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대단하다던 영화 <인셉션>을  왕십리 아이맥스관에서 보고 왔다. 사실 이런 류의 영화를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라서, 솔직히 내 몸에 전율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크리스토퍼 놀란이 추구하려는 '세계관'의 정교함이 어떻게 '영화적'으로 만들어졌는가를 목격하는 차원에서, 그는 '대단한'사람이란 걸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사실 이 영화를 통해 '꿈'/'무의식'을 비롯한 정신분석학의 재론이나, 기본 개념들을 꼽아간다는 것이 영화 속에 '빠져들기'위한 하나의 방법일 수도 있으나, 나는 그러한 접근을 별로 좋아하진 않는다. (그러한 개념들을 탐독하고 재론한다고 해서, 이 영화에 대한 퍼즐을 맞춘다는 것 자체로서의 탐닉이 과연 우리가 영화를 사랑하는 자세일까? 그것은 오히려 영화를 '논리'와 '의미'로 죽여버리는 행위가 아닐까?- 공략집 같은 것이 나온다는 것이 어쩐지 불편하다) 영화는 '영화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방법('시네필'이 보여주는 그 영화에 대한 과시와 열정이 사라진 지금, 이러한 방법은 지극히 필요한,  영화 내부를 응시하는 행위다), 거기에 왜 이렇게 할리우드는 '이런 류'의 영화에 집착하는가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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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 2010-08-05 0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셉션을 못 봤지만, 얼그레이님의 할리우드에 대한 의심에는 공감합니다. 사회학과 정신분석학적 접근.. 필요한 것 같습니다. 정신분석학적 소재를 상업화하고 거기에 열광하는 증상교환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겠습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8-05 14:18   좋아요 0 | URL
증상교환에 대한 분석. 멋진 표현입니다!
 

졸업논문을 준비하면서,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건, 사실 '무엇을 더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뺄 것인가'의 문제라는 것을 절실하게 느낀다. 내 결과물이 주위 예상보다 오래 걸리는 건, '뺄셈'의 위력을 스스로 느끼고 싶기 때문이다. 만두피 안에, 고기도 넣고, 이런 저런 야채도 넣어보자는 마음으로 준비했지만, 사실 시간이 지나면서 내 마음을 채우고 있는 건, 그런 욕심이 누군가 나의 만두를 젓가락으로 찝었을 때, 쉽게 부숴질 것 같다는 예상이다.  

롤랑 바르트의 <기호의 제국> 흉내를 내려는 것은 아니지만, 아마도 이 졸업논문을 가득 채운 분위기를 표시하는 한자를 꼽으라면, '無'가 될 것 같다. 지금 이 순간 뺄셈이 그동안 내가 준비한 것들을 다 무너뜨리는 것 같아도, 요즘은 그런 쓰라림이 이상하게 좋다.  

변태는 화려하지 않다. 지극히 기본/근본적인 것이 변태적이다. 내가 준비하는 성과물에 바라는 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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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 2010-08-04 0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두 비유가 정말 촌철살인입니다. 두 학기를 막 끝낸 저도 슬슬 논문의 압박이ㅜㅜ

얼그레이효과 2010-08-04 20:03   좋아요 0 | URL
바라님은 잘 하실 겁니다.^^!

비로그인 2010-08-05 0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그레이님만의 독특하고도 탁월한 만두를 빚으실 거라 믿습니다.
더운데 건강도 챙기시면서 하세요^^

얼그레이효과 2010-08-05 14:19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오늘 제 만두 내용의 알짜배기 하나를 페이퍼에 공개할려고 합니다. 관심있으신 대목이라면 같이 고민 공유하고싶네요.^^
 

 1

슬라보예 지젝의 책이 집에 몇 권이 있는데, 꼼꼼하게 완독한 첫 책 '기념일'은 8월 1일이 되었다. 원제가 '난쟁이와 꼭두각시(발터 벤야민의 역사철학테제 를 모티브로 한)'인 <죽은 신을 위하여>가 그 주인공인데, 책이 상당히 재미있었다. 

지젝의 본 책을 통해 내가 느꼈던 점 하나. 종교는 변태와 가장 친밀한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이건 책에 없는 표현이다. 그냥 내가 지어내본 것) 종교, 특히 기독교가 가장 적대적 관계로 간주하고 있는 것, 그것과의 관계를 다시 곱씹어보면, 그 존재는 가장 기독교와 친한 친구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의 존재는 곧 죄의 존재와 함께 가야한다. 죄가 없으면 기독교는 완전무결한 승리를 세상에 선포하고 그들의 건강함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까?(이것은 우리가 혁명에 대해 느끼는 두려움이다.지젝이 말하는 혁명 다음의 불안)지젝은 아니라고 보는 것 같다.  

오히려 기독교가 노리는 것은 우리의 삶, 그것의 건강함이 아니다. 우리가 건강하지 않음을 우리 스스로 보여줌으로써, 그것을 통해 발생하는 죄의식 자체를 기독교는 환영한다. 이 죄의식의 깨달음이 이루어지면 기독교는 곧바로 회개의 제의를 만들고,그들이 '반복적'으로 회개할 수 있는 시스템에 놓여질 수 있도록, 그 연속성을 보장하는 제도를 만든다(지젝은 이 책을 통해 기독교의 큰 핵심 중 하나는 바로 '반복'이라고 주장한다) 

고로 기독교가 사랑하는 것은 죄일지 모른다. 죄의 정화와 함께 은밀히 유포되는 죄와 쾌락의 추구는 지젝이 '도착적 기독교'라고 표현한 오늘날 기독교의 중핵이라 할 수 있다.  

지젝이 잘 설명한 것처럼 금지에 대한 저항의 과정 대신, 금지 자체가 우리에게 위반을 직접적으로 명령하는 시대, 이 시대의 기운 안에서 기독교 또한 예외일 수 없다. 성과 속의 구분법으로 세상과의 뚜렷한 '차단'을 강조하는 무리에 당신이 속해 있다면, 당신은 그 무리 안에서 편안히 죄의 기운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나중에 긴 글을 적어볼 예정이지만, 종교의 열정이 떨어진 만큼, 문화에 대한 열정 또한 추락하고 있다. 우리는 오늘날 종교에서 믿음을 수반한 열의를 기대할 수 없다. 다만 일상에 스며든 그저 그런 '생활방식'의 하나가 종교다. 문화 또한 그렇다. 문화에 열정을 바친다는 건, 요즘 세상에서 찾아볼 수 없는 풍경이다. 오히려 문화를 '관리'하는 주체의 모습은 낯익다. 영화문화에서 '컬트'라는 단어가 갖고 있는 종교성을 생각해보라. 그 종교적 제의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단어의 몰락, 더 이상 컬트라는 단어가 문화의 핵심 담론축에도 못끼는 지금. 오늘날 문화에 자신의 믿음을 투자하는 사람들은 적대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 적대감은 90년대와는 또 다른 문화에 빠진 이에 대해 느끼는 더 큰 공포감이다. 그 공포감은 그 사람의 모습을 기이하게 여기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 사람이 자본주의적 삶에 그만큼 어색하다고 느끼는 편안한 관조에서 오는 내버려두기의 시선일 것이다. (지젝이 초반부에 기독교의 위상을 언급하며 , 문화와 믿음의 관계를 설명한 대목은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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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 2010.6.22~6.29.  

정성일,허문영,박찬욱. 영화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66쪽  ~67쪽

정성일 : 이 얘기를 꺼내는 가장 큰 이유는 이를테면 가끔 이해하기 힘든 사람을 만나기 때문입니다.누군가 '펠리니의 모든 영화가 다 좋다'고 하면,만일 그 말을 영화학자가 했을 때는 그에게서 관심이 없어지고,시네필이 그런 말을 했을 때는 그 말이 의심스러워집니다.시네필이란 결국 취향의 문화이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드는 데 나에게 시네필은 두 가지 전제가 필요합니다.하나는 (66) 우정의 문제, 나는 저 사람과 같은 영화를 보러 와서 친구가 될 수 있을까,하는 것이고 나와 취향이 전혀 다른 저 사람의 견해가 궁금하고 그 견해를 존중하고,그 차이를 존중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는 점입니다.그렇게 시네필을 생각할 때 우정과 이웃의 정치학이라는 두 가지 관점에서 보게 됩니다.  

68쪽 

정성일 : 박찬욱 감독을 만나면 꼭 질문하고 싶은 게 있었습니다. 좋아하는 감독의 명단은 시네필들이 우정을 교환하는 방식 중 하나이죠. 말하자면 명단의 교환이라고 할까요. 그런데 박찬욱 감독이 위대한 감독의 자리에 로버트 알드리치를 이야기할 때 갑자기 당신의 견해가 궁금해졌습니다.(중략) 앤드루 새리스는 아마도 명단의 작가주의를 시작한 시네필 영화비평가일 텐데 그는 모든 감독을 11개의 분류로 나눈 다음 가장 최상의 자리에 '만신전'(Pantheon)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73쪽 

정성일 : 이 얘기를 계속해서 던지는 까닭은 시네마틱하고 말하는 빛의 순간, 바람의 순간이라는 것이 영화에서 굉장히 놀랍고도 미묘한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영화에서 미묘한 것만이 우리에게 영화적인 감흥을 던집니다. 물론 인공조명으로 만들어낸 빛일 수도 있고 한편으로는 거리에 나가 담은 빛일 수도 있고, 영화학자들이나 비평가들이 그런 순간에 대해 의미가 무엇인지 찾는 반면 시네필들은 오로지 그 순간에 대한 감흥만을 느낍니다.  

정성일 : 사실상 영화에서 바람을 보고 감동받는 까닭은, 그 영화가 바람을 가시적으로 보여주고 있어서라기보다는,바꿔 말해 박찬욱 감독이 빛에 감동을 받는다면 그것은 영화가 시간을 찍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시간에 대한 가막, 그것은 3D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겁니다. 그러면서 시네필의 영화 체험을 보는 쪽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우리 시대가 포스트 시네필의 시대에 접어든 게 아닐까 생각해봤습니다. 그래서 포스트 시네필에 대한 가장 결정적인 차이점은 영화의 여행이 자유로워졌다는 겁니다. dvd를 통해 자유롭게,과거의 시네필들은 거의 상상할 수 없는,그러니까 지금의 시네필들은 한손에 DVD를 쥐고 또 다른 한손으로는 인터넷을 통해서 그리고 영화관이 아닌 자신의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바닥에 누워 영화를 봅니다. 사실 극장에 오지 않는 관객을 적대적으로 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포스트 시네필에게는 이전의 시네필과 달리, 영화가 이제는 필름이 아니라 파일의 형태로 접근 가능해졌다는 겁니다. 제작자의 입장, 자본가의 입장, 자본의 입장, 창작의 입장에서는 파일의 형태로 영화가 바뀌었다는 것은 자유롭게 영화에 접근할 수 있게 됐다는 것입니다. 사실 카피라이트의 문제로 생각해본다면 서양세계 중심이었던 정보의 독점으로부터 벗어나, 아프리카 오지의 시네필도 컴퓨터만 있다면 파리의 시네마테크와 똑같은 프로그램으로 자신의 집 안에서 영화를 감상할 수 있게 됐습니다. 문제는 한국에서는 고전적 시네필과 포스트 시네필이 동시에 발생하고 그들이 공존하는 독특한 형태를 보인다는 점입니다. 사실 개인적으로 영화를 볼 때 가장 좋았던 건 '어쩌면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보는 것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절박함이었습니다. 영화를 오로지 머릿속에만 저장할 수 밖에 없을 때 말입니다. 그때는 영화를 보는 태도가 필사적이 됩니다.  

74쪽 

정성일 : 그걸 우리 토픽으로 연결시키자면 시네필과 영화학자의 방법론 두 가지가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시네필의 방법론은 영화를 영화로 설명하고 싶어 합니다. 이게 둘의 중요한 결별 지점인데,시네필들에게는 각자의 이상적인 영화가 있고 영화 보는 내내 자기가 감독인 것처럼 조립하기 시작하고 친족관계를 찾고 계보나 지도를 짜고 그것을 확장시켜 자기 나름의 필름 히스토리를 만듭니다. 그러면서 교과서의 영화사에 대한 수정을 요구합니다.  

76~77쪽 

정성일 : 마무리 얘기를 하자면 시네필이 영화에서 중요한 가장 큰 이유는, 오로지 시네필의 존재만이 영화적 체험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성립 가능하게 하기 때문입니다.그들만이 영화에서 매혹이란 게 뭔지 설명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영화적 순간이란 시네필의 순간의 동의어입니다. 그리고 시네필의 위대한 능력은 영화가 보여주는 것 이상을 보여준다는 겁니다.말하자면 오로지 시네필들만이 지금 그 영화에서 무엇이 자신을 매혹시켰는지 설명하려고 노력합니다. 

정성일 : 오로지 시네필의 존재만이 영화학의 무능력을 증명하는 게 아닌가 합니다. 영화학이 감히 그 매혹을 설명하려고 달려드는 순간 유명한 수술대의 교훈이 성립합니다. 수술은 성공했는데 환자 죽었어,라고 그렇게 시네필들이야말로 미라가 될 뻔한 영화에 생명을 불어넣는 게 아닌가 합니다.  

정성일 : 시네필의 경험 핵심은 마법적 황홀함이라(76)고 생각합니다. 그 정체를 알고 싶어서 20대 때 기호학,구조주의,마르크시즘,정신분석학 책들을 열심히 봤습니다. 얻은 교훈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아무리 열심히 봐도 거기에 답이 없다는 것, 두 번째가 사실 중요한 데 이 연구들의 공통된 목표는 이 마법적 황홀함을 부정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겁니다. 결국 이 공부를 덮으면서 하게 된 결심은 이 마법적 황홀함을 방어해야 한다는 태도입니다. 사실 그런 점에서 영화학에 대한 시네필들의 저항, 앞서 얘기한 '시네마틱'한 것에 대한 방어가 있어야 하나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게 공부하지 말라는 말로 들려서는 안될 것입니다.거기에는 각자의 이데가를 갖고 있을 겁니다. 우리는 시네마틱이라는 단어로 방어하고 공격에 저항하는 심정으로 연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77쪽 

허문영 : 그 긴장이라는 게 매우 중요한 것 같습니다. 시네필이라는 집단은 오히려 똑같은 취향을 가지고 있을 때 공동체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왜 같은지가 아니라,우리는 왜 다른가라고 질문할 때 시네필의 우정은 성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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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신을 위하여 - 기독교 비판 및 유물론과 신학의 문제 프런티어21 5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정아 옮김 / 길(도서출판) / 2007년 7월
품절


오늘날 '문화'를 말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여기서 '문화'란 기본적인 생활세계의 범주로서 등장한다.예를 들어,종교에 대해서 말할 때,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정말로 믿음을 갖고 있는'것이 아니라 다만 우리가 속해 있는 공동체의 '생활양식'을 존중하여 종교적 의식이나 관행(의 일부)을 지키는 것뿐이다(유대교를 믿지 않는 유대인이 '전통을 존중하는 차원에서'부정한 음식을 금하는 율법을 지키는 경우 등)."내가 그것을 정말로 믿는 것은 아니다.그것은 내가 속한 문화의 일부일 뿐이다"라는 말은 우리 시대를 특징짓는 부인된/치환된(disavowed/displaced)믿음을 표현하는 지배적인 양식인 듯하다. 문화적 생활양식이란, 산타클로스를 믿지는 않지만 해마다 12월만 되면 집집마다 또 공공장소마다 크리스마스 트리를 세운다는 사실, 바로 그것이 아닐까?-13쪽

즉 '문화'란 우리가 정말로 믿지는 않으면서도 실천하는 모든 것, '진지하게 생각하지'않으면서 실천하는 모든 것을 지칭하는 이름이다.과학이 이러한 문화 개념에 포함되지 않는 이유 역시 과학이 너무 진짜라는 사실때문이 아닐까? 우리가 근본주의적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야만인',반문화세력,문화에 대한 위협으로 치부하는 이유 역시 그들이 겁도 없이 자기들의 믿음을 진지하게 생각한다는 사실 때문이 아닐까? 마침내 오늘날 우리는 자신의 문화 속에 매개 없이 속해 있는 사람들,자신의 문화에 거리를 두지 않는 사람들을 문화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기에 이르렀다.-14쪽

영웅이란 보편적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 반드시 배반당해야 하는 존재다.(31) / 진정한 지도자는 종교적,정치적,학문적 지도자를 막론하고,자기의 가장 가까운 제자들을 상대로 이런 식의 배반을 도발해야 한다.-31,33쪽

사랑하는 사람에게 완전히 반했을 때,그 사람이 우리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우리에게 아기처럼 완전하게 의지할 때,이러한 신뢰를 배반하고,그에게 심한 상처를 주고,그의 존재 전체를 부수고 싶다는 이상하고 그야말로 도착적인 충동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우리 중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32쪽

삼위일체의 교훈은 신이 신과 인간 사이의 균열과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것,신이 바로 이 균열이라는 것이다.이러한 존재가 바로 그리스도이다.그는 균열에 의해 인간과 분리된 피안의 신이 아니라,균열 자체,신을 신으로부터 분리하는 동시에 인간을 인간으로부터 분리하는 균열이다.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또한 레비나스-데리다의 타자성(Otherness)이 어떠한 오류를 범하고 있는지를 정확히 지적할 수 있다. 레비나스-데리다의 타자성은 일자 속에 존재하는 이러한 간극의 정반대,즉 일자의 내재적 이중화의 정반대다.즉 타자성에 대한 단정은 타자성 자체의 지루하고 단조로운 동일성(sameness)에 다다른다. -42쪽

오늘날의 섹슈얼리티와 예술이 마주친 딜레마를 생각해 보자.끊임(59)없이 새로운 예술적 탈선과 도발을 감행해야 한다는 초자아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보다 재미없고 기회주의적이고 쓸데없는 짓도 없다-59,60쪽

종교의 광신적 옹호자 가운데 오늘날의 세속 문화를 지독하게 공격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결국은 종교 자체를 저버리는 것(의미 있는 종교적 체험을 상실하는 것)으로 끝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이것과 완전히 똑같은 방식으로,자유주의 전사들은 반민주적 근본주의와 대결하는 데 너무나 열을 올린 나머니 테러와 싸울 수만 있다면 자유와 민주주의 자체를 내던져도 좋다고 생각하지 않은가?그들은 비기독교적 근본주의가 자유에 대한 주된 위혐임을 증명하는 데 너무나 열을 올리다,심지어 지금 여기 우리가 살고 있는 소위 기독교 사회에서 우리 자신의 자유를 제한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후퇴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63쪽

우리에게 닥칠 수 있는 최악의 사태는 우리가 '공식적으로'원하는 것을 정말로 얻게 되는 것이다.이렇듯 행복은 본래 위선적인 것이다.즉 행복이란 사실은 원치 않는 것들을 꿈꾸는 것이다.오늘날 좌파가 자본주의 체제를 상대로 자본주의가 결코 채워줄 수 없는 요구 사항(완전고용 실행하라!복지국가 유지하라!이민자 권리 보장하라!)을 퍼부을 때,그들은 기본적으로 히스테릭한 도발의 게임-주인(Master)이 들어줄 수 없는 것을 요구함으로써 주인의 무능력을 노출시키는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다.그러나 이러한 전략의 문제점은 체제가 이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것을 요구하는 사람(73)들이 사실은 요구가 충족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73쪽

불안의 원인은 죄가 규범으로 승격되는 상황,즉 욕망을 지탱하는 금지가 결여되는 상황이다.이러한 결여로 인해서 우리는 욕망의 대상-원인에 답답할 정도로 가까워진다-금지가 주었던 숨 쉴 공간이 없어진다. 우리가 규범에 대한 저항을 통해 개체성을 주장하기 전에 이미 규범에 먼저 우리에게 저항할 것, 위반할 것,갈 데까지 갈 것을 명한다.(중략)인류 역사상 상호 작용에 대한 규정들이 이토록 빡빡했던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그러나 이러한 규정들은 더 이상 상징적 금지로 작용하지 않는다.오히려 이러한 규정들은 위반의 양식들 자체를 규정한다.-94쪽

제대로 된 기독교의 구원은 타락을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 아니라 엄밀한 의미에서 타락을 반복하는 것이다.-133쪽

오늘날의 쾌락주의는 쾌락과 제약을 결합한다. 쾌락과 제약 사이에서 적당한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케케묵은 얘기가 아니다.오히려 오늘날의 쾌락주의는 대립항들의 무매개적 일치(작용과 반작용의 일치)라는 일종의 사이비 헤겔적 개념이다. 해가 되는 그것이 이미 약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쾌락의 궁극적 사례는 미국에서 판매되는 초콜릿 판매약(cgocolate laxative)일 것이다. 이 약의 역설적인 광고문을 읽어보자.변비에 시달리고 있나요? 그러면 초콜릿을 좀더 드세요!(변비를 일으키는 바로 그것을 좀 더 드세요)-157쪽

국가 제도가 선포하는 비상시국은 진정한 비상시국을 피하고 '정상 궤도'로 돌아가려는 절박한 전략의 일부다.-216쪽

정말 어려운 일은 묵묵히 혁명을 준비하는 일도 아니요,혁명적 폭발이라는 '사건'의 조건을(218)마련하는 일도 아니다.진짜 힘든 일은 사건이 일어난 후 - '혁명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때-시작된다.-218,219쪽

라캉이 보기에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 가운데 하나가 배설이 문제가 된다는 점인 것은 그 때문이다.인간에게 배설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그것이 악취를 풍기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나의 내장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인간이 똥을 부끄러워 하는 이유는 똥을 통해 우리의 가장 은밀한 부분이 노출/외화되기 때문이다. 동물에게 똥이 문제가 되지 않은 이유는 그들에게는 '내면'이 없기 때문이다.-243쪽

헤겔의 지양(Aufhebung)의 최고의 사례는 이것이다. 즉 오늘날 이러한 기독교의 핵심을 구제하는 것은 제도적 조직의 껍제기를 버리는 행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이보다 중요한 것은 특정한 종교적 체험을 버리는 것이다).여기서 간극은 메울 수 없는 간극이다.종교적 형식을 버리거나 형식을 유지하며 본질을 잃거나 둘 중 하나다.기독교를 기다리는 궁극적인 영웅적 행위가 이것이다.기독교의 보물을 지키기 위해서는 기독교를 희생해야 한다. 기독교가 출현하게 하기 위해 그리스도가 죽어야 했듯이.-277쪽

그러한 이데올로기 가운데 하나인 '현행 기독교'는 우리에게 기만적인 죄의식을 느끼게 함으로써 불안 없는 쾌락을 향유할 가능성을 제공한다.지젝은 이것을 법과 죄의 변증법이라고 표현한다.즉 규범은 위반의 욕망을 일으키기 위해서 존재할 뿐이다.지젝이 현행 기독교를 '도착적'기독교,혹은 기독교를 가장한 쾌락주의라고 비판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기독교가 도착적인 방식으로 작동할 때,우리에게 종교가 필요한 이유는 종교가 처벌받지 않고 삶을 즐기게 해주는 안전장치를 제공하기 때문이다."-2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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