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큰 일'을 볼 때, 변을 확인하고 물을 내리는 편이다. 어릴 적부터 그런 습관이 들어서, 어른이 되어도 잘 고쳐지지 않는다.그러다보니 하루에 몇 번은 똥의 모습을 본다. 문득 똥과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진다. 밥의 미래는 다양하겠지만, 주로 '나'라는 놈을 통해 '똥'이 될 운명에 처한다. 내 입에 들어가기 전, 밥은 세상을 살아가는 누구나가 원하는 존재지만, 정작 내 몸에 들어가면, '밥'은 세상 사람들이 가장 기피하는 존재로 변해가는 것이다. 그것이 '똥'이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 똥보다는 밥을 더 가치있게 생각한다. 삶을 말풍선으로 그려본다면, 우리는 그 '삶'을 위해 말풍선 안에 밥을 채워야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살기 위해 '똥'을 그리워하진 않는다. 똥은 피하고 싶은 존재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에게 '똥보다 못한 놈'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농담 수준으로 받아들여질 수는 없다. 그것은 사회를 사는 사람이라면, 모욕이다. 많은 이들이 이 모욕을 듣지 않기 위해서 살고 있다 해도 과장된 말은 아닐 것이다.   



 

 

 

 

 

 

 

  

# 밥상을 엎어버리다  - 더 불쌍한 똥이 되기 위해 

 

하지만 스스로를 똥이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최근 고다 요시이에의 만화 <자학의 시>를 보면서 밥과 똥의 생각을 더 깊이 해봤다. <자학의 시>에는 날마다 밥상을 엎어버리는 재주(?)가 있는 남편 이사오가 등장한다. 그는 소위 "밥먹을 가치도 없는 놈"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한 사람으로 묘사된다. 쓰레기도 제대로 못버리고, 아내 유키에가 어렵게 벌어온 돈을 경마와 빠진꼬,술에 다 써버리는 특기(?)만 있는 남자에게 남은 건, 남에게 받는 스트레스 집에선 받고 싶지 않다는 이상한 '자존심'뿐이다. '밥이라도 먹을 가치가 있는 놈"과 "똥보다 못한 놈"의 사이에서, '자학'이 남편 이사오와 아내 유키에에게 스며든다. 이사오의 '신경질 놀이'인 밥상 뒤엎기는 단순히 아내 이사오에게 부리는 신경질이라곤 볼 수 없다. 만화를 침착하게 보다 보면, 이사오는 결국 스스로에게 "내가 이 세상에 살 가치가 있는가"를 매번 밥상을 뒤엎어버림으로써 묻는다는 느낌을 준다. 결국 밥상을 뒤엎으면서 그는 '밥이라도 먹을 가치가 있는 놈"이라는 걸 스스로 부인하고 만다. '자학'인 것이다. 자신이 하고 다니는 짓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아내 유키에가 정성스럽게 차려준 밥상에 대한 분노는 더 차갑다. 만약 아내 유키에가 이사오의 이런 짓에 분노로 맞대응했다면, 이 만화는 재미없는 홈드라마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내 유키에는 밥상이 매번 뒤엎어져도 그것에 화를 내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는 이사오가 자신을 더욱 사랑해주길 원한다. 이웃들이 남편과 헤어지라고 해도, 또 그 어떤 험담을 해도, 유키에는 그것에 대해 "맞아요, 맞아,못살아"하지 않는다. 그녀의 자비로움은 이사오의 자학 강도를 더 세게 보이도록 한다. 

밥상을 뒤엎으면서, 이사오는 밥을 먹을 권리를 포기한다. (물론 그 이후의 장면은 나오지 않지만), 그는 밥상을 엎어버리면서 똥을 쌀 권리를 유보한다. "똥보다 못한 놈"이라는 소리를 집에서라도 듣기 싫어서. 그렇게 그는 스스로의 생존을 '짠하게' 보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의 주위를 휘감는 건 "더 불쌍한 똥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확실한 미래다. 





 

 

 

 

 

 

# 자학과 나르시시즘  - 맹정현의 '마조히즘적 나르시시즘, 경쟁적 나르시시즘, 냉소적 나르시시즘' 

<자학의 시>를 통해 밥과 똥, 그리고 나의 관계를 깊이 생각해볼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는 어떤 텍스트와의 만남 때문이었다. 문학동네 2010년 여름호에서 맹정현 선생이 기고한 <마조히즘적 나르시시즘, 경쟁적 나르시시즘, 냉소적 나르시시즘>이 그 주인공이다.   

 
맹정현 선생은 오늘날 주체란 무엇인가라는 기획 속에서 '나르시시즘'의 유형과 한국 사회의 '오늘'을 연결지어 이야기한다. '나르시시즘'은 자학과 별 관련이 없어 보이지만, 아니다. 오히려 '자학'은 생존과 자살 가운데, 사는 자가 취하는 우리 시대의 가장 나르시시즘적인 태도일지 모른다. 자살은 할 수 없는(왠지 모르게 삶에 대한 그런 식의 종말은 스스로가  아깝다고 생각하는 듯한, 더 나아가 그런 식의 종말을 두려워하는 주체) 그러나, 생존에 대해 그렇게 큰 확신도 없는 주체. 이도 저도 아닌 상황에서 자학은 자신의 삶을 유지시켜주는 부정의 에너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자학에 중독되었을 때, 그것의 결말은 죽음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자학은 더 괴로운 결말을 보여준다. 이 삶에 살아가긴 하지만, 그 삶에 대하여 힘이 생기지 않는 현실, 그 체감. 자학의 종말은 무기력으로 치닫는다. <자학의 시>에서 남편 이사오는 그것을 실감나게 보여주는 캐릭터다.  

 

하지만 스스로를 요구의 대상으로 만들면서 타자를 배제하는 냉소적 대상화는 그나마 이 사회를 적응의 대상으로 바라보면서 그 속에 편입하고자 애쓰는 자들의 몫이 될 것이다. 그러한 가능성이 아직 열려 있지 않은 더 어린 세대,즉 사회 속으로의 통합에 대한 열망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직 감을 잡(480)지 못한 세대에게 주어진 것은 바로 남근에서 찌꺼기로 추락하면서 발생하는 현기증을 타자에게 돌리는 것이다.바로 여기서 '무리짓기'와 '따돌리기'가 유래한다.자신이 똥으로 추락하는 체험을 잊기 위해 무리를 지으면서 타자를,자신의 희생양을 똥으로 추락시키는 것이다. – 480,481쪽



- 아내 유키에가 보여주는 '복합적 나르시시즘'

 

아내 유키에는 매번 웃는 모습,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며 남편과는 다른 '건강함'을 영위하는 듯한 캐릭터이지만, 사실 <자학의 시 2>에서 공개된 유키에의 과거를 보면, 그녀의 웃음 자체가 삶을 향한 건강함이라기보단, '자학'의 일종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의 남편과 똑같은 모습을 한 아버지. 날마다 찾아오는 사채꾼에 겁이 나지만, 아버지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딸이 벌어온 돈을 도박과 음주에 써버린다. 학교에서 그녀는 왕따다. 가난이 만든 왕따. 그는 부끄러움과 함께 외로움을 느낀다. 친구들은 잘 놀아주지도 않고, 그렇기때문에 그녀의 이타심은 매번 다른 친구들의 이용 수준에서 그친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친구들을 원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에게 친구들의 사랑이 이렇게라도 더 다가왔으면 한다. 그리고 "내가 이 정도 했는데, 이제는 날 받아주겠지?"라는 식의 물음 섞인 행위를 시도한다. 그러나, 여전히 그 행위는 답없이 혹은 차가운 상태의 답으로 다가온다. '인정'해주길 바라는 의도에서 던진 질문이 '비-인정'으로 되돌아올 때 나타나는 '마조히즘'의 나르시시즘'. 맹정현이 말한 '마조히즘적 나르시시즘'은 여기서 돌출된다. "이제 난 똥이 아니겠지?"라고 물었을 때, 주체는 타자로부터 "그래 이제 너는 똥이 아니야"라는 답을 듣길 바라는 상태. 그러나 정작 타자는 "넌 아직 똥이야"라고 말하면, 주체는 스스로를 예외의 자리에 놓는다. 그래 "나는 똥이야"라는 위치로. (물론 맹정현 선생이 본문에서 언급한 마조히즘적 나르시시즘은 한국의 민족성에 관한 언급에 밀착된 개념이기 때문에 내가 생각하는 마조히즘적 나르시시즘과는 차이가 있다)

주체가 스스로를 예외의 상태로 위치지었을 때, 여기서 발생하는 나르시시즘은 우리에게 애잔함을 준다. 그리고 이러한 나르시시즘은 '울음의 의미'를 띤 웃음으로 더 극화된다. 학급에서 '왕따'가 된 순간, 유키에가 선망하는 타자 후지사와는 유키에에 비해 모든 것이 뛰어난 여학우로 묘사된다. 피아노도 잘 치고, 사교성도 좋고, 얼굴도 예쁜 후지사와를 보면서, 유키에는 스스로의 비극을 극화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자학의 시'가 극명해지는 순간은, 친구들이 자신과 놀아주지 않을 때, 그리고 후지사와가 웃으면서 그녀의 손을 잡고 화장실에 가자고 할 때이다. 유키에는 후지사와가 쉬는 시간에 자신의 손을 잡고 화장실을 가자고 할 때, '거짓-볼일'을 만든다. 오줌 /똥이 나오지 않지만, 그녀는 타자인 후지사와가 그녀를 '인정'해주고 있다는 생각에, 거짓으로 '볼 일'을 보는 척한다. '거짓-오줌/똥'의 존재. 그녀는 여기서 강렬한 자학의 시를 쓴다. 이사오가 밥상을 엎어버리면서 '똥보다 못한 놈'이라는 자조를 불쌍하게 내비치며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확인한다면, 유키에는 거짓 오줌/ 똥, 즉 오줌과 똥이 나오지 않지만, 나온 것처럼 시늉을 함으로써,   극한의 자학을 선보인다.  더 불쌍한 똥이 된 유키에.

 

 

# 윤리와 원한 ....(그리고 자학)

어느새 우리 삶에 익숙해진 무리짓기와 따돌리기 속에서, 우리가 놓치고 사는 것은 밥과 똥, 그리고 그 두 존재의 변화를 책임지는 인간의 윤리일 것이다. 윤리가 주는 사유의 선택지는 이제 어긋난 선과 악의 구분법으로만 작동하는 듯하다. 인터넷에서 매번 일어나는 병리로서의 언어들, 그것의 이합집산과 합종연횡,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작별하며, 윤리의 자장 안에서 합리화를 외치는 사람들. 결국 그들이 외면하는 건 '똥을 잊기 위해 사투하는 자신'일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 "똥보다 못한 놈/년"이라고 자신있게 외칠 때를 놓칠 세라, '자학의 공연장'을 설치해주기 위해 애를 쓴다. '똥이 되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는 그/그녀는 스스로가 '똥이 될지도 모른다'는 현실에 날마다 폭발물을 설치하려 한다. 누군가 알아서 '똥이 되어준다'면.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가장 즐거워하는 소망이 되었다. 그러나, 그런 소망이 증가할수록, 늘어나는 건 나는 그렇지 않아라고 말하는 순간 양산되는 자학- 나르시시즘이다. 해석되지 않은 상황에서 자학은 나르시시즘을 볼 수 없고, 나르시시즘은 자학을 볼 수 없기에, "나는 똥이지 않아"라는 가녀린 나르시시즘(타인에게 강조하는 그 명령과 같은)이 또 다른 자학과 이어지는 고리의 끈끈함은 인간에게 남은 윤리의 굴레이다. 우리는 똥을 잊으려 할수록, 똥이 될 수도 있다는 그 두려움을 스스로 누적시키고 있는 건 아닐까. 그것에 대한 회피와 부정이 우리 시대의 안전지대에 들어가기 위한 쾌락이 되었다는 것은 여전히 씁쓸하고 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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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 63호 - 2010.여름
문학동네 편집부 엮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품절


나르시시즘이 '민족'이 아닌 '주체'라는 이름으로 집단적 현상을 바라볼 수 있는 최소한의 요소라면,우리는 또한 이것이 다양한 방식으로 엮이는 매듭을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필자의 가정은 그중에서도 각 세대의 정체성이 구성되는 방식 속에서 특정한 나르시시즘이 발현되며,그리고 그것이 다른 세대의 나르시시즘과 독특한 매듭을 형성하는 것에 우리의 '민족성'의 이면이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467쪽

사실 이러한 인정에 대한 요구는 상상적인 차원에 속한 나르시시즘적인 것이며, 그런 만큼 타자의 시각이 그러한 나르시시즘을 지탱해주지 못하게 되면 그 요구는 타자의 시선에 대한 무관심으로 쉽게 변질되며,그런 한에서 그들은 때때로 타자들과 양립할 수 없는 민족의 고유성을 내세워 자신을 '세계 시민'으로부터 예외의 자리에 놓기 마련이다. 타자에게 인정을 갈구하지만, 그렇다고 그러한 인정을 받지 못한 것에 실망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실망은 그 주체를 여전히 타자에 종속된 주체, 이타적 주체로 남겨놓기 때문이다.반면 여기서 우리가 목도하게 되는 것은 묻는 순간, 상대의 호응이 없으면 곧바로 마음을 닫고 피해자적 태도로 변질되는 특이한 입장이다. "우리는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무엇'이다."그리고 여기서 상실감으로 인한 자의식이 피해자적 위치에서 공고해진 민족주의와 중첩된다."우리는 너희들에게 상처를 입은 '무엇'이다." 바로 이것이 자신의 눈과환상을 통해서가 아니고는 타자를 생각하지 못했던 저 서구인들의 '오리엔탈리즘'의 대척점-470쪽

에 있는,서구인들을 보는 우리의 태도, 즉 타자가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에(470)관심이 있는 듯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신에게 도취되어 있던 우리의 '마조히즘적 나르시시즘'이다.-470,471쪽

'마조히즘적 나르시시즘'이 현재 우리 사회의 시대정신의 가장 밑바탕,다시 말해 '현재 속의 과거'를 이루는 것이라면,그보다 더 현재적인 세대,지금 사회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는 소위 386과 그 언저리에 있는 '현 세대'에서 고유하게 나타나는 것은 바로 '경쟁적 나르시시즘'이다. 이들의 특징을 한마디로 요약해보자면,이들은 앞선 세대에 비해 정체성의 문제에서 비교적 자유로우며(다시 말해 자신이 누구인지를 물을 필요가 없으며), 그런 만큼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세대이다.오히려 이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전 세대가 집착했던 것들이 현 시점에 한계로 작동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즉 전 세대로부터 지속적으로 요청되어 온 상상적 차원에서의 인정과 초자아적 아버지의 옹립, 경제의 재건 등을 통한 나(우리)의 확립이 궁극적으로는 나의 자유를 희생한 대가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아비의 세대가 기꺼이 자신을 봉헌하는 것으로부터 정체성의 확립을 추구했다면,이제 그 자식 세대,어느 정도는 상실의식에서 벗어나 있는 세대가 벗어나고자 했던 것은 바로 전 세대가 자청했던 권위주의,즉 결손된 상징화의 틈새를 뚫고 드러난 잔혹한 초자아적 아-471쪽

버지의 우상일 것이다.아비의 우상을 파괴하고,('세습'이란 개념과 분리될 수 없는)계급적인 부조리를 척결하며 민주주의의 완성에 몰두한 이들은,겉으로 볼 때 정치적으로 전 세대에 비해 급진적이고 합리적인 것처럼 보인다.하지만 수직적인 차원의 부조리를 척결하기 위해 이들이 치러야 할 대가는 바로 수평적 차원의 부조리이다.즉 애석하게도 아버지의 우상 파괴,초자아적 아버지를 타도하기 위해 하나가 되었던 형제애들을 기다리는 것은 '평등'과 '형제애'가 아닌 상상적 '경쟁'이다.-471쪽

실제로 현 세대에 의해 모든 분야에서 이루어진 권위주의의 청산은 경쟁 사회로의 내몰림과 분리될 수 없다.이것을 단순히 희소성의 원칙,경제의 원칙으로만 설명할 수 있을까?우리가 생존의 문제에 있어 과거보다 덜 자유롭고 그렇기 때문에 더 경쟁해야 한다는 식의 논리는 타당하지 않은 듯 보인다.이러한 관점은 어떻게 해서 정치적인 차원에서 급진적이고 합리적이었던 이들의 열망이 궁극적으로는,특히 감수성의 차원에서는 전 세대만큼이나 혹은 더 가혹한 방식으로 보수성을 띨 수밖에 없는지를,다시 말해 어째서 수직적인 불평등에는 민감하지만,수평적인 차원의 부조리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무관심한지를 설명해주지 못한다. -472쪽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스펙형 인간들은 철저하게 스스로를 대상화하지만,'나는 타자를 위한 대상입니다'로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했던 구세대의 마조히즘적 나르시시즘과는 달리,자신이 봉사하는 타자의 일관성을 믿지 않는다는 점이다(이것이 또한 학벌사회와 스펙사회이 다른 점이기도 하다).즉 스펙은 자신이 요구되는 대상이기를 바란다는 것을 함축하지만,그의 영혼은 자신의 구매자인 기업이나 조국을 향해 있지 않다. 팔리기 위해 기꺼이 준비된 상품이 된 인간은 더이상 기업을 위해 봉사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대의 없는 어떤 냉소적 대상화가 있을 뿐이다.-480쪽

하지만 스스로를 요구의 대상으로 만들면서 타자를 배제하는 냉소적 대상화는 그나마 이 사회를 적응의 대상으로 바라보면서 그 속에 편입하고자 애쓰는 자들의 몫이 될 것이다. 그러한 가능성이 아직 열려 있지 않은 더 어린 세대,즉 사회 속으로의 통합에 대한 열망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직 감을 잡(480)지 못한 세대에게 주어진 것은 바로 남근에서 찌꺼기로 추락하면서 발생하는 현기증을 타자에게 돌리는 것이다.바로 여기서 '무리짓기'와 '따돌리기'가 유래한다.자신이 똥으로 추락하는 체험을 잊기 위해 무리를 지으면서 타자를,자신의 희생양을 똥으로 추락시키는 것이다.-480,4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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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 - 다문화제국의 새로운 통치전략 카이로스총서 16
웬디 브라운 지음, 이승철 옮김 / 갈무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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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이 내세우는 중립성의 신화가,실제로는 부르주아 프로테스탄트 규범에 깊숙이 매몰되어 있음은 물론이다.세속주의 이외에 미국 내외의 관용 담론을 연결시켜주는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자유주의 관용 담론의 중핵에 위치한 "개인의 도덕적 자율성"이라는 관념이다.도덕적 자율성의 관념은 미국의 안팎 모두에서 관용할 수 있는 주체와 관용 불가능한 주체를 나누는 기준이 되며,자유주의와 문명 담론을 은밀히 결합시킨다.-27쪽

근대 초기에 피비린내 나는 종교 전쟁을 종결시키기 위한 노력에서부터 오늘날 인종주의적 법률의 입법화를 저지하는 운동에 이르기까지,관용 담론이 때로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하지만 역으로 관용에 대한 호소가 반드시 폭력과 종속을 제한하려는 목적을 가졌던 것도 아니다.예컨대, 오늘날 동성애자에 대한 법적 평등의 완전한 실현 대신에 이들에 대한 관용에 호소하는 것은,동성애자를 탄압하는 것에 대항하여 이들에 대한 관용을 주장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후자가 관용을 잔인함과 폭력,공적인 배제와 대립시키는 데 반해, 전자는 관용과 평등을 대립시키년서,관용을 통해 동성애자의 종속적인 지위를 계속 유지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33쪽

정치적 담론으로서의 관용은, 불쾌함을 유발하는 것들에 대한 행동이나 발언을 참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그것은 사회적,정치적,종교적,문화적 규범들을 부과하는 행위이며,관용의 대상이 되는 이들을 관용을 베푸는 이들에 비해 열등하고 주변적이며 비정상적인 이들로 표지하는 일인 동시에,상대가 관용의 한계를 넘어섰다고 판단될 경우 부과할 수 있는 폭력 행위를 사전에 정당화하는 기제이다.더 나아가 정치적 담론으로서 관용은 단순히 이미 존재하는 정체성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정체성의 생산 그 자체에 관여하며,문화를 종족 혹은 인종과 뒤섞고,믿음과 신념의 문제를 유전적 형질과 결합시키는 데 일조한다.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정치적 담론으로서의 관용은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탈정치화함으로써,자연스럽게 정체성 그 자체를 관용의 대상으로 구성한다.-38쪽

탈정치화의 공통된 방식 중 하나는,정치 현상을 이해하는 데 있(40)어, 그 현상이 등장하게 된 역사적 배경과 그 현상을 조건 짓는 권력의 문제를 배제하는 것이다.-40,41쪽

두 번째 탈정치화 방식도 존재한다.이는 정치적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하면서,정치적 언어를 감상적이고 개인적인 언어들로 대체해버리는 방식이다.정의와 평등의 문제가 관용으로 대체될 때,타자에 대한 정의의 문제가 타자에 대한 감수성과 존중의 문제로 대체될 때, 역사적 배경을 가진 고통들이 단순히 차이와 공격성의 문제로 환원되고 그 고통이 개인의 감정의 문제로 여겨질 때, 정치적 투쟁과 변혁의 문제는 특정한 행동과 태도,인정의 문제가 되어 버린다. 물론 이러한 접근도 나름의 의미를 가지긴 하겠지만,불평등과 배제 같은 정치적 문제의 해결책으로 관용을 제시하는 것은,정치적으로 생산된 차이를 물화하는 것일 뿐더러, 정의의 추구를 단순한 감수성 훈련 혹은 로티가 태도의 개선이라 이름붙인 해결책으로 환원해버리는 것이다. 그 결과 정의의 추구는 이제 태도와 행실을 치료하고 개선하는 문제가 되어 버린다.-42쪽

정리하자면 오늘날 "정치의 문화화"는 비자유주의적인 정치적 삶 전체를 소위 문화의 문제로 환원시키며,이와 동시에 자유민주주의 제도를 문화와 무관한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이러한 논리 속에서,관용은 자유민주주의 원리의 일부로서 문화적 영역-즉, 섹슈얼리티에서 종족성에(53)이르기까지 모든 본질화된 정체성들을 포괄하는 영역이자 현대 자유주의 체제내에서 차이의 문제를 담당하는 영역-에 적용된다.즉, 관용은("차이"와 관련되기에 비자유주의적이며, "본질적이기에"비정치적이라고 여겨지는)문화적 정체성과 이러한 정체성 간의 충돌을 규제하기 위한 자유민주주의의 도구로 기능한다.이 과정에서 관용은 이러한 정체성 주장 및 정체성 간의 충돌을 탈정치화하는 동시에,스스로를 단지 양심의 자유나 정체성의 자유를 보충하는 도구로,즉 어떤 규범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자유주의적 통치의 도구로 내세우는 것이다. -53,54쪽

관용은 그 대상이 되는 요소를 주인 안으로 편입시키는 동시에, 그 대상의 타자성otherness을 계속 유지시킨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한 타자성 관리 방식이다.바로 이 점이 관용을 한편으로는 동화,흡수와 다른 한편으(62)로는 배제,부정과 구분시켜준다.관용의 대상은 전체 내부로 편입된 후에도 여전히 표지된marked채 남아 있다.관용의 대상은 주인과 완전히 하나가 되거나 주인 속으로 용해되지 않기 때문에,이것이 가진 위협적이고 이질적인 특성은,주인의 신체 내부에서 계속 유지된다.-62,63쪽

관용이 차이에 대한 적대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을 관리할 뿐인 한, 관용은 각종 심리적 문제의 원인이 된다.관용이 무엇에든 적용되는 이데올로기이자 통치의 요소가 된 오늘날,이 심리적 문제는 그 어느 때보다도 명백한 사회적 효과를 가진다.오늘날 관용의 대상이라 여겨지는 이들은 주변적 대상으로 표지됨과 함께, 시민과 비시민 혹은 인간과 비인간을 구분하는 경계에 자리 잡게 된다.이와는 반대로,관용을 실천하도록 종용받는 이들은,시민윤리와 평화,진보의 이름하에,적개심과 분노를 억눌러야만 한다.-64쪽

관용은 그 대상이 되는 이들에게 공적 영역에서 그들의 "차이"를 드러내지 말 것을 요구한다. 관용의 대상이 되는 이들은, 사적이고 탈정치화된 방식으로 자신들의 "차이"를 드러내는 한에서만,즉 이를 정치적 주장으로 연결시키지 않는 한에서만,관용 가능한 대상이 된다. 관용 대상에 대한 이러한 요구는, 정치화된 정체성이면 추구하기 마련인 인식론적,정치적 입장과 충돌할 뿐 아니라,"차이"를 구성하는 사회적 권력에 대해서는 침묵하고,비표지된 문화,종족,인종,섹슈얼리티의 헤게모니를 강화하는 효과를 낳는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계층화되고 불평등한 사회 질서 속에서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정치적 권리와 원칙이 작동하는 전형적인 방식이 되풀이 되는 것이다. -88쪽

근대적 주체 형성은,한편으로는 표지된 주체의 차이를 존재론화하고,다른 한편으로는 이 표지된 주체가 유사한 주체와 맺고 있는 관계를 명확히 하는 과정을 통해 진행되었다.그런데 우리는 이 과정에서,민족-국가의 추상적인 시민권 담론이,여타의 다양한 주체 생산 담론들-즉 기독교인,부르주아,백인,이성애적 규범으로부터 일탈한 존재들을 분류하고 규제하는 담론들-과 긴밀히 결합해 작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역사적으로 배제되어 온 이들을 추상적 시민권 담론을 통해 내부로 편입시키는 과정-다시 말해, 배제된 자들의 일탈적 성격을 지우도록 강요하는 과정-은, 곧바로 이러한 지위를 재기입하기 위한 좀 더 강력해진 규제와 표지의 방식을 만들어 냈다. -124쪽

타자의 종속과 비체화abjection가 이러한 종속의 사사화나 경제 영역에서의 종속의 제도화를 통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을 때, 즉 더욱 완전한 평등이 시급한 문제가 되는 곳에서,관용은 종속과 배제의 역사를 유지하기 위해 소환된다.관용은 헤게모니적 규범이 일탈적 타자를 손쉽게 식민화하거나 내부화할 수 없을 때,혹은 직접적 종속이나 편입보다는 새로운 주변화와 조절의 테크닉을 통해서만 지배를 유지할 수 있을 때, 자유민주주의 사회 내부로 호출된다.따라서 오늘날 대중 정치 담론 속에서,이성애 여성은 평등의 후보자가 되는 반면, 레즈비언 여성은 관용의 대상이 된다.전자의 종속적 차이는 이성애적 사회 질서와 가족 질서에 의해 안전하게 보존될 수 있지만, 후자는 그럴 수 없기 때문-130쪽

푸코의 통치성 개념은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통치는 만약 조직되지 않는다면 그저 비생산적으로 남아 있었을,개인과 대중 그리고 초국적인 신체의 힘들을 이용하고 조직하는 과정을 포함한다.더 나아가 주체들의 욕구와 능력,욕망 역시 통치성에 의해 관리되고 지도된다.따라서 통치는 푸코가 "행위의 지도"라고 부른 것,즉 개인의 신체와 사회적 신체,정치적 신체의 행위를 지휘하고 지도하는 것과 관련된다.둘째,행위의 지도로서 통치성은,개인에서부터 인구,신체와 정신의 특정한 부분에서부터 윤리와 노동,시민적 실천에 이르기까지,다양한 지점을 통해 작동한다.셋째,통치성은 법이나 여타의 가시적인 권력에 한정되지 않으며,광범위하게 펼쳐진 비가시적 권력들을 통해 작동한다.푸코는 사목권력을 통치성의 이러한 특징을 보여부는 전형적인 예로 보았다.-140쪽

넷째,통치성은 일반적으로 정치권력이나 국가와 관련이 없다고 여겨지는 다양한 담론에 침투해,이러한 담론을 통해 작동한다.여기에는 범죄학,교육학,심리학,정신의학,인구학,의학에 이르는 다양한 과학 담론과 종교 담론,그리고 여타의 대중 담론이 포함된다.이와 같이 통치성은 집중화나 단일화,체계화에 기대는 것이 아(140)니라,근대 사회에 분산된 광범위한 권력과 지식을 통해 작동한다.-140,141쪽

정치적 갈등의 원인을 불관용에서 찾는 관용 담론은,불평등과 지배 같은 문제를 개인적인 편견과 증오의 문제로 환원해 버린다.이는 정치적인 문제를 개인화하고,그 원인을 특정한 태도의 문제로 돌려버리는 탈정치적 접근이다.개인과 그 태도가 갈등의 이유로 제시되자마자,권력의 문제는 시야에서 사라진다.이러한 관점에 따르면,다양한 사회적,경제적,정치적 문제의 원인은 편견을 가진 개인이고,관용적 개인은 이러한 문제의 해결책인 것이다.-233쪽

주체나 사회의 법칙이 문화와 종교에 의해 구성되는 사회는 이제 유기체적 사회와 동일시되며,자율적 개인의 등장은 이러한 문화와 종교의 영향력을 소멸시킬 것으로 간주된다.여기서 사실상 개인의 도덕적 자율성이란,바로 문화와 종교의 극복을 의미하는 것이다.그리고 이러한 극복 과정을 거친 자유주의 주체에게 문화란,먹을 거리,의복,음악,라이프스타일과 같은 것들일 뿐이다.과거 권력으로서의 문화는,이제 하나의 삶의 방식으로서의 문화로 대체된다.자유주의 사회에서 사적 공간이 "비정한 세계에 남은 단 하나의 안식처"가 된 것과 마찬가지로,개인을 억압하던 문화는 이제 개인의 즐거움과 안식의 원천으로 변화한다.과거 지배와 비합리성의 원천이었던 종교 역시, 이제 개인의 위안과 자기 충족,도덕적 지침을 얻기 위한 주체의 선택지 중 하나로 변형되어야 한다.-2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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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취생이라 가격에 민감하다. 그러다보니  간단하게 장을 본다 하더라도 대형 할인점을 가는 경우가 많다. 운동도 할 겸,이라고 핑계를 대지만, 우리 동네의 '불안지대'라고 불리는 그 위치에 조용히 자리 잡은 편의점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단골 편의점이 올해 초에 문을 닫고, 노부부가 욕심을 갖고 차린 편의점인데, 주인 아저씨의 표정은 고저가 크다. 너무 크게 사람들을 반가워해주거나, 때론 늦은 밤 술에 취해 벌건 목을 보여주면서 나오는 그 우울함의 큰 차이. 그것때문에 요즘은 돈을 더 주고서라도 '불안지대'에 자주 들린다. 이 곳이 불안지대라고 불리는 건 이유가 있다. 편의점이 위치한 그 곳이 우리 동네에서  가게가 문을 열고 닫는 주기를 가장 빨리 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오전에 할인마트에 들렀다가 아차 싶어, 나도 모르게 할인마트 봉지를 들고 편의점에서 물건을 하나 샀다. (소심한 사람들에겐 이 상황 참 곤욕이다. 어찌 보면 에티켓일 수도 있고, 어찌 보면 뭘 그런 것까지 신경쓰냐는 그 고민) 아저씨가 큰 웃음으로 반겨주길래, 이 아저씨 참 대인배구나 싶었더만, 텅텅 빈 가게에 라디오에 나오는 사연에 웃고 계셨다는 것을 눈치 채고선 미안해졌다.아저씨 냄새가 가게에 진득하게 남아 있는 걸 보니, 알바도 못 구하고, 혼자 밤을 샜나보다. 

 "라면 하나 더 살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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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 2010-07-26 0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그레이님의 소심함에 진한 동질감 느낍니다^^ 저희 동네에도 상황 동일합니다. 궁벽진 동네에 근래에 대형할인마트가 생겨서 온동네 사람들이 그리로 몰려가고 인적 끊긴 작은 수퍼 주인들의 침울한 표정을 대하노라면 -- 대형할인점 개업 허가 문제 같은 것은 시장 논리로 결정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무기라곤 자기 몸밖에 없는 사람과 최첨단 무기 즐비하게 가진 사람을 마주세우고 싸우라는 것이 공정하다는 게 지금의 시장 논리이지 뭐겠습니까. -- ...

얼그레이효과 2010-07-26 23:28   좋아요 0 | URL
다각도로 한 번 고민해봐야 할 문제인 것 같아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를 읽다가 요즘 공부하는 부분의 이론적 시선이 들어있는 것 같아서 옮겨 왔다.  

원문 :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890 

서동진 선생의 글이다.

 

동성애의 게이화

언제던가 괜찮은 남자는 다 애인이 있고 멋있는 남자는 죄다 게이라던가 하는 광고가 TV에 등장한 적이 있었다. 꽤 잘나가는 시사주간지에서 내게도 동성애자 남자친구가 있었다면 하는 이성애자 여성의 수다를 큼지막하게 싣기도 했다. 최근엔 연속극의 여제, 김수현의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를 두고 시끄럽다. 일전 통화했던 어느 언론사 문화부 기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동성애자가 안방극장을 점령”했기 때문이다. 보수적인 기독교 집단은 늘 그랬듯이 동성애를 조장하는 방송 프로그램을 내보냈다고 시청거부운동을 펼치는 등 야단법석이다. 그래서 지난 10년 동안 연례행사처럼 되풀이되는 ‘동성애자는 누구인가’를 묻고 알리는 대중매체의 기사나 프로그램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여기에 잠깐 토를 달자면 거기에서 들먹이는 동성애자란 당신들의 동성애자라는 것이다. 실은 대중문화 안에서 소비되는 동성애 정체성은 이성애자 사회가 지어낸 환상과 다름없다. 그렇다고 그것이 동성애자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허위라고 말할 일은 아니다. 그 환상은 동성애자 편에서도 참조하고 또 써먹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거두절미하고 말하자면 동성애, 그리고 동성애자란 것이 무엇인지는 동성애자 스스로가 대답의 열쇠를 가진 게 아니라는 것이다. 대중매체에서 흔히 ‘그들 자신의 목소리로’ 라는 이름으로 경청하는 동성애자의 목소리라고 해서 동성애와 동성애자의 진실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동성에 이끌린다거나 정서적 친밀감을 느낀다는 사실이 곧 동성애자라는 정체성에 속하거나 혹은 동성애자에 관한 진실을 가지고 있음을 보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동성애자 역시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스스로 배우고 익힌다. 그래서 동성애자가 가장 많이 묻는 질문이 ‘동성애자란 무엇인가’라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글로벌 게이?

 동성 간의 성애적 관계나 친밀한 감정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지는 전연 분명하지 않다. 별나게 동성사회적인(Homosocial) 한국에서 동성애란 정체성이 다른 사회와 동일하게 인식될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만무하다. 이를테면 게이란 정체성을 통해 자신을 동일시하며 동성애자 사회를 구축한 한국·대만·홍콩 같은 아시아 국가의 동성애자와 오랜 동성애적 하위 문화를 가지고 있던 일본, 그리고 ‘히즈라’(Hijra)나 ‘커토이’(Kathoey) 같은 흔히 ‘제3의 성’이라 부르는 성별 체계를 가진 인도·타이 같은 사회에서, 동성애란 말이 가리키는 것이 다를뿐더러 성별·성정체성·성행동 사이에 맺는 관계도 복잡하게 뒤얽혀 있다. 
 

놀랍게도 최근까지 성행동의 공간 안에서 서로 다른 성행동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특정한 사회적 성원으로 나누는 기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적어도 일부 서구 사회를 제외하면 일반적인 현상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이른바 ‘국제 성정치적 관계’라 부를 만한 것이 급격하게 변화하며 생겨난 현상이다. 이를테면 서구 사회에서 에이즈 위기와 관련해 폭발적으로 등장한 성정체성에 따른 역학적인 인구 분류는 동성애적 성행동을 단순히 성행동의 종류가 아니라 특정한 라이프 스타일(잦은 섹스 파트너 교체, 사우나를 비롯한 다양한 퍼블릭 섹스 공간의 발달 등)에 따라 살아가는 사회집단이 나타내는 행위 성향으로 보게 했다. 이는 에이즈와 관련한 의학적 캠페인은 물론 그와 관련한 다양한 정치적·문화적 매체를 통해 전세계에 확산됐다.

다음으로 동구권 붕괴 이후 종래의 사회적·정치적 운동을 대신하게 된 인권운동 역시 동성애 정체성이란 관점을 확장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른바 국제인권운동은 성적 영역 안에서 벌어지는 차별과 박해를 적극적으로 인권 이슈로 제기했다. 당연히 그 효과는 동성애 정체성의 세계화라고 부를 수 있는 현상이었다. 이는 동성 간 성행동이 취할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정체성을 인종이나 종족과 거의 다르지 않은 특정한 성적 공동체로 정의하는 특정 서구 사회의 정체성 담론을 유포시켰다. 성정체성에 따른 인권침해란 이름으로 우리는 모든 사회를 동일하게 인식하고 평가하게 된다. 따라서 이란, 아프가니스탄에서부터 미국과 스웨덴 같은 사회에 이르기까지 어느 사회에서나 동성애 정체성, 동성애자 사회가 있었던 듯한 생각에 이르게 된다. 이는 많은 나라에서 반발을 초래했다. 더불어 지금까지 무시되거나 그를 변별할 특별한 지식을 갖지 않던 사회에서 갑자기 동성애 정체성이란 이름을 빌려 해당 사회의 동성 간 성행동을 처벌하는 일이 빈번하게 나타났다.

세 번째로 단연 우리는 다양한 문화적 매체를 통해 순환하는 성정체성에 관한 지식, 의례, 상징, 이미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여기에는 ‘퀴어 시네마’란 이름으로 소개되는 예술영화나 ‘스톤월 항쟁’이니 ‘게이·레즈비언 행진’이니 하는 미국 주류 게이운동의 유사 정치적 담론에서부터 <섹스 앤드 더 시티>나 <퀴어 애즈 포크> <퀴어 아이> 같은 TV 시리즈는 물론 마돈나 같은 게이 청중이 특별하게 숭배하는 스타를 둘러싼 팬덤이나 문화적 이벤트(클럽 파티 등), 그리고 전 지구적인 게이 관광객을 대상으로 발달된 관광지 등 다양한 것이 포함된다. 따라서 지구화 과정에서 운반되는 것은 자본과 상품, 사람이지만 성정체성과 관련한 것들이기도 하다. ‘게이 정체성의 세계화’라고 부를 수 있는 이같은 현상은 많은 사회에서 형성된 성과 관련한 사회적 분류와 위계, 이질적 정체성 담론을 동성애·동성애자 정체성 속으로 끌어모은다.

동성애자, 좋은 게이 시민

이는 한국 사회에서 동성애자 사회의 형성을 살펴볼 때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다. 1990년대 중반을 전후해 본격적으로 활동을 개시한 한국 사회의 동성애자 운동은 무엇보다 동성애자를 특정한 생활양식이나 문화적 관습을 공유하는 공동체로 정의하고, 이에 근거한 특수한 사회집단으로 규정하는 구실을 했다. 동성에 대한 친밀감이나 동성과의 성행동은 자신이 동성애자이기에 그런 것이라는 생각은 얼핏 성과 무관해 보이는 폭넓은 삶의 영역을 성정체성이란 것을 통해 이야기하고 표현하게 한다. 이를테면 자신의 성장과 가족관계 등을 묘사하는 방식은 이제 동성애자라는 정체성을 통해 재구성된다. 자신의 특별한 버릇이나 습관, 외상적 사건은 모두 동성애자로서의 성장 이야기 속에 스며드는 것이다. 따라서 동성애자는 주어가 되어 수많은 사건과 행위를 술어로 거느리게 된다. 이처럼 인생 서사가 성정체성 서사로 각색될 때, 동성애자는 그런 사회적 체험과 관습, 생활양식 등을 공유하는 사회로서 자신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동성과의 성행동이나 친밀한 관계는 동성애자이기에 있었던 혹은 일어날 일일 뿐 동성애 정체성을 구성하는 결정적 준거가 되지 않는다. 동성애자 수영 동호회에 나가 동성애자끼리의 사회 활동을 즐기며 더욱 안정적이고 일관된 동성애자로서의 자아를 체험하는 것이 우연적인 성행동을 통해 동성과 섹스를 하는 것보다 더 동성애적인 것이 되었다 말할 수 있다. 청소년 동성애자를 지원·보호하는 것이 동성애자운동이 가장 관심을 기울여야 할 문제로 집착하는 것 역시 이해할 만한 일이다.


그렇지만 이런 변화가 당연한 것도 또 유일한 방향인 것도 아니다. 동성애자를 둘러싼 사회적 관용이 늘어나고, 동성애 이야기가 공론화되고, 동성애자 권리에 대한 관심이 적극적으로 제기돼왔다고 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이야기 속에는 이미 특정한 성정치적 관점이 스며들어 있다. 물론 그것의 두 가지 큰 뼈대는 ‘인권 정치’와 ‘정체성 정치’라는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비롯된 성정치다. 서구에서 1980년대 초반을 전후해 사회주의적·급진적 사회운동이 쇠퇴하면서 성정치 역시 보수화돼왔다. 이성애적 규범이 지배하는 성의 체계를 거부하고 이를 변형하려던 급진적 성정치를 대신해 ‘좋은 동성애자 시민’이 됨으로써 이성애자와 다양한 성적 소수자가 공존하며 살아가는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을 목표로 삼은 새로운 동성애자 사회운동의 물결이 등장했다. 이는 앞서 말한 조건 속에서 많은 비서구 사회로 확산됐고, 한국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그리고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성애적 규범을 은밀하게 지지하는 역할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가운데 하나가 동성애를 탈성애화함으로써 건전한 시민 주체로 길들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9금’으로 대표되는 청소년에 대한 성적 규제 강화, 성매매의 불법화, 성폭력이나 아동 성폭력에 대한 집단적 패닉 등은 중산층 이성애자 가족이 우리 시대의 성정치 모델이 되었음을 역력히 보여준다. 따라서 기존 동성애자의 주된 세계였던 동성애적 하위 문화는 ‘음지’ 혹은 ‘불행한 과거’로 망각되거나 거부되고, 세련된 클럽이나 바 같은 상업적인 유흥 공간, 아니면 스포츠나 다른 취미를 통해 매개된 사교적 모임이 건전한 동성애자를 위한 공간이 돼버린다. 감정적 헌신에 터 잡은 장기적인 친밀한 관계가 정상적·규범적 관계가 되고, 물론 이는 TV 드라마에서 보이는 것처럼 함께 마트에서 장을 보고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여행을 다니는 유족한 삶을 사는 고학력 중산층 동성애자 남성을 특권화한다.

이는 정서적 교류와 헌신에 기반한 관계로 부부관계를 그려내는 보수적 중산층 이성애자 부부의 이데올로기를 반복한다. 이때 이성애적 규범에 동화될 수 없는 동성애자는 더욱 주변화되고 자신의 삶에 관해 발언할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다. 그래서 정작 우리 사회에서 성적 위계로 볼 때 가장 열등한 성적 소수자는 ‘중년 노동자계급 이성애자 남성’처럼 보이는 것도 착각은 아니다. 사회적 재생산을 가족화하는 신자유주의적 가족 경제 내에서 노동자계급 이성애자 남성 가장은 생계부양자라기보다는 가정의 재무적 활동의 책임자라는 역할을 요구받는다. 이들은 정작 현실에서는 가장 취약한 생존 조건에 놓였다. 게다가 정서적 교감과 만족이 가장 큰 역할을 해야 하는 새로운 친밀성의 세계로 가족 생활에 참여하도록 강요받는다. 그러나 그들이 할 줄 아는 것은 권위적인 남편과 가장의 역할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대딸방’으로, ‘키스방’으로 전전한다. 그들은 좋게 보아 ‘재수 없는 꼰대’고 더 나쁘게는 ‘잠재적인 치한’이다. 그들이 한국 사회에서 가장 비천한 성적 소수자가 아니라면 누가 그것이겠는가. 다양한 취향과 문화를 존중하는 것을 ‘예의’와 ‘미덕’으로 간주하는 다문화주의적 사회에서 게이는 이미 좋은 친구이자 시민으로 융숭한 대접을 받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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