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2010.6.22~6.29.
정성일,허문영,박찬욱. 영화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66쪽 ~67쪽
정성일 : 이 얘기를 꺼내는 가장 큰 이유는 이를테면 가끔 이해하기 힘든 사람을 만나기 때문입니다.누군가 '펠리니의 모든 영화가 다 좋다'고 하면,만일 그 말을 영화학자가 했을 때는 그에게서 관심이 없어지고,시네필이 그런 말을 했을 때는 그 말이 의심스러워집니다.시네필이란 결국 취향의 문화이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드는 데 나에게 시네필은 두 가지 전제가 필요합니다.하나는 (66) 우정의 문제, 나는 저 사람과 같은 영화를 보러 와서 친구가 될 수 있을까,하는 것이고 나와 취향이 전혀 다른 저 사람의 견해가 궁금하고 그 견해를 존중하고,그 차이를 존중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는 점입니다.그렇게 시네필을 생각할 때 우정과 이웃의 정치학이라는 두 가지 관점에서 보게 됩니다.
68쪽
정성일 : 박찬욱 감독을 만나면 꼭 질문하고 싶은 게 있었습니다. 좋아하는 감독의 명단은 시네필들이 우정을 교환하는 방식 중 하나이죠. 말하자면 명단의 교환이라고 할까요. 그런데 박찬욱 감독이 위대한 감독의 자리에 로버트 알드리치를 이야기할 때 갑자기 당신의 견해가 궁금해졌습니다.(중략) 앤드루 새리스는 아마도 명단의 작가주의를 시작한 시네필 영화비평가일 텐데 그는 모든 감독을 11개의 분류로 나눈 다음 가장 최상의 자리에 '만신전'(Pantheon)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73쪽
정성일 : 이 얘기를 계속해서 던지는 까닭은 시네마틱하고 말하는 빛의 순간, 바람의 순간이라는 것이 영화에서 굉장히 놀랍고도 미묘한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영화에서 미묘한 것만이 우리에게 영화적인 감흥을 던집니다. 물론 인공조명으로 만들어낸 빛일 수도 있고 한편으로는 거리에 나가 담은 빛일 수도 있고, 영화학자들이나 비평가들이 그런 순간에 대해 의미가 무엇인지 찾는 반면 시네필들은 오로지 그 순간에 대한 감흥만을 느낍니다.
정성일 : 사실상 영화에서 바람을 보고 감동받는 까닭은, 그 영화가 바람을 가시적으로 보여주고 있어서라기보다는,바꿔 말해 박찬욱 감독이 빛에 감동을 받는다면 그것은 영화가 시간을 찍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시간에 대한 가막, 그것은 3D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겁니다. 그러면서 시네필의 영화 체험을 보는 쪽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우리 시대가 포스트 시네필의 시대에 접어든 게 아닐까 생각해봤습니다. 그래서 포스트 시네필에 대한 가장 결정적인 차이점은 영화의 여행이 자유로워졌다는 겁니다. dvd를 통해 자유롭게,과거의 시네필들은 거의 상상할 수 없는,그러니까 지금의 시네필들은 한손에 DVD를 쥐고 또 다른 한손으로는 인터넷을 통해서 그리고 영화관이 아닌 자신의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바닥에 누워 영화를 봅니다. 사실 극장에 오지 않는 관객을 적대적으로 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포스트 시네필에게는 이전의 시네필과 달리, 영화가 이제는 필름이 아니라 파일의 형태로 접근 가능해졌다는 겁니다. 제작자의 입장, 자본가의 입장, 자본의 입장, 창작의 입장에서는 파일의 형태로 영화가 바뀌었다는 것은 자유롭게 영화에 접근할 수 있게 됐다는 것입니다. 사실 카피라이트의 문제로 생각해본다면 서양세계 중심이었던 정보의 독점으로부터 벗어나, 아프리카 오지의 시네필도 컴퓨터만 있다면 파리의 시네마테크와 똑같은 프로그램으로 자신의 집 안에서 영화를 감상할 수 있게 됐습니다. 문제는 한국에서는 고전적 시네필과 포스트 시네필이 동시에 발생하고 그들이 공존하는 독특한 형태를 보인다는 점입니다. 사실 개인적으로 영화를 볼 때 가장 좋았던 건 '어쩌면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보는 것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절박함이었습니다. 영화를 오로지 머릿속에만 저장할 수 밖에 없을 때 말입니다. 그때는 영화를 보는 태도가 필사적이 됩니다.
74쪽
정성일 : 그걸 우리 토픽으로 연결시키자면 시네필과 영화학자의 방법론 두 가지가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시네필의 방법론은 영화를 영화로 설명하고 싶어 합니다. 이게 둘의 중요한 결별 지점인데,시네필들에게는 각자의 이상적인 영화가 있고 영화 보는 내내 자기가 감독인 것처럼 조립하기 시작하고 친족관계를 찾고 계보나 지도를 짜고 그것을 확장시켜 자기 나름의 필름 히스토리를 만듭니다. 그러면서 교과서의 영화사에 대한 수정을 요구합니다.
76~77쪽
정성일 : 마무리 얘기를 하자면 시네필이 영화에서 중요한 가장 큰 이유는, 오로지 시네필의 존재만이 영화적 체험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성립 가능하게 하기 때문입니다.그들만이 영화에서 매혹이란 게 뭔지 설명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영화적 순간이란 시네필의 순간의 동의어입니다. 그리고 시네필의 위대한 능력은 영화가 보여주는 것 이상을 보여준다는 겁니다.말하자면 오로지 시네필들만이 지금 그 영화에서 무엇이 자신을 매혹시켰는지 설명하려고 노력합니다.
정성일 : 오로지 시네필의 존재만이 영화학의 무능력을 증명하는 게 아닌가 합니다. 영화학이 감히 그 매혹을 설명하려고 달려드는 순간 유명한 수술대의 교훈이 성립합니다. 수술은 성공했는데 환자 죽었어,라고 그렇게 시네필들이야말로 미라가 될 뻔한 영화에 생명을 불어넣는 게 아닌가 합니다.
정성일 : 시네필의 경험 핵심은 마법적 황홀함이라(76)고 생각합니다. 그 정체를 알고 싶어서 20대 때 기호학,구조주의,마르크시즘,정신분석학 책들을 열심히 봤습니다. 얻은 교훈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아무리 열심히 봐도 거기에 답이 없다는 것, 두 번째가 사실 중요한 데 이 연구들의 공통된 목표는 이 마법적 황홀함을 부정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겁니다. 결국 이 공부를 덮으면서 하게 된 결심은 이 마법적 황홀함을 방어해야 한다는 태도입니다. 사실 그런 점에서 영화학에 대한 시네필들의 저항, 앞서 얘기한 '시네마틱'한 것에 대한 방어가 있어야 하나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게 공부하지 말라는 말로 들려서는 안될 것입니다.거기에는 각자의 이데가를 갖고 있을 겁니다. 우리는 시네마틱이라는 단어로 방어하고 공격에 저항하는 심정으로 연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77쪽
허문영 : 그 긴장이라는 게 매우 중요한 것 같습니다. 시네필이라는 집단은 오히려 똑같은 취향을 가지고 있을 때 공동체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왜 같은지가 아니라,우리는 왜 다른가라고 질문할 때 시네필의 우정은 성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