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드라마에서 "다음주면 집이 넘어갈 것 같다"는 대사를 심각한 표정으로 하는 한 대기업 사장의 아들을 봤다. "아, 저거 내가 어릴 적부터 정말 두려워하던 장면인데.." '집이 넘어간다'라는 표현에서 오는 어떤 두려움.  

요즘, 학교 가는 길에 늘 보였던 '때리는 할머니'가 안 보인다. 신촌에만 늘 계시던 할머니가, 가끔 종로에 보일 때면, 이상하게 드라마의 그 장면이 생각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비로그인 2010-06-29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겠죠.

얼그레이효과 2010-06-30 11:45   좋아요 0 | URL
네. 그럴 것 같아요..
 

공부와 인격의 관계. 이것에 대해 늘 거부하고 싶은 절망감이 있다. 하지만 그동안 접한 시간들을 다시 정리하면서, 이 절망감을 그냥 받아들여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여자를 꼽으라면, 교수의 아내라고 생각한다. 정의와 결혼한 남자의 아내에게 문득 다가가 묻고 싶은 건, 아픔의 틈새이리라. 그 아내에게 남편 분이 훌륭한 일을 하셔서, 뿌듯하시죠?란 말을 건네는 건 그녀의 남은 여생을 불행하게 예언하는 또 다른 행위가 아닐까. 이보다 더 불행한 교수의 아내는, 그동안 못 놀았다는 것을 술자리에서 촌스럽게 티내는 연구원, 강사들, 교수들의 인생에 동참해야 하는 그녀들일 것이다. 

"그거 그냥 이렇게 하면 며칠만에 끝나지 않아?"와 같은 말들을 자주 들을 때면, 그건 그 사람의 지적 능숙함으로 이해되기보단, 세상에 속하기 위한 동물로서, 글과 말을 잡아먹는 현세주의의 표효로 느껴질 때가 대부분이다. 이런 인생을 쳐다보는 두 젊은 신상 부류가 있다. 구석에 앉아. 소심하게 그들을 비웃거나, 교수보다 더 뛰어난 현세적 판단과 감각을 갖고, 교수들의 인사부장 역할을 처리하는 조숙한 괴물.  

가끔 이 괴물들이 다가와 누구누구의 공부사와 신상을 상세히 읊어준다. 누가 어디서 대학 석사를 땄고, 어디 박사를 했으며, 한국에 와서 무엇무엇을 했다는 말이 나보다 너무나 어린 년,놈들에게 나올 때면 주일학교 시간에 봤던 <슈퍼북>같은 만화 주인공처럼, 차라리 성경 속 이야기 안으로 숨고 싶다.   

영화 <권태>의 마지막 장면 대사처럼, "우리가 이 절망으로 인해 오히려 살아야만 해"라는 그 고백을 언제쯤 내 마음 속 깊숙한 곳에서 하게 될 날이 올까. 가까운 미래는 아닐 것 같다는 게 내 중론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문부식 선생을 둘러싼 아픈 사건들이 몇몇 있다. 이 아픔은 여러 갈래로 나뉜다. 하지만, 이 아픔의 속사정을 재론한다는 것에 대해 난 여전히 신중하고픈 입장이다.(그것이 그에 대한  예의인 것 같다) 그는 여전히 달변가이며, 문장가이다. 그리고 여전히 뛰어난 출판인으로서의 감각을 지닌 채, 대중들과 조용히 소통하고 있다. 이 정도까지만 소개하겠다. 역사와 기억에 대한 그의 진심은 당신의 몫으로 남겨두겠다. 

민주주의, 역사, 기억에 대한 그의 명문 중 하나인 <다시 첫 차를 기다리며, 환멸 역에서>의 몇 구절을 옮겨 본다. 생각의나무 시절, 당대비평이 휴간하기 전, 2005년 2월호의 흔적이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는 영화가 있던가. 불안과 동요가 사람들의 영혼을 지배할 때 모든 것은 숨가쁘게 거래의 양식으로 변한다. 관심과 사랑과 화해의 방식까지도. 그것은 이미 불안의 시대에 유일하게 확실하다고 믿어지는 관계의 방식이자 삶의 단일한 원리가 되어 있음으로 삶을 지배하는 배후의 폭력은 쉽게 대상화되지도 않는다. 지난한 단계를 거쳐 한결 참신해지고 한층 장황해진 우리의 대의제 민주주의도 우리의 삶을 덮친 불길한 기운으로부터 우리를 구제하지 못한다. 아니 우리가 마주친 이 시대의 거대한 역설은, 무수한 사람들의 희생과 고통을 자양 삼아 탄생된 그 민주주의가 광휘를 발하는 동안 사람들의 무력감이 더욱 심각해져 마침내는 실어증 상태로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 223쪽 

 

비인기 과목임을 자조하던 '역사업자'들을 오늘처럼 바쁘게 만들었던 때는 일찍이 없었다. 고구려사에서부터 해방전후사까지 시대별 전문가들을 모두 불러내어 고루 활력을 불어넣었던 사례도 마찬가지다. 바야흐로 역사는 국책사업이 되었고, 사회적 양극화와 빈곤의 심화로 고단한 대한민국에서 최대의 사회적 논쟁은 다름 아닌 '광화문 현판 교체'문제이다. 역사가 돈 되는 사업이 된 마당에 앞서 이재를 터득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가만히 있을 리는 없다. 마침내 전방위적 과거사 규명의 시대다. 영화 <그때 그 사람>은 개봉되기도 전에 사회적 시선을 모으는 데 성공한다. '쿨한 냉소'든 역사의 희화화든 '역사라는 시장'에서 중요한 것은 소재의 가치와 참신성, 그리고 무엇보다 시장성이다. 역사의 시장에서는 사람들이 지닌 상처와 고통의 기억도 상거래의 법칙을 강요받는다.  

사람들은 과거사라고 해서, 상처나 고통이라고 해서 다 동등한 것은 아니며 똑같이 중요하게 취급받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이내 알게 된다. 진상규명, 명예회복, 보상이라는 수순으로 된 창구들을 지나쳐가는 속도에도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사실도. 참혹한 상황은 사람들의 상처나 기억들 사이에 경쟁이 생겨나거나, 정치적 수요가 만들어낸 특정의 표준적 기준에 맞추어 기억들이 변형되기 시작하면서부터 나타난다. 어쩌면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들을 이미 '현재'로부터 다 터득하고 있는지 모른다. 과거라는 시장에서 어떤 것이 고가로 거래되고 어떤 것이 외면당하는지. 225-226쪽 

 

덧붙이자면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무리 없이 통합되어 있는 가식된 현재와 현재의 질서를 위협하지 않는, 즉 '위험하지 않은 과거'에는 솔직히 관심이 없다. 인간의 고통과 기억은 - 그것이 설사 모순과 수치심으로 채워진 것이라 할지라도- 역사의 시장에 나앉아 좌판에 나열된 채 사람들의 시선을 구걸토록 방치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며, 인간의 불행한 운명과 고통의 기억을 전유하여 자기 정당화의 밑천으로 삼으려는 현세적 권력의 기도에 저항하기 위해 '기억하기의 고통'을 수행하지 않은 기록을 기억의 정본으로 삼을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역사철학테제>에서 벤야민이 말했던 '어떤 위험의 순간에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과 같은 어떤 기억'들이 <돌 속에 갇힌 밤>에는 틈새 속에 박혀 있다. 기억의 혁신은 거의 언제나 틈새 속에서 일어난다. -228쪽 

어느 때부턴가 시대적 유행어가 된 '민주화 이후'라는 말을 생각한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삶이 단지 양극화된 사람들 사이의 거리를 메우는 수사적 균형 아래 위태롭게 매달려 있음을 실감하고 있는 중이다. 이 허위의 균형이 숨긴 거짓은 이제 폭로되어야 한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라는 수사적 정의는 오늘의 민주주의가 처한 상태를 숙고하도록 자극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어떤 민주주의인가"라는 질문이 개입되어 있지 않음으로 동어반복의 틀 속에서 민주주의를 물신화시킬 위험이 자리 잡고 있다. 우리의 '참여 민주주의'가 왜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으냐고 질책하는 고언은 진지하지만 위험하다. 우리가 목격하고 경험하고 있는 불행은 그 민주주의가 할 수 없는 일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나아가 아무 것이나 행해도 된다고 믿는 것으로부터 더 심화되어 왔기 때문이다. -230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비디오를 보는 남자
임영태 / 랜덤하우스코리아 / 1995년 10월
절판


나는 커피포트에 물을 부어 놓고는 밖으로 나가 현관 옆의 반납가에서 비디오테이프를 꺼내온다. 전부 여덟 개. 나는 담배 한 대를 빼물고 책상에 앉아 컴퓨터의 파워 버튼을 누른다. 팍. 모니터가 정전기 현상으로 반짝거리고 나자 우우우웅 먼 들녘의 매운 바람소리 같은 팬 작동 소리에 이어 컴퓨터 하드 디스크가 돌아가고 화면에는 프로그램 로고가 나타난다. 엔터키를 치자 메뉴 화면이 뜬다. 이어서 제법 날렵하게 움직이는 내 손가락들, 나는 반납 화면으로 전환하여 반납기에서 빼온 테이프 번호를 입력하기 시작한다. 1294,725,384,588(오팔팔이군!),603,2605,1751,322.
-12쪽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어제 들어온 신간 테이프 하나를 진열장에서 꺼낸다. 영업 사원이 왔을 때 한참이나 망설이다가 들여놓은 대만 영화다. 좋은 영화는 가능하면 구입해 놓자는 내 어줍잖은 자존심이 시킨 일이다. 이 영화는 그럴듯한 상도 받았고 비평가들의 평도 좋은 편이지만 그런 건 고객들의 선택에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아카데미 상이라면 모를까 칸느영화제 감독상이나 비평가협회 선정 최우수 작품이니 하는 배경들은 오히려 고객들을 '앗 뜨거!'하게 만든다. 이 영화는 당신을 졸리게 할지도 모릅니다 - 대개의 고객들은 그 안내문을 그런 식으로 해독하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붙여 자켓 헤드에 박힌 광고문이라니, '산해진미와 삶의 휴머니티에 대한 따뜻한 이야기',휴머니티를 만나자고 비디오 가게에 오는 사람은 없다. -13쪽

게다가 고객들은 대만 영화에는 익숙하지 않다. 감독도 배우도 낯설고, 무슨 화끈한 액션이 있는 것도 아니고, 요약된 줄거리에서 풍기는 건 딱 청소년 대상 교양 문예물의 인상이니 누가 거들떠 보겠는가. 이(13)테이프 역시 대여 횟수 4회에 그쳤던 지난 번의 [로빙화]처럼 본전 뽑기는 힘들 것만 같다. 대만 영화로는 [결혼 피로연]이 그나마 본전에 접근했을 뿐이다. -13,14쪽

나는 가게 안에 손님이 있으면 영화를 보지 못하는 체질이다. 자꾸 신경이 쓰인다. 같이 앉아서 보는 거라면 상관 없지만 뒤통수에 손님을 놔 두고는 영 집중이 안 되었다. 또 하나, 나는 손님이 테이프를 고르다 말고 영화를 힐끔거리기라도 하면 이상하게 화가 치민다. 어쩐지 그런 행위는 감상자인 나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다. 아니면 영화에 대한 예의가 아니든가. 그렇다고 내가 영화를 유별나게 사랑하는 사람은 아니다. 나는 다만, 진득히 계속 보는 것도 아니면서 껄렁하게 하면을 기웃거리기나 하는 그런 눈길들이 싫다.-15쪽

청년은 신간 진열대에 달라붙어 열심히 이것저것 테이프를 꺼내보기 시작했다. 화끈한 액션물을 좋아하는 청년이다. 나는 청년이 어느 테이프를 고를 것인지 예상할 수 있었다. "새로 나온 게 별로 없네요?" 그렇게 말하는 청년은 이미 하나는 골라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월말과 월초에는 테이프가 들어오질 않아요. 며칠 지나면 볼 만한(26) 게 많이 들어올 겁니다." "스티븐 시갈 꺼는 새로 나온 것 없어요?" "그 사람은 영화가 많지 않아요. 죽음의 표적은 보셨나요?" "아휴, 그거야 옛날에 봤지요. 액션은 정말 시갈이 끝내주는데...전에 어느 글에선가 보니까 반담도 시갈이 자기보다는 한 수 위라고 말했더라구요." 청년은 내가 예상한 테이프를 뽑아 뒷면의 줄거리를 읽고 있었다. "한 수 위니 어쩌니 해봐야 영화배우들끼리의 얘기일 뿐이지요." 내가 조금 심드렁하게 받아주자, "아니예요!"-26,27쪽

그 무슨 불경한 소리냐는 표정으로 청년이 얼굴을 돌렸다. "반담은 가라데 유럽 챔피언이었어요. 그리고 시갈은 백악관 경호실의 무술 사범이었구요. 둘 다 실제로도 쟁쟁한 무술 고수들이라구요." 그건 나도 아는 이야기였다. 그동안 비디오 잡지를 열심히 들여다본 덕분에 그런 식의 스타들의 뒷배경은 나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시갈이 백악관 무술 사범이었다는 건 내가 알기론 불확실한 정보였다. -27쪽

나는 영업 사원이 들고 온 일곱 개 중에서 네 개를 들여놓았다. 총 갯수로는 다섯 개였다. 우선 아놀드 슈왈츠제네거가 주연한 액션물은 생각해 볼 것도 없이 두 개를 집어들었고, 이연걸 주연의 홍콩 느와르는 하나를 할까 두 개를 할까 망설이다가 일단 하나만 들여놓기로 했고, 자켓 그림에서부터 색정 내음이 농염한 이태리 에로물 하나, 그리고 죽은 친구의 원수를 갚아주는 격투기 영화 하나였다. 격투기 영화를 들여놓은 건 조금 찜찜했다. 한때는 그런 비디오가 잘 나갔다고 하던데 요즘엔 격투기에 대한 반응이 시들했다. 내가 근래에 보았던 몇 편도 줄거리가 너무 상투적이었다. 싸구려로 양산해낸 영화는 고객들도 금방 알아차리게 된다. 일단 자켓에 쓰여진 현란한 광고 카피에 기대보기로 했다. 한데 이 비디오 보급처가 '스타맥스'이고보면 카피도 믿을 건 못 된다. '스타맥스'에서 나오는 것들은 대체로 광고 카피에 허풍이 심한 편이었다. 이 회사에서는 출시되는 모든 비디오에 '최고의','최대의','숨막히는','완벽한' 등등 온갖 그럴싸한 수식어는 다 동원시킨다. -39쪽

가게를 연 초기에는 대여해 간 테이프 중간에 가끔 엉뚱한 것이 녹(39)화되어 돌아오고는 했다. 테이프에 녹화가 조금 돼 있다고 물어내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테이프를 새로 들여놓을 수도 없고, 아무것도 모르고 대여해 갔던 고객들은 테이프를 반납할 때면 투덜거리고, 보통 골치 아픈 게 아니었다. 내 하소연을 드은 영업 사원은 빙긋이 웃으며 아주 간단한 처방을 알려 주었는데, 그것은 신간을 구매하자마자 테이프 아래의 탭을 제거해 놓으라는 것이었다. -39,40쪽

근방에 아파트를 끼고 있는 목 좋은 가게에서는 빅히트 영화인 대박 테이프는 여러 개씩 들여놓고는 한다. 하지만 수입이 시원찮은 내 가게로서야 아무리 대박 프로라 해도 두 개 이상 구입한다는 건 무리였다. 가뜩이나 들어오는 손님마다 볼 만한 비디오가 없다고 투덜거리는데, 어차피 반짝하고 나면 구프로가 되어 밀려날 테이프를 한 종류만 여러 개 구입할 수는 없었다. 사정이 그러하고 보면 테이프나 빨리 돌려야만 예약하고 기다리는 고객들에게 불평을 사지 않을 터인데, 1박 2일의 대여 기간을 지키기는커녕 열흘씩 자기 안방에 테이프를 방치해 두는 고객들이 있게 되면 영업에 막대한 지장이 생기는 건 당연했다. 대박 프로를 대여해 간 집부터 시작해서 열세 집 모두를 돌아다녔다. 하지만 큰 맘 먹고 반나절이나 소비했음에도 테이프 회수는 반타작에 그쳤다. (중략)이사 가버린 집이 없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비디오 가게를 시작한 지 이제 겨우 석 달인데 그동안 떼어 먹힌 테이프가 열 개도 넘었다. 한번은 중간에 이사간 것도 아니고 처음부터 가짜 주소를 적어놓고는 떼어 먹는 사람도 있었다. 그 후로는 가게에 처음 오는 사람에 대해서는 필히 주-52쪽

민등록증을 확인하였다. 가게를 개업한 초기에는 기껏 비디오 하나 빌려주면서 주민등록증 제시를 요구한다는 게 계면쩍기만 하여 상대가 불러주는 대로만 적어 두었던 것이다. "제가 떼어 먹을 사람같이 보여요?"(52) 가끔은 그렇게 노골적으로 마뜩찮은 표정을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아휴, 그럴리가 있나요. 그저 형식적인 겁니다."-52,53쪽

가게 안에는 '대여 기간을 넘길 시 하루당 5백원의 벌금을 받습니다'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한데 나는 아직 한 번도 벌금을 받아본 적이 없다. 나뿐 아니라 모든 비디오 가게가 벌금을 요구하지 않는다. 못하는 것이다. 천하에 야박한 장사꾼 놈이라고 욕이 들어올 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 역시 이 나라가 아직은 신용 사회가 못 된다는 증표이다. -53쪽

저녁엔 요 며칠을 통틀어 가장 손님이 많았다. 대목의 계절이 시작된 걸 느낄 수 있었다. 비디오 가게는 여름과 겨울이 성수기이다. 여름엔 학생들의 여름 방학과 직장인들의 휴가가 있고, 겨울엔 겨울 방학과 이런저런 연휴들이 많다. 그리고 기나긴 밤이 있다. "아저씨 이거 재미 있어요?" 퇴근길에 들른 듯 양복에 가방까지 들고 있는 손님이 테이프 하나를 들어 보인다. 그다지 재미 있다고는 할 수 없는 비디오였다. 나는 언제나처럼 잠깐 망설이다가 결국 언제나처럼 대답해 버리고 말았다. "그건 아직 못 봤는데요." 비디오 가게 주인에게 재미를 물어보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65쪽

재미없다고 하면 안 빌려갈 것이 뻔한데, 고루고루 테이프를 회전시켜야 할 입장에서 곧이곧대로 말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아주 막역한 단골 손님이라면 솔직하게 평해 주기도 하지만 대개는 아직 보지 못했다고 비켜가게 되었다. -65쪽

사실 가게를 낸 초기에는 고객을 끌기 위하여 테이프를 제법 많이 구매했었다. 한 달에 오십 개까지 들여 놓기도 했었으니 그야말로 내 생활비는 염두에도 두지 않은 출혈 구매였다. 그런데 그렇게 많이 들여 놓아도 막상 재미있는 테이프는 별로 없었다. 테이프를 보는 안목이 없어서였다. 시사를 해 보고 구매하는 게 아니고 테이프 자켓의 요약된 줄거리, 일방적인 선전 문구, 몇 개의 광고 화면만을 가지고 즉석에서 판단해야 하는 사정이므로 애초부터 확률이 높은 게임일 수가 없었다. '극장 개봉 화제작'이니 하는 것들은 이미 관객들로부터 검증을 받은 영화이니니만치 어느 정도 믿고 선택할 수 있지만, 그마저도 사실 무조건 신뢰하고 들여놓을 수는 없었다.-79쪽

영화 관객과 비디오 관객은 같지가 않은 것이다. 연인끼리거나 혹은 뜻 맞는 친구와 더불어 모처럼 뭉클한 감동에 사로잡히고 싶어 찾아가는 게 영화관이라면, 비디오는 방에서 혼자 뒹굴뒹굴 시간 죽이기 위하여 보는 경우가 태반이기 때문이다. -79쪽

자켓 표면의 한정된 정보들을 최대한 다양하게 조합하고 섬세하게 유추해 보아야 하는 그 일은 사실 상당한 논리적 분석력이 요구되는 과정이다. 게다가 그 과정은 영업사원 앞에서 테이프를 들여다보는 1분여의 짧은 시간에 즉발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아무튼 그렇게 되면, 어느 문구가 과장되어 있고 어느 문구가 영화의 핵심인지, 요약 줄거리에 생략된 내용은 대충 어떤 것인지, 캡춰된 몇 개 화면은 영화의 어느 장면과 맞닿아 있는 것인지가 얼추 그려지게 되고, 그러면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전개 속도, 주인공의 이미지와 조연급 인물의 역할까지가 선하게 잡혀온다. -80쪽

사람들은 신간이 들어오면 귀신처럼 집어든다. 어떤 사람은 아예 신간이 아니면 보지 않는다. 그렇다고 예전에 나온 모든 비디오를 다 본 것도 아니면서 그렇다. 올 때마다 신간이 적다고 투덜거리는 게 안쓰러워서(정말 안쓰러웠다)내가 모처럼 마음 먹고 그 사람이 좋아할 만한 비디오 한 편을 추천해 주자 사내는 대뜸 고개를 저으며 심드렁하니 대꾸했다. "이거 오래 된 거 잖아요?" 마치 쓸모없는 골동품이라도 대하는 태도였다. "영화라는 게 시간 지난다고 삭는 거 아니잖아요?아주 오래된 거라면 지금 취향하고 안 맞을 수도 있지만 이건 작년에 출시된 거예요. 재미 있으니까 한 번 믿고 봐 보세요." "에이, 그래도 지난 영화는 어쩐지.. 새로 나오는 것도 얼마든지 많은데 굳이 한물 간 영화 다시 볼 필요는 없잖아요."-81쪽

에로물 일색이다. 방화 진열대에 서는 고객은 대개가 에로물만 찾으니 어쩔 수 없다. 방화 중에도 괜찮은 영화가 많은데 그런 건 영화관에서나 팔린다. [길소뜸],[남부군],[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등 몇 편은 내가 비디오 가게 시작한 이후 아직 한번도 대여란에 입력된 적이 없다. (중략) 에로물이 아니고도 대여가 되려면 영화관을 들썩거리게 만든 영화라야만 한다. [장군의 아들],[결혼 이야기],[서편제],[투캅스]...이 정도면 어지간한 외화쯤 우습게 뛰어 넘는 대박이 되는 것이지만, 그 밖에는(142) [전국구],[시라소니] 등의 호쾌한 액션물이나 되어야 가까스로 본전에 접근한다.-142,143쪽

"처음이냐고 물어보고, 처음일 경우엔 꼭 주민번호를 받아 놔야 돼. 그리고 신프로 빌려가는 사람에게는 대여 기간이 1박2일이라는 걸 환기시켜 주고, 반납 들어온 테이프도 번호는 꼭 적어 나야 돼. 혹시 영업 사원이 테이프 가져오면 일단 다 받아 놔, 비닐은 뜯지 말고, 그리고.."-162쪽

무슨 내용이든 좋다고 했으니 그저 영화 이야기나 할까 합니다. 지금 제 삶의 언저리엔 그것뿐이니까요. 말하고 보니 자신이 꼭 무슨 영화인이라도 되는 것 같군요. 하기야 비디오 가게 주인인들 영화인이라고 못할 것도 없겠지요. 비디오 협회에서도 그러더군요. 우리는 문화 예술 종사자라고.-200쪽

"비디오 가게지요? 테이프가 기계 속에 들어가서 나오질 않네요. 어떡해야 되지요?" 나는 이름을 물어보고 나서 그대로 놔 두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컴퓨터의 고객 명단으로 무슨 테이프를 빌려갔는가 확인해 보았다. 한창 잘 나가는 테이프였다. 주소를 보았더니 가게에서 멀지 않았다. 마침 한가한 시간이니 가서 테이프를 회수해 오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작은 드라이버 하나를 챙겨 가게를 나섰다. -182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재봉(1993). 하재봉의 비디오천국. 우리문학사.   

10쪽 

아직도 이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나는 진정으로 권하고 싶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캄캄하게 불을 켜놓고, 차가운 얼음 주스나 혹은 진한 커피 한 잔을 타 들고, 천천히 <파리,텍사스>속으로 걸어들어가보라고. 일단 한 번 그 속으로 발을 들여놓기 시작하면, 그리하여 두 시간이 흐른 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끝나고 스태프와 캐스트의 명단이 서서히 올라오기 시작할 때면, 당신은 이제 다시는 방안의 불을 켤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은 이미 삶의 온갖 비밀과 그 치유할 수 없는 쓸쓸함을 알아채버렸기 때문이다.

71쪽 ~72쪽

(전략) 지금은 영화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는 한 친구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는 원래 6시간 필름인데, 일본/미국용으로 4시간으로 재편집을 해서 시장에 내놓았으며,국내에서 상영된 것은 흥행을 위해 그것을 다시 자른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또 충격을 받았다. 나는 그 친구에게서 4시간용으로 만들어진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비디오 테이프를 한 벌 복사해서 보았는데,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이번에는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극장에서 내가 본 영화는 전혀 다른 영화였다. 분명히 같은 영화였는데, 전혀 다른 영화였던 것이다. 아무리 영화를 수입해서 들여올 때 국내 관객들의 수준을 생각한다고 해도 이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물론 그 이전에, <사막의 라이온> 같은 대작 영화도 하루 5회 상영하기 위해 2시간 남짓으로 여지없이 칼질당한 전례가 있었지만, 이처럼 앞뒤가 제 마음대로 편집되어서 상영되지는 않았다. 이것은 상업적인 목적 이전에 영화라는 예술 장르에 대한 분명한 도전이고 중대한 침해라고 생각한다.  

극장 상영용 영화는, 본래의 필름을 2시간 40분 정도의 시간에 맞게 원본의 회상 장면 같은 것을 없애고 순서대로 배열한 것이었으며, 중요한 대목을 가위질한 것이었다. 내가 극장에서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몇가지 의문들이 비디오 테이프를 보면서 비로소 풀렸다. 줄거리가 이어지지 않았고, 꼭 나와야 될 인물들의 행적이 후반부에 묘연해지는 것(예를 들어 로버트 드니로의 애인이었다가 나중에 제임스 우즈의 정부가)(71) 되는 데보라의 행적)도 실마리가 풀렸다. 지금 시중에 나와 있는 것은 다행히 240분으로 된, 원본 영화이다. 그런 점에서 비디오는 극장 상영 시간으로 생각하고 흥행을 걱정해야 되는 영화적 특성에서 얼마만큼 자유로울 수가 있으며, 그것 또한 비디오 테이프의 장점이라고 볼 수 있다.  

78쪽, 80쪽 

우리 시대가 보유하고 있는 가장 뛰어난 영화 작가중의 한 사람인(78)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작품이, 드디어 비디오를 통해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된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사건이다. (이 작품이 일반 비디오숍에 과연 몇 개나 진열될 수 있을까? 싸구려 중국 영화와 3류 에로물,폭력물 사이에서 이처럼 수준 높은 영화가 버티기란 정말 힘들다. 영세적 규모와 한정된 주민을 대상으로 하는 지역 비디오숍에서, 다양한 특징을 지닌 고객을 대상으로 하는 대규모 비디오 체인점으로 현재의 비디오 시장은 점차 변모되어가야 한다. 그것만이 비디오를 영화의 하위 개념으로 종속시키지 않고 독자적인 비디오 문화를 싹틔울 수 있는 방법이다. 오락물 비디오에서 일반 교양, 다큐멘터리, 아트 비디오로 관심이 옮겨지기까지는 물론 지난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미리부터 포기하는 순간,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자극적인 쾌락과 향락에 맡겨버리는 것이 된다.) 

162쪽 ,164쪽

비디오는 나에게 무엇인가? 마그네틱 테이프로 옮겨진 영화를 시청하기 위한 단순한 매개물에 불과한 것인가? 내가 비디오와 연결된 TV 모니터를 통해 보는 거슨, TV방송국에서 제작한 드라마나 쇼 대신, 극장에서 상영되었던 잔혹한 액션물이나 예술이란 이름으로 포장된 저급 포르노 필름이 아닌가? 나는 비디오를, 재생 영화를 보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 것 이외에 또 무엇이 있나? 내가, 롯셀리니 감독의 <칼리큘라>를 이야기하면서 비디오의 사용에 대한 의문을 꺼내는 이유는, 그것에 대한 나의 개인적 경험이 <칼리큘라>와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현재 정품으로 비디오숍에 배급되어 있는 <칼리큘라>의 러닝 타임은 104분. 그러나 그것은 원본에서 40분 정도 잘려나간 것이다. 다행이라면 기본 줄거리는 그럭저럭 연결된다는 것이다. 나는 이 작품을 소위 비품으로 보았다. 87년의 일이다. 내가 단골로 다니던 가게에서는, 비품을 별도로 라면박스 속에 숨겨놓고 빌려주고 있었는데(지금은 철저한 단속으로 비품이나 불법 복제가 거의 사라졌지만), 그 중에서도 포르노 테이프는 제목을 붉은 글씨로 써놓아 쉽게 구별이 되도록 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나는  붉은 글씨 속에서 CALICULA라는 글자를 발견하였다. 포르노 테이프를 보지 않는 나였지만, 카뮈의 인상 깊은 동(162)희곡을 기억하고 있던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빌려와서 그것을 보았고, 곧 엄청난 충격에 사로잡혀버렸다.  

나는 지금도, 내가 지금까지 본 어떤 비디오 테이프보다, 당시 비품으로 보았던 <칼리큘라>가 내 영혼에 깊은 울림을 주었다고 확신한다. 그런 점에서 모든 검열은 사라져야 한다. 정품으로 나와 있는 테이프에는, 충격적인 그룹 섹스나 수백 명의 성기가 거리낌없이 노출되는 정사 장면, 얼굴만 남기고 땅 속에 몸을 묻어놓고 칼로 목을 베는 잔혹한 살해 장면 등 다 잘려져 있지만, 그러한 장면들은 삶의 본질적 의미를 탐구해가는 깊이 있는 주제 아래 계산된 예술적 영상들인 것이다.  

 203쪽 -204쪽

나는 비디오 중독자다. 방안에서 이것저것 장난지차 더 이상 나를 자극하는 것이 없을 때, '비디오나 빌려볼까?' 생각한다. 내가 아는 어떤 여자는 스트레스가 쌓일 때, 비디오를 빌려본다는 것이다. 하룻밤에 세 개 정도는 보통이다. 휴일에는 일곱 개까지 '때린' 적도 있다고 했다. 그래야 스트레스가 풀린다는 것이다. 신경통이 있을 때도 마찬가지란다. 그렇다면, 비디오 테이프는 현대판 만병 통치약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슬리퍼를 끌고 집 나온 개처럼 어슬렁거리며 집 앞의 비디오 가게에 나가면, 수천 개의 비디오 테이프가 화려한 사각 상자에 갇혀 빼곡히 꽂혀 있다. 어떤 녀석들은 눈을 뱀처럼 뜨고 나를 노려보기도 한다. 나는 사열대 앞을 지나가는 장군처럼 그들을 일벌하다가 하나를 뽑아든다. 집에 돌아와서 비디오테이프의 직사각형 몸체를 들고 VCR 안으로 집어넣는 순간의 쾌감은, 섹스보다 뛰어나다. 가볍게 녀석의 몸을 손끝으로 밀면, 검은 기계는 그것을 삼킨다. 내 눈앞에서 비디오 테(203) 이프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