할 만한 것이 존재할 수 있는 환경이 애당초 없었던 사회에서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사태가 진전될 수도 있다. -237쪽

영화의 경우는 우리나라 영화보다도 엉뚱하게도(?) 외국 영화에서 컬트 현상이 나타났으니, 다름아닌 '홍콩 느와르'의 선풍이 그것이다.그리고 여기에는 80년대 들어 소극장의 형태로 급속히 불어난 '재개봉관'들의 존재와 비디오의 광범위한 보급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한국에서의 홍콩영화붐에 불길을 당긴 것은 <영웅본색>이었는데, 이 '전설적' 영화의 개봉관에서의 흥행성적은 사실 신통치 않았다(서울의 경우 화양,명화, 대지극장에서 87년 6월 23일부터 7월 9일까지 개봉, 9만 4천 604명을 동원). 그러나 <영웅본색>은 뒷골목과 변두리의 '동시상영'프로가 되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기 시작하였고, 급기야는 주인공의 옷차림과 제스추어를 모방하고 수십번씩 같은 영화를 되풀이해 보는 청소년 집단-'주윤발 신드롬'에 걸린(?)-이 나타나기까지 하였다. -238쪽

'개봉관 실패 -> 재개봉관 성공'의 과정은 <천녀유혼>의 경우에도 반복되었는데, 여기에 '극장에서의 실패 -> 비디오로 재평가'라는 새로운 현상을 <열혈남아>가 보태었다. 이러한 사례들을 한국적인 '컬트'현상으로 볼 것인가 하는 물음과는 별도로, 80년대 한국의 대중문화에 홍콩 영화가 파고들어온 과정, 그리고 그것이 우리나라 관객에게 수용되는 양상을 이해하는 데 이들은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것이다.비디오문화의 또 하나의 부산물은 쏟아져나오는 프로 테이프 덕분에(?) 우리들이(238) 말로만 듣던 '그들'의 컬트 영화를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그들'에게 컬트인 것이라 해서 '우리'에게도 컬트 영화일 수는 없다. 문제는 우리나라에도 컬트 영화가 존재하느냐 혹은 앞으로 나타날 것인가 하는 데 있지 않다. 컬트를 이야기함은 진지하게 영화를 대하는 사람들에게 영화를 '보고 '읽는' 방법의 깊이와 너비를 더해 줄 수 있을 때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진지한 사람들'속에는 상투적이지 않은 시각으로 영화의 '재미'를 찾으려는 '영화광'들도 당연히 포함된다. -238,2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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